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84)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84화(84/190)
【084화 – 전쟁, 전투 그리고 전략】
김앤강 특허분쟁팀,
시니어 파트너 유경민의 방.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이정후 변호사님께서 전화하셨는데, 연결할까요?
이정후라는 이름에 유경민의 미간이 먼저 반응했다. 용건을 듣기도 전에 주름이 파인다.
“연결해.”
-네, 연결하겠습니다.
찰나의 무음 뒤, 수화기에서 타이르는 듯한 어조의 느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 변호사.
“네, 변호사님.”
이정후다.
-삼전 법무팀 박 상무한테 연락받았지? 모레 회의하자는 연락.
“네, 받았습니다.”
-전체적인 전략 관련한 회의라서 특허팀에서 특별히 준비할 건 없지만, 이채선 사장도 참석한다고 하니까, 유 변호사가 신경 좀 쓰라고 전화했어. 함 변호사가 준비할 건가?
“네.”
-함 프로가 성실하지. 그래도 유 변호사가 챙겨 봐. 삼전의 실세들이 참석하는 자리니까.
이채선,
현 ㈜삼전 사장,
‘삼전 그룹의 주인’ 이명구 회장의 장남.
한 10년 뒤쯤에는 삼전 그룹의 주인이 될지 모르는 사람이 참석하는 자리이니, 해당 클라이언트를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파트너 변호사로서 한마디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마치 부하 다루듯, 학생 대하듯 하는 저 말투는 역시나 거슬린다.
특별히 준비할 건 없다고 하면서 신경을 쓰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말한 건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늘 저런 식으로 모호하게 지시를 내리는 것도 유경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치를 했으면 정말 잘했을 양반.
하긴, 이미 하고 있는 건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들어가십시오.”
-아참, 모레 회의에 나도 참석할 거 같아.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냥 알고 있으라고.
?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딸깍.
통화가 끝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유경민.
미간의 주름이 더 짙어진다.
‘미팅에 참석한다고?’
이정후는 사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애초에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빌링을 하지 않는다는 뜻.
그가 하는 미팅은 의뢰인과의 사적인 자리들뿐이지, 이런 실무 미팅에 그가 참석할 까닭이 없다.
‘단순한 실무 미팅이 아니라는 건가?’
특허 사건 관련 보고를 준비하라고 한 걸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듯싶다.
그럼, 왜···?
‘특허팀이 딴소리를 하나, 안 하나 지켜보겠다는 건가?’
이채선 사장에게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를 걸어서 할 수 있는 양반이었다.
얼굴 보고 해야 할 이야기라면 식사 자리든 골프 약속이든 잡았을 거고.
기업법무팀 이슈 관련해서 보고할 것이 있었다면, 시니어 파트너 양호락이 참석했을 것이다.
세부적인 부분에 관심도 없을 거면서. 딱히 할 말도 없는 양반이 사장이 참석하는 실무진 미팅에 굳이 참석하겠다는 건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상기시켜 주겠다는 심산처럼 밖에 들리지 않았다.
“벌써부터 이런데, 나중에는 아주 사사건건 관리하려 드시겠네···.”
아직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김앤강에 남아있는데도, 벌써부터 하늘에 오른 것처럼 군다는 의미였다.
유경민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
현상 유지를 원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러면 김앤강에서 은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변호사 인생 처음으로 그의 머리를 스쳤다.
‘나간다고 하면 과연 얼마나 많은 클라이언트가 응원해 줄까? 후배 중 몇 명이나 따라나설까?’
그의 나이 쉰여덟. 더 이상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생각이 절대 아니다.
당장 재작년 그의 뜻을 거스르고 나간 구조조정팀 시니어 파트너 노태규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앤강을 나가 광종으로 옮겼던 그는 최근 세컨드 티어(2nd tier, 2급) 로펌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 연차 대 변호사가 대형 로펌에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그만한 매출을 매년 지속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만한 매출을 지속하려면 큰 기업들로부터 꾸준히 사건들을 따올 수 있어야 하고, 밑으로 연봉으로만 수억 원씩 받아 가는 주니어 파트너와 어쏘들 열댓 명 정도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제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같이 일할 수 없다.
