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9)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9화(9/190)
【009화 – 근면과 성실은 통한다】
6시 10분.
영상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 쪽을 바라본 범상은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아쉬웠다.
이제 좀 알 것 같은데.
사무실에서 들고 간 책만 열네 권에 <해황기> 마흔다섯 권.
한 번에 다 들고 갈 수 없어 만화방을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정확하게 얼마나 걸릴지 몰라, 음식도 중간에 몇 번 추가로 배달시켜야 했다.
그러다 보니 로스타임이 생겼다.
아공간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필요할 때마다 5분, 10분씩 나오는 것들이 모이니 계획했던 스케줄에서 30분이나 늦어버렸다.
그리고 알고 나면 보이는 것이 더 많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이었다. 마지막에 미쳐 챙겨 들어오지 못한 판례들과 논문들을 인터넷으로 찾아가며 택시 안에서 합의서를 수정했다.
지저분하고 전문가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주어진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파트너 변호사 관점에서는 수긍할 수 있을 만한 변명 거리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아쉬웠다.
진짜 열심히 했는데···
범상은 수기로 고쳤던 수정문들을 합의서 워드 파일로 옮겼다.
아쉽게도 시간 안에 끝마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주어진 임무를 다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7시 05분.
범상은 완성한 합의서 초안을 백인찬 변호사의 책상에 올려놓고 (물론 이메일로도 보내고) 나왔다.
꼬르르르르륵-
마지막에는 추가로 음식 시킬 시간조차 없어 한 48시간 동안은 공복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영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회의실 쪽을 한 번 더 바라본 범상은 주린 배를 붙잡고 사무실을 나섰다.
도저히 안 되겠다.
뭐 좀 먹어야겠다.
-*-
7시 15분.
영상회의가 끝났다.
회의실에서 나온 백인찬은 한범상의 방을 지나쳤다.
자리에 없다.
“한 변호사 어디 갔어?”
“방금 식사하러 나가시는 것 같던데···.”
“참나- 하루 종일 자리에 비우더니 밥때는 또 챙겨나가는구먼.”
백인찬은 고개를 흔들며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양복저고리를 옷걸이에 걸고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 프린트물 하나가 놓여있다.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합의서 초안 완성했습니다.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범상-」
큼지막한 포스트잇에 정갈한 글씨로 쓴 노트.
글자도 크다.
“이건 또 뭐야. 사람 약을 올리겠다는 거야, 아니면 사회적응능력이 제로인 거야. 서른다섯이나 먹었다면서.”
백인찬은 귀찮은 듯이 프린트물을 옆 폐지 상자에 던졌다.
그랬다가 문득 아까 회의 들어가기 직전에 범상이 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잠깐 고민한 인찬은 폐지 상자에서 프린트물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영상회의 중에 상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국제 상거래에서 있어서 상계는 매우 까다로운 절차이다.
일반적인 상거래에서 내가 상대에게 받을 돈이 있고 상대가 나한테 줄 돈이 있으면 서로 상쇄하고 잔액을 주거나/돌려받으면 된다.
실제 대부분 국제 상거래에서도 그렇게 처리된다. 그게 상계니까.
하지만, 해사채권들은 다르다.
일반 상거래채권으로 상계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성격에 따라 상계 순위도 정해져 있고, 준거법에 따라 해사채권 인정 범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해상법이 어려운 것이다.
인찬은 아까 범상이 언급한 상계에 관한 조항과 질문을 달아놓은 관련 주석을 검토했다.
‘이것 봐라.’
아까도 느꼈지만, 그냥 허투루 하는 질문들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의 자세가 됐다. 질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나름 자기가 생각하는 답을 적어 놓았다.
장황했던 아까와 다르게 간결하고 정확한 분석과 답.
백인찬은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범상의 합의서 초안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 읽었고 난 후 든 생각은 ‘제법이다’였다.
‘국내고, 국외고 3년 차 미만 변호사가 이 정도 합의서 초안을 가져온 거를 본 게 얼마만 인가.’
사무실 서식에 선박 이름과 당사자 이름만 바꿔 오는 놈들도 있다.
그나마 똑똑한 놈들도 괜히 일을 더 받을까 봐 적당히 해오는 시대에 이해가 안 가는 조항에는 주석까지 달아놓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자신만의 결론까지 달아놨다.
주석들 다 빼면 이대로 상대방에게 줘도 될만하다.
이런 수준을 기대하고 일을 시킨 거는 아닌데.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인상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감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으른 놈인지 부지런한 놈인지가.
똑똑-
“변호사님, 식사 안 하세요?”
“해.”
“밑에서 하실까요? 아님, 다른 데 가실 거면···.”
