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15)
1. 옹이가 많은 고목(古木)이 숲보다 오래 살아남는다(2)
영빈관에 손님이 한 사람 더 늘어났다. 그는 장염을 만나기 위
해 태산에서 달려온 서검자였다. 서검자는 장염과 그 일행을 만나
본 뒤 곧바로 거처를 영빈관으로 정했다. 물론 무림맹의 어느 누
구도 서검자가 영빈관에 머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서검자의 배분이 높기도 했지만, 현재 정파 무림의 최고고수가 서검
자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무림 최고수가 영빈관에 머물겠다는
데 감히 반대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서검자는 영빈관에 머물며 장염과 기천검의 검의(劍意)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물론 대부분 서검자가 묻고 장염이 대답하
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침부터 장염과 기천검을 토론하던 서검자의 안색이 울그락 붉
그락 해졌자.
“아니, 나는 자네가 터득한 검의를 묻는데, 어지 내가 가르쳐 준
구결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건가?”
서검자는 장염에게 무언가 색다른 기천검의 해석을 원했건만
장염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서검자가 자신을 한껏 낮추
어 장염에게 기첨검의 검의를 물으면, 장염은 앵무새처럼 구결을
반복해 설명했다. 그러나 그 구결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서검자가
장염에게 전수해 준 것이니 가슴이 터질 노릇이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서검자에게 장염이 느긋하게 말했다.
“어르신, 어르신의 구결이 검의를 가장 바르게 표현한 것이라.
사실 더 이상의다른 말은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장염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서검자로서는 달리 푸념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네가 자네 나름대로 깨달은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그 과정은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천검
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몸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안다고 해서 누구나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는 말입니다.”
“…….”
장염이 여기까지 말하자 서검자는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사실 오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구결을 묵상하고 연마하
여 앞으로도 뒤로도 다 외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비단 그뿐
이랴! 누군가에게 자세히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서
검자 자신의 몸으로 펼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펼
쳐지지 않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일찍이 장염이 고민하던 바로 그 문제 앞에 서검자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되 펼칠 수 없는
경지였다. 한마디로 머리 따로 몸 따로라는 말인데, 이 부분에 있
어서는 장염도 서검자에게 마땅히 더는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것
이었다. 장염 자신도 극복하지 못한 부분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
명할 수 있단 말인가?
보통 서검자와 장염이 기천검을 놓고 토론할 때면 으레 향이와
영화, 그리고 하후연과 지염도가 멀찍이서 구경을 했다. 그들은 서
검자와 장염이 나누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잘 새겨 들었다. 두 사
람의 말이 일상적인 무학의 경지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어서,
들어두기만 해도 언젠가 크게 소용되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검자와 장염은 그들의 사람됨과 무공에의 열의를 알고 있었
으므로 종종 알기 쉽게 무공의 도리를 풀어주었다. 어려운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어려운 것은 어
려운 것을 알기 쉽게 표현하는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장염은 서검자가 무학의 일대 종사라
는 것을 알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서검자는 그렇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이처럼 심오막측한 무공의 도리를 머리에 담고
다닐 수 있다니…….’
한때는 장염을 제자로 삼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빈관
에 머물며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장염
의 무공 수위는 놀랄 만한 것이었으며, 더불어 세상을 관조하는
눈도 그가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경지였다.
‘이 기회에 의형제라도 맺자고 해볼까?’
서검자는 장염을 볼 때마다 의형제를 맺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이 차이도 문제였지만, 의
형제를 맺는다는 일은 단지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화
산파 장문인의 스승이며 현존하는 무림 최고의 배분을 지닌 사람
이다. 괜히 의형제를 맺었다가 장염의 생활이 복잡해지고 피곤해
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무리 장염이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해도 ‘나 때문에
그가 번거롭게 될 수도 있다’ 고 생각하자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서검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거의
동생에게 대하듯 하는 것이라 주변 사람들은 간혹 머리를 갸웃거
릴 때가 있었다.
오늘도 지염도가 머리를 긁으며 하후연에게 속삭였다.
“형님, 아무리 봐도 서 어르신이 장 소협을 대하시는 게…….”
하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검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모습
만 따로 떼어내서 생각한다면 서검자는 정파 최고의 배분을 가진
고수가 아니라 옆집 할아버지쯤이다.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봐도 검선(劍仙)께서 장 소협에게 투정
을 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이거 내가 벌써 노망이 나서 헛
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지염도의 고리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러고 보니 하후연의
설명이 가장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검선
서검자가 장 소협에게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후연이 고민하고 있는 지염도의 어깨를 툭치며 중얼거렸다.
“신경 쓰지 말아라. 어디 두 분 다 보통 분들이시냐. 신선들의
세계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거라구.”
말을 마친 하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뜰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검을 뽑아 들고 검결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염도가 멀리서 바라보니 하후연의 신형이 나무 사이를 오락
가락하는데, 마치 골짜기를 굽이굽이 감도는 한줄기 강물 같았다.
‘형님의 태극양의검법이 벌써 삼성에 이르셨구나!’
자신도 향이에게 같은 검법을 전수받았지만, 아직 이성의 경지
였다.
‘나도 질 수야 없지. 향 사부를 위해서라도 더욱 정진해야겠다.’
지염도는 박도(朴刀)를 움켜쥐고 하후연의 맞은편 구석으로 갔
다.
휘이잉-! 휘잉-!
박도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려퍼졌다.
하후연으로부터 ‘검법에 맞게 검을 사용해 보라’는 귄고를 받
았지만, 야리야리한 검은 왠지 그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지염
도는 어디선가 자기의 생김새처럼 우직하게 생긴 박도를 구입한
뒤로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고집불통(固執不通)의 지염
도는 검법을 수련하는 지금도 도(刀)를 휘두르고 있었다.
지염도의 진전이 느린 것은 도(刀)로 검법을 연마하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수련한 무공이 하후연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후연
은 비록 하수(下手)였지만 무가(武家) 출신으로 기초가 튼튼했으
며 몸놀림이 유려했다. 그에 비해 지염도는 살상력 높은 마교의
무공만을 집중적으로 배운 터라 패도적이고 딱딱했다.
출신 배경만큼이나 성격도 각각 달라서 하후연이 부드럽고 섬
세한 반면 지염도는 단순하고 거칠었다. 자연히 장염의 무공은
하후연에게 더욱 적합한 것이었다. 그나마 지염도가 장염의 무공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향이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순종 때문이
었자. 향이의 자상한 지도가 없었다면 지염도는 벌써 익히기를 포
기하고 마교의 무공을 연마했을 것이다.
지염도에게 있어 향이는 어머니나 누이 같았고, 장염은 아버지
와 같은 존재였다. 본래 지염도는 남을 쉽게 믿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내다. 그러나 장염과 동행하면서부터 자기 주변의 사람
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염도는 태평객점에 여장을 푼 뒤 하후연을 형님으로, 그리고
향이를 스승으로 모셧다. 저염도로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셈이다.
하후연은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지염도의 순수함을 아는지라 결
국 그를 받아들였다.
향이도 지염도를 볼 때마다 사별한 동생들이 생각나는지 툭하
면 눈물을 글썽거렸다, 처음 지염도의 절을 받으며 ‘이제는 서로
가족처럼 의지하며 지내보자’고 한 향이의 말은 그런의미에서
각별한 것이었다.
그 앞에서 지염도가 어울리지 않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
어뜨림며 ‘네, 사부님’ 이라고 대답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입에 두
고두고 오르냐렸다. 그날 이후로 지염도는 향이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흥경궁(興慶宮)에서
장염을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염도
가 상상하기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그간 장염에게 무공 이상의 것을 배웠다. 그것은 한마디로 ‘어
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그런 것을 생각하
며 살지 않았지만, 장염을 만나 무림맹까지 오는 동안 그것은 어
느새 자신의 최대 관심사가 되고 말았다.
부웅! 붕!
쉬지 않고 혼신의 힘으로 박도를 휘두르던 지염도가 마침내 움
직임을 멈추었다.
“헉헉…….”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무작정 땀을
흘리기로 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한동안 장염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서검자가 돌아갔다.
장염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향이와 영화가 어떤 주제를 놓고
열심히 토론 중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하후연과 지염도가 검
과 도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었다.
‘어디, 그럼 나도 하던 일이나 끝내볼까?’
장염이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장염이 하던 일이란 다름
아닌 태극양의검의 보완이었다.
그 무렵 장염은 새로운 무도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전이(轉移)의 수련으로 얻게 된 원융
지의(圓融之意)를 자신의 모든 삶에 접목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전이가 정신적인 측면의 수렴이었다면, 윈융지의로 자신의 삶을 조명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장염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문자(文字)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전에는 경천일기공 ‘만물일체(萬物一體) 심물일여(心
物一如)’ 의 법문을 통해 ‘모두가 하나다’ 라고 생각해 왔으나, 언
제부터인지 그의 눈에 세상을 가득 메운 그물[天網]이 보였다. 그
그물에는 자신을 포함한 자연, 이를테면 구름과 바람과 바위조차
도 한 덩어리로 얽혀 있었다. 이전에는 텅 빈 공간이 보였는데, 이
제 장염의 눈엔 세상 어디에도 빈 공간이 없었다.
‘모두가 저 거대한 그물에 촘촘히 얽혀 있으니 이것이 하늘의
그물[天網]이라는 것인가!’
무심코 그물의 이 끝을 당기면 저 끝에 있는 사물이 반응을 했
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도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늘의 그
물 안에서 장염은 만물일체 심물일여의 실제를 체험하고야만 것
이다.
그때부터 경천일기공은 단지 내공 수련에서 벗어나 삶을 이끌
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장염은 지금가지 자신이 얼마나 무공에
천착했었는가를 반성하며, 생각과 무공을 새로운 그릇 속에 충실
히 담아 나갔다.
태극양의검의 보완은 그러던 중에 떠오른 것이다. 장염은 태극
양의검에 원융지의를 도입하여 태극양의검 후반 삼검식을 창안했
다. 이미 무공의 이론과 구결의 정리는 끝났고, 그것이 적용만이
남았다. 그러나 적용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무학
의 대가가 무공을 창안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대성하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장염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태극양의검의 후반식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장염의 눈이 스르륵 감겨졌다. 그는 눈에 보이
는 이 세계 너머에 있는 곳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무(武)와 도(道)
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아주 가끔씩 그의 손이 살짝 들어 올려졌다가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마침내 장염의 두 손이 무릎 위에
고정되었다. 그때부터 장염은 마치 한 개의 석상(石像)인 양 미동
도 하지 않았다.
장염은 눈을 뜨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왜 이곳에 모여 계시는 겁니까?”
장염의 앞에 서검자는 물론 향이와 영화까지 모여 앉아 있었다.
“장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좌선을 시작한 지 오늘로 삼 일째랍
니다.”
향이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밤이구요. 장 동생, 지금 자정(방 12시)이 넘었다는
거 알아요?”
장염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까?”
영화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벌써 사흘 전의
일이다. 식사 시간이 되어도 장염이 나오지 않아 살짝 들어와 보
았다. 처음에는 그저 방에서 혼자 묵상 중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장염이 그렇게 하루를 다 보내자 영화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아무리 불러도 장염은 귀가 먼 사람처럼 대답이 없었다.
죽은 사람처럼 가슴의 기복이 보이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이틀이 되어도 장염의 몸에 변화가 없자 서검자가 달려왔다. 그
러나 서검자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 사람이 번갈아가며 장염의 방을 지켜왔던 것이다.
장염의 얼굴을 지켜보던 서검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허! 자네의 수련은 참으로 묘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구먼. 그러
나 그렇게 요상한 수련을 자주 하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피가
말라 죽게 될 게야.”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장염이 눈을 뜨자 떠들썩하게 소란을 떨다가 하나둘
씩 빠져나갔다.
장염은 삼 일을 연공했다고 하지만 피로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
았다. 본래 무공에 집착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나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태극양의검의 후반 삼검식을 연구하다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나저나 배가 고파오는군.”
장염이 허기진 배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조용한 음
성이 들렸다.
“오라버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식사를 하셔야죠?”
“아! 물론 먹어야지요. 꼭 먹을 겁니다.”
장염이 대답과 함께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영화가 음식이 가득
담긴 작은 상을 들고 서 있었다.
영화가 음식상을 장염의 손에 쥐어주고는 속삭였다.
“훗! 오라버니, 무공을 많이 연마하면 곧 부자가 되시겠어요.”
“네?”
“밥을 삼 일에 한 번씩 먹으니 재물이 모이지 않겠어요?”
“하핫! 그럴 리가요.”
다음날 날이 밝자 장염은 자신의 일행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을 불러 모았다. 완성한 태극양의검 후반부 삼검식을 전수해 주기
위해서였다.
현재 태극양의검을 익히고 있는 삶은 네 사람뿐이었다. 향이
와 영화, 하후연과 지염도가 모두 태극양의검을 배웠다. 그들 중
지염도는 향이에게 무공을 배웠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장염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염도의 얼굴은 흥미진진해 보였다. 드디어 장
염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받게 된 것이다.
장염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후반 삼검식을 가르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극양의검의 전반(前半) 사식과 후반(後半) 삼식을 모두 익
히고, 마침내 검과 뜻이 통하면 어의통검(於意通劍)의 경지에 이
르게 될 것입니다.”
“어의통검의 경지란 무엇입니까?”
하후연이 궁금한 듯 되물었다. 무림의 경험이 적지 않은 하후연
에게 어의통검이란 말은 낯설었기 때문이다. 곁에서 듣고 있던 영
화의 표정도 어리둥절해졌다. 어의통검이라니, 자신도 무당산에서
십 년이란 세월을 공부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하, 어의통검이란 말 그대로 ‘뜻으로 두루 검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지요.”
말과 함께 장염의 손이 맞은편 담장 아래의 자작나무를 가리키
자 그곳에서 한 자루 장검이 빛살처럼 날아와 장염의 등 뒤로 파
고들었다.
찰칵!
