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17)
7권으로 이어집니다 )
7권 목차
제 1장 자기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자
제 2장 바람은 멈추었쓰나 물결이 인다
제 3장 함이 없어야 이로움이 있다
제 4장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남도 할수 있다
제 5장 마음으로 기를 다스린다
제 6장 타고난 신령스런 성품이 빛을 발한다
제 7장 뜻을 따라 몸이 행한다
제 8장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제 9장 만물은 도에서 나왔다
제 10장 무욕의 대욕
제 1장 자기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자
대륙에서 오악이라 일컬어지는 산들중 첫 번째인 태산은 고대 제왕이 봉선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산이다.
어디 제전의 신성함뿐이랴! 산동성에서 제일 높은 태산은 수려한 자연 경관과 수많은 유적들로 천하제일
의 산으로 칭송받아 오고 있다.
그 태산에 무림삼장으로 유명한 비월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처음부터 비월장이 태산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천하십대고수라는 비월장주가 입신양명하여 세운 장원이 비월장이며, 그것이 태산에 세워
진 것은 이십년을 넘지 않았다.
다른 무림삼장의 오랜 전통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이었으나, 무림세가라는 것이 그렇듯 무력을 인
정받으면 그뿐이이다. 비월장 장주 금거산은 무림에서 태산장법으로 이름을 얻었고, 일가를 이룰수 있었
다.
바로 그 천하십대고수 중의 하나인 금거산이 연무장에 식솔들을 모은 뒤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
다.
“오늘 이후로 혈마사가 중원에서 사라질 때까지 비월장을 폐쇄하겠다.모두들 각자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훗날 혈마사가 강호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돌아오도록 해라.”
비장한 금거산의 말에 비월장의 총관 철권 소천성이 황급히 입을 열였다.
“장주께서 나가라고 하시지만 어찌 저희들만 위기를 넘길 수 있겠습니까?”
“허허헛! 하남성에 있다는 혈마사가 비월장으로 온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만약 온다 해도 나 혼자라
면 그들에거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소이다. 혈마사가 강북일대를 돌아다닌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어
찌 내가 장원을 비울수가 있겠소이까? 나의 일은 염려 마시고 총관께서는 남은 가족들을 이끌고 황산으
로 가주시구려.”
장주를 바라보는 소천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나이 예순이 될때까지 금거산을 따라다녔지만 오늘처
럼 암담하기도 처음이다. 안휘성의 황산은 장강 이남이기도 하지만 금거산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장주
가 황산으로 가라고 하닌 분명 처가로 가족들을 보낼 심산이가 본데, 어찌 사십 년을 함께한 장주를 버
려두고 혼자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장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남아 장주를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로 하
여금 하북성까지 동행케 하면 될 것입니다.”
“어허, 총관께서는 어찌 그리도 내 마음을 몰라주시오.”
금거산의 마음이 답답해졌다. 한 사람의 고수라도 안전해야 후사를 도모할 수가 있다. 소천성은 금거산
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이번에 잔류했다가 화를 당하면 앞으로 누굴 G
고 장원을 이끌어 간단 말인가!
“장주님! 저희들도 장주님의 곁에 남겠습니다!”
비월장의 제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비월장의 제자는 일대 제자부터 삼대 제자까지
모두 구십여 명이었따. 그많은 사람들이 비분강개한 음성을 소리를 지르니 연무장의 분위기는 장엄하기
까지 했다.
비월장의 제자들 앞에 서 있던 금철심이 성큼 한 걸음 나섰다.
“저도 남아 숙부님을 돕겠습니다.”
금철심의 말이 끝나자마자 금거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우리 금가의 미래가 네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늘 어찌 그런 망발이냐! 또한 설령 네
가 남는다고 해도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헛된 바램일랑 일찌감치 접어 두거라!”
금철심은 금거산의 형인 금거정의 일점혈육이었다. 본래 금씨 삼형제가 있었으나 큰형은 호손을 남기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다. 그 뒤 둘째인 금거정이 아들 하나를 낳는 동안 금거산은 딸만 둘을 낳았다.
후에 금거정은 동생 금거산에게 하나뿐인 아들을 보냈다. 무림일절이라는 금거산의 무공을 금철심에게
잇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금거산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라 아낌없이 무공을 전수해 주고 친자식처럼 돌
보아주었다. 그런 금철심이니 어찌 금거산이 조심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금철심은 금씨 양가에서 고이고이 키운 철부지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금거산이 위기의
순간에 자기만 떠나라고 하니 양심상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숙부께서 뭐라고 하시든 저는 비월장에 남을 것입니다. 저도 제 한몸은 지킬 수 있다로 믿고 있습니
다.”
“어허!”
금거산이 탄식을 터뜨리며 조카를 바라보았지만, 그 쇠 심줄같이 질긴 고집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어
릴 때부터 자신이 하고싶지 않은 일을 시키면 누가 뭐라고 해도 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
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던 금철심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엄하게… 엄하게 키울 것을….’
말 안 듣는 조카를 앞에 두고 금거산이 땅을 치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러기에는 금철심이 너무 자
라 버린 것이다. 금거산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장주, 소장주의 생각이 저러하시니 차라리 저와 소장주로 하여금 장주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
시요.”
총관의 말에 금거산은 하늘이 무너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금철심은 억지로 떠나 보내면 혼자 길을 돌
아서라도 다시 찾아올 녀석이다. 그것이 멋이며 협객의 도리라고 저 홀로 믿고 살아가는 녀석이니 이제
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저들을 데리고 황산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편이 낫겠다.’
어쩌면 자신이 황산에 다녀올 즈음이면 혈마사의 혈겁도 끝났을지 모른다. 지난해 무림첩이 비월장까지
날아왔지만 그때는 마침 페관 중이라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무림첩이 발동했으니 혈마
사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금거산이 제자들에게 명했다.
“비월장의 제자들은 들어라! 내가 일대 제자들을 이끌고 식솔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겠다. 그러나 이대
와 삼대 제자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강호의 풍파가 가라앉거든 돌아오로록 하라.”
총관인 소천성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북지역은 혈마사가 돌아다니며 무림인들을
주살하고 있는 형편이니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장주가 혹시라도 헛된 명
예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면 후환이 무궁했을 것이다. 역시 장주인 금거산은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
한 무림인 이었다.
‘이런 주인을 만나기도 어렵지… 암….’
소천성은 장원의 사람들을 재촉하여 ?은 시간 안에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늦여름의 정오, 마
침내 비얼장의 일대 제자 삼십 명과 장주 가족들은 안휘성의 황산을 목표로 미래를 알 수 없는 여정에
올랐다.
* * *
사공철은 혼신의 힘으로 태극양의검법 삼초식을 펼쳤다. 검풍이 사방으로 날리자 근처에 있던 나뭇잎들
이 솟아올랐다. 불규칙적으로 날아다니는 나뭇잎들 사이로 파란 광망이 날 선 이빨을 번득였다.
‘아아, 언제부터 내가 저런 검기를 뿜을 수 있게 되었을까?’
사공철이 문득 움직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했다.
짝! 짝! 짝!
“좋군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공철이 몸을 돌렸다. 장염 조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사공철이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조아렸다.
“아직 멀었습니다.”
사공철은 문득 ‘내가 이처럼 겸손했던가?’ 되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느닷없이 파란 검기며 자
신의 겸손함이라니, 이건 혹시 꿈인가?
사공철이 힘겹게 눈을 뜨자 해거름의 황야가 눈에 들어왔다. 거친 풍광 속에 사람들은 셋, 혹은 넷씩
짝을 지어 모여 있는데,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당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자신의 곁에 늘 붙어 다니는 얼굴이 통통한 쌍혈귀였다. 사공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극심한 부상을 당한 이래 묵직하게 굳어있던 목덜미가 편하게 움직여졌던 것이다. 지난번 장염 조
사의 운기행공 덕분일까? 온몸에 가득한 것이 이전에 느껴보지 못하던 신선한 기운이었다.
“이곳은 어디냐?”
“근처에 천주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 어느새 안휘성에 들어왔던 게로군.”
고개를 끄덕이던 사공철이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리고 보니 아스라이 먼 곳에 몇개의 산들이 보였다.
‘그렇다면 저곳이… 천주산인가?’
사공철은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산들 중에 제법 우뚝 솟은 것이 천주산이리라. 그렇다면 지
금 무림맹의 별동대는 천주산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제법 많은 거리를
이동했다. 그동안 자신을 들쳐 업고 다니느라 두 쌍혈귀의 고생이 컸을 것이다.
“무림맹 본진으로부터 연락은 있었다더냐?”
“쩝, 왠걸요, 그놈들이 별동대를 미끼로 삼은 듯싶습니다요.”
쌍혈귀가 혀를 끌끌거리며 대답했다.
미끼가 되었다니, 사공철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쌍혈귀의 말을 들은 뒤라 그런지 붉은
노을을 등 뒤로 하고 앉아있는 사람들에게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믿었던 무림맹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
해서일까? 초췌한 무림인들의 몰골을 살피던 사공철은 ‘그놈이 그놈이라니까’ 하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
다.
그 시간 이무심은 장염과 함께 무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따. 아직 장염에게 무당파가
낯선 것처럼 이무심에게도 청룡당이 낯설었다. 게다가 이무심은 오랜만에 동행하게 된 장염에게 묻고 싶
은 일들도 많았다.
“장 사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소. 무림맹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니 납득이 가질 않소이
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무림맹은 한 사람의 손이라도 필요한 시기인데 이곳의 고수들
을 숩게 내칠 리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장염의 음성은 말과는 달리 왠지 자신이 없는 듯 했다. 이미 강호에서 이 꼴 저 꼴 다 겪은 이
무심이 그 마음을 읽지 못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무림맹에서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구려. 맹주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질 않겠소?”
장염은 대답하지 않고 검게 타오르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 며칠 간 하늘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이무심이 장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청신없이 지내온 날들이었다.
쫓고 쫓기느라 하늘은 고사하고 땅도 살핀 적이 없다. 아마 장 사부는 더 심했을 것이다. 고산에서 몸을
뺀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 동안 혈마사 라마승들의 집요한 추격 속에 몇번이나 위기를 넘겼는지 모
른다.
“장 사부께서 워낙 바쁘질 않았소…”
장염이 이무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대체 무엇에 그리 바빴을까? 한 편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상케 하는 이로? 아니면 무림의 정의라는 고상한 이념 아래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다니느라? 자
신이 알기로 음 과 양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어느 한 편만을 극단적으로 고집
할뿐이다. 그 속에서 자신도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자연의 더하고
덜어내는 이치를 너무 깊숙이 알아버린 탓일까? 이무심을 향한 장염의 음성은 공허하기만 했다.
“바람이 일면 구름은 떠나갑니다.”
장염이 청명검의 고색창연한 검집을 툭툭 치며 말했다.
“누구든 칼로 흥한 자는 결국 칼로 망하고 말 터인데… 언제나 이 덧없는 분란이 가라낮을지 걱정입니
다.”
장염은 자꾸만 날카로워져 가는 자신의 검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면 공력과
검기가 더욱 의지대로 좌우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더 많은 파괴를 가져오고
있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데, 세상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
고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명해졌다.
“내 장 사부가 추구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지금은 장 사부의 검이 필요한 세상이오. 나는 그것
이 장 사부를 향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외다. 지금 저들의 하늘을 거스르는 행위는 사람의 힘으로 막
을 수조차 없지 않소?”
“그러나 그들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역천의 힘이라면, 어쩌면 저 역시 그들과 같은 부류일지도 모릅
니다. 저도 하늘을 거스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이지요.”
“…….”
이무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장염이 역천의 힘이라니! 자신은 단 한번도 장
염의 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장염도 착잡한 눈빛으로 이무심을 마주 보았다. 세상에 어차피 절대적인 선이란 없다. 경재학이 그랬고,
무림맹이 그랬으며, 사마외도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나름
대로의 삶을 살아갔다. 그들은 지금까지 서로를 용납하지 않았고, 상대에게 적당한 피해를 끼치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걸 수없이 경험한 장염은 자신이 어느 한 편에 서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기에
는 자신의 힘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혈마사와 오행혈마인이 역천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상
대인 자신도 역시 같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장염이 생각하기에 역천과 순천은 서 있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달랐다. 요즘 들어 장염은 자연계를 초월할 수 있는 자신의 절대적인 능력이 두렵기 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어지는 노을 속에 대화마저 무겁게 느껴지자 이무심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장 사부를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소.”
장염의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이무심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한 달쯤 전 저기 있는 네 사람 중 세 사람과 손을 섞은 적이 있소. 그런데 마지막에 내가 이해하기 어
려운 일이 일어났다오.”
이무심이 다비천왕의 건검을 집어 던졌을 때 일어나 현상에 대해 자세히 셜명했다.
“나는 지금껏 그 이치를 알기 위해 수없이 고민했지만 아직 알지 못했소. 장 사부에게 그 이유를 듣기
위해 오래 기다려 왔소만…..”
장염이 이무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염이 들으니 태극양의검법으로 건검을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에게야 이상할 것도 없는 문제이지만, 이무심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문제 일지도 모른
다.
“이 대협, 태극양의검의 궁극은 용의불용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대협이 느낀 것은 바로 그 초입의
단계인 이기어검입니다. 처음에는 기로써 검을 부리고 그 다음은 의지로 검을 부립니다. 며칠 전 이대협
이 연공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를 허공에 풀고 있더군요. 자신의 기를 허공에 풀어 끝까지 그 기
세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기어검의 시작입니다.”
이무심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이기어검이라니! 듣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떨리는 소리
였다. 자신의 나이 이제 사십 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지난 오 년 간 쉬지 않고 무극일원심법을 운용했지
만 설마 하니 이기어검에 근접했다는 말을 듣게 될줄은 몰랐다.
“정말… 내가 어검술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이오?”
“이 대협의 말씀은 분명 이기어검에 대한 것입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오?”
장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검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진기가 상련부단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순한 공력과 평상심의 유
지가 관건입니다. 공력도 문제이지만, 만일 그 마음이 올곧지 못하면 기가 흐려지고, 그렇게 된다면 주화
입마의 위험도 뒤따르게 되는 법입니다.”
이무심의 얼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검술의 지고한 경지란 결코 한걸음에 다다를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맛본 그 희열을 어찌 누르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장염이 이무심의 얼굴에 가득한 열망을 알아채고 더욱 진중하게 말했다.
“이 대협께서 어검술을 펼치실 때는 단전에 공력이 가득하고 마음이 혼탁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짧
은 시간 홀로 수련할 때라면 그런 기회가 한두 번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 이외에는 모든 것이 충분히
갖추어질 때까지 어검술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무심의 얼굴에 희망과 좌절이 거듭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손끝에 잡힌 이기어검의 초입이었다. 그러
나 장 사부의 말을 들으니 그것을 펼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전에 끊임없이 공력이 가득하
기도 어렵거니와 무념무상에 가까운 평상심을 유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살아생전에 자유롭게 이기어검을 펼치고 거둘 수 있을까?”
이무심의 얼굴에 떠오른 번민을 보고 장염이 격려했다.
“이 대협께서 하고 계시는 허공에 기운을 푸는 연습이야말로 이기어검의 수련에 더없이 좋은 방법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심을 유지하며 기운을 끊어지지 않게 풀어가다 보면 언젠가 원하는 때에 자유롭
게 펼치고 거두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장 사부의 말을 들으니 막혔던 가슴이 뚫린 듯하오.”
비록 현재는 불가능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무심은 만족하기로 했다. 장사부가 아니라면 누가 이
런 문제를 속 시원히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자유롭게 검을 다루고야 말리
다.
장염은 이무심의 얼굴에 떠오른 결의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과연 이무심이 어검술의 유혹을 견
딜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보다 좋은 것에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자신의 손안에 놓여 있다
고 느낄 때는 더욱 그렇다.
문득 장염은 향이와 이무심에게 찾아온 기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태극양의검법
의 궁극인 용의불용력에서 온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추구하던 바로 그 최후의 경지가 은연중에 사람
들에게 기연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향이는 그녀의 신선주의 공력과 그녀의 고운 심성 때문에 기연을 얻었다. 검기점혈이라는 지고한 경지
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연공 기간이 짧은 향이의 검기점혈은 불완전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불
완전한 공력이었지만 향이는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무심은 달랐다. 특별한 기연이 없는 이무심은 향이만큼 공력이 갚지 못하다. 그런 그가 평상
심마저 잃게 된다면 이무심의 이기어검은 그를 주화입마로 이끌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장염은 이무심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둘다 불완전했지만 향이와는 달리 이무심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대협의 마음에 성급함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장염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무심의 일은 이제 그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욕심없기를 바라지만 그럿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단지 바랄 뿐’ 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오욕칠
정을 다스릴 수 있는 그때에야 비로소 이무심은 한 사람의 진정한 무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장염이 떠나가자 이무심은 자신이 이기어검을 펼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참오하기 시작했다.어차피 공
력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늦은 나이지만 장염이라는 일대 기인을 만나 일원무극심법을 전수 받았다.
그 심법은 생활 가운데 연공할 수 있어 지금은 나름대로 작은 성취가 있었다.
‘물론…. 이기어검을 펼치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무심에게 있어 정작 문제는 평상심이었다. 자신이 이기어검을 간절히 원하는 바는 자식과 제자들의
복수를 위해서다. 어찌 원수를 눈 앞에 두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도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간 자식을 생각하면 손이 부들부들 떨릴지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어검은 가장 필요한 것
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이기어검을 완성한다.’
자신의 이기어검이 경재학과 마교의 고수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라
도 없다면 살아갈 힘이 없게 된다.
이무심이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점점 멀어져 가는 상승의 검술을 생각하며 한숨지었다.
‘하늘은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이것은 기회인가, 더큰 절망인가….’
이무심에게서 떠난 장염은 무당파 사람들이 마련해 놓은 자리로 가지 않았다. 갑자기 무당파의 울타리
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노호의 살기 어린 눈빛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적반하장이
라는 말은 노호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것이었다.
처음 노호를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내가진력에 당해 생사의 위기를 넘겼다. 혈마사에서 탈출할 대 노호
는 자신을 핍박했으며, 이제 무당파 사람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악연이 있나.’
생각할수록 노호와 자신은 정말 악연이었다. 세상에 살면서 만나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나 보다. 장염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자신도 지금까지 노호에게 호의를 베풀지 못했다. 언제나 노호가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를 싫어하고 있는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더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장염에게 있서 수련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본래의 성격상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한참 만에 장염이 자리 잡은 곳은 사방을 관측하기에 좋은 약간 높은 지대였다. 다행히 그 자리는 무리
의 중간쯤 되는 위치라 마음도 편했다 장염은 그곳에 몸을 뉘일 만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장염이 쉴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어느덧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갔다.
“아니, 아래에 마련한 자리가 불편하시면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지지 않구요.”
정좌를 하고 있던 장염은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음성에 눈을 떴다. 가까운 곳에 춘양 진인이 기척없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춘양 진인의 손에는 작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아닙니다. 원래 스스로 손발 놀리기를 즐겨 하는지라….”
장염의 곁으로 다가온 춘양 진인이 작은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건량입니다. 그리고 혹시 사숙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무 때라도 말씀하십시오.”
장염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
춘양 진인은 더 말이 없는 장염을 힐끔 쳐다보았다. 장염이 건량만 받아 들뿐 다른 필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 사숙은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인가?’
남들이 인정하든 말든 무당파는 당금 무림을 이끌어 나가는 하나의 거대한 축이다. 무림을 이끌어간다
는 말은 무력과 재물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대문파는 터를 닦은 지역세서 단지 명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산한 제자들 중에 일부는
표국,객점,주루,도박장 등을 운영했다. 그들은 하산한 이후에도 수입의 일정 부분을 출신 문파에 기부해
왔다. 그것은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고 있다는 감사의 마음도 있었지만, 무력을 사용하게 될 경우 사문
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문하생뿐이랴? 지역에서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대문파와 친분 관계
를 유지하려고 했다. 구대문파는 그런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고다운 대상이었다. 재물이 넘치는 사
람들은 자식들을 문하생으로 들여보냈고, 이런저런 이유로 재물을 희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
대문파는 그들이 자리 잡은 지역에서 상당한 재물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 춘양 진인이 말한 것에는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문파의 어른으로서 무당파에 넘치는 재물
을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장염은 그런 문제에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허… 강호에서 생활하려면 최소한도의 재물이 있어야 할 텐데…’
춘양 진인은 장염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장가촌의 궁핍함은 말할 나위도 없고, 돈
이 없어 주방에서 일해야 했던 장염의 과거까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장염은 도통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
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기사 지금같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무슨 그런 사치스런 일을 떠올릴 수 있을까? 장염에게
조금씩 문파의 일을 이야기해 주려던 춘양 진인은 씁쓰레하게 웃으며 고래를 저었다. 아직은 소소한 이
야기로 시간을 보낼 만한 때가 아니었다.
“장 사숙의 몸은 괜찮습니까?”
춘양 진인이 생각났다는 듯 장염의 아래위를 세세히 살폈다. 장염은 퇴로를 막아주기 위해 항상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때문에 앞이 막히면 다시 앞으로 달려와 달아날 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어제도 끈질긴 혈마사의 추격을 받았지만 장염 덕에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뒤늦게 돌아온 장염
의 한쪽 어깨가 피로 물든 것을 보았다. 춘양 진인은 장염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ㅏ.
춘양 진인의 눈이 어깨 부위에서 떠나지 않자 정염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 부상을 입은 사람이 한둘입니까?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저의 상처는 가벼운 것입니다.”
“장 사숙께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람들을 차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 사숙 같은 고수가 피를
흘릴 지경이었다면 그 내외상이 실로 적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본래 무공이 깊지
않으니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입지만, 장 사숙은 그런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염이 듣기에 거북한 이야기였지만 춘양 진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반 사람들의 상처와 장염 같은 고
수의 상처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장염 같은 절대 고수는 어지간해서는 피부가 상할 일도 없
다. 그런 고수가 피를 흘렸다는 것은 몸에 엄청난 손상을 입은 것이다.
“장 사숙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무당파뿐만 아니라 무림이 장 사숙을 필요로 하고 있습
니다.”
“하하, 장문인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몸은 그다지 크게 축나지 않았으니 심려치 마십시
오.”
“…..”
마음 같아서는 장염의 어깨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사숙에게 무례하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춘양
진인은 몇 번이나 장염의 몸을 살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공 중인 사숙에게 불쑥 찾아와 너무 오
래 머물렀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최선은 장염 사숙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장 사숙,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장염도 자리에서 일어나 춘양 진인에게 모리를 숙이며 말했다.
“장문인께서도 몸을 잘 돌보셔야 할 것입니다.”
“…..”
장염이 보기에 춘양 진인의 상세도 쉽게 회복될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그나마 곁에 자기가 있으
니 무리하지 않게 된 정도다. 그러니 장염의 입장에서는 장문인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헛! 알겠습니다.”
춘양 진인은 서로의 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니 왠지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언제 자신
과 무당파에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상상이나 했던가! 허리를 세운 춘양 진인은 검은 산 그림자를 바라보
며 몇 번을 더 웃다가 자리에서 떠나갔다.
* * *
황야의 뒤편에 하늘에서 흙더미를 뚝뚝 떨어뜨려 놓은 것 같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다. 해가 지기 시작
할 무렵 바로 그 기묘한 산 사이로 북은 가사를 걸친 라마승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피처럼 북은 가사
를 걸친 라마승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자 골이 깊은 산 주변은 금세 음산해지기 시작했다.
“필요 이상으로 살기가 가득하구나.”
정상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던 마하륵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살기가 너무 강했다. 이미 극마
의 지경을 넘어선 마하륵에게 그것은 거북했고, 굉장한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마하륵이시어, 형제들을 잃은 슬픔 때문입니다.”
마하륵은 곁에 다가와 공손히 말하는 혈마륵을 바라보았다. 혈마륵은 허리에 천을 친친 동여매고 있었
는데 그 사이로 지금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변한다. 죽음도 변화의 일부분일 뿐이니 크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피에 물든 혈마륵의 허리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보래 혈마사의 승려들은 죽음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해 크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가벼이 여기기 까지 했다. 자신도 지금까지 그
렇게 믿고 살아왔따. 그런데 요즘 들어 마하륵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죽음은 가벼운 것만도 아니라는 생
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더 흥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하륵이시여, 열흘 사이에 형제들 오십여 명이 성불하였습니다.”
마하륵은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성불한 것은 축하할 일이지 분노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육체는 죽으면 흩어져서 다시 본래의 흙, 물, 불, 바람으로 되돌아가 버리지만, 마음은 항상 신령하여
하늘과 땅, 온 세상에 가득하고 영원하다.”
혈마륵은 정좌하고 있는 마하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혈마사의 주지인 마하륵은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일까? 무극지기의 주인에게 당한 혈마사의 라마승 오십여명을 직접 성불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혈마륵 자신이었다.
무극지기의 사내와 마주친 형제들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직접손을 맞댄 사람은 내공이 소멸됐고, 간접
적으로 그의 검기에 휩쓸린 사람은 내상을 입어 자유로운 운신이 불가능했다. 혈마륵은 그런 라마승들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지금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혈라마들이 중원에서 서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강호에서 홀로, 혹은 작은 무리로 여행하
는 라마승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라마교 이단인 혈마사의 라마승 때문에 애꿎은 정통라마교의 승려들
도 분노한 무림인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반 라마승마저도 살해당하는 마당에 무공을 발휘할 수
없는 혈라마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혈마사가 중원에 온 목적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혈라마는 마하륵에게
진언하여 형제들을 성불시키게 되었다. 혈마륵이 더 살기를 띠는 이유는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았기 때문
인지도 몰랐다.
혈마르그이 답답한 심정이 전달되었기 때문일까? 마침내 감겨 있던 마하륵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그토
록 바랬건만 혈마륵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앞에 감히 마주 설 수 없었다. 머리를 숙이는 혈마륵의
귀로 마하륵의 낮게 깔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느냐?”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지만 중원에서는 그를 장천사라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흠……”
혈마륵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찾아들었던 마을에서 한인들의 절규를 들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죽어
가면서도 마귀들을 무찌른다는 장천사를 찾았따. 호기심으로 그 장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탐문하던 혈마
륵은 무림맹에서 용을 타고 승천한 장천사, 그가 바로 무극지기의 사내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
다.
“장천사라면 저들이 섬기는 신선이 아니냐?”
중원인들에게 있서 장천사는 장도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도릉이라면 천 년 전 ‘하늘이 이 땅 위에
내려보낸 인류의 스승’ 이라는 뜻에서 자신을 ‘천사’ 라고 칭하던 도인이다. 마하륵도 그를 중심으로 일
어난 종교가 천사교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혈마륵의 대답을 듣던 마하륵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장천사라… 그럴 법도 하지.”
“그는 정말 신선입니까?”
“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너는 이미 그와 대면했으니 잘 알 것 아니냐?”
마하륵의 눈이 다시 혈마륵의 허리 어림으로 향했다.
혈마륵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허리의 성처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가 신선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마하륵은 혈마륵의 자존심을 잘 알고 있다. 그런 혈마륵이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상대라면 역시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여기서 저 무극지기의 사내, 장천사라 일컬어지는 남자를 꺾지 못하면 더이상의 중원행
은 불가능한 것이다.
“네가 보기에 그의 나이는 어느 정도나 되어 보이더냐?”
“가까이서 보니 이제 겨우 삼십 재 정도로 보였습니다.”
“음… 무공이 인간의 경지를 넘으면 오히려 다시 젊어진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마하륵은 처음 아미타삼혈존에게서 상대가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
러나 지금 혈마륵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사내는 반로환동의
고수일지도 모른다.
혈마륵은 마하륵이 장천사가 반로환동의 고수인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묵묵히 고래글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미타삼혈존과 자신의 공세를 뚫고 유유히 사라질 리가 없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허리의 상
처가 다시 은은히 저려왔다.
어제 정오 무렵 혈마륵은 아미타삼혈존과 함께 길을 조금 앞질러 가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만
늦어도 대부분의 상황은 이미 종료된 뒤였기 때문이다. 그가 마하륵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면 애써 따라
잡은 무림인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있고, 대지위에 나뒹굴로 있는 것은 무공을 잃은 혈라마뿐이었다.
사실 무림인들의 움직임은 혈마사보다 조금 느렸다. 혈마사에서는 자신이 직접 무공을 잃거나 움직이기
어려운 동료를 성불시켜 주었기에 전체의 행진 소도가 느리지 않았다. 그에 반해 무림인들은 부상자들을
모두 이끌고 도망치는 형편이었다. 그 덕에 혈마사가 쉬지 않고 뒤를 쫓으면 무림인을 따라잡을 수 있었
다.
그러나 그 무림인들에게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미타삼혈존의 말에 의하면 장천사가 번번이
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장천사는 혈마사의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나 가장 늦게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처
음에는 아미타삼혈존이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혈마사 최고라 일컬어
지는 아미타삼혈존은 처음부터 장천사의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까지만이라도 붙잡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장천사를 놓치곤 했다.
혈마사의 전진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모두가 빨리 움직여 주는 것은 아니다. 혈마사에도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혈마륵은 그중에서도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아미타삼혈존과 함
께 무림인들이 가는 방향을 앞질러 갔다. 그리고 그토록 마주치기를 원하던 장천사의 일행과 대면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다섯 명의 도사를 땅에 눕혔을 때 아미타삼혈존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자가 바로 그 장천사입니다!”
아미타삼혈존이 가리키는 곳에 한 젊은 사내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갓 삼십이나 되었을까? 삼
십치고는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그 이하로는 보이지 않는 젊은 사내가 도사들을 좌우로 가르며
달려왔다. 아니, 장확히는 도사들이 사내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
“그대가 장천사인가?”
어색한 한어를 동원하여 정중히 물었건만 상대는 질문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한어에도 종류가 많다더니…..’
처음에는 상대가 전혀 말을 못 알아듣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조금 후에야 그가 못 알아듣는 것은 ‘자
신이 장천사라고 불린 것’ 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찍이 서장에서 그대들의 고행하는 모습을 보았소. 가는 길이 다르다고는 하난 멀리 이곳까지 와서
수행할 이유는 없다고 보오만,원하는 것을 아직 얻지 못했소?”
사내의 음성에선 그다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중원에 혈마사의 오대참화라는 것이 전해지지 않을
리 없건만, 특이한 사내였다. 그는 단지 ‘가는 길이 다르다’ 는 말로 혈마사의 행위를 일축하고 있었다.
게다가 원하는 것이라니? 설마 하니 이자는 혈마사가 중원에 온 목적 중의 하나가 오행혈마경의 회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신앙이나 서로의 비밀에 대해 논의할 때가 아니다. 혈마륵은 사내가 단지 ‘
무극지기의 주인인 장천사’ 라는 것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극지기의 주인인가?”
사내는 무극지기라는 말에 일순 놀라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해탈시켜 주마.”
혈마륵은 다짜고짜 사내의 정면으로 검지손가락을 곧게 뻗었다. 전륜신공을 일으킨 뒤라 ‘찌직’ 하는 소
리와 함께 지풍이 뻗어 나갔다.
이 정도의 공세라면 막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혈마륵이 처음부터 자신의 절학인 지풍으로 공격한 것은
스스로의 투쟁 본능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왠지 사내와 대화를 나누자니 마음이 느슨해지고 권태로
움마저 밀려왔기 때문이다. 사내가 피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면 그 순간 달려들어 가루를 내고 말리라.
그러나 사내는 혈마륵이 날린 지풍을 피하지 않았다.
퍽!
사내의 몸에서 울려 나오는 격타음에 깜짝 놀란 것은 혈마륵과 아미타삼혈존이었다.
심장 어림을 강타당한 사내는 오히려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해탈은 타인이 시켜줄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 급박한 순간에 그런 것까지 꼬치꼬치 따지고 들다니, 상대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혈마륵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으며 뒤로 물러났다. 장천사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곁에 있던 아미타삼혈존도 자신을 따라 뒷걸음치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다
섯 사람 사이로 지나갔다.
그때였다. 멀리서 구경하던 무림인들 틈 속에서 작은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혈마사의 라마승
들이 근처까지 다다른 듯 싶었다.
무림인들이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하자 땅바닥에 처박힐 번했던 혈마륵의 투지가 한순간에 솟구쳐 올
랐다.
“형제들, 마하륵께서 오시기 전에 속히 끝을 내자!”
혈마륵이 장천사의 정면으로 달리며 소리치자 아타삼혈존도 좌우로 갈라지며 따라붙었다. 네 살마이 풍
차처럼 휘두르는 강철 선장은 무엇이든지 가루로 만들 것처럼 보였다.
부웅! 붕! 붕! 붕!
폭풍처럼 휘몰아쳐 가는 네개의 선장 한가운데 장천사는 조용히 서 있었다.
아미타삼혈존의 선장이 장천사의 머리와 양쪽 허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얼핏 보기에 장천사의 몸은 그
냥 가만히 서 있는데 아미타삼혈존이 일부러 피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있나……’
중얼거리던 혈마륵은 장천사의 머리를 향해 전륜무적의 초식을 펼쳤다.그의 손끝에서 강철 선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천사의 머리가 부서진다고 생각한 순간, 정작 혈마륵의 눈
에 걸린 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었다.
“헉!”
그제야 장천사의 신법이 절륜하여 모두가 비껴 지나간 것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네 사람이
바람처럼 장천사를 스쳐지나간 뒤, 처음으로 움직임을 멈춘 사람은 마혈존이었다.
혈마륵이 보니 어느 틈에 마혈존의 눈빛은 서장을 유랑하는 수많은 수도사들과 닮아 있었다. 그 허탈과
무상함이 가득한 동공이라니. 마혈존은 그간의 내공을 모두 상실당한 것이 분명했다.
남은 분노존과 수호존이 혈마륵에게 힐끔 눈길을 던졌다. 한순간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허무와 슬
픔이었다. 장천사에게 무공을 폐쇄당했다는 것은 곧 성불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과 같다.
다음 순간 수호존과 분조존이 괴성을 지르며 장천사에게 육박해 들어갔다.
장천사는갑자기 사나워진 두 사람의 모습에 일순 당황하는 것 같았다. 놀란 장천사가 양손으로 수호존
과 분노존의 선장을 붙잡았을 때, 혈마륵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그의 열린 가슴으로 선장셈?밀어 넣었
다. 장천사의 상체가 살짝 비틀어졌지만 선장은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꽈직!
쇠가 바위에 박히는 소리를 내며 선장은 장천사의 좌측 어깨에 박혀 들어갔다.
‘성공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다. 장천사의 상체가 부드럽게 흔들렸다고 느낀 순간 박힌 줄 알았던 선장을 통
해 감당할 수 없는 반탄력이 밀려 들었다. 혈마륵은 자신도 모르게 선장을 놓고 말았다.
“크윽!”
장천사의 어깨에 꽂혔던 선장은 도리어 빙글빙글 돌며 혈마륵의 허리를 때리고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보니 장천사가 어깨로 선장을 걷어낸 꼴이 아닌가!
장천사가 연이어 두 손을 흔들자 수호존과 분노존도 자신처럼 멀리 팅겨져 나갔다.
‘어찌 이럴 수가….!’
수호존과 분노존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피를 보는 순간 혈마륵의 가슴으로 오한이 치밀기 시작
했다. 단 두 수 만에 혈마사 최고고수들 모두가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사람들의 귀에 멀리서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장의 끝에 매단 강철 고리가 울리는 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호존이 재빨리 마혈존을 들쳐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분노존도 그 뒤
를 따랐다.
혈마륵이 보니 장천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마도 그난 자비를 베풀었건만 세 사람이 더
욱 미친 듯이 달려든 이유를 알 수 없었으리라.
장천사는 혈마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선두의 라마승이 보일때쯤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사라졌다.
혈마륵은 혈마사의 본진이 올 때까지 허리를 움켜쥐고 움직이지 않았다. 장천사의 눈빛과 앞으로 자신
이 해야 할 내키지 않는 일들 사이에서 그만 현실을 잊고 만 것이다.
“아직도 어제의 일을 생각하느냐?”
문득 고개를 드니 마하륵이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에는 도망 다니던 그가… 어제는 왜 그처럼 손을 썼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사실 지금 혈마륵이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이다. 어쩌면 속으로 장천사를 경원시했던 것도 다 아미타삼
혈존이 ‘그는 달아나기를 잘한다’ 라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 모르겠느냐? 그는 자기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다.”
“…..”
자기를 위해서 싸우지 않는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혈마륵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마하륵을 바라
보았다.
“그 이전에는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어제도 우리가 다급하게 뒤?지만 않았어
도 그는 무림인들을 다 보낸 뒤에 또 달아났을 것이다. 무림인들에게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고자 급하게
손을 쓴 것이겠지. 왠지 장천사란 사람을 만나보고 싶구나.”
마하륵은 지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싸워서 제거할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혈마사의 최대 걸림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천사를 말이다.
게다가 마혈존의 죽음은 자신의 성급함 때문이란 말인가? 혈마륵은 마하륵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
다.
“마하륵이시여.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해 싸우지 않습니까? 그의 모든 것은 위선입니다.”
마하륵이 혈마륵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내게는 그가 위선이기를 바라는 것으로 들리는구나.”
“……”
사실 혈마륵에게 장염에 대한 원한이 새겨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의 일 이후다. 그 이전까지 장염은 그
저 대단한 중원의 고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제저녁 혈마륵은 장염 때문에 마혈존을 성불시켜 줘야 했
다.
마혈존은 천령혈에 손을 얹은 혈마륵에게 ‘제르 제용(다음에 보자)’ 이라고 했다. 그러나 혈마륵은 마혈
존의 눈을 외면했다. 아니, 내세에도 이런 식으로 이별해야 한다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른 혈마사의 라마승들과 달리 아미타삼혈존은 혈마륵에게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혈마륵이 다음 세대
를 이끌어갈 혈마사의 차기 주지감이라면, 아미타삼혈존은 그를 도와 혈마사를 이끌어갈 사람들이다. 혈
마륵은 마하륵의 곁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곁에는 아미타삼혈존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 아미타삼혈존의 하나인 마혈존을 어떤 이유로든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다. 혈마륵은 지금 그것이
괴로웠다.
‘네가 반로환동의 고수든 뭐든 다시 만나면 반드시…..!’
마하륵은 혈마륵의 원념에 가득한 눈동자를 보며 허탈한듯 말했다.
“과연 너는 형제들을 성불시켜 주지 못하였구나.”
혈마륵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형제들을 성불시켰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마하륵의 말
을 듣는 순간 그 믿음이 흔들인 것이다. 형제들을 성불시켜 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은 과
연 무엇이란 말인가? 마혈존은 차지하고라도 그 이전에 자신의 손으로 이승을 떠나게 한 수많은 형제들
이 있다.
연약해진 믿음만큼 혈마륵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하륵은 격동에 떨고 이쓴ㄴ 혈마륵을 보며 천천
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중원에 와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행위가 시험받고 있다. 너는 그에게
복수하려고 하기에 앞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거라.”
마하륵이 떠나가자 혈마륵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음의 갈등으로 혈기가 솟아 허리에서
피가 더 많이 배어 나왔지만 혈마륵은 쳐다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혈마륵이 앉은 자리로 피가 홍건
히 고이기 시작했다.혈마륵은 자신의 몸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았다.
‘저것은 나의 피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흡혈한 다른 사람의 피인가.’
혈마륵은 몽롱한 가운데 자신의 몸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심장마저 굳어지며 숨이 서
서히 멈추어졌다. 입을 벌려 소리를 치려고 해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검은 하늘이 눈앞으
로 다가왔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지자 몸이 뒤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주화입마인가….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전신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던 혈마륵은 마침내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후 모
든 것이 멈추었다. 그렇게 혈마륵이 자신의 몸에 찾아든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순간이었다.
“나.무.아.미.타.혈.”
혈마륵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하륵의 진언이었다. 혈마륵은 조용히 마하륵의 음성
을 들었다. 마하륵은 동이 터 오를 때까지 진언을 멈추지 않았다.
혼돈의 와중에서도 혈마륵은 자신을 생으로 잡아 끌어주는 마하륵이 고마왔다.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책망하지 않는 마하륵이다. 혈마륵의 가슴에서 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잠
정이 솟아났다.
‘살고 싶다. 정말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
그토곡 죽음을 경원시하던 혈마륵이었지만 그날 밤 그는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의 바램 때문이
었을까? 새벽 미명이 서서히 밝아오자 혈마륵의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근육이 다시 뒤틀리자 마하륵은 부드럽게 혈마륵의 몸을 감싸 안았다.
“네가 살아서 바르도(죽은 뒤 사람의 영혼이 49일 동안 경험하는 혼몽한 세계) 를 경험하였구나. 언젠
가 너도 알게 될 테지만, 피는 우리 수행의 방편이지 목표가 아니다. 어쨌든 아루래도 우리가 본 사로
돌아갈 날이 다가온 것 같다.”
혈마륵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아직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혈마륵은 마하륵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랬다.
‘그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하륵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바르로들 경험했다는 것은 혈라마께서 너를 차기 주지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곧 혈라마께
서 너에게 강림하여 말씀하실 것이다. 그때는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본 사로 돌아가야겠지. 그전에
나는 장천사를 만나야겠다.”
혈마륵이 눈을 끔뻑이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나타냈다.
‘마하륵이시여, 장천사는 반드시 제 손으로…..’
“너는 아직도 생사에 그토록 집착하느냐? 혈라마께서 그런 너를 차기 주지로 세우셨다니, 알수가 없구
나.”
답답하다는 듯 혈마륵의 눈이 찡그려졌다. 마하륵은 그런 혈마륵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네가 생사에 잡착하는 만큼 원한이 깊을 것이다. 알고 보면 원한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
“마하륵이시여….. 저는 결코… 결코…..”
겨우 혀가 풀린 혈마륵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사실 마하륵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단지 원한을
풀고 싶었다. 마하륵이 저처럼 반대하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위대한 혈라마 께서는 자신
의 이런 바램을 이루어주실까?
제 2장 바람은 멈추었으나 물결이 인다
무림맹의 본진이 별동대와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 경재학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경재학이 본진
을 별동대에게 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아니다. 경재학은 나름대로 열심히 별동대와 합류하기 위해 애
를 썼다. 그러나 그것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재학은 처음 고산의 오색약수에서 별동대와 합류하지 못했을때 별동대의 몰살을 예감했다. 그러나 별
동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안휘성의 천주산 방면으로 이동했다. 비록 별동대의 몰살을 애타게 바라는 경
재학이었지만 그걸 드러내 놓고 표현할 바보는 아니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를 때 경재학도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별동대가
몰살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합류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직까지 별동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이쓴 것은 전적으로 경재학의 청부 때문이었다.
몽고의 기마대는 처음 장염에 의해 별동대 몰살 작전이 실패하자 다른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자기들의
병력을 잃지 않으면서 별동대를 없애는, 이른바 차도살인의 묘였다. 몽고군은 벌판에서 뜻하지 않게 병
사를 잃고 나 후 전략을 조금 수정했다. 생각보다 고강한 별동대의 무공에 차라리 그들의 처분을 혈마사
의 손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병법에 익숙한 몽고족 기마대의 장군에게 그것은 간단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적당한 시기에 무림맹
본진의 진로를 막는다’ 였다. 그 바람에 천주산 근처에 이르기까지 무림맹 본진은 졀정적인 순간마다 몽
고족의 기습 공격을 받아야 했다.
“대체 저들이 왜 이곳까지 와서 설치고 있단 말이오!”
화산파 장문인 상유천이 정면을 응시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며칠 전부터 따라다니는 기마병은 조금
이라도 시야가 확 트인 지형이 되면 바람처럼 달려들어 창을 휘젓고 사라졌다. 그 기마병이 아침나절부
터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벌써 별동대와 만나기로 약속한 지점에서 세 차례나 벗어났다. 그 한 벗ㄴ씩의 어긋남마다 얼마나 많은
별동대가 죽어갔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상유천의 옆에서 전방을 살피던 신룡 진인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도도 그것이 이해가 가질 않소이다. 사실 저들의 상대는 우리가 아니라 관군이 아니겠소? 게다가 지
금이 어떤 때요? 황제께서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에 나선 시기가 아니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외다.”
신룡 진인의 표정도 상유천 못지 않게 어두웠다. 어디 신룡 진인뿐이랴? 구대문파 모두가 별동대에 자
기 문파의 제자들을 파견한 바 있으니 실로 암담한 노릇이었다.
지금도 신룡 진인과 상유천이 바라보는 들판에 한 떼의 기마대가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몽고의 기마
대는 기습에 뜻이 없다는듯 자기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림맹으로서는 그들이 왜 길을 막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기마대가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냈으니, 지금은 공격받지 않는다해도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장문인들이 투덜거리고 있을때 임시 막사 안의 경재학도 불편한 심기를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자자들이 이제 직접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려 하는구나.’
한껏 양보해서 그것까지는 이해할수 있다. 어차피 자신의 목적은 별동대의 몰살이니까 말이다. 누구의
손에 죽더라도 장염을 비롯한 별동대가 죽어주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자신이 저들을 요령껏 돌파해서
별동대와 합류해야 한다는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림맹이 무능했다고 원망을 살 터인데…..’
어디 원망부니랴? 자신을 비롯한 사대문파 장문인이 장염과 적대시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만
약에 저 오백여 명의 기마대를 뚫지 못하고 게속 끌려 다니기만 한다면 훗날 두고두고 비만을 받게 될
것이다. 아루미 생각해도 ‘가장 좋은 것은 저들이 직접 별동대에 뛰어 들었어야 했다’ 는 거이다.
경재학은 머리가 지끈 거리기 시작했다. 몽고족은 생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고, 지금 또다시 별동대를
하룻길 앞에 두고 기마대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역시 해야 할 일은 자기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이 좋다.’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은 부인인 경영자가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친 것
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십여 년 전 자신의 손으로 교하국과 혈마사까지 뒤집어놨는지도 모른다.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경영자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알겠느냐? 무엇인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네 손으로 직접 하거라. 네 손으로 할 수 없는 일이거든
남에게 시키지고 말거라.자기 능력에 버거운 일을 남에게 맡겼다가는 훗날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되어
돌아오다.”
부친은 나라가 망했어도 원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경재학은 혈족들이 쉬쉬하
면서 부친에 대해 불평하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경영자가 힘을 쓴다면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
나 경영자은 한 번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아버지는 왜 나라를 찾지 않아
요?’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도 경영자는 정색을 하고 야단쳤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말고 모두 잊어라. 내가 나서서 국운이 회복될 것이었다면 벌써 나섰을 것이다. 그
러나 이미 하늘은 우리를 버렸다. 너도 다른 사람들의 쓸데없는 말에 관심 가지지 말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만 생각해라.”
그러나 그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없었다. 가문에서는 후손들 중 누구도 명나라에서 관록을
얻지 못하게 했다. 어른들은 ‘나라없는 백성이니 더 이상 관직을 얻을 수 없다’ 고 했다. 그렇다고 다시
나라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후손들에게 그저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죽기를 강요
했던 것이다.
독자로 태어난 경재학은 어린 시절 벌모세수를 하여 혈기가 왕성했다. 그러나 그 차고 넘치는 순수한
힘을 사용할 곳이 없었다. 결국 경재학은 집안위 종복들을 불러 보아 간단한 병정 놀이를 즐기기로 했다.
그 병정 놀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과격해지고 세밀해져서 나중에는 죽거나 다치는 사람까지 나왔지만,
집안의 어른들은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달리 그 힘을 방출할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서로가 시대
를 잘못 타고 태어난 죄라고 여겼다.
뒤늦게라도 초원으로 보내면 힘 쓸 곳을 찾아볼 법도 하건만 사실 원나라는 재기 불능이었다. 경영자는
하나뿐인 아들을 초원으로 돌려보냈다가 절명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욕심으로 그 아들의 넘치는 힘을
꾹꾹 눌러 담게만 했다. 그렇게 재능과 힘이 억눌린 상태에서 경재학은 무공을 배워 나갔다.
경재학은 장년이 되어 가문의 무공을 대성한 뒤 ‘나라를 찾겠다는, 헛된 짓을 하지는 않겠다’ 는 약속
하에 강호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검진강호 란게 너무도 시시했지.’
정말 그랬다. 그때는 정말 세상이 무미건조했다. 강호가 요즘처럼 이렇게 짜릿했더라면 자신은 순수하
게 무림의 안녕을 위해 헌신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그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자기 목숨이 달아날판이다.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조차
내려지지 않았다.
‘뚫고 나가야 하나, 맥없이 기다려야 하나.’
경재학은 암담한 가운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마치 가문의 어른들이 후손의 질로를 결정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도 그만큼 늙었다는 거겠지.’
경재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따. 막사 밖에서 총관 산전수전 목불인의 조심으러운 음
성이 들렸다.
“맹주, 장문인들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알겠소.”
경재학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걸어갔다. 어차피 장문인들이 찾아온 이류래야 뻔하다. 그들은 이구
동성으로 저 몽고의 기마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물어보리라.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어디 있다고….’
문득 제갈가의 가주인 제갈천이 떠올랐다.
‘제갈가의 천 가주가 살아 있었다면 좋은 수를 내줄법도 한데.’
그러나 제갈가는 이미 무림에서 멸문당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지금 이 상황을 재치있게 극복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몽고의 기마대는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해주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경재학의 앞에 사대문파 장문인들이 나타
났다.
“맹주, 대체 저 기마대를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이미 멸문의 화를 입은 청성파의 장문인 파운신권이 경재학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문파가 멸문당
해 급격히 제자의 수가 줄어 이쓴 현실 속에서 저 별동대의 제자들은 정말 금쪽과도 같은 것이다. 그이
음성에는 아무 행동도 위하지 않고 있는 경재학에 대한 가벼운 질책이 서려 있었다.
“저로서는 지금 당장 뭐라 드릴 말씀이 없소이다. 들판에서 몽고의 기마병이 얼마나 강한지 모두들 알
고 있으리라 믿소.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이까?”
점창파와 종남파 장문인도 멸문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애가 탔지만 딱히 반론의 여지도 없었다. 날
이 좀 어두워진다면 모를까,지금으로써는 맹주의 말이 옳았다.
점창파의 영천상인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도 없지 않겠소이까?”
경재학이 영천상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얼마 전 무림맹 내에서의 분란 이후 왠지 그의 언행이 예사롭지
않다. 문득 사람들이 말하는 검술의 화경이란 어떤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 영천상인뿐
이랴? 다른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행동거지도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의 진면목을 딱딱하게
굳은 표정 뒤에 감추고 있는 듯했다.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칠 푼의 힘을 숨기라고 했던가?
어쩌면 이 늙은 노강호들은 철저하게 그 말에 따라 행동하는지 몰랐다.
‘지금은 자존심조차도 잠시 접어두면서 말이지.’
이들은 생사를 가름할 순간이 와야 그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그리고 그때 이들의 검, 혹은 권 앞에 서
있을 사람은 누가 될지 여전히 미지수였다.
그 감추어진 면목이 슬쩍 드러난 사람은 원정 선사나 영천상인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속이
깊고 음흉해 보이는 저 신룡 지인이나 상유천은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현천검객이나 파운신
권조차도 쉽게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십여 년 전 자신의 진두 지휘를 받아들이던 무기력한 모습과는 뭔가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도무지 그 다른 점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경재학은 장문인들의 능청맞아 보이는
얼굴을 보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살기를 느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지.’
경재학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몇 가지 방책을 구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금으러써는 그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인 것 같소. 장
문인들께서도 생각해 보시오. 만일 우리가 여기서 저 기마대와 정면으로 마주친다면 크나큰 전력의 손실
을 가져올 것이 어니겠소? 우리의 상대은 저들이 아니라 혈마사의 마승들이라 생각하오이다.”
영천상인의 곁에서 신룡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영천상인의 말처럼 별동대가 죽어가기를 기다
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맹주의 말씀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일이오만…..”
“진인의 염려를 모르는 바가 아이외다. 그러나 저들에게 정면으로 맞서기도 ,그렇다고 멀리 우회하기도
힘든 노릇이오.시간과 체력의 소모를 가져오면서까지 우회하느니 차라리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밤새
이동하는 편이 낫다고 보오.”
경재학의 말이 끝나자 신룡 진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왜 밤새 이동할 생각을 하지 못
했던가? 낮에 기마병이 길을 막는다면 밤에 이동하면 그뿐인 것이다. 기마대의 움직임은 밤이 되면 수월
치 못할 것이다.
“맹주께서는 그와 같은 뜻을 알려 사람들로 하여금 기왕이면 낮 시간 동아 쉬게 해야 하지 않겠소?”
“장문인들께서도 수고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오.”
“알겠소이다.”
사대문파 장문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재학의 천막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은 해가 저
물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몽고족 기마대는 먼저 공격해 들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땅거미가 내려앉을
시간이 되자 아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노을이 질 무렵 경재학과 육대문파 장문인들은 발 빠른 개방의 고수를 불러 들였다.
“조의내 협사께서 중책을 맡아 주셔야 겠소이다.”
현재 개방의 장로이며 강남 제일의 경공으로 소문난 조의내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맹주께서 말씀만 하시면, 아무리 귀하더라도 저의 한목숨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본래 저희
개방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동시에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있으며…”
“허허헛! 개방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바요.”
경재학이 껄껄 웃으며 조의내의 말허리를 잘랐다. 경재학도 개방의 됨됨이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조의내의 말과는 달리 개방은 거지로 구성되어 있는 중원 최고의 방파이며,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이란 구
걸과 공갈 협박, 그리고 좀도둑질 정도다. 개방은 소뇌부 몇명을 제외하면 무공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는 형편이라 그 머릿수를 이용해 소문을 모으고 퍼뜨리는 일이 아니라면 천하에 쓸데가 없는 방파인
것이다.
무림맹도 강호에 굵직한 일들이 많고 또 개방의 하는 짓이 하오문과 크게 다르지 않아 한쪽 눈을 질끈
감아주고 있었다. 그런 개방에게 무슨 협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그저 필요할 대 한 두번 불러 도
움을 받으면 그뿐이다. 개방은 그렇게 무림맹에 불려온다는 자체를 대단한 영광으로 알고 있으니 서로에
게 손해가 나지 않는 거래인 셈이다.
다행히 오늘의 저 조의내는 그 수뇌부라 부를 만한 사람이다. 나이는 비록 환갑이 넘었지만 무공은 말
할 것도 없고, 특별히 경공에서 무림맹의 본진을 따라나선 무림인 중에 가장 빠를것이다. 말이 많고 약
간의 푼수기가 있는 것이 흠이지만 말이다.
“조 협사께서 해주실 일은 실로 막중한 것이라 할 수 있소.”
조의내의 노안에 득의한 빛이 만연했다. 무림맹의 맹주가 막중한 사명을 맡긴다로 한다. 실로 자손 만
대에 길이 보존될 영광이 아닐수 없다.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 아닌가 싶기
도 하다. 긴장한 조의내의 얼굴에 주름이 더욱 깊이 패여갔다.
“조 협사, 협사께서 우리보다 앞서 별동대를 만나주셔야겠소이다.”
다행히도 맹주의 하는 말은 조의내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조의내의 얼굴에 감돌던 긴장이
조금 해소가 되었다.
“별동대에게 혈마사를 하루만 천주산에 붙들어 매달라고 하시면 되오. 아시겠소?”
“알겠습니다. 그런데 맹주의 명을 전한 뒤 저는?”
경재학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이후로 조 협사께서는 별동대에 머물러도 좋소이다. 어차피 별동대와 하룻길이니 모두가 천주산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갑자기 조의내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에 습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나이 열 살에 거지가 되어 개방에
몸담은 뒤로 어언 오십년이나 흘렀다. 전전대 방주의 눈에 들어 그의 무공 일부를 전수 받고 나이 삼십
에 강호에 뛰어 들었으나, 따지고 보면 무림의 눈칫밥만 삼십 년을 먹은 셈이다.
그 삼십 년 눈칫밥이 가르쳐 주기를 ‘무림맹의 본진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숙청 대상’ 이라고 했다.
물론 무림맹에서 자기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숙청시킬 이유는 없다. 단지 저 별동대의 면면을 보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인데 자신더러 그곳에서 대기하라고 한다. 한마디로 재수가 옴 붙
어서 벼락맞아 죽을 놈 곁에 서게 된 셈이다.
조의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신룡 진인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조 협사께서 어째 내켜 하지 않는 것 같구려.”
아! 구대문파 장문인에게도 협사의 소리를 들었으니 어찌 죽음을 마다하랴.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십니다. 아무리 이 한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한들 한번 맡겨진 사명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말에 흥분한 조의내가 입에서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본협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번 일을 완수하여 반드시 무림의 안녕을 도모 하겠습니다.”
경재학은 갑자기 온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의내의 허튼소리 때문인지, 혹은 지저분한 그
의 몸에서 떨어지는 저 정체모를 가루들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허허헛! 왠지 가만히 앉아 듣고 있기가 송구하구려. 조 협사의 영웅적인 행동을 기대해 보갰소이다.”
