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83)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83화(83/190)
【083화 – 공진단 같은 남자】
센터게이트빌딩 15F,
특허팀 시니어 파트너의 방.
이정후를 만나고 돌아온 유경민은 기분이 언짢았다. 화가 입으로 튀어나온다.
“그래서 신경을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있기에 삼전 그룹이 김앤강에 일감을 몰아주는 건 안다.
그래도, 그 목적을 위해 다른 팀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것은 예전부터 못마땅했다.
사무실을 위한 것인지, 자기 입신을 위한 것인지.
괜히 ‘신선들’ 알력 다툼에 끼고 싶지 않아 늘 조용히 하는 그였지만, 정말이지 언젠가는 한번 들이박고 싶은 마음도 가슴속 깊은 곳에 품고 산다.
‘인간’이다.
“참나, 누구 기분이 상한다는 건지···.”
의뢰인 눈치를 어느 정도 봐야 하는 거야 당연하나, 어쏘 변호사 배당까지 간섭하려 드는 것은 누가 봐도 도가 지나치는 일.
좀 전 이정후의 방에서 유경민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어가 능숙해서 배당했다고 해명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현시점 ‘하늘’에 제일 가까이 있는 이정후라고 해도 그건 지나친 참견이었으니까.
‘그건 제 소관입니다’라는 소심한 항변이었다.
참고 있던 불만들을 입 밖으로 내뱉으니 답답한 속이 좀 풀린다.
하지만, 뜨거워진 머리가 식고 나니 이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한다?’
단순한 사건은 아니다.
그건 이정후의 말이 맞다.
부영 SD 테크놀로지와 후지와 전기산업 사이의 특허 분쟁은 삼전과 NEC가 하고 있는 전쟁의 일개 전투일 뿐.
거기에 일본과 한국, 양국 간에 외교 문제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미국이라는 이기적인 제삼자의 속셈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
두통을 없애려면 이정후한테 빠짝 엎드리면 된다.
그의 말대로 삼전 법무팀에 다 맡기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근데, 유경민은 그게 하기 싫다. 속이 불편하다. 한 스푼밖에 없는 반골 기질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매번 그를 힘들게 한다.
띠리링- 띠리링-
-네, 함익철입니다.
“함 변호사, 잠깐 내 방으로 와.”
유경민은 함익철을 불렀다.
전쟁이 이정후 소관이라면, 전투는 그의 소관.
시키는 대로 하든 안 하든, 가능하다면 맡은 전투에서는 지고 싶지 않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
똑똑-
“변호사님.”
“들어와, 함 변호사.”
호출한 지 1분도 안 돼, 함익철이 찾아왔다.
그의 이런 모습이 좋다. 언제나 빠릿빠릿하고. 제일 일찍 출근해 제일 늦게 퇴근하고. 믿음직스럽다.
유경민은 제일 신뢰하는 주니어 파트너를 앞에 앉혔다.
“골치 아프게 됐어. 피셔 앤 리처드슨한테서 의견서는 들어왔어?”
“네, 들어왔습니다.”
“뭐래?”
피셔 앤드 리처드슨은 미국에 본사가 있는 인터내셔널 로펌으로 유경민 팀이 종종 이용하는 IP(지식재산권) 전문 로펌이다.
분쟁은 한국 회사와 일본 회사 사이에 발생한 것이지만, 배틀그라운드는 미국.
유경민은 당연히 현지 변호사의 조언을 먼저 받아봤다.
“디펜드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승소 확률은?”
“60~70% 정도라고 합니다.”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네.”
변호사가 말하는 60~70%는 일반인 기준 50:50에 가깝다.
만약 자문을 구했는데, 변호사가 50%라고 말하면 거의 진다고 보면 된다.
함익철은 짧은 침묵으로 동의한 후, 다음 진행에 관해 물어봤다.