그것은 청명검이었다. 어느 틈엔지 공동파의 보물 청명검이 날
아가 자작나무를 한 바퀴 돌고 되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마
치 검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후연이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장염의 등뒤로 삐죽이 튀어나
온
청명검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꿀꺽, 전설의 이기어검(以氣御劍)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어의통검(於意通劍)입니다. 어의통검은 기운
[氣]이 아니라 뜻[意]으로 검을 다루는 것입니다. 기운과 뜻의 차
이는 훗날 여러분이 알게 될 것입니다.”
어의통검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
예고없이 서검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서검자가 찾아오자 장염은
얼이 빠진 표정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장내를 벗어났다.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무공 지식을 가지고 이기어검술과 어
의통검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시원스런 답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의 혼란은 결국 향이와 지염도에 의해 매듭 지어졌
다.
“장 동생이 칠식을 다 터득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했으
니,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군요.”
하후연이 듣기로 향이 소저의 말은 매우 합리적인 것 같아 보
였지만, 사실 대부분의 검사들이 평생을 수련해도 이르지 못할 단
계가 이기어검이었다.
하후연은 ‘그 말씀을 들으니 속이 후련해지는군요’ 라고 회답하
는 지염도의 넓은 등판을 ‘펑!’ 소리가 나도록 친 후, ‘너의 사대
후손이라면 혹시 알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말했다.
향이는 그제야 자신의 말이 얼마나 요원한 경지인가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향이가 강호인으로 살게 된 것이 얼마 전이니, 그
경험이나 지식이 일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사람들은 그 뒤로 저마다 어의통검의 경지에 이르기 위
해 칠식의 검법을 연마했다. 향이는 영화와 짝을 이뤄 검술을 수
련했고, 하후연은 지염도와 함께 익혔다.
향이와 영화가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린 지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
후연과 지염도가 어울려 다니며 뻔질나게 영빈관을 드나드는 것
은 하남성 무림인들에게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무
림인들 사이에 하후연이란 존재는 각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남성에서 하후연과 지염도의 일상이란 무척이나 단도로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영빈과으로 찾아와 날이 저물도록 무공을 익히
거나 장염과 서검자가 나누는 논검을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매일 태평객점과 영빈관을 뻔질나게 오가니 자연히 사람들의 눈
에 드러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무림맹에서는 이 두 사람을 문무쌍치(文武雙恥)
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무림맹 정문에서 방명록을 작성하던 원룡
서생이 장난삼아 출입자의 명부에 기록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누
구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갔는지 모르게 무림맹에 널리 퍼진 것이
다.
하후연은 무공에 있어 무(武)의 수치였고, 지염도는 글을 모르
니 문(文)의 수치였던 셈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문무쌍치라고 불
리게 된 배경에는 하후연의 낮은 무공 실력과 지염도의 문맹(文
盲)을 넘어선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강호엔 하후연보다 무공이 떨어지는 사람이 많았고 글을 모르
는 무인은 그보다 더 많았다. 그럼에도 마치 이 두 사람만이 오늘
날 문무(文武)의 수치로 대표되고 있다는 것은, 무림맹 내어세 양
빈관을 출입하는 장염 일행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
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어쨋든 강호에서는 아직도 하후연을 섬서주접이라고 놀려댔지
만, 적어도 하남성에서는 문무쌍치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했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문무쌍치라고 불리는 사실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염도로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름을 사해(四海)에 드높이게
된 셈이라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고, 하후연은 장염에게 무공을
전수받으면서부터 상한 감정의 치유가 끝난 셈이라 피식 웃기만
했다.
간혹 지염도가 ‘나는 본래 출신이 험악해서 저보다 더한 소리
도 좋게만 들리지만 형님은 속도 좋으십니다’ 라고 할 때마다 하
우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명줄이 쉽게 끊기지 않지. 강호도
마찬가지라 상처가 심할수록 그 명성이 오래가는 법이다.”
신선한 바람이 무공산(武功山)에 자라고 있는 나무를 세차게
흔들었다.
촤아아아!
공야숙(公冶宿)은 숲이 우는 소리를 듣고 힘겹게 눈을 떴다. 고
개를 들고 보니 조금이라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오직 자
신뿐이었다. 사방에 가득한 것은 짖어지고 으깨진 시체들이었고,
자신은 그 한가운데쯤 위치한 바위 위에 흡사 드려진 제물인 양
누워 있었다.
청정한 생활만 해오던 공야숙이 언제 이런 복마전을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시산혈해(尸山血海)를
만들어낸 주인공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때부터 공야숙은
모습이 없는 상대와 싸워야 했다.
‘언제 다시 나타날까? 제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공포는 형체도 없이 다가와
공야숙과 그가 잠시 몸을 기대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집어삼켰다.
“끄아아아아! 너는 누구냐!”
공야숙은 공포에 맞서기 위해 철검을 빼 들었다. 매화 문양이
해 곧추세워졌다. 그러나 철검은 곧 맥없이 지면을 행해 수그러들
었다.
공야숙이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비칠거리기 시작했다. 그리
고 다음 순간 쓰러질 뜻휘청거리는 공야숙의 검무(劍舞)가 시작
되었다.
“헤에…살고 죽는 게 다 뭐냐! 더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 우헤
헤…키킥! 개 한 마리를 훔치면 불인(不仁)이라 하지만 한 나라
를 훔치면 의(義)라 한다네. 그럼그럼,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라
지만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네. 으흐흣! 도(道)가 어디에 있
는가! 도가 어디에 있는가! 도가 어디에 있는가! 반평생 도를 찾
아다녔지만 정작 나는 영웅이 되고 말았네. 헤헤…본래 나는 도
인(道人)인가? 본래 나는 영웅인가?”
공야숙의 검P이 허공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매화(梅花)가 피어
났자. 마침내 꽃이 서른여섯 송이가 되자 공야숙은 더 이상 움직
이지 않았다. 서른여섯 송이의 매화가 서늘한 그림자를 이끌고 떨
어져 내렸다. 공야숙의 눈이 꽃을 따라 작게 흔들렸다.
이제 혈기 왕성한 이십 대의 도사가 매화나무 그늘 아해에서
스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입산(入山)한 지 십 년이 지났을 때 젊은 도사도 다른 사령들의
뒤를 따라 죽음의 동굴에서 사십구 일(四十九日)을 보냈다. 한줄
기 빛도 스며들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동굴에서 나와 스승을 찾아
뵈었을 때 스승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못했습니다.”
제자의 입에서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였을까? 스승의 얼
굴이 살짝 굳어졌다.
젊은 도사는 아무것이라도 보았노라고 답했어야 하는 것이 아
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 스승을 소일 수는 없었다.
죽음의 동굴이 수행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르쳐 준다
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것은 본 것이며 보지 못한 것
은 보지 못한 것인다. 스승은 못내 아쉬웠던지 제자에게 거듭 물
었다.
“동굴 안에서 정녕 아무것도 없너냐?”
젊은 도사는 잠시 동굴을 떠올려 보고는 정중히 대답했다.
“네, 그저 어둡기만 했을 뿐 눈에 보이는 것은…없었습니다.”
그제야 스승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그렇다면 너는 어둠을 본 것이로구나.”
스승은 그 말을 끝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더 묻지 않았다. 젊은
도사는 스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
었다.
“그런데 사부님, 보통 사람도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不老長生)
할 수 있습니까?”
“너는 신선이 되고 싶은 것이냐?”
젊은 도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
공(武功)이든 법술(法術)이든, 도가(道家)의 공부를 하고 있는 사
람들치고 신선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던가? 다만 신선이 된
분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너무도 다른 세상의 사람들인 것만 같
아 ‘과연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고 궁금
할 뿐이었다.
세상에 홀로 남은 그에게 불로장생은, 먼저 간 가족들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 바라던 단 하나의 소원이기도 했다.
젊은 제자의 마을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승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옹이가 많은 고목은 결이 많아서 나무꾼의 톱이 소용없고, 또
너무 휘어서 목수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그래서 숲보다도 더 오
래 살아남게 되는 게지. 허허헛! 지금 네가 바라는 불로장생이란
바로 그 정도인 것 같구나. 어둠이 네 운명에 있으니 언젠가 네가
그것을 극복한다면 혹시모르지, 바라던 대로 신선이 될 수 있을
지도…一.”
마침내 매화가 모두 땅에 떨어져 내렸다.
공야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나 사부, 제자는 이렇게 옹이가 많은 나무가 되고 말았소.”
멍하게 서 있던 공야숙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쩝, 뭐야? 그런데 대체 나의 사부는 누구지?”
공야숙이 깊게 함몰된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기억이
오락가락하고 도통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분명 이 부서
진 머리의 흔적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자신
의 이름만 가끔씩 떠오를 뿐 왜 머리가 부서져야 했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조각은 과연 자신의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렇게 또렷한 정신도 조금 후면 온데간
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누구냐?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알 수도
있으련만.’
공야숙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텅 빈 기억들 사이
로 훌쩍 지나고 말았다.
잠시 후 멍하게 서 있던 공야숙의 신형이 검과 함께 하늘로 날
아올랐다.
“나는 누구지? 나는 정말 공야숙이라는 사람인가? 아니면 피에
굶주린 악마인가? 나는 누구냐! 아니지, 아무려면 어떠냐! 나는
나다! 우헤헤헷!”
검과 하나가 된 공야숙이 무공산 꼭대기로 가볍게 날아 올라갔
다.
언제부터인지 무공산은 강서성의 절대 금역으로 불리기 시작했
다. 무공산에 들어간 무림인치고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었지 때문
이다. 그렇다고 무공산 근처에서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
니다. 강서성의 무림인들은 조마조마한 가운데 그저 무공산의 공
포가 강서성 전체로 확산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경재학은 무관에서 출관한 이후에 가신(家臣)이자 무림맹의 총
관인 산전수전(山戰水戰) 목불인(木不忍)을 만났을뿐, 한동안 외
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 보고 무림맹의 사람들은 ‘과
연 맹주는 심기가 깊으시다’ 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맹주가 이
처럼 미묘한 시기에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천마후와 장염의 문
제’ 에 대해 차분히 대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에서는 장염이 구대문파 장문인보다 더 명성을 떨치고 있
는 시기이니 ‘맹주가 무림맹의 권위를 위해서도 쉽게 모습을 나
타내지 않는 것이좋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실제로 경재학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장염
과 천마후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 내면적인 이유는 세인들의 상상
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미 출관한 지 오 일이 넘었지만 경재학은 맹주의 관사에 칩
거한 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연공의 후유증
으로 보신(保身)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무검의 경지에 이른 경재학이 따로 보신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경재학에게는 단지 장염과 관계된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휴우,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녀석과는 타협점을 찾을 수가
없군’
그것이 며칠간 고심한 끝에 내린 경재학의 결론이었다. 재물이
나 권력에 미련이 없는 자가 자신에게 원한만 가득 품고 있으니
대체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타협이 불가능하다면 그를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가지 경재학이 무림을 지배해 온 법칙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년 전에 경세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던 녀석이
니…….’
경재학이 끙끙거리면서도 칩거를 깨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
유가 비로 이것이었다. 도무지 장염의 무공 수위를 예측할 수 없
었다. 이년 전에 마교 교주와 합공했으나 장염을 어쩌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무검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나 상대도 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장염은 자신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림맹으로 태연히 걸어 들어왔다. 무공에 대한 절
대적인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재학은 지난 오 일 간 쉬지 않고 장염의 무공과 자신의 무공
수위를 비료해 봤지만, 아직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
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에
처리해야 할 혈마사와 마교의 문제가 눈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
다. 서둘러 무림맹을 이끌고 이 불씨를 진화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구대문파에 의해서라도 자리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타
인에 의해 권좌를 내어준다는 것은 경재학에게 있어 죽으라는 말
과 다름없었다.
‘놈이 삼대문파 장문인과 손을 섞었으나 낭패를 본 것은 오히
려 장문인들이라고 했게다…….’
자신과 삼대문파 장문인들의 무공을 비교해 보았다. 지금이라면
자기도 그들 정도는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
신이 장염을 만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것
만으로는 부족했다. 장염과 자신은 그야말로 불공대천의 원수였기
때문이다.
경재학의 심사를 알 길 없는 목불인이 찾아왔다. 그는 요즘 아
침저녁으로 찾아와 경재학에게 무림맹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
고 있었다.
“맹주님, 아무래도 서둘러 회의를 주재하셔야겠습니다.”
경재학은 제법 심각한 표정의 목불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재학의 눈빛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보라는 뜻을 담고 있었
다. 가신 따위에게 어줍잖은 염려의 대상 따위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차 선발대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하였습니다. 일차 선발대의
대부분이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 혈마사를 따라 화
산파로 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선발대에 사파(邪派)가 섞여 있다는 보고는 이미 받았소.”
경재학이 짧게 말을 받았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
다는 뜻이 분명했다.
“최근에 멸문한 청성파의 생존자 가운데 현문(玄門)이라는 도
사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흑도방파에서 활동하던 사람인데, 황
금에 눈이 먼 동료들의 배신으로 죽을 뻔했었죠. 생사지경(生死之
境)을 헤매는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
강호에서 살다 보면 살고 죽는 게 다반사라 지금 저 얘기가 무
슨 의미를 가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 중요하다고 믿
고 있으니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리라. 경재학은 조
금씩 지루해지는 마음을 애써 달래야 했다.
“오늘 아침 그가 찾아와 청성파에서 강북제일마존 마광옥을 보
았노라고 말했습니다.”
늘어져 있던 경재학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경재학의 상체
가 목불인을 향해 기울어져 갔다.
경재학의 반응을 확인한 목불인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아무래도 마교가 혈마사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
다.”
지난 며칠 간 경재학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먹구름이
서서히 사라졌다. 혈마사의 행보 속에 마교의 수작이 섞여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름대로 대처할 방법이 있다. ‘혈마사의 힘이
그처럼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는 위로를 얻을 수 있으며, 이 기회
에 마교에 대한 적의(敵意)를 확실히 불태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무림맹의 사람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무림의
명문정파를 멸문시키고 있는 혈마사에 대해 무한한 신비와 공포
를 느끼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혈마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
룻밤에도 천 리를 이동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목불인의 보고
를 듣고 나니 혈마사와 마교의 행보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총관의 덕이 오늘 나에게 큰 힘이 되었구려. 오늘 오후에는 무
림의 형제들 앞에 다시 나서야겠소.”
