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Lawyer’s Subspace RAW novel - Chapter (90)
범상한 변호사의 아공간-90화(90/190)
【090화 – 맹렬하게】
미국,
텍사스, 포트워스.
6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무덥다.
제법 큰 회의실이 여러 나라, 여러 회사에서 온 관계자들로 가득 찼다.
삼전, 김앤강, 텍사스 IP, 앨리슨 커클랜드, TSPC. 협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한국에서 온 한 젊은 변호사에게로 향했다.
“해당 특허는 일본 신이치 전자가 미국특허청에 등록한 기술로, 2011년 TSPC가 신이치 전자를 인수하면서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으나, 그 전해에 미국 센티널 세미컨덕터 사(社)가 해당 특허 등록에 이미 이의를 제기한 상태였고···.”
표절 시비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어 전략은 ‘장르적 유사성’이다.
「해당 장르에 이미 많이 존재하는 구조나 형식, 요소 등을 차용한 것일 뿐이지, 시비가 된 작품을 베끼거나 독창성을 해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
이 주장을 펼칠 때, 변호사들은 시비가 걸린 작품보다 이전에 존재하는 유사한 작품들을 여럿 열거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비슷한 논리의 주장이 기술 특허에서 사용된다.
“···TSPC 인수 직전 합의를 통해 이의 절차가 중단되었지만, 신이치 전자와 센티널 세미컨덕터 사(社)가 체결한 합의서 제26조 3항에 따르면, 합의 당시, 권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유보한 것일 뿐이고, 이는 삼전이 센티널 세미컨덕터 사(社)를 인수하면서 삼전에게 그대로 이전되어···.”
일반인들은 특허가 매우 정교하고 대단한 것에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정말 특별하고, 이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술이어야만 인정해 주는 권리라고.
딱히 그런 건 아니다. 기계의 오른쪽에 있는 버튼을 왼쪽으로 옮겼을 뿐이어도 ‘독창성’을 인정받아 특허 등록이 가능하다.
당장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다른 브랜드들의 휴대전화기를 봐도 알 수 있다. 전부 비슷비슷한 모양이나 기술들인데, 각기 특허들이 등록된 것들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분쟁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미스터 한, 미스터 한 맞죠? 해당 이슈는 이번 소송에서 제기되었었고, 무트(moot, 고려할 가치가 없는 걸)로 판단해서···.”
“아니요. 1심에서 삼전을 대리한 매켄지가 전략적으로 철회한 것이지, 법원이 무트라고 판단한 적은 없습니다.”
“뭐가 됐든, 지금 말하는 이슈는 텍사스 IP와 관련이 없는 것이, 텍사스 IP가 TSPC로부터 해당 특허 관련된 권리를 인수했을 때는 그러한 사정에 대해 알지 못했을뿐더러, 특허 양도 계약서 제34조에 따르면···.”
“TSPC와 텍사스 IP 사이에 체결된 2021년 3월 12일 자 양도 계약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해당 양도 계약서는 TSPC와 텍사스 IP 사이에서만 유효할 뿐, 제삼자인 삼전에는 그 효력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 변호사님이 미국 특허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주장을 하시는 것 같은데, 닥트린 오브 어싸이노어 에스토펠(Doctrine of Assignor Estoppel, 특허 양도인의 금반언 법칙)에 의해서 해당 권리는 인수를 통해서 센티널 사에서 삼전으로 이전될 당시에 이미 센티널 사(社)와 TSPC 사(社)가 합의를 통해서 결론을 지었기 때문에···.”
“미스터 무어야말로, 관련 합의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시나 보네요. 관련 합의서 24조 7항에 보면, 분쟁에 관해 권리를 유보한다고 되어 있을 뿐이지, 포기한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 합의서 47조 11항에 보면, 해당 합의는 합병이나 인수 시 추후 협의를 통해 변경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한범상의 말이 끝나자, 반대편에 앉아있는 앨리슨 커크랜드의 변호사 로버트 무어는 옆에 앉아있는 어쏘 변호사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방금 상대가 언급한 계약서 조항을 당장 찾아 확인하라는 의미였다.
어쏘가 서둘러 조항을 찾는 사이, 로버트 무어는 여유로운 척,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한번 가르치려 든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타임 바(time bar, 시효)가 끝난 권리예요, 미스터 한. 미연방법상 특허 침해 소송 제기의 시효는 6년, 계약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도 6년이에요. 후자 관련해서, 텍사스주의 경우, 텍사스 시빌 프랙티스 앤드 레미디즈 코드에 챕터 16에 따라 4년입니다.”