“아냐, 밑에 좋아.”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실 거죠?”
“응, 바로 가자고. 회의를 몇 개 했더니 배고파.”
“네. 그럼,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 윤 변호사.”
“네.”
“모레 현진상선 회의 있잖아.”
“예. 안 그래도 식사하면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스케줄 조정해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됐어.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네? 그럼, 혼자 가시게요? 아닙니다. 클라이언트한테 양해를 구했습니다. 혼자 가시면 회의 진행하시랴 동시에 리포트 쓰시랴 힘드실 텐데요.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야. 윤 변호사도 바쁘잖아. 같이 갈 사람 있어.”
“누구요? 송 변호사는 그날 재판인데.”
방금 정했다.
“한 변호사를 데려가 보려고. 설마 회의 중에도 집에 가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네?”
“아니야. 일단은 밥이나 먹자고.”
외국 변호사로서의 첫걸음
해상 분쟁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용선계약, 건조계약 등 계약 관련 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선박충돌, 화물손상/멸실 등 해상 사고 관련 분쟁이다.
실무에선 전자를 (‘물에 닿지 않은’ 사건이라 하여) 드라이 케이스(dry case)라 하고, 후자는 (‘물에 닿은’ 사건이라 하여) 웻 케이스(wet case)라 부른다.
국외 클라이언트의 선박이 인천항에 입항하던 중 국내 선박과 충돌하는 사고가 났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다만, 선수 좌현이 크게 손상되었고 싣고 있던 화물도 손해를 입었다.
전형적인 웻 케이스. 백인찬은 상대방 선원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범상을 데리고 현진상선 인천항 사무실을 찾았다.
“What was the exact time of the collision and the position of the ship? (충돌 시간과 좌표가 정확하게 어떻게 됩니까?)”
“Who were on the bridge at the time of the collision (충돌 당시 선교에 있던 선원이 누구누구인가요?)”
“What was the vessel’s speed? How about the visibility and sea condition? Can I see the deck log? (당시 선박의 속도는 어땠나요? 해상 상태와 시정은요? 항해일지 좀 볼 수 있을까요?)”
상대방 선주는 국내기업인 현진상선이었지만, 선장은 러시아인이었고 일등 항해사를 제외한 선원 대부분이 필리핀 국적이었다.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됐다. 백인찬이 물으면 선원들은 답했고, 범상은 인터뷰를 기록했다.
백인찬에게는 익숙한 업무.
이십 년을 넘게 했으니, 웬만한 사건은 충돌 위치와 모양만 봐도 대충 감이 온다.
그렇다고 쉬운 일은 아니다.
배에는 카메라가 달려있지 않다.
선박용 블랙박스인 VDR(선박항해기록)을 조사해 항적을 아는 방법은 있지만,
항적을 알아도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는지를 조사하는 일은 결국 선원들의 인터뷰를 통해서밖에 할 수 없다.
빌딩만 한 배 두 척이 드넓은 바다에서 10노트(대략 시속 18.5km/h)로 항해하다가 부딪혔다. 서로를 언제 인지했는지, 어떤 통신을 주고받았는지, 그 외 특별한 상황은 없었는지, 일일이 물어보고 조사해야 한다.
인간은 간사하니까. 언제나 불리한 진실은 감추고, 감출 수 없으면 유리하게 조작하려 한다. 인간의 본능이다.
능숙한 해상 변호사는 선원의 말에서 진실과 허위를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대충 이 정도 하면 된 것 같다. 한 변호사, 꼼꼼하게 기록했어?”
“네.”
“빠진 거 없지?”
“네.”
“그럼, 가지.”
“저기, 변호사님.”
“왜?”
“빠진 거는 없는데요. 아까 변호사님이 하신 질문 관련해서 선장님하고 하나 확인해도 될까요?”
“뭔데?”
“Master, you said you saw the red light on the opposing vessel about 10 minutes before the collision and therefore thought that the vessel would make the port turn. But, the 1st officer on duty stated it was difficult to even see the vessel’s white light on the masthead due to the fog and poor visibility. Now, who’s telling the truth?
(선장님, 선장님께서는 충돌 10분 전에 상대 선박의 붉은 항해등을 봤고, 그래서 배가 왼쪽으로 돌 거로 예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당직 중이던 일항사는 안개 등으로 인해 시야가 좋지 않아 돛대에 달린 마스트등도 보이지 않았다고 진술했는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범상의 질문에 백인찬은 내심 감탄했다.
팀에 들어온 지 석 달도 안 된 놈이 해상 변호사 흉내를 낸다.
그것도 제법 그럴싸하게.
‘어쭈, 요놈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