경재학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 차 오르자 목불인도 덩달아 기분
이 좋아졌다. 정주의 천하제일가에서 주군을 따라 하남으로 나온
사람이 모두 열 명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자신처럼 주군의 얼
굴에 미소가 떠오르게 하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맹주님의 인덕(人德)이지요.”
경재학의 얼굴에 떠오른 만족스런 미소를 확인한 목불인이 읍
(揖)을 하고 물러났다.
목불인이 방에서 나가자 경재학은 곧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전신으로 몰려들었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 부으려나.’
아직은 빗방울이 내비치지 않았지만 조만간 제법 많은 비가 내
릴 것처럼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렇군, 이 년 전에도 이런 날씨였지.’
돌이켜 보니 당고립산맥의 이름없는 산중에서 장염과 처음 손
을 섞었을 때가 이랬다.
‘그날 폭우가 쏟아지지만 않았던들…….’
그랬다가 두고두고 뒤가 개운치 않은 일이 없었을 것이다. 천지
를 뒤덮은 먹구름과 앞을 내다보지 못할 만큼 쏟아 붓던 빗줄기.
그 바람에 장가촌 일당을 한 번에 일망타진하지 못했다. 어디 그
뿐이랴! 마교 교주와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염마저 놓치고 말
았다.
‘장소, 이놈! 감히 어수선한 틈에 남북지약(南北之約)을 내팽개
?단 말이지.’
이 년 전 청해성에서 헤어지며 강북 이남으로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장소는 혈마사로 분장하여 보란 듯이
강호 전역을 휘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어
차피 장소를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이 기회에 정파 무림인들을
규합하여 혈마사와 마교를 쓸어버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무림맹에 있는 장염과 천마후를 생각하면 지금 마교가
설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마교가 설치고 있다
는 것은 무림맹에서 천마후를 잡아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장염을 상대해야만 하는 경재학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와
도 같았다.
“하하핫- 하늘이 이처럼 나를 돕는데 어지 이루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경재학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숙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웃
음소리와 더불어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경재학은금세 굵어지는 빗방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요즘 들
어 부쩍 적적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른바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것인가.’
어언 일갑자(60세)를 넘긴 경재학에게는 아직 후사가 없었다.
그동안 무공과 무림 경영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 후회없이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건만, 이렇게 사정없이 비라
도 몰아치는 날이면 뜻밖에도 교하국의 공주가 떠오르곤 했다.
경재학이 문득 돌이켜 보니 자신의 인생에 있어 여자를 가까이
해 본 적이 있다면 오직 그때뿐이다.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그 이
후로 지금까지 주변에 여자란 없었다.
‘제법 표독스런 눈빛을 하고 있었지.’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군
거리기까지 했다. 어쩌면 바로 이 두근거림 때문에 아직 다른 여
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미 죽어버린 여자에게 무슨 미련이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경재학이 빗줄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공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들어선 경재학의 눈에 작고
섬세한 물방울은 선명하기만 했다. 이제는 사라진 교하국 공주의
눈동자처럼 말이다.
“사라져라!”
마음속에 들끓는 번민 때문일까? 경재학이 외마디 소리를 내지
르며 한 손을 휘젓자 거대한 돌개바람이 몰아쳐 갔다. 돌개바람은
거센 빗방울을 감싸 안고 하늘로 섯구쳐 어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순찰을 돌던 사람들의 입이 쩍 버어졌다.
저 멀리 맹주의 숙소 위로 한줄기 돌개바람이 끝없이 뻗어 올라
가며 빛방울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
이상으로 1장은 끝임니다
천사지인 2장 원천을 생각하라
경재학이 구대문파 장문인들에게 배첩을 날린 것은 그 해의 우
기()가 시작되던 6월 하순경이었다.
통보를 전해 받은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일찍 대회의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 한결같이 떠
오른 것은 기대와 호기심이었다. 천하제일인 불사신검 경재학이
드디어 오랜 침묵을 깨고 군웅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
는 것이다.
쏴아아!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회의 장소로 속속 모여들고 있을 해,장
염은 빗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경재학이 오랜 칩거를
깨고 오늘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처음 아미파 장문인의
연락을 받은 순간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던가! 경재학과 다시 만
날 날을 대비하여 오랜 기간 수련했다. 자신의 수련은 ‘복수’라는
말보다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당고랍산
맥에서의 결전 이후로 하루도 경재학을 잊은 적이 없었다.
경재학과의 만남은 장염과 장가촌 사람들에게 있어 인생 최대
의 전환기였다. 그리고 그 격동기를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은 사람
은 겨우 네 사람뿐이었다.
‘이 대협, 그리고 장 대협. 나는 오늘 경재학을 만납니다. ‘
오래도록 경재학을 곁에 두고 생활해서일까? 막상 경재학을 만
난다고 생각하자 깊은 원한만큼의 살의()가 생기지 않았다.
장염은 자신의 그런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그저 담담하다 못해 아
무 느낌이 없다고 할까? 경재학과의 만남을 앞루고 장염은 오래
도록 침묵했다.
영화는 오늘 장염이 무림맹주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전
해 들었다. 그녀는 ‘오늘 장 오라버니가 맹주를 만나고 나면 자유
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굳게 믿었다.
근래에 들어 장 오라버니의 가라앉은 표정을 보면 왠지 불안한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별다른 일이야 있겠는가. 자신이 결백하고,
장 오라버니를 돕고 있는 삼대문파 장문인들도 있다. 영화의 짧지
않은 강호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장염과 영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향이도 그런 점에서 적
잖게 안심하는 눈치였다.
“후후,화매,드디어 무림맹에서 떠나게 되는군요 비가 쏟아지
고 있다는 것만 빼면 그런대로 좋은 날씨이지요?”
영화는 향이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안심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향이는 그런 영화를 향해 밝게 웃어 보이고 주섬주섬 짐을 꾸
리기 시작했다.
‘향 언니, 지금 무얼 하고 계세요?”
영화가 의아하다는 듯 향이를 바라보았다. 향이가 옷가지들을
하나씩 들어 곱게 접고 있었다. 마치 멀리 떠나려는 사람같이 말
이다.
“장동생은 맹주로부터 양해를 얻는 즉시 이곳을 떠날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향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장 동생은 아무래도 이런 곳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거
든요 게다가·. 한 번 마음을 정하면 그 순간에 바람처럼 떠나가
고 말지요 장 동생은 그런 면에서 보면 무정()하기까지 하답
니 다. ”
영화가 곰곰이 돌이켜 보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장 오라버니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향 언니가 하는 말이라면 아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럼 저도 옷가지를 정리하도록 할게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작년 겨울 삼도회를 떠날 때에는 정말
경황이 없었답니다. ”
영화가 웃으며 ‘그때의 얘기를 해주세요’라고 하자 향이가 중
얼거렸다.
“작년 겨을 삼도회에 잠시 머물던 때의 일이에요.장 동생이 감
모(감기)에라도 걸렸던지 며칠 누운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느닷없이 ‘떠나자’고 하는 거예요.”
“어머, 그래요? 왜 그랬을까?”
“그건 저도 몰라요 다만, 그때의 장 동생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런 모습이었어요 마치 버림받은 남자처럼 어찌나 불쌍해 보이
던지‥‥ 후훗!”
“어머,혹시 그때 정말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던 걸까요?호호호”
사실 그 당시 장염이 쓰러진 것은 영화가 천마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상이 악화된 결과였지많 두 사람이 그런 사실까진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현재의 불안한 심경을 누르기 위해 지나
간 얘기로 웃고 떠들 뿐이었다.
대회의실에 장문인들이 모두 모였지만,누구 하나 선뜻 먼저 입
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무림맹은 창설 이래 처음으로 망망대해에
서 표류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 것인가?’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짧지 않은 침묵을 깨뜨린 것은 소림사의 장문인 원정 선사였다.
“아미타불, 맹주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니 성취가
실로 적지 않은 것 같소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이오. 폐관하는
자가 적지 않으나 원하는 것을 얻고 다시 나오는 자가 몇이나 되
겠소이까?그것도 이처럼 짧은 시간에 말이오.”
그제야 하나둘씩 경재학의 무공 성취를 축하하는 말들이 오가
기 시작했다.
경재학은 그들의 말에 일일이 포권하며 겸양의 인사를 던져 주
었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켠으로는 누구든지 어서 다음 말들을 꺼
내주기를 바랬다.
‘자,자,서로 체면은 이제 그만 차리고 어서 당면한 문제를 꺼
내놓도록 하시구려.’
그러나 경재학의 기대와 달리 듣고 싫은 얘기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장문인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당,아미,공
동, 화산파는 이래저래 관련된 문제라 조심스러웠고,상대적으로
그들의 반대 입장에 서게 된 곤륜,점창,청성,종남파는 무당파를
비롯한 사대문파의 눈치를 어느 정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어색한 대화가 오간 뒤였다. 마침내 신룡진인이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이미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맹주께서 폐관하신 동안 실로
적지 않은 일즐이 있었소이다. ”
신룡진인이 늘 어울려 다니던 삼대문파 장문인들에게로 잠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맹주가 폐관하기 전까지 저 삼대문파
장문인들과 어울려 신진사대문파라고 불리웠으나 이제 신진이라
는 말은 쏙 들어갔다. 변방의 외진 곳에 자리한 곤륜파를 제외하
고는 삼 파가 괴멸당하고 말았으니,어디에서 전날의 위세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인가!
경재학의 눈이 신룡진인을 따라 장문인들에게로 돌아왔다. 경재
학도 아까부터 그들의 모습이 이전만 못하다는 젓을 피부로 느끼
고 있었다. 혈기 왕성하던 청성파의 파운신권은 착 가라앉은 표정
으로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으며,종남파의 현천검객은 계속해
서 멍한표정으로 시선을 허공에 걸어두고 있었다. 그나마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점창파의 영천상인이 조금 특이하
다고 할까?
‘그러고 보니 영천상인의 검술이 화경()에 접어든 것 같다
고 했던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숫자의 고수는 정국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재학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
기로 했다.
‘게다가 저런 사람이 한둘은 있어야무료하지 않은 법이지.’
사실 너무 많은 절정고수는 다스리는 데 어려움이 따르지만 적
당한 숫자는 맹주의 위엄에 힘을 실어준다. 저들에게는 아주 가끔
씩 자신이 그들보다 더옥 고수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면 되는
것이다.
경재학은 마주쳐 오는 영천상인의 눈빛이 이전에 비해 조금 더
불손하게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문파가 망했다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 그를 자극하는지도 모르
지.’
신룡진인은 경재학이 침중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자 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
“혈마사에 의해 공동,청성,점창,종남파가 멸문당했소. 그들은
지금 화산파를 향하고 있다고 하오. 그러나 점창파를 습격했던 한
떼의 혈마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오리무중이오. 이런 시국이
라면 구대문파가 하나로 뭉쳐도 시원치 않을 형국인데, 지금 무림
맹은 한두 사람에 의해 내부 분열이 극에 달하여 있소이다. 우리
모두는 그동안 맹주께서 출관하여 사태를 수습해 주시기만 기다
려 왔소. 이제 맹주께서 혈마사에게 문하생들을 잃은 사대문파의
원한을 갚아주시고,동도들의 갈등을 해소하여 주시길 바라는 바
이오.”
아미파와 공동파 장문인의 얼굴 근육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러
나 아직은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조금 더 참아야 한다. 섣부른
발언으로 맹주마저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재학은 공동파와 아미파 장문인의 표정을 힐끔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들은 어디에서 장염을 알게 되었을까?장염은 사회적인
신분이 지극히 낮은 자이니,구대문파 장문인과 교분을 쌓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터인데,그가 알기로 장염에게 그
정도의 시간은 없었다.
‘역시 기묘한 노릇이야‥‥‥‥’
장염이라는 인간을 떠올릴 때마다 기이하다는 인상을 떨칠 수
가 없었다. 그의 상식을 초월하는 무공과 언행이란! 게다가 이제
는 무림을 좌우하고 있는 구대문파 장문인들 중에 세 명이나 그
를 알고 지내는 판국이다. 구대문파의 장문이라는 존재가 재물이
나 명예를 따라 교분을 맺는 자들이 아니니, 평생을 가도 좀처럼
사귀기 어려을 터인데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그놈의 운세도 지독히 좋은 거라고 인정해 줄밖에‥‥‥’
그러나 그 좋은 운세도 자신을 만났으니 이제 끝이 보인 것이
나 다름없다.
“본 맹주도 출관하자마자 수하를 통해 지난 일들을 모두 보고
받았소 폐관한 동안에 두 개 문파가 더 멸문을 당할 줄은 생각지
도 못했소이다. 하나 혈마사를 눈앞에 두고도 폐관할 수밖에 없었
던 것은 그들의 무공을 상대하기 위함이었으니 여러분들도 이해
해 주시리라 믿소.”
그러면서도 내심 ‘뭐,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었다’라고 중얼거리던 경재학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혈마사와 무림맹의 내분은 어찌 보면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
니,오늘 우리의 결정에 따라 무림의 모든 분쟁은 해결의 실마리
가 보일 것이오.”
경재학의 말이 끝나자 구대문파 장문인들 사이에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그것은 맹주가 분명히 혈마사와 무림맹의 분쟁이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정 선사가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빈승은 맹주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구려. 맹주의 고견()
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주시기를 바라오.”
잠시 뜸을 들이던 경재학이 대답했다.
“흠‥‥ 청성파의 멸문 당시 생존자가 이십여 명인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 그중 한 생존자가 그날 강북제일마존을 목격했다고
하오.”