“일본법입니다.”
“?”
“관련된 계약서가 많죠, 무어 변호사님? 변호사님께서 혼돈하신 것 같은데, 해당 특허 이의 관련해서 신이치 전자와 센티널 세미컨덕터 사이에 체결된 권리 유보 계약서의 준거법은 일본법입니다.”
“!”
로버트 무어는 다시 한번 옆에 있는 어쏘 변호사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범상은 기다려 주는 관용 따위 베풀지 않는다.
이건 의뢰인의 미래가 달린 협상이다.
“46조입니다. 미연방법상 계약상 양도된 권리의 시효 판단 시 적용되는 준거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어 변호사님께서 더 잘 아실 테니까, 굳이 설명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텍사스주 법상도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아실 테고. 옆에서 찾는 동안, 일본법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면, 20년입니다.”
“···.”
“해당 계약상 권리의 유보가 시효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신다고 해도, 일본법상 아직 청구권이 유효합니다.”
거만한 얼굴로 참석했던 상대방 변호사들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법에서도, 팩트에서도 커크랜드가 밀렸다는 것을.
그중 제일 거만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있던 로버트 무어의 다급해진 손가락질이 말해주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 에어컨 바람이 식힐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진행된 미팅은 일단 그렇게 끝났다.
-*-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온 김앤강 변호사들은 삼전 전략팀 변호사들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
포트워스. 인구 백만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지만, 제법 괜찮은 식당들이 있다.
더 큰 휴스턴이나 댈러스를 두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협상 상대방인 텍사스 IP의 본사가 이곳에 있어서였다. 법인세 혜택으로 아메리칸 에어라인 그룹, GM 파이낸셜 등 큰 회사들의 본사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카하- 한 변호사님, 대단하시던데요! 로버트 무어 변호사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회의 끝날 때 얼굴이 빨개져서는···하하하.”
긴 회의였다.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사람도 목이 바짝바짝 말랐던 미팅.
어찌나 갈증이 났는지, 시원한 맥주 한잔에 취기가 올 지경이다.
한 모음 크게 들이킨 삼전 전략팀의 변호사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원래 얼굴이 빨가시던데요.”
“하하하- 그렇기는 한데, 이번에는 목까지 새빨개져서는···아무튼 아- 통쾌했습니다. 원래 좀 뭐라고 해야 하나, 인종차별까지는 아니지만,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그런 말투를 가진 사람이거든요, 로버트 무어 변호사가. 근데 오늘은 한 변호사님한테 절절매는 게, 아우- 시원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변호사님! 한잔하시죠.”
삼전 변호사는 범상을 향해 맥주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한 말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유경민도, 함익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미국 변호사라고는 하지만 어쏘가 한다고 하니까, 조금 우습게 본 것 같습니다.”
“아- 그거 아닌 거 같은데요. 그냥 법에서도, 팩트에서도 한 변호사님께서 완전히 압도해 버리시던데. 그렇지 않았습니까, 유 변호사님?”
특허분쟁 1심에서 텍사스 IP 사(社)가 승소했다.
예상대로 텍사스 IP 관계자들과 그들의 로펌인 앨리슨 커크랜드 변호사들은 합의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처럼 거만한 얼굴을 한 채 회의실로 들어왔다.
물론 그쪽도 전략적으로 그렇게 나온 것이겠지만, 확실히 협상 시작 때부터 깔아뭉개려는 속셈이 보였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한범상을 먼저 내보낸 것도 있다.
‘우린 어쏘도 이 정도 해’라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
그리고 설사 한범상이 토론에서 깨진다고 해도, 뒤에 파트너 변호사들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싶었고.
1차 미팅을 통해서 상대의 전략을 알아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물론 한범상의 실력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너무 잘해버렸다.
김앤강의 3년 차 어쏘는 사실관계에서부터 관련 법들까지 정확하게, 빈틈없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협상 내내 관련 지식을 장인 칼 다루듯 뽑아 휘둘렀다.
아무리 머리에 있는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런 긴장되는 자리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버벅거리게 마련인데, 그런 것 하나 없었다.
쉴 새 없이 상대를 몰아붙였다.