격려의 말과 함께 경재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된 것도 같기도 하지만 그렇
지 않을 수도 있다. 문득 조의내의 말을 듣고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자신이야말로 어느 순간부터 무림의
안녕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허,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원….., 알 수 없는 노릇이야.’
육대문파 장문인들도 조의내에게 한마디씩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얼마 후 조의내는 무림맹주와 육대문
파 장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자리에서 떠나갔다.
조의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경재학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허헛! 참 재미있는 분이 아니시오?”
“그러게 말입니다.”
조의내를 신통치 않게 여기던 신룡 진인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 뒤로 장문인들은 별다른 이
야깃거리를 찾지 못했다. 생사대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잡답 나눌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일곱 명의 고
수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하나 둘씩 흩어져 갔다. 장문인들이 돌아간 뒤 무림맹의 본진도
천주산을 향해 출발했다.
* * *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던 찜통 같은 여름도 지났다. 맑은 날씨가 계속되자 가을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르
러갔다. 초목은 그색이 조금씩 짙어지기 시작했고, 물빛도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청해성의 황하수채는 반년이나 끌어오던 마교와의 싸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수채 곳곳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수리를 마쳐야 겨울나기가 고생스럽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황하수채의 밖에는 마교의 파천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총채
주 구절양장 서문당은 수하들에게 불타 버린 전각을 다시 세우게 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이런
전시에 무슨 전각이 필요할까?’ 의아해 하겠지만, 황하수채는 당장 많은 건물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파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사파제일 황하수채’ 라는 이름 때문이다. 대문차가 연합을
해도 마교와 정면으로 승부하여 버티기 힘든 판에 황하수채는 반년이 넘도록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수적들의 가공할 무위와 총호법 장소룡의 신기묘산에 대한 소
문은 강호를 끓어오르게 했다.
게다가 황하수채의 휘하에 식객으로 들어갔다는 삼도회의 영웅담은 또 어떠한가! 협의에 있어 늘 정파
에 기죽어 지내던 사파인들은 마교마저도 인정한 삼도회의 의리 앞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황하수채에 가면 귀수신룡 장소룡과 의리의 삼도회를 만날 수 있다’ 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인심은 물처럼 흐르기 마련이고, 인심이 고이는 곳에 사람도 모여든다. 마교의 오랜 족재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크고 작은 문파들이 소문을 듣고 황하수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이름만 얻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그 이름에 이끌려 찾아든 수많은 사파 고수들 때문에
황하수채는 정말 사파제일이 되고 말았다.
착찹한 표정의 두 사람이 언덕 위에서 신축과 보수가 한창 진행 중인 황하수채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
들은 파천대의 대주인 혼세마왕과 부대주 무영혈장이었다.
무영혈장이 묵묵히 서 있는 혼세마왕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주, 언제까지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단독으로 저들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이제는 파천대와 천마대가 힘을 합쳐야 제
압이 가능할 것이다.”
무영혈장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대주마저도 현실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속하는 수적들이 저렇게 까지 세력을 얻게 될 줄 몰랐습니다.”
“본좌도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하늘의 뜻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어렵게 교주님을 찾아내 이
제 천하가 본 교의 것라고 믿었건만….”
겨우 수적들 하나가 이리도 걸리적 거릴 줄이야. 처음 수하들을 이끌고 황하수채를 찾아오던 날 얼마나
기세등등했던가! 한번 드잡이질을 마치면 수적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충성 맹세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수적들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끝내 꺼지지 않았다. 아니, 꺼지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이제는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오히려 파천대마저도 함부로 할 수 엇ㅂ는 상대가 되고 말았다.
“대주, 본산의 고수들은 언제쯤이나….?”
무영혈장이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형편에 놓인 대주 앞에서 할 말이 아
니었다. 어쩌면 대주의 불호령이 떨어질 소리를 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혼세마왕은 의외로 선선히 대답했다.
“글쎄다. 간혹 들리는 소식을 들으니 내부에 좋지 않은 조짐이 보인다고 하더니.. 내부적으로 뭔가 잡음
이 많은 모양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무림의 일이 더 급하니 곧 좋은 소식이 올 것이다.”
혼세마왕의 속도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다. 평소에는 말상대로 여기지 않던 자신에게 본산의 일을 슬
쩍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무영혈장은 혼세마왕의 말을 들으며 나름대로 생각에 잠겼다.
‘본산에 복잡한 일이라니…. 설마 하니 교주님에게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니겠지.’
무영혈장도 마교에서 오래 살아온 터라 내부에 얼마나 많은 알력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은 교주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무림 일통을 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때에 누군가 반역
을 꾀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분명하다.
‘무림을 평정할 때까지만이라도 아무 일이 없어야 하는데…..’
적어도 무림을 평정할 때까지만이라도 본산의 고수들이 분열되지 않는다면 마교는 무림을 재패할 수
있을 것이다. 무영혈장은 당분간이라도 윗분들이 반목하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지금 마교가 분열
하면 정파는 물론이고 사파에게도 배척당하게 될 것이다.자신처럼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 절대 고수들의
편가름에 할말은 없다.
‘그저 반목하지 말고 잘 지내주시기를 바랄 뿐.’
그 시간 황하 강변에 자리한 추운루에는 장소룡과 한 노인이 마주 앉아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장소
룡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노인의 얼굴에는 온통 주름이었다. 가끔씩 술잔을 들어 올릴때마다 보이는 손
등에도 주름이 가득했다.
“갑자기 무슨 주정을 하려는가 염려하시는 게요?”
장소룡이 웃으며 시원스럽게 술병을 들어 올렸다.
“제가 이곳에서 얻고 후회하지 않는 것은 오직 화조주 뿐입니다.”
노인은 잔을 들어 한숨에 비우고 장소룔 앞에 내밀었다. 장소룡이 병목을 술잔에 대고 천천히 기울이자
잔은 금세 맑은 액체로 차 올랐다.
“올해로 노부의 나이 여든이 엄었소이다. 제법 오래 살지 않았소이까?”
장소룡은 묵묵히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에는 그늘에 숨어 그 기척을 드러내지 않던 노인이다.
그 노인이 파천대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고 황하수채에 흑도방파의 고수들이 넘쳐 나자 술자리를 요청
했다.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었던 모양이다.
“알고 보면 당문에는 내문과 외문이란 것이 있소. 당문의 문주는 대대로 내당문에서 나왔고 보통 사람
들이 당문으로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은 내당문이라오.그러나 나는 외당문의 늙은이오. 외당문은 당가의
역식에 의해 기술이 전수되어 뒤늦게 생긴 곁가지라 할 수 있다오. 물론 세월이 흐르다 보면’내외가 일
체되는 일’ 도 종종 있지만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소. 어차피 외당문도 이런저런 사연으로 당씨 성
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장소룡은 뜻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채워 나갔다. 어차피 타 문파의 내부 사정에 대해 깊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당문의 여식이 어떤 사연으로 가문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집가
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적잖게 있었나 보다. 그런데 노인이 말한 ‘내외가 일체되는 일’ 이란 뭘까?
“나에게는 늦게 본 심원이라는 아들이 있소. 이 녁석은 기특하게도 일찍이 연애에 성공하여 나에게 손
주를 하나 안겨주었는데, 우리 외문은 내문에 비해 숫자가 적기에 손도 귀하다오.”
“그렇군요.”
장소룡은 얼른 잔을 비우고 다시 화조주를 가득 채웠다. 아무래도 몇 잔의 술이 더 필요한 이야기 같았
다.
“나는 손주를 돌보는 낙에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지냈다오. 그런데 손주 녀석은 아무래도 외문이 작게만
보였던 것 같소. 성인식을 치른 뒤 내문으로 거처를 옮겨 버린 게요. 허허헛! 사실은 노부의 선부께서 내
외일체를 이루셔서 내문이나 외문의 경계가 사라졌음을 이 녀석은 몰랐던 게요. 아니, 오히려선부께서
터득한 경지는 내당문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그 녀석을 말없이 내문으로 보냈다오.
언젠가 다시 돌아와 나에게 비기를 전수받게 될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오.”
“….”
그 손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마교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리라. 장소룡이 다시 한 잔의 화조주를
들이켰다.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듣기에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 녁석의 이름은 당효요. 이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서글픈 이름이 되고 말았소. 나는 그 녀석
에게 당문의 비기를 전수하려고 오래도록 별렀는데… 꽃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것이오.”
원래 당효는 과거 사천성의 의혈단에서 삼절중 하나로 불리던 젊은 영웅이다. 그는 의혈단에서 사천혈
사를 조사시킬 때 일룡이봉삼절사검과 함께 서장까지 갔다가 포로가 되었다. 훗날 장염과 마교 교주 장
소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애석하게도 마성이 발작한 장소의 손에 처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다.
노인의 말속에는 손주와 후계자 모두를 잃은 슬픔이 깊게 배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처럼 술잔
을 거듭 들이키는 것도 어쩌면 노인과 같은 심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혈육을 잃은 감정이 말보다 앞서
전달되었던 것이다.
문득 무영과 무혼을 잃고 난 뒤 맛본 슬픔과 절망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언제쯤이나 이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떨리는 손끝으로 다시금 잔을 채우는 장소룡의 귓전으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손자인 효가 마교 교주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당문에서는 무림맹으로 고수들을 보냈다오. 그
러나 왠일인지 무림맹은 마교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소. 그 당시 우리 효뿐 아니라 무당파와
조가의 자제 등 제법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지만, 무림맹은 침묵했다오.”
장소룡이 깜짝 놀란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노인과 자신은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마교 교주 장소에 의해 아들과 손자를 잃은 것이다.
“허……”
장소룡의 탄식에 노인이 잠시 하던 말을 멈추었다. 장소룡이 처연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결국 노기인께서는 마교에 복수를 하기 위해 강호를 돌아다니시다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로군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마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황하수채를 이용하려는 마음은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소이다. 강호에서 마교에 맞서는 곳이라고는 오
직 황하수채뿐이었으니, 장 대협에게라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장소룡이 노인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노기인과 제가 이처럼 같은 처지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장소룡은 의아해하는 노인에게 당고랍산맥에서 죽어간 두 아들에 대해 소상히 말해 주었다. 술기운이
올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장소룡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야기를 듣던 노인이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이 있나! 정녕 죽일 놈이로다. 죽일 놈이로다.”
“…….”
노인과 장소룡은 한동안 말없이 술잔만 열심히 비워 나갔다. 누가 보면 마치 술 시합이라도 하듯 두 사
람은 술 마시는데 열중했다. 한참 만에 내력을 상실한 장소룡이 곯아 떨어졌다. 장소룡의 널찍한 등판을
바라보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바람은 멈추었으나 물결이 계속 인다더니… 세월이 가도 그대와 나의 원한이 이렇게 남아 있었구려.
언젠가 하늘을 대신해…. 그 저주받은 마물을 처리할 날이 올 것이오.”
노인은 마지막 남은 화조주를 잔에 붓고 천천히 들이켰다. 새삼 인연이란 알 수가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강호에서 눈앞에 있는 장소룡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힘든데, 그와 자신은 생각지도 않은 인연으
로 얽혀 있다.
‘세상이 좁은 것인지, 같은 길을 가노라면 하늘이 만날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것인지….’
한 사람의 마인으로 세상에 너무 많은 고통이 생겼다. 지금은 그 마인이 미쳐서 날뛴다는 소리가 들리
지 않지만, 이미 사람들의 원한이 너무 크고 깊었다. 이제 마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인생은 결코
혼자만의 바램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3장 함이 없어야 이로움이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벌써 천리가 넘는 거리를 움직였구나.”
천주산을 지척에 두고 하후연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보니 하남성 동북의 고산에서 이곳 안휘성까지 정
신없이 쫓겨왔다. 날수로 치면 보름이 넘었고 거리로 대충 생각해도 천 리를 훨씬 넘겼다. 수련 삼아 여
행했다면 이런저런 깨달음이라도 남았을 텐데, 자신은 단지 살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우리가 넘은 산과 강이 한둘이 아닙니다. 저는 솔직히 장 소협을 만나 이렇게
까지 고생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후연이 지염도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래서 너는 우리와 만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단지 몸은 이렇게 고생스러운데도 마음이 편하니 그것이 이상할 따름입니다.”
하후연은 지염도의 말을 알아들었다. 마교에서 지염도는 육체적으로 조금 편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
들은 무공 수련과 싸움질 할 때 이외에 특별힐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염도는 지금에
비교하면 그때의 생활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걸 말하고 싶은 거겠지.’
하후연은 지염도가 장염과 향이를 따라다니며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해 묻는 것을 종종 보았다. 사실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자신의 어줍잖은 지식으로 지염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장 소협과 향 소저라면….’
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평생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다. 장염에게는 인간의 도를,
그리고 향이에게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람의 정을 말이다.
“마음이 편해도 무공의 연마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무림인으로 사는 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무공뿐이니까!”
지염도가 박도의 손잡이를 우왁스럽게 움켜쥐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형님과 향 누님에게 염려를 끼쳐 드리지 않기 위해 틈틈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비무를 해볼까?”
하후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염도가 몸을 뒤로 훌쩍 날렸다. 연무를 위한 장소와 시간이 나질 않
아 두 사람이 함께 비무를 시작한 지 별써 보름이 넘었다. 그동안 하후연은 지염도의 도법이 조금씩 안
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염도의 패도적인 도법이 안정되어 간다는 것을 느낄 만큼 자신의 검
법도 향상되어 있었다.
잠시 호홉을 가다듬던 두 사람이 상대바에게 검과 도를 날리기 시작했다.
사사사삭!
파파파팟!
하후연의 검이 꼬리를 물고 유현하게 지염도의 박도에 달라붙으면, 지염도는 마치 태풍 같은 기세로 하
후연의 검을 밀어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칼질이 있었음에도 두 사람의 검과 도는 단 한 차례도 맞부
딪치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이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주변으로 검풍이 휘몰아칠 뿐이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검과 도를 연마하고 있을 때였다. 근처의 수풀이 갈라지며 봉두난발한 거지가 슬그머
니 걸어나왔다. 웬 거지가 근처로 다가오자 두 사람은 일순 움직임을 엄추었다. 무공은 외인에게 보여주
지 않았으며, 무공의 연마를 외부인이 지켜본다는 것은 큰 결례이다.
“아아, 그냥 하던 일을 마저 하시기 바라외다. 본협은 그저 지나는 길이니…..”
의외로 불쑥 나타난 사람은 자기 앞에서 무공을 계속 보이라고 요구하는 뻔뻔한 사람이었다. 상대를 알
아본 하후연은 천천히 검을 수습하며 말했다.
“개방의 조 협사 아니십니까? 저희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두 사람에게 다가온 거지는 개방의 장로라는 조의내였다. 그가 며칠 전 별동대를 찾아와 맹주의 명령을
전달했다고 들었다. 하후연은 개방에 대해서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맹주가 천주산에서 혈마사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게획하고 있다고 했지.’
그 말을 듣고 본진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던 별동대의 고수들이 발끈하자, 노 거지는 ‘무림
맹 본진이 별동대를 도우러 올 수 없었던 이유’ 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본진과 별동대 사이에
몽고의 기마대가 있다는 것이었다.
별동대의 고수들은 이미 몽고의 기마대를 경험한 뒤였기에 조의내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
다. 물론 몽고의 기마대가 왜 무림인의 일에 끼어들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슬금슬금 하휴연과 지염도 사이에 끼어든 조으내가 천연덕스러운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두 분께 결코 어렵지 않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다오.”
본래 부탁이란, 그것을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쉬운 것이라도 저처럼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
나 어차피 하후연과 지염도는 상식과 관계엾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 어렵지 않은 부탁이 무엇입니까?”
태연한 하후연의 말에 조의내가 음성을 한껏 낮춰 속삭였다.
“내가 이미 이리저리 알아보았소이다. 두 분께서 틀림없이 장 소셥의 일행이라고 하던데…”
하후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염도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과연 저처럼 속삭일 만한 일이던가? 자신
과 지염도가 장염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무림맹에서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디 따라다
니다 뿐인가? 장염에게서 무공까지 지도받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 이상한 사람이 별안간 하후연의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소협,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개방의 장로이며, 협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여기기
로 작정한 사람이외다.”
“…….”
조의내가 놀란 얼굴의 하후연에게 침을 튀겨가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본협이 별동대에 도착하는 순간 무림맹에서는 본협과 별동대의 운명을 같은 것으로 인정하였소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소?”
하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의내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본협이 별동대에 와서 보니 사방이 도사와 여승 천지라, 마땅히 이 한 몸 엮어둘 곳잉 없었소
이다. 청컨대 이 자유로운 영혼이 그대들과 함께 머물다 가기를 허락하여 주시구려.”
참자코 듣고 있던 지염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나는 조 협사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 어려워 미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본래 지염도는 배움이 적어 상대가 어려운 말을 사용하거나 빙빙 돌려 말을 하면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 조의내의 경우 그 두 가지 모두가 해당되는 것이었으니, 울컥하는 마음에 거칠게 쏘아 붙이
고 만 것이다.
유심히 듣고 있던 하후연도 마음이 산란할 지경이니 지염도야 오죽할까! 하후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
다가 정중하게 되물었다.
“조 협사께서 조금 더 쉽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도 두 분 곁에 붙여주시구랴.”
재빨리 말을 마친 조의내가 하후연과 지염도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림맹에서 떠나올 때
조의내는 나름대로 별동대에서의 행동 방침을 정하였다. 그것은 ‘별동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장염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소 과장된 소문임을 감안하더라도 장염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별동대와 합류한 뒤 목격한 장염의 무위는 소문 이상이었다. 장염의 곁에 있어
야 살 수 있다는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만약 여기서 거절당한다면 장염에게 직접 찾아가리라. 그리고
거지 근성을 발휘하여 끈덕지게 달라붙을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차피 이들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이 젊은 녀석들이 나를 거절하면 장염에게 달라붙어야지.’
조의내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하후연의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눈을 마주 보고 있으면 상대는 돈
들어갈 일이 아닐 경우 대부분 승낙했다.
하후연은 필사적으로 자신과 눈을 맞추려 하는 조의내에게 대답했다.
“장 소협이 가는 곳에 별동대가 가고, 별동대가 가는 곳에 장 소협이 갑니다. 조 협사께서 편한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후연의 말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조의내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자기들을 따라다
니라는 말인가? 아니면 장염을 따라다니라는 말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장염은 어차피 별동대와 함께
움직이니 그냥 별동대를 따라다니라는 말인가?
‘아무래도 장 소협을 한번 마나봐야겠구먼.’
조으내가 헤픈 웃음을 지으며 하후연과 지염도에게서 떠나갔다.
그날 밤도 장염은 얕은 산 정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겼다. 혈승에게 당한 어깨의 상처도 신경
쓰이는 것이었지만, 지금 장염은 ‘왜 혈라마들이 그처럼 더욱 흥분했는가?’ 에 마음이 쏟고 있었다. 아무
리 생각해도 철천지원수 대하듯 덤벼드는 혈라마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사연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장염으로서는 혈마사의 라마승들이 무공을 잃은 돌료를 죽인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오래도록 생
각했지만 별다른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라마승들의 무공을 소멸시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한 답답한 현재 상황은 어느 한쪽이 소멸하기 전까지는 무한정 반복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천지교태의 경지에 이른 라마승과 담판을 짓는 일이다.’
장염은 오래전 서장에 머무르던 시절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라마의 기도와 솔직 담백한 태도는 지금까
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장염은 어쩌면 저 무리들 중에 있는 천지교태의 라마승과도 대화가 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혈마사의 라마승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에게 다가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
다.
‘오늘은 그에게 나의 마음을 전해봐야겠다.’
장염은 머리 속의 모든 생각을 비워 나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조금 지나자 서늘한 밤바람이 육체를 통과하고 지나갔다. 또다시 물아일체의 경계에 접어든 것이다.
바람을 타고 이미 지나온 길로 돌아가자 곧 눈에 익은 산세가 잡혔다. 장염은 그중 하나의 봉우리에서
흘러나오는 무상의 기운을 향해 나아갔다. 세 사람의 혈라마에게서 오십 보쯤 떨어진 바위 위에 한 노라
마가 앉아 있었다.
노라마에게 다가간 장염은 말을 걸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은 노라마를 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아
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장염은 자신이 아직 마음까지 전할 수 있는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안타깝구나.’
아무리 안타깝고 다급해도 노라마의 주변을 맴돌 뿐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문득 정좌하고 있던 마하륵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주변에 대
자연의 기운이 가득했던 것이다.
“빈승에게 손님이 오신 것이오?”
정말 이 기운이 무극지기의 주인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 몸을 숨겼는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하륵의 소리를 듣고 멀리서 혈마륵과 두 사람의 아미타삼혈존이 달려왔다.
“마하륵이시여, 부르셨습니까?”
“….”
마하륵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신기하게도 무극지기의 기운이 가까이에서 느껴
졌다. 그 기운은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 듯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마하륵은 그이 말을 기다리기
위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혈마륵과 두 명의 아미타삼혈존은 마하륵이 입을 다물자 다시 물러갔다.
마하륵은 기다려도 상대로부터 아무런 말이 없자 다시 눈을 떴다.
“나.무.아.미.타.혈.”
마하륵은 나직이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해도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왠지 위축되는 자신
을 느꼈다. 지금까지 추구해 온 믿음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마는 것을……”
마하륵이 건곤지기를 일으켜 사방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산 정상에 때 아닌 돌풍이 휘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곤지기로도 상대의 기운은 흩어지지 않았
다. 그제야 마하륵은 그것이 바로 물을 초월한 하나의 의지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형체가 없는 상대에
게 무슨 내공이며 진언이란 말인가!
마하륵의 마음이 가라앉자 뜬금없이 몰아쳐 오던 회오리바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장염은 노라마가 일으키는 공력을 보며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첫 번째 걸음에서는 자기의 뜻을 전하지
못하고 상대를 긴장시키기만 했다. 뜻을 전할 수 없다면 상대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장염이 천지간에 풀어놓았던 의식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손님이신가!’
서서히 전이를 풀던 장염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낮선 기운을 느꼈다.
바스락 바스락.
잡목 사이를 헤치며 걸어오는 사람은 육십 대의 노 거지였다.
“거기 장 소협이시오? 본 협사는 개방의 장로로 그 이름을 조의내라 하오. 장 소협의 대명은 익히 들어
오던 바이오. 오늘날 과연 누가 있어 소중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떠벌거리며 다가오는 조의내에게 장염이 짧게 말했다.
“더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무슨……?”
조의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장염의 음성에 깃든 긴박함은 느낄 수 있었다. 걸음을 멈춘 조의내가
나무 사이에 엉거주춤 섰을 때였다. 잡목들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조의내의 몸을 휘감아가기 시작했
다.
휘리리릭!
“이건 뭐야? 으아아악!”
‘아차!’
장염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나무가 꿈틀거리는 짧은 순간, 조금 전 희미하게 느껴지던
기운이 오행혈마기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조의내의 몸을 휘감아가는 나무를 보니, 이번 상대는 바로 오
행지기 목의 기운을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잡목을 뚫고 나오려는 조의내를 오히려 위험에 머
무르도록 한 것이다.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조의내의 온몸은 나무에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변해 버렸다. 처음 보
는 광경에 장염이 순간적으로 판단을 잃어버렸을 때다. 조의내를 집어삼킨 나무 덩어리가 맹렬한 속도로
굴러왔다.
콰드드득!
깜짝 놀란 장염이 재빨리 두 손에 공력을 모았으나 차마 나무를 때리지는 못했다. 상대의 본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저 나무 덩어리 속에는 개방의 노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무 덩어리가 지척에 이르자 장염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그리고 무릎이 탄력있게 펴지자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러나 장염의 두 발이 지면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땅 밑에서 나무뿌리들이 치솟기 시
작했다.
파파팟!
나무뿌리는 지체없이 장염의 두 발을 감아버렸다. 하체가 나무뿌리에 감긴 순간,장염은 굴러온 나무 덩
어리와 충돌하고 말았다.
콰앙!
조의내의 몸을 감싸고 있던 나무들이 충돌과 동시에 장염의 몸으로 파고 들었다. 나무에서 풀려났지만
이미 정신을 잃은 조의내는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털썩!
나무와 충돌하는 순간 장염은 경천일기공으로 전신을 보호했다. 아무래도 일번적인 무림인의 공세가 아
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경천일기공을 끌어올린 것이다. 아직 경천일기공의 효능을 완전히 알지는 못했
지만 경천일기공은 일전에 제갈위기나 경재학을 상개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혈마기를 담은 나뭇가지들은 장염의 호신강기를 뚫고 말았다.
푸욱!
“크윽!”
장염이 전신으로 파고드는 나뭇가지들을 손으로 잡아 뜯었다. 그러나 미친 듯이 손을 움직였지만 가슴
과 배에 박힌 십여 개를 뽑아내는 데 그쳤다. 손이 닿지 않는 등과 미처 손도 대지 못한 하체로 무수히
많은 나무뿌리가 박혀들었다.
빠드득 빠드득 빠드득.
나무는 쉴 틈 없이 움찔거리며 장염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마침내 그렇게 일각쯤 지나자 장염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얼마후 허공에 매달린 장염의 몸 아래로 피가 홍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움직임을 멈추자 산 정상에 적막이 찾아왔다. 희미한 달빛만 나무에 꿰뚫린 장염을 은은히 비
추고 있었다.
쏴아아!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몰아쳐 오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조의내가 꿈들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정신
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으헉!”
힘겹게 눈을 뜬 조의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장염이었다. 장염은 생전
처음 보는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나무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땅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나무뿌리가 장염을 허공에 매달아놓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지금 장염의 몸에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나무들이었다.
찔끔 놀란 조의내가 자라처럼 목을 빼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한참 동안 숨을 죽이고 기다
려도 더 이상의 인기척은 없었다.
‘저것은 대체 어떤 공력이란 말인가? 믿었던 사람마저 한순간에 죽고 말았구나. 나에게 큰 사명이 있어
하늘이 나를 살리려고 저 젊은 영웅을 데리고 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오늘 밤에 이곳을 떠
나 멀리 달아나 버릴까?’
조의내가 결심을 굳히고 누워있건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난 순간이다.
산 정상에 있던 잡목들이 일체히 뽑히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콰콰콰콰!
“으허헉! 대체…..”
한밤중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조의내의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조의내
가 달아나지도 못한 채 떨고 있을 때였다. 날아올랐던 나무들이 일제히 장염의 몸으로 내리꽂혔다.
꽈광!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자 조의내는 고막이 터질 듯한 충격에 귀를 감싸 안았다. 귈르 움켜쥐
고 정면을 응시하던 조으내의 눈이 부릅쩌졌다. 장염에게 날아간 나무들이 모조리 부서지며 사방으로 튕
겨났던 것이다.
타타탁! 타닥!
나뭇조각들이 발 앞으로 튀자 깜짝 놀란 조의내가 몇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장염이 조의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미 그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물러나도 소용없소!”
깜짝 놀란 조의내가 떠듬거리며 소리쳤다.
“소, 소협! 대협!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시오! 오해요! 나는 겨우 개방의 거지…..”
뒷걸음질치던 조의내의 등이 뒤에 있던 거대한 고목에 닿았다.
툭.
고목은 조의내의 등과 맞닿자 마자 ‘뿌드득’ 소리와 함께 뽑혀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허억!”
그 시간이 어찌나 절묘하던지 조의내는 자신의 몸에 기이한 공력이라도 생긴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
‘설마, 내 몸이 닿았다고 나무가 뽑혀 나갔으려구!’
장염이 조의내의 앞으로 걸어나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과연 그대는 오행혈마경을 익힌 사람이구려. 그러나 그대의 목기로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오.”
장염은 상대가 내뿜는 목의 기운을 보며 문득 제갈위기를 떠올렸다. 과거에 제갈위기는 흙의 기운으로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다. 흙의 바다 속에서 경천일기공의 깨달음으로 오히려 사물을 다스리는 힘
까지 얻었다. 그날 무위의 심득이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 목숨이다. 전화위복이라고 이미 사물의 본질을
느끼기 시작한 지 오래다. 장염은 오행혈마인 개개인이 더 이상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장염의 말에 깜짝 놀란 조의내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누군가 뒤에서날카롭게 소리쳤다.
“네가 뭐라고 해도 관게없다! 네가 나의 공력을 막을 수 있다면 그뿐, 나는 여전히 나의 길을 갈 뿐이
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려는 조의내의 손을 장염이 잡아 앞으로 끌었다.
“조 협사께서는 잠시만 제 곁에 계시기 바랍니다.”
조의내가 모뭇거리며 장염의 곁에 섰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조의내의 입에 평생 오르내릴 ‘천간
목과 경천일기공의 일대 접전’ 이 시작되었다.
하늘로 치솟았던 고목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잘 다듬은 장작처럼 쪼개져 나갔다. 잘게 갈라진 나무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지면으로 쏟아져 내렸다.
퍼퍼퍼펑! 펑!
폭음과 함께 흙과 바위가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으허허헉!”
조의내가 호들갑을 떨며 장염의 뒤로 돌아갔다. 마치 단단한 목검처럼 잘 다듬어진 나뭇조각들이 하늘
에서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장염의 뒤로 숨어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조의내는 마치
한 마리 꿩처럼 자기의 눈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장염과 조의내의 머리 위로도 한 무더기의 파편이 쏟어졌다.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쳐든 조의내의 눈에
새까맣게 떨어지는 날카로운 나뭇조각들이 보였다.
“으어어……”
조의내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얼이 빠져 있을 때, 장염이 두 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그 모
습을 보던 조의내가 질겁하여 소리 질렀다.
“장 소협! 위에! 위에!”
조의내가 보니 나무는 머리 위에서 쏟어지고 있는데, 장염은 엉뚱하게도 손바닥을 지면으로 향한 채 중
얼거리고 있었다.
“하늘의 그물은 놓치는 것이 없다!”
경천일기공의 무한 공력이 장염의 장심을 통해 지면으로 발출됐다.
고오오오!
정지한 시간 사이로 어마어마한 기의 폭풍이 밀려왔다. 조의내는 귀를 움켜쥐고 눈마저 질끈 감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누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곧 이어 온몸으로 알 수 없는 진동이 밀려 들었다. 그 힘이
어쩌나 강했던지 땅도 출렁이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개방의 제자들 중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맨발로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돈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귀
찮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겨울만 아니라면 맨발인 것이 위생상 더 좋았다.
개방의 장로인 조의내도 발이 썩는 것보다는 맨발인 것을 택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 덕분에 조의내는
지금 꼬질꼬질한 발바닥으로 뭔가 꼼지락거리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놀라 부릅뜬 조의내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이다.
“으헉!”
흙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인 양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슈슈슈슉!
조의내의 발 밑뿐만 아니라 산 정상에 있던 흙들이 마치 가늘게 뽑은 면발처럼 하늘로 쏘아갔다. 흙은
종횡으로 얽히며 솟아올랐는데, 그것은 마치 땅에서 그물을 짜서 하늘로 던지는 듯했다.
쿠쿠쿠쿵! 쿠쿵!
공중에서 나무와 흙으로 만든 그물이 부딪칠 때마다 지축을 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경선은 그물 망이 발 밑까지 밀고 올라오자 대경실색하여 천간목의 기운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미 내력의 한게에 다다른 드였다. 장경선은 천간목의 기운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흙의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끄으으윽!”
다행히 장염은 아직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흙의 그물에 잠력만 담았을 리
가 榴? 장경선은 토망에 살기가 깃들지 않았음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웅크렸다. 장경선을 담은 흙의
그물이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물 속에서 장경선은 침착하게 다시 한번 오행혈마기를 일으켰다. 심장이 터질 듯 뻐근해지더니 곧 혈
마기가 단전에 모여들었다. 장경선은 토망이 지면에 닿기 전에 진기를 소주천시키는 데 성공했다.
장경선을 감싼 토망이 거의 지면에 닿을 무렵이었다. 조의내가 어리버리한 얼굴로 눈앞에 떨어져 내리
는 토망을 구경하는데, 폭음과 함께 토망이 썩은 새끼줄처럼 토막토막 끊겨져 나갔다.
퍼펑!
“으헉!”
깜짝 놀란 조의내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토망에서 나온 사내는 조의내를 힐끔 쳐다본 뒤, ‘끝이라고 생
각하지 말아라!’ 는 말을 남기고 산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장 대협, 왜, 저, 저자를 잡지 않으시오?”
조의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이전까지 장염을 장 소협이라고 부르던 그가 어
느 틈에 대협이라 부르고 있었다. 장염이 하얗게 질린 조의내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함이 없어야 이로우며, 함이 없음으로 망녕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가르쳐 준 이치이지요, 그가
자기의 길을 간다고 했으니, 인연이 닿으면 언제고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달아난 사람은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의 생명을 취하려고 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장염은 그런 사람에게조
차 스스럼없이 ‘인연이 어쩌고’ 하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 내리던 조의내는 속으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계시네’ 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자는 …….”
“하하하! 저토록 가고자 하는 사람을 굳이 잡아두면 무얼 하겠습니까? 누가 그를 지킬 것이며, 그를 위
해 봉사하겠습니까?”
하기사 장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잡아서 죽일 것이 아니라면 지금 그를 잡아두어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혈마사에게 쫓기기도 바쁜 형편이 아니던가! 함이 없어야 이롭다니, 자신도 장염에게 찾
아와 수작만 걸지 않았어도 하루 편히 쉬었을 것이다.
‘이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군.’
스스로 찔리는 부분이 있어 중얼거리던 조의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장 대협. 조금 전에 분명히 피를 흘리고 죽어가시던 분께서….”
조의내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분명히 장염은 피를 쏟으며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 어디를 보아도 상처를 입었다거나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하, 대협이라뇨? 말씀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저 사람의 숨는 방법이 하도 고명해서 장난을
조금 친 것뿐입니다. 제가 나무에 묶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무는 제 몸을 뚫지 못했습니다. 몸과 닿은 부
분을 가루로 만들고 흡자결로 몸에 붙여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피는?”
“피가 아니라 근처의 나무에서 뽑은 수액입니다.”
자신의 공력으로 저 폐허 속에서 그것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장염의 멀쩡한
모습을 보며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장염이 자신에게 왜 거짓말을 하겠는가? 조의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염을 슬쩍 훔쳐보았다.
‘말이 쉽지 그런 일을 대체 어떤 인간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장염과 어둠 속의 사내가 싸우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누가 말해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본 일조차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보면 요즘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장염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과장인지 모를 일이다.
조의내는 최종적으로 장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사람은 무림맹에서 진짜 용을 타고 다녔어!’
별동대가 천주산 근방에서 하루를 묵어가던 그 밤에 일어난 일이다. 깊은 바닷물처럼 파란 하늘이 묵직
하게 출렁일 때, 그 무게에 눌린 듯 몸을 뒤척이며 신음하는 남자가 있었다.
‘으으으…..’
노호는 온몸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무공을 익힌 뒤로 꿔본 적이 없는 악몽에 또다시 시달리
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기가 괴물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은 꿈이 아닌지도 모른다. 과거와 달
리 지금의 노호는 뜬눈으로 주변의 경관을 바라볼수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사형제들이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지금 누워 있는 자신의 주위
로 흉측한 몰골의 사천황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고 있었다. 끔찍한 공포를 느낀 노호는 몸을 움
직여 달아나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긴느 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입과 혀가 굳고 숨도 목
구멍까지 차 올랐다.
‘끄윽…. 누가 좀, 도와줘…….’
한참 만에 사천왕상들은 저절로 사라져 갔고 그제야 노호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몸이 풀리자마자 노
호는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일어났던 그 광란의 시간들은 한바탕 꿈인 듯 사
방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 * *
“다시 말해 보아라.”
검귀의 분노한 눈이 정면의 마인에게로 향했다. 천마데에서 전령으로 온 마인이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천마대가 오히려 구룡채를 중심으로 뭉친 사파인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보고를 어찌 두번 올릴
수 있단 말인가!
“후우,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이나해봐라.”
검귀의 한숨을 들으며 마인은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을 느꼈다. 상대가 분노해 있으면 목숨이 오락가락
하겠지만, 한숨이라는 것은 일단 감정을 수습했다는 의미였다.
“구룡채의 채주가 인근의 사파인들을 규합하여 천마대의 공세를 모두 막아내었을 뿐 아니라…. 속하가
난주로 출발할 당시 호남성에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천마대 고수들의 피해가 막심한지라 본산에서 지
원이 없이는 다시 그들을 공격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검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사파에 천마대를 막아낼 세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허, 세상은 이처럼 변화무쌍하기만 하구나. 천 년 영화가 모두 물거품이 되려나.’
검귀가 고갯짓을 하자 전령으로 왔던 마인이 주춤거리며 물러갔다. 파천대로 황하수채를 섬멸하지 못해
본산의 지원을 기다린다고 했다. 겨우 사파도 일통하지 못했는데, 이런 상태로 어찌 천하를 일통할 수가
있겠는가!
“휴우…..”
검귀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미 사파대전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어 인력과 재원이 턱
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사파인들이 자발적으로 고수들을 파견하고 재물을 싸들고 찾아왔어
야 하건만 게획대로 되지 않았다.
‘황하수채와 구룡채라….’
그러고 보니 둘 다 무가 출신의 정통 사파가 아니라 도둑들의 세력이었다. 황하수채는 수적이요, 구룡
채는 산적 집단이다. 대마교가 겨우 도둑들에게 덜미를 잡혀 사파를 일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다가는 다시 분열되고 말 것이다.’
검귀의 안색이 흐려졌다. 이번에 마교가 또다시 분열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이 클 것이다.
과거에는 마교가 강성할 때 내부를 지탱하던 두 힘의 균형이 무너져 스스로 분열된 것이지만 지금은 달
랐다. 사파와의 전쟁으로 힘이 빠진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사파인들은 마교를 더이상 과거와 같이 두
려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외부적으로 힘들 때에 내부 결속이 잘되어 있다면 타개책도 있을 법하건만, 순찰영주와 혈수서
생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오래전부터 활동을 자제하고 있고, 삼마는 드러내 놓고 교주의 반대파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이거야…. 믿고 의논할 상대가 없다니.’
검귀의 고민은 그것이었다. 마교 내부에 워낙 많은 분파가 있다보니 어느 쪽의 고수를 밖으로 내돌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랬다가는 일순간에 마교는 다른 한쪽을 축으로 재편성되고 말 것이다.
검귀가 한숨을 쉬며 방에서 오락가락할 때, 문 밖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교주님께서 수호사령을 찾으십니다.”
창가까지 걸어갔던 검귀가 흠칫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금은 교줄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주의 부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상좌에 앉은 장소가 허겁지겁 달려온 마인들을 하나씩 살피며 히죽 웃었다.
“흐…. 본제가 오래도록 궁금하게 여기던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장소의 앞에 부복한 열두 명의 절정 마인들이 허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 안다고 해도 어찌 나설 것이며,
어찌 감히 모르겠사오니 말씀해 달라고 주문할 것인가. 장소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자기 기분 내키는 대
로 떠들도록 둘 수밖에 없다.
“나는 근래에 들어 몇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십이 마인들이 의아한 얼굴로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교주가 근래에 알게 도니 일이란 무엇일까? 워낙
교주의 주변에 꼬이는 마인들도 많기에 그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주워 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교
주는 천마후가 달아난 이후로 이런저런 무공 서적들을 가까이 했다. 시간이 남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자기의 무공 연원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너희들이 본제를 마교의 교주로 세운 까닭을 알고 있다. 내가 터득한 전대 교주의 무공 때
문만은 아니지. 흐흐흐… 그렇지 않느냐?”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부복하고 있던 검귀의 등골이 서늘해졌따. 마인들이 노라든 말든 장소의 말은 계속되었다.
“너희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런대로 쉽게 주무를 수 있는 물러터진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느냐?”
삼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남들이야 어떻든 그들이 처음 정소에게 자항없이 충성을 맹세했던 이유는
확실히 그랬기 때문이다. 물론 천살성의 기운을 알아챈 순찰영주의 영주 다르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교주님, 속하들이 어찌 감히…..!”
십이 마인이 일제히 허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마인들은 각자의 이유야 어떻든 교주의 저 망상만은 막
아야 했다. 장소가 더욱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내친 김에 한마디 더 해주랴? 본제는 얼마 전에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제의 내
공이 터무니없이 높아졌더란 말이다. 처음에는 본제가 익힌 마경 때문인 줄로만 알았지 뭐냐?”
그러나 장소는 마공을 완성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자신의 마공은 오행지기의 수기를 극성으로 끌어 모
을 뿐, 체내에 남은 다른 공력과는 무관했다. 마교의 원로들이 격체진력으로 자신의 생사현관을 타통시
켜 줄 때도 이렇게까지 엄청난 내공은 넣어주지 않았다.
“흐흐…. 본제는 이 정도나 내공을 높여줄 수 있는 세 가지 기물에 대해 들었다. 소림사의 대환단과 무
당파의 태청단, 그리고 만독문의 광마신단이 그것이지.”
허리를 숙인 삼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특히 광마신단을 직접 사용한 독수마존의 심장
은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본 교에 지체 높은 중이나 도사가 없으니 대환단이나 태청단과는 인연이 없을 것이고… 남은 것이라고
는 광마신단뿐인데, 무림사에 그 광마신단을 복용하고 살아났다는 사람이 없다. 사실 나도 그 때문에 고
생을 좀 했다고 할 수 있지. 그러나 덕분에 심마를 키우게 되어 드디어 혼자 있어도 무료하지 않게 되었
다.
크하하핫!”
장소의 말은 듣는 마인들에게 소름이 끼치는 소리였다. 저토록 이성적으로 자신이 미쳤다고 말하는 사
람이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그사람은 자신들의 생사를 좌우 할 수 있는 교주였다.
가장 앞에 있던 검귀가 흠칫하여 마인들을 둘러 보았다.
‘어쩐지… 교주가 느닷없이 미쳐 가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런데 과연 누가 만독문의 출신이란
말인가!’
만독문은 이제는 기억 속에나 자리한 문파였다. 이미 오래전 정사 양도에게 무림공적으로 지명된 후에
멸문당했기 때문이다. 그 만독문으 보물인 광마신단은 만독의 정화로 만든 것으로 과연 기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 한 알이면 만 명의 무림인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들었건만, 대체 그것을 어느 미친놈이 교주
에게 사용했단 말인가?’
독성 못지 않게 그 자체의 공력이 대단하여 누구든 복용하고 살아날 수만 있다면 대환단보다 더한 효
는ㅇ을 얻게 될 것이라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어느 누가 뻔히 죽을줄 알면서 광마신단을 복용한단 말인
가? 결국 광마신단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다가 만독문의 멸문과 더불어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그런데 지금 여기 있는 자들 가운데 누군가 그 광마신단을 교주에게 복용시킨 것이다. 정작 문제는 복
용시킨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교주가 알게 되었다는 데 있다.
장소가 마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커험, 그러나 나는 그 신단 덕분에 오히려 공력을 높였으니 어찌 고맙다고 하지 않으랴? 그런데 대체
누구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크크크… 그애가 누구니?”
마지막 말은 쇠를 긁는 듯한 느낌의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교주의 심마가 언뜻 밖으로 나온 것이리라.
그 괴기스러움 앞에서 마인들이 떨 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자 장소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뭐,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야 거기서 거기이니…..”
말끝을 흐리던 장소의 얼굴에서 살기가 일기 시작했다.
“사파를 일통하라 했건만 어찌 된 일니냐? 아무도 본제에게 성공했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없구나. 모두
젓가락을 손에서 놓고 싶은 것이냐?”
깊이 숙여진 검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런 것을 두고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교주는 지금 자기를
죽이려던 수하보다 강호일통이 지연된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뭐라 변명할 말이 떠
오르지 않았다. 교주의 명을 이행하지 못한 것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검귀가 잠시 망설이고 있는 동안 혈수서생 이면수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교주님. 속하가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살기가 일은 장소가 무심히 말했다.
“무엇이냐? 시답잖은 소리라면 네 목을 내놔야 할 것이다.”
긴장한 이면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교주님을 위해서라면 속하는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이면수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늘 이 한마디말로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될 것이다.
“본산의 고수들을 제외한다면, 강호에는 본 교에서 파견한 삼대가 있습니다. 혈마대는 무산 인근에서
소식이 끊겼는데 더 이상의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몰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천마대는 구룡채를 상
대하느라 전력의 사 할을 잃었습니다. 파천대도 황하수채를 상대하다가 역시 절반을 잃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삼마중 혈천마도 풍소곡이 검귀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그나마 삼마의 제자가 이끄는 천마대의피해가
검귀의 제자가 이끄는 파천대보다 적으니 위안이 되었다.
“이제는 혈마대를 제외한 천마대와 파천대의 수하들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모아서?”
장소가 제법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으로 이면수를 바라보았다.
“무림맹은 혈마사를 상대하느라 기력이 쇠하여 있으니,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그들을 치는 편이 효과
적이라 생각됩니다.”
뜻밖의 제안에 검귀가 얼굴을 들고 이면수를 바라보았다/
‘혈수서생이 저처럼 대담한 제안을 할 줄이야….’
어찌 보면 혈수서생의 말이 옳은지 몰랐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파를 두고 힘을 쓸 때가 아니라 이 기
회에 정파를 눌러야 하는지 몰랐다. 사파는 황하수채와 구룡채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정파
는 무림맹을 제외하면 힘의 중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마교의 자존심 때문에 힘겨운 사
파일통에 매달려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 교도 이미 수하들을 많이 잃었는데, 과연 무림맹이 그토록 호라호락할 것인가.’
혈마사를 맞이하는 무림맹은 지나치게 약했다. 이십여 년 전에 그토록 쓴맛을 보고도 구대문파가 정신
을 못 차렸을까? 검귀는 맥없이 질질 끌려 다니는 무림맹을 떠올리자 왠지 불안해졌다. 그러나 지금 이
분위기에서 어찌 그 심경을 토로할 것인가!
생각지도 않던 정사대전의 제안에 마인드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였다. 장소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크하하핫! 과연 혈수서생이로구나. 너의 그 말로 지금까지의 짜증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정파의 위
선자들에게 힘의 정의를 가르쳐줄 때가 왔다.”
장소의 이 말은 마교가 사파일통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장소가 그처럼 호쾌히 이
면수의 말에 동조하자 마인들의 허리가 깊이 숙여졌다.
“교주님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검귀와 삼마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실패한 제자들의 목이 달아날 판이다. 애
써 키운 제자들의 목이 달아나면 그만큼 자신들이 지지 기반도 약화된다. 게다가 솔직히 지금은 달리 방
법이 없었다.
그날 저녁 삼마는 다시 은밀한 회동을 가졌다 .아무래도 교주가 광마신단까지 알아버렸으니 별도의 대
책을 세워야 했다.
“아무래도 서둘러 음산 삼로와 손을 잡아야겠소.”
독수마존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낮의 회의때 교주가 한 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틀림없다. 여민의 눈빛으로 독수마존을 바라보던 풍소곡이 말했다.
“우리 모두가 독존과 운명이 같으니 어찌 수수방관하겠소이까. 교주가 광마신단을 알았다면 얼마간 독
존에게 혐의를 두고 있을 것이오.”
사람들이 광마신단을 독으로 알고 있는데, 독에 관한한 마교에서 독마보다 더 정통한 사람은 없다. 그
런 추측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교주의 친위 세력들은 만독전과 관련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독마를 포함한 삼마의 최후가 될 것이다.
풍소곡의 말을 듣던 혈해신마가 불안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과연 삼로가 우리의 말을 듣겠소이까?”
혈해신마를 향해 풍소곡이 확시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삼로가 원하는 것은 천산파와 음산파가 갈라지는 것이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음산파까
지 원할 수 있겠소. 그들과 손을 잡고 천산파만이라도 손에 넣어야 할 것이외다.”
비록 지금 갑자기 삼로를 끌어 들인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지만 삼로도 게획에 반대하지 않으 것이다.
만약 음모가 밝혀진다면 교주의 자리는 더욱 공고해지고, 그렇게되면 음산파가 음산으로 돌아갈 길은 영
영 사라지는 것이 된다. 음산파를 위해서 삼로는 마교의 분열과 교주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을 선택할 것
이다.
혈해신마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풍소곡이 계속해서 말했다.
“혈수서생이 낙양에서 출정식을 갖자고 했으니, 낙양에서 뜻이 맞는 고수들을 모아 교주를 제거합시다.
신임 교주는 당연히 장소교주의 목을 베는 자가 차지하게 될 것이오.”
독수마존은 급하게 서둘러 주는 풍소곡이 고마웠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외다. 도존께서 서둘러 삼로와의 회합을 주선해 주시구려.”
“염려 마시오. 삼로는 물론 다른 고수들도 교주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니 어찌 이 기회를 놓치겠소. 혈
수서생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풍소곡은 현 상태에서 무림일통이나 정사대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첫째 목적은 마교의 교주가 되
는 것이었으나, 이제 조금 수정해야 할 판이다. 마교의 교주가 아니라 천산파의 교주가 되는 것으로 말
이다. 풍소곡은 어차피 희생이나 양보없이 무엇인가 얻기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풍소곡은 ‘지금
은 천산파의 교주가 되는 것’ 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삼마는 오늘 불안한 대화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야릇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삼마끼
리도 서로를 도마나 독마, 혹은 혈마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지금 독존이니 도존이라고 서로를 한층 높
여준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결단의 날을 그만큼 촉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삼마가 마교에서 거사
에 성공하면 그렇게 불리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 절대 마인은 그런 서로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오늘 이후로 그들은
삼마가 아니라 삼존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 4장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남도 할수 있다
장염의 눈앞에 마침내 천주산이 보였다. 아침 안개가 감돌고 있는 천주산은 보기에도 신비로웠다. 그러
나 장염의 주변에 서 있는 누구도 자연의 신비로움에 젖어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천주산이야말로 무림맹과 별동대가 혈마사를 상대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천주산을 보는 장염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따.
‘천주산에서 살아 돌아갈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미 많은 지인을 잃어버린 장염이었기에 더 이상의 희생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 세상사
가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기만 하던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번 싸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
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처참한 죽음을 또다시 목도해야만 한다. 장염에게는 죽음이란 어느 쪽이든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번민에 휩싸인 장염을 지척에 두고 마초가 크게 외쳤다.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저들에게 피의 응징을 해야 할 때요! 그≠?않소이까. 장 소협?”
흥분한 마초에게 장염이 조용히 대답했다.
“잘 싸우는 자는 노여워하지 않으며, 잘 이기는 자는 맞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물러나
살필 때라고 봅니다만.”
마초라고 장염의 말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기진작을 위해 없는 말이라도 퍼뜨려야 할
때가 아닌가! 마초가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장 소협의 말은 충분히 알겠소만, 동도들의 앞에서 어찌 죽음이 두려워 몸을 사릴 수 있겠소이까.”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하후연이 한마디 내던졌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작정 사지로 뛰어들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
마초는 무림맹에서 별동대에 파견한 고수였으니 그 자부심이 남달랐다. 천하 무림 대회를 거치거나 구
대문파에서 파견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우림맹에서 일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림맹의 고수라면 그
무공의 수위가 결코 낮지 않았다.
그런 마초였으니 하후연 같은 잡배가 자신에게 말대꾸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한 손이라도 필요하지 않았다면 너는 이미 팔다리가 부러져 있을 것이다.’
마초 같은 고수는 본래 하후연과 같은 사람들과는 말상대를 하지 않는다. 지금은 장염의 앞이니 다소
시건방진 후배가 있다 하더라도 가르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마초는 ‘끙’ 소리와 함께 먼 산으
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꽁한 얼굴의 마초에게 춘양 진인이 슬며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마 대협의 그 협의는 마땅히 우리 모두가 배울 바라 생각하외다. 다만, 때가 때인만큼 우리도 조금 더
신중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살펴야 하지 않겠소?”
그제야 마초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전적으로 장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춘양 진인은 속으로 ‘장 사숙의 말을 다시 한 것뿐인데’ 라고 중얼거리며 장염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염
은 착잡한 얼굴로 천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 사숙, 지난 밤에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혈마사의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장염은 지난 밤 상대했던 남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히 마기였으나 사
람 됨됨이는 사악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경재학은 가까이 있는 정파의 고수들에게 마경을 퍼뜨
려 왔다.
‘제갈위기도 그렇고.’
그러나 이런 말을 어찌 남에게 할 수있으랴. 더구나 이처럼 위태로운 시기에 말이다. 장염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는 중원의 무림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장염이 고개를 끄덕이자 춘양 진인의 얼굴에 그늘이 어렸다. 저주받은 오행혈마인이 다시 등장한 것이
다. 무림맹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그들이 왜?”
“아마도 그들에게 마공을 전수한 사람이…. 제 목숨을 원하는가 봅니다.”
“대체 그 천인공노할 자가 누구입니까?”
“…..”
장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일이다. 아무도 些?않음으로, 그
한마디 말로 인해 정파 무림이 분열에 휩싸일 수도 있으므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단지 공
동의 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다른 것에 마음 둘 상황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데 경재학은 여전히 자신의 목숨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 어려운 시기에도 살수
를 보낼 만큼 말이다.
‘집요한 자로군.’
생각할수록 몇 년 전 당고랍산맥에서 그자의 손에서 달아난 일은 천운이 따랐던 것이다. 그때 장가촌
사람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장가촌 사람들. 장염이 문득 이무심에게로 눈을 돌렸다. 몇 걸음뒤에 이무심이 서 있었다. 그의 전신에
서 풍기는 기운은 고독함이다. 그 고독함 속에 제자와 아들을 잃고 강호에서 떠돌아야 하는 사나이의 서
글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죽었다면 부모님도 저런 모습이었겠지.’
장가촌의 가족을 떠올리자 가슴 한켠이 싸하게 시려왔다. 고향을 떠난지 벌써 육년째 접어들었다. 누구
도 이렇게 오래도록 장가촌에서 떠나 있으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
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미 많은 형제들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 버렸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심정이란 겪어보지 않은 이상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마음은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이무심의 검은 항상 극단을 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무심은 검의를 빠르게
터득하고 있었지만, 그 빠름의 뒤에는 항상 외줄 타기를 하는 광대와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춘양 진인은 장염이 입을 다물자 나름대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비록 사실이 궁금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장염에게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던질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결국 춘양 진인은 언젠가 장염 사숙이
스스로 말해 줄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오행혈마인은 차치하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근접한 혈마사와의 싸움이다. 춘양 진인은 무림인들을 불러
모은 뒤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동도들은 들으시오. 무림맹의 본진과 혈마사는 모두 우리로부터 하룻길에 있소. 지금부터는 주변의 경
계를 강화하고 적들을 맞아 싸우기 좋은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외다. 경계는 돌아가며 맡으면 되겠지만
좋은 장소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이 자리에 병법과 지리에 능한 분이 계시면 나서주시기를 바
라외다.”
춘양 진인의 말이 끝나자 무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병법과 지리에 능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었
다. 무림인들은 관으로 진출할 생각이 없는 한 어지간해서는 병볍 같은 건 배우지 않았다.
한참 만에 풍림장주 영호성이 나서며 말했다.
“내가 병볍은 모르나 지리에는 과히 어둡지 않소. 일전에 마 대협께서 군 출신이라고 들었소만. 그 정
도면 기본적인 병법이나 공성전에 대한 경험이 있지 않으시겠소? 나와 마 대협이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
보았으면 하오만…..”
다소 의기소침해 있던 마초가 한 걸음 나서며 대답했다.
“영호 대협의 말씀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미력한 힘이나마 필요하다면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춘양 진인이 영호성의 친친 동여맨 허벅지를 보며 말했다.
“몸도 불편하실 텐데 맡아주신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오.”
풍림장과 무당파의 관계가 어색했으나 생사의 위기를 함께 넘기다 보니 이미 그런 생각은 서로 간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장염과 영호화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 장염이 무당파의 어른으로 밝혀
졌다. 자연히 무당파나 풍림장 모두가 서로에게 조심스러웠다.
천하십대고수 중의 하나인 영호성은 놀라 만큼 빨리 회복을 찾아갔다. 영호성이 외상이 심했다면 춘양
진인은 내상이 심한 편이었다. 춘양 진인이나 영호성 모두가 십대고수에 드는 사람들이었으니, 두 사람
은 서로의 몸이 회복되는 것에 자연 관심이 가는 바였다. 춘양 진인은 영호성의 외상이 급속도로 치유되
는 것에 놀랐고, 영호성은 춘양 진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동하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사실 두 사람이 입은 내외상은 보통 사람이라면 몇 달을 정양해도 완쾌될까 말까 한 상태였다. 결국 그
만큼 두 사람의 공력이 심후하다는 것이었으니 서로를 더욱 존중했다.
영호성이 창에 관통당했던 허벅지를 툭툭 쳐 보이며 ‘아직 그런대로 쓸모있는 다리가 아니오?’ 라고 말
한 뒤 마초와 함께 떠나갔다.