구대문파 장문인들 입에서 일제히 ‘아!’ 하는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혈마사의 행로를 곰곰이 따져 보다가 마
침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소 무림에는 현재 두 가
지 혈로()가 형성되어 있소이다. 하나는 공동파에서 출발하여
종남파, 그리고 화산파로 이어지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점창파와
청성파를 잇고 있소 현재 무림맹에서 파견한 선발대는 전자(
)를 추적하고 있는데,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공동파와 종남파를
궤멸시킨 무리는 혈마사의 븐진이 분명하오.그러나 생존자의 증
언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후자()는 마교의 작전 세
력 같소.”
원정 선사가 황급히 물었다.
“지금 맹주의 말씀은‥‥‥?”
“그렇소이다. 마교가 혈마사로 흔란한 틈을 노려 정사대전(
)을 시작한 것 같소.”
경재학의 말이 끝나자 실내는 삽시간에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흥분한 고함 소리로 가득 찼다. 청성파 장문인 파운신권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저런 무도()한 자들 같으니! 외세가 중원을 쉽쓸고 있는
마당에 그 따위 얄팍한 수작을 벌이다니‥‥ 참으로 사악한 무리들
이로다!”
설마 하니 마교의 잔당에 의해 빈집이 털릴 줄이야 누가 상상
이라도 했단 말인가! 한편으로 생각하면 진작부터 사파를 규합하
고 있던 마교가 언제까지라도 잠잠히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게
잘못이다.
‘장차 조사들을 어찌 뵈을 것인가!’
자리에 털색 주저앉는 파운신권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혈마사에게 당한 것과 마교에게 당한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
다. 혈마사는 세외의 가장 강한 세력 중의 하나이며 중원 전역을
쉽쓸고 있는 항거하지 못할 세력이다. 그러나 마교는 한때 응성했
으나 지금은 난주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는 몰락한 사파제일의 세
력일 뿐이다.
수치와 절망에 휘싸인 파운신권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장차 조사는 조사고,지금 당장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 앞에 면목
이 서질 않았다. 발톱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던 사파의 무리
에게 크게 당했다. 재물은 물론 제자와 명예까지 잃었으니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한편 점창파 장문인 영천상인의 눈꼬리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
다. 겨우 마교 따위에게 문파가 멸문을 당한 것이다. 점창파의 고
수들 대부분이 무림맹에 와 있었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남아 있는
고수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낱 사파의 무리들에게
당해 돌아갈 집도 없게 된 것이다.
‘맹주께서는 이 문제를 어찌 풀어 나가려 하시오?”
화산파 장문인 상유천의 질문이 떨어지자 좌중의 소란은 다시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맹주는 이 모든 사태를 풀어 나갈 방법
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마제마()의 방법이 어떤가 싶소만.”
중인들이 바라보자 경재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무림맹에는 마교 교주의 부인인 천마후()가 머무
르고 있소 천마후를 볼모로 한다면 당분간 마교의 발호를 저지
할 수도 있을 것이오. 영원히는 아니라 해도 그들의 발을 잠시는
묶어둘 수 있다고 보오. 그동안 혈마사의 라마승들을 처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마교의 세력들을 하나씩 처리하면 결국 마교는 스스
로 자멸하고 말 것이오.”
이미 장염과 영화의 관계를 알고 있는 아미파,공동파, 화산파
장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맹주의 말하는 분위기를 볼 때 절대
로 영화와 장염의 문제가 바라던 대로 풀릴 기미가 엿보이지 않
았기 때문이다.
파진 사태가 조심스럽게 운을 메었다.
‘맹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미파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영호화 소저는 마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맹주께
서 그녀를 천마후로 단정 짓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파진 사태의 말 한마디로 삽시간에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갔다.
드디어 구대문파 장문인이 그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도
래한 것이다. 장염의 등장으로 인해 복잡하게 꼬여 버린 천마후,
혹은 영호화의 문제였다.
경재학의 눈 깊숙한 곳에서 순간적으로 섬전 같은 안광이 번득
였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으나 저도 모르게
잠시 긴장하고 만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영호화 소저가 천마후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실은 오직 하늘만이 알 수 있을 것이외다. ”
“그 무슨 말씀이시오! 맹주께서는 말씀을 가려서 해야 할 줄로
아오!”
당장에 공동파 장문인 광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제부터인
지 모르게 무림맹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던 공동파였다. 자신
들의 푸대접도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어쩐지 약
한 자에게 마음이 치우쳐 가던 중이다. 하물며 장염과 관계된 사
람이 욕을 당하는 마당이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재학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미파와 공동파가 장
염에게 기울어져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조금 돌아가는 수밖에‥‥‥‥’
경재학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아미파와 공동파 장문인께 죄송하게 됐소이다. 하나 나도 무림
맹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라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
음을 알아주시길 바라오.개방에서 올라온 첩보에 의하면 호북성
에서는 이미 마교가 사파를 규합하여 정파의 무관()을 하나
씩 없애고 있다고 하오.”
경재학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태도는 정말로 하고 싶
지 않은 말을 억지로 하고 있는 듯해서 중인()은 자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특별히 무당파와 풍림장의 주변에서는 아주 작은 분쟁
도 일어나지 않고 있소 심지어 혈전 중에라도 무당파의 고수나
풍림장의 고수가 등장하면 사파가 물러간다고 하는 소문이 있소
현재 사파와 인접한 정파의 무관에서는 무당파와 풍림장의 고수
를 초빙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 형편이오 그런 점으로 볼
때 영호화가 천마후가 아니라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오. 설혹 그녀가 천마후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교에서 이처럼
노골적으로 영호화 소저를 원하니,어찌 그녀의 비중이 작다고 하
겠소이까?”
대번에 파운신권의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명문정파가 멸문을 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아직도 피아()
를 구분하지 못하겠소이까!”
마교에 의해 멸문한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점창파의 영천상인
도 한마디 거들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사파와 관련된 사람은 무림맹에 발붙이
고 있기가 어려웠소.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는 한두 사람의 고수로
말미암아 사파와 어울리는 게 오히려 미덕이 되어버렸으니, 참으
로 말세요.더구나 이전보다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정파의 멸문이
줄을 잇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파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변하였
으니, 이런 기사()가 또 어디 있단 말이외까! 멸문당한 무림
동도를 생각해서라도 스스로 반성해야 할 줄로 아오.”
영천상인의 말은 그런대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
니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사파라면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하지 못
했다.
어디 그뿐이랴? 정파의 신진 고수들은 강호에 출두할 때마다
사파 거두들의 목을 베러갔으며,그것은 명문의 전통이나 다름없
었다. 그러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사파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천상인은 그런 정파인의 변화 때문에 마교 같은 사파가 다시
중흥기를 맞고 있는 것미라고 믿고 있었고, 그의 말은 설득력있게
좌중에 전해졌다.
멸문당한 문파의 장문인들이 소리 높여 대의()를 외치자,
그만 파진 사태와 광료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이 침묵하자 경재학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특별히 반대하지 않으신다면 천마후를 장차 마교와
의 협상을 위해 모셔두고자 하오만.”
파진 사태와 광료가 착찹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
서 반대했다가는 정말로 저 파운신권이나 영천상인과 같은 사람
과는 원수가 되고 말 분위기였다.
결국 경재학은 무림맹의 이름으로 천마후를 볼모로 잡아두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장염이라는 고수가 천마후를 데리고 나가려 하는 마당이니, 맹
주께서는 이 일을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시오?”
곤륜파의 신룡진인은 아무래도 장염에게 맺힌 게 많은 사람이
라 단번에 장염의 일을 들먹거렸다. 이미 영호화는 공식적으로 천
마후가 되어버렸으니, 장염도 무림맹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장염이 눈엣가시 같았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경재학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가 끝내 천마후를 데리고 나가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그의
진정 또한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니겠소?무림의 형세를 모르는
바가 아니라면, 지금 무림맹에 천마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알
테니 말이외다. ”
신룡진인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우선은 그를 불러 아직도 천마후와 더불어 무림맹을 떠나려
하는가를 묻고,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소?”
신룡진인으로서는 장염이 얼마나 천마후에 연연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한 수로 장염을 붙들어 맬 수 있다고 믿었
다.
경재학은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바이니 사양할
리가 없다.
“진인()의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친 바가 없으니, 또 다른
의견이 없다면 이 문제는 그리하도록 합시다. ”
다른 사람들이 한쪽으로 치우친 바가 없다는 경재학의 말에 토
를 달 리가 없다. 파진 사태와 광료만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
다는 표정이었으나, 딱히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당파의 춘양진인은 지금까지 영호화에 대해 깊이 관계치 않
으려 노력하던 중이라, 장염이란 자에 의해 부풀려진 작금의 사태
에 당황할 뿐 다른 의견을 개진할 여유가 없었다.
경재학이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삼개문파의 장
문인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장염,네놈이 어디까지 버터낼 수 있겠느냐.’
스스로 생각해도 마교와 천마후와 장염을 한데 묶은 것이 묘한
한 수였다고 생각한 경재학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들의 이견이 없으시니 장염이라는 고수를 이 자리에 청
하도록 하겠소이다. ”
말을 마친 경재학이 배석해 있던 소림사의 고정 선사(
)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선사께서 영빈관에 가셔서 장염이라는 분을 모셔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
고정 선사가 일수 합장으로 예를 표한 뒤 조용히 물러났다.
경재학의 속사정을 모르는 잗문인들은 일단 맹주가 장염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정 선사는 소림사의 장
로인 동시에 무림맹의 호법이었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파진 사태와 광료의 얼굴도 조금씩 풀어졌
다. 맹주가 다른 일반 위사들 대신 호법을 직접 보냈다는 것은 장
염에게 소흘히 대하지 않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영빈관의 숙소에서 깊은 호흡에 잠겨 있던 장염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는가?’
자신에게 손님이 찾아오고 있다. 장염이 좌선하고 있던 자리에
서 서서히 일어섰다. 은원의 고리를 풀기 위해서 오랜 시간 준비
해 왔다. 그 순간이 오면 이처럼 담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
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염이 방문을 열고 대청으로 걸어나갔다. 빗소리는 더욱 거세
게 들려왔지만 마음은 고요했다. 장염은 대청 한구석에 말리고 있
던 도롱이를 다시 걸치고 죽립을 깊게 눌러썼다.
쏴아아아!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은 어두웠다. 짙은 어둠 속에서 지면
()을 때리는 빗방을 소리가 요란하기만 했다.
어둠을 뚫고 몇 개의 사람 그림자가 다가왔다.
고정 선사는 몇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영빈관 앞에 이르렀다.
비록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런 일이라면 마다하고 싶지 않
았다. 그가 안내를 해야 하는 사람은 당금 무림의 최대 신비인이
라는 장염이다.
강풍을 동반한 폭우라 기름 먹인 고급 피풍의()로 비를
막았지만 이미 옷은 다 젖어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움직이기가 불편하구나.’
혼자서 중얼거리며 영빈관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걸어나오
고 있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죽립을 슬쩍 들어 올리고 자
세히 바라보니 장염이다. 상대를 확인한 고정 선사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장염이 나지막이 말했다.
“가시지요!”
고정 선사를 뒤로하고 장염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장염의
뒷모습은 빗줄기에 가려 금방 흐릿해졌다.
고정 선사가 재빨리 장염의 뒤로 따라붙었다.
‘길 안내를 하려 했는데 도리어 그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구나.’
어쩌다 보니 주객()이 전도되었지만 고정 선사는 크게 개
의치 않았다. 장염이라는 사람의 기도는 역시 범상한 것이 아니었
다. 그의 기도는 참으로 독특해서 한번 접하면 좀처럼 잊기 어려
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마치 몰아치는 빗줄기 같구나.’
실제로 앞서 가는 장염의 신형은 자세히 살펴도 빗줄기와 구분
이 되지 않아 고정 선사는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궈
고 장염이 자기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서둘러 따라붙었다.
쏴아아아!
그렇지 않아도 쏟아지는 빗줄기로 앞이 보이질 않는 판국에,장
염마저 비와구분되지 않으니 고정 선사는 죽을 맛이었다.
“허어, 이런‥‥‥‥”
결국 고정 선사는 장염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빗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동행한 위사들의 권고에 따라 대회의실로
가보기로 했다. 위사들이 ‘장염이라는 사람도 무림맹에서 제법 오
래 머물렀으니 그 정도쯤은 알아서 찾아을 것이다’라고 했기 때
문이다.
위사들의 추측은 옳았다. 고정 선사가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장
염이 회의가 열리고 있는 창룡전()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
고 있었다.
도착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난 듯,창룡전 한 켠에는 그가 벗어놓
은 도롱이와 죽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시주, 실로 죄송하게 됐소이다. 빈승이 뒤를 따라오다가 그만
시주가 다른 길로 접어든 줄 알고‥‥‥‥”
장염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길을 따라 걸었어야 하는 것인데, 비를 따라간 저의 잘못이지
요.”
고정 선사가 머슥한 표정으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소림사는 선
종() 계열이다. 고정 선사도 그간 누구보다 많은 화두()
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장염의 말을
들었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비를 따라갔다니‥‥‥?’
정말 기묘한사람이었다. 잠시 장염이 남긴 말의 의미를 생각하
던 고정 선사는 시간이 적잖게 지체된 것을 깨달았다. 장염의 뒤
를 따라오느라 시간과 정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조금 더 개인
적으로 장염이라는 사람과 말을 나눠보고 싶은 욕심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지금은 무림맹의 호법으로서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장염이라는 사내를 바라보니, 다시 눈길을 먼
빗속으로 던져 두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눈으로 모든 빗방울을
걸러내려는 듯한지라 고정 선사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미미하게 머리를 흔들던 고정 선사가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문으로 손을 가져갔다.
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아니, 어쩌면 소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낙 빗소리가 컸던 탓에 문이 열리는 소리는 미처 고정
선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장염이 들어가자 파진 사태와 광료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
이했다.
“장 소협, 어서 오시구려.”
“장 사부, 평안하셨습니까?”
장염이 두 사람에게 읍을 해 보이고 몇 걸음 내디뎠다.
차박. 차박.
그 물에 젖은 발자국 소리에 중인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뜻밖에
도 장염의 온몸은 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의 젖은 발이 바닥
에 닿을 때마다 사람들의 눈은 빛나거나 더 깊이 가라앉았다.