“세컨드 오피니언을 구해볼까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피셔 리처드슨이 그렇게 말했으면 다른 데도 비슷하겠지.”
곤란한 상황이다.
우리가 그러한 조언을 받았다면, 상대방도 비슷한 조언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누구 하나 고개를 숙일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떻게 할까요? 부영 SD에 그대로 조언할까요?”
그대로 조언하면 부영은 자신들이 우세하다고 생각하겠지. 그게 거짓은 아니지만, 정확한지는···.
무엇보다도 그게 삼전이 원하는 건지 모르겠고.
“일단 삼전 법무팀에 보고해.”
“삼전에요?”
“보고해. 그쪽에서 알아서 한다니까 일단은 요청한 대로 하자고.”
“네, 알겠습니다.”
“어찌 됐든 그쪽에 걸려있는 돈이 더 크니까.”
“네.”
냉정해진 유경민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안전한 결정이다.
“통화하면서 함 변이 분위기를 한 번 봐 봐. 삼전 법무팀이 원하는 게 뭔지. 삼전하고 NEC 사이에 분위기가 어떤지. 나중에 괜히 원망 듣지 않으려면, 이쪽저쪽 눈치를 다 봐야 하는 상황이니까.”
“네.”
“포토레지스트 분쟁 관련해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좀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한범상 변호사에게 리서치를 시켰는데, 가지고 오면 검토한 뒤에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함 변이 직접 봐. 리서치가 쉽지 않을 거야. 사안이 중요하기도 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요, 변호사님.”
“?”
“한 변호사가 제법 잘합니다. 이해도 빠르고, 리걸마인드도 갖추고 있어서, 믿고 맡겨 볼 만한 친구입니다.”
시니어 파트너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모르게 불신이 느껴졌다. 익철은 자신이 추천한 어쏘를 두둔했다.
그렇다고 면피용으로 한 발언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었다.
같은 연차 어쏘 변호사들보다 자질이 뛰어나다고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편을 드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주니어 파트너의 발언은 유경민으로하여금 이정후의 발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특허 분쟁 사건이 아니야. 이런 사건에 경험 없는 어쏘들 투입해서 쓸데없이 기분만 상하게 할 수 있어. 어쏘 교육은 이런 사건에서 하는 게 아니지. 그런 거 구분은 이제 할 줄 알잖아, 유 변호사도.」
‘이정후는 왜 한범상이 못마땅한 것일까?
정말 삼전의 반응이 걱정돼서?
강태산의 낙하산이라서?’
그가 강태산을 경계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아는 내용이었다.
유경민은 이정후의 뜻대로 한범상을 케이스에서 뺄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굳이 이정후의 심기를 건드려 가며 중용할 생각도 없다.
‘태산’이 굳건히 서 있을 때도 가만히 있었는데,
이제 와서 이정후를 상대로?
어리석은 짓이지.
한 스푼짜리 반골 기질쯤이야···
매번 잘 참아 삼켰기에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함 변이 좋게 보는 친구인 건 알겠는데, 믿고 맡기는 건 다른 사건에서 해도 되는 거니까, 이 사건은 함 변이 직접 챙겨 봐.”
“넵. 알겠습니다. 직접 챙겨 보겠습니다.”
유경민은 한범상을 잘 몰랐다.
아직은···
-*-
“어, 안 계시네.”
범상의 메신저 사인이 켜지는 것을 보고 왔는데, 방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야근하는 비서가 도하영에게 설명해 준다.
“한 변호사님, 15층에 가셨어요.”
“15층이면, 특허팀 회의에 들어가셨나요? 방금 메신저 켜졌던데?”
“그건 아니고요. 배당받으신 특허 사건 자료 조사 때문에 요새 밤에는 거기 소회의실에서 늦게까지 일하세요.”
“아-”
“뭐 필요하세요? 전해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제가 직접 갈게요. 특허팀 소회의실이라고 하셨죠?”
“네.”