영호성이 마초와 떠나자 춘야 진인은 무리들을 이끌고 드디어 천주산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몽고의 기마대는 밤이 되어 움직이는 무림맹의 앞길을 더 이상 막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가 무림맹 본
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전력의 손실을 가져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몽고의 기마대가 사라지자
무림맹은 쾌속 진군하여 마침내 천주산을 지척에 두게 되었다.
멀리서 춘주산을 살피던 경재학의 눈에 정광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제 혈마사와의
마지막 대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비록 별동대가 몰살당하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혈마사를
고이 놓아보낼 생각도 없다. 이 천주산에서 장염과 혈마사 모두를 정리할 것이다.
‘무림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경재학의 머리 속으로 치밀한 모의 전투가 치러졌다.
‘별동대가 혈마사와 만나고 본진이 배후를 칠 때쯤이면 별동대는 거의 괴멸된 상태일 것이다. 괴멸이
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 본진에는 합류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본진과 합류하게 되면 기마대의 공세로부
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별동대는 혈마사나 몽고의 기마대에 의해 모두 죽게 될것이다. 그것이 길고 긴 줄다리기의 끝이다.
그래야만 무림사의 모든 은원이 서로에게 염예롭게 해결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합류를 막는가인데……’
별동대와 본진을 따로 떼어놓는 방법은 간단한 듯하면서도 좀체로 그 실마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경재학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렵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쉽게 생각하면 누워서
물 마시는 것처럼 쉽다.
‘그들을 먼저 보내든지 남기는 것이다.’
혈마사를 괴멸시키면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별동대를 먼저 귀환시키고, 그 반대의 경우 본진이 남은
혈마사를 쫓고 별동대에게는 뒷수습을 맡겨 조금 쉬게 하면 된다. 무림인들은 어차피 몽고의 기마대가
별동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 찬성할 것이다.
결국 혈마사와 별동대 모두 이번 천주산의 전투를 끝으로 무림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반드시….!”
경재학의 몸을 중심으로 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무림의 고수들은 ‘과연
맹주의 기백이 대단하다!’ 하고 감탄했다. 혈마사를 눈앞에 두고 마음을 가다듬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
다.
지켜보던 상유천조차도 경재학의 기도에 일순 압도당할 정도로 그의 각오는 대단한 것이었다.
‘맹주의 각오가 저 정도나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무림에 다시없는 복일 것이
다.’
상유천이 경재학의 상기된 모습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자신을 포함한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가장 염려
하던 바는 무림맹주의 돗패였다.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던가! 이십여 년 간 맹주의 말 한마디에 무림의
대소사가 좌우되었다.
맹주의 절대적인 무공을 흠모하여 그의 휘하로 들어간 무림인의 수도 부지기수였다. ㄱ들의 그늘에 기
생하는 수많은 무림의 협작꾼들을 세면 그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염려
스러운 것은 그의 가문이다. 도무지 기원을 알 수 없는 천하제일가의 사람들이 맹주의 수족처럼 도처에
서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도 맹주를 두려워해서 그들의 무공과 세력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유천이 언제나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화산파의 속가제자들이다. 그는 무림첩을 받았을
때 일부러 하산한 속가제자들을 부르지 않았다. 화산파도 그러할진대 다른 문파는 과연 어떨까? 사실 이
십여 년 전의 혈사를 치르고 난 뒤 더욱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림맹의 팽창과 맹주의 독주였다. 애석
하게도 그 당시 어느 문파도 무림맹을 견제하지 못했다.
상유천은 그때의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처음부터 속가제자들을 끌어 모으지도 않았다. 그들은
화산파의 자존심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유천은 다른 장문인들 역시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무림을 이
끌어가는 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생각에 있어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다른 문
파에서 이렇게 하려니 생각하면 거의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화산파의 결정과도 비슷했다. 사람이
꾸려 나가는 일이란 결국 공통 분모가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신진사대문파라는 사람들도 그 점에 있어서는 장담할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라고 문파의 자존심이 없을 것인가? 아니, 오히려 다른 문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속내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래저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은 음
모와 협작이 난무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의를 위해서든 개인의 이기심을 위해서든 말이다.
* * *
비록 드문드문 남은 것이지만 소화촌의 나무에 초록이 짙어졌다. 소화촌에도 어느덧 가을이 찾아든 것
이다. 계절은 만인에게 공평한 것이어서 재물이 있든 없든 모두가 가을의 청명한 날씨를 만끽하고 있었
다. 근래 들어 황사도 심하지 않아 거리는 사람들의 발길로 넘쳐 났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과 음식도 있다. 소화촌의 빈민들도 사람들의 이동을 따라 분주하게 떠돌아다녀
낮이면 마을이 거대한 무덤처럼 조용했다. 이렇게 청명한 가을의 소화촌에는 불문율이 있다. 낮에는 마
을을 비우고 밤에 돌아오는 것이다. 노동을 하든 구걸을 하든, 이렇게 벌기 좋은 시절에 어떻게 집구석
을 지키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단 한 집은 그 불문율과는 무관하게 살았다. 그 집은 소화촌에서 제법 유명한 소걸과 제갈위기
가 머무는 폐가였고, 사람들은 그 집을 지날 때마다 ‘일하지 않으면 처먹지도 말아야 해’ 라고 말했다.
그들의 눈에 젊고 어린 두 남자가 언제나 빈둥거리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언제나 마당ㅇ ㅔ앉아서 낮이나 밤이나 꾸벅꾸벅 졸았다. 처음에는 ‘
저렇게 일을 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염려해 주었지만, 나중에는 ‘저런 것들은 왜 사나 몰라’로
바뀌었다.
매일 마당에서 노닥거리고 앉아서 졸기나 하는데 굶주린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열심히 일
하고 구걸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그렇게 노력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주변인을 보면 속이 뒤집히는
것이다.
“사부님, 왜 사람들은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죠?”
소걸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제갈위기를 바라보았다. 제갈위기는 소걸의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소걸이 연공을 하기 싫으니 또다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방의 노거지가 죽은 뒤로 조
용히 앉아 제법 명상 흉내를 내던 소걸이다.
‘흥, 네 녀석이 이제 그 인내심의 한계에 이른 모양이로구나.’
제갈위기만큼 소걸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아마도 소걸은 저 허튼소리를 시
작으로 아침 연공을 건너뛰려 할 것이다.
“남의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군자는 말을 어눌하게 하고 행동을 민첩하게 해야 하는 버이다. 저
들은 우리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제멋대로 떠들게 두고, 너는 하라는 네 일이나 열심히 하거라. 그건
그렇고 오행토납법은 어디까지 익혔느냐?”
내랭한 제갈위기의 말에 찔끔한 소걸이 재빨리 대답했다.
“사부님의 가르침으로 두 번째 단계인 영의 근처에 이른것 같아요.”
오래전 제갈위기는 소걸에게 한 가지 호홉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대충 오행토납법이라
고 했다. 아무래도 그것이 오행지기를 끌어 모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갈위기가 가르쳐준 오행토납법
은 다섯 단계로 나누어졌는데, 그 첫 번째가 정의 단게로 이는 나오는 것으로 오행지기가 천지사방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끼는 단계였다.
두 번째는 영의 단계로 곳곳의 혈에 둑을 쌓아 물방울처럼 기운을 모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수의 단계로 물을 대는 것처럼 기운이 혈마다 흘러넘치는 것이다.
네 번째는 경의 단계로 혈에 고인 오행지기를 경맥을 따라 유유히 돌리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합의 단계로 오행지기를 모두 단전에 모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오행토납법의 다섯 번째 단계는 제갈위기로서도 생각만 해본 것에 불과했다. 자기 자신이 겨우 토
기만을 다스릴 수 있으니 오행지기를 다 모은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의 학문과 스스로 터득한 오행혈마경의 이치를 기반으로 오행지기란 결국 하나로 모아지는 기운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섯 번째 단계란 결국 제갈위기의 깊은 학문과 높은 무공으로 상상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걸의 품성으로 볼때 오행토납법의 대성이란 요원한 것으
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앞의 네 단계도 보통의 인간이 평생에 걸쳐 연마한다 해도 체득하기 어려운 것인데, 저렇게 게으르
고 설상가상으로 무식하기까지 한 소걸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제갈위기가 창안한 오행토납법은 학문과 철학의 기반이 없이는 대성하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
니, 제갈위기 자신도 이제와 터득해 보라고 하면 ‘못하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벌써 이 단계나 갔단 말이지? 그걸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제갈위기가 소걸의 뺀질거리는 얼굴을 보며 속마음과는 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열심히 연마했구나. 숨을 쉴 때마다 언제나 자신에게 ‘이게 뭐냐?’ 라고 묻기를 쉬지 말
아라.”
“네에, 스승님!”
제갈위기는 씩씩하게 대답하는 소걸의 얼굴을 외면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소걸에게 큰 기
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소걸은 삐딱해졌고, 자신은 피곤했기 때문이다. 소설이 워
낙 배우기를 싫어했고 잊기를 잘하는 탓에, 그저 호홉이나 쉬지 말고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제
오행지기를 모으거나 말거나는 어차피 제갈위기의 관심 밖이었다.
소걸은 모처럼 제갈위기가 따지지 않고 넘어가 주자 그만 기분이 좋아졌다.
‘스승님은 잘잘못을 잘 가리는 편인데, 다른 말씀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제대로 하긴 했나 보다!’
기분이 좋아진 소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마당을 이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한동아 뛰어다니던
소걸은 몸이 근질근질하자 부러진 몽둥이를 손에 쥐고 허물어진 담벼락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
다.
퍽! 퍽! 퍽!
방으로 들어가 명상에 잠기려던 제갈위기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지금 뭐 하는 게냐?”
제갈위기의 음성이 방문 밖으로 은은히 울려 나왔다. 소걸이 펄쩍이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헉헉! 스승님, 제가 지금, 헉헉, 눈에 보이지 않는, 헉헉, 개를 잡고 있어요.”
소걸이 자기 딴에는 개수작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 것이었지만, 제갈위기에게는 그저 어린 녀석의 심
심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마당에 웬 개가 있다고 수선이냐?”
“헉헉, 한 마리 개가, 헉헉, 제 마음속에 있어요.”
방문을 사이에 두고 제갈위기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이제 보니 또 그 개수작이로구나. 적당히 하거라.”
소걸은 제갈위기가 개수작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스승이 싫어하는 짓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삼 초의 개수작은 이미 몸에 익어서 전처럼
헷갈린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복잡한 삼육오나 해봐야겠다.’
개수작 삼초식도 어렵게 익혔는데 방주의 무공인 타구봉법 삼백육십오 초식을 소걸이 정상적으로 외웠
을 리가 만무하다.
소걸이 몽둥이를 제멋대로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두르며, ‘개를 데리고 나갔다’, ‘개를 일어버렸다’, ‘개를
찾아나간다’ 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참다못한 제갈위기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 되지도 않는 노래를 얼마나 더 할 셈이냐?”
“스승님, 이건 모두 삼백육십오 개나 된답니다.”
“네가 설마 그 많은 가사를 다 외웠을 리는 없을 텐데….”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 노래는 무척 재미있어요. 그래서 저절로 가사가 생각나니 언젠가는 다 기억할
수 있을 거에요.”
소걸에게는 ‘결국은 개를 찾아서 다 때려잡는다’는 내용의 가사가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그
런지 하나를 생각하면 그 다음 가사가 떠오르고, 그리고 얼마 후에는 다시 그 뒤의 가사가 떠올랐다. 어
디 가사뿐이랴? 구개음하의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이 가사와 잘 어우러져 너무 신이 났다.
그러나 제갈위기처럼 점잖은 사람에게 그런 가사가 기분 좋으리 없다. 제갈위기는 ‘무슨 그런 저질 동
요가 다 있나?’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게 심심하면 차라리 마을이나 한 바퀴 둘러보고 오너라.”
마침내 제갈위기의 입에서 외출 허거가 떨어지자 소걸은 몽둥이를 내던지고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스승님, 그럼 저는 휭하닌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어차피 이제는 근처를 맴도는 사람도 없고, 무림맹도 비었으니 소걸을 마음대로 쉬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제갈위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걸은 혹시라도 제갈위기의 마음이 변할까 봐 뒤
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소걸을 내보낸 제갈위기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거지와의 싸움에서 입은 내상이 생각
했던 것보다 깊었다. 그날 노거지의 대나무 지팡이에 얻어맞은 혈이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 이제는 모두
막혀 버렸다.
그것은 검으로 치면 일종의 검기점혈과도 같은 것이며, 지독한 내가중수법이었다. 그만한 고수가 이런
외진곳에까지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제갈위기의 짧지 않은 식견으로도 그 노거지의 정체를 알기
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무림맹에서 일했던 십여 년 전보다 훨씬 이전에 활동하던 기인임
에 틀림없다.
‘대체 어떤 공력이기에 혈마기를 뚫고 혈도마저 봉한단 말인가?’
치명적인 위험은 없었지만 한번 막힌 혈도는 쉽게 소통되지 않았다. 노거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확
실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몸에 이렇게 까지 오래도록 피해를 입힐 줄은 미처 몰랐다.
“쯧쯧, 이래서야 원수 갚기도 쉽지 않겠군.”
제갈위기가 혀로 끌탕질을 치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마경을 익히도록 사주
한 사람은 무림맹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높은 신분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군사 집무실
에 누가 그런 마경을 가져다 놓을 수 있겠는가! 군사의 집무실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군사들과 맹주, 그리고 총순찰, 호법등이다.
결국 그들 중에 한 명이 마경을 가져다 놓은 것이며, 자신은 그꾀임에 빠져 그것을 들고 낙향한 것이다.
그 대가는 아주 비싼 것이어서 제갈가가 멸문당했고, 가족은 모두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원수가 그처
럼 높은 위치에 있는 자라면 무공 또한 만만치 않을 터, 지금의 몸 상태로는 그들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제갈위기는 무림맹이 돌아올 때까지 몸을 회복시키고 무공의 경지를 더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걸에게 쏟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서는 당분간
어쩔 수 없다.
‘걸아, 너와는 훗날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마.’
지금은 해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제갈위기는 마음을 정하고 소화촌에서 폐관에 들기로 결심했다.
* * *
난주의 천마방을 떠나는 단천혈마 양지의 얼굴은 덤덤하다 못해 무표정하기까지 했다. 어제저녁에 있는
삼마와의 회동 이후 감정을 그도로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밤 삼마는 은밀히 삼로를 찾아와 낙양의
거사에 대해 의논을 했다. 낙양ㅇ에서 힘을 합쳐 장소를 없내는 데 성공하면 음산파의 독립을 인정하겠
다고 했다.
‘흥, 독립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겠지. 그때는 음산파가 어디를 오고 가도 함부로 막지 못할 것이다.’
제천혈마 장소가 누군가! 마교 제일 고수이며 그 공력의 끝을 알 수 없는 잔혹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
의 무력에 눌려 음산파가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장소가 제거된다면 누가 음산파를 잡아둘 수
있을 것인가!
그날 삼로는 삼마의 반역 모의에 절대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장소의 무공이 고강해 완전히 제거되지 않
는다 해도 그는 무공의 대부분을 상실할 것이다. 단천혈마는 낙양에서 그의 목숨을 취할수 없다고 해도
만족할 수 있었다. 잠시라도 마교의 권력 서열에서 그를 밀어내기만 하면 그 한 사람쯤은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상처 입은 호랑이쯤이야….’
물론 흉포해지기는 하겠지만, 지금처럼 마교 고수들을 수하로 부리지만 못하게 돼도 충분히 승산은 있
다. 삼마가 천산파를 잡고 삼로가 음산파를 규합하면 장소가 설 곳은 없게 될 것이다. 삼로가 노리는 것
이 바로 그 점이었다.
‘어차피 지금 음산파는 무림일통에는 관심이 없다. 조용히 음산으로 돌아가 문파의 맥을 보존하며 선대
의 무공이나 찾아 익혀 후일을 기약할 것이다.’
그것은 비단 단천혈마 양지만의 생각이 아니라 음산 삼로 모두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아무래도 무림의
분쟁이 길어질수록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무림은 한 문파의 손에 들어간 역사가
없다. 그 미친 짓을 지금의 장소 교주와 몇 사람의 측근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음산파와 마
교에 귀속된 대부분의 사파는 그들을 위한 희생양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 수는 없지.’
단천혈마는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음산파는 마교로 완전히
흡수되거나 무림에서 그 명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사실 삼마가 자발적으로 음산파를 찾아오던 그 밤, 단천혈마는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었다. 광마신단
은 독마의 짓이 분명한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처럼 서둘러 자신들의 음로를 밝힐 이유가 없다. 다
른 때 같았으면 약점을 잡았다고 좋아할 일이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삼마와 삼로의 목적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삼로도 음산파의 독립을
위해서는 교주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강호에서 굴러먹던 삼마가 그 사실을 짐작 못할 까닭이 없다. 그
들이 작정을 하고 찾아론 이상 어차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당연히 음산파의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
“낙양에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오?”
생각에 잠긴 단천혈마의 귓전으로 가느다란 전음성이 들려왔다. 곁에서 걷고 있던 귀령신마였다. 낙양
에서 장소 교주를 제거하기로 동의했으니 염려가될 것이다. 단천혈마가 피식 웃으며 전음으로 대답했다.
“먼저 음산파의 제자들을 모을 생각이외다.”
음산파의 출신으로 마교에서 활약하고 있는 절정 고수는 우선 십마왕중 세 명이 있다. 그리고 마교칠문
중 이문이 음산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무공이 쓸 만한 제자들로는 외삼당 당주 중에 두 명, 내삼당
당주 중에 한 명이 있다. 이래저래 털어 모으면 이십칠 명의 고수가 있는 셈이다.
이십칠 명의 고수 중 절정 고수는 무려 자신들을 포함해 여섯명, 그에 조금 못 미치는 고수가 이십사
명이 있는 셈이다. 이들의 숫자라면 단독으로 교주를 상대해도 완패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음
산파와 합세할 저 삼마의 측근들도 음산파 못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싸움은 천산파의 고수 중 얼마만큼의 고수가 반대하느냐에 따라 길어지거나 짧아질 것이
다. 그러나 결국 누가 반대하든 이길 것은 틀림없다. 마교 내부에 이만한 숫자의 세력이라면 굳이 치밀
한 게획조차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낙양에서 장소 교주를 제거한 후에 천산파를 그냥 둘 셈이오?”
귀령신마의 전음이 다시 이어지자 단천혈마가 걸음을 멈추었다.
“교주를 치는 것도 큰 모험인데 여기서 어찌 더 위험을 자초하겠소? 만약 우리가 천산파를 넘보면 교주
휘하의 잔존 세력과 삼마 모두를 감당해야 하는데, 지금의 우리에겐 그만한 힘이 없소.”
전음을 날린 단천혈마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단천혈마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 음산비마를 보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좋은 때가 아니오?”
뜬금없이 던져진 말에 음산비마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물게 좋은 날이구려. 올 겨울의 음산도 그렇게 궁핍하지만은 않겠소이다.”
음산비마의 말마따나 드물게 호창한 날씨였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공기는 시원하면서도 포근했다.
생에 가장 큰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까? 단천혈마는 세상사가 이처럼 속 편하게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교주의 시해란 과거로부터 현재, 아니, 미래에도 끊임없이 계속될 마교인들의 운명이었다.
마교에서는 너무 강한 자도 죽임을 당했고 너무 약한 자도 죽임을 당했다. 강한 자는 뎐제하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약한 자는 그의 자리를 탐낸 다른 마인에게 죽었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삼마가 교
주의 자리를 노리고 탐심을 부리고 있다면, 자신들은 음산파로 돌아가기 위해 모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뭐, 결국 우리도 음산파를 우리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건 교주는 역시 함부로 오를 자리가 아니
다.
단천혈마는 음산파는 삼로와 함께 지금처럼 이끌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훗날 삼로 중 어느 누군
가가 음산파를 휘어잡기위해 두 사람을 제거하려 들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까지 미리 걱정하며 살기에는
살날이 많지 않았다.
단천혈마가 좌우의 이로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 두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삼마가 아직까지 교주의 자리에 연연하는 것을 보면 그것도 그렇게 장담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권
력에의 집착이란 나이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나리가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집착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해 가을, 낙양으로 향하는 관도 위로 때 아닌 사파 무림인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천주산의 무림맹은
혈마사를 상대하느라 이런 사릴을 알 수도 없었지만, 감숙성과 섬서성, 그리고 하남성의 무림인들은 마
교의 이동이 가져올 혈풍을 지레짐작하고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 * *
천주산에 입산한 별동대가 점심 무렵이 되어 자리 잡은 곳은 정상에 거의 인접한 집점이었다. 그곳은
오르는 길이 험했지만 일단 오르고 나면 제법 널따란 분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영호성과 마초는 무림인
들에게 ‘이곳이야말로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에 편하고, 사방으로 달아나기도 용이하다’ 고 말했다. 몇 개
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분지는 제법 아늑한 감마저 주었기 때문에 무림인들은 크게 만족했
다.
춘양 진인은 무리들을 열두 소대로 나누어 각 소대별로 한 시진식 경계를 세웠다. 그리고 다시 몇 명의
고수들에게 주변 정찰을 맡겼다. 무림맹과 합류할 때까지 혈마사아 함께 있어야 하니 혈마사와 무림맹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장염은 춘양 진인의 권유에 따라 무리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명상에 들기로 했다. 춘양 진인은 장염
의 능력을 어느 정도 짐작하는 탓에 장염이 혈마사와 무림맹을 찾아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장염도 더
이상의 큰 피해 없이 싸움을 끝내고 싶었기에 춘양 진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천주산의 분지에 별동대가 자리를 잡음으로 길고 긴 여행이 끝났다. 시간이 조금 남는 사람들은
저마다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몸을 추스르고 연공을 시작하면서부터 천주산에는 의기가 충
천하기 시작했다.
춘양 진인이 그토록 배려를 하고 원했건만, 장염은 명상에 깊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무당파
제자 두 사람이 근처에서 기웃거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환영검 노호와 설상검 소소였다.
“사형, 왜 그에게 찾아가는 거예요?”
소소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노호를 바라보았다. 노호의 성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소소
로서는 지금 노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없었다. 노호는 첫 만남부터 장염을 하찮은 사람으로 보았고, 그
것이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장염이 태사조가 된 뒤로 그에 대한 혐오는 이전보다 더욱 심
해졌다.
그런데 지금 태사조 장염에게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소가 ?변이나 길을 막고 ‘왜 그러느
냐?’ 고 묻지 않았다면 벌써 장염의 앞에 도달했을 것이다. 사실 정염의 근처에서 노호가 머뭇거리고 있
는 것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소소 때문이었다.
“네가 언제부터 나의 일에 그처럼 참견을 하게 된 거냐?”
노호가 걸음을 멈추고 소소를 쏘아보았다. 이럴 때의 노호는 정말 내정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요
즘 들어 수도 없이 자기몸을 탐하던 노호가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대하자 움찔거리며 한 걸음 물
러났다.
“사형, 저는 단지…..”
“단지 뭐냐? 네 눈에는 사형도 보이지 않고 태사조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내가 태사조를 뵈러 가는
데 왜 그처럼 나서서 소동을 일으키느냐 말이다.”
소소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노호를 바라보았다.
“사형,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죠?”
“비켜라!”
노호가 어깨를 밀치며 성큼 걸어나가기 시작했지만 소소는 더이상 따라붙지 않았다. 노호가 분명히 사
형과 태사조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어….. 노호 사형은 태사조를 누구보다 싫어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노호의 돌변한 태도에 넋이 나간 소소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벌써 저만큼 엎서 나간 노호가 장
염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노호의 걸음걸이는 아주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그것은 노호가 무당산에서
사부인 도천 도사에게 무공을 전수받을 때 보여주던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설마… 노호 사형이 정말로 태사조에게 무공을 배우려고?’
마음으로는 몇번이고 부정하고 있었지만 노호는 벌써 장염앞에 나아가 허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노호도
결국은 보통의 무림인이었다. 소소는 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라리 잘되었다’ 고 생각했다. 이 기회
에 무공도 배우고 태사조와 더욱 친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 5장 마음으로 기를 다스린다
“무당파 십사대 제자 노호가 태사조를 뵙습니다.”
장염은 무심한 눈으로 노호의 숙여진 등을 바라보았다. 이미 노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염의 마음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이 거북한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노호의 완강한 등을 보
니 이미 늦었다.
“그대는 나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시오?”
장염의 음성에는 감정이 실리지 않아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 노호조차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상대가
표출하는 감정의 수위를 알아야 적당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면 저렇게 태연히 나를 맞이할 수 없을 텐데. 그러나 어
차피 언젠가는 한번 찾아올 일이다.’
노호는 마음을 가다듬고 더욱 깊이 허리를 조아렸다.
“태사조께 불경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백번 죽어 마땅한 제자입니다. 지난 일들을 모두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염이 탄식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하아, 나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지 않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비록 노호는 지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장염의 말은 사실이었다. 장염은 언제부터인가 크고 작은
은원들로부터 초연해지고 있었다. 밤낮으로 명상하며 물아일체의 지경에 들다 보니 절로 세속의 일들이
덧없게만 느껴졌다. 시대를 뒤흔들고 있는 혈마사와 마교 교주 장소는 물론이고, 요즘 들어서는 경재학
마저도 바람에 깃든 먼지처럼 여겨지는데, 하물며 노호 같은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노호에게는 장염의 대답이 빈말로 들렸다.
‘흥, 말은 그렇게 해도 그 원한이 실로 앝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노호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허리를 조아렸다.
“태사조의 바다 같은 도량에 비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못난 제자의 행동을 용서해 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없이 바라보는 장염의 눈빛에 노호는 괜히 안절부절못하다가 드디어 찾아온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
다.
“제자가 무당사에 입산한 지 십여 년 가까이 되었으나 아직 무공이 일천하여 본 파의 명성에 누가 되었
습니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옵시기를 태사조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으니 누구든지 인연이 있는 자는 묻기
를 주저 말라 하셨습니다. 이제 큰 싸움을 앞두고 제자가 태사조의 가르침에 따르고자 하오니 지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노호는 말을 마치자 허리를 곧추세우고 눈만 아래로 내리깔았다.
장염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노호를 바라보았다. 무당파의 제자들은 그동안 무례히 굴었던 기억 때문인지
선뜻 다가와 가르침을 청하지 않았다. 가끔씩 주변을 맴도는 자들이 한둘 있었지만 그들은 무두 장운인
의 지시로 수발을 거들기 위해 왔던 자들이다. 그나마 그들도 자신이 태사조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해결하자 어색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지금 노호가 무당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가
르침을 청해온 것이다.
장염은 노호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무공에 대한 집념이 자존심보다 앞서 있는 사람이로구나.’
그렇게 자부심이 강하던 사람이 저처럼 머리를 숙이고 찾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리라. 장염은 왠
지 노호의 그 집념이 부담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노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선
뜻 내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호가 무당파 장문인의 이름을 앞세워 가르침을 청하고 있으니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무당파의 제자이니 어찌 후배에게 가르침을 마다하겠소.”
마침내 승락이 떨어지자 노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장염과 동행하며 틈나는 대로 그의 무공을 훔쳐
보았다. 질투도 생겼지만 초인적인 장염의 능력에 감탄한 노호는 그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로 작정
했다.
‘장염 같은 천박한 사람도 지고한 경지에 올랐으니 내가 배우면 더 높은 경지로 접어들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장염이 앞서 나갈지라도 빠르면 오 년, 늦어도 십 년이면 장염보다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생각한 노호는 여러 날 고민하다가 마침내 오늘과 같은 방문을 결정했다. 이런 일에는 문파의 이
름을 앞세우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상대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면
된다. 그리고 그 계획은 멋들어지게 성공한 셈이다.
“그대가 익힌 무공이 무엇이오?”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노호는 장염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검으로는 태청검과 소청검, 그리고 태극검을 익혔고, 장권으로는 회풍장과 태극권을 주로 익혔습니다.”
“펼쳐 보이기 바라오.”
노호는 속으로 ‘내가 말하지 않은 새로운 공력을 전수할 일이지 번거롭게 만드는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침착하게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검을 뽑아 태청검의 검결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팟! 팟!
날카로운 검풍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만약 어설프게 하면 내가 아직 익히지 못한 줄 알고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을 게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노호는 자신의 검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노호는 마지막 초식까지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후우……”
노호가 숨을 길게 내뱉은 후 장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쯤에서 뭔가 말을 해주던가, 아니면 새로운 무
공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장염은 묵묵히 노호의 움직임을 바라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태사조?”
“계속해서 다른 것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노호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장염을 힐끔 바라본 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소청
검과 태극검을 펼쳐 보였다.
검법을 모두 끝낸 노호가 이번에는 장염이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회풍장과 태극권까지 펼
쳐 보였다. 어찌 보면 장염의 말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도 보이지만, 사정은 ‘귀찮으니 어서 이것 말고 다
른 무공을 가르쳐 달라’ 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한참 만에 노호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헉헉. 태사조! 이것이 제가 아는 무당파의 무공입니다.”
한순간에 쏟아 부은 힘 때문에 노호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장염은 땀에젖은
노호를 유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노호의 검에는 귀기가 서렸고, 그의 장권에도 딱딱함이 가득하다. 무당파의 무공을 저토록 정교하게 펼
칠 줄 알면서도 그 가는 길이 다르니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다.’
노호는 검로나 장권의 투로가 격식에 맞으면서도 그 속에 깃든 정신은 전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모
습은 무당파의 것이었으나, 그것의 발현은 너무도 달랐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절도있는 동작이며 기운
이 충만한 것으로 보였겠지만 장염의 눈에는 귀기와 긴장의 다름 아니었다.
‘이대로 두면 그는 언젠가자신의 귀기에 사로잡혀 도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무당파의 무공은 순정화평한 것으로 익히면 일힐수록 심성이 고와지고 평화를 추구한다. 그런데 저처럼
높은 경지까지 익히고도 오히려 마공을 익힌 사람처럼 굳고 날카로우니 이해 할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
은배우기에 따라 선하고 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하나 있구려…..”
“…….”
노호가 열기 가득한 눈으로 장염을 마주 보았다. 인연이 닿으면 오가다가 마주치는 어줍잖은 사람에게
조차 아낌없이 무공을 전수해 준다는 장염이다. 장가촌의 촌 무지렁이들에게도 무공을 전수했고, 공동파
와 아미파는 물론 수계현 에서부터 따라온 초절정 하수들에게도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고 들었다.
어디 그뿐이랴? 사파 줄신의 사내와 무림의 삼류 건달에게도 무공을 전수해 준 것으로 알고있다. 사실
노호가 장염을 찾아오게 된 것도 그 같은 장염의 행동 때문이다.
“그대의 무공은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가 없으나 그 내용이 구결과 상이 하니, 나로서는 태평경을 먼저
가르치고 싶군요.”
말을 마친 장염이 천천히 경구를 슷떳기 시작했다. 이 태평경은 부친인 장삼이 즐겨 읽던 도교의 경
전으로 위대한 평화를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런 염병할….’
노호가 어금니를 악물고 장염을 노려보았다. 저 태사조라는 장염이 고의로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 틀림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법술사들이나 중얼거리고 다니는 경구글 암송할 까닭이 없다.
‘어쩐지….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할 때부터 알아봤다. 네놈이 과거의 작은 원한을 가지고 이렇
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거로구나.’
평소 내려다보던 장염의 앞에 나와 고개를 숙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했던가! 그러나 장염은
끝내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지 않고 이렇게 능멸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너에게는 가르쳐 줄 수가 없
다’ 라고 했으면 가증스럽지나 않을 것이다.
“그만두시오!”
노호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장염을 노려보았다.
“일찍이 당신과 나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뒤로하고 찾아와 고개를 숙였소. 그
러나 당신은 끝내 선배 된 도리를 다하지 않고, 장문인의 말씀까지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후배를 조롱하
는구려! 차라리 가르치기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하지 그러시오!”
노호는 자신의 기분에 사로잡혀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사실 분지는 거의 원형에 가깝게
오목한 곳으로 귀를 기울이면 무리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다. 다만 서로의 체면이 있으므로 고의로 엿들
으려 하지 않아 그런대로 사적인 대화들이 간간이 오갔지만, 지금처럼 호통을 치게 되면 사정은 다르다.
노호가 소리칠 때부터 유심히 지켜보던 춘양 진인과 도천 도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도천 도사는 다가
오자마자 장염에게 읍을 한 뒤 황급히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태사조 앞에서 이게 무슨 불경스런 태도란 말이냐!”
“사부님, 부족한 제자가 오늘 태사조께 가르침을 청했으나 오히려 놀림당하게되어 그만 흥분…….”
부르르 떨고 있던 춘양 진인이 노호의 말을 끊고 단호히 말했다.
“존장을 능멸하고도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다니, 아직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한단 말이
냐!”
춘양 진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호가 무릎을 꿇었다.
“장문인, 제자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오늘 이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제자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어허, 이놈이 그래도 감히 장문인께…..”
“두어라, 오늘은 노호의 말을 들어보아야겠다.”
춘양 진인이 문득 도천 도사의 말을 끊고 노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철없는 제자
중의 하나려니 생각했으나 하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춘양 진인은 이 순간 노호가 얼
마만큼 위험한 인물인지 속속들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춘양 진인의 속을 알 리 없는 노호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인가!
“태사조와 제자는 오래전부터 작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태사조를 알 수 없었기에 제자가 버릇없
이 몇번 태사조께 손을 썼습니다. 그런데 태사조께서 본 문의 어른임이 밝혀지고 난 뒤, 저는 두렵고 공
경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사죄하고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자염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노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춘양 진인은
슬쩍 장염의 표정을 살핀후 ‘과연 그릇이 이처럼 다르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누구라도 후배에게 이 같은
모욕을 당하면 듣는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장염은 한가하게 소풍을 나온 사람 같았다.
“그런데 태사조께서는 외인에게는 본 파의 무공을 쉽게 가르쳐 왔으면서도 제자에게는…..”
노호가 말을 흐리자 춘양 진인이 조용히 물었다.
“너에게는?”
“무공을 가르치겠다고 말만 앞세울 뿐 희롱하기만 하시니, 어찌 제자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
과거의 원한 때문에 너만은 가르칠 수 없다’ 고하셨으면 제자가 이토록 원망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춘양 진인이 장염에게 허리를 숙여 공경을 표한 뒤 다시 물었다.
“그래, 태사조께서 너를 어떻게 희롱하시더냐?”
“제자에게 지금까지 이긴 무공을 펼쳐 보이라 하시고는, 새로운 무공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태평경을 말씀하시니…… 이는 필시 제자에게 사사로운 원한을 풀지 못하고 게신것이 아니겠습
니까?”
장염은 노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로운 무공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노호는 한두 마디 살을
붙여 자신을 몰염치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차피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거짓은
오래가지 않는다.
원망으로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노호의 눈을 마주 보던 춘양 진인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너의 무공을 펼쳐 보거라.”
노호는 일순 당황했지만 공손히 몇 걸음 물러났다. 어차피 얼마나 완벽하게 익혔는지 보여주지 않으면
믿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노호의 검이 천천히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노호의 태청검과 소청검, 그리고 태극검이 펼쳐
졌다.
그런데 노호의 절도있는 검법을 유심히 바라보던 춘양 진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허어, 우리 도문에 어쩌자고 이런 일이…. 그만 하면 됐다.”
검을 거둔 뒤 다시 한 번 장권을 펼치려던 노호의 몸이 정지했다.
“후욱… 후욱…..”
가쁜 숨을 조절하던 노호는 춘양 진인 앞에 다가와 허리를 조아렸다. 절기를 완벽하게 시연해야한다는
부담으로 공력을 크게 소모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
생은 끝난 것과 다름없으므로 아낄 것도 없었다.
“도천아, 너는 어떠하냐? 네 눈에도 태사조께서 잘못한 것으로 보이느냐?”
도천 도사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자는 아직 공부가 깊지 못하여…….”
“쯧쯧…..”
춘양 진인은 이미 장염의 사람됨을 익히 아는 처지다. 결코 사사로운 은원 때문에 사람을 능멸할 사람
이 아니었다. 사숙이 태평경으로 희롱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갈 수도있었을
것이다. 천하십대고수이며 도력이 깊은 춘양 진인은 특별한 관심으로 노호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심
안으로 노호의 검식을 관하다가 검에 깃든 귀기를 보고야 만 것이다.
보통 기운이라고 하는 것은 내공과는 또 다른 것이다. 기운은 패도적인 것, 유현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등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달랐다. 처음에는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한 사람이 기운을 끌어들이지만,
나중에는 형성된 기운이 자기와 비슷한 종류의 기운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 기운이 사람에게 쌓여 음산
하다거나 밝은 기운을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그 기운의 형성이 더욱 빠르고 극단적이었다. 생각을 집중하거나 연공하는
중에 우주에 떠도는 온갖 기운을 쉬지 않고 끄렁들이기 때문이다. 기운은 서로 닮은 것들끼리 뭉치고 다
른 기운을 밀어낸다. 그래서 마침내 한 가지 기운이 사람에게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파의 무공을 익힌 사람들은 무공 자체가 주는 어두움 때문에 성격마저도 어둡게 바뀌는데, 그럴 경우
그가 풍기는 기운도 그에 걸맞게 암울해졌다. 그러므로 기운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
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 사람도 많듯 기운의 종류도 다양했지만, 도가에서 가장 경계하는 기운은 귀기였다. 귀기는 정신
을 혼미케 할 뿐 아니라 성품마저 완전히 변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도사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돌며 이 귀기와 대적하여 싸우고 있었다.
춘양 진인은 무공의 고수이며 신심이 깊은 도사였기 때문에 검에 깃든 노호의 귀기를 발견한 것이다.
일단 도문의 사람으로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바로 저 귀기이다. 저 귀기야 말로 모든 도사들의 원수이며
물리쳐야 할 적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 귀기에 사로잡혀 나중에는 일대 마인으로 변해갔다.
춘양 진인의 마음이 번민으로 가득 찼다. 하필이면 이 급박한 때에 귀문에접한 제자를 보게 된 것이다.
이 귀기의 근원이나 시발점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것은 있다. 도문과 귀문은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 저 귀기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언젠가 강호에는 귀검이 출현할 것이며, 노호는 도사들의 원수
가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장 사숙은 그것을 내다본 것이리라.
춘양 진인은 이마를 찌푸리며 노호를 바라보았다. 이제 문제는 ‘버릇없는 제자를 가르치는 것’ 에서 ‘도
문이 원수가 도리 싹을 어떻게 하느냐’ 의 갈림길로 접어든 것이다.
“너의 길은 우리와 다르구나. 너의 태사조께서는 바른 길을 가르쳐 주려고 하신게다.”
노호는 바른 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가 ‘장문인도 장염과 같은 사람이로구나’ 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
한 것은 무공의 가르침인데 장염과 장문인은 자꾸만 과거의 은원을 빗대어 야단치고 있는 것이다.
“장문인께서도 이미 태사조와 같은 마음으로 제자를 비나하시니 억울하옵니다.”
춘양 진인은 이번에는 자신에게까지 대드는 노호를 보며 ‘어허! 어허!’ 하며 탄식을 터뜨렸다.
“네 이놈! 어찌 장문인과 사조에게……”
도천 도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호가 소리쳤다.
“사부님께서도 그 이유를 모르기는 저와 마찬가지가 아니십니까! 왜 연배가 낮고 무공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로 이처럼 괄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도천 도사는 일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딱히 노호의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춘양 진인은 실성한 사람처럼 따지고 드는 노호를 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노호의 눈에서 쏟아지는 귀
기 어린 광망을 바라보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필이면… 내 대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이냐.’
정말 그랬다. 한번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는 본 적도 없는 일이 자신의 대에 생긴 것이다. 게다가 시기
적으로 가장 위태로운 때에 말이다. 그러나 일문의 수장이 되어 어찌 방관만 할 것인가! 비록 바라는 바
는 아니지만 정리할 것은 속히 정리해야 한다. 그것도 문도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말이
다. 마음을 정리한 춘양 진인이 단호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무지와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고 어찌 상대를 탓하는게냐! 네가 진정으로 나를 장문인으로 인정
하고 사숙을 태사조로 인정하였다면 이미 그 가르침에 따랐을 것이다. 도천아!”
도천 도사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자 장문인의 하명을 기다리옵니다.”
“무당파에서 사문의 존장을 능멸한 자와 귀문에 접한 자를 어떻게 처리하라 가르치더냐!”
깜짝 놀란 도천 도사가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떴다. 존장을 능멸한 죄는 파문이며 귀문에 접한 자는 무
공을 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무당파에 들어온 이래 아직 존장을 능멸했다거나 귀문에 접한 자를
보지 못했다.
도천 도사는 제자 노호 앞에서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내가 너를 잘못 가르친 것이더냐?”
그 말은 ‘너는 나의 판단을 믿지 못하느냐?’ 고 되묻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도천 도사는 즉시 춘양 진
인의 말뜻을 깨닫고 노호를 바라보았다. 노호도 아끼지만 춘양 진인의 가르침에 그릇도니점은 없었다.
노호가 존장을 능멸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귀문에 관한 사부의 판단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귀문에 접
한 자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도천 도사의 입술이 힘겹게 열리
기 시작했다.
“존장의 능멸은…. 파문이며, 귀문에 접한 자는 무공을 폐하는 것입니다.”
주변이 삽시간에 긴장으로 가득 찼다. 다른 문파의 사람들은 애써 외면했고, 무당파의 사람들은 이 일
이 어떻게 처리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뿐이었다. 지금까지 무당파에서 파문을 당한 사람은 여럿 있
었지만 무공까지 폐하여진 사람은 드물었다.
짧은 순간 춘양 진인은 복잡한 눈빛으로 노호를 바라보았다. 비록 자신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아
무래도 노호는 돌이키기 어려운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귀문에 접했으니 그대로 두면 후환
이 무궁할 것이다.
“무당파 십삼대 도천의 제자 노호는 들어라. 지금까지 너의 언행이 실로 무당파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장에 대한 능멸이 지나쳐… 너를 파문한다. 네가 이미 귀문에 접했으니 어찌 무당파의 공력을 남겨두
랴! 제자들은 노호의 기해혈을 파하여 무당파의 공력이 그에게서 떠나게 하라.”
일단 장문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도천 도사가 노호의 혈도를 봉쇄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미안하구나,노호야.”
노호는 일이 이렇게 까지 커질 줄 몰랐으므로 눈을 치뜨고 소리쳤다.
“사부님, 억울합니다.! 어찌 무공을 가르쳐 달라던 제자에게 죄가 있단 말입니까! 외인에게까지 아낌없
이 전해주면서도 사문의 후배에게는 무공을 전수하지 않는 태사조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닙니까! 게다가
귀문이라뇨? 제자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귀문이 대체 무엇입니까?”
“……….”
도천 도사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문파와 가는 길이 달라 파문된 제자는 따로 교류라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무림인이 무공을 폐쇄당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찾아갈 이유도 명분도 없고, 찾아가 만난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무당파의 제자들 중 법술사들은 귀문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공을 주로 배운 무도사들에게 귀문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래더 귀기란 무림인들보다는 일반인들의 삶과 더욱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무림인의 경우 대부분 그들이 익히는 내공술의 정심함에 의해 심마의 과정을 거쳐 귀기를 극복했던 것
이다.
장문인과 동행하던 집법장로 정허 도사가 노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허 도사가 참담한 표정으로 노호
의 단전에 손을 얹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보다 못한 장염이 춘양 진인과 노호 사이로 걸어나왔다. 노호의 검에 깃든 귀기는 그의 심성이 악랄하
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노호와의 갈등도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만물은 서로가 조금씩 영향을 주
고받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노호는 자신을 원망하고 저주하다가 귀기를 끌어들이게 된
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노호가 파문당하고 무공이 폐쇄되는 것에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
이라고 할지라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을 터인데, 자신과 오랜 시간 알게 모르게 부대끼며 지내온
사람이다.
“장문인, 노호 소협의 파문을 보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춘양 진인은 장염이 나서자 ‘아직 귀문에 대해 잘 모르시나 보다’ 라고 생각하여 즉시 대답했다.
“사숙, 귀문에 접어든 자에게 자비를 베풀 수는 없습니다.”
만약 자비를 베풀었는데 그가 악독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뒤에 따르는 희생을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그이 마음이 귀기에 사로잡혀 조금씩 변해갈 것입니다. 무림인중에 귀문에 접어든 자 치고 혈풍강호하
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사숙께서 저의 고충을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춘양 진인이 염려하는 바는 그것이었다. 일반인도 귀문에 접어들면 미친 짓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한데,
하물며 무림인이야 오죽하겠느가! 더구나 구대문파의 무공은 보통의 무림인들이 감당할 수도 없다. 누가
노호의 뒤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면, 노호처럼 귀문에 든 무림인은 크나큰 재앙인 것이다.
“우리가 기왕에 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이니 그로 하여금 마음으로 기를 다스리도록 기회를 줌이 어떻겠
습니까?”
춘양 진인의 눈에 잠시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마음으로 기를 다스린다.’ 는 말은 법술사
들에게는 신앙과 같은 이었다. 자신도 오래전 사부에게 무공과 법술을 전수받을 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귀문에 접어든 사람에게 어떤 희망이 있단 말인가!
‘대체 저 노호는 어쩌다가 귀문에 접어들어 사문의 앞길을 막는 것인지…..’
춘양 진인이 한동안 고민하다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축귀의식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절정 고수
의 심안에 겨우 포착될 저 심원한 귀기를 누가, 그리고 무슨 수로 제거한단 말인가!
“사숙, 아무리 생가하여도 안 되겠습니다. 이번만은 사숙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춘양 진인과 장염의 말을 듣던 노호의 안색이 울그락불그락 변해갔다.
‘멀쩡한 사람을 앞두고 귀기니 뭐니 하는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나의 인생까지도
끝장을 내려고 하는구나!’
지금까지 부모처럼 믿고 의지하던 도천 도사마저도 자신을 배신하고 오히려 혈도를 봉쇄했다. 노호는
이미 무당파에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설자라리는 커녕 이제 무공을 폐하고 쫓
겨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 추잡한 것들! 그토록 오랜 정리마저도 장염 때문에 외면하다니! 이것들이 한술 더 떠서 이제는 나를
죽이려고 드는구나!’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서 있던 노호는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했다. 이전
까지 무림의 후지기수로 한 몸에 갈채를 받아왔으나, 이제는 도리어 사문에서 버림받고 무공마저 잃게
생겼다. 지금까지 사파의 고수들에게 협명을 그만큼 떨쳤으니, 무공을 잃으면 반드시 살해당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가슴 밑바닥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크하핫! 오냐! 이 추악한 인면수심의 무리들아! 너희들이야말로 아침저녁으로 간사하게 마음이 변하는
구나! 어제까지 촉망받는 제자며 무림의 기재라고 떠받들더니, 오늘 장염이 나를 핍박하니 너희들도 나
를 외면해? 마음대로 해라! 파문이라고 했느냐? 오냐, 파문시켜라! 아니, 내가 너희 돼먹지 않은 도사들
을 모두 파문시키겠다! 내가 살아나기만 한다면 반드시 복수할 테니 차라리 여기서 나를 죽여라!”
반쯤 실성한 노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제야 귀문이라는 게 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언제 노
호가 저 같은 원한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가! 사람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노호는 입으로 끊임없이 도
사들을 향해 욕설과 저주을 쏟아냈다.
장염은 그런 노호와 춘양 진인을 번갈아 보며 탄식했다.
‘아아, 너무 늦었다. 노호와 무당파 사이에 이렇듯 골이 깊게 패였으니, 좋은 끝을 보기는 어렵게 되었
다.’
정말 이제 노호가 죽든 무당파가 죽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무림에서 사라져아 했다. 그리고 이변이 없
는 한 노호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 나리라.
‘엣말에 천명은 머물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 답답하구나.’
너호를 도우려 했지만 오히려 그에게 원한을 샀고, 무당파와 노호마저 돌이킬 수없는 관게가 되고 말았
다. 모두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장염으로서도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노호의 욕설을 듣다 못한 춘양 진인이 소리쳤다.
“정허 도사는 무엇을 망설이시는가!”
정허 도사가 허리를 조아리며 ‘장문인의 명을 받듭니다’ 라고 대답했을 때다.
“혈마사다!”
분지 끝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청룡당 수적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한순간 무림인들 사이로 공포가
휩쓸고 지나갔다. 아직 무림맹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혐마사를 먼저 만난 것이다.
춘양 진인이 우왕좌왕하는 무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황하지 말고 소대별로 담당한 지역으로 가시오!”
사람들은 노호 하나만 남기고 모두 제자리를 찾아 뛰어갔다. 한쪽으로 달려가던 지검천왕이 품에서 오
색비연무를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퍼엉!
오색의 연기가 맑은 하늘에 아름답게 펼쳐졌다. 이 정도의 신호라면 근처에 있는 무림맹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혈마사의 눈에도 띄겠지만, 어차피 혈마사와는 이미 마주쳤으니 더이상 주저할 이
유가 없었다.
장염은 안타까운 눈으로 홀로 남은 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자신이 그를 위해 해줄 일은
없었다. 장염은 짧은 한숨을 쉬고 청룡당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지금은 혈마사의
일부터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늦게 가면 늦는 만큼 사상자가 생기니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수적들이 한쪽으로 달려 내려가자 그 뒤를 사대찬왕 중 지검천왕과 증창천왕이 따랐다. 사대천왕은 정
룡당의 신세를 진 이후로 그들에게 신세를 갚기 위해 행동을 함깨해 오고 있었다. 지금은 다비천왕과 광
권천왕의 부상이 심하여 두 사람만 먼저 몸을 날린 것이다.
허공으로 몸을 띄운 장염은 청룡당과 함께 달려가는 이무심을 발견하고 곧 그이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대협, 지금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아. 청룡당의 사람들이 라마승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 다
급하게 따라 내겨간 모양입니다.”
장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살폈다. 뛰어가는 철룡당과 사대천왕, 그리고 그 뒤에 다시 꼬리를 물
고 달리는 풍림자으이 모습이 안정되어 보였다. 아마도 청룡당의 수적과 혈마사의 척후조가 어쩌다 눈이
마주친 모양이다.
그들이 척후조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피바다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안
심할 바는 아니다. 척후조가 분지에 모인 무림인들을 발견하고 돌아간다면 언제 습격이 시작될지 모르는
일이다.
장염이 공력을 일으켜 아래로 몸을 날리자 한줄기 선으로 변해 이무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무심은
장염이 자기를 지나쳐 사라지자 곧 걸음을 멈추었다.
“허….. 정말….. 하루가 다르구나…..”
어느새 장염은 자기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동향 사람이라는 친분으로 그
럭저럭 곁에 머물기 어렵지 않았는데, 이제는 같이 있어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마치 한줄기 바람처럼
사람들의 곁에 머물다가 훌쩍 떠나는 느낌이었다. 마치 지금의 장염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듯이 말이다.
장염은 사대천왕을 지나 청룡당의 수적들에게 이르렀다. 그런데 장염이 다가갈수록 수적들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마침내 장염이 그들에게 다가갔을 때 수적들은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아, 이미 종적을 놓친 개로구나.’
울창한 숲 속에서 수적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장염은 수적들으 지나쳐 단수에 오십여 장을 달
려갔지만, 사람이 흔적을 찾지 못했다. 잠시 나무 끝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던 장염은 멀리서 한 무리 거
대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아, 무림맹이 연기를 보고 이리로 오는구나.’
장염은 그 기운에 사기가 깃들지 않음을 보고 무림맹이라고 생각했다.
‘무림맹이 이미 지적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다.’
적어도 혈마사보다는 무림맹이 더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잠시 나무 위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장염이
다시 분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분지로 돌아온 장염은 허탈해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청룡당이 혈마사의
척후조를 놓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염이 다가가자 춘양 진인이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숙, 무당파의 여제자와 노호가 사라졌습니다.”
춘양 진인의 뒤로 무당파 제자들이 낯빛을 굳힌 채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색비연무를 날리고 사
방으로 뛰어다니다가 돌아와 보니 노호가 사라진 것이다. 장문인이 노호를 파문시키고 그의 무공을 폐하
라고 했건만, 정작 노호가 사라졌으니 문파의 망신이었다. 크게 놀란 무당파 제자들이 뒤늦게 사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노호를 발견할 수없었다.
원래 노호가 점혈당하여 서있던 자리는 장염이 명상에 잠기던 자리다. 그곳은 사람들의 눈이 쉽게 미치
지 않는 분지의 한 귀퉁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점혈당한 채 서 있던 노호가 혼란한 와중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노호는 수성에도 좋지만 사방으로 달아나기도 좋은 분지의 지리적이 헤택을 톡톡히 본 셈이다.
한참 만에 머뭇거리던 도천 도사가 입을 열었다.
“장문인 ,아무래도…. 제자인 소소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간 것 같습니다. 제가 거둔 아이들중 이제 둘만
남았으니, 서로 아끼는 마음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 제자를 잘못 거둔 저의 잘못입니다.”
춘양 진인이 도천 도사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됐다. 두 사람의 깊은 관게를 알고도 이런 일을 에측하지 못한 나의 책임이 크다. 그나저나 귀문에 든
자가 달아났으니 앞으로 법술사들이 어찌 될꼬…..”
도천 도사는 춘양 진인이 뭔가 더 알고 있는 듯 말하자 그만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찌 그들의 관계를 자
신만 알고 있었다고 착각하며 있었을까! 장문인까지 알 정도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아, 내가 알 정도면 다른 사람도 알 수있으리란 생각을 왜 하지 못했던가. 그 둘을 좀더 잘 살폈어야
하는것을…..’
제자 네 사람을 거두웠는데 하나는 죽고, 둘은 파문당하고 ,나머지 하나는 파문당한 제자와 도망쳤다.
이처럼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어찌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춘양 진인의 얼굴은 도천 도사보다 더욱 어두웠다. 법술사들은 무공보다는 술법에 능한 사라드이며, 민
간을 돌아다니며 축귀 의식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무당파에 한을 품은 노호가 달아났으니 그 뒷
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춘양 진인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제자들은 모두 물러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도록 해라.”
무당파 제자들이 축 처진 어깨로 자리를 떠나갔다. 춘양 진인은 제자들이 떠나자 장염에게 간단히 예를
표하고 몸을 돌렸다.
“장문인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몸을 돌린 춘양 진인에게 장염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호탄을 보고 무림맹이 먼저 찾아온 것 같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무림맹의 본진이 있으니 조만간 그
들과 만나게될 것입니다.”
춘양 진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혈마사를놓치고 노호도 달아나 절망스러웠던 차에 정말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사숙의 말씀을 들으니 적으나마 위안이 됩니다.그런데… 노호가 달아났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 ”
“모든 것은 하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사람이 계획을 하여도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 하지 않습니까?”
“허헛…. 그렇겠지요.”
춘양 진인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즘 들어 너무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무당파의 사문을 나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이 계획과 어긋나 있었다. 태청단으로 내공을 회복한 뒤 천하를 좁다고 굽어
보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득도란 이런 삶보다 더욱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
게 생각하니 더욱 암담해졌다.
무림맹이 가까이에 있다는 장염의 이야기가 퍼지자 무림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혈마사를 먼저 발견했
을 째부터 느껴지던 공포는 어느 틈에 사라져 있었다. 위기감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조금씩 무당파 노호
의 일을 이야기했다.
멀리서 무당파의 일을 구경하던 풍운도 청운에게 물었다.
“사형, 사형은 귀문이 뭔지 알아요?”
“나라고 어찌 알겠느냐?”
“사형은 궁금하지 않아요?”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대체 뭐냐?”
“사부님께 여쭤보러 가자구요.”
청운이 자제를 바라보다가 ‘끙’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사실 자신도 그것이 가장 궁금했기 때문이
다. 대체 귀문이 무엇이길래 무당파의 노호 같은 사람이 한순간에 무공마저 빼앗겨야 한다는 것일까?
“가자.”
청운이 짧게 말하고 스승인 광료에게로 걸어갔다. 청운의 뒤를 풍운과 일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라갔다.
청운은 광료 앞에 이르자 목소리를 낮춰 인사를 올렸다.
“사부님, 저희들이 왔습니다.”
광료가 전에 없는 태도를 보이는 제자들에게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능른 또 무슨 일들이냐? 어디서 목들을 다쳤는냐? 목소리하고는 …….”
공동파에서 마지막으로 데리고 나온 제가들의 엉뚱한 행동 째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게
몇 번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공동파의 맥이 이런 녀석들에게 이어져도 되는 것인가 하고 의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히려 사형은 이 녀석들의 허튼 짓거리를 ‘허허’ 웃으며 넘겨주고 있다.
‘ 뭐….. 잘되겠지.’
잘될 것이다. 아니, 잘되어야 한다.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저려온다. 사부인 태허자의 마
지막 너털웃음이 떠오르는 날이면 광료는 하루 종일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태허자의 당부가 아니었던들
어찌 세 제자들을 데리고 하산했겠는가! 세 제자와 강호를 떠돌며 생활하다 보니 손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무공을 전수하지 않기 때문인가?’