장염과 비무를 벌였던 세 장문인은 ‘혹시 저자의 내공이 소실
된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장염의 움직임을 날카롬게 살폈다. 원
기를 상실한 호랑이는 개에게도 물려 죽는다. 그러나 장염의 아래
위를 살폈어도 별다른 이상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세 사람의
얼굴에 다시 특유의 무관심한 표정이 떠올랐다.
장염의 발걸음은 원형 탁자에 이르러서 멈추어졌다. 그의 뒤를
따르던 물줄기도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비에 흠뻑 젖은
장염이 탁자 곁에 서서 조용히 좌우를 살피자,분위기는 금방 어
색하게 가라앉았다. 거대한 원형의 탁자에 십여 명이 둘러앉았는
데, 경재학은 정면을 바라보며 여유있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역시 지저분한 자로다. 이런 악천후()에 스스로 비 맞기
를 자처하여 방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다니.’
처음부터 장염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던 청성파의 장문인 파
운신권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장염이 사천성의 요리사 출신
이라는 것을 알았던 순간부터 형성되어 온 선입견은,그의 놀라운
무공을 견식한 뒤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장염의 시선이 무심히 원형의 탁자를 한 바퀴 둘러볼 때,경재
학의 우측에 앉아 있던 원정 선사가 눈운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
넸다.
“장 시주,오랜만에 뵙는 것 같소 우중()에 오시라 해서 번
거롭게 해드렸구려.”
장염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덕분에 물을 잊었으니 어찌 번거롭다고 하겠습니까?”
원정 선사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선재()로다! 시주께서 이미 그와 같은 경지에 다달았으니
실로 무림의 홍복이외다. ”
고기는 물속에서 헤엄치지만 물을 잊어버리고 새는 바람을 타
고 날지만 바람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미 장염이라는 젊은 기인
이 물질의 이치를 저처럼 깊이 깨달았으니,어찌 천지조화(
)가 멀다고 하겠는가! 원정 선사의 생각으로는 이처럼 무림이
흉흉한 때에 보기 드문 고수가 곁에 있다는 것이 듬직할 뿐이었
다.
경재학의 눈빛이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듣고 보니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회의실로 들어온 것도 심득()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장염이니 그가 특
별히 연공을 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미 ‘도
()가 깊어 절로 몸이 따라가는 경지’라는 것인데,초췌해 보이
는 몰골을 보며 ‘또다시 문제가 생겼는가?’ 싶어 기뻐했던 것이
허탈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너의 경지를 알 수 없으니,내가 오늘 너를 시
험해 보리라.’
경재학으로서는 장염의 경지에 따라 자신의 생사가 좌우되는
마당이니 절로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모질게 마음을 잡아먹은
경재학이 두 손의 깍지를 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 뵙겠소 장 소협의 대명()을 들은 지 오래라 초면(
)인데도 익숙하게 느껴지는구려.”
장염의 얼굴에 흐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저 마두()가 오늘
높은 곳에 앉아 자신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음성을 들으
니 서서히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당고랍산맥에서 죽어간 형
제들의 원혼을 생각하면 당장 달려들어 그의 견고한 목줄기를 움
켜쥐어도 모자란 감이 있다.
‘맹주의 두 눈을 보니 어디선가 뵌 듯한 모습인데,그곳에 앉아
계시니 오히려 낯설군요.”
과거 당고랍산맥에서 복면을 하고 있던 것에 대한 비웃음이 분
명했다. 의외로 장염의 대답이 담담하자 놀란 것은 경재학이었다.
그는 장염이 흥분하여 자신에게 덤벼들 줄 알았다. 아니, 설사 대
놓고 공격하지 않는다 해도 적대감 정도는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장염은 기억이라도 상실한 사람처럼 멀뚱거리며 자
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장염의 태도는 상당히 불경스러운 것이어서 그에
게 적대적이던 사대문파 장문인들의 공분()을 사기에는 충분
했다. 사대문파 장문인의 얼굴이 경직되자 원정 선사가 재빨리 입
을 열었다.
“허헛! 두 분이 마침 서로가 뵌 듯한 인상이시라니 더욱 잘되었
소이다. 맹주와 장 소협이야말로 정파의 기등들이 아니시오. 두 분
의 뜻이 모아진다면 정파 무림은 큰 힘을 얻은 것이외다.”
경재학이 목소리를 깔고 점잖게 말을 받았다.
“선사()의 말씀이 옳소이다. 장 소협과 같은 신진 고수를
뵈니 과연 옛말에 틀린 것이 없구려.장 소협, 강물은 언제나 새롭
게 흐른다고 하오. 내 오늘 장 소협의 한 손을 빌려 무림의 위기
를 해결해야겠소이다.”
장염이 문득 경재학을 바라보니 그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런 천연덕스러옴이라니! 그에게서는 일
말의 수치심도 느낄 수 없었다. 경재학은 지금 ‘강물은 언제나 새
롭게 흐른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자는 건가? 과거를 잊고 자신을
도와달라는 것인가?
그러나 그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지나간 역사를
바로잡지 알고서는 현재도,미래도 없다. 언제나오늘의 필요에 따
라 적절하게 과거를 눈감아준다면 세상에 또 다른 경재학이 나오
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선인()들이 이르기를 ‘한 모금의 물을 마실 때에도 그것
의 원천을 생각하라’고 했소.”
주변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맹주의 노골
적인 도움의 요청에 장염은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말로 화답했
다. 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가?
경재학의 눈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일순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
다. 빛무리는 장염의 전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갔다.
주변 사람들은 맹주의 눈빛이 칼날 같구나’ 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장염은 그 순간 실제로 경재학이 내뿜는 무형의 검기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장염의 몸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경재학은 당황하여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좌중의 시선이 경
재학을 따라 우측으로 향했다.
쏴아아아!
여전히 세찬 빗줄기가 경재학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놈! 어느 틈에 이형환위()라니.’
장염의 신형이 너무도 빨라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했으나,
경재학은 자신의 공력이 허공을 치고 돌아오는 그 섬뜩한 감각에
치를 떨어야 했다. 장염의 공력은 과연 전보다 더욱 정심해져 있
었다.
경재학이 어색한 헛기침을 몇 번 터뜨렸다.
“험,험,그건 그렇고,장소협께서 천마후를 데리고 나가려 하신
다고 들었소이다만.”
장염의 눈 깊숙한 곳에 서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짧
은 순간이었지만 그 차가움이 얼마나 깊었던지 곁에서 지켜보던
원정 선사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암울한 미래에의 예고
와도 같은 것이었다.
‘과연 타협점은 없는 것인가!’
원정 선사가 안타까운 눈으로 장염과 맹주를 바라보았다. 자신
은 장염이 영호화 소저를 데리고 나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사()라는 것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지금은 그저 두 사
람이 파국을 향해 치닫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천마후를 데리고 나갈 뜻이 없소.”
장염와 음성은 어느 틈에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원정 선사가 제일 먼저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맹주의
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경재학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소협의 생각이 그령다면 참으로 다행이구려.”
사람들은 맹주의 음성 속에 깃든 빈정거림을 엿보았다. 그러고
보니 맹주는 아까부터 저 장염을 도발하고 있었다. 사대문파 장문
인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해 갔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불사신검
경재학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늘한 음성이 경재학의 말을 뒤따랐다.
“그대의 생각이 옳소 나는 먼저 풍림장의 영호화 소저를 데리
고 나갈 것이외다. ”
“……”
실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자 회의실은 굵은
빗소리로 가득 찼다.
쏴아아아!
장염이 어느새 맹주를 ‘그대’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영호화를 데리고 나가겠다’는 선언에 신경을 쓰느라 미처 염두
에 두지 않았다.
장염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소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고 보오.”
장염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이형환위인가!’
경재학은 이미 장염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폭우() 중에 장염을 놓친 경험이 있다. 그러나 오늘은 하늘의
도움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자신은 오늘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
를 해두었다.
“장 소협,서두를 것 없소. 애석하게도 천마후는 영빈관에 없으
니 말이오.”
장염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에 시선을고정한채 되물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소?”
장문인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느라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어느 틈에 맹주가 천마후를 빼돌렸단 말인가? 과연 맹주의 정치
적인 감각은 탁월한 것이었다.
“천마후는 지금 이곳에 있소.”
말을 마친 경재학이 손뼉을 두 번 쳤다.
짝! 짝!
그것이 신호였을까? 안쪽으로 나 있던 작은 문이 빼꼼히 열리
며 영호화와 향이가 몇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섰다. 두 사람
은 사태를 어느 정도 인식했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장염을 바라보
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두 사람의 혈도를 제압해 놓았소이다.”
장염은 두 사람과의 거리와 출구를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다.
‘두 사람이면 조금 어렵겠지만, 시도는 해볼 만하다.’
그런 장염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경재학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셋을 모두 잡지는 못하오만, 확실히 반 쪽은 잡을 수 있
소.”
그 순간 영화와 향이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일
어났다. 기운은 차갑게 두 사람의 치마를 횝쓸고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했지만, 장염은 그 속
에서 검기를 느꼈다.
처음 자신에게 쏘아져 왔던 바로 그 무형의 검기였다. 사람 반
쪽을 잡아두겠다니, 결국 무검지경()의 고수가 사람 하나
를 죽이겠다고 암시한 것이다.
‘비열한 자.’
저 두 사람을 무사히 데리고 나가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벗어
난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
난처한 표정의 장염을 향해 경재학이 말했다.
“장 소협의 젊음과 기개가 부럽기만 하오. 하나 세상은 나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오. 우리가 천마후를 모시고 있어야 하
는 까닭을 아시오? 지금 마교가 혈마사와 함께 강호에서 분탕질
을 치고 있소. 한데 묘하게도 그들이 무당파와 풍림장만은 건드리
지 않으니 어찌 그 배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들이 저토
록 천마후를 공경하고 있으니, 차후에 벌어질 정사대전을 대비해
서라도 천마후를 무림맹에 모셔두어야 하는 것이라오.”
“연약한 여자를 방패로 삼으려 하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오.”
경재학이 장염의 빈정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말했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지 오래요.”
“흥!”
장염의 코웃음과 동시에 파운신권의 노호()가 터져 나왔다.
“저런 발칙한 자 같으니라구! 맹주 앞에서 오만방자함이 분에
넘치는구나!”
경재학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하나 내게도 한 가지 방도가 있는데, 이것은 그대의 마음에도
맞을 것이오.”
장염의 냉랭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대의 방도는 들어보지 않아도 신묘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겠소. 아녀자들을 볼모로 잡다니, 그 수단이 범인()의 상
리()를 깨는 바요. 그 정도면 듣지 않아도 충분히 그 깊이를
알겠소. 이미 상황으로 보아 나는 따르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보
니 그대는 이제 그 방법이나 말해 보시구려.”
파진 사태와 광료는 이처럼 신랄하게 말하는 장염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장염의 잔잔한 말속에서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분노
를 느낄 수 있었다.
‘아미타불‥‥‥‥’
파진 사태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나 한 번 뛰기 시작한 가
슴은 좀체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맹주가 계획한 이번의
일은 정파의 지존답지 않은 성급한 것이었다.
무엇이 불사신검 경재학으로 하여금 저토록 정당하지 못한 수
법을 동원하게 했을까?
‘혈마사나 마교 때문인가?’
그러나 여자의 직감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
었다. 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선문답 같은 대화 속에 답이 있으련
만, 애석하게도 그것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경재학의 커다란 음성이 대전을 울렸다.
“간단하오. 그대가 무림맹을 도와 혈마사와 마교를 막아낸다면,
무림맹은 차후로 천마후의 일로는 그대들의 발목을 잡지 않겠소.
나는 그것이 천마후가 사파와 연루되어 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
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소.”
대전에 앉아 있던 장문인들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것
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장염과 같은 절대고수가 무림맹과 함께
움직여 준다면 실()보다 득()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장염과
같은 고수와는 적이 되고 싶지 않다’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장염을 누구보다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파운신권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고 말고’를 연발했다. 장염과 같은 고수의 도움을
받게 되어도 좋지만, 함께 싸우다 보면 훗날 그와는 싸울 일도 없
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시비가 일어도 자기 편에서 참으면 그
뿐이다. 명망있는 대문파가 개인과 다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
나 생사를 함께한 동지였다면 더 더욱 그러하다.
‘암,그때 가서는 무조건 양보해도 오히려 문파의 덕이 되는 게
지.’
그렇게 파운신권이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을 때였다. 잠
시 동안 침묵하던 장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어진 업이 당장에는 안 보이나 그늘에 숨어 있어 그를 따른
다고 했소. 나의 강호 생활이 일천하여 무림을 위해 우선 막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소만.”
장염이 말을 끊고 경재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무림의
혼란과 경재학의 위선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눈앞에 놓여 있으니, 오늘은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경재학이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핫! 장 소협이 무림을 위해 용단()을 내렸으니 참으
로 기쁜 날이외다. 이런 날은 술이라도 한잔 나누어야 하질 않겠
소?”
‘술이라‥‥‥’
장염이 문득 주변의 냉랭한 얼굴을 둘러본 후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6-2
제 삼 장
새가 날면 깃이 떨어진다
대기()는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 모든 것이 눅눅했다. 무
공산 정상의 젖은 땅 위에 한 사람이 누워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먹구름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 속의 안개가 조금 걷히는가 싶더니, 오늘은 ‘그를 죽여
라!’ 하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죽이라니, 자신이
죽여야 할 그는 대체 누구일까?
나는‥‥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가 누구인지는 궁금했지만 공야숙은’무공산을 떠나 그를 찾
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를 죽여야 한다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면,본능은 무공산에서 떠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결국 공
야숙은 무공산을 떠돌아다니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른손으로 함몰된 뒤통수를 쓰다듬어 보았다. 왠지 그를 죽여
야 한다는 소리가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공야
숙은 어쩌면 그가 자신의 머리를 부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의 머리를 부수었던 것일
까?
‘원수‥‥‥?’
으드드득!
