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82)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82화(82/190)
【082화 – 늘어가는 사건】
일주일 뒤,
경기도 용인.
부양 SD 테크놀로지 공장.
투박하게 생긴 건물의 꼭대기 층. 넓은 회의실. 점퍼를 입은 연구원들이 더 어울릴 법한 공간 안으로 양복쟁이들이 모여들었다.
파트너 변호사들을 뒤좇아 들어간 범상은 그들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명함을 건넸다.
마지막으로 일본 기업 측 대표단이 도착했고, 주최 측의 간단한 인사와 함께 회의가 시작됐다.
“미스터 마쓰다, 후지와 전기산업이 주장하는 반도체 검사 장치 특허 침해 기술에 대해서는 지금 반박 자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미팅은 그 부분에 대해 논쟁을 하려고 모인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미스터 박,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네요. 논쟁하려고 꺼낸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합의 조건들을 이야기할 수가 없기에···.”
분쟁 당사자들 간의 첫 미팅답게 진행이 매끄럽지 못하고, 때론 오가는 말에 감정도 섞인다.
어설픈 영어로 오가는 논박. 동시통역을 위해 배치된 직원들이 양측에 있었지만, 역시나 답답하면 직접 할 때도 있다.
소통이 중간중간 끊긴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그러지 않았으면 더 치열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합의 조건이요? 아니요.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습니다, 미스터 마쓰다. 일단은 양 당사자 간에 견해차를 먼저 확인하고···.”
“그건 무슨 말인가요, 미스터 박? 방금 논쟁하려고 모인 자리가 아니라고 해 놓고서는 견해의 차이를 확인한다는 말은 그 반대 같은데요. 아닌가요? 그리고 그것만 확인할 거라면 굳이 이렇게 모일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회의실 가운데에 마주 보고 앉아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 반도체 회사 후지와 전기산업의 마쓰다 쇼헤이 전무와 국내 반도체 검사 회사 부양 SD 테크놀로지의 강인표 부사장이었다.
이 자리가 만들어진 이유는,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는, 전자가 후자의 기술 특허 등록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싸움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묘하다.
그들 양옆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딱히 싸움을 말리지도, 그렇다고 참전하지도 않은 채, 표정 관리만 하고 있다. 부영 SD의 임직원 같지는 않다. 반대편도 마찬가지. 후지와 전기의 임직원처럼 보이지 않는다.
책상 끄트머리에 앉은 범상 역시 입을 다문 채 열심히 분위기 파악했다.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몰랐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변호사 중에서는 해당 기술과 분쟁의 쟁점에 대해선 그의 이해도가 가장 높았다.
“자, 그러면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서면으로 정리가 되어야 할 것 같으니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넘어가고. 합의 절차 진행에 관해 얘기를 좀 나눠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같은 말들이 반복되자, 부양 SD 테크놀로지 측에 앉아있는 사람 중 하나가 중재를 하고 나섰다.
시작부터 표정 관리만 하면서 묘하게 거만함이 풍기고 있던 바로 그 남자. 그는 부영 SD 테크놀로지 임직원도 아니었고,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로펌의 변호사도 아니었다.
그는 삼전 그룹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그의 발언에 맞은 편에 앉아있는 후지와 전기의 마쓰다 쇼헤이 전무는 자신의 옆쪽에 앉아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끄떡이자, 마쓰다 쇼헤이 전무는 삼전 그룹 사람의 제안대로 절차 진행에 관한 주제로 넘어갔다.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NEC(Nihon Electronics Corporation)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아, 알았다. 그런 거구나.’
그런 것이었다.
이건 후지와 전기산업과 부영 SD 테크놀로지의 싸움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야 둘의 분쟁이지만, 사실은 반도체 공룡들인 삼전과 NEC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반도체 검사 장비 및 기술에만 한정된 싸움이 아니었다.
“벌써 세 시간이 넘었는데,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고, 다음 미팅 스케줄을 잡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는 게 좋겠네요.”
회의는 살짝 허무감이 들 정도로 아무런 진전도 없이 끝났다.
이메일로 오고 간 내용에 추가된 것도, 해결된 것도 없었다.
회의록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누가 이 싸움의 프론트라인이 될 것인지 얼굴들을 보러 나온 자리 같았고, 계체량 측정을 위해 만난 자리 같았다.
···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
주니어 파트너 함익철은 범상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척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한 변호사는 어땠어? 어떻게 봤어?”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부영 SD하고 후지와 전기의 싸움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확히 봤네. 아니야. 삼전하고 NEC 싸움이지.”
“네. 그럼 혹시 미국에서 진행 중인 포토레지스트 소재 관련도 연관이 되어 있는 건가요.”
“오- 대단한데. 그것도 그렇고, 최근 5G 사업 깨진 것 때문도 있고.”
함익철은 범상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뒷좌석 옆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시니어 파트너 유경민 역시 내심 제법이라 생각했다.
사건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는 정보였으니까. 아니, 일부러 기록에 명시하지 않은 정보였다. 정치적인 배경에 대한 정보는 그냥 알고 있어야지,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기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비밀유지특권으로 보호되는 로펌 기록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회의에 삼전과 NEC 사람들이 참석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 사실상 결정권은 삼전과 NEC가 쥐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요?”