어쩌면 자신이 무공 사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세 녀석도 자신을 그다지 어려워하는 기색
이 없다. 추료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는 녀석들이 자신에게는 별 소리를 다 하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도
추료에게 묻기 어려운 시답지 않은 질문을 한 보따리 안고 왔을 게다. 그래도 그런 녀석들이 밉지만은
않았다.
광료의 귓가에 청운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무당파에서 말하는 귀문이 뭔가요?”
순간 광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무당파의 일을 이 호기심 많은 녀석들도 구경하고 만 것이다.
‘하긴, 이 녀석들도 이제 법술사의 일을 알 때가 된 겐가.’
공동파도 도가의 계열이라 법술사가 제법 많이 있었다. 무림에서 멸문의 화를 입은 것은 주로 무공을
익히는 도사들이다. 그러나 이제 공동파의 몇 안되는 체자들이니 무공이든 법술이든 가르칠 건 다 가르
쳐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혈마사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으니 여기서 자신이 전하지 않으면 장차 누가 일
러줄 것인가!
광료는 세 제자들을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가서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잘 새겨듣고 외인에게는 함부로 발설하지 말아라. 세상에 있는 도사는 모두 두 종류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첫째는 법술사요, 둘째가 무공술사다. 본래 도사들은 모구 법술만을 공부했으나 점차 내외공을 함께
연마하게 되었으니 법술사야 말로 도사 중의 도사라고 할 수 있지.”
듣고 있던 일운이 궁금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럼 우리는 뭐지요?”
“네 녀석들은 마당을 쓸다가 뒤늦게 무공이나 배웠으니 뭐겠느냐?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데 또 한 번 끼
어들면 말해 주지 않을 테다.”
찔끔한 일운이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광료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법술사들이 하는 일은 신부와 옥결, 영도 등을 가지고 귀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귀기란 무엇이냐? 한마디로 미망의 세계흘 떠도는 미혹케 하는 존재들에게 그 마음이 사로잡힌 사
람을 말한다. 귀기에 사로잡히면 보통 심성이 극악하게 변한다거나 귀신 들리고 말지.도문에서는 그런
자들을 일컬어 귀문에 접했다고 말한다.”
“귀문에 접했다는 말이 귀신 들린 거라구요?”
깜짝 놀란 얼굴로 청운이 되묻자 광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노호는 멀쩡하던 걸요? 좀 건방지긴 했지만 그래도 미친 사람 같지는 않던데…..”
청운의 말을 듣던 광료가 ‘허허’웃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귀계가 보이면 어찌 도사가 필요하겠느냐? 귀문에 접한 자를 알아볼 수 있는 자는
도사 둥에도 극히 드물단다. 그리고 도사들은 구별하는 자들의 말을 절대 의심하지 않지.”
지금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풍운이 물었다.
“그럼 귀문에 접했다는 것은…. 영적인 존재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인가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기운은 마음을 따라가며 사람의 마음은 기운을 따라간다. 세상에 많은 기운이
있는데, 너희가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 기운이 모이게 되는 게야. 그 기운들 중에도 귀기가 있
는데 이 귀기는 사람의 심성을 잔혹하게 변화시키지.”
일운이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귀문이라는 것은 귀기스런 기운과 귀신이라는 말인가요?”
광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사람이 스스로 마음에서 간절히 원해 세상에 떠도는 괴기스런 기운을 끌어 모아도 귀문이요,
귀신에 접해도 귀문이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자는 몇 사람의 법술사들뿐이다.”
이룬이 주변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사부님, 왠지 으스스해요……..”
광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귀기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허공의 귀기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르는 대
로 기운은 일어나게 되어 있거든. 이제 알겠는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던 풍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그런데 한 가지 더 궁금한게 있어요.”
“뭐냐?”
“누구나 귀문에 접할 수 있는 건가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귀문과 접하지 않을수 있죠?”
“좋은 질문이다. 내가 말하지 않더냐. 마음이 기운을 불러들인다. 그 마음이 바르면 귀문에 잡히지 않느
다. 아마도 무당파의 노호는 그 마음이 올곧지 않았기에 귀문에 든 것일 게다. 사람을 끊임없이 미워하
고 원망한다는 것은 귀문에 드는 지름길이지……”
“하지만 마음이 옳지 않다고 다 귀문에 드는 것은 아니잖아요?”
광료가 물끄러미 일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결국 모든 것은 천명이라고 할 수 있지. 너희도 부지런히 마음의 공부를 하도록 해라.”
공동파의 세 제자는 ‘예’ 라고 대답한 뒤 조용히 물러났다. 광료는 물러가는 세 소년들을 바라보며 희미
하게 웃었다. 더 이상 자신이 그들에게 가르칠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가르칠것이 남았다.
광료는 무공이 아니라 법술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광료는 제자들이 눈앞에서 벗어날 때까지 나무 그늘에 앉아 바라봐 주었다. 아무래도 세상의 일이 그들
이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일까? 돌아가는 세 제자의 걸음걸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제 6장 타고난 신령스런 성품이 빛을 발하다
“그래, 저 우측의 봉우리 끝 부분에 무림인들이 있더란 말이냐?”
혈마륵이 마하륵의 물음에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열 명의 형제들이 앞서 출발했는데, 그들이 봉우리에서 일단의 무림인과 마주쳤다고 합니
다.”
“그래, 드디어 그들이 저곳에서우리와 대적하기로 작정하였구나.”
마하륵의 말에는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아 조금 허탈하게까지 들렸다.
“마하륵이시여, 무림맹의 사람들이 근처에 있으니 서둘러 저들을 쳐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미 옳은 것은 없다.”
“…….”
혈마륵은 마하륵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언제부터인지 마하륵은 옳고 그른 것으로 부터 멀리 떠
나 있었다.
‘흡혈을 끊으시면서부터 마하륵께서 조금씩 이상해지셨다.’
그러나 마하륵이 혈마사의 주지이므로 그 말에 따라야 했다. 아니, 마하륵이 주지가 아니었어도 자신은
그의 말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만큼 마하륵은 이미 자신이 짐작하기 어려운 곳에 가버린 분이었다.
“마하륵이시여, 언제까지 저들을 살펴보시겠습니까?”
마하륵이 웃으며 혈마륵을 바라보았다. 혈마륵은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자신이
망설이게 된 원인은 지난밤 만난 그 알지 못할 기운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생각할 때 모든 일의 끝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혈마륵이 공손히 절하고 물러났다. 어차피 무림맹이든 저 일단의 무림인이든 혈마사의 상대였으니 지금
서둘 필요는 없다. 자신이 눈앞의 무림인들을 먼저 없애고 싶었던 것은 아미타삼혈존의 복수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가 그들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이상 조금 돌아갈 뿐이다.’
얼마 후 마하륵은 혈마사의 라마승들에게 ‘하루 더 쉬었다가 산을 오르겠다’ 고 했다.
마하륵은 명상 중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눈앞에 혈마륵이 조용히 서 있었다.
“마하륵이시여,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마하륵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
마하륵은 묵묵히 혈마륵을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나도 스승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승이 아니었다. 내가 너에게 뭐라고 하더냐?”
혈마륵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에게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혈라마의 음성을 듣지 못한 지 여러 날이 지났구나. 이제 네가 혈라마의 음성을 들었으니 혈마사
의 주지가 바뀔 것이다. 혈라마께서 우리를 부르시니 어찌 지체하겠는냐, 잘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 쉬거
라.”
“마하륵이시여, 언제 돌아가더라도 저 눈앞의 무림인들만은 없애야 합니다.”
“아직은 너의 시대가 아니다.”
“……….”
혈마륵은 한참을 묵묵히 서있다가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하륵은 별이 쏟아질 듯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간 것인가……’
어느 틈에 혈마사의 새로운 주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혈라마가 혈마륵을 부르신 것은 아마도 주지를 바
꾸는 것뿐만 아니라 뭔가 계획하신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대체 무엇일까?
‘왜 혈라마께서는 혈기 가득한 혈마륵에게 혈마사를 맡기신 것일까?’
왠지 혈마사에 남아 있는 노라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라마가 옆에 계시다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우
리의 믿음은 무엇이며 어떻게수행하는 것이옳은지, 그리고 지금 저 눈앞의 무림인들을 모두 없애고 돌아
가는 것이옳은지, 그러나 노라마는 곁에 없었고 아직까지는 자신이 혈마사의 주지였다.
마하륵은 다시 자리에 앉아 깊은 명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음 깊은 곳에 그 대답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노라마가 없는 이상 자신의 마음에 그 대답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밑바닥에서 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회한을 견딜 수 없었다.
* * *
무림맹은 그날 밤 별동대와 합류하지 않았다. 아니, 무림맹은 오색 연기를 발견한 이후 전진을 멈추어
버렸다. 육대문파 장문인이 ‘왜 움직이지 않느냐?’ 고 묻자 경재학은 ‘아직은 때가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보시오. 저 오색비연무는 단지 여기 있다고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하오. 위기를 알리는 신호가 아니란
말이오. 지금 우리가 그들의 위치를 알았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도. 근처에 혈마사가 있으니 괜히 저들에
게 다가가다가 혈마사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큰 낭패가 아니겠소.”
상유천에 경재학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쩌시겠다는 복안은 있으시오?”
경재학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이렇게 까지 노골적으로 맹주의 생각을 물어온 사람은 없었다.
‘역시 구대문파 장문인들은 천하제일가의 총복들과는 다르군.’
지금까지 고분고분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이렇게 돌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경재학이 잠시 뜸을 들이
다가 대답했다.
“별동대가 있는 곳을 알았으니 다른 방향을 집중적으로 수색할 생각이오. 연기를 보니 별동대와의 거리
는 매우 가깝소. 그들이 혈마사를 만났을 때 우리가 달려가도 늦지 않을 거리 아니오? 게다가 본래부터
별동대는 혈마사를 잠시 잡아둘 생각으로 전력의 안배를 마친 상태외다. 위치를 모르는 것은 이제 무림
맹 본진과 혈마사뿐이니 먼저 움직여 적에게 위치를 알릴 필요는 없다고 보오이다.”
육대문파 장문인들은 경재학의 말이 틀리지 않은지라 모두 자기 문파로 돌아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니. 마치 별동대가 전멸하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지 않은가?’
상유천이 중얼거리며 천막을 오락가락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로 생각하면서도 ‘역시 맹주는 구대문
파를 하나의 수단으로 여길 뿐이다.’ 라고 중얼거렸다. 맹주는 별동대에 속한 사람들 하나하나의 생명에
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는 그저 이기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처럼 승리가필요한 시기에 그 마음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 많은 생명을 대
상으로 전력의 안배 운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아니야.”
상유천의 확신에 찬 음성이 천막 안에 울려 퍼졌다.
‘날이 밝으면 당장 별동대와 합류하자고 주장하리라. 만약 다른 오대문파가 반대한다면 화산파만이라도
별동대와 합류하여 제자들과 생사를 함께하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무림맹과는 더 이상 같이 행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별동대
의 제자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상유천을 믿고 별동대로 파견 나간 사람들인 것이다. 상
유천은 다른 문파 사람들도 자기와 뜻을 같이하길 바랬다. 그렇게만 된다면 맹주와는 다소 어색해 지겠
지만 무림맹과의 공조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 * *
장염은 분지 아래로 펼쳐진 울울창창한 숲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해가 뉘엇뉘엇 지기 시작했는데도
무림맹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지척에 이르렀으니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으로 ‘만약 경재학이 나를 제거하기 위해 무리들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이라고 생각하자 아찔해졌다.
아무리 뻔한 결과가 보인다 해도 사람의 일이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낮의 노호만 해도
그렇다. 노호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게 달아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마 무당파 제자들
누구도 노호가 그렇게 되리란 걸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미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최선을 다할뿐, 그 이상은 하늘에 달렸다.’
장염은 혈마사의 라마승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지금은 그것이 자신의 최선이라고 믿었다. 비록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돌아올지라도 그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장염의 전이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 장염은 의지로 자신의 몸을 비우고자 노력했다.의지가 무얼 얼마
만큼 할 수 있을까? 장염은 계속해서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장염은 자신이 너무 의지
에 연연한 것은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다.
‘의지란 결국 나의 다름 아닌데, 내가 나에 집착하는 한 자연과 합할 수 있을까?’
문득 스승의 열여섯 자 법문이 물아일체의 경계에서 흐릿하게 사라져 가는 장염의 의식을 스쳐 지나갔
다.
‘연정화기 연기화신 연신환허 연허합도 무의무념 무사무심 성령독요 초화만신.’
자신은 오래전에 허를 단련해 도에 합한 지경까지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수련한 전이가 그랬고, 자신의
무공 철학인 원융지의가 그랬다. 모두가 정기신으리 무공일로를 떠나 자신이 새롭게 갈무리한 공력이었
다. 그 공력으로 경천일기공을 자유로이 움직여 왔고, 지금까지 숱한 난관을 극복해 왔다.
그러나 어의통검으로 무공의 극치에 이른 뒤부터 지금까지 도를 향한 삶이 중단되어 왔다. 상황이 다시
무공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의 무상한 한계를 얼마 전 라마승과의 접촉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천명에 순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노호의 일을 통해 절감했다. 장염
은 흐릿한 의식 속에 저도 모를게 중얼거렸다.
‘나는 도를 떠나서는 답을 얻을 수 없다.’
지금 법문은 무의무념이요, 무사무심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본래 타고난 신령스런 성품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장염은 어의통검으로 극에 이른 ‘의지를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 을 비우기 시작했다. 의지를 다스리는
것도 결국은 나를 다스리는 것이니, 계속해서 나에 집착해서는 더 넓은 곳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것
이다.
지금까지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그 밝게 빛나던 모습은 검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연 스승은 그광채 속에 얼마나 많은 비밀을 담아두고 가신 것일까?
장염은 게속해서 생각을 끊고 마음을 비워 나갔다. 어의통검이 다 무엇이더냐! 나는 무공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려고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장염은 스승 진원청처럼 생각
을 끊고 번잡한 속세를 잊을 뿐 아니라, 마음마저 완전히 비우고 싶었다. 그러면 인간의 삶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염의 의식이 한순간 공중에서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장염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완전히 잊고 말았다. 아니, 잊은 정도가 아니라 장염의 의식은 그자리에서 꺼지듯
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홀연히 의식이 사라진 장염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장염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 순간 멀리 떨어진 마하륵은 한 사람의 방문자를 맞이해야 했다.
명상에 잠겨 있던 마하륵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혈마륵이 다시 찾아온 줄 알았
다. 그러나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은 결코 혈마륵이 아니었다.
‘허……. 이 사람은 대체 언제 이렇게 가까이에 왔을까?’
마치 한줄기 바람인 듯 그에게서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옷차
림은 그가 한인임을 알게 했다. 마하륵은 어눌한 한어로 정중히 물었다.
“누구시오?”
마하륵은 자신의 마음으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대사를 다시 뵙게 되었군요. 나는 장염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마하륵은 얼마 전 찾아왔던 기운이 장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간 깨달음이 계셨던가 보구려.”
장염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누구든지 조금씩 변해가기 마련 아닙니까?’
마하륵은 자신이 장염을 감당하려고 했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 장염은 이미 인
간의 경지를 넘어서려하고 있는 자다. 그러나 자신은 아직 인간도 이해하지 못했다. 장염을 만나니 그제
야 자신이 갈 바가 분명히 보였다. 이 시간 마하륵에게 장염은 마치 노라마와 같은 존재였다.
“나느 이미 그대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우리는 내일 혈마사로 돌아갈 것이오. 혈라
마께서 우리를 돌아오라고 부르셨소.”
장염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되었다니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로군요. 나는 사람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마하륵이 ‘허허’ 하고 웃으며 말했다.
“빈승도 중원에 와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가오. 나역시 그대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소이다.”
사실 그랬다. 마하륵은 중원에 와서 건곤이기를 하나로 합치는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혈마사의 수행 방법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회의도 들었다. 이제 다시 서장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깨
달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보리라.
“내 오랬동안 그대를 만나보길 원했소.대체 그대의 그 공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게요?”
마하륵은 어쩌면 이 물음을 위해 오래도록 장염의 뒤를 따라다녔는지 모른다.
장염이 마하륵을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조화를 아는 것을 일컬어 항상됨이라고 하고, 항상됨을 아는 것을 일컬어 밝음이라 합니다.그리고 많이
살리면 복되다고 합니다. 제 공력은 여기 조화롭게 항상 살리는 것에서 나오는 거랍니다.’
마하륵은 장염의 말을 들으며 무릎을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과연 놀랍구려. 그러나 조화와 항상됨, 그리고 살리는 것 어느하나 쉬운 것이 없소. 그대가 그 어려운
길을 가고 있으니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이오.”
사실 혈마사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장염의 말을 들으니 지나온 일이 몹시 부끄러웠다.
생각할수록 ‘살리는 일처럼 복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싶다.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지만 이제라도 다시
돌아가면 될 일이다.
생각에 잠긴 마하륵을 향해 장염이 말했다.
‘언제고 대사를 다시 볼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주저 마시고 저를 찾아 부르시기 바랍니다.’
마하륵이 머리 속으로 장염의 말을 되뇌는데, 어디선가 불어온 한줄기 바람과 함께 장염의 종적이 묘연
해져 버렸다.
“어허! 내 아직 듣고 싶은 말이 많았건만, 인연이 다했으니 참으로 아쉽구나…..”
마하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에는 휘여청 달이 밝았는데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지만 장염을 만난 일이 어디 꿈이겠는가! 장염의 마지막
말은 어쩐지 자신의 미래와 관련이 있는 듯싶었다.
한동안 바람처럼 떠돌던 장염은 서서히 자신과 사물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생각이 다시 모이고
의식이 하나로 집중되자 깊은 명상에서 깨여날수 있었다.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의 경지를 더 나아간 것보다 기쁜 것은 마침내 피를 흘리지 않고 돌악ㄹ 수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마하륵이 날이 밝는 대로 서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으니 더 이상의 싸움은 없을 것이다. 게다
가 마하륵을 보니 그 깨달음이 깊어 다시 혈란을 일으킬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혈마사가 돌아간다니 이제 남은 것은 오행혈마인과 노호의 문제 뿐이다.
‘우선은 영화 소저를 다시 찾을 수 있겠구나.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도록 하자.’
지금 생각해 봤자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으니 머리만 아플 뿐이다. 장염은 모처럼 깊은 잠에 들기
로 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쯤은 자두어도 되겠다 싶었다. 눈을 감은 장염의 머리 위로 서늘한 가을바람
이 스치듯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하나가 되었던 바람이라 그런지 장염은 오히려 포근함을 느꼈
다.
다음날 날이 밝자 장염은 춘양 진인에게 혈마사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별동대가 환호성을 지르
자 분지는 금세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강호를 떨게 했던 혈마사가 돌아간다고 하니 더이상의 희생은
없을 것이다.
춘양 진인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저녁까지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여겼는데 자고 일어나니 생명
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많은 무림인들 중에 누가 죽어 나갈지 염려하던 차에 장염의 말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사숙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틀림없겠지요.”
추풍검 심방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만리검 양극을 바라보았다. 강호에 나온 이래 무수히 많은 제자들
의 죽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 죽음의 행렬이 멈춘 것이다.
“장문인, 이소식을 무림맹에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양극의 말에 춘양 진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조의내 협사를 본진을 보았다는 방향으로 떠나보냈습니다. 지금쯤 그들도 소식을
들었을 겝니다.”
심방이 즐거움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허허헛! 그럼 이제 모두가 자파로 돌아갈 일만 남은 겐가?”
“아마도 그럴 겝니다. 혈마사 때문에 무림첩이 발동되었는데, 그들이 스스로 돌아간다고 하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도문의 일뿐입니다.”
춘양 진인의 말에 심방과 양극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렇다.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다. 이제 도문
의 일이 남은 것이다. 귀문에 접한 노호가 등장했으니 앞으로 수많은 도사와 승려들이 죽어 갈 것이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심방이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장문인은 이 일을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신가?”
“도첩을 돌릴 생각입니다.”
양극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도첩을 돌린단 말인가?”
가장 최근에 발부된 도첩도 거의 오십 년쯤 전이다. 그때는 소림사의 고승이 귀문에 들었다. 처음 한동
안 소림사에서는 문파의 수치라 여겨 귀문에 든 승려를 비밀에 부쳤었다. 그러나 그가 소림사의 항마동
을 탈출해 백여 명의 도가의 법술사와 승려를 살해하자 소림사는 은밀히 도가와 승가에 도첩을 돌렸다.
그를 잡아 축귀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였다. 도첩이 돌고 난 후에야 그는 겨우 붙잡혔는데, 그때까지 다
시 오십여 명을 살해한 뒤였다.
귀문에 든 일반인은 법술사와 승려를 두려워했는데, 기이하게도 무림인으로 귀문에 든 자는 그 반대였
다. 그들은 마치 철천지 원수를 만난 듯 법술사와 승려만 보면 때려죽였던 것이다. 그래서 각 문파는 귀
문에 든자의 공력은 무조건 폐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무림인으로 귀문에 든 자라도 공력이 사사지면
법술사와 승려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특별한 해악을 끼치지 못했다.
심방과 양극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과거 소림사에서 도첩을 돌린 뒤 승려들은 한동아 기가 죽어 지냈었
다. 귀신을 쫓는 자들이 귀신에 씌었으니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런데 이제 무당파에서 도첩을 돌리게
생겼다. 이 일이 지나가면 한동아 도사들도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양극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정녕 도첩 외에는 방법이 없겠소?”
“저라고 어디 무당파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노호는 무당파의 고수며 무림의 후지기수
로 그 무공이 결코 낮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귀문에 들었다면 조만간 그 공력의 괴이함이 도를 넘을 터
인데… 무당파의 힘만으로는 그를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고한 법술사들과 승려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그를 잡아들여야 합니다.”
심방과 양극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춘양 진인과 장염, 그리고 심방과 양극이 노호의 일을 염려하고 있을 때였다. 분지 아래에서 바
람같이 달려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숨이 턱에 차 오르도록 뛰어온 사람은 개방의 조의내였다. 조의내가 춘양 진인에게 달려오자 근처의 무
림인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춘양 진인은 조으내가 다가오자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조 협사께서는 맹주에게 혈마사의 일을 알려드렸소이까?”
조의내가 춘양 진인과 장염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대답했다.
“맹주께 알려드리고 어찌햐야 하는가를 묻자 맹주는 무림맹의 본진과 더불어 도주하는 혈마사의 뒤를
쫓겠다고 하셨소.”
춘양 진인이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을 터뜨렸다.
“어허!”
돌아가겠다고 하는 혈마사를 굳이 쫓아가 공격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러는 와중에 무리맹의 고수들
은 또 얼마나 죽어갈 것인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어디 그뿐이랴! 혈마사가되돌아가다가 공격을
당한다면 언젠가 다시 복수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혈마사와 무림맹은 끝도 없는 싸움을 반
복하게 된다.
아미파의 파진 사태가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쩌자고 맹주는 멈출 줄을 모른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이긴다 한들 죽을 자는 어쩌라구…..”
아미파는 이미 많은 제자를 잃었기에 죽음에 대해 민감했다. 파진 사태는 이미 싸움이 끝났으니 이쯤에
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아무리 돌아가ㅡㄴ 혈마사라고 하지만 그들의 힘은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춘양 진인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하시던가요?”
“맹주께서는 별동대의 말은 일이 끝났으니 먼저 돌아가도 좋다고 하셨소이다.”
숨죽이고 듣고 있던 무리들의 얼굴에 다시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혈마사에 복수를 하겠다
는 각오였지만 생사의 고비를 넘기다 보니 모든 것이 덧없어졌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형제의 복수를 위
해 중원에 왔지 않은가! 무의마한 싸움에 지쳐 있던 무림인들은 맹주가 다시 뒤를 따르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도 좋단다. 무림첩이 발동되어 지금까지 생사를 맹주의 손에 맡
겼는데 살아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맹주의 말을 전한 조의내가 재빨리 몇 마디 덧붙였다.
“험험, 이미 혈마사가 돌아가는데 그를 뒤에서 친다는 것은 할짓이 못 되오.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했으
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조의내는 별동대가 혹시라도 협의가 어쩌구 하면서 무림맹을 따라가면 어쩌나 싶었다.
‘나도 당신들도 여기서 돌아가야 해!’
조의내는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처음에는 개방에서 협의가 어쩌구 하느 통에 자원해서 무림맹으로
들어갔다. 발이 빠르니 설마 생명이야 보존하지 못하랴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혈마사의 라
마승들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발만 빠른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력 또한 괴이하게 독랄하고 강했다. 조의
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명예가 무슨 밥 먹여준다구! 제발 돌아간다고 해줘, 제발!’
조의내의 간절한 바램이 헛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더 이상의 싸움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던 춘양
진인은 무리들을 향해 선포했다.
“우리는 혈마사를 상대로 우리가 할 도리를 다 했다고 보오. 물론 여러분들 중에 아직 자파가 본진에
있는 분들이야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지만, 주변을 돌아보시오. 모두가 지치고 사처 입어 누굴 상대로 싸
울 만한 상태가 아니외다.”
춘양 진인의 말은 옳았다. 비록 공동파의 추료와 광료는 복수를 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 했지만, 별동
대에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정히 본진을 따라가시겠다는 분이 계시면 말리지는 않겠소만, 우리는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합시
다.”
춘양 진인의 말이 떨어지자 무리들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들도 사실 조의내 만큼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 * *
상유천은 눈앞에 보이는 혈마사의 라마승들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별동
대와 합류하러 가겠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아침도 먹기 전에 달려온 조의내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변
했다.
“아침이면 혈마사가 서장으로 되돌아 간다고 합니다.”
조의내의 말을 들은 맹주는 곧 사방으로 척후대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쪽으로 이동하는 라마승들
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맹주는 육대문파 장문인을 모은 뒤 ‘우리가 여기서 저들의 기세를 꺾어놓지 않는다면 저들은 두고두고
중원을 우습게 볼 것이오’ 라고 말했다.
맹주의 말은 이미 멸문당한 점창파와 종남파, 그리고 청성파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는 것은 물론 그들
의 복수심마저 자극했다.
삼대무파 장문인들이 반드시 피의 응징을 해야 한다고 하자 경재학이 말했다.
“우리 본진은 지금까지 전력의 손실 없이 여기까지 잘 왔소이다. 그러나 별동대는 이미 혈마사를 만나
피해가 막심하니 어찌 그들까지 동참하라 하겠소. 혈마사는 단지 돌아가는 일에 열심이니 우리만으로도
그들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 보오.”
무림맹의 본진이 칠백오십여 명이니 사실 그 정도 숫자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미타불, 기왕에 그들이 돌아간다고 하는데 우리가 나서서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이…..”
원정 선사는 사실 어쩐지 이십여 년 전의 일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때도 돌아가는 교하국의 고수들
을 몰살시킨 기억이 있다. 혈마사에 대한 후회는 없었지만, 돌아가는 교하국 고수들을 몰살 시킨 것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점창파의 영천상인이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렇다고 어찌 그들을 그냥 고이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그들이 앗아간 생명이 너무도 많습니
다. 이번 기회에 우리 중원에도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뒤로 소림사의 원정 선사는 ‘아미타불’ 이라고 중얼거릴 뿐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소림사는
이번 혈마사의 일로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다른 파의 감정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한편으
로 혈마사와 같은 사교의 무리들을 처리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반드시 그들에게 피의 응징을 해야 한다는 삼대문파 장문인들의 말에 상유천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별동대로 가겠다면 싸움을 회피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별
동대에 더 이상의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위험이 없는 것은 별동대뿐이 아니다. 지금 무림맹은 중원의 힘이 거의 모두 모인 것이니 혈마사
에 비해 결코 약하다고 볼수 없다. 그런 거대한 힘으로 혈마사를 기습하는 것이다. 돌아가는 일에 분주
한 혈마사는 아마도 허둥지둥대다가 몰살당할지도 몰랐다.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야.’
상유천은 멀리서 침울하게 걷고 있는 혈마사의 라마승을 보며 중얼거렸다.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
았지만 벌써부터 도살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혈마사에게서 전의를 느끼지 못했기 때
문이다. 지금 무림맹은 싸울 의사도 없고 싸울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숨을 죽이
고 있는 것이다.
‘하기사… 그대들도 일방적으로 중원인을 무참히 죽이지 않았던가.’
상유천은 산다는 건 이처럼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혈승이 다가올수록 상유천은 자신을 합리롸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일단의 혈마사의 라마승이 매복하고 있는 상유천과 무림맹의 앞으로 지나갈 때였다.멀리서 ‘펑’ 하는 소
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허공에 하얀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 연기를 신호로 혈승들에게 강철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본진에 속한 궁수들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슈슈슉!
간혹 가다가 화살들 사이로 보이는 검은빛의 구름은 우모침이었다. 활을 다루지 못하는 무림 고수들이
멀리서 암기류를 던지고 있었다.
“크아악!’
“으윽!”
화살과 암기가 비처럼 쏟아지자 질서 정연하게 걸어가던 혈승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순간
에 혈승 이십여 명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혈승들은 화살과 암기를 피하기 위해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러
나 숲으로 뛰어든 혈승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매복하고 있던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기습의 효과로 무
림맹이 덕을 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얼마 후 천주산의 협곡에서는 혈승들과 무림맹의 고수들이 어
우러진 처절한 혈투가 시작되었다.
사시말에 시작된 싸움은 해가 질 무렵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 길고 지루한 싸움은 양측에 적지 않은 피
해를 입혔다.
혈마사의 라마승은 겨우 십여 명만 살아남아 서쪽으로 달아났고, 무림맹의 칠백오십여 고수도 삼백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혈마사가 거의 괴멸 상태까지 갔다면 무림맹의 본진은 거의 절반 이상 생명을 잃은
것이다.
천주산을 지나던 이백삼십여 명의 혈마사 혈승 중에 살아서 서장으로 돌아간 사람은 마하륵과 혈마륵,
그리고 아미타삼혈존 중 수호존과 혈승 칠인뿐이었다.
그에 비해 무림맹은 사백여 명이 사망했는데 그중에는 종남파 장문인 현천검객과 청성파 장문인 파운
신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파가 멸문한 데 이어 장문인마저 죽임을 당한 종남파와 청성파의 맥은 그날
이루로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통있는 소림사, 화산파, 곤륜파, 점창파의 문하생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각처에서 자
원한 승도속의 무림인들은 그보다 더 심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천주산 전투’에 참
가하고도 생존한 사람들은 일약 유명인사가 되기까지 했다.
이래저래 천주산 혈전은 무림사에 보기 드문 무림맹의 희생을 가져왔다. 그것은 이십 년 전 보정산 전
투 때보다 두 배 이상 되는 피해였는데, 사람들은 제갈가가 사라진 탓이라고 말했다. 이십 년 전 사천성
의 보정산에서는 병법에 따라 치밀하게 싸움을 별였으나, 천주산에서는 무림맹이 인원수만 믿고 너무 안
이하게 대처했다고 입을 모았다.
천주산의 대혈전 이후 무림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이 경재학과 원정 선사, 상유천, 신룡
진인, 영천상인을 일컬러 천하오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 천하십대고수라고 불리던 현천
검객과 파운신권이 허망하게 사망했으니 이전과 다른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역사는 늘 새로운 이름들을 만들어낸다. 과거에 천하십대고수가 무림의 하늘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
더 이상 십대고수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두 사람은 죽었고 비월장주 금거산은 무림의 일에 뛰어들지 않
았으니 사람들의 기억에 자리할 틈이 없는 것이다.
한편 금거산과 달리 무림첩에 응했던 영호성과 춘양 진인은 별동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세인들의 관
심을 끌지 못했다. 전 무림의 세력이 집중되었던 천주산 일전에 그들이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림인은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 장천사라는 이름이 은밀히 떠돌기 시작했다. 무림맹과 혈승들과
의 싸움이 과장되어 강호와 민간에 퍼져 나간 것이다. 사람들은 장천사가 풍운조화를 일으키며,’용을 타
고 다니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다니다’ 고 말했다.
* * *
호북성의 무한에 자리한 허름한 객잔에 세명의 도사들이 찾아들었다. 허름한 도복을 걸친 세 도사는 방
으로 들어간 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천주산의 전투에 참가했던 청성파의 용화도사와 그의 사
제들이었다.
방 안에서 침통한 표정의 도사 두 사람이 용화 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못 참겠다는 듯이
용원 도사가 입을 열었다.
‘사형, 장문인께서 사형에게 검보를 다시 주시며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용화 도사가 고개를 들어 사제인 용원을 바라보았다. 청성파에 있던 네 명의 사제들을 이끌고 무림맹의
장문인을 찾아갔으나, 얼마 전 천주산의 전투 때 장문인과 사제 세 명이 죽었다. 문파가 완전히 멸문당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이제 와서 태을무형검보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용화 도사는 문득 천주산에서의 끔찍한 전투를 떠올렸다. 그날 자기으 ㅣ두 손으로 피투성이가된 현천
검객의 몸을 쓸어안고 있었다.
“사제…. 나는 오래전….. 꿈속에서나마…. 스승님의 마지막 …. 말씀을 들었다….”
“장문인…..”
용화 도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현천검객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무슨 미련이 그리 많은지 사형은 죽
어가면서도 한마디 말을 남기려고 애쓰고 있었다. 현천검객과 용화 도사는 모두 구룡 진인의 제자들로,
따지고 보면 사형제 간이다. 구룡 진인이 처음으로 거둔 사람이 현천검객이라면 마지막으로 가르친 사람
들이 용화 도사를 비롯한 다섯 명의 도사들이었다.
“진인께서는 …. 그 밤에 ….. 내 머리맡에 찾아와….. 잊으라고 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현천검객은 움직이지 않았다. 용화 도사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현천검
객의 시신을 안고 밤새 울었다. 무림맹을 찾아 나설 때는 문파의 재건이라는 꿈을 안고 있었는데, 단 하
루 만에 장문인과 사형제들을 잃고 만 것이다.
용화 도사가 푸석푸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글쎄 …. 나도 무엇을 잊으라고 하신 건지 알 수가 없다. 청성파를 잊으라는 건지, 검보를 잊으라는 건
지, 아니면 그 모두를 잊으라는 건지….”
침묵하고 있던 용지 도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형, 우리 청성파는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도량이 파괴되고, 장문인이 죽었으며, 제자들도 대부분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제자들은 몇 안 되는데
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장문인이 용화 도사에게 검보를 넘겼으니, 청성파의 미래는 용화 도사에게 달
려 있는 셈이다.
“이미 속세를 떠난 우리들인데 어디에선들 도를 닦지 못하겠는가.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이 없으니 어찌
문파의 이름에 연연할꼬.”
청성파가 멸문당한 뒤 어느 정도 명리에 초월해 있던 용화 도사는 천주산의 일로 속세에 미련을 버린
뒤였다. 용화 도사의 맥빠진 소리를 듣던 용원 도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사형,이제 문파의 앞날이 사형 한 사람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찌 그처럼 무책
임한 말씀을 하시오?”
“사제, 나는 세상일에 덧없음을 알아버렸으니 어찌하겠나. 더이상 나에게 문파의 일을 강요하지 말아주
시게.”
용원 도사가 어이없다는 듯 용화 도사를 바라보았다. 사형은 지금 청성파의 장문인 되기를 포기한 것이
나 다름이 없다. 사형이 ‘너무 막중한 책임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라고 생각한 용원 도사가 음성을 낮워
다시 말했다.
“사형께서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러신 듯한데,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편해지실 게여. 그리고 사형 한 사
람에게 문파의 일을 떠넘기지 않을 테니 기운내시구려.”
용화 도사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대답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네. 이 태을무형검보를 사제들에게 내어줄 테니 그것으로 나의 결심을 알아주
시게.”
말을 마친 용화 도사가 품에서 태을무형검보를 꺼내어 두 사제의 앞으로 내밀었다. 용원 도사와 용지
도사는 매우 심난한 표정으로 용화 도사를 바라보았다. 용화 도사가 저처럼 그 태도가 분명하니 더 이상
청성파의 일에 사형을 끌어들이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용원 도사가 사제인 용지 도사를 힐끔 바라본 뒤 태을무형검보로 손을 뻗쳤다. 다섯 중의 막내인 용지
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큰 사형이 아니면 둘째 사형인 용원 도사가 청성파를 이끌어주어야 했
다.
“사제, 못난 나는 고맙다고밖에 할말이 없구먼. 멀리서나마 청성파의 재건을 위해 기도하겠네.”
“어차피 사형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청성파의 이름을 잊지 말아주십이오.”
그 말은 언제고 청성파의 요청이 있으면 한 손 거들어달라는 말과 같았다. 용화 도사가 ‘내가 어찌 스
승님의 가르침을 잊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용원 도사는 그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용화 도사
는 살아남아 청성파의 제일고수가 되었다. 그런 그가 청성파를 떠나면서도 사문을 돌보겠다고 약속한 것
이다.
다음날 날이 밝자 용원 도사와 용지 도사는 무림맹으로 떠났다.
혹시라도 살아남은 청성파의 제자들이 무림맹에 있다면 합류할 생각이었다. 사제들과 헤어진 용화 도사
는 그 길로 복우산으로 들어가 평생 동안 속세를 출입하지 않았다.
제 7장 뜻을 따라 몸이 행한다
마교의 전력이 낙약에 도착한 것은 무림맹이 천주산에서 마지막 일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난 직후였다.
물론 그 승리는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았지만, 무림맹의 승전 소식은 마교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장소는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귀환하는 무림맹의 전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교의 정찰대가 무림맹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온 그날, 마교의 수뇌들이 모인 마천
각에서 임시 회의가 열렸다.
“교주님, 무림맹은 현재 전력의 육할을 잃은 상태입니다.”
검귀가 정찰대의 보고를 토대로 무림맹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다. 검귀의 말은 대체로 정확한 것이었다.
“살아남아 귀환하고 있는 무림맹은 전체의 사 할에 불과하며, 구대문파 장문인중에 두사람이 사망했습
니다. 이대로라면 본 교에 승산이 있습니다.”
검귀의 말을 듣고 있떤 풍소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호사령께서는 정말로 구대문파의 남은 인원이 사 할 뿐이라고 확신하시는 게요?”
“무슨 뜻이오?”
풍소곡이 의아해 하는 검귀를 향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랫동안 정파인들의 생활을 지켜보아 그들의 위선적인 행태를 적잖게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 중
의 하나요.”
“여전히 풍 장로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겠소만…..”
한쪽에 있던 요마 화옥령이 들고 있던 몇 권의 책을 장소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풍소곡이 앞으로 나섰다.
“무림첩이 돌 때부터 나는 무림맹을 주시한 바가 있소. 이것은 비마문의 첩보조가 거금을 들여 입수한
무림맹의 방명록이오. 이 책에는 무림첩이 발송된 이후부터 그들이 무림맹을 떠나기 전날까지의 방문자
가 기록되어 있소.”
비마문은 마교칠문 중 하나로 대내외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었다. 무리들이 ‘오오!’ 하고 감탄사를 터뜨리
자 풍소곡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
“이 책을 분석하던 비마문에서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구대문파의 속가 제자들이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외다.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팡에서 그들의 속가제자를 제외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검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풍소곡의 지적이 맞다면 무림맹에 모인 고수들은 구대문파의 전력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림맹의 나머지 떨거지들은 모두 어디에 있다는 것이냐?”
장소가 음산하게 묻자 풍소곡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교주님, 아직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혈마사를 위해 남겨놓은 것
이 아니란 것밖에는…….”
장소가 짜증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에잇! 쓸모없는 것들! 그러니 너희가 지금 무림맹의 전력을 안다는 것이냐, 모른다는 것이냐?”
집단전에 있어 상대방의 전력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그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장소가 분통을 터뜨리자 마인들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검귀는 풍소곡의 지적이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웠다.
‘그런 정보가 있으면 진작에 서로 공유했어야지.’
저 삼마의 행동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부터가 허위인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당황한 검귀가 잠시 말을 잊고 있을 때였다.
마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검귀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는 마교 감찰단의 일원으로 그 성정이
포악하여 잔혈마인이라 불리는 자였다. 가만히 잔혈마인의 말을 듣고 있던 검귀의 눈이 차츰차츰 부릅떠
지기 시작했다.
“어찌 감히……”
마침내 부들부들 떨던 검귀가 장소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교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문득 장소가 돌아보니 검귀의 얼굴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이 마교에
들어온 이래 저처럼 흥분한 검귀를 보기도 처음이다. 장소는 ‘무슨 재미있는 일이 터진 모양이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의 허락이 떨어지자 검귀가 이르 뿌드득 갈며 말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몇 놈들이 … 감히 교주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 순간 장소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며 눈에서 광채가 번득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피를 가까이 하지
않아 무료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제 정당하게 살육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기쁠겠는가!
“푸흐흐! 그래, 그 하룻강아지들이 누구냐?”
잔혈마인이 장내를 살핀 뒤 장소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장소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잔혈마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감찰당의 평생 소원이 교주 앞에서 역모를 파헤치는 것인데, 그 영광된
기회가 드디어 자신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비록 이안에 반역자들도 있지만, 감히 교주의 앞에서 무슨수
작을 부리랴! 잔혈마인의 허리가 깊이 숙여졌다.
“교주님, 그주제를 모르는 것들은…..”
잔혈마인의 뒷말은 차마 이어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풍소곡이 그이 머리를 잡아챘기 때문이다.
풍소곡이 재빨리 잔혈마인의 혈도를 봉쇄하고 말했다.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구나!”
검귀는 반신반의하던 참에 풍소곡이 나서자 ‘옳거니 네놈이 제 발로 걸어나와 죄를 자백하는 구나’ 하
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직접 밝히는 편이 가장 정확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자리는 마교
본산의 고수들이 운집하고 있는 곳이며, 최강 고수 장소 교주가 함께하고 있는 자리다.
다음 순간 검귀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풍소곡이 크게 소리치며 잔혈마인의 머리를 주먹
으로 내려친 것이다.
“본 교의 안위를 생각하여 우리 삼존이 나서기로 한 것을 이제야 알았단 말이냐!”
퍽!
잔혈마인의 머리는 그야말로 잘 익은 수박처럼 터져 나가 사방으로 뇌수와 피를 뿌렸다.
마인들은 본래 피와 가까운 족속들이라 눈앞에서 한두 사람쯤 죽어가는 것을 서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
았다. 게다가 잔혈마인의 죽음으로 큰 역모가 저처럼 확연히 알려지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이제 남은 것은 본산의 고수들과 교주의 초절한 무공으로 반역자들을 주살하는 것뿐이다.
처음에는 장소뿐 아니라 검귀와 순찰영주, 그리고 혈수서생 이면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곧 들어났다.
“저놈들을 잡아라!”
검귀가 소리를 쳤지만 장내에서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인 마인은 단지 십마왕 중 네 사람뿐이었다. 십마
왕 중 여섯은 어느 틈에 장소를 향해 자신의 독문병기를 꼬나 쥐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곧 이어 음산파 출신의 단천혈마, 귀령신마, 음산비마가 삼마의 곁으로 갔고, 독비도객
과 화옥령, 그리고 마안요희도 삼로의 뒤로 늘어섰다.
풍소곡이 잔혈마인의 몸통을 장소에게 던지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미 밖은 사문과 삼당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었으니 그대들만 남은 셈이다.”
마천각에 참석한 마교의 원로 중 이제 장소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검귀와 순찰영주, 이면수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검귀를 비롯한 순찰영주와 이면수의 표정에 절망의 기색은 없었다. 검귀가 계산
을 해보니 마교칠문중 사문이 돌아섰다면 아직 삼문이 교주의 편이고, 내외육당중 삼당이 돌아섰어도 남
은 삼당이 있다.
게다가 멀리 있지만 행동대인 천마대도 교주의 편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저들은 마교의 세력중 절반이
조금 넘는 세력만 손에 넣은 셈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수뇌부들을 몰살시킨다면 바교는 본래대로 돌
아갈 것이다.
‘이제 무림맹을 칠 수는 없겠지만 당분간 마교의 분열은 없겠군.’
그동안 내부의 요동이 심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교주의 무공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으
니 이 기회에 마교를 평정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검귀가 검을 빼 들고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려는 순간이
었다.
덜컹!
마천각의 문과 창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엄청난 양의 붉
은 피가 쏟아져 들어왔다.
쏴아!
비릿한 혈 향이 실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닥과 벽이 피로 붉게 물든 마천각은 대낮인
데로 음산했다.
“이런 미친놈들!”
검귀가 욕설을 퍼부으며 쾌속한 신법으로 날아오를 때였다. 뒤쪽에서 상상하지도 못한 마기가 흘러나왔
다.
“크카카카카! 이 피, 너무 좋군. 너무 좋아…….”
흠칫 놀란 검귀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당연히 서 있어야 할 교주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교주의 자
리에 서 있는 것은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자기 몸에 뭍은 피를 핥고 있는 한 마리 마물이었다.
‘아차! 늦었다.!’
검귀의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땅을 치고 통탄할 일이었다. 이 급박한 순
간에 교주의 정신분열이 다시 시작되었다. 처참하게 분해된 잔혈마인의 골수와 피가장소의 마성을 자극
하고 만 것이다. 아디 그뿐이랴! 저 지독한 풍소곡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장내를 피바다로 만들
어 교주가 마성에 사로잡히도록 유도했다.
‘교활한 놈, 과연 저놈이 교주 앞에서 잔혈마인을 쳐 죽인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일단 마성에 사로잡힌 교주는 피아의 구별이 없어졌다. 검귀는 일찍 경험하여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교의 고수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고랍산맥에서 겨우 살아 돌
아온 네 마인들의 목격담이 아니더라도, 광기에 사로잡히면 수하들을 죽여 흡혈하는 교주를 모른는 사람
은 없었다. 저 풍소곡은 바로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마성에 사로잡힌 교주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풍소곡은 교주를 죽이지 않고 몰아내가로 작정한 것이
틀림없다.
검귀는 풍소곡의 귀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장소가 교주 자리에서 물러나면 마교는 저들의
손에 장악될 것이다. 훗날 장소 교주가 다시 그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
운 일일지 모른다. 머리가 비상한 풀소곡이 그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멈추어 선 검귀가 몸을 뒤로 훌쩍 날렸다. 마음이야 어떻든 지금 교주 가까이에 붙었다가ㅡㄴ 오히려
피의 제물이 되기 십상이다.
“모두 물러나서 교주님의 뒤를 따르시오!”
순찰영주와 이면수는 검귀의 말을 알아듣고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자 장내는 삼마와 그를 따르는 마인
들만 남게 되었다.
풍소곡이 광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푸하하핫! 마물이 된 장소는 상대하지 말고 저자들만 죽이시오!”
그때부터 장소를 중심으로 검귀 일행과 삼마를 따르는 세력들의 쫓고 쫓기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피에 굶주린 장소는 좌충우돌하며 걸리적거리는 마인들을 죽여나갔따. 마천각의 주위는 반란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마물로 변한 장소를 무조건 피해 다녔다. 마천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마인들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으므로 불쑥 나타난 장소에게 수없이 살해당했던 것
이다.
피의 태풍은 근 한 시진이나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그리고 혈풍이 지나간 뒤 마교는 천산파와 음산파로
다시 갈라졌다. 천산파는 원로들의 만장일치로 삼존이 다스리는 체제를 선택했다. 한 사람의 교주가 나
오지 못한 것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장소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싸움이 일단락되자 삼존은 마교의 천산파를 이끌고 다시 천산으로 돌아갔고, 천산파에서 분리된 음산파
는 삼로를 따라 음산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이 년이 넘도록 계속되던 사파와 마교의 혈전도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 * *
낙양의 외곽에 관우의 사당인 관림당이 있다. 명장 관우가 번성에서 오나라 장군 여몽에게 패하여 살해
된 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사당을 만든 것이다. 관림당의 뒤와 맞닿은 숲에 네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마교 교주 장소와 검귀, 그리고 순찰영주와 이면수였다. 그들의 몰골은 이루 말할 수없이 처참했다. 온
몸에 피칠을 한 장소는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고, 그의 곁으로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검귀와
왼쪽 팔이 사라진 순찰영주, 그리고 오른쪽 다리가 사라진 이면수가 등을 나무에 기댄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검귀가 대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천산파와 음산파의 합공 속에서 죽지 않고 몸을 뺐으니 대단하외다.”
순찰영주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마교 역사상이처럼 대단한 역모도 없었고, 살아서 달아난 일도 없었겠지요.”
“그대들은 어쩌자고 교주님을 따라나선 게요? 저들의 유혹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말이요.”
순찰영주가 허탈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마음이 죽었으니 무엇으로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주님을 따라나선 것은 복수
를 하기 위함입니다.”
이면수는 순찰영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니 순찰영주는 집마령주에게 복수를 꿈꾸는 것일까?
하기사 장소 교주를 혈마인으로 만들라고 했으니, 교주를 따라다니다 보면 집마령주도 만날수 있을 것이
다.
‘대단한 고집을 가진 사람이었군.’
이면수는 순찰영주의 집념에 고개글 내저었다.
“혈수서생도 교주님의 곁에서 해야 할 복수가 남았소?”
이면수는 검귀의 질문에 ‘저도 마나고 싶은 사람이 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잠시 세 사람이 어색한 침
묵에 잠겨 있을 때 장소 교주가 정신을 차렸다.
“푸흐흐, 결국 이렇게 되었군.”
장소 교주의 음성이 들리자 검귀와 순찰영주와 이면수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어쨌든 교주를 보필하
지 못한 죄가 큰 것이다. 한참만에 검귀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교주님, 저희들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역도들을
참살하겠습니다.”
“화무십일홍 이라더니나의 영화가 짧았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이 원한을 백배 천 배로 갚고 말 것이
다.”
마교 교주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서 인륜과 천륜도 져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풍소곡이 그렇게
얻은 자기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린 것이다. 분노한 장소가 부들부들 떨자 검귀가 땅에 머리를
쿵! 처박으며 소리쳤다.
“교주님, 저희가 반드시!”
“흥! 됐다.어차피 따분하던 참이다.”
차갑게 대답한 장소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오행혈마공을 완성하여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행각했는데 어이없게도 심마를 이기지 못해 마교에서 쫓겨난 셈이 되고 말았다.
‘대체 이 심마를 제압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순간 심마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내력이 고갈될 때까지 아무나 다 죽여 버리니 이래서야 수하들 앞에
어찌 설까?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방법이 없자 장소는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 심마를 없애지 못하면 나는 영영 마교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장소의 한숨을 듣던 이면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주님, 교주님의 내공이 불완전하여 심마가 극성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르옵니다.”
“본제의 내공이 불완전하다니?”
“오행혈마기는 본시 다섯이 상생하며 상극하는 이치가 아니옵니까? 혹시라도 오행혈마기가 다 모이면
완성된 내공으로 심마를 소멸하실 수도…..”
장소가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럴듯도 하다. 지금 심마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광마신단의 공력과 오행혈마
기의 공능이 엇비슷하여 충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고강한 내공으로, 즉 꼭 오행혈마기
다섯이 아니라 하나만이라도 더 모아 들인다면 혹시 이 심마를 소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희망이 생긴 장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말을 듣고 보니 드럴듯하다. 본제의 심마가 소멸되면 어느 누가 수작을 부리겠느냐! 오냐! 이제부터
오행혈마기의 공력을 연마한 자를 찾아보아야겠다.!”
말을 마친 장소는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더니 한족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검귀와 순찰영주, 그리
고 이면수도 멀어져 가는 장소의 뒤를 따라 낙양성의 서쪽으로 사라져 갔다.
* * *
한편 무림맹 본진과 갈라져 하남성으로 돌아가던 별동대의 앞길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별동대가 조금
이라도 시야가 트인 곳으로 나오면, 잠시의 쉴 틈도 허락하지 않고 몽고의 기마대가 기습을 해왔다. 그
바람에 기마대에 의해 별동대가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천주산에서 무림맹으로 선회한
첫날 별동대는 기동하기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혈마사의 일도 끝난 뒤라 아무도 주변을 경계하
지 않았기에 그 피해는 더욱 컸다.
별동대의 생존자는 무당파가 장염과 춘양 진인, 그리고 심방과 양극을 제외하고 열다섯 명, 아미파는
파진 사태와 파경 사태 외에 열두 명, 풍림장은 영호성 외에 열 명, 무림맹의 기습조는 사대천왕을 필두
로 십삼 명, 청룡당은 이무심과 사공철 외에 열 명이 살았다. 모두가 출발한 이원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
를 냈지만 공동파 만큼은 한 사람도 사망한 자가 없었다.
그것은 추료와 광료가 한시도 제자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은연중에 공동파를 선
두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동파는 이미 멸문한 데다가 그 구성원의 나이가 어리거나 무림 초출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그래서 다른 고수들은 그들에게 큰 전투력을 기대하지 않았고, 따라서 위험한
임무를 맡기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부상이 심한 사람을 따로 남겨두고 다시 출발한 별동대는 칠십여 명에 불과했다. 이 칠십여
명이 기마대 삼백여 명을 상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숙, 저들의 숫자가 대충 삼백이라고 해도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춘양 진인의 말을 듣던 장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오백여명이었던 기마대는 별동대와의 서너 차
례접전 끝에 삼백여 명으로 줄었다. 그동안 장염이 이백여 명을 점혈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삼백여 명은 칠십 인에게 많은 숫자였다.
“장문인께서 반대하지 않으시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숙의 고언을 들려주십이오.”
장염이 잠시 춘양 진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기마대는 자신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까지 집요하게 별동대의 뒤를 따라붙을 리 없다. 지금은 비록 삼백여명으로 그 수
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군사를 움직이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면 기마대는 금세 보강될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이들과 자신이 잠시 헤어지는 것이지만, 과연 저 기마대의 목표가 자신 하나뿐인지도 확
실치 않았다.
“저들의 움직임을 보건대…. 왠지 우리가 하남성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남으로 가는 길목에서 벌써 몇 차례나 기마대와 맞닥뜨렸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것이
다.
“그렇다면 저들은 앞으로도 계속 하남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를 노릴 것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숫자
가 첨가될지는 하늘만이 아시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들이 우릴르 곱게 놔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장염이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별동대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넓고 길도 많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하남으로 바로 갈 것으로 알고 있으니, 오히려 길
을 거꾸로 나아가면 저들의 추격을 떠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북상하지 말고 남하 하자는 말씀이로군요.”
장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멀고 고되겠지만, 적어도 기마대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춘양 진인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야 하루라도 빨리 무림맹으로 돌아가 다른
문파의 제자들을 무사히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괜히 촉박하게 서두르다가 인명을 잃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어차피 혈마사의 일이 끝났으니 이제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기마대를 피해야겠다.’
마음을 정한 춘양 진인이 혼쾌히 대답했다.
“사숙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미 모든 일이 끝났으니 서너 달 늦어진들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건 저들의
생명을 보전시키는 것이겠지요.”
말을 마친 춘양 진인은 칠십 인을 멈춰 세운 뒤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고 말했다. 별동대의
무림인들도 내심 전방에 은신해 있을 기마대가 두려웠으므로 춘양 진인의 지시를 따랐다.
사람들이 되돌아가기 시작해도 장염은 멈추어 선 채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사숙, 어째서 함께 가시지 않으십니까?”
춘양 진인이 의하하다는 듯이 장염을 바라보았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홀로 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지.’
사숙이 무림맹에 감금된 영호화 소저를 하루라도 빨리 구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
고 설마 여기서 무리들과 작별이야 하실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춘양 진인에게 장염이 웃으
며 말했다.
“제가 어찌 홀로 무림맹으로 달려가겠습니까? 잠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장염이 손바닥을 지면으로 하고 우수를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장염과 춘양 진인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팔방으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니, 춘양 진인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 풀은 부드럽게
누웠고, 모리 높이의 나뭇가지들은 이리저리 휘어지고 얽혀, 마치 많은 사람들이 황급히 헤치고 지나간
듯했다.
“아……….”
팔방으로 뚫린 삼십 장 길이의 흔적들을 보며 춘양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장 사숙은 혹
시라도 기다리던 기마대가 뒤를 따라올까 싶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삽시간에 팔방으로 열
린 숲길은 가다가 다시 작은 샛길들과 자연적으로 얽혀 있었으니 누가 어디로 간줄 알 것인가!
“이제 됐습니다. 가시죠.”
장염을 따르던 춘양 진인이 힐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 길은 사흘이 지나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허…. 사흘까지나……’
보래 인위적으로 휘어놓은 것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장 사숙이 나무를 부러뜨리지 ㅏㄶ았고 풀도
누르지 않았으니 얼마나 오래갈까 싶었는데, 자그마치 사흘이나 저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건
대체 무슨 공력일까?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장 사숙이 보여주는 무공은 자신이 알고있는 무당파 진무
경의 공력이 아니었다.
“그런데 장 사숙, 언제 법술까지 배우셨습니까?”
장염이 무슨 소린가 싶어 춘양 진인을 마주 보았다.
“저는 아직 법술을 배운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물어보시는지요?”