도하영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메신저로 해도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간다.
오늘은 너무 바쁜 나머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
무언가에 몰두해서 일하는 모습은 섹시하다.
같은 변호사가 봐도 그렇다.
센터게이트빌딩 15층 소회의실.
똑똑-
창밖으로 일하는 범상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하영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특허팀 사무실로 아예 옮긴 거예요?”
“어, 도 변호사님.”
하영은 챙겨온 초콜릿을 주머니에서 꺼내 범상에게 내밀었다. 타이밍을 재다가 괜히 어색해지기 전에.
“아, 고맙습니다! 화이트초콜릿이네요.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식사 안 했어요?”
“네, 있다가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
“말하죠. 저도 바빠서 아까 샌드위치 시켜 먹었는데.”
사실 하영은 아까도 범상의 방을 슬쩍 체크했었다.
같이 먹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자리에 없었다.
“아까는 파이낸스팀 미팅 때문에 18층에 있었고, 그전에는 해상팀 회의에 참석하느라 시간이 없었어요.”
“와- 여기저기에서 한 변호사님을 많이 찾으시네요.”
“요새 좀 사건들이 몰려서···.”
“괜찮아요?”
“네, 뭐, 아직은. 헤헤.”
하영은 서류 더미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덤덤하게 대답하는 범상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루 종일 사무실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여러 팀 회의에 참석하느라 본인 방에는 거의 있지도 못했으면서, 점심에 꺼진 메신저에 이제야 다시 접속했으면서,
누구는 몰려드는 사건에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할 법도 한데,
이 남자는 한 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다.
“아, 근데, 왜 오셨어요?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예전에는 저 표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태연한 척하려고, 감정을 숨기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실제로 그런 변호사들이 있다. ‘저는 이 정도 업무에는 끄떡없습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더 밝게 웃고 다니는 어쏘들.
하영은 이제 안다.
한범상은 그런 허세꾼이 아니라는 것을.
저 여유로움은 찐(眞)이라는 것을.
‘아- 왜 이렇게 멋있지, 이 남자.’
“변호사님?”
“네?”
“변호사님이야말로 바쁘신 거 아니에요? 방금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어서 오신 거냐고 물었는데.”
“아! 그랬어요? 순간 잠깐 딴생각이 나서··· 그러니까, 제 말은 사건 관련해서 딴생각이 났다는···”
“저 보다도 우리 도 변호사님이 진짜 바쁘신 거 같은데요. 대화 도중에 사건 생각 때문에 멍까지 때리시고.”
‘우리···도 변호사? 지금 “우리”라고 한 건가?’
“우리, 아니! 슈리 캐피탈 사건 관련해서 최 변호사님이 변호사님께 확인해 보라는 게 있어서요!”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확인하실 것이 무엇인가요! 하하.”
범상의 놀림에 하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범상은 눈치채지 못했다.
눈치챘어도 방이 더워서 그런 줄 알았을 남자였다.
덥기는 무슨.
3월하고도 14일밖에 안 됐는데.
-*-
일주일 뒤,
눈치 더럽게 없는 남자는 함익철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변호사님,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무슨 일이야? 지금 하고 있던 게 있기는 한데···.”
“부영 SD 사건 관련해서 상의드릴 것이 좀 있어서요.”
“부영 SD?”
“네, 잘하면 이의를 취하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연애 관련해서는 눈치가 더럽게 없지만, 사건 관련해서는 완전히 다른 남자다.
한범상은 전투에서 이길 방법을 찾았다.
“이의를 취하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게 뭔데? 아, 그러지 말고, 소회의실로 가자. 요새 거기서 일하지?”
“네.”
근면과 성실은 안 될 일도 되게 한다.
함익철은 지난 일주일간 범상이 어떻게 일했는지 봤다.
15층에서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그보다 더 일찍 출근했고, 더 늦게 퇴근했다.