차라리 가만히 뒀으면, 눈치껏 알아서 기었을 텐데.
자꾸 이런 식으로 간섭하고 나오니, 삼킨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똑똑-
조금 전 이정후와 한 통화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은 차가워지려고 할 때, 자신을 따라와 줄 것 같은 믿음직한 주니어 파트너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변호사님,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부영 SD 관련해서 상의드릴 게 생겨서요.”
“어, 함 변호사.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부르려고 했는데, 잘됐네. 거기 좀 앉아. 방금 내가 이···.”
바로 그때, 혼자인 줄 알았던 함익철 뒤로 기대하지 않았던 얼굴이 따라 들어왔다.
“한 변호사도 같이 왔습니다. 한 변호사가 직접 보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사라지려고 했던 주름이 그의 미간에 그대로 남는다. 한범상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단지, 더 큰 문제가 있는데, 어쏘 하나를 두고까지 이정후와 신경전을 펴고 싶지 않은 심정이라서였다.
“뭔데 그러지? 모레 예정된 삼전 법무팀하고의 미팅 때문에 지금 좀 급한데.”
“그것 관련입니다. 변호사님께서 한번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것 관련?”
“네. 한 변호사가 괜찮은 전략을 하나 고안했는데, 삼전 쪽에서도 솔깃할 만한 내용입니다.”
“삼전 측에서?”
“네.”
함익철의 의견에 유경민은 한범상을 쳐다봤다.
딱히 특별해 보이는 건 없다. 함 변호사가 왜 이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걸까?
돌려보내려던 유경민은 신임하는 후배가 이렇게까지 강조하는데, 무안 주기가 싫어서 그냥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 변호사, 방금 설명한 부분들이 확실한 거야? 언론에 발표된 기사들만 가지고 짠 거면 곤란한데.”
“확실합니다. 내용은 기밀이라 확인할 순 없었지만, 기사들에 언급된 소송들이랑 중재 건들이 계류 중인 건 해당 법원과 중재원에 전부 확인했습니다.”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유경민은 한범상을 다시 쳐다봤다.
좀 전과 다르게 보인다.
‘뭐지, 이 친구?’
-*-
사직빌딩 9F,
유경민과 통화를 마친 이정후는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다.
「부영 SD 특허분쟁 사건 번호: S101-0113
사건 담당 변호사: YGM, HIC, HBS」
‘HBS’는 한범상의 이니셜이다.
분명히 알아듣게 얘기했는데···
유경민이 한범상을 빼지 않았다.
사소한 것이지만, 반역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팀 매출이 높고, 건드리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잘나서, 자기 실력이 좋아서 그렇게 된 거라고 착각하는 시니어 파트너들이 있다.
잘나갈수록,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는 본인들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오판이다.
이 자리는 그렇게 쉽게 올라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지금 그 누구도 김앤강을 나가면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안에서 버티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이정후는 이참에 유경민에게 확실히 보여줄 셈이다.
김앤강 총매출의 20%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김앤강의 다음 ‘하늘’이 누가 될 것인지를.
김앤강 변호사로 정년퇴임을 하려면 한 스푼 반골 기질조차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정후는 깜짝 놀랐다.
이틀 뒤 삼전 본사 회의실 미팅에 나타난 한범상을 보고는.
-*-
센터게이트빌딩 15F,
유경민의 방.
“함 변호사, 함 변호사 말대로, 한 변호사가 발표하는 거로 가겠지만, 함 변호사가 꼭 이중으로 꼭 확인해.”
-네, 그러겠습니다.
“불편해할 사람들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중간에 태클이 들어오면 내가 어느 정도 커버는 하겠지만, 한 변호사한테 분위기 잘 보면서 하라고 당부해 두고.”
-네, 변호사님.
“잘 준비시켜 봐.”
-예.
딸깍.
한범상의 아이디어는 기발했다.
설명도 깔끔했다.
내심 많이 놀랐다.
3년 차 어쏘가 시니어 파트너인 자신보다도 이 전쟁을 넓게 보고 있다.
물론 그래서 문제인 점도 있다.