“허…. 사숙께서 지적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노호가 귀문에 접한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사숙께서 그
에게 태평경을 외워주셨다고 들었을 때, 저는 노호의 면면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느긋하게 걸어가던 장염이 가볍게 옷깃을 털며 말했다.
“저는 때때로 사람들이 선문으로 가는 것과 귀문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만, 그것을 보기 위해 따로 공부
한 적은 없습니다.”
“사숙, 그러나 그것이 절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선문과 귀문이 저절로 보여지는 것이라면 어느 볍술사가 그것을 위해 평생 동안 공부하겠는가! 춘양 진
인은 장염이 뭔가 다른 공부가 있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무공은 차치하고 도력이라면 지신이 조금 앞서
리라 여겼건만 장염의 법술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물아일체의 지경에 들기 위해서는 천지만물의 기운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 오래
도록 그 지경을 넘나들다 보니 절로 터득되었나 봅니다.”
“과연! 사숙의 말씀을 들으니 많은 깨달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숙처럼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루기 위
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장염이 문득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구름을 보니 과거 아미파에서 수련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춘양 진인은 사숙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장 사숙은 허튼소리로 심기를 어
지럽힐 사람이 아니었다. 춘양 진인은 문득 먼 과거 진무궁에서 진원청 사조를 만나던 일을 생각했다.
사조께서 제자를 거두셨다고 하셨을 때, 속으로 사조에게 배우지 못한 것을 그분에게 배워야겠다고 작정
했었다.
‘허허허, 세상에 우연은 없는 것일까?’
자신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오늘 장염 사숙에게 많은 가르침을 얻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노호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장 사숙을 찾았을 것이다. 인연이란 무엇인지, 노호는 파문당하고 자신은 장사숙의 공력
에 대해 듣고 있다.
“아미산에 있는 도관의 옛 터에서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장염은 복호사가 있던 자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열여섯 자의 비문을 떠올렸다. 그것은 진원청 사부에게
전해 받은 법문 열여섯 자와 같았다. 비록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날 하늘을 날아다니고 호
풍화우하는 상상을 했다.
그날을 떠올리자 가슴이 뭉클하며 저려왔다. 인간의 흥망성쇠가 과연 무엇이기에, 그때는 모근것을 잃
고 의지할 곳 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의신행의 경지에 올라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장염이 과거로부터 돌아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전수해 주신 열여섯 자의 법문 속에서 저는 길을 보았습니다. 연허합도의 경지에 이르면
물아일체를 이루 수 있습니다. 정이 바른길을 찾으면 기가 생기고, 기가 바른길을 찾으면 신이 형성되며,
신이 바른길을 찾으면 허에 이르게 됩니다. 허는 도와 합해지는데 그때 비로소 자연과 내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춘양 진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장 사숙이 말하는 열여섯 자의 법문은 아마도 ‘연정화기 연기화
신 연신환허 연허합도 무의무념 무사무심 성령독요 초화만신’ 을 말하는 것이리라.
자신은 그 법문을 이해할 수 없었던 도가의 의식처럼, 기원조차 알 수 없는 불가해한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앞에 그것을 연공하고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연공 구결이 아닌데….. 어찌 그걸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장 사숙이 보여주고 있는 경지는 그 법문이 아니면 설명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춘양 진인 이기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았다.
“장 사숙, 저는 …… 저는 그것이 연공법문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춘양 진인은 여전히 그것이 연공할 수 없는 법문임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것을
연공할 수 있었다면 천하에 신선 아닌 도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사는 인간이고
결코 신선이 될 수 없다.
“장문인께서도 오늘부터 연공하시면 좋은 결과를 보실 것입니다.”
사심없는 장염의 말에 춘양 진인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장염 사숙은 자신이 익힌 것은 남도 익힐 수 있
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저 순진함이야말로 신선이 되는 첩경인지도………’
생각해 보니 자신은 법술에 능하고 도력이 깊었지만 순진한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했다. 강호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이 순진하다면 도리어 그것이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문파의 지존이라는 자리는
순수함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자리였다.
이러저런 생각으로 번민하는 춘양 진인에게 심방과 양극이 다가왔다. 어느 틈에 다시 별동대 속으로 되
돌아온 것이다.
“장문인의 얼굴이 훤해지신 걸 보니 좋은 말씀이라도 나누신게요?”
춘양 진인은 심방의 물음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이곳이야말로 무릉도원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춘양 진인이 사형들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 후 선두로 걸어나갔다. 다시 무리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심방이 약간은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저는 장문인이 그리도 세상을 좋게 보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실 춘양 진인은 장염을 빗대어 한 말이었다. 춘양 진인은 자리를 떠나가며 ‘여기에 신선이 있
으니 이곳이야말로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 것이다.
듣고 있던 장염도 춘양 진인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지라 웃으며 ‘우리도 그 마음을 배워야 할 겁니다
‘ 라고 말한 뒤 이무심에게로 걸어갔다. 아미파에서의 일을 생각하니 오랜만에 이무심과 나란히 걷고 싶
어졌던 것이다.
그날 밤 별동대는 천주산을 비껴 지나가 태로 근방의 객점에 들기로 했다. 이미 혈마사의 일이 끝났으
니 더 이상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일은 없었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뒤를 쫓을 몽고의 기마대가 신경 쓰
였지만, 설마 하니 관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인들의 부락에 나타나기야 하겠는가!
오랫동안 산과 드에서 노숙했던 별동대는 오랜만에 쌓인 피로를 풀기로 합의한 것이다. 다행히 제법 큰
마을에는 객잔과 음식점이 성업 중이었고, 별동대는 그중의 호반객점과 그 옆에 붙은 태호객점을 세내
숙소로 삼았다.
장염은 무당파의 원로 고수들과 같은 방을 배정받았는데,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아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원로 고수들로 부터 존대를 받으며 한 방에 머무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문 닫은 객점의 빈자리에 장염이 털썩 주저앉자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점소이 일묘가 느
긋하게 다가갔다.
“손님, 늦었지만 원하신다면 간단한 소채와 식은 돼지고리를 내올 수 있습니다.”
장염은 점소이의 말하는 모양새가 조리있고 단정해서 저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게는 그저 차나 한 주전자 주시면 됩니다.”
일묘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점소이에게 정중한 사내를 만나 의외였지만, 이 늦은 방에 차
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차보다는 홍주라도 한 주전자 올릴까요?”
장염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굳이 데우지 않아도 되니 차나 한 주전자 가져다 주십시오.”
점소이가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후 물러가자 장염은 감회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참 낯익은 분위기로구나. 사천제일루에서 요리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왜 그렇게 마음이 편했던가 생각하니 음식 냄새가 배인 객점 때문이었다. 비록 곳곳에 세월의 때가 타
서 지저분하긴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자니 사천제일루가 떠올랐다.
‘헌원 형님은 잘 계실까? 그날 이후로 인사도 못하고 도망치듯 떠났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니 헌원일광과 요리 사부 이대추, 그리고 염소 수염 민주려와 그의 딸 민소백이 떠올
랐다. 하나같이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에게 진 신세를 아직 갚지 못했다. 사천
성까지는 도대체 얼마나 멀까?
장염이 가만히 눈을 감고 사천제일루를 떠올리고 있는 동안, 일묘가 조심스럽게 찻잔과 주전자를 내려
놓고 물러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가자미 눈으로 장염을 훔쳐보던 일묘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헉! 사람의 몸에서 빛이 나다니!’
눈을 감고 있는 장염의 몸에서 한순간 광채가 번득였던 것이다. 실내는 기름 등잔이 두 개 뿐이어서 전
체적으로 어두컴컴했다. 그래서 장염의 몸에서 번쩍인 빛은 일묘의 눈에 더 잘 보였다.
사박사박.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일묘의 귀로 낮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밤 숙소에서 나온 손님이
또 있는 것일까? 일묘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을 때다. 뒤늦게 나온 손님은 자연스럽게 먼저 나와
앉은 손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장 사부, 아직 안 주무셨구려.”
일묘는 한참 만에야 뒤늦게 나온 손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손님은 한쪽 팔을 사용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명상에 잠겨 있던 장염은 이무심의 나직한 음성을 듣고 살며시 웃었다. 이무
심의 음성을 듣기 직전에 사천제일루를 그려볼 수 있었다.
“이 대협, 이렇게 좋은 밤을 어찌 잠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허허헛! 술도 드시지 않는 분이 흥취만은 대단하구려.”
이무심이 싱긋이 웃으며 장염을 바라보았다. 그는 술 한잔에 만취하는 기인이자, 그 한잔에 천하도 담
을수 있는 사내였다.
“이 대협은 이 밤에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오늘은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
이무심이 말끝을 흐렸다. 장염은 그런 이무심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도 이기어검에 대한 고민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한잔하고도 남을 분위기였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소.”
“무엇입니까?”
이무심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어다.
“노호의 일을 보았소만 나는 도사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구려. 무당파 장문인이 그의 무공을 폐하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오?”
장염은 이무심에게 춘양 진인에게 전해 들은 귀문과 선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툰양 진인은 인간이 귀문을 스스로 선택하여 갈 수도 있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당하게 되는 사람도 있
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불필요한 증오를 품고 살아가면 자기가 선택한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렇지 않은 사람도 간혹 귀문에 사로잡힌다고 하니 사람의 미래은 여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 있던 이무심이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노호는 증오 때문이든, 혹은 하늘의 뜻이든…. 귀문에 든 것입니까?”
장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자신도 노호의 검에 실린 귀기를 보았다. 노호를 생각하자 문득
법술사와 승려들이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인연의 고리를 어찌 자신이 다 알아서 풀며 맺을까! 자신은 고
작 노화와의 인연마저도 원하는 대로 풀지도 끊지도 못했다.
‘모든 것은 천도에 따를 뿐이다.’
장염이 묵묵히 찻잔을 기울였다. 몇 번을 끊이고 우려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식어서 차가운 찻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신 썼다.
“그렇다면 나는 선문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오? 장 사부의 말을 들으니 귀문은 정말 접
하기 싫소.”
장염이 다시 한잔의 차를 따르며 대답했다.
“선문과 귀문은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이무심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허어! 선문과 귀문이 함께 있는 것입니까?”
설마 선문과 귀문이 함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 사부는 지금 선문과 귀문이 함께 있다
고 말했다. 그 둘이 정말 함께 있는 것이라면 수 많은 사람들은 큰 위험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염이 긴장한 이무심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그러나 눈과 눈썹처럼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영원처럼 먼 사이도 있습니다. 선문과 귀문이 그
러하니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장 사부의 말씀은 너무 어렵소.”
장염이 이무심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것은 마치 음양의 이치와 같지요. 손바닥과 손등은 서로 보는 면은 반대되지만 같은 자리에 있질 않
습니까? 손등은 깎아 나가도 손등이며 손바닥은 깎아 나가도 여전히 손바닥입니다. 귀문과 선문이 그와
같으니 사람들은 우연히라도 잘못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간혹 가다가 제 스스로 잘못을 범하고 하늘만
탓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무심은 그제야 어렴풋이 장염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한마디로 선과 악은 모두 자기의 마음
에서 선택하여 따라갈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쉴 틈 없이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마치
자신이 이기어검을 써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을 선택한 책임은 하늘이 아니라 내가 져야 하는 것이겠지.’
이무심은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차를 마셨다. 쌀쌀한 날씨에 차가워진 찻물이 뜨거워진 가슴을 식
혀주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냉수 같은 차를 마시며 지나온 추억을 곱씹었다.
제 8장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사천성의 명물 사천제일루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리 명인과 사천제일루의 간판이며 사천
제일미녀 민소백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원래 요리 명인과 민주려의 딸 민 소백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요리 명인이 요리에 집착하
여 그녀를 멀리하는 동안 민소백은 명인의 사형인 헌원일광과 친해졌다. 그러던 오느 날 헌원일광은 요
리 명인에게 요리 대결의 승자가 그녀를 차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요리 명인은 처음에는 반
대했으나 헌원일광의 고집에 져서 결국 헌원일광과 경천동지할 접전을 벌여야 했다. 사흘 밤낮이나 벌어
진 요리 대결의 승자는 요리 명인이었다. 그러나 비록 요리 대결에서는 승리 했지만 뒤늦게 민소백과 헌
원일광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게 도니 요리명인은 사천제일루 를 훌쩍 떠났다. 요리 명인이 사천제
일루를 떠나며 했다는 마지막 말은 두고두고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아름다운 여자를 위해서는 요리하지 않겠다.”
그 뒤 요리 명인은 장체를 숨기고 세상을 떠돌고 있다고 한다. 사천제일루 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장
염과 그 뒤로 부쪽 가까워진 헌원일광과 민소백을 본 사람들은 그것이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
고 입을 모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명인이 ‘ 요리에는 성공했으나 사람에는 실패했다.’ 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덧붙여 ‘ 한
가지 일에 미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으니 주의해야 한다’ 고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이대추의 심부름으로 주방을 나서던 헌원일광은 객점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이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침나절이었으므로 아직 객점에 손님이 들지 않았다. 텅 빈 객점 한쪽에 일찍부터 민소백이 나와 앉아
있었다. 장염이 사라지고 난 뒤 창가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은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그녀는 ‘장염이 자나
가다가라도 나늘 보고 한번쯤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았다.
바삐 움직이던 헌원일광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젯밤에는 장 동생의 꿈을 꾸었습니다.”
민소백은 느닷없는 헌원일광의 말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두 사람의 아침 인사인 셈이
다. 민소백이 객점에 자주 나와 창가의 자리를 지키다보니 두 사람이 함께 대화를 나눌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머, 그래요? 어떻든가요, 꿈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더군요. 아마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삼 년쯤 전 낮선 사람들에게 끌려간 뒤로 생사가 불분명한 장염이다. 헌원일광의 말은 다분히 그러기를
바라는 자신의 바램을 담고 있었다. 민소백도 헌원일광의 말속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함초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인은 어디를 가서든지 잘되실 거라고 믿어요.”
헌원일광이 그녀를 향해 읍을 한 뒤 돌아섰다. 이제 다시 서둘러 심부름을 다녀와야 하는것이다.
“요즘도 간혹 명인의 소문이 떠돈다지요?”
“……”
몸을 돌리고 몇 걸음 내딛던 헌원일광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 소문 때문에 한때는 그녀를 멀리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자신은 겨우 주방 요리사였는데, 상대는 주인의 딸이다. 감히 그녀를 자기의 상대로
생각한다는 자체가 송구스러운 일이었다.
“저는 언제나 아가씨께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습니다.”
민소배근 창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헌원일광은 민소백의 옆모습을 향해 조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미 가을도 깊어가
는 지라 실내와는 달리 서늘한 공기가 폐부 깊숙히 밀려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살갖으로 파고들자 헌원일광은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투둑,툭.
어깨뼈가 연골과 부딪치며 작은 소리를 냈다.
‘정말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그러고 보니 장염과 알게 된 지 벌써 삼년이다. 장염이 떠난 뒤로 사천제일루가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
는 것은 헌원일과의 노력 덕분이었다. 헌원일광의 요리 솜씨는 일취월장해서 이대추나 민주려도 흡족해
하고 있었다. 사실 요리 명인의 삼각관계한 것도 따지고 보면 헌원일광의 요리 솜씨가 그에 필적할 만큼
좋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곳저곳에서 헌원일광을 모셔가려고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 와도 감사하지
만 옮길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이 이대추나 장염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장염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헌원일광은 사천제일루에 남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어제 본 장 동생은 정말 …. 분위기가 좋았어.’
인사치레로가 아니라 정말 장염의 얼굴이 부드럽고 편하게 느껴졌다. 민소백의 말대로 어디를 가든지
잘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게 끌려가지 않았다면, 또 다음날 성도르 ㄹ떠들썩하게 했던 살인
극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자신도 마음 편히 장염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제 꿈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니 장염이 웃으며 곁에 서 있었다.
“장 동생?”
장염은 ‘형님, 곧 뵈러 가겠습니다. 사부님께도 전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헌원일광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염이 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얼굴입니다.”
“어…. 그래 보였나? 사실 민 소저를 좋아해. 그런데 감히 말할 수는 없고, 그래서 고민이야.하하핫!”
이건 꿈이니까 마음에 담아둔 말을 한번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라도 마음껏 할 말을 다하지
못하면 인생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하하핫! 드디어형님에게도 봄이 찾아왔군요.”
그리고 장염은 사라졌다. 정신을 차린 헌원일광의 귓가에 ‘형님에게도 봄이 찾아왔군요’ 라는 말이 생생
하게 울렸다.
‘그런 꿈을 다 꾸다니, 한심하군.’
헌원일광은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장염의 밝고 건강한 모습을 꿈에서라
도 보았으니 다행이다. 송씨의 향신료 가게로 향하는 헌원일광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 * *
무공산의 정상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던 공야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금 전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설레는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스승에게 처음으로 송문고검을 하사받던 날의 심정이 그랬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다면,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무엇이 있느냐?”
스승은 그때 분명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자신이 대답을 찾지 못하자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 검으로 그것을 찾아라.”
공야숙은 혼미한 가운데서도 스승의 당부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으으? 무슨 소리지? 이 검으로 무엇을 찾으라고?’
공야숙이 녹이 슨 철검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검을 보면 피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자신
은 그것 말고도 찾아야 할 것이 있었던가 보다.
공야숙은 아무 생각 없이 철검을 바라보았다. 본래 생각할 것도 없었지만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
니 설레임은 더욱 커졌다.
별안간 공야숙의 커다란 음성이 무공사에 울려 퍼졌다.
도에서 하나가 나왔다!
하나에서 둘이 나왔다!
둘에서 셋이 나왔다!
셋에서 만물이 나왔다!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니다!
나와 너 사이에는 무엇이 있느냐!
“우아아아!”
갑자기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쥔 공야숙이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아프다. 이제는 아무것도 담기
지 않은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다 비웠기에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이 아프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한참 만에 겨우 통증을 가라앉힌 공야숙은 저도 모르게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 설레이는 무언가
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그곳에 두근거림을 멈추게 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문득 공야숙의 기억 저편에서 스승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이 검으로 그것을 찾아라.”
공야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본능은 무공산을 떠나면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었지만, 귓가에 울리
는 말을 믿기로 했다. 오늘의 설레임은 어제까지의 두려움보다 훨씬 강했다.
공야숙의 신형이 바람처럼 산 아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디어 강서성의 저주로 불리우던 공야숙이
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 * *
몽고 기마대를 피해 남하하던 별동대가 망강에 이른 것은 10월 중순이다. 장염이 길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아서 그랬는지 그 뒤로 몽고의 기마대는 별동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오던 길을 돌
아가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행은 망강에서 배를 타기로 했다.
“장 동생, 우리가 타고 갈 배가 저것인가요?”
향이의 손끝이 멀리 정박해 있는 몇 척의 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염은 즐거운 듯이 말하는 향이를 보
며 웃었다. 강가에서 자란 향이가 좋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몽고의 기마대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일행의 분위기는 한결 좋아졌다. 사람들은 마치 여행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기도 했다. 간혹 상세가 악화된 일행이 의원을 찾아 나설 때가 되어야 자
신들의 현실을 자각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현실이라고 해봐야 사명을 다 끝
마치고 무림맹으로 복귀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누님은 강가에서 자라셨다니 뱃멀미가 심하지 않으시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배는 이번이 처음이
랍니다.”
장염이 자란 곳은 궁벽한 산간 마을이다. 근처에 강이라고 할 것도 없고, 있서야 개울인데 누가 개울에
배를 띄우겠는가. 장염은 배를 탄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후훗, 그래요? 배에 오르면 장 동생게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겠군요.”
곁에 있던 아미파의 정원이 장염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장 사부님은 공력이 심후하시니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거예요, 정 불편하시면 천근추의 신법이라
도 쓰시면 될 거예요.”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군요. 정원 스님은 장차 큰스님이 되실 겁니다.”
정원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장염에게서 ‘큰 스님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들으니 절
로 기분이 좋아졌다.
“장 사부님은… 나중에 무엇을 하실 생각이세요?”
정원의 질문에 장염이 즉시 대답했다.
“음…. 계속해서 요리도 하고 싶고, 아버지를 도와 집을 짓고 다리를 세우는 일도 하고 싶습니다.”
뜻밖의 말을 들은 정현, 정원, 정경이 장염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장염과 같은 무림의 일대 기인이
너무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건 소박이 아니라 불가능한 이야기였다.세상이 그를 가만
히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 동생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무림에서는 장 동생을 필요로 할 거예요.”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겁니다. 어느 한두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거라면 그것은 아
무리 좋은 일을 위해서라도 공평하지 않아요.”
정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장 사부님께서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그저 …… 사람의 일은 사람에게 맡겨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장염의 말이 너무 애매해서 아I의 세 여제자나 향이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서 따라가며 듣고 있던 지염도가 하후연의 허리를 쿡 찔렀다.
“형님, 그럼 사람의 일을 언제는 개나 돼지가 대신해 주었습니까?”
하후연이 지염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가끔 너의 머리 속이 궁금해진다.”
말을 마친 하후연이 장염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후연은 장염의 말속에서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저 거인은 지금 자신의 힘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자신은 늘 다른 사람보다 고강한 무공을 얻기를 원
했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과 그저 엇비슷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남들과
월등히 차이가 나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 속에 묻혀 살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도
통한 도사나 승려들이 깊은 산중으로 은거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레 아니라….. 아마도 장 소협은…. 아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지염도가 말을 하려다가 멈춘 하후연에게 불만의 눈초리를 던졌지만, 한번 닫힌 하후연의 입은 다시 열
리지 않았다.
“허허, 이곳에서 저들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앞서 걸어가던 풍림장의 영호성이 춘양 진인에게 말했다.
“진인, 저기 보이는 사람들은 비월장의 금 대협이 아닙니까?”
춘양 진인이 선?장에 가득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비월장을 망강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비월장의 장주 금거산이 천하십대고수 중의 한사람이었으니, 영호성이나 춘양 진인과는 밀접한 관계라
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림첩을 받고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 소식이 궁금했는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되자 반가움이 앞섰다.
잠시 후 비월장의 금거산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별동대의 숫자나 행색이 예사롭지 않았으므로 아무
리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해도 금세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두 분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금거산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인사를 해오자 춘양 진인과 영호성이 마주 읍을 했다.
비월장과 풍림장은 무리삼장으로 남다른 친분이 있다. 영호성이 금거산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헛! 사천의 천하 무림 대회 이후 근 삼 년 만에 다시 뵙는구려.”
은밀하게 인사를 건넸던 금거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것 같은데, 거리낌없이 말하고 행동하는구나.’
금거산이 힐끔 보니 뒤에 보이는 무림인들 절반 정도가 크고작은 부상을 입었고, 그 행색도 여간 초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주위를 의식하지 않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금거산은 짐작되는 바가
있어 넌지시 물었다.
‘영호 대협과 친인의 건강한 모습을 뵈니 마음이 기쁘오이다. 혈마사의 일로 얼마나 분주하시겠소이까?
집안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저도….”
영호성과 춘양 진인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아직 금거산은 혈마사의 일이 끝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금거산을 응시하던 춘양 진인이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허허…. 금 대협,혈마사의 일은 이미 끝났소이다. 그들은 지금 서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맹주
께서 그들을 곱게 보내지는 않겠다고 뒤따라갔지만, 어쨌든 앞으로 혈마사로 인한 걱정은 없을 것이외
다.”
금거산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하하핫! 망강에서 이렇게 기뿐 소식을 듣다니,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금모가 한
잔 내겠소이다. 바쁘시지 않다면 거절하지 말아주시기 바라오이다.”
황산으로 가기 위해 망강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던 금거산이다. 그러나 혈마사가 되돌아가고 있다
면 굳이 황산으로 갈 이유가 없다. 여기까지 서둘러 오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오늘 하루 푹 쉬고
다시 태산으로 돌아가리라.
금거산이 기분 좋게 말하자 춘양 진인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빠르게 생각했다. 여기서 배를 타고 장
강의 물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무혈, 황석을 지나 호북성의 무한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북으로 방향
을 잡아 걸으면 늦어도 보름이내에 하남성에 도달할 것이다.
“금 대협께서 저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늘 하루 망강에서 쉬며 여독을 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춘양 진인의 말에 영호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별동대에 속한 사람드이 고생만 했으니 하루쯤
즐기게 해도 괜찮을 것이다. 더구나 부자로 소문난 금거산이 스스로 한턱 낸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
다. 두 사람이 순순히 승낙하자 금거산은 별동대와 함께 달을 옮겨놓은 것같이 크고 화려하다는 이월루
로 향했다.
* * *
낙양에서의 반란에 성공한 삼존은 천산파를 이끌고 우선 난주로 돌아갔다. 난주의 잔존 세력을 남김없
이 모두 이끌고 천산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삼존은 난주의 천마방에 들러 수하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준 뒤 사흘 간 쉬지 않고 잔치를 벌였다. 아무
래도 인심을 얻어야 잡음이 덜하기 때문이다.
수하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날, 삼존은 그들만의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밤이 깊도록 함께 있어도 반란에 성공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장소와 검귀 일해이 죽
지 方?달아났기 때문이다.
“후우, 아무래도 나는 장소의 일이 마음에 걸리오. 미쳐도 그처럼 대단한 놈인데 만약 마공에 다른 공
능이 있어 제정신이라도 차린다면 그를 누가 막겠소?”
풍소곡이 은근히 떨고 있는 혈해신마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과거의 위풍당당하던 혈해신마가 아
니었다.
‘허기사…. 천산파와 음산파의 고수들이 연합했어도 그 한 놈을 죽이지 못했으니…..’
어디 죽이지 못하기만 했을까? 혈해신마는 한쪽 팔을 잡아 뜯겨 외팔이가 되었고, 독비도객은 심장을
뽑혀 죽었다. 음산파의 마안요희도 사지가 찢겨 죽었고, 십마왕도 여섯 중에 넷이나 죽어버려 마교에서
십마왕이란 이름은 사라졌다. 천하를 호령하던 원로 고수들이 장소 한 사람에 의해 죽어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소. 장소에게 더 이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는 거요. 감사원을 주축으로 마교의 추살대를 보내도록 합시다.”
불안해하던 혈해신마의 얼굴에 어느 정도 평정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장소와 검귀 일행이 부상을 입고
달아났으니 그들에게 회복할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최고수들로 구성된 합공을 뚫고 달
아난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추살대의 힘만으로 제거할 수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끊어져
나간 팔의 통증이 더욱 심해지는 듯 했다. 어깨를 주무르던 혈해신마가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과연 추살대의 힘만으로 그들을 제거할수 있겠소?”
“그때는 달리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오. 사파에 협조를 구해도 되고, 무림맹에 그자들을 떠넘겨도 될
것이오.”
잠자코 듣고 있던 독수마존이 끼어들었다.
“그들이 우리의 요청을 수락하겠소? 어제까지 우리와 피를 흘리며 싸우던 자들 아니오?”
사파는 마교가 통일을 시킨다는 명분으로 지금까지 싸워왔고, 정파 역시 마교에 휘둘릴 대상은 아니었
다. 그런 사파와 정파 양쪽에게서 어떻게 협조를 얻을수 있단 말인가!
“염려마시오. 사파는 장소가 헛된 싸움을 일으켜 우리가 우리가 그를 축출했다고 하면 되고, 무림맹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경재학과 장소의 남북지약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어찌 그가 감
히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겠소? 크하하핫!”
시원스럽게 웃는 퐁소곡을 보니 근심이 절로 사라지는 듯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하면 사파와 무림맹의
협조를 쉽게 이끌어 낼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독수마존이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본래 우리 사도라는 것이….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지 않겠소이까? 흐흐흣!”
풍속곡은 독수마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재학이 스스로 사도에 한쪽 발을 걸쳤으니, 앞으
로 쉽게 몸을 빼지는 못할 것이다. 무림에서 동도가 하나라도 늘어나는 것이 곧 힘이 아니던가! 무림맹
에 그처럼 든든한 동료가 생겼으니 이제 두고두고 이용할 것이다. 그것이 사파의 길이요, 살아가는 방식
이었다.
* * *
망강의 이월루는 창업한 이래 가장 많은 무림인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였다. 비월장의 삼십여 명과 별동
대의 칠십여 명이 들어가자 이월루는 다른 손님을 받아들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물론 이월루야 얼마든
지 공간이 남아돌아 갔지만, 그 백여 명의 손니이 대단한 무림의 고수들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감히
출입하지 못했다.
널따란 주루에 띄엄띄엄 앉아 술잔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별동대와 비월장의 사람들이다. 비월장의 제자
들 중에는 별동대의 구대문파 제자들과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알고 지내던 사
람이 있으면 다가가 혈마사와 관계된 별동대의 활약을 들으려 했다. 그러다 뵌 이월루는 무림인들이 떠
드는 소리로 소란하기 그지없었다.
청룡당과 떨어져 장염의 곁에 앉아 있던 이무심은 아까부터 속이 편치 않았다. 저 건너편에 앉아 무림
맹의 은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금철심 때문이었다. 비월장의 금철심이 누군가! 장가촌 사람들이
처음으로 무림에 촐도해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돌아다닐 때 약육강식의 면모를 확실히 보
여주었던 사람이다.
장염은 이무심의 표정이 편치 않음을 보고 넌지시 말했다.
“이 대협,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 것이 우리 일문의 그윽한 공부입니다.”
“……….”
그러나 이무심이 정작 괴로운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오 년 전 이무심은 아들 무쌍이 보는 앞에서 금철
심게게 손목을 잘렸다. 그 수치스런 기억을 지우기도 전에 무쌍은 당고랍산맥에서 장소에게 살해당했다.
지금 이무심은 그것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주었더라면 나의 복수도 뜻 깊었을 것이다.’
지금은 원한이 솟구치다가도 허망하게 사그라들었다. 그것을 보아줄 아들도 없으려니와 더 큰 슬픔으로
이무심의 사슴이 재가 된 마당에 무슨 원한이여 복수란 말인가! 이무심은 장염에게 슬쩍 웃어 보이고 묵
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구러나 정작 싸움은 금철심의 협기에 의해 멀리서 시작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별동대의 활약상을 듣고
있던 금철심이 점창파의 천류에게 말했다.
‘천형,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들은 수적들이 아니오? 무림맹이 수적들과 함께 다닌다면 후에 구설수에
오를 것이외다.”
몇 순배 잔이 돌자 취기가 오른 금철심이다. 자기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청룡당의 수적들에
게도 들릴 만큼 소리는 커져 있었다.
일월루의 공기가 청룡당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급속도롤 얼어붙기 시작했다. 정룡당은 가
급적 별동대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한쪽에 따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귀통이에 몰려 앉았다고
해도 마음마저 구석진 곳에 처박아둔 것은 아니다.
황하수채 청룡당은 무림맹의 협사들과 힘을 합쳐 혈로를 b고 나왔다. 비록 처음에는 다른 목적으로 접
근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행동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처럼 무림의 일에 동참하지도 않
은 사람들이 출신 성분을 가지고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커억, 퉤! 술집에 개를 풀어놓았나 보구나.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구나.”
“크하하핫!”
사공철의 왼편에 앉았던 마른 쌍혈귀가 침을 뱉으며 소리치자 수적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본래 마음에
담아두고 못사는 족속들이라 금철심의 말을 흘리지 못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수적들은 욕을 한 숟
가락 먹으면 몇 바가지로 되받아줘야 직성이 풀린다.
이곳저곳에서 ‘씨블 개자슥’, ‘싸가지없는 시키’ 로 시작된 욕설이 마침내 ‘저 새끼 부모가 누구래?’ 에
이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금철심이 탁자를 꽝! 치며 벌떡 일어섰다.
“주제를 모르는 도둑놈들 같으니! 무림맹의 일을 조금 거들었다고 함부로 날뀌는 구나! 걸레는 빨아도
걸레일 뿐이다! 누가 감히 금룡공자 앞에서 나불거리는지 보자!”
자리가 자리인만큼 감히 큰 소리를 터뜨릴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혈기가 치솟은 금철심이다. 금철심이
호랑이 눈을 하고 청룡당이 앉은 곳을 쓸어보자 주루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런 현
상을 두고 ‘한마디로 좌중을 압도했다’ 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주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아
니었다.
원로 고수들은 금철심의 행동이 못마땅하여 입을 꾹 다물었고, 청룡당은 ‘오냐, 너 잘 걸렸다. 이제 이
놈을 어떻게 요리한다?’ 생각하느라 침묵했다. 과거 같으면 쥐 죽은 듯이 살았겠지만 지금은 청룡당의
대표를 맡고 있는 사공철이 있고, 그 뒤에 그이 사백인 이무심, 아니, 더 나아가 이무심의 사부라는 장염
이 있다. 수적들이 생각하기에 가히 천하를 상대해도 두렵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금거산은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어색하게 웃으며 춘양 진인을 바라보았다. 춘양 진인이라면 이 분위기를
무마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춘양 진인은 묵묵히 소채를 가져가가 우물우물 거
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장염 사숙의 제자로 자처하는 이무심과 이무심의 사질이라고 하는 사공철이니 자신이 나서기가 뭐한
것이다. 이럴 때는 그저 끼어들지 않고 음식이나 실컷 먹는 편이 낫다. 어차피 장 사숙이 있는 한 큰 싸
움은 일어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춘양 진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금거산이 슬며시 말했다.
“제 조카가 버릇이 없어서 그만 흥취를 깨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불러 나무랄 터이니…….”
“허허헛, 젊음이 좋은 게지요.”
춘양 진인의 말은 ‘젊어서 그런 것이다’와 ‘그런 젊음이 부럽다’ 는 의미를 담고 있을 뿐이다. 금거산이
슬쩍 영호성을 바라보아도 그 역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가만 보니 영호성은 웃으며 멀리 떨어진 장염
이라는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허, 영호성은 온통 장염이라는 사람에게만 신경이 가 있구먼. 하기사 혼기가 찬 딸이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
이월루에 들어와 장염을 소개받을 때 여간 놀란 것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삼십 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무당파 장문인의 사숙이라고 했다. 금거산도 망강까지 오는 동안 장염에 대한 소문은 조금씩 들
었다. 주로 ‘장염이 무림맹에서 천마후를 데리고 나가기 위해 구대문피 장문인들과 싸움을 벌였다’ 거나,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아갔다’ 는 식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그런 소문이라면 자신도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과거 한때는 ‘금거산의 태산장법에 태산제일봉
이 무너졌다’ 는소문이 나돈 적이 있었다. 물론 금거산은 단 한 차례도 맨 땅에 공력을 쏟아 부은 적이
없다. 금거산이 알기로 소문이란 의례히 그런 것이다.
결국 장염은 인사만 나누고 다른 무리들 속으로 사라졌다. 금거산은 아무래도 무림의 어른들과 한자리
에 앉아 있는 것이 어려워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잡지 않았다.
“허헛……..”
한참 만에 금거산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금철심의 어리석은 행동에 자기 혼자 긴장하여 떠
든 셈이다. 자기와 같은 자리에 앉은 어느 누구도 무림에서 금룡공자라는 금철심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
지 않았다.
‘쩝! 왠지 맥이 빠지는군.’
조카의 일에 고인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그럴 만한 대사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금거산
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조카이기 때문에 남들에게도 좋게보여
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오늘의 술자리도 조카 금철심의 안목을 넓혀주기 위해 마련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카는 못난 꼴을
보이고 있고, 그나마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으니 이런 걸 일컬어 헛수고라고 하는 것일까?
금철심은 일단 사방이 조용해지자 어깨가 조금 으쓱해졌다. 금룡공자의 이름으로 큰소리를 친게 주효했
던 모양이다. 그런데 금철심이 다시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였다. 수적들 틈 속에서 젊은 사내가 일어나
더니 금철심이 있는 곳으로 걸어나왔다.
금철심 앞에 이른 사내는 돌연 한구석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그가 인사하는 곳을 바라보
던 금철심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낯익은 중년의 사내가 그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를 어디서 보았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금철심에게 젊은이가 말했다.
“당신이 비월장의 금룡공자요? 전부터 당신의 이름을 많이 들었소. 그런데 소문보다 금룡이 대단해 보
이지 않아 조금 실망이오. 아, 나? 나는 형제들이 청룡신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지. 금룡과 청룡이면 그
래도 같은 용 자 돌림인데, 조금 더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나?”
듣고 있던 금철심의 얼굴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처음에는 존대하던 말이 뒤로 갈수록 내려가더니
나중에는 반말에 가까웠다.
‘알고 보니 이거 미친놈 아닌가?’
그러나 함부로 발작하기도 쉽지 않았다. 저자가 정말 청룡신검이라면 최근에 급부상한 사파의 고수였다.
“네놈, 무례하구나!”
이제 서로 간에 반말과 욕설이 오고 갔으니 말로는 끝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쉽
게 검을 뽑아 들지 못했다. 금철심은 상대가 요즘 한창 이름을 날리는 신진 고수라 머뭇거렸고, 사공철
은 부상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했던 거이다.
자존심 때문에 서로 마주 서게 되었지만,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조심해야 한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서로를 노려볼 때였다.
“소란은 그만피우고 이리 오너라.”
사공철이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 긴장을 풀지 않고 있다가 ‘운 좋은 줄 알아라’ 는 한마디를 남기고 돌
아섰다.
“사백님, 부르셨습니까?”
“장 사부 앞에서 다시 소란을 일으키면 용서하지 않겠다.”
사공철이 찔끔한 눈빛으로 장염의 눈치를 보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멀리서 사공철을 지켜보던 금철심은 그제야 저 중년의 사내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아니, 저자는 몇 해 전 나에 의해 손목이 잘린 그 촌뜨기 아닌가! 그리고 보니 무림의 소문이란 것이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저놈이 청룡신검이라고는 하지만 저자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보니 가히 짐작이 된
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전까지 참고 있던 게 너무 후회스러웠다. 사공철에 대한 폭발할 것 같은 본노는
엉뚱하게 그에게 대접을 받고 있는 이무심에게로 쏠렸다. 아무래도 이무심이 저 도적의 윗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저 별 볼일 없는 중년인이 그의 상관이라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 게다가 상처받은 자존심
은 도적들의 잔챙이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되지 않을 것 같았다.
‘네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악연이라고 생각해라.’
협의로 충만한 금철심은 보무도 당당하게 이무심에게로 걸어갔다.
“그대는 오래전 나에게 가르침을 받고도 아직 저런 자들과 어울리고 있는가!”
주루를 울리는 금철심의 호통에 깜짝 놀란 것은 멀리 떨어져있던 사대천왕이었다. 이무심이 누군가! 그
는 이미 아미파의 여승들이 복마대협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협객이다. 게다가 그의 무위 또한 자
신들이 직접 경험한 바 있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겨우 금룡공자가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사대천왕이나 별동대의 구대문파 제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
도 금철심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먼 사촌보다는 가까이 있는 이웃이 더 좋다던가! 지금까지 청
룡당의 도움을 직접, 간접으로 받아온 처지다. 비월장은 그들의 생명과 무관했지만 지금의 청룡당은 혈
맹과 같았던 것이다.
“푸하하하핫!”
마침내 참고 있던 이무심의 웃음이 주루를 흔들었다. 이무심은 누가 쳐다보든 말든 끊임없이 웃어 젖혔
다. 이무심은 마치 눈앞에 금철심이 없는 것처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순간 장염은 이무심의 웃음에 담긴 공허를 읽었다. 참고 참아 모두 덧없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건
만 굳이 찾아와 무덤을 파는 금철심이나 그의 도발적인 행동에 과거를 떠올리며 공허하게 웃고 있는 이
무심이나 모두 안돼 보였다.
“뭐가 그리 우습다는 것인가!”
문득 웃음을 멈춘 이무심이 장염에게 말했다.
“장 사부, 인생이란 게 참으로 재미있지 않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감동을 함께 나눌 아들이 없구려.”
이무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방으로 삼엄한 검기가 밀려 나갔다.
“나는 본래 마음이 그다지 넓지 않으나, 장 사부의 가르침이 있으니 어찌 심하게 하겠느냐? 그저 빚만
갚고 말 테니 너도 먼저 손을 쓰거라.”
오 년 전에는 장소룡을 구하기 위해 먼저 비검을 날렸다가 손목이 잘렸다. 비록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
만, 이처럼 끊임없이 도발해 오니 복수하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이무심이 말을 마친
후 금철심 앞에 마주 섰다.
금철심은 이무심의 기도가 과거와 딴판인지라 일순 당황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
람들 앞에서 달아날 수도 없는 일이다.
‘오냐, 네놈이 오 년 동안 무얼 배워봤자 얼마나 배웠다구!’
금철심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무램맹의 고수들 앞이니 피차 간에 상대를
죽일 수는 없다. 허점을 찾아 일검에 베어주리라.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금철심은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운몸을 움
직일 수 없었다. 상대가 특별히 공력을 일으킨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숨이 턱턱 막혀왔다.
“오라는 데 무얼 하는 거냐?”
“…………”
상대는 마치 자상한 스승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듣고 있는 금철심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스승은 자신
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지만, 저 중년인은 틀림없이 자신을 벨 것이기 때문이다.
“멈추시오!”
금거산은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누가 금철심에게 손을 쓰겠는가?’ 방심하고 있다가 사태가 심각해지
자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소리는 오히려 금철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지금 이곳에는 숙부와
수많은 무림의 고인들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운 것이다. 금
거산의 소리를 듣자마자 금철심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받아랏!”
언제 뽑혔는지 모를 금철심의 검이 그림처럼 이무심의 몸으로 박혀들었다.
파팟!
그러나 이무심의 상체가 금철심의 눈앞에서 부드럽게 흔들린다고 느낀 순간이다. 하얀 빛줄기가 환상처
럼 금철심의 우수를 스쳐 지나갔다.
슥.
다음 순간 허공으로 굵은 핏줄기가 치솟았다.
“아아!”
금철심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자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진 것이
다. 한쪽은 무림의 오랜 동도요, 다른 쪽은 생사를 함께한 전우다. 장내에 있는 무림인들이라고 어느 편
을 들 것인가! 안타깝다는 듯한 탄식이 곳곳에서 울려 나올 뿐이었다.
장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만 상대가 뒤바뀌어 있을 뿐 오 년 전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
의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를 뿐이다. 이제 금씨와 이무심이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맺었으니 절로 한숨
만 나왔다. 왜 사람은 이렇게 늘 불안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가느 것인지!
‘언젠가 일이 생길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금거산은 멀리서 잘려 나가는 조카 금철심의 손목을 보았다. 무인에게 손이 사라졌으니 그의 전부를 잃
은 것이나 다름없다. 금거산의 몸이 수치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금철심의 손목과 함께 금
씨의 명예도 추락했다. 아니, 명예는 둘째 치고 장차 형님을 무슨 낯으로 대할 것인가!
손목이 잘린 금철심은 비월장의 무사들에 의해 옆으로 옮겨 졌다. 나머지 무사들은 이무심이 낮아 있는
탁자를 둥그렇게 둘러싸기 시작했다. 여러 고수들 앞에서 금철심이 먼저 출수했으니 이무심에게 제제를
가하기도 어려웠다.
금거산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조카의 피로 얼룩진 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이무심에게 말했다.
“그대의 공력이라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니었소?”
금거산도 조카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손목을 날려 버리는 일은 너무 과한 처사라
고 생각했다.
이무심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대들 같았으면 상대의 목이라도 날렸을 것이오.”
금거산은 일순 대답하지 못했다. 중년인의 말이 젼혀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앞에서 누군가
금철심과 같이 행동했다면 역시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금거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모든 사람이 금거산은 아니다. 그래서 금거산은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당신은 감히 나에게도 같은 교훈을 내릴 수 있겠소?”
금거산의 말이 떨어지자 이무심은 손에서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대는 오래전 나에게 한 말을 잊은 거요?”
말을 마친 이무심이 오른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금거산은 반듯하게 잘려 나간 이무심의 손목을 보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오 년 전 사
천혈사가 있던 그때, 조카 금철심에 의해 손목이 잘린 사람이다. 그가 오 년 만에 저렇게 무서운 고수가
되어 금씨 일족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9장 만물은 도에서 나왔다
이무심과 금거산 사이에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금거산은 이무심의 손을 보고 모두가 조카의 잘못이
불러일으킨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감정은 생각과 달랐다.
이무심도 금거산이 물러날 의사를 보이지 않자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지금 이무심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복수를 하면 시원해질 줄 알았던 마음이 지금에 와선 전보다 더 무거워져 있었다.
‘장 사부가 늘 살리는 것의 복을 말하더니만…….’
정말 그랬다. 차라리 과거를 떠올리며 이를 갈던 시절의 마음이 더욱 가벼웠다. 그러나 이무심은 자신
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늘의 뜻에 따를 뿐이다.’
오 년 전의 자신이 베어질 운명이었다면 이제는 벨 운명인 것이다.
‘베겠다. 당신이 나를 막아서면 당신을 베겠다.’
이무심이 금거산의 정면에 서서 한 손을 늘어뜨렸다.
금거산은 이무심의 기도가 멀리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지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공력이라니… 무림에 이렇게 빨른 진보를 보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래도 상대에게 전력을 다해야 겨우 승기를 거머쥘 수 있을것 같았다. 마침내 금거산이 골력을 끌어
올리자 넘치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옷자락이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한동안 서서 서로를 노려볼 때였다. 이월루의 문이 뜯어져 나갈 듯 활짝 열렸다.
콰당!
금거산과 이무심의 눈이 문 쪽으로 돌아갔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많은 무림 고수가 운집한 곳에 저런 식
으로 등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금거산과 이무심의 긴장이 보이지도 않는 듯 이곳저
곳을 기웃거렸다.
“우헤헤헤…. 이거 뭐가 이렇게 사람이 많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공야숙이었다. 공야숙은 마주 보고 서 있는
금거산과 이무심에게 다가갔다.
“어 ? 거기 싸울라구 그래? 왜 그래. 싸우지 마. 무서워.”
금거산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괴인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아다. 치렁치렁한 머리는 허리까지 이
르렀고, 씻지도 않은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얼굴은 나이를 알아보기 어려우리만치 수염에 뒤
덮여 있는데, 어디에서도 무공을 익힌 흔적은 찾아볼수 없었다.
“그만 봐, 응? 그러다가 ….. 너 눈 빠지겠다.”
“무례한 놈!”
금거산이 공력이 깃든 손바닥으로 공야숙을 치려는데, 이무심의 검끝이 손바닥으로 밀려왔다.
파팍!
두 사람이 공야숙을 사이에 두고 맞붙었다가 떨어졌다.
‘우욱……’
이무심은 금거산과 부딪치는 순간 밀려온 엄청난 암경에 내부를 다치고 말았다. 이무심은 어금니를 악
물고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핏덩이를 꿀꺽 삼켰다. 비릿한 혈 향이 느껴졌지만, 피를 토하여 상대에게 약
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금거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무심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자신의 칠성 골력을 검끝으로 받아낸 것
이다.
“그대가 한 가지 재간을 믿고 그처럼 방자하게 굴었구려. 그러나 나 역시 그대의 무례와 오만을 용서할
마음이 없소!”
금거산이 소리치며 다시 왼손을 이무심에게 밀어 넣었다. 어차피 무공을 모르는 것 같은 괴인야 처음부
터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지금은 이무심이라는 고수에게 전 신경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무심은 태극양의검의 이초식인 천산둔형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금거산의 오른손이 왼손에 이어 어느
틈에 가슴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산을 밀듯이 연달아 치고 오는 그것은 검거산의 태산장법
이었다.
‘헛!’
이무심이 다시 한걸음 물러서며 검끝을 교묘히 휘둘렀다. 검은 금거산의 왼손을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걷어냈다.
멀리서 두 사람의 겨룸을 지켜보던 춘양 진인은 이무심의 웅혼하면서도 부드러운 검법에 감탄을 터뜨
렸다. 그것은 태극검이나 양의검을 닮은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달랐다.
‘과연 사숙께서 창안하셨다더니 그 변화가 무쌍하구나.’
감탄하며 지켜보던 춘양 진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두사람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괴인이 돌
연 금거산의 두 손을 꽉 붙잡았기 때문이다.
금거산의 손을 붙든 괴인은 ‘왜 자꾸 때려?’ 라고 말하고 있었다.
‘허허…….’
자신도 금거산의 태산장법을 맨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무공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괴인
이 마치 어린아이를 붙잡듯 금거산의 두 손을 제압한 것이다.
‘무림에는 모래 알처럼 기인이 많다더니, 과연 하늘 밖에 하늘이 있었구나. 저 정도의 고수라면 무림에
알려졌을 법도 한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기인은 무리에 아직 없었다. 춘양 진인은 괴인의 옷차림을 한참 바라보다
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지금까지 무림의 고수들을 거의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괴인은 전
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괴인에게 두 손이 잡힌 금거산은 뒤늦게야 괴인이 미쳤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공의 고수라
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때릴 거야? 안 때린다고 해봐. 그럼 놔줄게. 우헤헤…..”
이렇게 미친 사람과 다퉈서 뭘 하겠는가! 조카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끊어 오르는 울화
르 삭여야했다. 금거산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자 괴인은 잡고 있던 두 손을 풀었다. 금거산은 이무심
에게 ‘다음에도 이와 같은 행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라고 소리친 후 자리로 돌아갔다.
이무심은 어차피 그런 행운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피식 웃었다. 그런 행운이 있었
다면 자기 인생이 이렇게 까지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행운이 있었다면 네 조카에게 손목이 잘리지도 않았고, 아들을 瑩層돗刻柰憫?’
씁쓰름하게 웃던 이무심이 괴인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감사하외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굳이 거들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괴인의 음성이 오십 대를 넘어선 것처럼 느껴졌기에 이무심의 인사는 정중했다.
“우헤헤헤, 감사는 무슨, 그런데 감사가 뭐야?”
이무심과 괴인의 대화를 듣던 장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우를 뵈니 반갑기가 그지없습니다. 자리에 함께 앉으시지요.”
공야숙은 친근하게 인사를 하는 장염을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왠일인지 이 사람에게서 스승의 냄
새가 났다. 스승과 같은 냄새라면 믿을 수가 있다. 또 믿을 사람이 아니면 어떤가! 공야숙은 장염의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에….. 너, 아니, 당신은 나를 알아?”
장염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은 도에서 나온걸요.”
“어엇! 너, 당신도 스승님과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괴인과 장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무심이 물었다.
“스승님의 함자를 아십니까?”
“어? 함자가 뭔데?”
“……..”
괴인에게 질린 이무심이 머쓱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워 나갔다. 오늘의 일은 깊이 생각할수록 답답하기
만 했다. 금씨 젊은 녀석의 손목을 잘랐는데도 생각만큼 속이 후련하지 않았고, 금거산과의 겨룸은 산
넘어 산을 느끼게 했다. 지난 오 년 간 피를 깎는 수련끝에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나 천하십대고수 금
거산의 일장에 내상을 입었다.
“허헛!”
차라리 저 괴인처럼 자신도 바보로 살 수 있다면 좋을 것도 같다. 은원도 없고 사람과의 갈등도 없으니
얼마나 속이 편할 것인가!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런 괴인과 장염은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또한 묘하기 그지없다.
괴인이 ‘무서운 꿈을 꾸었어’ 라고 말하면 장염은 ‘생사의 긴 꿈에서 깨면 아무것도 없어요’ 라고 했다.
또 장염이 ‘잠에서 깨면 뭐가 보이죠?’ 라고 하면 괴인은 ‘긴 꿈이 보여’ 라고 했다. 듣고 이던 이무심이
중얼거리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는 나도 미치고 말 게다.’
* * *
천마대의 대주 수라마검이 검귀로부터 갑작스런 회군 명령을 받고 구룡채를 떠나갔다. 천마대가 구룡채
를 떠날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파천대의 혼세마왕도 난주로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혼세마왕의 공
동 사부인 삼존이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제야 혼세마왕은 마교가 천산파와 음산파로 갈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 교가 불안하다고 하더니
결국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구나 하고 탄식을 터뜨렸지만 어쩔 수 없다. 언젠가 한 번쯤 이런 일이 있
으리란 예상은 했으나 시기가 뜻밖이었다.
혼세마왕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황하수채를 떠나야 했다. 아마도 다시 오늘날과 같은 무력은 얻
지 못할 것이다.
천산파와 음산파가 뭉치고 현재 같은 전력을 보유하려면 적어도 10년은 더 걸릴 일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철수하라는 것은 앞으로 사파의 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수하들을 이끌고 돌아
서는 혼세마왕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구절양장 서문당은 파천대가 돌아가고 있다는 수하들의 보고를 받고 남궁척과 장소룡을 불러들였다.
“장 호법, 저들이 돌아가고 있다고 하오. 그들이 다른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아닌지 염려되오이다.”
“우선 그들이 수하들을 우리의 앞에서 거둔 것은 사실이니 근심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회주님
의 염려처럼 저들이 수하들을 모아 방심하고 있는 우리를 공격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서문당이 황급히 되묻자 장소룡이 잠시 생각하다가 뜻밖의 말을 했다.
“혹시라도 마교에 변고가 생겨 저들이 돌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제가 직접 그들의
뒤를 밟아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삼도회의 회주 다비검 남궁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 대협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저들이 갑자기 수하들을 거둬들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그
러시다면 저도 수하들을 딸려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꼭 장 호법이 가셔야만 하오?”
장소룡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핫! 이번에 강호에 나가 찾아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제가 자청하는 겝니다. 이미 청해성의 사파가
채주님을 따르고 있으니, 제게 잠시 마교의 뒤를 추격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장소룡은 장염과 이무심을 만나보고 싶었다. 몸은 이미 망가졌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보고 싶은 마음까
지 망가지진 않았다. 아니, 몸이 불편할수록 동고동락하던 장염과 이무심이 더욱 그리워졌다. 그래서 이
번 기회에 황하수채를 잠시 벗어나 볼 요량이었다.
황하수채의 채주 서문당은 마교보다 장소룡이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이 더 염려스러웠다. 황하수채를 청
해성 제일로 키운 것은 전적으로 장소룡 덕분이었다. 그는 수하들의 무공을 지도했을 뿐 아니라 불패의
진법으로 무수히 많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왔다.
“정히 그러시다면 어찌 말릴 수 있겠소이까? 다만 염치없지만, 나를 위해 너무 오래 지체하지는 말아
주시구려.”
장소룡이 웃으며 ‘한번 형제의 정을 맺었으니 어찌 홀로 편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서문당
은 즉시 장소룡의 출전을 허락했다.
그날 정오가 되자 장소룡은 평소 자기를 호위하던 십팔마룡과 백룡당과 황룡당의 수하 각각 백명, 그리
고 삼도회의 오극렬과 그의 수하 이십 명을 데리고 마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간 은밀히 장소룡을
지켜주던 당문의 노인도 ‘마교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며 장소룡과 동행을 자처했다.
말 위에서 좌우를 둘러보던 장소룡은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살기 위해서 숨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처음 황하수채를 찾아올 때만 해도 혈혈단신 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수하들을 이끌고 마교
의 뒤를 쫓고 있다.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장소룡이 옛날을 생각하며 껄껄 웃다가 옆에 있는 당문의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의
움직임에 따라 상체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허탈해 보이든지 장소룡은 저도 모르
게 말고삐를 잡아 당기고 말았다.
푸르륵.
천천히 걷고 있던 말이 멈추자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라도?”
“아닙니다.,,,,”
노기인과 비교하면 자신은 아직 희망이 있는지도 몰랐다. 나이도 젊고, 친구와 형제도 있으며, 고향에는
남은 가족도 있다. 문득 지금까지 너무죽은 아들들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또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장소룡은 다시 말을 몰아 노인의 옆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몸이 불편한 장소룡과 당문의 노인만 말을
탔고, 이백사십여 명의 사파고수들이 걸어서 청해성을 지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사파가 떼를 지어 몰
려다닌 일도 없었거니와 계파를 초월하여 그렇게 뭉쳐본 일도 없었다. 말 위에 올라탄 늠름한 모습의 장
소룡과 그의 수하들은 오랫동안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 * *
이월루에서 장염과 합석한 괴인은 그 이후로 장염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별동대는 배에 올랐고, 비월장은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미 혈마사가 무가들을 공격하지 않는데
굳이 황산까지 가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별동대가 배에 오르기 직전 금거산이 이무심에게 다가와 말했다.
“단오절이면 그대가 무림앵에서 할 일도 끝났을 때가 아니오?”
한마디로 내년 단오절에 만나자고 하는 말이다. 금거산과 이무심이 만나 우의를 다질 일이 없으므로 이
말은 복수의 날을 잡자는 것과 같았다.
“하하핫! 무림맹의 일은 이미 끝난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단오절이면 넉넉한 시간이외다.”
금거산은 이무심이 의외로 선뜻 동의하자 재빨리 못을 박았다.
“그렇다면 단오절에 어디 계시려오?”
이무심이 생각해 보니 특별한 연고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황하수채야 도적들의 소굴이니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미산에 있을 수도 없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이무심이 장염에게 물었다.
“장 사부는 무림맹에 들렸다가 어디로 가시겠소?”