공야숙이 모질게 이를 갈아 붙였지만 살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끊임없는 죽음에의 갈망인데, 이
상하게도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원수’라는 어색한 단어를 통해
충동적으로 살기를 끌어올려 보알지만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미 모든 기억이 사라진 그였다.
“우헤헤헷!”
한동안 뒤틀린 웃음을 터뜨리던 공야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섰다. 옷이 젖어 오돌오돌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한기()를
느낀 공야숙이 철검을 뽑아 들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검끝에서
피어난 매화가 사방으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비산()하던 매화
는 얼마 뒤 공야숙의 주변으로 떨어져 내렸다.
공야숙이 입가로 흐르는 침을 옷깃으로 쓱 문지른 뒤 매화 사
이로 달려갔다. 언제나 매화를 볼 때면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
한다. 오늘도 매화 사이로 철검을 밀어 넣으며 공야숙의 검무(
)가 시작되었다.
“도()는 음양()의 큰 순리에 따르며!”
파팟!
철검 끝에서 매화 열두 송이가 피어 오르자 공야숙은 매화를
밟으며 허공으로 도약했다.
‘때에 따라 움직이고!”
파파팟!
열두 송이 매화 위로 다시 열두 송이가 겹쳐 올랐고,공야숙의
발이 그 위를 타고 올라섰다.
“항상 사물에 응하여 변화한다. ”
파파파팟!
그 위에 또다시 매화 열두 송이가 피어 오르자 삽시간에 사방
은 서른여섯 송이의 매화로 가득 찼다.
공야숙은 구름 속에서 매화 서른여섯 송이를 발으며 멋쩍은 웃
음을 흘렸다.
‘지금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지금까지 떠들어댄 말은 모두 무슨 뜻일까? 자신의 입으로 뭐
라고 소리를 쳤지만,그것은 단지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일 뿐이
다. 그렇지만 소리 지를 때마다 마음이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져
왔다. 공야숙은 고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헤헷!”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공중을 주유하던 공야숙의 몸이 마침
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땅과 바위와 나뭇등걸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며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으허허헛!”
낙양성의 서쪽 관도를 따라 내려가면 소화촌()이 나온다.
소화촌과 낙양성을 잇는 관도에 허름한 동악묘()가 있는데,
허탈한웃음소리는그중의 한곳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보거라,소걸.너는 타구봉법(:개를
두드리는 봉법)을 지난 삼 일 동안 단 하나밖에 익히지 못했다는
것이냐?”
그는 개방의 대장로 구개음하였다.
구개음하 앞에서 왠지 자신없어 보이는 얼굴의 소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일이‥‥‥.”
그런 소걸을 바라보는 구개음하의 흰 수염이 바람도 없는데 출
렁였다.
타닥- 타닥-
작은 모닥불이 조용히 타올랐다.
절반 이상 뜯겨져 나간 문짝 밖으로 보이는 빗줄기는 굵었지만,
그래도 실내라고 안에서는 마른나무가 뒤틀리는 소리만 간헐적으
로 들릴 뿐이다.
작은 모닥불 건너편에서 소걸을 바라보는 구개음하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라 주인없는 동악묘에서 아침부터 느긋하게
쉬고 있던 구개음하였다. 그런데 심심풀이로 이를 잡던 구개음하
의 앞으로 삼 일 전에 길거리에서 얻은 제자 소걸이 뛰어들었다.
그것도 물에서 갓 건진 강아지 같은 몰골을 하고 말이다.
‘머리라도 가리지 왜 그렇게 젖어서 돌아다니느냐?’고 하자 소
걸은 ‘어린이용 죽립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구개음하는 하나뿐인 제자의 몸이 축날까 싶어 손수 모닥불을
피우고, 젖은 옷을 말리게 했다.
그리고 소걸이 어느 정도 쉬었다고 생각하자, ‘그건 그렇고 삼
일 전에 가르친 삼초식의 타구봉법은 다 익혔느냐?고 다시 물었
다. 그런데 되돌아온 제자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무참하게 깨뜨렸
다.
흥미진진한 얼굴의 구개음하에게 소걸은 시큰등한 목소리로
‘하나만요’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개방에는 제자들이 익힐 수 있는 타구봉법과 방주만이 익히는
타구봉법이 있다. 개방에서는 그 두 개를 구분하기 위해 제자들이
익히는 삼초식의 타구봉법을 흔히 개수작(開手作:손으로 두루 통달
한다)이라고 했다. 그래서 타구봉법이라고 하면 방주의 것으로,개
수작이라고 하면 개방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기초 봉법으로 이해
했다.
방주의 타구봉법이야 위력이 뛰어나고 익히기가 까다로워 무림
와 일절이라 칭하기도 했지만, 개수작은 그렇지 않았다. 개방의 구
성원은 한마디로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개방 제자의 거의 대부분이 문자를 모르고, 머리도 더불어
좋지 않았다. 문자를 모르고 머리마저 나쁘다는 최악의 상황을 고
려할 때 그들에게 쉽게 가르칠 수 있는 무공이란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개수작이었다.
단지 삼초식의 이 봉법은 무공에의 깊이있는 이해나 삶에의 철
학적인 성찰이 필요없었다. 그저 막대기를 휘둘러 개를 패는 삼초
식의 동작이었으니 말이다. 이 삼초식의 동작은 무림의 삼재검법
()과 비견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삼재검법이 그래도 철
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개수작은 구걸 중에
개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창안된 지극히 삶과 밀착된 무공이었다.
삶과 밀착된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개방의 문도
들이 익히는 개수작은 강호의 무인()이 추구하는 것과 상당
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누구도 훔쳐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익히기 쉽거나 허접스러운 동작
을 비유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무공을
배우는 사람의 동작이 서투르거나,가르치는 자의 뜻과는 다르게
움직일 때 ‘개수작 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그 개수작 삼초식 중에 겨우 하나를 익혔다니‥‥‥’
원래 개방의 전대 장문인 천리향()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그는 죽
기 전에 무슨 영감이 있었는지 타구봉법을 구개음하에게 전하고
후사를 부탁한 바 있었다. 구개음하는 천리향의 사후()에 지
금의 방주()인 통천개()에게 타구봉법을 전하고 그를
대표로 세웠다. 먼 훗날 개방의 구전()되는 역사에 의하면 구
개음하가 평생 가르친 사람은 단 둘인데, 바로 통천개와 소걸이었
다.
그렇다고 구개음하가 벌써부터 소걸에게 방주의 타구봉법을 가
르쳤다는 것은 아니다. 삼 일 전 구개음하가 소걸에게 가르친 타
구봉법은 개수작이었다. 아무리 구개음하가 개방의 대장로이며 타
구봉법을 알고 있다 해도,그가 소걸에게 방주의 증표와 다를 바
없는 타구봉법을 가르쳤을 리 만무하다. 구개음하는 소걸과 개방
의 만남을 기념하는 의미에서,당연히 삼초식의 타구봉법인 개수
작을 먼저 가르쳐 준 것이다.
개수작은 쉬운 만큼 강호에서 천대받는 무공 중의 하나였다. 역
설적으로 누구도 개수작을 익히려 하지 않았기에 개방의 제자들
은 이 개수작을 펼침으로써 스스로가 개방 제자임을 증명했다. 그
러므로 개방의 제자라면 반드시 개수작을 펼칠 줄 알아야 한다.
개방의 제자들은 개수작을 통해 자신들이 유랑하는 일반 거지 떼
와는 구별괸다고 믿었다.
구개음하가 그런 깊은 사연이 있는 개수작을 먼저 소걸에게 가
르쳐 주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기본이 되는 삼초식의 타구봉법 개수작을 아직 익히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허헛! 설마 농담이겠지.돌이 갓 지난 애기들도 익힐 수 있는
삼초식의 타구봉법을 영악한 걸아()가 익히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 맹랑한 녀석이 나의 개성을 시험하는
것 같구나.’
이런 일에는 아무래도 더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어른된
도리다. 구개음하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으허헛!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걸아, 마음 푹 놓고 내가 가르
쳐 준 타구봉법을 펼쳐 보도록 해라.”
‘넷! 스승님.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
노스승의 격려에 힘을 얻은 소걸이 환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노스승께서 저처럼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을 줄이야!’
소걸에게 있어 타인이 자기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는 것’은 최고의 덕목이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갑자기 증폭
된 제갈위기의 집요한 관심 덕분에 몸과 마음이 얼마나 피폐해졌
던가!
다행스럽게도 제갈위기는 며칠째 두문불출()하고 있었
다. 그는 그저 망연자실한 얼굴로 ‘절연()은 없는가’라고 중
얼거릴 뿐,소걸이 들어오고 나가는 일에도 일체 관심을 두지 않
았다.
소걸로서는 스승의 갑작스런 변화가 가져오는 침울함에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지금까지 몇 차례 겪어왔던 일이라 나름대로 적
응하고 있었다. 아너, 어쩌면 그건 소걸이 내심 바라던 바인지도
모른다. 스승이 홀로 골머리를 싸맬 때마다 소걸은 충만한 해방감
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만 해도 우울한 집 안의 분위기를 핑계 삼아 소화촌 밖을
나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폭우()가 쏟아지는 중에 웬 외
출이냐고 하겠지만, 소걸에게는 제갈위기가 연출해 내는 암울함보
다 빗속이 속 편했다.
그러나 아무리 편하다고는 해도 어린 소걸에게 소나기란 견디
기 어려운 것이었다. 왠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온다고 생각한 소걸
은 관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허름한 도관으로 들어갔다
가 노거지를 다시 만난 것이다.
다시 구개음하를 만났을 때,삼 일 전 그가 전수해 준 무공 때
문에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모닥불도 정면으로 쬐지
못하고 곁불로 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자신이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소걸은 조금 전까지 불쏘시개로 사용하던 나뭇가지를 들어 올
렸다. 작은 막대기는 자신이 봉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듯했다.
부웅! 붕!
몇 번 휘두르자 막대기는 손에 익숙하게 잡혀들었다.
소걸은 노스승 앞으로 나와 두 발을 벌리고, 무릎도 조금 굽힌
뒤, 엉덩이를 뒤로 뺐다. 오른손으로 잡은 막대기로는 땅을 짚고,
왼손은 조금 구부려서 단전()에 붙였다. 노스승은 이것이 타
구봉법의 기본자세인 좌식대변()이라고 했다.
‘아마 제일초가 좌식대변에서 우견타()였던가?’
마침내 구개음하가 전수해 준 구결을 생각해 낸 소걸이 씩 웃
었다.
구개음하는 소걸의 얼굴에 떠오른 의기양양한 웃음을 보고 역
시 자기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스승의 자질을 계속
해서 시험하는 독특한 녀석이라니 !
소걸이 두 다리를 어깨 널이로 벌렸다가 곧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구개음하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번져 나갔다.
‘옳커니, 저 우아한 좌식대변에서 우일보()라!’
저 엉거주춤한,그러나 흔들림없는 천주부동()의 좌식
대변 자세에서 개방의 독문십법이 단련된다. 저 형()이야말로
강호의 무인들이 흉내 내기를 꺼려하는 개방만의 독문표식인 것
이다.
좌식대변에서 우측 발을 내디디며,동시에 봉을 우()에서 좌
()로 비껴 휘두르면 그것이 일초의 견타()다. 우측 발이 나
가면서 휘두르는 것을 우견타(‘), 우견타 다음에 좌측 발이
나가며 좌()에서 우()로 휘두르면 좌견타()라고 했다.
이 우좌연타()까지가 이초식이며, 마지막 삼초식은 상단
의 자세에서 두 손으로 봉을 잡고 아래로 힘껏 내려치는 것이다.
이 세 동작의 어디에 복잡하고 헷갈릴 만한 움직임이 있단 말
인가. 물론 가끔가다가 보면 늘그막에 거지가 된 칠순(:70살)
노인들의 손과 발이 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젊어서
일찍 거지가 된 바람직한 거지들은 결코 이 세 동작을 혼용하지
않았다.
“허억!”
구개음하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지금 칠
순의 노인에게서 보여지는 전형적인 움직임이 소걸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저런 개수작이!
‘멈추어라!”
구개음하는 일단 소걸의 움직임을 제지시켰다. 구개음하의 얼굴
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겨우 삼초식의 타구봉법이 한순간에 개수작이 되고 마는구
나!’
구개음하가 호흡을 가다듬고 소걸에게 물었다.
“걸아,우측 발이 나갈 때는 우에서 좌로 휘둘러야 하지 않겠느
냐?”
소걸이 즉시 싹싹하게 말을 받았다.
“아! 그렇군요. 스승님, 제가 잠시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그럼 다시 한 번 펼쳐 보도록 해라.”
소걸이 호흡을 고르고 다시 몽둥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씩씩
한 소걸의 대답과는 달리 다시 펼친 우견타에서도 소걸의 봉은
좌에서 우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잠깐!”
소걸을 멈춰 세운 구개음하가 씹듯이 말을 이었다.
‘우측 발이 나갈 때는 봉을 좌에서 우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봉에 네 발등을 얻어맞을 수도 있다는 걸 벌써 잊었
느냐? 봉으로 개를 잡자는 거지, 결코 자해()를 하자는 게 아
니 다. ”
소걸이 허리를 깊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우측 발이 나갈때는 우()에서 좌()로! 명심하겠습니다!”
구개음하의 얼굴이 울그락붉그락해졌다.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이것은 결코 명심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몽등이를 휘두르는
가장 간단하고도 기초적인 방법을 이 어린 제자는 온몸으로 부정
하고 있었다. 그것도 가히 강호의 사람들에게 개수작이라 불리울
만한 동작으로 말이다.
‘혹시, 무공이 너무 천박하여 익히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
닐까?’
구개음하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어린 제자는 기재 중의 기재가 분명하다. 다
른 걸 차치하고라도 벌써부터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살아가려고 하는 생활 태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저 지독한 잔머리가 결코 거저 만들어진 것은 아닐 터.’
구개음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제자 앞에서 삼초식의
타구봉법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렇군.저 녀석은 지금 나에게 말없는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
다. 일반 제자들이나 익히는 개수작. 그래,어쩌면 그것 때문에 자
존심이 상한 것일 게다.’