“그나저나 젊음이 좋네. 사무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것 같던데, 얼굴에 티가 하나도 안 나네. 부럽다. 부러워.”
시니어 파트너 유경민이 사건에서 배제하라는 투로 지시를 내렸지만, 함익철은 그럴 수 없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지 누구한테 준다는 말인가.
그 선배에 그 후배라고 했다. 함익철에게도 한 스푼의 반골 기질이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좀 더 젊다는 거.
그리고 한범상을 조금 더 먼저 경험해 봤다는 거.
“변호사님도 공진단 하나 드릴까요?”
공진단 같은 남자다.
머리를 맑게 해주고 심장을 뜨겁게 해준다.
억지로 삼킨 반감에 직방이다.
“그래, 하나 줘봐.”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 84화
전쟁, 전투 그리고 전략
십수 년 전, 세계 1, 2위를 다투는 IT 기업들이 수조 원에 달하는 특허분쟁을 벌였었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전쟁이었다.
단순히 특허 1종을 두고 붙은 것이 아니었다. 내부 기술에서부터 디자인까지 여러 개 부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장도 다양했다.
미국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국, 호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복잡한 분쟁이었다.
쟁점이 되는 기술·디자인 중에는 독점도 있었고 제삼자를 통해 취득한 것도 있었다. 심각한 부분도 있었지만, 소비자가 보기에는 하찮은 부분도 있었다.
정치·외교적인 이슈도 작용했다.
양국의 언론도 가세했다.
하지만, 진짜 흥미로운 건 전쟁을 벌이면서도 둘은 밀접한 사업적 파트너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연간 수천억 원에 달하는 비즈니스가 둘 사이에 오고 갔다.
싸움이 치열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법률 비용만 매년 수백억 원이 나갔으니까.
2007년에 발발한 전쟁은 십 년이 넘게 지속됐고, 2018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군사전쟁처럼 두 기업의 산업전쟁도 합의로 끝이 났다.
표면적 승자는 가장 큰 미국 전투에서 이긴 1위 기업.
미국 법원이 한화로 7,000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금 지급을 2위 기업에 명령했다.
그 뒤로 2위 기업은 다른 전투들에서 사실상의 항복을 선언하고 소송들을 취하했다.
그래서 정말 전쟁의 진정한 승자가 1위였을까?
언론 대부분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 십여 년간 2위 기업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크게 성장했고, 브랜드 이미지 역시 큰 폭으로 향상됐다. 2007년 당시 5%도 안 됐던 2위 기업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특허분쟁이 종결되었을 때 20%가 되어 있었다.
“TSPC를 끌어들이면 어떨까요? 부영 SD 특허 관련해서 후지와 전기가 제기한 이의를 철회하는 조건으로.”
한범상의 설명이 끝났을 때, 함익철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살짝 고민스러웠다.
설명은 깔끔했다. 전략도 납득이 갔다. 설득력 있다. 매우.
하지만, 어쏘가 내놓은 전략이 특허분쟁팀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흠···.”
그렇다고 그냥 입 다물고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으신가요?”
막연하냐고? 아니다. 실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지만 뜬구름 같다는 말도 맞다. 특허팀이 뻗는다고 손에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단, 유 변호사님께 가서 말씀 드려봐야 할 것 같은데.”
“네.”
“말 나온 김에 지금 하자.”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회의실 밖으로 향하는 함익철.
범상은 인사를 한 뒤 책상을 정리했다.
“뭐해?”
“네?”
“지금 가자니까.”
범상은 선배가 가서 보고 한다는 줄 알았다.
익철은 범상과 함께 갈 생각이다. 범상에게 아직 신뢰가 없는 시니어 파트너가 직접 들어야 할 내용이다. 아이디어를 낸 후배보다 설명을 더 잘할 자신도 없고.
“아, 넵, 알겠습니다.”
범상은 재빨리 설명 자료를 챙겨 익철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