금거산과 이무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염이니 두사람이 결투할 자리를 찾는다는 것을 알 수있었다. 마
음 같아서는 영호화를 데리고 풍림장이나 장가촌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생각지도 않은 폐를
끼치게 될지 몰랐다. 그때 문득 사천성이야말로 두 사람의 은원이 시작된 것이니 그 매듭을 풀기에도 적
당하지 않겠는가!
“일을 마치는 대로 사천성 성도의 사천제일루에 잠시 머무는것이 좋겠습니다.”
장염의 말을 들은 이무심이 즉시 금거산에게 대답했다.
“내년 단오절에 사천성 성도의 사천제일루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금거산은 장염과 이무심에게 딱딱한 어투로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소’ 라고 말한 뒤 떠나갔다.
금거산과 비월장이 떠난 뒤 별동대는 곧바로 두 무리로 나뉘어 배에 올랐다. 장염은 무당파와 아미파,
공동파와 함께 승선했고, 풍림장과 무림맹 기습조, 그리고 청룡당이 한 배에 탔다. 한 척에 다 타기는 숫
자가 조금 많았고 둘로 나뉘어 타니 자리가 오히려 남았다. 결국 선주의 부탁으로 상인들까지 태우자 두
척의 배는 금세 사람으로 가득 찼다.
마침내 두 척의 배가 가을바람을 받으며 강물을 가르고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뱃전에 서서 강바람을
맞고 있는 장염에게 향이가 다가왔다.
“장 동생, 지금 기분은 어때요? 견딜 만한가요?”
“처음 타보는 것인데도 의외로 편하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뱃멀미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후훗! 장 동생이 워낙……”
“………..”
장염이 궁금하다는 듯 바라보자 향이가 배시시 웃었다. 몇 해전 수계현에서 찐빵과 만두를 만들어 팔
때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향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간단히 대답했다.
“생활력이 강해서 그래요.”
장염은 향이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생활력이 강하다는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려
서부터 몸이 약해 비실대던 장염이라 향이에게 막상 그런 소리를 들으니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향 누님께서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뱃전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뒤로 봉두난발의 괴인이 다가왔다. 장염이 웃으며 아
는 체를 하자 괴인이 정중하게 말했다.
“장 소협이라 혀셨소?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들은 다 가지고 있소이다.”
“기인께서 맑은 정신을 회복하셨으니 다행입니다.”
장염의 말을 들은 괴인이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그리 좋아하기에는 이르다오. 여기를 보시구려.”
“아!”
괴인이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손으로 걷어 올리자 함몰된 머리가 드러났다. 아마도 저 상처 때문에 괴인
의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상처를 낸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대체 누가 이토록 나에게 손을 쓴 것인지…. 천만다행으로
내가 살았으니 망정이지……”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곧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크하하핫! 하늘은 ….. 사실 무심하다오.”
괴인은 크게 웃고 나 뒤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향이는 괴인의 말과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것은 향이의 몸에 배다시피 한 고인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향이는 직
감적으로 저 괴인에게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괴인의 풍모는 전에 향
이가 모시던 수많은 무림의 기인들과 흡사했던 것이다.
별동대를 태운 배가 무혈을 지날 때였다. 그날 아침까지 순풍에 돛을 올리고 쾌속 항진하던 두 척의 배
는 바람이 잦아들자 물살 따라 서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승선한 사람들은 선실과 갑판에서 꼼짜고 않
고 있었다. 경치를 보고 웃고 떠드는 것도 하루이틀이다. 며칠째 계속된 항해로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뱃전에는 오늘도 두 사람이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날 승선할 때부터 두 사람은 거
의 매일 같은 자리를 지켰다. 무심한 눈으로 일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던 괴인이 중얼거렸다.
“헤헤…. 물속에 사람이 있어.”
“그는 무얼 하고 있지요?”
“그 사람은 책을 읽고…… 그리고 …… 사람을 먹어…..”
장염은 괴인의 말을 듣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처음 이 괴인을 만났을 때부터 느껴지던 혈의 기
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이 괴인은 오행혈마인중의 하나일 확률이 높
았다.
그동안 장염은 괴인에 대해 꽤 많은 사실을 알게 되어다. 우선 그는 자신의 짐작대로 도사였음이 분명
하다. 드문드문 제정신이 들 때마다 한두 마디씩 슷떳는 것들은 분명 도교의 경전이었다.
괴인이 도사였다는 사실은 이월루의 문을 열고 들어올때 느껴지던 선천의 기운으로도 알 수있었다. 아
마도 이 괴인은 정파의 고수로 무림맹에 있다가 경재학의 술수에 당한 것이리라.
‘그런데 대체 누가 오행혈마인의 머리를 파괴했단 말인가!’
설마 하니 경재학이 그랬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무공산의 인근에 있던 다른 무림인도 아니다. 그들에
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지금 저 괴인이 강물 속에서 본 장면은 자신이 흡혈을 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
렇다면 이미 오행혈마기가 형성되어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단계인데, 그 정도면 가히 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람은 또 무얼 하고 있어요?”
괴인은한참을 주저주저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울고 있어… 헤헤…..”
입을 굳게 다문 괴인은 다시 말하지 않았다. 이제 오늘은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괴인은 말이 많은 듯하면서도 한번 입을 다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오늘 괴인은 조금 달랐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던 것이다. 다시 입을 연 괴인
의 음성은 깊게 가라앉아 있어 그의 수양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내가 무공산을 떠난 것은 장 소협과 만나기 위함인 것 같소. 무공산에 있을 때 가슴이 설레며 누군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소. 나는 무공산을 벗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했었기에 머물러 있으려 했으나….
스승의 말씀을 붙들고 북쪽으로 달렸소.”
“………….”
장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기에게는 오행혈마인을 잡아끌 만한 요소가 없다. 오히려 누군가 그를 잡
아 이끌었다면 그는 오행혈마인일 것이다.
‘지난번 나에게 찾아왔던 그자일까?’
그가 아직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별동대의 주변에 있을 것이다. 자신이 먼저 괴인을 만나게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장염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 것이오?”
괴인의 질문에 장염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인연이 있습니다.”
공야숙은 장염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저 젊은 협객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다고 했다. 스승
은 자신의 검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과연 그렇겠구려. 스승께서 내게 하시려던 말씀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생각되오.”
“별 말씀을요. 제가 어찌 감히 도장의 스승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오, 나는 그대에게서 이미 스승의 체취를 느꼈소. 그것 하나라도 하늘에 감사할 일이 있으니 다행
이오.”
괴인이 유유히 흐르는 물살을 지켜보며 말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했소. 이제야 말이지만 나는 역천을 하려고 했던 것 같소. 그러나 그대와
인연이 닿아 스승의 가르침을 깨달았으니 이제 물처럼 살아보려 하오.”
“좋으신 생각입니다.”
말을 마친 괴인은 장염에게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를 한 후 객실로 들어갔다.
괴인의 뒷모습은 마치 무욕의 대욕을 이룬 사람같았다.
‘괴도사의 과거를 회복시킬 방법이 없을까?’
오행혈마인 둘이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거 서장의 혈마사에서 만난 노라마는 그들이 서
로 잡아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염은 과거를 잊고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괴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장염이 우려하던 그 일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바로 그
날 저녁 괴인이 꺼지듯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장경선은 육지로 두 척의 배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미 공력이 심후하여 산이든 들이든 배를 따라가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처음에는 장염의 이목에서 피하기 위해 멀리서 따라가며 가는 방향을 잠작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멀리서 며칠씩 따라가며 배의 항로를 보니 십중팔구 무한으로 가는 것이다. 배가 무한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되자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조금 뒤처지면 부지런히 경공으로 따라붙으면 되고, 그 반대
로 미리 가서 쉬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 장경선은 배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무혈에서는 처음으로 별동대보
다 앞서 달려가 강변에서 몇 시진 쉬다가 스쳐 지나가는 배를 지켜보기도 했다. 그날 밤은 그냥 강변에
서 푹 쉬기로 했다. 앞서 지나간 배는 날이 밝는 대로 부지런히 뒤쫓으면 된다.
그렇게 마음 먹은 장경선이 쉴 곳을 찾아 돌아다닐 때다. 누군가 따라붙은 느낌에 장경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저 무시무시한 장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이 달아나도 관여치 않던 장염이 이제
와 자신을 잡으려고 할 이유가 없다.
‘이 기도는 장염이 아니구나.’
장경선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지 긴장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니
장염을 만날 때도 이처럼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때는 얼마나 긴장했던지 손이 끈적할 정도로 땀을 흘렸
었다. 마침내 장경선이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냐?”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헤헤헤… 니가 나를 불렀니?”
그는 장염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공야숙이었다. 공야숙이 자신을 강력하게 잡아 끄는 기운에 이끌려
이곳까지 달려오고 만 것이다. 장염이 알았으면 땅을 칠 노릇이었으나 천리는 그렇게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장경선은 상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봉두난발한 머리도 그렇지만 말을 함에 있어 발음
이 불분명했다.
‘이런 심야에 내 뒤에 따라붙은 게 미친 사람이라니……’
장경선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왜 너를 부르겠느냐? 여기서 떠나거라.”
그러나 나이를 알 수 없는 괴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를 깜짝 놀라게할 소리를 했다.
“헤헤헤… 너도 사람을 먹었구나?”
“뭣이!”
장경선이 벼락같이 소리치며 괴인에게 쌍장을 날렸다. 자신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어 본 사내에게 두려
움을 느낀 것이다.
퍼펑!
장경선의 손바닥이 괴인의 가슴을 때리자 북 치는 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져다.
“아파! 왜 때려!”
공야숙이 돌연 검을 뽑아 들고 장경선에게 달려들었다.
달빛 아래 잔득 일그러진 장경선의 얼굴이 드러났다. 괴인은 자신의 오행혈마기가 깃든 공력을 정면으
로 받고도 쓰러지지 않은 것이다. 장염과는 또다른 느낌의 저 괴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장경선이 괴인의 검을 피하며 손바닥으로 열두 번이나 허공을 때렸다. 장경선의 성명절기인 섬전십이장
이었다.
퍼퍼퍼펑!
기운과 닿는 곳마다 찢어지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공야숙은 섬전십이장을 여덟 번 피했으나 네 번은
피하지 못했다.
퍼퍼퍼퍽!
장경선의 장풍은 공야숙의 몸에 끔찍한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공야숙은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
통 속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자는 누구며, 왜 나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공야숙이 철검을 품에 안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갑자기 돌변한 상대의 모습에 긴장한 장경선이 두 손바닥에 혈마기를 끌어 모았다. 공중에서 그런 장경
선을 보던 공야숙이 ‘아!’ 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저 두 손에 G힌 기운이 낯설지 않았다.
장경선이 두 손을 공중으로 밀어 올리자 두 줄기 강맹한 장력이 몰아쳤다.
콰아아아!
공야숙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검끝을 흔들기 시작했다.
“도는 음양의 큰 순리에 따르며!”
철검의 끝에서 하얀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매화는 달빛을 받으며 아래로 부드럽게 낙하했다.
꽈광! 꽝!
장경선은 장풍이 매화검기에 의해 터져 나가자 황급히 몸을 이동했다.
퍽! 퍽! 퍽! 퍽!
장경선이 서 있던 자리에 여섯 송이 매화 문양이 새겨졌다.
장경선의 두 손이 다시 한차례 허공으로 솟구쳤다.
슈슈슈슉!
장력은 꿈틀거리며 공야숙의 몸으로 밀려갔다. 장력이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는 전설의 회선장이었다.
“도는 때에 따라 움직이고!”
밤하늘에 또다시 한 무더기 매화가 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장력과 매화검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
리지 않았다. 장력은 교묘하게 매화 사이를 돌아 공야숙의 머리와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공야숙이 철검을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항상 사물에 응하여 변화한다.”
회선장이 공야숙의 몸을 강타한 순간 공야숙의 몸에서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허공에 있는 공야숙이
마치 한 그루 매화나무가 된 듯했다. 그의 팔과 다리와 가스에서 매화가 피어나 사방팔방으로 날아들었
다.
퍼퍼퍼펑!
공야숙은 머리와 가슴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매화검기와 회선장이 너무 가까이에서 폭발한 것이다. 그
때 공야숙은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떠올리고 싶어하던 과거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죽어도 기억하고 싶
지 않은 지나온 날들이었다.
“끄아아아!”
지면에 내려선 공야숙의 두 눈에서 혈광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더 이상 공야숙은 철검으로 매화검기를
날리지 않았다.
화산파의 대사부인 서검자가웃으며 말했다.
“알겠느냐? 매화삼십육검은 음양의 순리를 따르며, 때에 따라 움직이고, 항상 사물에 응하여 변화한다.”
공야숙은 그 앞에서 ‘네’ 라고 대답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렇다 . 나는 화산파의 공야숙이다!’
공야숙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혈광이 점점 짙어졌다.
‘이십여 년 전, 나는 강서성 옥산에 마공 비급을 회수하려 갔었다. 그러나 비급을 찾은 나는 그만 호기
심을 참지 못하고 그만….. 보고야 말았다.’
비극은 이십여 년 전 호기심으로 마경의 책장을 넘길 때 시작되었다. 마공 구결이 공야숙의 머리에 박
혀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지워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은 조금씩 마공 구결대로 천지
간의 오행지기 중 금의 기운을 끌어 모으로 있었다.
비록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몸에 쌓인 오행지기는 더 많은 기운을 원했다. 그때부터 공야숙은
무림맹으로 귀환하지 않고 무림을 떠돌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이 기운을 일으켰으나 나중에는 기운이 기
운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 년 쯤 지나 마침내 오행지기 금의 기운이 이성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공야숙은 흡혈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야숙은 도를 닦던 도사다. 가끔씩 무상의 도력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공야숙은 점점 마
물로 변해가는 자신을 스스로 없애기로 결심했다.
‘무공산에서 나는 내 손으로 머리를 부수었다.’
그런데 하늘은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던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아직도 죽지 않고 강
호를 떠돌고 있었다. 아마도 금의 기운이 머리가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막았던 모양이다.
‘큰일이다. 혈마기가 다시 정신을 지배하려고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오행혈마기가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죽으려고했던 것
조차 의미가 없어진다. 어느 때에 다시 맑은 정신을 차리게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마물이 될 수는 없다.’
마침내 장경선은 상대로 자신과 같은 오행혈마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된다. 장경선이 오행지기 천간목의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두 손을 휘두르자
공야숙의 발 밑에서 뿌리가 솟아 나와 그의 온몸을 친친 감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공야숙은 장경선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눈으로 더욱 짙은 혈광을 뿌렸다. 마음으로는 어서 죽었으면 하
는데 몸은 죽지 않으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공야숙은 상대가 자신을 어서 죽여주길 바랬다. 공야숙의
바램이 간절할수록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광도 짙어졌다.
“죽어랏!”
마침내 장경선이 두 손을 광포하게 휘둘렀다. 그 짧은 순간 공야숙은 자신의 몸이 의지를 떠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보았다.
‘아아, 생명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러고 보니 이런 생명들이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공야숙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의 죽음은 이 아름다운 생명을 버려야 할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인
가? 그러나 자신이 살아 있으면 더 많은 생명이 다치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살리기 위해 나는 나를 버린다.’
장경선의 손이 공야숙의 가슴을 강타했다.
펑!
“크윽!”
장경선은 공야숙의 가슴에 손끝이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힘을 강하게 주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장
경선의 손이 공야숙의 심장을 향해 스스로 파고들었다.
푸욱.
그 순간 장경선의 눈에서 혈광이 쭉 뻗어 나왔다. 이제는 마기가 다른 마기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장경
선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공야숙의 심장을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감겨 있던 공야숙의 눈이 천천히 떠졌
다. 장경선이 차마 공야숙의 맑은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생사는 순간임을 알라.”
그 말을 끝으로 감겨진 공야숙의 눈은 다시 뜨여지지 않았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장경선이 손에 들린 심장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심장은 한순간에 장경선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심장을 다 먹어치우자 장경선의 몸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고통을 견디지 못한 장경선이 땅으로 뒹굴자 흙과 돌이 녹아버렸다. 그가 굴러가는 곳마다 땅이 패이고
초목이 불타올랐다. 그렇게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장경선의 몸이 장강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달빛이 부글
거리는 수면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수면으로 떠오르는 기포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부글부글부글.
다음 순간 장강을 가르며 한 사람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촤아아아!
그 사람은 허공에서 서서히 수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과연 장경선이었다.
장경선은 잠시 강물위에서 공야숙과 싸우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이 마지막 말은 이해할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살아 남았는가 하는 것이다.
“크하하하핫!”
장경선이 호탕하게 웃으며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오행혈마인의 비밀을 알게된 것이다. 오
행혈마인은 본래 다섯이 아니라 하나였다. 공야숙은 자신보다 뛰어났지만 스스로 살기를 포기한 사람 같
았다. 그의 금기는 자신의 목기보다 강해 보였지만 삶을 포기한 사람은 누구도 이길 수없다.
“흥!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몰랐나 보군.”
중얼거리던 장경선이 강줄기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간 중원 각지에 떨어져 있던 오행혈마인들은 거대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장소는 곤하게 자다
말고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에 벌떡 일어났다. 심장에 전해지는 통증은 거의 반 각이나 지속되었다. 반
각쯤 지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개운해졌지만 장소는 알 수 있었다.
‘오행지기 중의 하나가 사라졌다!’
서로 간의 견제와 균형을 잡아주던 오행혈마인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그가 사라지자 이전보다 더욱
강해진 오행지기가 느껴졌다.
‘아뿔사! 어느 놈이 선수를 쳤구나!’
명오도 비룔장의 자기 처소에서 가슴을 쥐어뜯다가 통증이 사라진 뒤에야 오행의 균형이 무너졌음을
깨달았다. 균형이 무너졌다는 것은 오행지기가 합쳐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제야 명오는 바닥을 치며
후회했다. 그 사실을 왜 나만 몰랐던가!
만약 오행혈마기가 견제와 균형을 넘어서 합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다른 오행혈마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명오는 이제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 시작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싸움은 다른 누구
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싸움이었다.
소화촌의 제갈위기도 폐관 중에 통증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도 통증의 시간이 지나간 뒤
에 누군가 오행지기를 흡수했음을 직감했다.
‘어차피 오행지기는 음양이기에서 나왔고, 음양이기는 무극에서 나왔으니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것이
었다. 다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냐는 것인데…. 내가 다른 오행혈마인을 만나면 그의 오행지기를 흡수
할 수 있을까?’
제갈위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쯤 다른 오행혈마인들도 오행지기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오행혈마기가 공존하는 줄로만 알았으나 공존이 아니라 독존이었다.
‘이 지독한 공력이 한데 모인다고 생각하면…….’
문득 제갈위기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는 인간에 머물지 않고 마신이 될 것이다. 제
갈위기는 자신이 너무 큰 일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했다. 이래서는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할지도 몰랐다.
더구나 다른 오행혈마인에게 조직력이라도 있다면 자신처럼 혼자 몸인 사람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제 10장 무욕의 대욕
오행지기 중에 둘을 지니게 된 장경선은 얼마 달리지 않아 별동대를 따라잡게 되었다. 장경선은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앞서 가는 배를 향해 다짜고짜 장풍을 날렸다.
콰콰콰쾅!
달밤에 조용히 미끌어지던 배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하자 상인과 무림인들이 갑판으로 뛰어나왔다.
“크하하하핫!”
공력이 담긴 장경선의 광소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자 물결이 흉흉하게 뛰놀기 시작했다. 장경선은 어차
피 무림맹과는 원한이 없다. 아니, 얼마 전까지 오히려 기습조를 보호하기까지 했다. 지금 사람들을 놀라
게 한 것은 자신의 공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다 보면 반드시 장염이 뛰쳐 나오리란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염은 반
드시 죽여야 했다. 물론 이미 경재학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
문에 그는 우선 경재학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장경선의 일장에 뱃머리가 파손되자 사람들이 우와좌왕하기 시작했다. 장경선은 겁먹고 웅성거리는 사
람들에게 소리쳤다.
“살고 싶으면 장염을 나에게 넘겨라.”
사람들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칠흑 같은 어둠뿐 어디에도 사람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림인들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강변이 배로부터 십 장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만약 그것에서 외치는 소리라면
그의 공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선실에서 잠들어 있던 장염이 지금의 소동을 모를 리가 없다. 사람들 틈에서 저방을 주시하던 장염이 천
천히 뱃전으로 걸어나갔다.
“그대는 누구시기에 나를 찾는 것이오? 나 하나 때문이라면 더이상 소동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오.”
장경선은 어둠 속에 은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염이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자 찔끔 놀라고
말았다.
‘아니, 저놈은 어떻게 되어 먹었기에 내가 보인단 말인가?’
장경선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소리쳤다.
“크하핫! 네게 담력이 있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말을 마친 장경선이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수면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
갑판과 뱃전에 서 있던 장사꾼들과 무림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사람
은 지금 강물을 밟고 달리고 있었다. 마치 전설에나 나올 법한 광경에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볼 때였다.
뱃전에 서 있던 장염이 강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별동대야 이미 장염의 무위를 알기에 눈을 빛내
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장사꾼들은 ‘앗! 사람이 물에 빠졌다!’ 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곧 입을 다물었다. 강물로 뛰어든 사내가 땅 위에 서 있듯 몸을 수면 위에 세우고 있었
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장염의 신형이 미끌어지듯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 위에서 바라보고 있던 춘양 진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등평도수!”
자신도 말로나 들었지 실제로 사람이 물 위를 미끌어지듯 달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장염
과 저 낮선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삽시간에 장염과 사내는 중인들의 눈앞
에서 사라져 버렸다.
장염이 사내의 뒤를 따라 물 위를 달린 지 일각쯤 되었을 때다. 사내가 돌연 몸을 돌려 육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장염은 처음부터 사내가 바로 오행혈마인이며 얼마 전에 자신의 생명을 노리던 자임을 알아보
았다. 그러나 그의 공력이 며칠 만에 초절해졌다고는 생각지 못했으므로 오늘 밤 그의 등장이 이해가 되
질 않았다.
‘아니, 저 사람은 나에게서 달아난 지 며칠이 되었다고 다시 나타난 것일까?’
게다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기습을 해도 상대가 안 될 텐데 지금은 그러지도 않고 있다는 것이
다.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무른 척하고 돌아갈 수도 없다. 큰 소동으로 자신을 유인했으니 끝까지 쫓아가
이유를 알아내고 말리라!
장염의 결심을 알기라도 한 듯 사내가 멈춰 섰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소?”
장경선이 피식 웃으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머리를 달라고 하면 주겠느냐!”
한순간에 장염의 전신으로 섬전십이장이 밀려들었다.
퍼퍼퍼펑!
장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장력이 저 혼자 장염의 몸 주위에 떨어지며 폭발음을 냈다.
“이형환위로구나!”
장경선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쌍장을 교차시켰다.
슈슈슈슉!
장염을 향해 기이한 소음과 함께 장풍이 밀려들었다. 장경선의 절학인 회선장이었다. 즈금의 회선장은
이전과 달리 그 움직임이 마치 영사와 같았다. 놀란 장염이 이형환위를 펼쳤으나 끝내 몸에 달라붙는 장
풍을 떨치지 못했다.
장염이 두 손을 벼락같이 뒤집었다. 그 순간 장염의 팔뚝을 타고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형성되어 회선장
과 맞부딪쳤다. 장염도 무당파의 절학인 회풍장을 펼친 것이다.
펑! 펑!
네 줄기 손바닥 바람이 허공에서 만나자 지축을 흔드는 두 번의 폭음이 울렸다.
그 순간 장염은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상대의 공력이 의외로 강했기 때문이다. 장경선은
한 걸음 물러나 히죽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이 한차례의 접전으로 자신이 장염에 비해 결코 하수가
아니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나의 천간목을 다시 받아볼 테냐!”
장경선이 조롱하듯 소리치며 두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사방의 나무들이 공중으로 날아 올라가기 시작
했다. 장경선의 손이 까딱이자 허공에 세워졌던 나무가 장염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갔다.
휘이이잉!
그 순간 장염도 지면으로 경천일기공의 공력을 쏟아 붓었다.
“하늘의 그물은 놓치는 것이 없다!”
경천일기 제일기공 천망부실!
삽시간에 땅속에서 도망이 솟구쳐 올랐다. 하늘로 올라가는 토망과 땅으로 떨어지던 나무가 중간에서
충돌했다.
꽈꽝! 꽝!
곳곳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게 웬일인가! 토망은 툭툭 끊어져 사방으로 흙가루를 뿌리는데,
나무는 변함없이 장염을 향해 꽃히고 있었다.
장염은 사내의 공력이 이전과 달라졌고, 또 나무에 깃든 것이 목기 하나가 아님을 깨달았다.
‘설마 벌써 괴도사가 저자에게 당한 것인가!’
그러나 나무는 장염에게 오래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펑! 퍼펑!
주변으로 떨어져 내리는 창끝 같은 나무를 피해 장염의 신형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기가 깃든
강철 같은 나무를 피하면서도 장염의 마음은 괴로웠다. 상대가 강해진 것보다도 그의 강함 뒤에 있을 괴
도사의 죽음 때문이었다.
대체 욕망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분주하게 피해 다니던 장염의 신형이 돌연 멈추었다.
장경선은 장염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냐, 잘 걸렸다!’
공중을 부유하던 나무에서 기괴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빠지지직! 티틱!
나무들이 극성으로 펼친 천간목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잘게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갈라져 나간
나무 파편들은 더욱 예리해서 마치 하나하나가 창끝 같았다.
“가라!”
장경선의 손짓에 따라 공중에 가득하던 나뭇조각들이 장염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쏴아아아!
분노한 장염이 머리 위로 청명검을 뽑아 올렸다.
“나의 뜻이니 검이여! 인간의 욕망을 쓸어버려라!”
어의통검의 묘!
무의무욕 기천기검!
장염이 청명검으로 기천검의 검기를 쏘아 올리자 검봉에 둥그런 빛무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점점 부풀어 오르던 검광이 마침내 폭발하듯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파츠츠츠츳!
빛이 닿는 곳에 있는 나무 조각들은 한순간 가루가 되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장염이 서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사방 십여 장에 뽀얀 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장염은 먼지
를 그대로 뒤집어쓰며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무욕의 대욕을 이룬 도사를 생각했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먼지가 다 가라앉기도 전에 장경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목기와 금기로도 장염
을 어쩔 수 없었으니,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장염에게 너무 놀란 장경선은 혹시라도 무
림맹에서 장염을 다시 만나게 될까 두려워 아예 귀주성으로 향했다.
* * *
제갈위기가 낙양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 것은 무림맹의 소문이 소화촌까지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은 모이기만 하면 천하오절과 장천사에 대해 떠들어 댔다. 간혹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옛날
의 제갈가가 있었다면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할 때는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오래전에 결정되었다. 지금 와 애석하게 여긴다고 해서 죽은 식솔들이 되살아날
리가 없는 것이다. 천하오절이 혈마사를 무찔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갈위기는 무림맹을 살펴볼 생각으
로 소화촌을 빠져나갔다.
‘구대문파와 무림맹의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될까?’
몇 번을 생각해도 소문만으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하남성 에서의 복수를 위해서도 무림맹의
피해나 생존자의 규모를 알아야 했다. 제갈위기는 사천성에서 온 무림인들 만큼은 아직도 살아 있기를
바랬다. 그들이 죽어버렸다면 당장 자신의 복수는 방향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낙양성에 들어선 제갈위기는 무림맹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럴수가! 오행의 기운이다!’
자신이 느꼈으면 상대도 자신의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제갈위기는 재빨리 몸을 틀어 사람들 속으로 파
묻혀 갔다. 며칠 전 오행지기 중 하나가 사라지고 두 기운이 하나로 뭉친 것을 느낀 뒤로 늘 조심해 왔
다. 그런데 지금 이토록 가까이 올 때까지 그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대체 이자는 누구이길래 오행지기를 그토록 완벽하게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상대의 능력에 놀란 제갈위기가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움직였다. 그러나 한번 가까이에서 느낀 오
행의 기운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자기를 찾았으며 따라붙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흥, 그렇다면 어디 따라와 봐라.’
상대가 오행혈마기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도 그렇다. 결과는 직접 맞부딪쳐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마침내 상대를 확인하기로 결정한 제갈위기는 한적한 소로로 접어들자 걸음을 멈추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따라다니지 말고 이제 그만 나오시는게 어떻소?”
말을 마치자 그의 앞뒤로 두 사람씩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나타나면서 작은 골목길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잠시 후 앞에 서 있던 삼십 대의 사내가 웃으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크하하핫! 네가 본제를 위해 기다려주다니….. 잘 생각했다.”
제갈위기는 사내의 말을 듣는 순간 언뜻 짚이는 생각이 있었다.
“그대는 마교의 교주가 아니오?”
장소는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 웃으며 제갈위기의 아래위를 훑어 보았다. 상대가 가진 오행지기의 힘을
가늠해 보고 있는 중이다.
‘대체 어떻게 저놈의 공력을 합칠 수 있다는 거야?’
장소가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가슴만 세차게 두근거릴 뿐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곧 알게 되겠지.’
제갈위기는 상대가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구석구석 바라보기만 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과연 이자는 오행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 쫓아온 것이로구나.’
제갈위기의 가슴도 아까부터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자기와 비슷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 눈앞에 나타
난 것이다. 어차피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금세 묘해져
버렸다. 누가 되든지 한 사람은 상대의 공력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흥! 네가 마교의 교주라고 해도 상관없다. 너와 나는 어차피 한번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냐? 흐흐흣!”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갈위기는 앞뒤를 막고 있는 세 명의 다른 노인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저자가
마교의 교주라면 이 세 노인들도 그 공력이 보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합공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저 오행지기를 지닌 자가 없다면 모를까. 지금은 자기 혼자서 이들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다.
제갈위기는 기회를 봐서 무조건 달아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체면 따위에 연연하지 않은 지 오래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갈위기가 슬그머니 무극토의 기운을 끌어올려 지면으로 흘려 보냈다.
혈수서생 이면수와 함께 사내의 퇴로를 막고 있던 검귀는 갑자기 땅이 출렁거리며 몸이 빠져들자 대경
실색하고 말았다.
“헛!”
대체 이게 무슨 공력이란 말인가! 검귀와 이면수가 허우적거리며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장소는 수하들 둘이 갑자기 땅속에서 허우적거리자 제갈위기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교주의 호신무공인
천마파천권이었다. 오행혈마기가 담긴 장소의 권에는 파천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콰콰콰콰!
권풍이 밀려들자 제갈위기는 허공으로 뛰어오른 뒤 검귀와 이면수의 머리 위를 타넘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크하하핫! 미련한 놈들!”
사내가 비웃으며 사라지자 흙은 더 이상 출렁거리지 않았다. 아니, 이번에는 갑자기 본래의 흙으로 돌
아오자 검귀와 이면수는 목만 남기도 묻힌 꼴이 되고 말았다. 검귀가 얼굴을 붉히며 공중으로 날아올랐
다. 검귀가 흙 속에서 빠져나가자 이면수도 곧 뛰쳐나왔다. 검귀와 이면수는 사내가 달아난 방향을 멍하
게 바라보고 이쓴 장소에게 허리를 숙였다.
“교주님, 죄송합니다.”
“…………”
검귀는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교주의 앞길을 막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전 처음 접한 공력에 놀라 미처 대응을 하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다.
“됐다. 저자의 오행지기가 흙의 기운이었다는 것을 몰랐으니 그런 것이다.”
사실 놀라기는 장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터득한 공령수의 공력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의 능
려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장소는 더 더욱 저 오행지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어찌 된 일인지 저놈은 내 기운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이번에 찾아낸다면 반드시…..’
제갈위기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사실 그랬다. 오행혈마인들은 끊임없이 오행의 기운을 내뿜고 있기에 서
로의 존재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장소의 몸에 있는 광마신단의 공력과 오행혈마기는 자주 충돌
했기에 장소의 몸에서 발산되는 오행의 기운은 늘 불규칙했다. 그래서 제갈위기는 장소가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장소는 제갈위기가 사라졌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제갈위기가 내뿜는 오행의 기운으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느긋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소화촌으로 되돌아온 제갈위기는 급히 소걸을 불러들였다.
소걸은 ‘오늘은 또 무얼 가르치시려고 저렇게 서두르시나?’ 싶어 짜증이 났다. 왜 스승은 자꾸만 무얼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일까? 소화촌의 어느 애들도 자기처럼 고달프게 뭔가를 배우지는 않는다. 어디 애
들뿐이랴? 개나 소나 닭도 뭔가를 배우지는 않는다.
‘그럼 나는 개만도 못하게 살고 있구나!’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던 소걸이 쭈삣거리며 제갈위기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부르셨어요?”
제갈위기는 강아지처럼 밖으로만 나도는 소걸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제갈가가 멸문당한 뒤 처음으로 정을 주고 함께 살아온 녀석이다. 그동안 쉬지 않고 보아온 녀석인데 오
늘 다시 보니 새록새록 정이 깊었다.
“오늘은 내가 너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제갈위기는 소걸에게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며 깨달은 이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갈위기가 말을 꺼낸
지 일각이 지나자 소걸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제갈위기는 소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하
고 웃고 말았다.
‘이제 보니 나는 천상 학자였나 보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소걸을 붙들고 ‘인생이 어떻고 공자의 가르침이 어떻고’를 늘어놓
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배운 자신의 학식으로도 자기의 인생을 가르침에 합당하게 살지 못했다.
제갈위기는 소걸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쩌면 이 녀석이야말로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갈지도 모르겠다. 많이 배운들 무엇하랴. 천리에
순응하지 못하고 세샹을 어지럽히는 나 같은 사람이 수두룩한 것을.’
제갈위기는 더 이상 소걸에게 훌륭한 이야기를 전하지 않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만큼 좋은 이야기
를 많이 아는 사람도 드문데 자기를 돌아보니 촌 무지렁이보다 더한 폐해를 끼치며 살아왔다. 배움이란
느 것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소걸을 바라보자 그제야 소걸의 천품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오! 아하하핫!”
소걸은 스승이 말을 멈춘 뒤 갑자기 웃기 시작하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또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준 모양이다.
“헤헤헤……”
소걸은 스승이 따분한 말을 하는 것보다 저렇게 웃는 편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암, 따분한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그만큼 따분한 거라구. 본래 말이란 마음에 담은 것을 입으로
꺼내는 거니깐.’
제갈위기가 한동안 대소를 터뜨리다가 소걸에게 말했다.
“이제 너와 나의 인연이 다한 것 같다. 너는 내가 가르쳐 준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느냐?”
“네!”
소걸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제갈위기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소걸이 자신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다. 그 어렵고 까다로운 내공의 구결과 쉬지 않고 가르쳐 온 인생의 진리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당연하다는 듯이 저렇게나 망설임없이 말이다.
“아하하하핫!”
얼마나 웃었는지 제갈위기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제갈위기는 눈가를 손끝으로 살짝 훔치고 소걸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나이가 어언 불혹에
접어들었다. 결혼을 하지 못해 당연히 자식이 없었지만 왠지 이 녀셕을 보니 남 같지가 않다.
‘가문이 온전했더라면… 내가 오행혈마경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 이런 자식도 있었을 테지.’
다급한 순간이 되자 자신의 인생에 남은 게 뭔가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을 찌
르는 학문도 무공도 결국은 끝까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제갈위기는 소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걸아, 내가 가르친 것은 다 잊어도 좋다. 그러나 나는 가끔씩 떠올려다오.”
소걸은 제갈위기의 말에 왠지 눈물이 핑그르르 돌고 말았다. 재빨리 고개를 떨구고 눈을 끔뻑거려 조금
고인 눈물을 말렸다.
‘누가 말하기를 싸나이는 세 번 울어야 한다고 그랬는데…..’
소걸이 고개를 떨구자 제갈위기가 다시 말했다.
“너는 지금 무림맹으로 가거라. 그리고 그곳에서 장염이라는 사람을 찾거라.”
소걸이 놀란 눈으로 제갈위기를 바라보았다. 스승이 지금 자신에게 소화촌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스승님, 왜 갑자기….”
“하하핫! 심부름을 보내는 것이다.”
그제야 소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런데 무슨 심부름이에요?”
“너는 무조건 그에게 여덟 번을 절하면 된다.”
소걸이 약간 의심이 간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끝이에요? 제가전해줘야 할 어려운 말 같은 거 없어요?”
“그래, 그게 전부다.”
소걸이 환하게 웃자 제갈위기가 말했다.
“네가 정말 그에게 여덟 번이나 절을 할 수 있을까?”
“그럼요! 제가 얼마나 동작이 빠른데요!”
“하하핫! 그래, 됐다. 나와 약속을 하자. 너는 그에게 여덟 번을 벌하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야
한다. 어떠냐? 감히 네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소걸은 ‘무슨 그런 이상한 약속이 다있어?’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여덟 번
만 절을 하면 되는데 누가 그걸 못할까! 게다가 자신은 혼자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것에는 이력이
난 사람이다.
‘헹! 내가 혼자라면 무서워할 줄 알고? 스승님이 나를 한참 잘못 봤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재빠른데,
못하게 하면 도망치면서라도 하고 말 거야.’
소걸에게 이번 스승의 심부름은 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재미있을 것이다. 제다가
상대가 싫어하면 할수록 절하는 재미가 붙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손해나는 심부름이 아니다.
게다가 스승의 감시에서 벗어나 낙양을 마음껏 구경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소걸이 떠난 그날 해질 무렵 소화촌을 찾아든 네 명의 외지인이 있었다. 아무리 외지인이 떠돌다가 가
는 소화촌이라고 해도 그들 네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눈에 금새 띄었다. 세 사람의 노인과 한 젊은이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그날 밤 소화춘은 난데없는 대참사를 겪어야 했다. 마을에 있는 집의 절반이 지진에 무너져 내렸고, 나
머지 절반은 광풍에 휘말려 주저앉았다. 술시초에 시작된 지진과 광풍은 해시말 까지 계속되었다. 소화
촌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무너진 집에 깔려 죽거나 지진과 광풍에 휘말려 죽었다.
천재지변이 얼마나 고약했던지 소화촌에서 가장 게으르기로 소문난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집터에
는 마치 거대한 뱀이라도 기어간 듯 선명한 자국이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흙과 돌이 녹아 꿈틀거리는 모
양을 만들고 있었다.
* * *
장강을 따라 가던 별동대는 무한에 도착한 뒤 다시 육로로 북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초,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하남성 무림맹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별동대는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중상을 입은 사람
들은 현지의 맡기고 왔는데, 그 수가 무려 맥여 명에 달했다. 결국 총인원 이백칠십구 명이 떠났으나 걸
어서 돌아온 자는 겨우 칠십삼 명이었다.
무림맹은 별동대가 무사귀환하자 떠들썩하게 환영식을 열었다. 그동안 소식이 끊겨 모두 죽은 줄 알았
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주산에서 무림맹으로 돌아오는 정상적인 길에서 아무도 별동대의 흔적ㅇ
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별동대가 무사귀환하자 무림첩에 의해 소집되었던 구대문파의 제자들도 하나둘씩 자파로 돌아갔다. 마
지막까지 무림맹에 남은 사람들은 구대문파 원로들과 맹에서 상주하며 일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얼굴에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마지막으로 장염과의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구대문파 사람들은 맹주가 장염에 대
해 부정적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과연 이번에 맹주가 영호화를 내어줄 것이냐로 설왕설래했다.
“장 사부, 아마 맹주도 이번에는 영화 소저를 돌려보낼 겝니다.”
파진 사태의 말에 장염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심관에 들러 함께 차를 마시자는 아미파 장문인
의 부탁을 받고 와보니 아미파의 원로뿐 아니라 춘??진인, 심방, 양극, 추료, 상유천, 영호성 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상유천이 장염을 향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미 마교도 자중지란을 일으켜 스스로 천산과 음산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더 이상 영호화 소저를 잡아
둘 명분이 없소.”
중인들이 ‘그렇고 말고’ 라고 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여기서 더 잡아두겠다고 하면 무림맹
이 분열되고 말 것이다.
정파인들만큼 명분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드물다. 이제 영호화를 잡아두는 일은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일이었다.
장염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무거웠다. 경재학은 처음부터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영화 소저를 잡아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이제 영화 소저를 순순히 놓아줄까?’
그리고 영화 소저를 구해내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무림의 분쟁이 해결되었으니 경재학
을 응징해야 하는데, 현재 경재학의 위치는 무림 맹주다. 그것도 보통의 맹주가 아니라 천하오절이라고
칭송이 자자한 인품과 덕망을 겸비한 정파의 지존이었다.
“사실 오늘 장 사부를 모신 것은 내일 맹주께서 마지막 결산을 하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장염이 파진 사태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내일이면 길고 긴 싸움의 끝이 나는 것인가!
“그런데 빈승은 장 사부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심껏 답해드리겠습니다.”
파진 사태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장 사부께서는 오래전부터 오행혈마인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장염이 고개를 끄덕이자 파진 사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마인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계신 듯했습니다. 제가 잘못 보았나요?”
“……”
장염이 찻잔을 들어 잠시 차 냄새를 음미하다가 대답했다.
“온갖 유위의 상은 꿈같고 아침 이슬같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파진 사태는 장염이 그것에 대해 경계할 뿐 더 깊이 말해 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염이
입을 굳게 다물자 중인들은 서로 오행혈마인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얼마전 제갈위기의 살행
을 경험한 바 있으므로 오행혈마인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통감하고 있었다.
“드릴 말씀은 마인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염이 말하자 무림인들의 대화가 뚝 끊어져 버렸다. 지금 현재 장염만큼 오행혈마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맞은편에서 춘양 진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 사숙, 그들이 끌어당기고 있다는 말은 혹시 오행지기가 뭉쳐지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역천의 힘으로 형성된 오행지기는 다섯이 아니라 셋입니다.”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사물을 관조하면 천지에 가득한 기운이 한눈에 보인다. 아침에 명상에 들었던 장
염은 지난 밤 또다시 오행지기가 뭉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행지기가 하나로 뭉치면…. 그 힘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마신지체가 되어 반인반마가 됩니다.”
무리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신지체라면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기사 한 사람의
능력도 그러할진대 다섯이 모이면 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 장 사부께서는 그를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파진 사태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묻자 장염이 씁쓰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하나가 된 마신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장염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무림에 누가 그의 상대가 될 수 있다는 말
인가!
“그렇다면 그들이 오행지기를 다 모으기 전에 처리해야 하지 않겠소?”
“…….”
상유천의 말은 논리적으로 옳았지만 누가 감히 오행혈마인을 상대한다는 말인가! 중인들이 장염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미 두사람이 오행지기를 모았다면 더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은 오행혈마인을 상대할 수 없
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오직 장염뿐인데 지금까지 무림맹은 그에게 못할 짓을 너무 많이 했다.
“비가 내리는군요.”
장염이 어색한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제야 무리들은 밖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
가 내리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그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마신이 탄생한다면 무림사에 다시
없는 저주가 분명하다.
상유천이 장염의 얼굴을 살피며 내심 중얼거렸다.
‘왜 하늘은 악신은 쉬지 않고 허락하면서 …. 신선은 내려주지 않는 것인가?’
다음날 날이 밝자 장염은 경재학이 주최하는 무림첩 결산에 참여하게 되었다. 태사의에앉아 천연덕스럽
게 회의를 진행하는 경재학을 보는 장염의 눈은 과거와 또 달라 보였다.
‘불쌍하다……’
장염의 눈에 경재학은 너무 불쌍해서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는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
고 자기 인생의 결과가 무엇으로 다가올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장염의 눈에는 저주받은 그
의 고단한 인생이 보였다. 그것은 진정 한 인간에게 저주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본진 칠백오십 명, 별동대 이백칠십구 명으로 총 일천이십구 명이 출전하여 사망이 오백삼십육 명이며,
중상이 이백오십이오.”
경재학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십여 년 전 보정산에서는 구백여 명이
출전하였으나 사망자가 이백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본 맹주의 잘못이오.”
“………”
맹주가 한 겸양의 말에 아무도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장문인과 원로들이 생각할 때 그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뻔뻔한 놈들! 제갈가는 저희들이 씨를 말려놓고 마치 모든 책임이 나에게만 있는 것처럼 여기는구나!’
욕설을 퍼붓던 경재학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 일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 소협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아울러 마교의
일이 원만히 처리되었고, 또 장 소협께서 헌신한 공로가 있으므로 천마후를 돌려보냈고, 무림맹에서는
앞으로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소. 물론 다른 장문인들의 반대가 없다면 말이외다.”
본래부터 경재학이 간절히 바랬지 다른 장문인들은 그 문제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 또다시 맹주
가 장문인들을 거론하자 상유천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누가 그토록 열심히 풍림장의 여식을 잡아두자고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맹주의 그 말씀에는 동의
하오.”
경재학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으나 이것이 혈마사의 일로 크게 신뢰를 잃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었다. 잠
시 침묵하고 있던 경재학이 손뼉을 한 번 치자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시비가 영호화를 데리고
나왔다.
“허허헛! 영화화 소저,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모시고 있어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따지고 보
면 오늘날 강호에서 무림맹보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소. 모든 일이 잘 풀렸으니 지나간 일들에 대해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말아 주시기 바랍외다.”
경재학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영화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사실 영화는 무림맹에 있으면서 맹
주가 얼마나 장염과 별동대에게 심하게 대했는지 알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가족들마저 이 일에 휘말
려들어 사지로 들어갔으니 그동안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장 오라버니…..”
장염이 초췌한 모습의 영화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더 고와지셨습니다.”
“………”
말없이 장염의 곁으로 다가간 영화가 장염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그러자 장염의 뒤쪽에 서 있던 영
호성이 헛기침을 했다.
“험, 험, 아비도 여기 있다.”
화들짝 놀란 영화는 그제야 얼른 달려가 영호성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
얼마 만에 안겨보는 아버지의 품인가! 영화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굴러떨어졌다. 이제 그리운 사람들
을 다시 만났고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무림맹에서 나가면 장 오라버니와 더불어 풍림장과 장가촌
모두를 둘러볼 것이다.
장염이 고개를 들어 태사의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경재학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대체 무엇을 믿고 영화 소저를 쉽게 내어준 것일까?’
영화 소저를 보내고 나면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이 될 줄을 알고 있는 것인가?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
을 것이다. 너의 이기적인 욕망에 휩쓸려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느냐!
그런 장염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경재학이 말했다.
“본 맹주는 그동안 무림의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오행혈마인의 뒤를 쫓아왔소. 그러다가 마침내 세명의
오행혈마인이 있는 곳을 알아내게 되었소.”
그렇지 않아도 오행혈마인을 걱정하던 상유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체 어디의 누구란 말이오?”
“내가 알아낸 것은 마교의 제천혈마 장소, 사천의 신기서생 제갈위기, 하남의 섬전수 장경선이오.”
잠시 뜸을 들이던 경재학이 말을 이었다.
“장소와 제갈위기는 하남성에 있고, 장경선은 귀주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소.”
장염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저 대마두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자신이 만든 오행혈마인을
감시해 왔는지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하나둘씩 그 정보를 흘려 무림맹을 좌지우지하고, 이제 자
신마저 그 올가미 속으로 몰아 넣으려 하고 있었다.
장문인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장염에게 모아졌다. 이미 무림에 장천사라고 소문이 난 것을 알 만한 사람
은 다 알고 있다. 장염의 능력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신룡 진인과 영천 상인, 그리고 파운신권조차도 기
대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들은 자신도 자신도 없으려니와 왜 팔대문파의 장문인이 그런 일에 직
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하핫! 맹주가 준비하신 것이 이것이오?”
장염이 웃음을 터뜨리며 묻자 경재학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기만 했다.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다는 장천
사의 이야기는 장염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 때문에 떠돌게 된 말일 게다. 그렇다면 팔대문파 장문인들
의 저 말없는 간청을 장염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그는 소문과 달리 장천사 장염이
아닐 것이다.
“나는 장 소협께서 이 시대의 장천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경재학의 말을 들으니 문득 짚이는 바가 있다.
“맹주는 앞으로도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을 잘 아시겠구려?”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알겠소? 다만 동도들에게 실망을 끼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뿐이오.”
장염에게는 ‘자신이 오행혈마인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는 말로 들렸다.
그리고 경재학은 실제로 자신의 말이 장염에게 그렇게 들리기를 바랬다. 그래야 장염과의 긴장된 관계
가 좀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장염을 쥐는 고삐가 느슨해지면 자신은 염라전으로 불려
가게 될 것이다.
경재학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총관에게 눈짓을 했다.
산전수전 목불인이 재빨리 다가와 장염 앞에 작은 목함을 내려놓았다.
“장 소협에게 무림맹과 정파 무림을 좌우할 수 있는 무상신패를 내드리겠소.”
말을 마친 경재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더 이상 장염과 대화를 할 이유가 없다. 저 무상신패를
내준 것은 그만큼 무림맹에서 장염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의 과장된 표현이다. 장염이 거절한다면 구대문
파와 무림맹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경재학은 그것이 아니더라도 장염이 오행혈마인을 찾아 떠날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것이 지금까지 자신을 있게 한 정치라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8권 목차
제 1장 말로는 전할수 없는 것이있다
제 2장 변화의 시작
제 3장 떠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제 4장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면 도에 이른다
제 5장 남족으로 가는 사람들
제 6장 도에 뜻을 두면 악은 생기지 않는다
제 7장 진성이 붉은 구름에 덮이다
제 8장 다시 서장으로 가다
제 9장 망자의 산
제 10장 오행혈마인의 비밀
제 1장 말로는 전할수 없는 것이 있다
장염이 경재학에게 무상신패를 받던 날 무림맹이라고 쓰인 황금빛 편액 앞에 어린 거지가 나타나다. 어
린 거지는 하루종일 원룡서생의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아 하품을 해댔다. 근면 성실한 우원룡서생의 입장
에서 보면 거지가 마치 자신을 감독하러 나온 꼴이었다.
“네 이놈! 네놈은 거지면 거지답게 어디 가서 구걸이라도 할 일이지, 왜 신성한 무림맹의 대문을 어지
럽히느냐!”
“저는 거지가 아니걸랑요.”
“…………”
‘허, 고 녀석 말대답을 참 싸가지없게도 한다.’
꾸짖는 어른의 가르침에 장난처럼 ‘거지가 아니걸랑요’ 라니, 어디 가서 전문적으로 정떨어지는 말을 배
워도 저보다 더 잘할 수는 없다.
“너를 보니 부모가 참 속깨나 썩었겠다.”
“저 아저씨, 모르시는 말씀 하시네. 속 썩은 사람은 저라구요. 부모 없이 자라 우라지게 고생했거든요.”
“…………”
‘이런 우라질!’
하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니 부모가 없다는데도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다른데 가서 놀아라!”
엄중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지가 물러나지 않자 원룡서생이 호통첬다.
“네 이놈! 어르신의 말씀이 들리지 않느냐!”
“스승님의 심부름으로 왔으니까 나도 손님이라구요!”
꼬마 거지는 원룡서생이 큰 소리를 치기가 무섭게 맞답아 소리쳤다. 무림에서 거지와 어린아이를 조심
하라는 말이 있다. 워낙 기인이 많아서 하는 말인데 가만 보니 이 녀석은 거지에 어린아이이기까지 하다.
원룡서생이 한풀 꺾인 소리로 물었다.
“그래, 누구를 찾아왔느냐?”
“아직 안 들어갈 거니까 몰라도 돼요.”
“…………..”
어린 거지는 다시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뭉기적거렸다.
‘허참, 나 같으면 들어가든지 다른 데 놀러 가든지 하겠구만, 저거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하릴없이 저렇게 뭉기적거리는 것이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일이던가! 한동안 지켜보던 원룡서생은 지루
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극악스러운 녀석이다! 언제고 들어오겠지.’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꾸벅꾸벅 졸던 원룡서생이 한기를 느끼고 깨어난 것은 거의 황혼 무렵이었다.
해거름이 되니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헛 ! 세상에, 아직까지 저러고 있다니….’
원룡서셍이 할 말을 잃고 어린 거지를 바라았다. 자신이 몇번이나 자세를 바꿔가며 졸고 있는 동안에도
어린 거지는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쯧쯧, 네 녀석도 안됐구나. 만일 무림세가에서 태어났더라면 그 끈질감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내공을
쌓았을 텐데…..”
어른도 견디기 힘든 한잘에 넋 놓고 앉아서 오래 버티기를 어린 꼬마가 하고 있었으니, 원룡서생이 감
탄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런 인내가 있다면 가부좌로 백 년 내공인들 못 쌓을까! 그러나 감탄만 하
고 있을 수도 없다. 슬슬 무림맹의 문을 닫고 들어갈 시간인 것이다.
“꼬마야, 이제 문을 닫을 생각인데… 그만 누국르 찾아왔는지 말해도 되지 않겠느냐?”
“내일 다시 올게요.”
어린 거지는 원룡서생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골목 귀퉁이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저 녀석은 누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원룡서생이 어이없는 얼굴로 방명록을 들어 그 위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
질 같아서는 즉시 뒤쫓아가 멱살을 잡고 ‘대체 네가 찾아온 사람이 누구냐?’ 고 묻고 싶었지만 참기로했
다. 어차피 누구든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약한 자식 같으니라구… 찾는 사람이 허접하기만 해봐라.’
손에 들고 있던 맛있는 음식이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원룡서생은 거지가 사라진 골목을 째려보았다. 이
제 어디 가서 오늘의 이 무료함과 허무함을 달랠 것인가!
‘오늘은 방명록을 사겠다고 찾아오는 정신 나간 녀석도 하나없군.’
하기사 생각해보면 보름 전에 팔아먹은 방명록 같은 것을 또 사겠다고 나설 작자가 있을 리 없다. 그게
무슨 명문이나 무림의 비급도 아닌데 누가 사겠다고 덤빌 것인가! 복사본이야 하루 공들이면 만들 수 있
으니 다른 사람이라도 방명록을 사겠다고 다려들면 베껴줄 용의가 있는데, 그 이루로 나서는 작자가 없
다.
‘음…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비싼 값을 불렀어야 했는데… 고작 은자 두 냥이라니…..’
원룡서생이 방명록을 품 안에 넣은 뒤 작은 탁자를 들어 올렸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고단했떤 하루를
마감해야 한다. 짐을 들고 들어가는 원룡서생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원룡서생은 다시 탁자를 들고 정문으로 나왔다. 어제처럼 어린 거지가 어슬렁거
리며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웬일인지 꼬마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어제 하루 심심해서 얼쩔거린
녀석이었던가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시 오마던 녀석이 점심 시간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오? 아침부터 몸이 편치 않아 보이오만.”
“총관 어른, 어쩐 일이십니까?”
원룡서생이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상대가 총관인 산전수전 목불인인 이상 어떻게 앉아서대화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상전에게 ‘어제저녁까지 깐죽거리던 어린 거지에게 한 방 먹여 주려고 벼르로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하
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씩 어리고 땡글땡글한 놈들을 보며 이상하게 뭉개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
어쩌면 어제의 거지 꼬마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모른다.
“흠, 그럼 다행이고.”
“헤헤……”
총관이 바라보자 원룡서생은 손바닥을 비비며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산전수전 목불인이 왠지 미심쩍다
는 듯 원룡서생을 바라 볼 때 멀리서 어기적거리며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앗! 그 녀석이다’
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원룡서생의 눈에서 한순간 광체가 쏟아져 나왔다. 무료한 업무에 재미와 긴장을
더해줄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총관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 시간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뿐.
어린 거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정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오후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기 시작했다. 적당
한 시간이 되자 원룡서생은 거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험험, 꼬마야. 오늘은 손님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는냐?”
원룡서생의 친절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꼬마가 대답했다.
“아저씨가 우리 스승님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죠? 난 더 놀다가 들어갈 거라구요.”
원룡서생은 속으로 이를 갈아붙이면서도 목불인의 앞이라 더욱 친근하게 웃어 보였다. 총관만 아니었으
면 벌써 손발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하하, 그러나 스승님의 심부름이면 어서 그 사람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는냐? 그리고 사실 무림맹의
정문에 너 같은 어린아이가 자꾸 나와서 놀고 있으면 어른들 보기에도 좋지 않고….”
원룡서생이 말을 하며 목불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자기가 말하는 어른이란 목불인을 의미하는 것이었으
니 이쯤에서 그가 한마디 던져 주면 어느 정도 거칠게 몰아붙일 생각이다. 과연 목불인은 자기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아니, 저 꼬마는 누군데 정문에 곰팡이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이오?”
총관이 곰팡이라고 했으니 이제 앞으로 벌어지는 사태는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다. 원룡서생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 꼬마는 스승의 심부름으로 맹에 왔다고 말은 하나,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으니 참으로 맹랑한 녀
석입니다. 그의 스승이나 맹에 있다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 답답하지 않으련만 끝내 말을 하지 않고 좀도
둑처럼 어슬렁거리기만 하니…..”
‘자꾸만 걸리적거려 뭉개 버리고 싶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원룡서생은 꿀꺽 삼켰다.