구개음하가 문득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자신
이 알고 있는 최고의 무공은 개방의 방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타
구봉법 삼백육십오 초식이다. 그 삽백육십오 초식을 생각하면 자
다가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지금도 단지 떠올리기만 했는데 가슴이 뛰기 시작해서,구개음
하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안 되지.아무리 내가 대장로라고 해도 방주의 허락 없이 이놈
에게 절기를 가르칠 수는 없지.’
그러다가도 금방 마음이 변했다.
‘눈 높이 교육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구개음하는 제자에게 최고 절기를 가르치고 싶다는 유
혹과 한동안 싸워야 했다.
같은 시간 소걸도 구개음하 앞에서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왜 나는 손과 발이 제멋대로 움직인단 말이냐! 우견타는 좌에
서 우로! 좌견타는 우에서 좌로! 아닌가? 가만 우우좌냐 우좌우
냐‥‥ 좌우좌인가? 좌좌우인가?’
구개음하의 상상과는 전혀 관계없이 소걸은 좌우()의 갈등
속에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휴우‥‥‥‥”
모든 것은 자신의 불찰이었다. 좀 더 진지했어야 하는데, 건성으
로 받아들이다보니 이제는 좌우마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뻣뻣해진
목을 홰홰 내젓던 구개음하의 눈에 소걸의 고뇌하는 모습이 들어
온 것이다. 그 순간 구개음하는 마침내 어린 제자에게 진정한 타
구봉법을 가르치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아무렴,저렇게 진지한 녀석 앞에서 어찌 진수를 숨길 수가 있
단 말인가!’
구개음하가 헛기침을 터뜨리며 말했다.
“험험! 잘 듣거라.스승이 보기에 너는 이미 삼초식의 타구봉법
을 완벽하게 터득했다.”
어린 제자에게 얕보일 수는 없다. 녀석이 개방의 삼초식 개수작
을 비웃었으니, 진정한 타구봉법의 어려움을 알게 해야 한다.
‘비록 네가 터득한 것은 타구봉법이지만, 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가르칠 무공은 개방의 비전절학으로, 그 이름을 삼육오절(
)이라 한다.”
아무래도 방주의 타구봉법이라고 말하자니 꺼림칙해서, 그냥 삼
백육십오 초의 타구봉법을 삼육오절이라고 얼버무렸다. 어차피 타
구봉법이 삼백육십오 초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방주와 자신
밖에 없으니, 이름만으로 이것이 타구봉법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
람은 없다.
구개음하는 삼백육십오 초의 타구봉법을 직접 시연까지 해가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아침나절에 시작된 구개음하의 시연은 점
심이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구개음하가 내력을 일주천(:진기를 임맥과 독맥을 통해 한
바퀴 돌리는 것)한 뒤 소걸을 보며 물었다.
“어느 정도나 이해했느냐?”
“스승님, 저는 전부 이해했습니다!”
구개음하는 네가 역시 기재로구나!’ 라고 칭찬하려다가 어금
니를 꽉 다물었다. 아무래도 가르침에 있어서는 칭찬을 극도로 아
낄 필요가 있다.
“그래,네가 이해를 했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오늘부터 전
심전력으로 초식을 익히고, 혹시라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거든 다
시 나를 만나는 날 묻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구개음하는 소걸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바라보며 자신이 얻은
행운에 감사했다.
‘참으로 개방의 기연이로다! 이 나이가 되도록 제자를 거두지
못한 것은 과연 걸아를 만나기 위함이었던 게로구나.’
무림의 절학()이라는 타구봉법 삼백육십오 초식을 한 번에
보고 이해하는 제자라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
고 있는 구개음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이
완전히 믿고 말았다.
설마 하니 스승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그 앞에서 초
롱초롱한 눈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없다. 삼백육십오 초식을 이
해하기도 어렵지만,감히 스승 앞에서 그것을 다 이해했다고 말하
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구개음하는 소걸의 말을 믿어
야 했다. 그것이 구개음하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었다.
소걸은 구개음하가 감동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마음 한구
석이 뜨끔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스승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마다 사용하는 언어의 체계란 것이 있는데,그것이 비슷한
사람도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 소걸과 구
개음하의 경우가 후자에 속한 것이었다.
소걸의 경우 구개음하가 펼친 삼백육십오 초식이 말하고자 하
는 바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이다. 즉, 소걸은 타구봉법의 창안
이념인 ‘개를 때려잡자’는 근본 취지를 이해한 것이다.
그것을 구개음하는 초식의 오묘함을 이해했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다.
좁은 도관의 모닥불 앞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땀을 뻘뺄 흘리며
타구봉법의 투로를 펼쳐 보인 구개음하의 노력은 소걸에게 간단
히, ‘개를 때려잡자’로 전달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이해하기 힘
든 몸짓으로 말이다.
아침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오후 늦게까지도 그칠 줄을 몰
랐다.
술시초(:저녁 7시)에 장염은 다시 경재학의 부름을 받았
다. 점심 무렴 회의실에서 ‘오늘 같은 날 술 한잔하지 않을 수 없
다’던 경재학의 말에 따른 것이다.
쏴아아아!
어두운 밤, 빗속을 걷는 장염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축하주()라 이거지?’
도롱이를 걸치고 죽립을 깊게 눌러쓴 장염이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림맹에 들어와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정든
영빈관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바라본 영빈관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점심 무렵의 회의 이후 경재학에 의해 영화가 은밀한 곳으
로 옳겨졌기 때문이다.
‘좋아좋아, 마음껏 축하해 주마.’
어두운 빗줄기 속으로 장염의 신형이 사라졌다.
비록 무림이 어려운 형편이라 할지라도 지금 창룡전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그런대로 밝았다. 당금 무림의 제일고수라는 경
재학이 출관했고, 그에 버금간다는 장염이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그뿐이랴, 무림맹주의 탁월한 신안()에 의해 무림의 혼란을
조장하던 자들이 밝혀졌다.
혈마사와 마교,생각해 보면 과거 이십 년 전의 이패에 버금갈
만큼의 세력들이다. 그러나 적이 누구인지 모를 때나그 신비로운
힘에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다. 혈마사는 이미 오래전에 경험한 바
있고, 마교는 더 더욱 그러했다.
정파 무림의 힘을 어느 곳에 쏟아 부어야 할지 모르고 있다면
우왕좌왕했겠지만, 목표가 정해진 이상 더 이상의 흔란은 없을 것
이다. 남은 것이 있다면 오직 반복되는 싸움뿐이다. 그리고 그 싸
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림인의 실존이기도 했다. 역설적??말이지
만, 싸움없이는 무림인의 존재 의미도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구대문파 장문인과 장로들은 은연중에 혈마사와
마교의 일을 ‘참으로 오랜만에 무인()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창룡전의 술자리는 친목과 더불어 전의()를
새롭게 다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자리인만큼 시중을 드는 사
람들이나,그 자리에서 흥청거리며 술을 퍼마시는 자들은 모두가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장염이 창룡전에 들어간 시간은 이미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
익은 뒤였다.
“하하핫! 장 소협, 어서오시오.”
경재학이 상석에 앉아 과장된 몸짓으로 장염을 환영했다.
장염은 경재학을 힐끔 바라본 뒤 공동파와 화산파가 모여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창룡전의 술자리는 화합을 다지는 떠들썩한 가운데서도 몇 부
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미 빛이 바랬지만 신진사대문파라고 자
처하던 문파들은 왼쪽에 자리 잡았다. 그 맞은편에 장염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알려진 화산파와 공동파가 있고,그 옆으로
아미파와 소림사가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장염이 들어서자 떠들썩하던 장내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장염이 무림맹과 합류하게 된 사연을 알
고 있다. 그것은 당사자에게 그다지 즐거운 상황이 아닐 것이다.
멀리서 장염을 바라보던 곤륜파 장문인 신룡진인이 입 안에 있
던 한 모금의 서봉주()를 꿀꺽 삼켰다. 수수와 샘물을 원료
로 만든다는 술이 목 울대를 타고 넘어갔지만,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자로다.’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절대로 이런 자리에 나타나지 않
을 것이다. 자신이 데리고 나가려던 사람은 도리어 볼모가 되었다.
이런 자리에 굳이 초대하는 맹주도 그렇지만,부른다고 해서 태연
히 찾아오는 장염도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장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는 해도 일말의
동정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 거참‥‥‥‥.”
신룡진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술잔을 가득 채웠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더니, 오늘은 공명정대()하기만 할 것
같던 맹주의 또 다른 일면을 보았다.
화산파 장문인 상유천도 의아하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빈관을 드나들며 사람들의 면면을 살
폈다. 특별히 장염과 영호화 소저의 관계는 남다른 것이었다. 그런
데 오늘 맹주의 명에 의해 그녀는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맹의 회합을 축하하는 이 자리에 나오다니‥‥‥.’
오늘의 자리는 그 의미가 분명했다. 첫째는 맹주의 출관을 축하
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장염과 구대문파와 연합을 공고히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말은 그렇다고 해도, 장염의 입장에서는 코가 꿰
어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누구도 장염이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지만‥‥ 과연 이 자리에 나온 보람은 있는 거로군.’
상유천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염과 관계가 있는 사람
들이 이 달갑지 않은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과연 장염
이 참석할 것인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장염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들이 나온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그
들은 누구도 장염이 나오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상유천이 이
율배반()적인 생각에 사로잡겨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무림맹주 경재학이 술잔을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이 술은 무림맹에서 오래도록 보관하고 있던 모태주()
외다. 십여 년 전 귀주성에서 열린 천하 무림 대회를 기념하여 귀
주성의 무가()에서 해마다 몇 항아리씩을 보내주고 있었소.
오늘같이 뜻깊은 날이 아니면 언제 이 술을 마신단 말이오? 장 소
협의 무림맹 입성을 기념하여 이 모태주를 한잔 올리겠소이다. 부
디 거절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라오.”
맹주의 말에 더러는 고개를 끄덕였으나,장염을 아는 사람들은
안색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것 자체만으로도
장염은 최선을 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 기념이라며
술까지 권하고 있다. 이것은 조롱일까? 아니면 장염의 무림맹 입
성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뜻일까?
경재학이 희미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경재학은 자신의 최고 절기인 무검식()을 발휘
했다.
건곤무형검() 제삼식() 건곤무해()
회륜참()!
그의 손에서 떠난 술잔이 탁자 위를 가로질러 장염에게 날아가
기 시작했다. 술잔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날아갔
다.
장염의 곁에 앉아 있던 상유천이 움직임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저것은‥‥ 무공의 시험이다!’
상유천이 보가에 지금 경재학은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장염
의 무공을 시험하고 있었다. 천천히 날아가는 술잔에는 모태주와
더불어 천하제일인 불사신검 경재학의 ‘끝을 알 수 없다’는 내력
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술잔으로 모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워
낙느리게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염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옥 짙어졌다. 술잔이 날아오는
속도도 가공할 정도로 느렸지만, 술잔 자체가 날아오는 속도보다
더욱 느리게 회전하고 있었다. 날아오는 속도가 그의 내력을 말해
주는 것이라면,저 회전 속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져 있을까?
‘뭐, 잡아보면 알겠지.’
장염이 태연히 술잔 앞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콰드드득!
손과 술잔이 닿는 순간,장염의 어깨가 뒤로 밀리며 바위가 으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처음부터 경재학과 장염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제 겨우 이십 대의 장염이 맹주의 공력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술잔은 장염의 손 안에 잡혀 있었지만 그 잔은 여전히 회전하
고 있었다. 바위가 으깨지는 소리는 장염의 손바닥 안에서 잔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장염의 손 안에서 미미하게 돌아가
는 술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바위를 갈고 있는 듯한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보통의 경
우 술잔을 잡뜨면 끝이다. 그런데 지금 장염의 표정은 굳어 있었
고, 경재학도 들어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술잔을 들고 있는 장염의 두 눈에 불신과 의혹이 가득했다. 경
재학이 날린 잔을 무리없이 받아내기 위해 구 성의 공력을 사용
했다. 그런데 막 잔을 움켜쥔 순간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드디
어 회전하던 술잔의 비밀을 보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술잔 속의 술들이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세찼던지 술은 금방이라도 술잔 밖으로 튀어나
올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술잔이 미미하게 돌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막강한 술의 회전 때문이었다. 경재학의 무궁한 내력이
담긴 술잔을 돌릴 지경이니 그 술이 가지는 잠력이란 가히 상상
을 불허했다.
‘크윽, 멈출 수가 없다.’
장염은 이를 악물고 내공을 끌어올려 술잔으로 보냈다. 지금 자
신의 내공으로 술잔을 보호하지 않으면 저 엄청난 힘의 술 방을
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보나마나 창룡전
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된다. 운수 좋은 사람들은 가벼운 상처로
끝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크게 부상을 입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말이다.
경재학은 술잔이 장염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간 뒤부터 더욱
내력을 끌어올렸다.
네가 나의 이 한 수를 막아낸다면,마음으로부터 네게 무릎을
꿇어주마. 그러나 막지 못한다면 너는 구대문파와 영영 등을 돌리
게 될 것이다.’
자신은 조긍 전 두 가지 수법으로 술잔을 날렸다. 무형검 회륜
참의 원리를 응용하여 술 방울을 회전시키고, 동시에 내력으로 술
잔을 감싸서 술잔이 깨지거나 술이 넘침을 방지한 것이다.
결국 술잔과 회전하는 모태주 속에는 자신의 평생 심득인 건곤
무형검의 정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지금 장염이 내력이
부족해 손 안의 술잔을 깨뜨리거나 술 방울이 넘치려고 하는 힘
을 다스리지 못한다면,그 피해는 고스란히 장염의 몫이 될 것이
다. 이미 술잔이 자신의 손에서 장염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에 사람
들은 ‘장염이 무리하게 맞서다가 화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할 것
이 분명하다.
잔을 잡은 장염의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
다.
‘경재학아! 어쩌자고 이처럼 극악한 수법을 쓰고 있단 말이
냐!