“그렇기는 한데, 그렇다고 부영 SD랑 후지와 전기가 들러리는 아니야. 어찌 됐든 자회사들도 아니고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회사니까.”
삼전이 시킨다고, NEC가 시킨다고, 양 회사가 무작정 ‘네, 네’ 듣지는 않을 거라는 말.
“아까 회의에서는 눈치들을 많이 보고 있는 것 같기는 하던데···.”
“지금이야, 분쟁 초기니까. 그리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자기네 매출의 90% 이상이 각 대기업에서 나오고 있는데. 그래도 만약에 이 분쟁으로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손해가 막대할 것 같으면, 고분고분하게 굴지만은 않을 거야.”
“네.”
이해됐다.
사실상 생명줄을 쥐고 있는 주인들이라고 해도 다른 목적을 위해서 희생시키려고 한다면 얌전히 죽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
자, 이제 그러면 범상은 궁금하다.
“그러면, 저희는 부영 SD를 대리하는 건가요? 아니면 삼전을 대리하는 건가요?”
“응?”
해당 특허 분쟁 관련 김앤강은 분명 부영 SD와 수임 계약을 맺었다.
삼전 그룹은 김앤강의 정기적인 의뢰인이고, 다른 여러 사건 관련해서 대리 중이다.
이 분쟁 관련해서는 지금 부영 SD와 삼전이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만약에, 그런 상황이 실제 발생할지는 모르겠지만, 삼전이 다른 목적을 위해 부영 SD를 희생시키려는 지시를 내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범상은 궁금했다. 그런 상황이 올 것 같아서 물은 건 아니었다. 그저 이야기하다 보니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그거야 당연히···.”
“삼전 그룹이지.”
함익철이 대답하기 전, 자는 것 같았던 시니어 파트너가 눈을 뜨며 말했다.
함익철은 곧바로 시니어 파트너의 발언에 부연했다.
“삼전 그룹이야. 우리한테 먼저 연락해 온 것도 삼전 그룹 법무팀이고.”
범상은 더 궁금해진다.
“그러면, 삼전과 부영 SD의 의사가 갈리면 어떻게 되나요? 저희는 부영 SD와 체결한 수임 계약을 파기하고, 그때부터 삼전을 자문하는 건가요?”
사실 생각하면 웃기는 질문이다.
분쟁의 당사자도 아니므로, 만약 부영 SD와 체결한 수임 계약을 파기한다면, 삼전을 대리할 일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간접적인 이해관계가 남아있으니, 자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사건에서 부영 SD를 대리하다가, 상황이 바뀌었다고, 부영 SD를 상대로 삼전 편에 서는 모습은 어딘가 살짝 이상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범상의 순수한 질문에 시니어 파트너 유경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안 되지.”
영미법상 보험사고의 경우, 보험사는 피보험자를 대리해 줄 변호사를 고용해 주기도 한다.
이때 변호사는 피보험자의 명의로 소송을 하지만, 사실상은 보험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대리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보험자는 이미 보험사로부터 보상을 받았으므로, 소송의 승패에 따라 손해를 입게 되는 건 보험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험사와 피보험자는 같은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소송을 거는 것이나, 만약 피보험자가 거짓말을 했다거나 소송 도중 공동의 이익에 배반되는 행동을 하는 경우, 변호사는 피보험자와의 수임 계약을 파기하고 보험사의 편에 서게 된다.
우선해야 하는 이익이 삼전 그룹의 이익이라는 시니어 파트너의 답을 들었을 때, 범상은 그런 구조를 이 상황에 대입해 봤다.
만약 부영 SD가 후지와 전기를 상대로 하는 특허 분쟁에서 진다면, 실질적으로 더 큰 손해를 입게 되는 회사는 삼전 그룹이기에, 김앤강은 삼전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유경민의 단호한 대답에서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안 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단순히 삼전과 부영 SD만의 이해관계만 얽혀있는 게 아니었다.
김앤강 내부의 이해관계도 뒤섞여 있었다. ‘신선’ 이정후와 특허팀과의 미묘한 신경전도···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 83화
공진단 같은 남자
사직빌딩 9F,
이정후의 사무실.
“삼전 법무팀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특허팀은 그냥 특허 분쟁 관련해서만 자문해 주면 돼. 다른 건 물어도 신경 쓰지 말고.”
“···.”
“유 변호사, 내 말 듣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가서, 일 봐.”
“네.”
“아, 맞다. 한범상 변호사에게도 사건을 배당했대. 무슨 이유라도 있나?”
“이유···요?”
“응, 이유. 워싱턴DC 변호사가 뭐가 필요하지?”
“저희 팀 어쏘 변호사인데요.”
“흠- 유 변호사.”
“네, 변호사님.”
“이 사건이 단순한 특허 분쟁 사건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이런 사건에 경험 없는 어쏘들 투입해서 쓸데없이 기분만 상하게 할 수 있어.”
“···.”
“어쏘 교육은 이런 사건에서 하는 게 아니지. 그런 거 구분은 이제 할 줄 알 텐데, 유 변호사도.”
“한범상 변호사를 빼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유 변호사가 결정할 일이지. 유 변호사 사건이잖아.”
“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특허팀에 뭐 문제가 생길 건 없지만, 사건 외에 민감한 이슈들이 얽혀있으니까, 그런 부분은 신경 좀 쓰라고 하는 얘기였어. 알았으면 가 봐.”
유경민은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