아직은 자신의 터무니없는 적개심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원룡서생은 다만 좀도둑이라는 말로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어허! 무림맹이 꼬마들의 놀이터가 아닌데… 어찌 저런 녀석을 그냥 두고 보았다는 말이오?”
말을 마친 목불인이 주변에 있던 무림맹의 경비 무사를 불렀다.
“너희는 왜 저 어린 거지가 얼쩡거리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냐? 설마 하니 저 꼬마가 개방의 전설
적인 고수라도 되는 줄 알고 있단 말이냐?”
총관의 질책이 떨어지자 경비 무사가 어린 거지에게 다가가 인상을 썼다.
“꼬마야, 여기서 어지간히 노닥거리고 이제 그만 집으로 가든지 안으로 들어가든지 해라. 너 때문에 죄
없는 어른들이 욕을 먹어서야 되겠느냐?”
“………”
이제는 말대꾸를 잘못하면 발길질이라도 떨어질 태세다. 분위기가 삭막해지자 어린 거지도 마침내 자리
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며 중얼거렸다.
“에구구구, 알았어요. 어차피 낙양에서 노는 것도 질려서 오늘쯤은 들어가려고 했어요.”
원룡서생은 거지가 정문으로 다가오자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원룡서생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실렸다.
“그래, 너는 누구며 찾아온 사람은 누구이기에 이처럼 오래도록 어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느냐? 어
디 그 고명한 이름들을 좀 들어보자꾸나.”
원룡서생이 손바닥을 비비며 바싹 다가갔다. 누구라도 원룡서생의 태도를 보면 그가 지금 단단히 벼르
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 야릇한 분위기가 어린 거지에게 전해지지 않을 리 없다. 문득 별 볼일 없는 스승을 생각하니 찾아가
라는 사람의 수준도 짐작이 간다. 앞뒤 생각없이 까불었는데 이제 잘못하면 낭패를 당할판이다. 위기를
느낀 거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싹싹하게 대답했다.
“에… 여러 어르신들, 감사하고, 죄송하고, 황송합니다. 저는…… 소걸이라고 하는 보잘것없는 어린아인
데요. 장염이라는 사람을 찾아왔어요.”
“…………”
그 순간 삐딱하게 서 있던 원룡서생이 자세를 바로 갖추었다.
어디 원룡서생뿐이랴! 못마땅한 얼굴로 소걸을 바라보던 목불인과 그의 곁에서 멀뚱이 서 있던 경비 무
사도 긴장한 얼굴이다. 의외의 대답에 놀란 원룡서생이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너는, 너는 감히…. 정말로 장 대협을 찾아왔다는 것이냐?”
본래는 ‘너의 스승이 감히 누군데 장 대협을 찾는냐?’ 고 물으려 했으나 상대를 모르니 마압ㄹ을 할 수
도 없다. 그러나 장염이 누구란 말인가!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현존하는 정사 양도의 최고수 이며, 그 행
동거지 하나하나가 비범하여 세상에서는 그를 장천사라고 부른다.
그가 알기로 장천사 장염과 인연이 닿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장천사의 주변에는 항상 명문정파
의 수장들이 진을 치고 있어 감히 그 근처에 가까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장천사 장염과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니, 차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원룡서생 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으로 소걸을 바로보던 목불인이 못 믿겠다는 듯 물었다.
“너의 스승이 누구길래 너를 장 대협에게 보냈단 말이냐?”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나절에 장염에게 무상신패를 전달하며 겨우 그의 얼굴을 살펴본 목불인이다.
장염은 그 뒤로 무당파의 숙소인 태청각에서 소림사, 화산파, 아미파, 무당파, 공동파의 장문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린 거지를 그에게 안내하기는 쉬운 일이나 아무나 데리고 갈수는 없다. 별동대가 복귀한 뒤로 무림맹
으로 찾아온 방문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장천사 장염의 소문을 듣고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일반인도 제법 있었는데 장염이 진짜 부적 속의 장천사인지 확인하고 싶어했
다.
원룡서생이야 그저 출입자의 명부를 받아 적으면 그만이나, 총관의 입장에서는 드나드는 사람 하나하나
를 일일이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는 총관 휘하의 몇몇 사람들이 정문 안쪽에서 방문자들을
선별하여 내전과 외전으로 안내했다. 내전은 주로 고명한 무림인들이 들어갔고, 외전은 일반인들이 호기
심으로 찾아왔다가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가는 식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총관이 없었다면 소걸이 들어간다 하여도 외전만 둘러보고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
금 총관이 있는 자리에서 분명히 장염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목불인은 어린 거지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
인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치를 살살 살피던소걸의 얼굴이 또다시 얄궂게 변해갔다. 무림맹의 사람들은 콧대가 높기로 유명해
어지간한 사람은 쳐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 장염이라는 사람에게 깍듯이 장 대협이라고 하고 있으니,
자기가 얼떨결에 찾아온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살짝 수그러들었던 기세가 봄날 햇살을 받은
새순처럼 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 스승님을 알고 싶으세요?”
목불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거지가 한 말의 진위도 알아내야 했지만, 자고로 유
명 인사의 신상 내역이란 알아둘수록 이득이었다.
“그걸 제가 아저씨에게 꼭 말해야만 되는 건 아니잖아요?”
“………”
소걸이 원룡서생과 목불인을 지나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에 남겨진 목불인이 똥 씹은 얼굴로 소리
쳤다.
“왜 말을 하려다가 마는 게냐?”
“다 말했잖아요, 더 알고 싶은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라구요.”
‘이런 빌어먹을 꼬마 녀석 같으니!’
목불인이 소걸의 뒤로 거칠게 따라붙었다.
“너, 정말로 스승의 심부름으로 온 것이 맞느냐? 만약에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너는 걸어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 정말 사람 못 믿으시기는…. 따라와 보면 알잖아요!”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를 빽 내지른 소걸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장염이라는 분을 만날 수 있죠?”
목불인은 잠시 갈등하기 시작했다. 이 어린 거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만약 이 거지가
무림의 대협객이며 살아있는 신선인 장염을 만나기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그러나 교활한 꼬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장염의 앞까지 안내를 해야 한다.
‘그것도 정중히 말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목불인이 망설일 때다.
소걸이 그런 목불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남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요.”
목불인은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보고 아주 잠시라도 의심했다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렇다, 어린아이가 이런 일을 가지고 어른을 속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동안 너무 속고 속이는 어른들의 틈 속에서 지내다 보니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 목불
인이 소걸에게 다가가 그이 어깨를 ‘툭툭’ 쳐 보이고는 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길을 안내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걸은 의연한 자세로 목불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제 스승이 명령한 징염을 만나 여덟 번 절
하기는 거의 끝난 것이다.
그 시간 장염은 태청각에서 장문인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경재학을 생각하면 무림맹에 더 머무르
고 싶지도 않았지만, 오대문파 장문인들이 장염을 놓아주지 않았다.
“허허헛! 풍림장주와 영화 소저가 목 빠지게 기다릴 텐데, 우리가 너무 잡아둔 것이 어니오?”
화산파의 장문인 상유천이 웃으며 말하자 좌중이 일제히 장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함께 점심을
먹은 이후로 계속해서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이런 식의 농담에 익숙치 않은 장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하, 두 분이 그렇게까지 저를 기다리실 리가 있겠습니가?”
아미파 장문인 파진 사태가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말했다.
“그러나 그분들이 아무리 장 사부를 기다리고 있다 해도 소승은 쉽게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어디 이런 기회가 흔한 것이랍니까?”
태청각의 실내에 앉은 장문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염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런 무림의 일대기인과
함께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무림맹에서 서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기약이 없기에 그
들은 조금이라도 더 장염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장염을 바라보던 춘양 진인이 생
각났다는 듯 물었다.
“오늘 무림맹에서 나가시면 장가촌에는 언제쯤 들를 생각이십니까?”
장염 사숙은 무림맹을 나서면 곧바로 가족들과 재회하려 할 것이 틀림없다. 무림의 큰 분쟁이 대부분
해소되기도 했지만 오행혈마인에 대한 맹주의 정보가 추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상신패를 건네주고 자리
를 떠났던 경재학은 장염과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실내에서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황급히 되돌아왔다. 그
리고 ‘감시해 오던 하남성의 오행혈마인 제갈위기가 사라졌고, 장경선은 귀주성으로 향하고 있소이다. 지
금 장 대협이 귀주성으로 가준다면 무림맹의 정보원들을 통해 장경선의 소재를 알려주겠소이다.’ 라고
말했다.
귀주성으로 가려면 반드시 호북성을 경우해야 하는데, 호북성에 들른 장염이 반드시 장가촌에 들를 것
이다. 장염이 장가촌에 간다는 것은 무당파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장가촌이 무당파의 관할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고, 장염은 무당파의 큰어른이다. 어찌 문파의 어른이 무당파 지역에 모무르시는데 수수방
관할 수 있단 말인가!
“글쎄요, 귀주성으로 가기 전에 들러볼 생각입니다만,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미 춘양 진인의 마음을 꿰뚫어본 장염이다. 번거로운 것을 극히 꺼려하는 장염이 춘양 진인에게 ‘언
제쯤 갈 것이다’ 라고 미리 알려줄 리가 없다.
춘양 진인은 씁쓰름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장 사숙이 그런 접대를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
고 있었지만, 장문인의 입장에서 묻지 않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사숙께서 장가촌을 떠나온 지도 벌써 오 년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자들을 시켜 가족 분
들께 미리 연락이라도 해 놓을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대답하는 장염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오 년 전 자신은 열한 명의 친인들과 함께 장가촌에서 강호로 나
왔다. 그러나 그중 겨우 세 명이 살아남았고 한 사람은 차마 못할 짓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런
데 어찌 자신만 무사 귀환하게 되었다고 즐거워할 것인가!
“부친께 이미 언제쯤 가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허헛! 언제 기별을 보냈습니까? 장 사숙의 곁에 그처럼 발 빠른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몰랐습니
다.”
춘양 진인이 너털웃음르 터뜨리며 바라보았다.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해 섭섭하기도 했지만 대체 언제
따로 사람을 보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마음만이라도 앞서 보냈지요.”
“………..”
춘양 진인과 주변의 장문인들이 일제히 장염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보냈다니, 듣기에 참 무난하고 좋은
말이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 했다면 그저 관념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장염의 말은 언제나 현실
이었기에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숙께서 마음만으로 뜻을 보내셨다니….. 미처 몰랐습니다.”
“……….”
장염은 춘양 진인의 말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에게 호기
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지금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꺼내면 또다시 자신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
가 세간에 떠돌 것이다. 그럴 바에야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미타불… 장 대협의 말씀을 들으니 이미 그 수행이 깊어 말로는 전해지지 않을 것 같구려.”
“선사께서는 장 사숙의 웃음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습니까?”
원정 선사가 춘양 진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일 어떠한 사람이 말하되 여래께서 설한 바 법이 있다 하면 곧 부처르 비방
함이라 능히 나의 설한 바를 알지 못한 연고니라’ 고 했습니다. 설법이란 것은 ‘가히 설할 법이 없을 때
그것을 설법이라 이름한다’ 고 하셨지요. 그것은 도가에서 ‘도를 도라고 말할 때 그것은 더이상 도가 아
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상유천이 웃으며 원정 선사의 말을 받았다.
“허허헛! 그것이야말로 아는 자는 떠벌이지 않고 떠벌리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오?”
장염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붉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얘기가 어디
까지 갈지 알 수가 없다. 장염은 황급히 두 손을 휘저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막았다.
“어이쿠! 저는 아직 부족함이 많아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것뿐이니 두 분께서는 너무 저를 치켜세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춘양 진인은 그제야 장염이 너무 깊은 이치라 드러내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에게는 자
기가 이해할 수있는 인식의 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장 사숙에게 연허합도를 들었을
때에도 깨달을 수 없었다.
‘장 사숙에게 마음을 보내는 방법이라도 배워보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은 이미 ‘허를 단련하여 도에 이른다’ 라는 한마디 속에 있는 것이었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잠시 ‘장염의 마음 공부가 대체 어디까지 이른 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제 삼십을 바라보는 나이를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는 성취였다. 그렇게 태청각에 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장염의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장 대협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스승의 심부름으로 왔다는 아이인데, 어찌할까요?”
마당에서 들리는 목불인의 소리에 장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강호에서 인연이 닿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시 만난 뒤다. 그런데 스승의 심부름이라니 도통 이해
할 수 없는 사연이다.
장염은 태청각 밖으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딛다가 ‘헛!’ 하고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분이 장 대협이시다’ 라는 목불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어린 거지가 달려들어 무작정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헉!”
지켜보던 목불인이 치를 떨며 소걸에게 달려들었다. 이 어린 거지의 절하는 것을 보니 장 대협을 사부
로 모시려고 작정한 철부지가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토록 많은 절을 할 것인가!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어른을 속이려 들어!”
“어어? 뭐예요! 놔요, 놔!”
목불인이 소걸의 상체를 뒤에서 끌어안아 더 이상 절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버둥거리는 소걸을 안고
있는 목불인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갔다. 무림맹의 총관으로 이십여 년은 지내면서 공도 없었지만 과도
없었는데 오늘 그만 이처럼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입 다물고 얌전히 있거라!”
‘내 이놈을 가만 두면 더 이상 목씨가 아니다!’
속으로 이를 갈며 소걸을 끌고 가는 목불인에게 장염이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
목불인이 황송하다는 듯 소걸을 내려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에 들으니 스승의 심부름이라던데…. 스승이 누구며 그 심부름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 말해
보거라.”
소걸이 목불인을 아래위로 흘겨보다가 장염에게 대답했다.
“스승님은 절을 여덟 번을 하라고 했는데 저는 다섯 번밖에 못했어요. 지금 세 번 더하고 말하면 안돼
요?”
장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소걸이 세 번의 절을 다 마친 후 말했다.
“스승님의 이름은……”
말을 하던 소걸이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스승의 이름 석 자도 모르고 지낸
것이다. 어차피 절을 했으니 스승과의 약속은 지킨 셈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무사히 벗어나기 위해서
는 이름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들은 기억이 없는데 어찌 말하랴!
“……….”
“하하핫! 너의 스승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면 내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지 않
겠느냐?”
소걸이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도록 마주치며 대답했다.
“맞다,맞아! 음……. 스승님은 조금 지저분하구요. 잔소리를 많이 하시구요. 자끔 무섭기도 한데요….”
소걸은 자신이 너무 나쁜 소리만 했다가 훗날 스승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다 싶어 재빨리 말을 덧붙
였다.
“그래도 마음은 착한 분이에요.”
“하하핫!”
태청각에서 나와 지켜보던 장문인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렇게 말해서야 그 스승이 누군
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ㅏㄷ.
“그렇다면 너는 스승에게 무엇을 배웠느냐?”
“오행토납법이요.”
그 순간 부드러운 미소를 띠던 장문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오행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던 장염이 진지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너는 스승과 낙양에 온 지 오래되지 않았겠구나?”
“네, 이월경에 왔으니까…. 아홉 달 정도 됐네요.”
“가까이 오너라.”
장염이 쭈뼛거리며 다가온 소걸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역시……’
소걸의 몸에 흐르는 기운은 일반적인 내력이 아니었다. 장염이 무극지기를 살짝 흘려보내자 소걸의 몸
에서 다섯 가지 기운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무극지기에 대항했다.
“으음…..”
소걸이 손목을 타고 흘러들던 짜릿한 기운에 놀라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제야 장염이 잡았던 손을
놓고 한걸음 물러났다.
“이제 가도 되는 거죠?”
장염은 소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저 어린아이의 말과 내공을 볼때 그의 스
승이란 사람은 제갈위기가 분명했다.
‘그런데 제갈위기가 왜 나에게 그의 제자를 보냈단 말인가?’
더구나 여덟 번의 절이라니, 마치 제갈위기가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제갈위기
는 무림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드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제자를 보내 한 일이다. 겨우 절 한 가지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아!”
한참 동안 생각하던 장염이 구부정하게 서 있는 소걸의 목덜미를 바라보다가 탄성을 터뜨렸다. 저 모습
은 십육 년 전의 자신과 무척이나 닮아 보였다. 눈앞에 서 있는 볼품없이 삐쩍 마른 어린몸은 미래에 대
한 불안을 가득 담고 있다. 장염은 소걸에서거 조마조마하게 살아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다. 그
리고 그제야 제갈위기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제갈위기는 이 아이를 나에게 맡기고 싶었던 것이다.’
장염은 오행지기의 아이를 맡아서 키울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림
에 다시없는 오행의 내공술을 전했으니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가문이
정파무림인에 의해 멸문당했으니 믿을 만한 무림인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제갈위기는 그때 죽은 것이었구나.’
오행지기가 뭉쳐지던 그날 제갈위기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
길 것을 감지하고 제자를 보낸 것이다. 여덟 번의 절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에 맡긴다는
것이리라.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여기든지 말이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소걸이라고 하는데요.”
“……….”
장염은 멀뚱하게 서있는 소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그리고 잠시 후 소걸의 눈빛 너머에 있는 무한의 자
유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평생 갈고닦은 나의 무극지기조차 저 자유를 다 포용할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웃음이 흘러 나왔다. 지금까지 무극지기와 자유 의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자신의 무공도 의지를 초월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지만, 저 자유 의지도 과연 같은 길에 서있는 것
일까? 문득 장염은 제갈위기가 자신에게 너무 큰 짐을 맡겼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소걸아, 너는 나에게 한 번의 절을 더 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너를 보낸 스승의 뜻이다.”
잠시 손가락을 꼽아가며 숫자를 세던 소걸이 물었다.
“그럼, 대협이 저의 스승이 되는 건가요?”
“그렇단다.”
“………..”
소걸에게 있어 여덟 번에서 한 번 더 절을 한다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미 세 명의
스승을 두었으니 한 명 더 생긴들 어떠랴! 뭐든지 처음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것이다. 한
번 더 절을 하는 것이 스승의 뜻이라고 하자, 소걸은 주저없이 장염에게 절을 올렸다. 그렇게 해서 장염
은 정식으로 소걸을 제자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 * *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어깨 너머로 내려갈 무렵, 많은 사람들이 무림맹의 문을 나섰다. 공동파 사람들은
공동산으로 돌아가 문파를 재건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추료는 벽운산장의 제자들을 이끌고 광료와 함
께 당분간 공동산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수계현에서부터 따라나선 벽운산장의 제자들도 더 많은 공부가
필요했기에 주저없이 공동산으로 가는 스승의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
아미파도 제자들을 이끌고 아미산으로 돌아갔는데, 파진 사태는 몇 번이고 장염에게 찾아와 다시 아미
파로 들려주십사 당부를 했다. 파진 사태는 장염이 아미파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한
동안 장염이 아미산에서 무공지도를 해준 덕분에 희생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십 년 전에는
생존자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적지 않은 숫자가 살아남았다.
장염이 정문을 나서자 이무심과 소걸, 향이, 하후연, 지염도가 곁으로 다가왔다. 이무심과 소걸은 장염
과 동향이거나 제자이니 함께 가는 것이 당연했고, 향이의 경우 마땅히 갈 곳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향이가 가는 길을 지염도가 외면할 리가 없고, 무림에서이미 징염도와 한 쌍을 이룬 하후연이 따로 떨어
져 나갈 이유가 없다.
“장 대협은 어디로 가실 작정이시오?”
무림맹의 현판 아래에서 영호성이 장염을 바라보았다. 대협이라고 하자니 어색했지만 무림의 배분이나
명성으로 보아 아직은 달리 부를 호칭이 없었다.
“………..”
영호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거의 모두 떠나가고 남은 사람은 장염 주변의 사람과 풍림장뿐이다.
풍림장은 호북성 무한에 자리 잡고 있으니 당연히 호북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 지금 무상신패의 주인인
장염이 어디로 갈지를 정하면 이 자리에서 헤어져야 했다.
“제자와 함께 소화촌을 방문한 뒤에 호북으로 가려 합니다.”
오행혈마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지만, 긴 여행에 앞서 부모님을 뵈어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헛! 그렇다면 우리 풍림장이 호북까지 동행을 청해도 괜찮겠소이까?”
“별 말씀을요. 길눈이 어두운 저를 이끌어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영화가 향이의 곁에 다가가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향 언니, 다행이에요. 저만 홀로 가게 되었으면 섭섭했을 거에요.”
“그럴리가 있나요.”
향이가 영화의 손을 꼭 붙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혼자 떨어져 나가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
이다. 감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부터 영화가 자신을 친언니처럼 따른다는 것에 감사했다. 만약
영화와 어색한 관계였다면 장염의 곁에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다.
무림맹을 떠나온 일행이 소화촌에 도착한 때는 유시말이다. 멀리 소화촌을 앞에 두고 밝기만 했던 소걸
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소화촌 일대는 군대가 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황폐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나없는 동안에 무슨 난리라도 났나?”
소걸이 무녀져 내린 소화촌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네…. 스승님, 원래 우리 소화촌은 이렇지는 않구요. 이보다는 형편이 좋았걸랑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장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야말로 오행지기가 합쳐진 바로 그자리였다. 하남
성에서 오행혈마인이 합체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불안안 얼굴로 사방을 살피던 소걸이 다람쥐처럼 한쪽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스승님! 스승님! 제가절을 다 했다구요!”
다려가던 소걸은 속으로 ‘한번이나 더 했어요!’ 라고 중얼거렸다. 여덟 번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겠지
만, 자신은 무려 아홉 번이나 한 것이다. 스승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자기를 다시 바라볼것이다.
“스승님!”
장염이 보니 소걸은 한자리에서 맴돌며 어짜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살던 집이
없어진 것이다.
“어…. ? 이상하다. 분명히 이 근처였는데…. 집이 없어졌네?”
장염이 주위를 둘러보니 집이 있던 흔적도 없이 사방의 땅이 초토화되었는데, 유독 한 가운데만 비 온
뒤에 거대한 구렁이라도 지나간 듯 흙과 돌이 녹은 위로 구불텅거린 흔적이 있었다.
“어이쿠, 너는 그 집에 살던 아이구나!”
소걸을 알아보고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저씨,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혹시 저랑 같이 살던 스승님을 못 보셨어요?”
빌어먹는 복장을 한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슬금슬금 다가와 소걸에게 말했다.
“너, 어디를 다녀온 게냐? 운도 좋지. 며칠 전 땅이 뒤집히고 벼락이 차던 밤에 마을 사람들 절반이 묻
혀 죽었단다. 너와 함께 살던 사람은 그중에도 비참하게 죽어서 다들…..”
“뭐하구요? 우리 스승님이 죽었다구요?”
사내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은 남자의 시신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다. 사내는 용케 토사에 묻히지는 않았지만, 팔다리가 덜렁거리고 가슴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스승님은 객잔이 무너졌을 때도 혼자 살아난 사람이라구요! 제게 말도 없이 죽을
분이 아니에요!”
“……….”
장염이 머뭇거리는 사내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내는 과장된 몸짓으로 부르르 떨어 보이고 자기가 본 모습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건 장염과
영호성, 이무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과연 그는 오행혈마인에게 오행지기를 빼앗기고 죽은 것이 틀림없
다. 그런데 가슴에 구멍이라니?
사내는 소걸에게 ‘너와 함께 살던 사람은 이미 죽었다’ 라고 말한 뒤 사람들을 근처에 있는 작은 봉분
으로 안내했다.
“그 사람은 따로 이곳에 묻어주었습니다.”
사실 소화촌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한곳에 묻혔다. 그러나 제갈위기의 경우 그의 시신이 워낙
늦게 발견된 데다가 그 시체도 처참해서 멀리 옮기지 못하고 근처에 따로 묻었던 것이다.
소걸은 사내가 가리키는 작은 봉분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곳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흙더미가 있
을 뿐이다. 스승의 무덤이라서 그런가? 가만히 바라보니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듯하다.
‘아! 스승님이 진짜 죽고 말았구나.’
털썩.
소걸의 작은 몸뚱어리가 흙더미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어… 어… 스승님. 저 왔어요.”
그간 적지 않은 죽음을 보았다. 자기 앞에서 죽은 스승만 두 사람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소걸은 이상하게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
죽은 사람하고는 대화가 되질 않는다. 어린 소걸은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 어…… ‘ 만 몇 번
반복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장염이 소걸에게 다가가 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네 스승께 인사를 하고 가자꾸나, 네가 스승을 잊지 않으면 스승도 너를 기억해 줄 것이다.”
“네에…….”
소걸이 나지막이 대답하고 천천히 절을 올렸다. 소걸의 귀로 며칠 전 스승이 했던 말이 들리는 듯 했다.
“걸아, 내가 가르친 것은 다 잊어도 좋다. 그러나 나는 가끔씩 떠올려다오.”
그때는 왜 그런 소리를 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 그 말을 알았다는 건 아니다. 단지 소걸
은 평생 스승의 얼굴과 그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평생…..잊지 않을 거예요.”
다짐하는 소걸의 얼굴로 두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스승은 자기 마음속에만 남은 것이다.
자기가 잠시라도 스승을 잊으면 스승은 없는 것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이…. 이게 뭐야.’
소걸이 꼬질꼬질한 옷깃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아무리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해도 따질 상대가 없었다.
소걸이 씩씩거리며 눈물을 훔쳐 내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떠나갔다.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 인사
가 끝났으니 더 이상 소화촌에 있을 이유가 없다.
훌쩍이는 소걸을 바라보던 장염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사람의 죽음도 서글프지만,
그의 죽음 뒤에 담겨 있는 오행지기의 합체를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졌다. 하남성의 제갈위기가 사려졌
으니 경재학에게 들은 정보가 맞다면 속히 귀주성으로 가야 한다. 지금 장염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귀
주성이 호북성을 경유해서 가야 한다는 정도였다.
일행이 호북성에 진입한 지 이틀쯤 되었을 때다.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장염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화가 다가와 속삭이고 있었다.
“저어….. 장 오라버니, 여기서 무한이 멀지 않으니, 저희 집에 들러 하루라도 쉬었다가 가실 수 있으세
요?”
말을 건네는 영화의 태도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장염에게 막중한 사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단 하루라도 풍림장에 함께 가고 싶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장염
을 소개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천마후라는 오명을 떠안고 살아왔기 때문에 더 강한 바람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요. 그동안 저도 풍림장을 구경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처음 영화가 풍림장에서 왔다고 했을 때부터 장염은 풍림장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지금 그 풍림장에 가
자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앞장서 가면서도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영호성이 씨익 웃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던 딸이다. 영화가 마교의 천마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
던가! 그때는 영화를 가문에서 축출하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혈연은 쉽게 끊을 수 없었나 보다. 결국 딸의 소문에 대한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 기약없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딸자식을 둔 무림인이 선망할 오늘의 이
자리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지금 딸의 곁에는 무림 제일의 기남자가 서 있는 것이다. 무공은 물론 인품
만으로도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사내였다. ‘지금까지 딸의 고생은 저런 사내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던
가?’ 생각하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암. 어디에서 저런 남자를 찾으려구!’
일찍이 품 안의 자식을 무당파로 떠나보내고 전전긍긍하던 시간들에 대해 모두 보상받은 기분이다. 아
니,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혼자 웃던 영호성이 몸을 돌려 장염에게 슬쩍 다가왔다.
“장 대협이 풍림장을 방문해 주신다니 영광이외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문전 박대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
하고 있었습니다.”
“허허헛! 천하의 장 대협을 누가 감히 홀대할 수 있겠소.”
영화가 ‘훗’ 하고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예전에 장 오라버니를 보셨으면 지금처럼 그렇게 말씀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영호성의 뒤를 따르던 영호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은 과거 장염의 모습을 본 사람 중의 하나
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지.’
영호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사람 일이란 뒤를 알수가 없는 거라고 하지만 장염의 경우
너무 심했다.
‘사람 사는 것이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일진대 나는 너무 가벼게 살았다.’
그동안 너무 가볍게 말하고 가볍게 행동했다. 보이는 것이 다인줄 알고 보이는 것만 믿고, 그 뒤에 있
는 모든 것은 한마디 말로 일축해서 흘려 버렸다. 과거 의혈단의 전의기라는 사람이 그토록 칭찬하던 장
염의 진가에 대해 자신은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향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땅을 보며 묵묵히 걸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난감했기 때
문이다. 지금처럼 계속 장염만 따라다닐 수도 없다. 지금 당장만 해도 그렇다. 가깝게는 장가촌을 목표로
가고 있지만 그 뒤는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장염은 오행혈마인 때문에 귀주성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 그런 장염의 뒤를 언제까지 따라다닐 수는 없
는 노릇이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라도 장염의 뒤를 따르고 싶었지만, 쟁쟁한 팔대문파 장문인들도 돌아
선 마당에 자기가무슨 도움이 된다고!
“휴우……..”
향이가 한숨을 내쉬자 지염도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무슨 근심이라도…….”
“장 동생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막중해서…….”
향이는 속으로 ‘나 같은 사람이 감히 곁에 있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고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림의 대사를 맡으셨으니 위험도 많을 텐데…..”
하후연은 지염도의 우락부락한 얼굴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곰 같은 녀석이라니…. 뭘 안다구.’
아무리 봐도 향이 소저는 너무 어려운 길을 택한 것 같았다.
제 2장 변화의 시작
장염이 풍림장과 함께 무한에 도착한 날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
론 조금만 걸어도 옷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말없이 앞서 가는 사람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장염이 뒤에서 타박거리며 따라오는 소걸에게 물었다.
“걸아, 아직도 마음이 무거운 거냐?”
“아뇨, 그냥…. 모르겠어요. 저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걸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제가 모신 스승님들은 모두 뒤가 좋지 않았어요.”
안개 속에서 귀주신투의 수하들에게 맞아 피를 토하고 죽어가던 첫 번째 스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
고 그 뒤를 이어 구개음하와 제갈위기의 모습이 겹쳐졌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죽어간단다. 마치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지.”
소걸이 손을 내밀어 안개를 잡아보았다. 안개는 연기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이렇게 별것 아닌 건가요?”
“하핫! 사람이 그렇게 별것 아닌 게 아니라 안개가 대단한 거지.”
장염이 소걸의 작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딛자 그만 소걸의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
쳐지기 시작했다.
‘앗!’
소걸이 짧은 비명을 삼켰다. 자신의 몸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 스승님!”
소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기의 몸이 천천히 분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팔과 다리가 은빛 분말
이 되어 뽀얀 안개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작은 대기의 흐름에도 온몸이 출렁거릴 정도로 안개 속에 녹아
들었을 때다.
“보아라, 이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지를…..”
눈앞에서 수 많은 형상이 만들어져 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나무와 꽃과 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짐
승들과 사람이 녹아져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형상들이 만나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었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뒤따라오던 일행 중 몇 사람이 소걸의 뒤에서 서서히 다가왔다. 소걸은 그들과 부딪칠까 봐 몸을 움찔
거렸지만 그들은 소걸의 몸을 부드럽게 통과해 좌우로 사라져 갔다.
“스승니, 어떻게 이럴 수 있지요? 제게 보이는 저것들은 모두 진짜인가요?”
“하하핫! 자금의 너는 소걸이냐, 아니면 안개냐?”
그러니 진짜라는 건가 가짜라는 건가? 되물으려던 소걸이 문득 자신의 팔다리를 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보아도 이미 소걸이라 불리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안개로 본 소걸인
가 소걸로 본 안개인가? 한참 만에 소걸이 물었다.
” 스승님, 사람은 결국 이렇게 한 방울의 물이 되고 마는 건가요?”
“글쎄다. 세상에 있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느냐? 흙이 되기도 하고, 바람이 되기도 하고, 이전에 알지 못
하던 어떤 것으로든 변해가겠지. 너는 이제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겠느냐?”
소걸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염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정말로 그것을 다 알게 된다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도 알게 될 게다.”
잠시 후 소걸은 그만 피곤해져서 눈을 스르륵 감고 말았다.
‘음…… 안개가 되니 이렇게 기분이 좋구나…. 나는 신선보다 차라리 안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캄캄했다. 변해 버린 주변 경관에 깜짝 놀란 소걸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헉!”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 틈에 섞여 안개 속을
겉고 있었는데 어느새 저녁이 되었단 말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넓은 방에 하후연과 지염도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부시러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하후연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제 일어났느냐?”
“어… 이상하다. 나는 분명히 안개 속에서….”
“너는 복도 많구나, 장 대협께서 너를 안고 여기까지 왔다.”
소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분명히 겉고 있었는데 언제 잠이 들었단 말인가?
“그럼, 여기는 풍림장인가요?”
“그렇다. 장 대협께서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장가촌으로 가신다고 하니 더 자두도록 해라.”
소걸은 ‘네’ 라고 대답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왔다. 싸늘한 밤바람이 온몸으
로 밀려 들어왔다. 흠칫 떨던 소걸은 저도 모르게 오행지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깊은 숨을 몰아쉬고
진기를 한 바퀴 돌리자 한기가 저만치 물러갔다.
차가운 달빛 아래 몇 걸음 내딛다가 아침나절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
나봤지만 장염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나를 안개로 만들었을까?’
스승은 단지 어깨를 어루만져 주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그 ?은 순간의 경험을 통
해 죽은 스승들에 대한 슬픔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그처럼 변해갈 것이다. 어
차피 자신도 먼 훗날 그 대열에 끼게 될 것이라면 벌써 부터 우울한 얼굴로 지낼 필요가 없다.
“쩝… 스승님들, 좋은 시간 되세요.”
소걸이 중얼거리며 정원을 빠져나오는데 멀리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엇, 스승님과….’
달빛 아래 한가롭게 걷고 있는 사람들은 장염과 영화였다. 두 사람은 멀리서 소걸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야기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도 장 오라버니와 함께 장가촌에 가보고 싶어요.”
“하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
영화가 의아한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장염이 반대한다면 어떻게 장가촌에 갈 수 있단 말인가. 당
혹해 하는 영화에게 장염이 웃으며 말했다.
“영화 소저, 부디 나와 함께 장가촌에 가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후훗!”
나직히 웃던 영화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대답은 뭐지요?”
장염이 되묻자 영화가 황급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내일 저도 꼭 함께 가겠어요!”
소걸이 두 사람의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원, 어린애들도 아니구. 좀 더 적극적으로 못하시나 두 분다 쩝!’
낮은 소리로 속삭이던 영화와 장염이 달빛을 받으며 멀어져 갔다. 소걸은 저도 모르게 ‘아아!’ 하고 탄
식을 터뜨렸다. 과연 네번째로 모시게 된 스승은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저
렇게 여자에게 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심야에….. 손도 안 잡아주시다니…너무 했다.’
소걸은 한참 동안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살펴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스승과 영화 소저가 너무
다정해 보였기 때문일까? 어린 가슴에 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왠지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암… 싸나이 십삼 세면 이미 고독을 아는 나이지.’
날이 밝자 풍림장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십수 년 만에 돌아온 풍림장의 셋째 딸 영호화가 장가
촌으로 가는 일행을 따라 가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워낙 강경한 태도로 나오는지라 가족드로 승낙하
는 수밖에 없었다.
연화부인은 주방과 안채를 오가며 안절부절못했다. 딸을 위해 해주고 싶은게 많았지만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참 만에 방으로 돌아온 연화부인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무가에서 태어나 외지로 떠돌아다니던 셋째 딸을 다시 강호로 내보내자니 속이 아려왔다. 그러나 아무
리 답답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것이 무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숙명인 것이다.
“허허! 부인, 너무 심려치 마시구려.”
“네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연화부인을 보며 영호성이 다시 말했다.
“저 아니의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그는 바로….. 무림 그 자체인 사람이오. 영화에게는 그의
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할수 있소.”
연화부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졌다. 도도하기만 하던 남편의 입에서 이만한 찬사를 들어본 적이 없
다. 저 평범하게 생긴 삼십애의 사내가 무림 그 자체이며, 영화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풍림장이 아니라
니! 천하십대고수로 이름을 날리는 남편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정말 그렇게 장염이라는 사람이 믿을 만한 것입니까?”
연화부인인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직도 그녀는 막내딸에 대한 기대 때문에 장염이라는 사람을 염려스
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는 나보다 더 뛰어나오. 모든 면에서 말이오.”
“그렇게까지…..”
그제야 연화부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남편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왔다면 영화를 그에게 딸려 보
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남편과 영화는 그를 사위요 배우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과년한 딸을 그와 동행시킬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 영화에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영화는 ‘ 그는 제게 너무 과분해서 늘 감사하고 있
어요’ 라고 말했다. 그때는 어미 앞이라고 그를 칭찬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식에게 과
분한 상대란 없다고 생각해 왔던 연화부인이다.
“그런데 그의 집안에 대해 아십니까?”
영호성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허허헛! 부인께서 조금 실망하시겠지만 그의 집안은 평범하기 그지없소. 부친은 장가촌에서 목수일을
하며 가끔씩 짚신도 만들어 판다고 하더이다.”
“……….”
“그러나 그의 사람됨이 진실하고 화아를 소중하게 아끼고 있으니 되지 않았소?”
연화부인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생각해 보면 이미 무림에 장염의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
렀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소 과장이 없지 않겠지만 그 정도 무공이라면 영화를 고생시키지 않으리라 생
각했다.
“언제 그의 집안 어른을 찾아봬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영호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음, 이참에 확실히 하는 것도 좋겠구료.”
“그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렇게 좋은 혼처라면 서둘러 손을 써야지요. 일을 서두른다면 영
화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모두 가라앉게 될 겝니다.”
영호성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에 대한 소문 때문이 아니라 장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
다면 지금 장염과 동행하여 장가촌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염이 오행혈마인을 처리하기 위해 귀
주성으로 내려가면 영화를 데리고 풍림장으로 돌아오리라.
“그렇지 않아도 장가촌에 가서 그 일에 대해 의논해 볼 생각이오.”
보모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둘째 딸 영호은이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 그럼 화아가 시집을 가게 되는 거군요!”
간혹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장염이 막내와 친하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진
전될 줄은 몰랐다. 가족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장염이라는 사람이 남 같지 않았다. 그는 동생이 선택한
사람이며 부모가 인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어떤 점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일까?’
마침 장염과 그 일행이 웃으며 안뜰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막내인 영화도 어느 틈엔지 그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영호은은 동생에게 저렇게 밝은 표정이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간의 고생이 적지 않았을 텐데……’
아마 동생의 얼굴에 저런 풍부한 미소를 띠게 만들어준 사람은 장염일 것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장염은 영호가의 사람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상대의 집안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영호가의 배경만으로도 두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다
만 상대가 영화를 대할 때 풍림장 때문에 기가 죽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두 삶이 풀어 나갈
일이다.
“떠나기에 앞서 인사드립니다.”
장염의 맑은 목소리에 영호은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허헛! 그 한마디 말만으로는 내 딸 영화를 데리고 갈 수 없다네.”
진작부터 장염을 외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던 영호성이다. 잠시 부인과 더불어 혼사를 논의하다 보니
하대를 하며 건네는 말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영호성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낸 장염이 붉어진 얼굴로
허리를 조아렸다.
“………..”
“안사람과 상의하여 나도 장가촌까지 동행하기로 결정했다네. 자네는 나를 집안의 어른들께 인사시켜
줄수 있겠는가?”
그 순간 장염의 뒤편에 서있던 영화가 고개를 떨구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갓므도 콩당거리기 시작했
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부친이 장가촌에 가려고 하는 이유를 어찌 모르겠는가! 영화가 곁는질로 장염
을 보니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다.
마침내 장염의 입에서 ‘어르신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러자 안채에 나와있던
풍림장 사람들이 다급히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장주가 외출을 하겠다고 했으니 서둘러 준비를 마쳐야 한
다. 더구나 장염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이유는 뻔하지 않겠는가! 무림의 일대기인 장염과 풍림
장의 혼사가 논의될 것이니 이보다 더 큰 행사는 없을 것이다.
조용하던 아침 분위기는 풍림장주 영호성의 한마디 말로 인해 발칵 뒤집어졌다. 그 바람에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했던 장염 일행은 정오를 넘기고야 풍림장을 나설 수 있었다. 풍림장에서는 장주와 총관을
포함해 휘하 무사 열 명과 짐꾼 다섯 명이 장염 일행에 합류했다.
* * *
혈풍이 겨우 가라 앉았다고 모두가 마음 놓고 있을 그때다. 겨우 겨우 살아서 서장으로 돌아간 혈마사
의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강호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뒤바뀐 일대 사건이며, 천사지인의 시작이었다.
혈마사의 대전에 앉아 있는 혈라마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난밤, 혈라마께서 강림하셔셔 명하신 말씀이오.”
“……….”
살아서 서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주지가 되어버린 혈마륵이다. 대전에 가득한 라마승들이 긴장된 눈빛으
로 혈마륵을 바라보았다. 혈라마는 믿음의 대상이니 그 말씀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하륵과 반야승께서는 앞으로 나와주시오.”
상좌에 앉아 있던 마흐륵과 노라마가 서서히 걸어나갔다. 혈마륵은 두 노라마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천천히 말했다.
“혈라마의 말씀이시오. 전대 주지인 마하륵과 반야승은 이단적인 사상으로 그 신앙이 변졀되었으니…
지하 토굴에서 평생토록 참회하라!”
“아아….”
근처에 있던 노라마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그것이 혈라마의 뜻이라면 따
를 수밖에 없다. 사실 원로들은 이런 날이 올 줄 예견하고 있었다. 혈마사에서 오직 그 두사람만이 흡혈
을 멈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이 두 사람의 절대 고수를 토굴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말이 좋아 지하 토굴이지
그것은 지하에 만들어진 뇌옥으로, 죄인들을 가두어다 징계하는 장소였다. 그런 원로들의 불안한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혈마륵의 굳은 음성이 뒤를 이었다.
“만약 본인들이 스스로 토굴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혈라마께서 친히 세상으로 나오겠다고 하셨으니, 두
분께서는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라오.”
“………..”
마하륵과 노라마 반야승의 신형이 한순간 떨려왔다. 혈라마가 세상에 나오겠다는 선언은 세상의 종말과
도 같은 것이다. 몇차례에 걸쳐 환생한 혈라마는 그 모습을 좀체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승과 저승의 경
계에 홀로 존재한다는 혈라마가 나온다면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반야승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전에 가득한 혈승들은 물론 원로들조차 몸을 떨고 있다.
이 사람들을 위해, 아니, 세상을 위해 두 사람이 인내하면 될 일이다. 반야승이 마하륵의 어깨에 주름 가
득한 손을 들어 올렸다.
“빈승이 어찌 감히 혈라마의 명을 거부하겠소. 나는 스스로 토굴에 들어갈 것이외다.”
“어찌 홀로 보내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반야승이 마하륵을 향해 웃어 보이고 대전을 떠나 지하 뇌옥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반야승이 지
하 토굴의 입구에 서서 중얼거렸다.
“허헛! 그러고 보니 이 토굴은 나와 인연이 깊구먼.”
마하륵이 노라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인연이라는 말인가? 자신이 알기로 노라마 반야승은
혈마사에서 단 한 차례도 징계를 받아본 적이 없다.
“몇 해 전 중원의 젊은이들을 이 토굴에 가두지 않았었소. 그들을 잡아온 사람이 나였음을 잊었딴 말이
오?”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이 토굴에서 노라마를 모시게 될 줄은 몰f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보며 껄껄 웃다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로 몇 사람의 혈승들이 따라 들
어갔다. 그들은 두 노라마의 혈도를 제압하고 팔다리를 쇠사슬로 묶은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혈라마의 지시대로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 대전에 남아 있던 혈승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분분
히 흩어졌다. 혈마륵은 돌아가려는 수호존을 따로 불러 주지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대는 나를 위해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혈마륵께서 말씀만 하시면 따르겠습니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혈마륵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중에 장천사의 얼굴을 아는 이라고는 그대와 나, 이렇게 둘뿐이다.”
수호존이 혈마륵을 바라보았다. 바라던 대로 혈마사의 주지가 된 혈마륵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대
체 무얼까?
“그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중원으로 가서 창천사에게 말을 전하라. 먼저 반야승과 마하륵이 보내
서 왔노라 하고, 그들이 같혀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해라.”
“그 말씀은?”
“그렇다. 이곳에서 장천사를 죽여 형제들의 원혼을 달래줄 것이다. 그들이 성불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
로 장천사 때문이다. 어찌 그런 원수를 이대로 놓아보낼 수 있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떠나라. 그는 절정의 고수이니, 중원에 가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
문득 수호존이 혈마륵을 바라보았다. 중원에서는 마하륵의 뜻에 따라 장천사를 그대로 두었는데, 지금
서장으로 불러들여 죽이려고 하고 있다. 자신이 알기로 지금까지 혈마륵은 마하륵의 뜻을 존중해 왔다.
귀환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굳이 장천사의 생명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혈마륵의 뜻입니까?”
“아니, 단지 변화의 시작일 뿐이다.”
수호존이 주지실에서 물러나 숙소롤 돌아갔다. 간단하게 짐을 꾸려 산문을 나서는데 세찬 바람이 몰아
쳐 왔다. 이제 곧 겨울이니 토굴에 갇혀 있는 두 노라마를 생각해서라도 서둘러야 한다. 수호존이 나무
로 만든 선장을 단단히 움켜쥐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 * *
난주의 천마방에 있던 삼존은 겨울이 오기 전에 천산으로 마교의 본거지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수하들
에게는 천산을 오래도록 비워둘 수가 없다고 했지만, 사실 난주의 천마방을 운영할 돈이 없었다. 마교가
통일 전쟁에 실패하자 사파들이 자금후원을 끊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관할하는 곳이 천산 일대이니, 더 늦기 전에 이만 돌아가야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을
것 같소만,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풍소곡의 말에 독수마존과 혈해신마가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오래도록 본산을
떠나 있었다. 마도의 인물들이란 주인이 없는 자리에서 무슨 짓거리들을 하고 다닐지 알수가 없다. 집을
오래 비워두면 분수를 모르는 정신 나간 놈이 집주인 행세를 하려 들지도 모른다.
“도존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하나…..”
혈해신마가 말끝을 흐리자 풍소곡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혈존께서 무슨 염려스러운 일이라도 있소?”
“아니외다. 다만, 미친 장소가 강호를 종횡하고 있는 마당에… 그를 그대로 두고 떠나려고 하니 마음
이….”
장소에 대한 대책도 세우지 않았는데 떠나야 한다니 혈존의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풍소곡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었소이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우리 천산파나 음산파
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듯 싶소. 그래서 말씀인데…”
“그래, 무슨 좋은 방안이라도 계시오?”
“계시다면 서둘러 말해 보시구려.”
독수마존과 혈해신마가 재촉했지만 풍소곡은 껄껄 웃으며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쯧쯧! 겁들은 많아서 …. 저러 배포로 어찌 교주 자리를 넘보았단 말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풍소곡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무림맹과 구룡채, 그리고 황하수채에 정식으로 사자를 보내 장소의 척살을 의뢰합시다.”
“정사 양파에 척살으 의뢰하다니… 장소를 무림공적으로 만들자는 말씀이오?”
대경실색하여 소리치는 독수마존의 말에 풍소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사 양파의 도움
없이는 장소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독수마존은 무림공적이 어떤 의미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다. 그의 사문인 만독곡도 정사
양도로부터 공적으로 찍힌 뒤 곧 멸문해 버리지 않았던가! 무림공적은 정사 양도 어느 쪽에도 도움을 받
을 수 없다. 누군가 무림공적을 돕거나 숨겨주면 그도 함께 공적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정사양도에서 공
적으로 낙인찍혔다는 것은 ‘무림인으로 강호에서 살 수 없다’ 는 것을 의미했다.
“하기사 그놈의 무공이 너무 뛰어나니 무림공적으로 만들기 전에는 방법이 없겠소.”
독수마존이 동의하자 혈해신마가 풍소곡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용호채와 황하수채는 사파이니 이제라도 말이 통하겠지만, 무림맹이 동조하겠소?”
“허허헛! 혈존께서는 맹주와 우리가 형제임을 잊으셨소이까? 그에게 남북지약을 상기시켜 주면 무림맹
은 반드시 … 장소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일에 앞장설 것이외다.”
풍소곡이 자신있게 말하자 혈존과 독존으 얼굴도 밝아졌다. 정사양도에서 공적이 된다면 장소의 처리
문제도 한결 쉬워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천산파와 음산파만 그의 생명을 노렸지만 이제 정파양파에서 그
를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이른바 차도살인의 묘라고 하던가!
삼존이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 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잡고, 이제는 다른 세력을 빌
어 뒷정리까지 다 하려는 참이다. 마교에서 보낸 감사원의 살수와 정사양도의 고수들로부터 얼마만큼 달
아날 수 있을지 몰라도, 장소아 그 일당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 * *
관도를 걷던 장염과 영호성 일행은 해가 떨어질 무렵이 되자 서둘러 객점을 찾아들었다. 가을 날씨치고
는 다소 쌀쌀해서 노숙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향 언니, 우리 오늘은 좀 푹 쉬도록 해요.”
영화가 객점의 계단을 오르며 향이에게 속삭였다. 지난밤 풍림장에서 두 사람은 생각처럼 편히 쉬지 못
했다. 영호는 연화부인과 밤새 속닥거리느라 그랬고, 향이는 풍림장에서 새삼 느끼게 된 가족의 그리움
때문에 잠을 못 이뤘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두 사람의 눈은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래요. 내일이면 장가촌이니…. 오늘이라도 푹 쉬어야겠지요.”
향이는 장가촌 이후로 자신의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무심과 하후연, 그리고 지염도는 모두
남자들이니 장염을 따라 나서거나, 혹은 아무 때라도 자기들의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뚜
렷이 할 일도 없거니와 오라는 데도 없다. 그렇다고 무림맹이나 풍림장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나는 장 동생과 헤어져야 할 텐데…..’
사실 향이는 더 이상 장염과 동행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무공이 높아 장염을 도울 수 있는 형편도 아
니고, 영화처럼 혼인할 사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장염의 곁에 머무르면 장염마저 공
연한 구설수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경쾌하게 계단을 오르는 영화를 보자 더 더욱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 오늘 풍림장주가 장가촌엘 따
라나섰으니 부모들이 만나서 나눌 이야기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금 섭섭한 감도 있었지만 장염과
영화의 관계를 생각하면 사실 늦은 편이었다. 걸음을 옮기던 향이의 입에서 아주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의지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오늘처럼 괴로운 날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장염 때문에 그런 일
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마냥 장 동생의 뒤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지.’
잠시 주춤거리던 향이가 두 발에 힘을 주고 영화의 뒤를 따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눈앞
의 계단을 힘차게 오르는 일뿐이다. 이제부터 더 먼 앞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일행이 객점에 자리를 잡자 장염은 객점 밖으로 걸어나갔다. 장가촌을 지척에 두니 가슴이 설레어 가만
히 있기 어려웠다. 장염은 객점 앞에 놓인 작은 의자를 하나 들고 둔덕으로 올라가서 자리 잡았다. 해가
떨어진 뒤의 바람은 서늘하고 적적하기만 했다.
‘여기라면 달이 잘 보이겠군.’
오늘 밤 특별히 달을 봐야 하는 이유는 없었지만, 가려지지 않는 커다란 하늘을 보고 싶었다. 넓은 밤
하늘을 바라보는데 꽃가지나 객점의 처마 때문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장염은 온몸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지나온 날들을 반추해 보았다.
기뻤던 일, 혹은 슬펐던 일들이 빠르게 다가왔다가 바라에 밀려 멀리 사라져 갔따. 한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걸까? 짧지 않은 인생이건만 희비가 너무 많아 그 무게를 하나하나
따지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장염은 그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허공에 다 풀어 던졌다. 추억들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인 양 하늘에서 맴돌다가 스러져 갔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객점에서 빠져나와
둔덕을 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장 사부께서 여기에 계실 줄 알았소.”
“이 대협도 잠이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달빛을 받으며 다가온 이무심이 장염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무심은 막상 장염의 곁으로 다가왔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장 사부, 단오절의 약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
이무심이 말하는 단오절이라면 금거산과의 비무에 대한 약속이 분명하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흐르는 물에 띄워진 나뭇조각과 같은 것이라, 얽매임없이 흐르다 보면 마침내 바
다에 도달하게 되지요.”
이무심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무엇에 얽매이고 있는가 돌아보라는 말이리라. 그러고 보니
무엇 때문에 금거산과의 비무를 덜컥 약속한 것일까? 혹시나 그것은 알령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체 나 같은 주제의 사람이 그런 자존심을 뒤늦게 내세워 무엇에 쓰겠다고….’
이무심이 피식 웃으며 깊은 어둠 속으로 눈길을 던졌다. 아들과 제자를 잃고 강호를 떠돈 지 벌써 오
년이 지났다. 마음만 먹는다면 장가촌에 가보지 못할 일도 없었지만 홀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
아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그런데 이제 그리던 장가촌을 눈앞에 두고 다시 살지 죽을지도 모르
는 약속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내가 그처럼 속이 좁은 사람인 줄 몰랐소. 아니, 어쩌면 속이 좁은게 아니라 내 안에 그토록 허
세가 남은 줄을 몰랐다고 할까……”
장염이 이무심의 옆얼굴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짧지 않은 강호의 경험으로 볼 때 사람들은 무
공이 높아질수록 속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이무심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도 어느새 그만큼 무공의 고수
가 된 것이리라.
“무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세상이 좁게 보여지기 때문이겠지요.”
이무심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으로 팔을 휘저어보았다. 주저하지 않고 금거산의 비무를 받아들인
배경에는 틀림없이 그런 것도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런 게 다 뭐라고!’
한동안 허공에다 손을 뿌려대던 이무심이 중얼거렸다.
“금거산의 장법은… 지금의 내겐 너무 벅차오.”
이무심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돌아오는 단오절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
무 짧은 것이다. 불안정한 검기를 다듬을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이처럼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정해진 운명도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미 그 결과가 …. 만약 장 사부라면 어쩌시겠소?”
장염이 이무심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손끝으로 달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참 곱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 달무리는 맑은 날에나 잘 보인답니다. 달무리는 달을 따라 생겨나지만,
달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지요.”
이렇게 속이 답답한 사람에게 달무리 이야기라니, 이무심이 장염의 엉뚱함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
다. 언제나 장염의 말에는 말 건너편에 담긴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일까? 이무심이 골똘히 생각하며 허공을 응시하는데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드렸다.
“……….”
한순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언뜻 알아듣지 못한 이무심이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하셨소?”
“저 같으면 그냥 달아난다고 했습니다.”
이무심이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장염을 바라보다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밤하늘 아래 시원한 웃음이 멀리 퍼져 나갔다.
다음날 정오 무렵 궁벽한 산촌인 장가촌에 한 무리의 외지인들이 찾아들었다. 여행자가 많지 않은 늦가
을에 왠 손님들인가 궁금해 기웃거리던 장가촌 사람들이 무리 중에 섞인 이무심을 알아보고는 벌 떼같
이 모여들었다. 오 년 전 무림에 나간 뒤로 소식이 끊긴 십여 명의 장가촌 식솔들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별을 받은 촌장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아니, 이 사법! 이게 얼마 만이신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있는 게요?”
이무심이 촌장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후 조용히 대답했다.
“풍파가 많은 곳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나갔던 저의 불찰입니다. 함께 나섰던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잃
었습니다.”
주변에 둘러서 있던 장가촌 사람들 사이로 탄식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 중에는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도 몇 있었던 것이다.
“아아…. 그런 일이….”
검버섯이 가득한 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오 년 전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마을을 떠났던 원
무도장과 천무도장 사람들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소식이 없어 한편으로는 이미 모두 죽은 게 아닌가 싶
었지만 애써 부정했다. 그런데 지금 천무도장의 이무심이 살아 돌아와 일행이 모두 죽었다고 하는 것이
다. 촌장이 뒤켠에 서 있는 장염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이무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우리 두 사람과…. 장소룡 사범이 살았습니다.”
“……..”
더 이상 촌장의 질문이 없자 이무심은 뒤에 서 있던 장염을 보며 말했다.
“장 사부, 도장에 들러 인사를 올린 후 댁으로 찾아뵙겠소이다.”
장염이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대답하며 읍을 하자 이무심도 마주 허리를 숙였다
촌장은 두 사람의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이 두 사람 사이에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가촌을 떠날 때만 해도 장염은 두 도장의 짐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이무심이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자네라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참으로 다행일세.”
“어르신의 염려 덕분입니다.”
촌장이 장염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볼품없던 장염이다. 그런데 지금 장염의 전신에서는 뭐라 형요하기 어려운 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촌장은 순간적으로 ‘장가촌에서 용 났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신형을 돌렸다. 이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알려졌으니 한차례 카다란 굿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무심이 천무도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아직 조금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장가촌 사람들이 이무심을 따라 사라지자 장염도 천주교의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장염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천
주교 위에서 장사를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장염과 풍림장 일행이 천주교에서 이십여 장 정도 걸었을 때다. 장염이 일행을 돌아보며 ‘이제
다 왔습니다’ 라고 말했다. 영화가 아까부터 두근거리고 있는 가슴을 쓸어 내리기 시작했다. 장가촌에 들
어서면서부터 뛰기 시작한 가슴은 좀체로 진정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 작은 집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오 년이다.