오죽하면 20년 베테랑인 로버트 무어 변호사가 그렇게 헤프게 손가락을 까딱거렸을까.
어렴풋이 알고 있어서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협상력.
미팅 내내 팔딱거렸다. 마치 모든 기록을 어제 다 본 사람처럼.
그래, 그 표현이 정확하다.
팔딱거렸다.
누구도 치고 나올 수 없을 만큼 맹렬하게.
“수고했어, 한 변호사.”
삼전 사내 변호사의 발언에 십분 동의하는 그였지만, 김앤강 특허팀 시니어 파트너 유경민은 가볍게 한마디만을 더했다.
김앤강 변호사들끼리 하는 자리였으면, 더 크게 칭찬했으면 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뢰인 앞에서는 겸손해야 하기에 그랬을 뿐.
“감사합니다.”
범상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야 하는 것을.
“아, 근데, 이런 주장할 수 있는 건데 매켄지는 왜 1심 때 그런 삽질을 한 건가요? 뭐, 법무팀이 주도한 것이겠지만, 애초에 김앤강이 했으면, 훨씬 더 수월했을 텐데요. 아쉽습니다, 참.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매켄지에게 항의하기도 그렇고···”
삼전 사내 변호사는 모르는 듯하다.
한범상이 진짜 대단한 이유를.
그래, 어쩌면 매켄지도 1심 때 그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범상이 내놓은 주장들이 새로이 발명된 게 아니니까.
하지만, 단순히 계약서 몇 번 보고 짤 수 있는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앞에 놓인 복잡하고 다양한 팩트들과 법률관계들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리 맞춰보고, 저리 맞춰보며 수없이 고민해야지만 나올 수 있는 전략임을,
새롭지 않아 보일지라도 아주 독창적인 주장임을,
한번 수십 개, 수백 개의 사건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로펌 변호사에겐 절대 쉽지 않은 태스크임을,
그리고 그건, 엄밀히 말하자면, 사내 변호사의 영역인 것을···.
삼전 전략팀의 변호사가 맥주 한잔과 승리감에 도취해 농담처럼 웃으며 칭찬하고 있었지만, 한범상에 대한 시니어 파트너 유경민의 마음은 이미 감탄을 넘어서 신뢰의 경지에 닿았다.
“한 변호사.”
“네, 변호사님.”
“내일 협상도 그냥 한 변호사가 주도하는 게 어때?”
“제가요?”
원래는 유경민이 하려고 했던 일.
“할 수 있지?”
폼이 좋은 어쏘가 있는데, 나설 이유가 없다.
“예.”
“오늘처럼만 해.”
“알겠습니다.”
솔직히 자신이라고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을 스치고 지나갔다.
점점 더 커지는 판
텍사스 IP는 소위 ‘페턴트 트롤(patent troll)’이라 불리는 특허 관리회사이다.
공장도, 연구소도 없이, 순수 투자 목적으로 이 특허, 저 특허를 마구잡이식으로 사 모으는 일종의 펀드 회사.
세상이 이렇게 됐다. 자본이 모든 분야에 지배자가 되었다.
그들을 욕할 마음은 없다.
그저 그런 것들이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지고 쓸데없이 비용만 늘어나게 되는 게 짜증이 날 뿐.
회사의 미래 따위는 관심이 없으면서 돈 몇 푼(?) 벌겠다고 경영권 분쟁에 개입하는 사모펀드들 같은 놈들.
차라리 TSPC와 직접 협상했으면 훨씬 수월했을 것을.
욕하는 거 맞다.
오정진은 지금 2주 전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진행된 텍사스 IP와의 협상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띠리링- 띠리링-
“응.”
-상무님, TSPC의 케니스 헝 이사님이 전화하셨습니다. 연결할까요?
“연결해.”
.
-Hi, Jin, how are you doing?
(하이, 정진, 어떻게 지냈어?)
“Good. And yourself?”
(잘 지냈지. 너는 어때?)
-Good, good.
(그럭저럭. 좋아.)
“So, what’s the plan?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Good news. Texas IP called.
(좋은 소식이야. 텍사스 IP로부터 연락이 왔어.)
“Yeah?”
(그래?)
-They want to settle.
(합의하고 싶대.)
지난 몇 달간 곤두서 있었던 오정진의 신경세포들이 그제야 좀 누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