누구도 그에게, 특허팀에게 그렇게 넓게 보라고 한 적이 없었으니까.
주제넘은 짓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이정후가 그렇게까지 간섭하고 나오지 않았다면, 유경민 성격상 좀 더 신중할 수도 있었다.
좀 더 내부 미팅을 해보고 결정했겠지.
이런 식으로 들이받지 않았을 거다.
유경민은 결심했다,
한범상을 삼전 미팅에 데리고 가기로.
리스크가 있는 결정.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사건을 맡은 후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은 맑고 가슴이 뜨겁다.
속이 편하다.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 85화
전략가들
최첨단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장치 ·기술 등을 떠올린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과학 역시 문학과 같다.
한 겹 위에 또 다른 한 겹이 쌓이는 것일 뿐이다.
“얼마 전, TSPC는 게이트 올 어라운드 3 나노미터 파운드리 제조 공정 중 LKGT1 특허 관련해서 미국 샘 리서치 사(社)와 합의했습니다. GAA 3나노 공정 LKGT1이 무엇인지는 여기 계신 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아시고 계실 테니까,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독일 경제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NEC의 독일 바흐텔 사(社) 인수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짧은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기사에는 경쟁자가 나타났다고만 언급되어 있는데, 그간 올라온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해당 경쟁자가 TSPC라는 걸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설명이 길다.
하지만 장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워낙 큰 전장의 외곽에서 치고 들어가는 전략이라, 처음에는 이 사람이 지금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삼전은 TSPC와 또 다른 GAA 3나노 공정으로 협약 중이고, 해당 협의에서 우세한 상황으로···.”
이야기가 점점 중점으로 들어오자, 실무진들의 눈들이 먼저 반짝이기 시작했다.
R&D팀 팀장은 변호사가 기술적인 부분에 해박하다는 점에 놀랐고,
법무팀 이사는 김앤강이 참여하지 않는 삼전의 해외 분쟁들에 대해서까지 그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실세 중의 실세인 전략팀 오정진 상무는 세세한 전략에 놀랐다.
이 전쟁의 전체 그림을 파악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만, 일반 삼전 투자자 중에서도 이곳저곳에 발표된 공식 정보들만을 보고 삼전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귀신같은 사람들이 있다.
전략팀 오정진 상무가 감탄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잠시만요. TSPC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 추측하는 이유가 뭐죠?”
“그 이유는 현재 TSPC가 미국 정부의 압박으로 공장을 미국 내에···.”
전략을 스텝-바이-스텝으로 세분화했고, 단계별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전략이라는 것이 그렇다.
말이 좋아 전략이지, 어떤 사람은 할머니 요리하듯 ‘이렇게 하면 그렇게 돼’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다.
오정진은 그런 전략을 싫어했다.
안타깝게도 위로 올라갈수록 그런 식의 감에 의한 경영이 심해진다는 것이 그를 더욱 그렇게 만든 것도 없지 않다.
같은 전략이라도 이렇듯 스텝별로 설명이 되어야지만, 변수가 생겼을 때 상황에 맞게 전략 변경을 할 수 있다.
전략팀 오정진 상무는 그런 점에서 한범상의 전략이 마음에 들었다. 해당 전략을 정말 오래 붙들고 고민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만 더.”
“네, 상무님.”
“다 좋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해야 할 이유가 뭐죠? 그냥 부영 SD 건을 포기하면 더 단순하지 않나요?”
그렇다고 쉽게 설득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 역시 전략가. 괜히 이채선 사장의 오른팔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범상 역시 고작 몇 주 고민해서 내민 전략이 아니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그도 잘 안다.
“상무님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도표들을 잠깐 보여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보시는 표는, 부영 SD 건을 합의했을 때 삼전이 얻게 될 득과 실을 정리한 표입니다. 다음은 저희가 제안한 방법으로 접근했을 때의 득과 실입니다. 둘을 비교해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나노 공정의···”
회의가 시작됐을 때, 삼전 그룹 측의 누구도 회의가 그렇게 진행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끝났을 때, 김앤강 특허팀에서 전략을 제안했다는 데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앤강 측 참석자 중에는 한 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