장염도 경재학의 수단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술잔이 자신의
손에 들어와 있으니 모든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콰드드드득!
장염의 애타는 심정과 관계없이 술잔의 돌아가는 속도는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정말 그랬다. 어떤 이유로든 이 한 잔의 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경재학에게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더 많은 피해를 내지 않기 위
해서라도 말이다.
장염이 전신의 공력으로 술잔을 움켜쥐었다.
빠드드득!
술잔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재학의 노
도()와 같은 공력이 밀려들자 술잔은 조금 전호다 더욱 빠르
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장염의 얼굴로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영문을 모르는
구대문파 사람들은 그저 두 사람이 내력을 겨루느라 그런 거려니
생각할 따름이었다.
“으음!”
장염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사람들은 두 사람의 내력 대결이 심상치 않은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렬게 밀어붙여라!’
청성파의 장문인 파운신권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경재학을
응원했다. 처음 장염이 영빈관에 나타났을 때,그에게 당한 기억을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려왔다.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장염
이 곤욕을 치르고 있으니 이보다 더 시원할 일은 없다.
‘저런,피까지 흘리다니‥‥ 내장이 상해가고 있다는 것인가? 안
됐군.’
파운신권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장염의 어깨가부들부들
떨리고 있고, 입술로는 한줄기 혈흔마저 내비치고 있다. 문파가 멸
문한 이후 늘 울적한 시간을 보냈으나, 오늘에야 조금 위로가 되
는 듯했다.
장염은 내력의 한계에 부딪쳤다는 것을 느꼈다. 절망감이 온몸
을 쉽쓸었다. 경재학은 단지 내공만으로 승부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자신은 경재학의 무형검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좋다! 네가 정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승부다!’
그러나 무엇으로 저 무형검의 검공을 상대한단 말인가?장염이
자신의 무공 근원을 이리저리 더듬어보았지만,지금 맨손으로 경
재학의 술잔과 술을 한꺼번에 막아낼 방도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
았다. 그러고 보면 경재학의 무공 응용 능력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력과 무형검을 단지 술잔과 술에 응용하여 자신을
이토록 곤경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 비록 어의통검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이처럼 맨손으로
무형검을 상대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것은 낮에 이
형환위의 신법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
었다. 몸을 피하는 순간 술잔이 폭발할 것이고,무형검의 검력이
담긴 모태주가 연회장을 덮칠 것이기 해문이다.
장염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다시 술잔을 바라보았다.
콰콰콰콰콰!
무심한 모태주가 술잔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깨가조금씩 처지며 무겁게 느껴졌다. 이대로 조금 더 간다면
치명적인 내상을 입게 될 것이다.
“크윽!”
장염이 비명과 함께 상체를 흠칫하고 떨었다. 어느 틈에 공력의
흐름마저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벌써 반 각(약7
분) 동안이나 쉴 틈 없이 공력을 운용했다. 지독한 공력의 소모전
이었다.
‘방법은‥‥ 없는가!’
최악의 경우 온몸으로 술잔을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전에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혹시, 기천검이라면‥‥ 기천검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움켜쥔 술잔으로 공력을 쏘아보내던 장염의 표정이 갑자기 엄
숙해졌다.
그러고 보니 맨손으로 공력을 쏟아 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수계현에서 기천검을 수련할 때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
다. 그때는 하나하나의 경락()으로 진기를 소통시켰었다.
기천검을 터득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어느 날, 공동파의 젊은 사
람들 앞에서 검리()를 논하다가 한순간 자신도 모르게 새로
운 감각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러나그 감각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어이없게도 그날의 감각이 손바닥, 아니, 손가락 끝
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설마‥‥‥.’
장염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빛이 번득였다.
‘해보자!’
그렇다. 이 깨달음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만,지금은 해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내공이 소실되고 있는 마당이니,더 이상 시
간을 지체할 수도 없다.
마침내 장염이 경천일기공의 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경천일기() 제일기공() 유생어무()!
아직까지 무림에서 경천일기공의 공력을 직접 사용한 적은 없
다. 지금까지는 경천일기공으로 생성된 공력으로 무공을 펼쳤을
뿐이다. 지금의 경재학은 장염으로 하여금 경천일기공을 끌어올리
게 할 만큼 벅찬 상대였다.
‘천하만물은 있음에서 생겨났고(천하만물생어유) 있음은 없음
에서 생겨났다.[유생어무]!’
경천일기공의 공력이 장염의 기경팔맥()을 쉽쓸고 지
나가자, 텅 비어 있던 장염의 단전은 순식간에 도가진력(
)으로 가득 차올랐다.
단전이 충분히 찼음에도 마치 깊은 샘이라도 터진 듯, 공력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헛! 언제 이렇듯 무한한 공력이 쌓였던가?’
그러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공력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장염은 단전에 충만한 공력을 오른손으로 밀어 보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공력은 한꺼번에 수태음폐경()과
수양명대장경(), 그리고 수소음심경()의
경락을 따라 흘러들었다.
동시에 세 개의 경락으로 내력을 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
웠지만, 이미 어의통검의 경지에 이른 장염의 의지는 그것을 가능
케 했다.
장염이 엄지와 검지,그리고 약지 끝에서 공력이 뭉치고 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번쩍!
장염의 오른손에서 중인들의 눈을 시리게 할 만큼 강력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다음순간 장염의 손아귀에서 회전하던 술잔이 멈추었다.
묵묵히 술잔을 바라보던 장염의 얼굴에 만족한 듯한 표정이 깃
들었다.
‘그런대로 축하할 만한 날이로군.’
술잔을 입술에 대고 살짝 기울였다. 모태주가 입 안에 그득하게
고여들었다. 세상의 이치는 변함이 없다. 하나를 잃으면 다시 하나
를 얻게 된다. 이제 무엇을 잃어야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단 말
인가?
꿀꺽꿀꺽,
장염은 단숨에 모태주를 들이킨 뒤 경재학을 향해 말했다.
“물고기가 움직이면 물이 흐려지고, 새가 날면 깃이 떨어지는
법이라오.”
“‥‥‥‥.”
경재학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최
고절학 건곤무형검이 무참히도 깨진 것이다. 상대의 수법은 무림
에서 오래 생활한 그로서도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건곤무형검
을 저렇게 수월하게 막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 너만큼은 반드시 죽인다.’
경재학의 얼굴에 다시 사람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헛! 좋은 말씀이오. 그러나 술잔이 너무 무거웠던 건 아니
오? 소협이 그처럼 절륜한 공력을 자랑하니,무림맹의 앞날이 참
으로 기대되는 바이오.”
모태주를 한 잔 비운 장염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술을 마셨으니‥‥ 앞날이 기대되기는 마찬가지요.”
6-3
제 사장
천자의 검
풍림장의 장주 영호성()이 호북성 무한()을 떠난 것
은 오월 중순쯤이다. 영호성은 본래 무림첩을 받지 않았다는 핑계
로 무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하루
에도 십여 개씩이나 날아드는 사파 무림인들의 방문첩을 거절하
는 것도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정파 무림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참
아 넘기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마후의 본가()가 무한에 있다는 소문 하
나만으로 무한은 사파 무림인들의 거점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
한을 중심으로 사파의 거대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얼마 후
정파 무가들과의 마찰이 본격화되었다.
정파의 유수한 무가들이 쓰러졌고, 상대적으로 풍림장의 세력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정도 무림의 고수들은 풍림장
을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호북성의 무인들은 ‘풍림장이
사파를 등에 지고 세력을 키우고 있다’거나, ‘영호성이 정사 중간
에서 어부지리를 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영호성이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영호성은 즉시 호북성에서 벌어진 사파와의 분쟁
에 참여했다. 그러나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마
교 호북성 무한 분타의 타주 단발마() 고고(孤高)가 ‘천마
후의 부친에게 감히 검을 겨눌 순 없다’고 말한 뒤 돌아갔기 때문
이다.
호북성에서 더 이상 적수가 엄다는 것이 풍림장의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정파의 무림인들에게 검을 돌릴 수는 없는 노룻이다. 결
국 영호성은 아들 영호진과 일급무사 삼십 명을 데리고 도망치듯
무한을 떠났다. 무한에서 동도()들로부터 외면당하자 무림맹
에 합류하여 혈마사와 싸워볼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호성의 곁에서 비를 맞고 있던 낙일검 영호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아무래도 쉽게 그칠 비가 아닙니다. 하남성에 들어왔
으니, 곧바로 무림맹으로 찾아가 보는 것이‥‥‥.”
영호성이 입을 꾹 다물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하남성으로 들어왔다. 과거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모
양새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자신의 곁에는 낙일검이
라는 외호를 얻은 용맹한 아들과 일급무사 삼십 명이 있는 것이
다.
“그러자꾸나. 맹주가 출관하였다고 하니 풍림장이 머물 곳을 마
련해 줄 것이다. 게다가‥‥‥.”
셋쩨 딸 영화가 무림맹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무림맹에 가면 영화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삼 년이로구나.’
삼 년 전 무당산에 들렀을 때 도천 도사의 배려로 수련 중인 영
화를 잠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하산하면 함께 생활하
게 되려니 생각했는데,사천성의 의혈단으로 가게 된 이후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 뒤로 무럭 삼 년이나 딸과 만나보지 못했다.
“가자.”
영호성이 앞장서자 영호진과 삼십 명의 무인이 조용히 뒤를 따
랐다.
무산()은 사천성() 동부에 있는 산으로 호북성(
)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무산에는 늘 따라다니는 전설 같은 이
야기가 있다. 태양신 염제()의 딸인 요희()가 죽은 뒤 무
산에서 운우()의 신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인데,그녀는 아침
이면 아름다운 구름으로 변해 산과 골짜기를 떠돌다가 저녁이 되
면 비로 변하여 자신의 슬픔을 알린다고 했다.
마교 혈마대의 대주 강북제일마존 마광옥이 무산에 도착한 때
는 해가 뉘엇뉘엇 질 때였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있나.무산신녀(:요희의 다른 이름)
야, 아직도 무산에 살고 있다떤 내가 화끈하게 위로해 줄 터이니,
비나 좀 그치게 해다오.”
마광옥의 전신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로 흠뻑 젖어 있었
다. 우기에 접어들어 비가 내리는 것인지,무산신녀의 전설이 이루
어지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제길!”
어쨌거나 생각할수록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손자들의
재롱이나 볼 나이에 비를 맞으며 정파 나부랭이들이나 습격하러
다녀야 하다니, 가슴으로 화기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보다 젊고 서
열도 낮은 고수들이 총단에 즐비한데, 벌써 몇 달째 노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다시는 여색()으로 인해 앞길을 망치지 않으리.’
그의 뒤틀린 심사를 짐작한 부대주 사영검마 갈천상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대주! 무산 신녀문()의 문주()가 재색을 겸비한 여
걸이라 들었습니다. 오늘 밤 대주의 수발을 들게 할까요?”
신녀문은 봉황곡과 함께 무림의 이대신비문파였다. 봉황곡은 위
치마저도 불확실했지만,신녀문이 무산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려
져 있다. 문도들의 강호 활동이 비밀리에 이루어지기에 자세한 것
은 알 수 없지만, 전부가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라고 했던가!
‘신녀문의 수발이라‥‥ 기특한 녀석.’
아무리 급조된 혈마대의 수하라고는 하지만 상관에 대한 충성
심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다. 혈마대의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호북성에 들어가 중소 규모의 정파 무가()들을 멸문시키는
일이다. 물론 무당파와 풍림장이 있는 곳은 적극적으로 피해다니
면서 말이다. 사천성의 끝에 있는 신녀문은 아직 혈마대의 명단에
*
들어 있지 않았지만,사실 명단이 별건가?
마광옥이 무산의 뿌연 봉우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초나라의 회왕()과 그의 아들 양왕()도 무산에서 신
녀를 만났다.”
갈천상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마광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광옥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주, 어떻게 할까요?”
“한 번 뜻을 세웠으면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사내다운 일
이라 할 수 있지.”
“대주?”
참다못한 마광옥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이 빌어먹을 놈아! 네놈이 그렇게 생각했으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내 앞으로 끌고 오란 말이다!”
갈천상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분노한 마광옥의 손과 발이 언
제 날아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몸을 피한 갈천상이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존명!”
갈천상이 천산구마와 혈마대 이백여 명을 이끌고 조운곡(
)으로 진입했다. 얼마 후 마광옥도 나머지 수하 백여 명을 이끌
고 천천히 곡 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조운곡의 입구에는 홍색
물안개가 자욱하게 어려 있었다.
‘커허 ! 좋다. 보슬비에 물안개라‥‥‥’
왠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홍색 물안개를 뚫고 지나가
는 마광옥의 얼굴이 조금씩 상기되기 시작했다. 안개를 뚫고 지나
가자, 조운곡의 입구 양쪽에 세워져 있는 작은 비석이 마광옥의
눈에 들어왔다. 비석에는 앙증맞아 보일 정도의 작은 크기로 신녀
문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과연 조운곡에 신녀문이 있긴 있었던 게로군.’
늘 말로만 듣던 신녀문을 코앞에 두니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마
광옥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 즐긴 뒤 신녀문주를
포함해 모든 문도들을 살려둘 생각은 없다. 혈마대는 무림에 마교
의 세력이 아니라 혈마사의 라마승으로 알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푸흐흣! 안됐지만 신녀문주여,그대의 생명은 오늘 하룻밤뿐이
다. ‘
잠시 신녀문주를 생각하던 마광옥은 이상한 느낌을 받고 걸음
을 멈추었다.
너무 조용한 게 아닌가!’
여태까지 혈마대가 지나간 자리치고 이처럼 조용한 적은 없었
다. 그런데 지금 조용한 것은 둘째 치고 이백여 명의 혈마대가 지
나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헛!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마광옥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좌우를 살폈다. 한순간 저 멀리
흐릿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마광옥은 일단 직감이 이
끄는 대로 신법을 펼쳤다.
“헛!”
마광옥의 눈앞에 상상도 못한 일이 펼쳐져 있었다. 일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