향이도 장염의 뒤에서 눈앞에 서 있는 목조로 만든 작고 견고한 집을 바라보았다. 마당이 자그마한 그
집은 초라해 보였지만 한눈에 보아도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수계현
에 있던 집도 저만했을 것이다. 장염과 집을 번갈아 보니 괜스레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형님, 집이 참 작소.”
하후연이 지염도를 힐끔 바라본 후 말했다.
“집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집을 만든다.”
지염도가 감격한 얼굴로 작은 집을 살펴보는 하후연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식구가 적으니 집이 작다는 말이오?”
“됐다.”
하후연이 짧게 끊어 말한 뒤 재빨리 장염의 뒤를 따라붙었다.
영호성은 장염의 집 앞에 이르러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장염의 부모를 만난다고 하니 절로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저렇듯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 오늘 그의 부모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딸과 자신의 소원도 무리없이 성사될 것이기 때문이다.
“밖에 뉘시오?”
방 안에서 작게 들려 나오는 소리에 장염이 대답했다.
“어머니, 접니다.”
장염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영화와 향이는 장염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며 빙그레 웃고
말았다. 장염 같은 사람도 오랜만에 상봉하는 부모 앞에서는 보통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덜컹.
작은 방문을 열고 두 사람이 뛰어나왔다.
“염아!”
“어머니!”
장염이 마당에 무릎을 꿇고 절하기를 마치자 이씨가 부둥켜안고 눈물부터 흘렸다.
“이 무심한 녀석아, 어쩌자고 이제야 찾아온단 말이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네 아버지가 얼마
나 근심을 했는지 아느냐?”
장염이 어머니 이씨의 뒤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내려온 사람은 동생 소영이었
다.
“아버지는?”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네 아버지는 몸이 성치 않단다.”
이씨가 장염의 손을 잡아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씨는 장염을 만난 반가움에 미쳐 손님들을 발견하
지 못했지만, 소영은 그렇지 않았다. 소영은 마당에 놓인 평상을 걸레로 닦은 뒤 간단한 먹거리를 구하
러 저잣거리로 뛰어갔다.
제 3장 떠날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평상에 걸터앉은 영호성은 그제야 장염의 집안에 우환이 깃든것을 알게 되었다.
“너희들도 자리에 앉아 좀 쉬도록 해라.”
풍림장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마당은 순식간에 풍림장과 장염의 일행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방에 들어간 장염은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겐가?’
그렇다고 해도 지금 자신이 장염을 도울 뾰족한 수가 없다.영호성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변의 풍광
을 살핀 뿐이었다.
그렇게 이 각쯤 지나자 소영이 한 아름의 음식을 싸 들고 돌아왔다. 소영은 한쪽에 달린 부엌으로 들어
가 사가지고 온 음식들을 가지런히 차려서 마당으로 내왔다.
“저는 소영이라 하는데 염 오라버니의 동생이옵니다.”
영호성은 평상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하는 소영에게 웃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소이다. 나는 풍림장의 장주 영호성이라 하외다. 우리는 모두 장 대협의 친구들이니 소저
께서는 마음을 편히 하시길 바라오.”
“……..”
당황하여 허리를 조아리는 소영의 얼굴에 의혹이 가득했다. 눈에서 빛이라도 쏟아질 것같이 위엄으로
가득한 중년인이 염 오라버니와 친구라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마당에 모인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비범
해 보이고 한쪽에 앉은 두 사람의 여인도 평생에 보지 못한 미인들이다. 언제 오라비가 이와 같은 사람
들과 사귀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집안에 무슨 문제라도?”
영호성이 조심스럽게 묻자 소영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뭐라고 말하려던 소영이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이 사람들에게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
들은 한번 왔다가 가면 그뿐이다. 가족들은 오래도록 이 장가촌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걸 생각하자 말문
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도움이 될지도…. 사실 장 대협이 있으니 우리가 달리 도울 일도 없겠지만
말이오.”
소영은 비범해 보이는 영호성이 그렇게 말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실은 한 달 전에 아버지께서…..”
장가촌에서 원무도장과 천무도장의 일류 제자들이 강호로 나간 뒤의 일이다. 삼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
자 사람들은 하나둘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무도장과 천무도장의 사범이 사라지자 관원
들도 하나둘씩 떠나갔다. 그 뒤로 장가촌에 생겨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한마음회였다.
이 한마음회는 일종의 시장 연합회와 같은 것이었다. 시장 연합회라고 해서 저잣거리의 상인들이 자발
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호북성의 사파인 한마
음회에서 떨어져 나온 사파 무림인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한마음회가 마교에 무릎을 꿇자 혈기가 강한
몇몇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 뒤 그들은 한마음회와 마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장가촌에
정착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한마음회가 무슨 일이라도?”
소영의 얼굴에 처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일 년 전부터 상점은 물론 노점상들에게까지 자릿세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의 보
호가 필요없다고 자릿세를 내지 않으시다가 그만 그들에게 집단으로…”
“허어…..”
영호성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영존께서는 심하게 다치셨소?”
“두 다리가 부러지시고 내장도 상하셨습니다.”
“이런….쯧쯧…”
한동안 혀로 끌탕질을 치던 영호성이 물었다.
“장가촌에도 무관이 있을 터인데, 아니. 그들이 아니더라도 관에서 그들을 그냥 보고 있었다는 겁니까?”
“원무도장과 천무도장은 제자가 없어 거의 문을 닫은 형편이고, 관은…. 오히려 그들에게 상납금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영호성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도 장염의 고향인 장가촌을 생각할 때면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대체 어떤 곳이기에 무림의 일대기인을 배출할 수 있었는지 꼭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잡배들이 그처럼 겁없는 짓들을 한단 말인가!’
영호성이 허탈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소영의 말을 듣고 있던 지염
도가 박도를 손에 득고 벌떡 일어난 것이다.
“내 이 세상 모르는 놈들을 한칼에……!”
“어허, 우선 앉아라. 어른들 앞에서 이 무슨 추태냐!”
하후연이 타이르자 지염도가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어찌 장 대협의 부친께 감히….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장 대협이 계신데 뭐가 걱정이냐? 일단 앉거라.”
지염도가 더욱 카다란 소리로 말을 받았다.
“형님도 아시지 않소? 장 대협이 어디 보통 분이시오? 그놈들이 눈물을 흘리며 빌면 모두 없던 일로 용
서하고 말 터인데, 나는 그 꼴은 못 보오! 그런 후레자식들은!”
불끈한 지염도를 하후연이 붙잡고 실랑이를 할 때였다. 작은 방문이 다시 한 번 덜컹 소리와 함께 열렸
다. 그리고 안에서 장염과 장삼, 그리고 이씨가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마당의 소란이 한순간에 잠잠해졌
다.
“어머! 아버지!”
소영이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도 운신을 못하시던 아버지가 아닌가! 나이가 들어
부러진 뼈는 잘 붙지도 않았고, 내상마저 심해 중풍든 사람처럼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 비틀거
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두 발로 서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얼굴의 혈색도 건강하던 때와 같이 불그스름한
게 보기 좋았다.
장삼은 천천히 걸아나와 짚신을 신은 뒤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올렸다.
“염이의 아비로 장삼이라 합니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후다닥 일어섰다. 감히 앉아서 장염의 아버지에게 절을 받을 만큼 대
범한 사람은 없었다. 영호성이 몇 걸음 앞서 나오며 마주 읍을했다.
“저는 영호성이라고 하외다. 장 대협의 부친을 뵙기 위해 무한에거 예까지 찾아왔습니다. 불쑥 찾아와
결례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깜짝 놀란 장삼이 더욱 허리를 숙이며 말을 받았다.
“결례라니요. 오히려 부족한 자식을 예쁘게 봐주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사를 마친 장삼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헛! 보시다시피 멀리서 오셨는데도 마땅히 드릴 것이 없습니다. 사실은 오래전 꿈에 염이가 나타
나 ‘모월 모일에 뵙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저는 죽은 염이가 귀신이 되어 나타난 줄 착각하고 말았습니
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늘이 바로 그날이로군요.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가난하여 누가 와도 내놓을
것이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장삼의 얼굴에 궁핍함으로 인해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없다. 영호성은 ‘과연 그 아
버지에 그 아들이다’ 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허허헛! 우리가 예까지 온 것은 장 대협과 영존의 탈속한 인품에 끌려 온 것이니 더 바랄 게 뭐가 있
겠습니까?”
장삼이 가만히 영호성을 바라보니 그 사람 됨됨이가 예사롭지 않다. 장염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이 딸과 함께 장가촌까지 온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허허, 이 녀석이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있더니 제 처가 될 사람까지 데리고 온 게로구나.’
뒤따라 나와 있던 이씨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신 영화와 향이를 둘러보았다. 장가촌에서는 찾아볼 수
도 없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이다. 장가도 못 갈 것 같던 아들이 어디서 저런 아름다운 처녀들을 데리고
왔을꼬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했다.
‘대체 저 두 아가씨 중에 누가 며느릿감인지 알 수가 없구나.’
유심히 보아도 두 사람 모두 흠 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다만 한 아가씨의 얼굴에 있는 자잘한 자상이
신경 쓰였지만, 눈빛이 선한 것을 보니 염려할 바가 아니다.
장삼과 이씨가 자신들을 바라보자 영화와 향이가 앞으로 다가와 대례를 올렸다.
“저는 영호화라고 합니다.”
장삼과 이씨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이 아가씨야말로 장염이 말한 동생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다
른 아가씨는 의남매일 것이다.
“저는 ……”
햐이가 잠시 머뭇거리자 이씨가 말을 받았다.
“아가씨가 향이지요? 염이에게 두 분에 대해 이미 들었다우. 그 동안 우리 염이를 봐주느라 고생들이
많았어요.”
향이가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조아렸다.
“저는 지금까지 장 동생에게 도움만 받아온 처지라….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소개가 끝나자 영호성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장 대인, 오늘 특별히 찾아뵌 것은 자식의 일로 상의드리기 위함입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장삼이 이씨와 함께 영호성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자 마당은 금세 웃음으로 가득했다. 마당에 있던 사
람들이 장염과 영화에게 처마다 한마디씩 농담을 던져 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영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조금 답답해 졌다. 장 오라버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다시 한마음회의 횡포가 시작될 것이다. 소영은
이 손님들이 있는 동안 그 한마음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주길 바랬다. 그러나 아까까지 흥분하여 펄펄 뛰
던 사람들과 오라비는 모든 것을 잊은 듯 웃고 떠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소영이 조심스
럽게 장염을 불렀다.
“오라버니…..”
장염이 푸근한 얼굴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래, 소영아, 무슨 일이냐? 내게 말해 보거라.”
장염이라고 부친이 왜 다쳤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지금 소영의 얼굴에 떠오른 저 긴장과 갈등의
빛은 바로 그 때문이리라.
“한마음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장염은 소영의 말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가족들이 당한 수치와 모멸을 느낄 수 있었다. 부친은 방에서
‘네가 미치고 나머저 한마음회에 맞아 다리가 부러진 뒤로 우리 가족이 완전히 바보가 되고 말았다’ 고
탄식을 터뜨렸었다.
“그들은 마땅히 하늘의 벌을 받을 게다.”
소영이 속으로 ‘그 벌을 누가 주는데요?’ 라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오 년 만에 돌아온
장염은 아직 믿어지지 않았다. 오 년 전까지 소영은 장염의 비명을 들으며 잠에서 깨야 했다. 그때의 기
억을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전율이 밀려왔다.
‘내가 오라버니에게 지금 뭘 더 바라는 거야.’
지금은 그저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 가지 더 바란다면…. 오라버니의 미친 증세가 나았기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소영은 장염의 얼굴을 오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하핫! 네가 그렇게 못 미더워하니 소영아, 나와 함께 잠시 마을에 다녀오자꾸나.”
소영이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손님이 많을 때 그들을 이끌고 한마음회를 찾아가 봐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저는 동생과 함께 저잣거리를 한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이미 소영의 말을 들은 뒤라 사람들은 장염이 한마음회를 찾아 가리란 걸 알았다. 그러나 동생과 함께
가겠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은 따라나서지 말라는 말과 같다. 지염도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장염에게 말
했다.
“장 대혐, 저희가 한발 앞서 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장염이 홀로 가면 대충 용서하고 끝낼 것이다. 지염도는 그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하하핫!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동생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고 올 생각입니다.
장염이 이렇게까지 사양하자 지염도는 허탈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처절한 응징의 기회가 물
건너가고 만 것이다.
둘만 가겠다고 하자 소영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함께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을 굳이 물
리치다니, 소영은 장염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향 언니와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사실은 혼자 따라나서고 싶었는데 향이만 홀로 두고 가자니 마음에 걸렸다. 영화가 향이를 힐끔 바라보
자 향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장염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장염이 마당에 앉은 무리들을 향해 인사를 건넨 후 마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편 천무도장에 둘러 가족들을 만난 이무시은 다시 원무도장으로 갔다. 과거에는 두 도장이 앙숙이었
지만 이제 장소룡이 형이 되었으니 인사를 가는 것이 당연했다. 이무심이 장진원에게 장소룡의 강호 활
동을 대충 전해주고 돌아 나갈 때다.
“자네가 소룡의 형이 되었다니 한 가지 부탁을 함세.”
손자와 제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장진원의 음성은 허탈했다. 돌아선 이무심이 장진원을 향해 허
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제게 청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내가 원무도장을 세웠으나 이제 기력이 다하여 제자도 감당키 어려우니… 참으로 장가촌에 면목이 없
구먼. 자네를 보니 이미 검기가 충만하여일가를 이룰 경지라… 마음 놓고 한가지 부탁을 하겠네.”
이무심이 고개를 들어 장진원을 바라보았다. 장진원의 노안에 근엄한 기운이 가득했다.
“장가촌에 한마음회의 무리들이 자리를 잡고 온갖 패악을 일삼으니 자네가 나서서 해결해 줄 수 있겠는
가?”
본래는 원무도장의 주인인 자신이 제자들을 시켜 처리할 문제였지만, 이미 제자들도 모두 떤난 뒤다.
그렇다고 늙은이 혼자 상대하다가는 관을 먼저 주문해야 할 판이다. 사실 자신이 전성기 때라고 해도 그
들 중 하나를 감당하기 어려울지 몰랐다.
“그들이 더 이상 악행을 일삼지 못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무심의 마에는 묘한 설득력이 담겨 있어서 장진원은 절로 고개가 끄덕였다. 이무심은 장진원의 앞에
서 물러나 곧바로 저잣거리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천무도장에서 부친인 이해룡에게 한마음회의 이야
기를 들었던 터였다. 부친은 한마음회가 돈을 내지 않는 상인들에 대한 본보기로 장삼의 다리를 부러뜨
렸다고 했다.
‘그들이 감히 자릿세라는 명목으로 장 사부의 부친을 능멸했다니….’
그렇지 않아도 원무도장에 들렀다가 곧바로 한마음회를 찾아갈 작정이었다.
“감히……”
이무심이 이를 갈며 발걸음을 서두르자 좁은 골목에 때 아닌 광풍이 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기탱천한 이무심이 한마음회의 현판 아래 도달했다.
“귀하는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한마음회의 입구에 서 있던 두 장한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장한들은 다가오는 중년인의 기세가 범상
치 않아 저도 모르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대들은 한마음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가?”
한 사람이 자기 앞가슴을 소바닥으로 ‘탁’ 치며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마음회의 형재들로……”
그의 뒷말은 이무심에 의해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길게 이야기할 것 없다. 지금 회주는 자리에 있는가?”
이무심이 냉기를 풀풀 날리며 말하자 장한은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내리깔았다.
“회주께서는 마침 안에 계시외다만……”
“물러나라!”
회주가 안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무심이 외마디 소리를 쳤다.
파파팟!
장한과 이무심 사이에 돌풍이 일며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무심이 무형의 검기를 일으켜 장한들
을 입구에서 밀어내 버린 것이다.
“으악! 귀신이다….!”
오싹 돋는 소름과 함께 몸이 절로 밀려나자 장한 둘이 비명을 터뜨렸다. 평생 처음 느껴보는 무형의 검
기라 그 충격이 컸다.
“흥!”
이무심이 비칠거리는 두 사람에게 냉소를 날리고 안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갔다. 실내는 그런대로 넓
었지만 탁자만 몇 개 있을 뿐이어서 사람이 기거하며 무언가 건설적인 일을 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
탁자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도박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무심이 들어서자 실내는 한순간 열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비명에 이어 낯선 방문자가 들이닥치니 긴
장할 수 밖에 없다.
“누가 회주인가?”
이무심이 공력을 실어 묻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모아졌다. 이무심이 그를 향해 몇 걸음
내딛는데 낯익은 젊은이들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이 사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무심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너희는 장근남과 장정이 아니냐? 나는 너희가 이런 곳에 몸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건실하던 두 사람을 한마음히에서 만나자 기분이 착잡해졌다. 시간이 사람을 이처럼 변화시키는 것일
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러 사람들이었는데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까? 오 년 전의 모습과 지금은
너무달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실내에 있는 사람들 중 서너 명은 오 년 전까지 도장에서 무술을 배우던 사람들이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변하게 한 것일까! 이무심의 얼굴이 굳어지자 장근남과 장정도 별수 없다는 듯 뒤
로 물러섰다.
“이 사부님, 조심하십시오. 이곳은 과거 장가촌의 허접한 무술도장과 다르답니다.”
조롱인지 염려인지 모를 장근남의 말에 이무심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크하하핫! 내가 무림을 유랑한 지 어느덧 오 년. 그러나 이 년 전부터 내 앞에서 그처럼 말하는 사람
을 보지 못했다.”
이무심은 조롱 섞인 장근남의 소리를 듣고 잠시 상상했다. 다시 허접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
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러나 현실은 냉엄한 것이어서 비록 자신은 강호를 울리는 일대 고수가 되었지만
친인들을 모두 잃은 뒤였다.
“……..”
이무심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도박판은 말끔히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난폭한 인상의 사람들이 하나둘
이무심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한마음회의 회주인 철권 사마영은 상대가 자신만만하게 나오자 그만 겁
이 덜컥 나고 말았다. 아무리 보아도 상대의 기세는 처음 대하는 것으로 이야기로만 듣던 무림의 일류고
수 같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어디 진짜 일류 고수들 앞에 서봤어야지. 저자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조차
할 수 없구나!’
이 순간 사마영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단 한 번도 무공의 일류고수가 어떤 면모를 보여주는지 구경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 수하 이십 명으로 충분한지 어떤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나는 한마음회의 회주인 사마영이오. 강호의 친구들이 나를 철권이라 부른다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
찌 되시오?”
“첫 만남에 안됐소만, 나는 귀하와 같은 사람과 교분을 나눌 생각이 없구려. 그내는 오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겠소.”
권 사마영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확실히 이자는 일류 고수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이름을 이토록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꼬리를 말면 일수일해 사마영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잡배들의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다반사다. 그러나 이런 기세 싸움에서까지 지게 된다면 나중에 고
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사마영은 고리눈을 부릅뜨고 이무심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어디서 이런 싸가지….”
막 욕설을 퍼부으려던 사마영의 뒷말은 채 이러지지 못했다. 중년인의 장포가 바람이 없는데도 ‘부웅’하
는 소리와 함께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사마영은 상대가 역시 초특급의 고수였다는 사실에 긴장하며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쳐라!”
한마음회의 장한들이 파리 떼처럼 이무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사마영이 보아온 고수라고
해봐야 강호의 삼류였다. 일류나 이류들과도 노는 물이 다르니, 특급 고수가 어떤 움직임을 보주는지 알
도리가 없다. 사마영은 중년인에게 몰려가는 수하들의 뒷모습을 보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수하들이 죄다 덤비면 조금 지치지 않겠나…. 그때 내가 마무리를…..’
그때 가서 설혹 패한다 하더라도 부끄러울 것은 없다. 왜냐하면 수하들도 이미 모두 당한 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고수에게는 백번을 패해도 마땅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고수와 손을 섞었다는
사실은 평생 자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마영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중년인이 빈 소맷자락을 흔들 때마다 두세 명씩 뒤로
나가떨어졌다. 마침내 대여섯 번 소맷자락을 흔들었을 뿐인데 서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언제부터인
지 주변 경관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사마영은 자신의 무릎이 후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여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대협. 본래 저는, 제가 무엇을,무엇을 택해야 되는지…. 감히 여쭤보려고 했었습니다.”
이무심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마영에게 다가갔다.
‘쯧, 이렇게 떨어서야 어디 뭐라고 할 마음이 안 생기는군.’
본래는 팔다리 어디 한 군데를 부러뜨려 놓은뒤 장 사부의 집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가 이
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대체 이렇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자들이 왜 무고
한 일반인들에게는 호랑이처럼 군림하려 드는 것일까?
“너는 한마음회를 없애고 나와 함께 장 대인의 댁으로 가서 사죄를 할 테냐, 아니면 이 자리에서 병시
이 되겠느냐?”
병신이 되면 재기를 할 수 없으나 사지가 멀쩡하면 언제든지 다시 조직을 재건할 수 있다. 사마영이 바
닥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쳤다.
“저는 대협의 말씀대로 장 대인에게 사죄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장 대인이 누구인지 무식한 제게 알려
주셔야…..”
사마영은 수하들 중의 누군가가 높으신 어른의 비위를 건드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느닷없이
장 대인이라는 인물이 튀어 나올리가 없다. 이곳이 장가촌이니 높으신 어른이라고 하면 필시 촌장, 혹은
현령의 사촌쯤 되는 사람일 것이다.
‘대체 어느 개자식이 어른들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내 이놈이 누군지만 알면…!’
정말 곱게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 분명하다. 장가촌에 정착한 지 어언 이 년, 그동안 수하들과
더불어 어르신에게 공경을 다하고 백성들의 보호자가 되어왔다. 그런데 지금 장 대인의 심기를 건드려
한마음회가 장가촌에서 문을 닫게 생겼으니 시로 통탄할 노릇이다.
“장 대인은 천주교에 계시는 분으로 그 존성대명은 장삼이라고 하신다.”
‘헛!’
사마영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장삼이라는 이름은 결코 대인의 풍모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천주교
의 장삼은 자신이 알기로 높으신 어른이 될 수 없다. 게다가 그 장삼을 손보라고 지시한 사람은 바로 자
신이 아니던가!
‘이런, 씨벌!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았더더니… 어디서 이런 절세 고수와 연줄이 닿은 놈을 건드렸구먼.’
사마영이 속으로 장삼의 기연을 부러워하며 다시 한 번 허리를 조아렸다.
“이제 보니 천주교의 장 대인을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장 대인께서 이렇게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느시
는 분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가 지금 즉시 찾아뵙고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수하들을 잘못
다스린 저의 불찰이니 이제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사마영이 자기가 시킨 일을 수하들의 탓으로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장삼에게 찾아가 대충 인
사를 하고 돌아오면 모든 일이 흐지부지 넘어갈 것이다. 마음을 정한 사마영이 기절한 수하들을 하나하
나 깨우고 있을 때다. 또다시 처음 보는 세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장 사부,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오?”
“하핫! 이 대협이야말로 어쩐 일이십니까? 저는 그저 간단한 집안일로 방문했을 뿐입니다.”
사마영이 이무심의 말을 듣고 입구 쪽으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일남 삼녀가 서 있었는ㄴ데,
어린 소녀 하나만 낯이 익을 뿐 나머지는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오늘 일진이 사납구나. 어디서 저런 떨거지들이….응? 그나저나 저 두여자의 미모가 상당하니 언제고
잡아다가 재미를 좀 봐야겠다.’
수하들을 깨우던 사마영이 향이와 영화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감히!”
마교에서의 구금 생활로 사내들의 시선에 민감해져 있던 영화는 중년의 사내가 음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진저리를 치며 달려나갔다. 영화의 몸이 너무 빨라 사마영은 무언가 자기의 눈앞을 휙 스쳐 지
나갔다고 생각했다.
펑!
한순간 가죽 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마영의 허리가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우욱, 우웩!”
사마영은 꺽꺽거리며 먹었던 것을 모두 게워냈다. 이쁘장한 것들이 이퍼럼 무공의 고수인 줄 알았다면
감히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강호의 여고수들에게 끈적거리는
눈빛을 던졌던 사마영은 한참 만에야 겨우 허리를 펼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마음회의 소행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영화는 사마영의 복부를 치고 돌아온 뒤에도 분
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헉! 이 언니가 이렇게 싸움을 잘할 줄이야…..’
소영은 영화의 손에 사마영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오늘 언니들과 함께 이 자리에 온 것이 다행
이다’ 라고 생각했다.
“영화 소저, 이제 그만 마음을 가라앉히시지요. 우리가 수련하는 마음의 공부는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잃고 도에서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었던 것지요.”
“………….”
장염은 지금 영화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기를 바랬다. 만약 그 믿음대로 삶이 살
아지지 않는다면 믿음이 대체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자신과 영화가 마음의 공부를 하고 있는 요즈음,
만약 그 마음이 도를 따르지 못한다면 도는 없는 것이 되낟. 장염은 영화가 더 가치있는 것을 향해 한
걸음 나가주기를 바랬다.
“………….”
향이가 말없이 서 있는 영화의 손을 얼른 잡아 자기 옆으로 끌어들인 후 말했다.
“장 동생, 우리 여인들에게는 장 동생의 도만큼이나 앞서게 되는 것이 꼭 하나 있답니다.”
“…………”
장염이 우두커니 서서 장내를 둘러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실은 그 이야기를 제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향이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장염은 지금 참아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자신이
추구하는 도에 대한 믿음으로 분노를 한껏 억누르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떠나 있던 집에 돌아와 보
니 아버지가 얻어맞아 누워있다. 누구라도 그 정도 되면 쉽게 참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장
염은 지금 영화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영화의 곁에 서 있던 소영은 장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 년 만에 돌아온 오라비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저런 사람이었나?’
소영이 알고 있는 장염은 언제나 괴로운 얼굴로 비틀거리던 사람이다. 어린 마음에도 오라비를 볼 때마
다 ‘언제 사람 구실을 할수 있을까?’ 근심했다. 그런데 집을 나간지 오 년 만에 돌아와 보여주는 행동거
지가 보통 사람 같지 않다.
소영은 ‘어쩌면 오라버니 때문에 길기만 하던 고통의 시간이 끝날지도 모른다’ 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장염은 소영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피식 웃어 보였다.
“소영아, 세상에는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치들이 많이 있단다. 시간이 되는대로 너에게도 가르
쳐 주도록 하마.”
실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장염이 고개를 돌려 사마영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한마음회의 사마영이라는 사람이오?”
사마영은 사내의 눈빛을 받는 순간 간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상대의 말 한마디가 마치 불밭은 화살인양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사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우에 숨 쉬기도 불편할 정도였다. 사마영이
마치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으으으으, 그러하오이다. 대협은 … 누구시기에…..”
“나는 장염이며, 가친께서는 장 자 삼 자 를 쓰고 계시오.”
사마영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저 괴이한 남자가 장삼의 아들이라면 오늘 살아날 희망이 없을
지도 모른다.
“용서하여 주시오. 내가 순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몹쓸 짓을 했소이다.!”
쿵, 쿵, 쿵.
부들부들 떨던 사마영이 이마를 바닥에 찧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자 심장을 죄는 듯한 긴
장과 공포가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 조용히 지켜보던 장염이 한 손을 휘두르자 무형의 힘에 의해 사마영
의 몸은 퉁겨지듯 勺鈒셀痴낫?
“으아! 대협, 용서하시오.”
일으켜 세워진 사마영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대가 과오를 돌이킨다니 내가 천신이 아닌 다음에 더이상 무슨죄를 찾겠소? 다만 가친의 마음에 아
직 그대에 대한 응어리가 남은 듯하니 지금 즉시 찾아뵙도록 하시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마영을 보고 있던 한마음회 장정들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대체 저자가 어떻게 했기에 악과 깡뿐이라던 회주께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끌려 다니시는 건가?’
그들의 의혹은 곧 풀어졌다. 장염이 장정들에게 몸을 돌린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하시겠소?”
장염과 눈빛이 마주친 한마음회의 장정들은 알몸으로 검날 앞에 선 듯한 느낌으로 덜덜 떨기 시작했
다. 그들은 장염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파사신기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장정들이 무릎을
꿇으며 일제히 대답했다.
“저희도 대협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대들의 일을 하시기 바라오.”
장염의 말이 떨어지자 사면이라도 받은 듯 사마영과 장정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
거리던 사마영과 한마음회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실내는 조용해졌다. 소란스러움이 가셔지자 이무
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 사부, 저들을 그냥 두고 떠나도 되시겠소?”
지금이야 조심하겠지만 장염과 자신이 마을을 떠나고 나면 저들이 다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이무심의 심정을 짐작한 장염이 웃으며 말했다.
“무당산이 예서 멀지 않은데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제야 이무심이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며 중얼거렸다.
“과연, 내가 나이를 먹긴 먹은 듯싶소. 장 사부가 무당파 장문인의 사숙인데 감히 장가촌에서 분탕질르
칠 사람이 어디 있을꼬?”
소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이 십오 세의 소영은 가끔씩 장가촌을 지나다니는 무림인들을
멀찍이서 보아왔기에 무당파가 어떤 곳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무당파의 신선들은 바람과 구름을 부리며
검 하나로 태산도 허무를 수 있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신선들만 모여 있다는 무당파의 장문인이 장 오라
버니의 사질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장 오라버니가 정말 무당파와 관계가 있나요?”
이무심은 소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관계가 있다 뿐이요? 장 사부는 무당파 장문인 춘양 진인의 사숙이라오. 그리고 나의 사부이기도
하고. 하하핫!”
소영은 이무심이 자신에게 말을 낮추지 않자 어색했지만, 그제야 장 오라버니가 평범하지 않음을 깨닫
게 되었다. 어디 그 뿐이랴? 조금 전 한마음회의 사람들을 때려눕힌 것을 보면 무공도 대단할 텐데. 그
런 사람조차도 장 오라버니를 사부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정말 무당파 장문인가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요?”
장염은 누이동생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나도 제법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은 편이란다.”
소영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집에서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하나뿐인 오라버니다. 그
특유의 병증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 높은 사람들과 알고 지낸다고 한다. 아버지, 어
머니와 함께 염려하던 집안의 큰일이 잘 해결된 셈이다. 물론 소영은 장염의 성공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장염이 일행들과 더불어 천주교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마음회가 다녀간 뒤였다.
마당에 앉아 있던 지염도는 한결 맥이 빠진 모습으로 장염 일행을 ㅐ鎌杉? 한껏 벼르고 있었지만 결
국 한마음회의 사람들에게 분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염에게 용서를 받았으니 그들의 잘못을 누가
더 문책할 수 있단 말인가!
해가 떨어질 무렵 풍림장 장주 영호성은 영화를 데리고 풍림장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영화가 조금 더
남아 있고 싶어했지만, 장염이 해야 할 일의 중대함을 잘 알고 있는 영호성이 영화를 그대로 두고 갈 리
가 없다. 영호성은 ‘이미 장염의 부친과 언약을 맺었으니 염려하지 말라’ 는 말로 영화를 설득하는 데 성
공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장염의 곁에 남게 된 사람은 향이, 하후연, 지염도, 소걸이었다. 장염은 그들 하나하나
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 먼
길을 떠나려고 하니 마음에 걸린 것이다.
저녁 식사 후 산책을 하고 있는 장염에게 향이가 다가왔다.
“장 동생, 나는 당분간 강호를 유람했으면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향이는 장염이 자신과 동행하자고 말해 주기를 바랬다. 따지고 보면 자기가 강호를
유람하는 것과 장염이 오행혈마인을 찾아 강호를 떠돌아야 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장염은 그런 향이의 속마음까지 세세히 알아줄 사람이 아니다. 장염이 웃는 얼굴로 향이를 보고
물었다.
“누님이 강호 유람이라구요? 설마 혼자 가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
본래 향이가 강호 유람을 하겠다는 의사를 처음 밝힌 사람은 지염도였다. 그때 지염도는 ‘제가 향 사부
를 모시고 다니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 그 뒤 지염도는 하후연에게 사연을 말했고, 당연히 하후연도 지
염도와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하후연으로서는 장염을 조금 더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소걸이라는 정식 제
자가 생겼으니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후 소협과 염도가 함께 가기로 했어요.”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향이의 속도 모르고 장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장염의 경험으로 볼 때 인간은 여행을 통해 성숙해질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의 여행을 통해 향 누님은
검기점혈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염이 즐거운 얼굴로 여행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말
하자 향이는 애매한 눈으로 잠시 장염을 바라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리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그저 장 동생이 조금 걱정되어서요. 그러나 장 동생이라면 노숙을 하게 되더라도 먹고 잠자
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니 제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요.후?!”
향이가 조금 허탈하게 들리는 웃음르로 말을 맺고, 소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장염은 달빛 아래 멀어져
가는 향이의 뒷모습을 막연히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처음으로 맞는 밤
이었다. 그러나 이 평온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하루 더 머물수록 오행지기의
결합은 더욱 빨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행지기가 다 모이면 나로서도 손쓸 도리가 없게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려 오 년 만에 찾은 고향의 밤이다. 장염은 어린아이가 아껴둔 음식을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먹는 것처럼 추억이 깃든 천주교 근처를 조심조심 돌아다녔다. 눈길 닿는 대부분이 유년 시절
에 장소, 이삼인과 더불어 뛰어놀던 자리였다.
마침내 한 바퀴를 다 돌고 마당으로 들어서던 장염은 달빛 속에서 오 년 전 이른 아침 자신에게 찾아
왔던 두 친구의 환영을 보았다.
‘삼인아, 너는 사라지고 이제 장소만 남았구나.’
한 순간 장염은 모든 것이 꿈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찌 지난 오 년 간 장가촌에 일어난 일들이 꿈
이랴! 진원청 사부를 만나고 장가촌 사람들과 더불어 강호 유람을 떠났다. 그리고 만남과 이별의 반복,
그것은 어쩌면 장염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인생의 진면목인지도 몰랐다.
‘날이 밝으면 이삼인과 장소의 집에도 들러 안부 인사를 드려야겠다.’
머뭇거리던 장염은 자신이 오랜 시간 머물던 작은 방 앞에 섰다. 이 작은 방에서 나와 강호를 누비고
다시 돌아왔다. 이제 자신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 길은 이 방에서 나와 바라본
세상보다 더 넓은 곳일까?
덜컥.
장염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상체를 밀어 넣었다. 좁은 방에는 하후연과 지염도가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장염은 한족 구석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조금 쉰 후에 날이 밝는 대로 무당파에 들렀다
가 귀주성으로 향할 것이다. 그렇다면 느긋한 기분으로 행복을 만끽하는 것도 오늘 하룻밤뿐이다. 이제
다시 오행혈마인과 자신의 길고 지루한 추격전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날이 밝자 장염과 그 일행은 조용히 장가촌을 떠났다. 장염이 머문 하루 동안 장가촌에는 적지 않은변
화가 일어났다. 한마음회가 갑자기 문을 닫았고, 한동안 믿기 어려운 소문이 떠돌았다녔다.
그것은 ‘무려 이 년 동안이나 장가촌을 휩쓸고 다니던 한마음회의 발한당들이 장삼의 집 마당에 무릎
꿇고 앉아 오래도록 훈시를 들었다’ 는 것이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장삼이 마루에 앉
아 뭐라고 한마디 할 때마다 장정들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과장된 말이건 간에 한마음회는 장가촌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간혹 한마음회에서 밥
을 얻어먹던 사람들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그들이 모여서 새롭게 악행을 일삼는다든가 하는 일들은 없
었다. 그것을 두고 장가촌 사람들은 ‘장삼의 아들이 크게 출세를 하여 한마음회가 달아났다’ 고 말했다.
그리고 장삼의 아들이 어느 정도나 출세를 했는지는 며칠 뒤에야 조금 밝혀졌다. 무당파의 장문인이 수
십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장삼에게 찾아와 인사를 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 뒤로 무당파의 기인들은 장
가촌을 지날 때마다 장삼에게 들러 다른 어려움이 있는지를 살피고 돌아갔다. 뒤늦게 한마음회의 소행이
무당파의 귀에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장삼이 이렇게 유명해지자 현령도 일이 있을 때마다 장삼 일가를 초청하려고 애썼다. 장삼과 그 가족은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장삼은 외부의 초대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고, 여전히
천주교에서 짚신을 지어 팔았다.
제 4장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면 도에 이른다
장염은 소걸과 함께 무당산에서 남하하여 호남성을 지나고 있었다. 십이월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장염
이나 소걸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장염은 한서불침의 신체라 그랬고, 소걸은 오행토납법으로 제
온을 적절히 조절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소걸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는 장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과거 진원청 스승이 자신을
볼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직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공부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소걸을 보면
즐거웠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장염을 따라나서게 된 사람은 소걸뿐이다. 이무심은 끝내 장가촌에 남아 폐관 수련
에 들어갔다. 장염이 피하라고 은근히 권유했건만, 이무심은 금거산과 약속한 단오절의 비무를 끝내 떨
쳐 버리지 못했다. 향이는 하후연과 지염도를 데리고 북상했다. 장염이 귀주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하
를 해야 하니 향이는 그 반대를 선택한 셈이다.
장염과 지금까지 동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을 어귀에서 헤어졌다. 이번에는 길일을 따로 잡지 않았지
만, 마치 오 년 전의 그날처럼 장가촌 사람들이 배웅을 했다. 덧 없이 반복되는 그 환송에 장염의 마으
이 저려왔다. 다시 한번 미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자와 남겨지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모두 다
시 만나기를 희망하지만 과연 미래는 희망적인 것일까?
장염이 성큼성큼 걷는 자신의 걸음을 종종걸음으로 따라붙는 소걸에게 물었다.
“춥지는 않으냐?”
이미 십이월에 접어들었으니 완연한 겨울 날씨였다. 걸음을 잠시라도 멈추면 한기가 스며들 지경이니,
여행은 소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정도는 시원한 거죠.”
“그래? 너는 아주 춥게 살아온 모양이구나.”
소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할 말을 궁리했다.
‘내가 춥게 살아왔나?’
지금까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갈 뿐 그날이 추웠는지 더웠느지, 혹은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스승님, 어떻게 살아야 추운 거예요?”
“………..”
자염은 일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라….’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추운 것일까? 단지 혹한의 날씨를 춥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헐
벗고 굶주린 것인가? 혹은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이 살아온 것일까? 소걸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질
문이지만 장염은 괜히 그 물음 앞에 진지해지고 말았다.
“그러게 말이다. 정작 말을 하고 보니 나도 잘 모르겠구나.”
“우헤헤헷!”
소걸이 뭐가 좋은지 한번 크게 웃고는 좌우를 살피기 시작했다.
장염은 산다는 것과 춥다는 것에 대해 이러저리 생각하다가 소걸이 주변을 기웃거리자 피식 웃고 말았
다. 어느 틈에 소걸은 자신이 던진 질문 자체를 떨쳐 버리고 있었다. 그것을 무상이라고 ㅏㄴ다면, 소걸
이 벌써 다 잊어버린 것을 자신은 아직도 붙들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허어,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더니…’
처음으로 맞은 정식 제자이며, 그 제자와의 첫 여행이었다. 자신도 어지간히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
는데, 며칠 살펴보니 소걸은 더했다. 처음에 장염은 소걸을 장가촌에 남겨두려고 했으나 홀로된 아이를
남겨두기가 안쓰러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물론 그때 까지만 해도 장염은 소걸이란느 아이의 적응력 이
라든가, 정작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에 그렇게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주성으로 가는 도중 장염은 소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야 했다. 우선 소걸은 우
려했던 것만큼 스승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것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고
잃음에 대해 담담했던 것이다.
자신이 마치 가다듬어 만들어진 도기라고 한다면 소설은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것 같았다. 자기를 돌
아보면 스승과의 인연이 있은 후 집착을 버리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소걸에게는 그런 진지한 고민조차 의미가 없다.
정면으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장염은 잡스런 생각을 떨치기 위해 어깨를 폈다. 그리고 습관적으
로 정면의 바람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무얼 좀 먹고 가야겠다.”
장염이 멀리 나부끼는 주막의 깃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침나절 이후로 한 번도 쉴 곳을 찾지 못했으
니, 이 집을 지나친다면 언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될지 몰랐다.
관도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워낙 주막이 작은 터라
손님이 든다 해도 안에서 먹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저 나무 탁자와 의자는 밖에서 먹으라는
의미리라.
가까이 가보니 과연 주막에는 손님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작은 주방과 방 두 칸이
전부였다. 장염은 차갑게 얼어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맞은편에 앉으려던 소걸이 엉덩이가 깨지
겠다며 잠시 호들갑을 떨었다.
얼마 후 주인인지 점원인지 모를 턱수염 가득한 사내가 다가왔다.
“소면과 고기볶음을 조금 부탁합니다.”
“술은 필요하지 않수?”
장염이 고개를 가로젓자 사내가 입김을 훅훅 불며 안으로 사라졌다. 웨만하면 손님이 보이지 않으니 방
에서 들라고 해도 좋으련만 사내는 권하지 않았고, 장염도 묻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소걸이 투덜거렸다.
“으으으…. 이렇게 추운데 밖에서 먹어야 하다니… 스승님, 방이라도 하나….”
“이제 한낮인데 묵어갈 것도 아니면서 무슨 방타령이냐? 이 정도 추위로는 너의 엉덩이 살이 터지지 않
으니 염려 말아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걸의 떠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장염이 손을 들어
올려 탁자를 가볍게 내려첬다.
퉁.
탁자 위로 아지랑이가 퍼져 나가는 듯싶더니 주위가 금세 훈훈해졌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얼
어있던 탁자와 의자는 물론 바닥의 흙들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리고 마치 봄이라도 시작된 듯 나른한
기운이 탁자를 중심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스승님, 그런 건 어떻게 배우는 거죠?”
“왜? 너도 하고 싶으냐?”
소걸이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Z였다. 지금까지 뭔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
기술은 정말 훔쳐서라도 배우고 싶었다. 저런 기술이라면 천하를 떠돌아 다닌다고 해도 얼어 죽지 않을
것이다.
“어렵지 않지. 천지에 가득한 것이 기운인데, 모든 기운은 서로 반대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거든. 예를
들면 찬 것은 더운것에, 그리고 젖은 것은 마른 것에 말이다.”
소걸이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장염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마음으로 ‘찬 기운아, 더운 기운을 데리고 오너라’ 라고 말을 하면, 보다시피 이렇게 되는 거
지.”
“그렇군요!”
소걸이 탄성을 크게 울렸다. 그렇게 간단한 이치를 지금까지 몰랐다니, 세상의 모든 비렁뱅이가 이 사
실을 알게 된다면 떨며 지낸 세월이 아까워서 어쩔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말아야지.’
귀찮기도 했지만 이 귀한 것을 왜 널리 퍼뜨린단 말인가! 소걸은 장염이 가르쳐 준 주문을 잊지 않기
위해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기술의 오묘함에 비해 주문은 의외로 간단했다.
‘단지 ‘찬 기운아, 더운 기운을 데리고 오너라’ 라고 했지.’
장염은 소걸이 뭐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피식 웃고 말았다. 가끔씩 들리는 말은 분명히
‘찬 기운아, 더운 기운을 데리고 오너라’ 였기 때문이다.
“소걸아,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네가 세상의 기운들과 친해져야 할 것이다.”
“아! 당연하죠.”
소걸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할 때 사내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그런데 날씨가 갑자기 많이 풀어졌나…. 방보다 밖이 더 따뜻한 거 같으니… 덕분에 드시기에 불편하
지는 않겠수.”
사내가 소면과 돼지고기볶음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밖에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있었나 보다. 소걸이 사내의 수염을 보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저씨는 얼굴에 털이 많아 더울지 몰라도, 조금 전까지 우리는 얼굴이 얼어서 턱을 움직이기도 힘들
었다구요. 어차피 장사도 안 돼서 방도 널널할 텐데 찬 데다가 밥상을 차려주시다니, 그렇게 살면 조상
의 은덕을 못 받는다구요.”
“허어, 네가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냐.”
장염이 소걸을 향해 짧게 말한 뒤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직 아이가 철이 없어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못합니다.”
텁석부리 사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젊은 남자는 평범하게 생겼는데, 그가 데리고 다니는 아이는 더욱 평
범하게 생겼다. 말 그대로 일단 지나치면 기억나지도 않을 상판들이다.
‘아, 정말 싸가지없는 놈일세. 이걸 그냥 한주먹에 확! 그나저나 이곳에 화기가 넘치는 것을 보니 열화
신주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나 본데…’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데는 냉기가 넘치는데 탁자 부근만 포근할 리가 없다. 전설에나 나오는 열화신주
같은 거라면 그 하나만으로 팔자를 고칠 수가 있다. 사내가 가만히 장여과 소걸을 살펴 보다가 다시 좌
우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의 관도는 이미 인적이 끊겨 차갑고 건조한 바라만 휭휭 오갈 따름이었다.
‘쯧쯧!’
장염은 사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강호에 나와 이런 식의 눈빛으 어
디 하루 이틀 보았던가! 그것은 마치 거미가 먹이를 향해 달려들기 직전에 보여주는 차갑게 가라앉은 모
습과 같았다.
소걸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소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앞에 음식이 놓인 이
상 자기의 말로 사내가 화가 났는지, 혹은 다른 생각으로 낯빛을 굳히고 있는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
다.
“후, 후, 후루룩, 후룩.”
장염도 텁석부리 사내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인 후 젓가락을 대접에 담았다. 아까부터 소면 냄새를
맡고 공복감이 더 심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참기도 힘들었다. 장염은 속으로 제발 사내가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아줬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장염의 바램과는 달리 대단한 결심을 굳힌 뒤였다.
꽝!
텁석부리 사내가 주먹으로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듣자듣자 하니 아래위가 없는 애새끼로구나. 그러나 어찌 그것이 너만의 잘못이랴! 으뜸은 너를 낳은
부모요, 그 다음은 너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의 죄다! 내가 오늘 장사를 접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 두 놈
을 용서할 수 없다!”
“……….”
장염과 소걸이 소면을 입 안 가득 넣은 뒤 우물우물 씹으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텁석부리 사내는 자신
의 말에 더욱 고무된 듯 점점 음성을 높혀 소리쳤다.
“이 개뼉다구들아! 무얼 쳐다보는 게냐! 오늘은 관 어르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으니 살고 싶다면 가
진 것을 다 내놓고 썩 꺼지거라!”
말을 하다 보니 과거 한때 비적질을 할 때 쓰던 말이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어쩌랴! 어차피 보주
를 빼앗으면 멀리 달아날 작정이니 비리비리한 사내가 포두와 함께 다시 찾아온대도 말짱 도루묵일 것
이다. 오늘 보물을 건지면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마음으로 착실하게 살아볼 것이다.
“귓구멍이 막혔는냐!”
관포삼이라는 이름을 가진 텁석부리 사내의 눈이 부릅떠졌다. 얼굴을 부드럽게 하면 모르되 한번 인상
을 구기면 과거의 관록이 그대로 나오는지라 인근에서도 알아줬다. 그런데 지금 인간적으로 지극히 평범
하게 생긴 사내가 우물거리며 눈을 끔뻑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보니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이로구나.’
아무래도 연장을 보지 못해 실감이 나지 않는가 보다 생각한 관포삼은 재빨리 부엌으로 뛰어갔다. 그리
고 눈에 뜨이는 대로 식칼 하나를 부여잡고 다시 마당으로 달려나왔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자리에 멍
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너희가 순진한 것 같아서 특별히 관 어르신께서 목숨만은 보존시켜 주기로 했다. 얌전히 가진 것을 탁
자 위에 올려놓아라!”
꿀꺽.
장염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 안에 가득한 소면을 삼켰다. 정말 이런 식으로 결과가 뻔한 일을 만나면 처
신하기가 쉽지 않다. 두들겨 잡기도 그렇고 바른 생할을 가르치기도 왠지 낯간지럽다. 아무래도 사내가
뭔가 착각하고 저러는 것이지 싶다. 대체 사내는 소걸과 자신의 모습 어디에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일까?
“주인장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말씀이라도 좀 들어 보십시다. 급하게 재물이 필요한 분 같
지는 않으시고, 장사를 잘 하시던 분이 그렇게 돌변하시니 왠지 죄스럽군요.”
“………”
과포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젊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이놈아!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는데 왠 잔말이 많으냐! 설마 영화신주가 네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것
은 아니겠지? 모든 것은 보물을 가진 네놈의 잘못이니 피차간에 말로 끝내도록 하자!”
그제야 장염과 소걸은 사내가 갑자기 도적으로 변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아챘다. 사내는 근방만 따뜻해
진 것에 오해를 한 것이 분명하다. 피수주, 피화주, 열화신주, 한음신주 등과 같은 절세의 기물이 있어
물과 불과 냉기와 열기를 다스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어찌 지금의 이 현상이 그런 기물
탓이랴! 장염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오해입니다. 오해.”
소걸도 사내가 원하는 것이 열기를 뿜는 보물인 열화신주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소걸은 그런 보물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소걸이 돼지고기음을 입 안 가득 집어 넣고 말했다.
“아어이(아저씨), 그어거느 어으어(그런 거는 없어요).”
제 딴에는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고 한 것인데, 관포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말았다.
“이 미친놈들아! 내가 왜 너희들에게 그런 이상한 소리를 들어야 하느냐! 어서 탁자 위에 오려놓지 못
할까!”
꽝!
돼지고기볶음이 담겨 있던 대접 앞에 식칼이 박혀 들어갔다. 칼을 탁자에 박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관포삼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내가 사십 년 가까이 살았지만 너희처럼 미련한 놈들은 처음 본다! 어서 올려놔! 올려놔! 오려놔!”
“아어이(아저씨)…..”
“소걸아, 그만두거라. 입 안에 음식을 담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 삼킨 후 천천히 말을 해야지. 지
금 누가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니지 않는냐?”
“……….”
장염이 부드럽게 소걸의 말을 끊었다. 소걸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장염을 바라보았지만, 틀린 말이 아
니었으므로 그냥 열심히 씹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관포삼은 어린아이가 우물거리며 말하는 것에 짜증
이 난 상태였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그래도 저 어리놈보다는 낫구나, 그렇다고 해도 열화신주는 관 어르신 앞에 내놓아야 한다.”
관포삼이 다시 탁자 위에 박힌 식칼을 뽑아 장염과 소걸의 앞에서 흉흉하게 휘둘렀다.
후익, 휘익, 휙.
장염과 소걸은 가끔가다가 식칼을 힐끔거릴 뿐 먹는 일에 열중했다. 관포삼은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칼
으 휘둘러도 두 사람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차라리 두 사람이 다 먹고 난 뒤에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싶
었다.
꽝!
다시 식칼이 탁자에 박혔다.
“헉헉, 씨벌, 이것은 결코, 헐헉. 힙에 부쳐서, 후우,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
주변이 조용해지자 장염과 소걸은 소면과 돼지고기볶음에 정신을 집중했다. 간포삼은 탁자 주변을 서성
이며 무슨말로 열화신주를 뺏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동안 장염과 소걸은 그릇을 모두 비울 수 있었다.
한동안 젓가락으로 빈 볶음 그릇을 이리저리 건드려 보던 소걸이 말했다.
“아, 잘 먹었다. 아저씨 생긴 건 산 도둑인데 요리는 정말 잘하시네요.”
관포삼이 들은 체도 않고 장염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생각해서 먹게 해주었다. 이제는 좋은 시간도 다 갔으니 선택해라. 보물
을 내놓을 테냐, 아니면 모가지를 내놓을 테냐?”
장염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보물이 저희에게 없으니 어쩌죠? 이거 그냥 제가 내공으로 만든 열기
구 일 뿐입니다.”
내공이라는 말이 나오자 관포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어디 상대의 말 한마디에 호락호락 넘
어갈 관포삼이던가!
“흥! 내공 좋아하시네! 과거에 관 어르신께서 이십 년 간 강호생활을 했지만, 그런 공력이 있다는 이야
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네놈이 무슨 장천사 같은 신선이라고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스승님, 그냥 가죠.”
마침내 참지 못한 소걸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사람에게 길게 설명을 늘어놔야 한
느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오해다. 오해는 푸어줘야 하지 않겠느냐?”
장염이 자리에서 일어나 관포삼에게로 걸어갔다. 관포삼은 장염이 다가오자 재빨리 식칼을 뽑아 들고
앞가슴을 가렸다.
“네놈이 뭔가 믿는 것이 있어서 그처럼 말장난을 늘어놓았구나!”
보물에 대한 욕심으로 식칼까지 뽑아 들었지만, 상대가 다가오는 지금은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
들었다. 저도 모르게 물러나던 관포삼이 이제는 얼굴도 흐릿한 부처를 떠올리며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 씨벌, 그냥 음식이나 만들어 팔 것을…. 잘 나가다가 옛날 생각을
했다니!’
상대가 설마 내공의 고수랴 싶었지만, 이 순간 자신보다 강해 보인다는 느낌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관포삼은 혹시 재수가 좋으면 살길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처님, 이번 한 번만 도와주쇼!’
연거푸 뒤로 물러나던 관포삼의 발이 무엇에 걸린 듯 비틀겨렸다. 다가오던 젊은이가 문득 발 밑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순간 관포삼은 눈을 질끈 감고 젊은이의 가슴 어림으로 들고 있던 식칼을 냅다 집
어 던졌다.
툭.
‘툭?’
관포삼은 식칼이 몸에 닿는 소리가 ‘푹’ 이나 ‘퍽’ 이 아닌 ‘툭’ 이라는 사실에 눈을 번쩍 치켜떴다. 식칼
은 젊은이의 가슴에 붙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꽂히거나 박힌 게 아니라 가슴 높이의 허공에 떠 있었다.
자기 내공이 고강하여 이기어 식칼을 한 것이 아니니 저 신비한 광경은 젊은이의 공력에 의한 것이리라!
젊은이가 손을 식칼의 아래에 대자 식칼은 젊은이의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관포삼은 자신
이 무림이 전설에나 나옴직한 사람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너, 그대는 보주가 없다니 믿고 그냉 보내주겠소. 다섯 푼이나 되는 음식 값도 받지 않겠소이다.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시겠소!”
장염은 텁석부리 사내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당신이 내가 누구인 줄 알았으니 보주가 없다는 것도 알것이오. 그러나 그대를 위해 한마디 좀
해야겠소. 그대가 과거에는 산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장사를 시작했으니 이제 다시 도적질을 해서야 쓰겠
소?”
장염이 손을 떨치자 식칼은 한편에 있던 탁자로 날아갔다. 탁자앞에 식칼이 이르자 탁자는 도끼로 팬
듯 절반으로 쫙 갈라졌다.
‘헉!’
관포삼이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는데 식칼은 빙그르르 돌아 마당 가운데로 날아갔다.
“이제 그대는 살길을 택하시오. 주막의 주인으로 살겠소. 아니면 도적으로 돌아가시겠소. 그대가 원하는
삶에 걸맞게 해드리리다.”
작은 식칼이 허공에서 주막 쪽으로 몸을 세우고 있었다. 관포삼은 젊은이가 저 식칼 하나로 주막을 반
쪽으로 가르려 한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산적임을 인정한다면 가를 것이 어디 주막 하나뿐이겠는가! 저
모습을 보니 말로만 듣던 신선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아침저녁으로 주무르던 보잘것 없는 식
칼 하나에서 저런 위력이 나올까!
“신선께서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그만……”
쿵, 쿵. 쿵.
무릎을 꿇은 관포삼이 머리를 땅에 박기 시작했다. 마누라의 유언으로 비적질을 그만둘 때 얼마나 모질
게 결심했던가! 그러나 채 십 년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리고 만 것이다. 관포삼의 이마가 찢어지
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관포삼은 눈물을 흘리며 얼어붙은 땅에 계속해서 머리를 찧었다.
본래 관포삼은 농사꾼이었으나 계속되는 가뭄과 홍수로 농사로 살 수 없게 되자 비적이 되었다. 산으로
들어간 관포삼에게는 제법 봐줄 만한 부인이 있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어느 날 관포삼이 일하
러 나간 틈에 소두령 중 하나가 관포삼의 부인을 겁탈라고 말았다.
수치를 느낀 관포삼의 부인은 관포삼이 돌아온 그날 새벽에 극약을 먹었다. 관포삼의 품 안에서 피르
토하며 죽어가던 부인은 관포삼에게 비적질을 그만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관포삼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
를 끄덕였다. 이건 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먹고 살기 위해 비적이 되었는데 그 바람에 마누라를
잃고 만 것이다.
며칠 뒤 관포삼은 술에 취한 소두령을 죽이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 뒤로 음식점의 사환과 주방의 보조
로 전전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리고 한적한 관도에 주막을 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보지도 못한 재물에 눈이 돌아가 마누라의 유언도 저버리고 다시 비적질을 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자. 죽어버리자. 죽어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관포삼은 머리
가 부서지도록 땅에 처박았다. 관포삼의 뇌리로 죽어가던 마누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기위해 비적이
되었고, 마누라를 비참하게 먼저 보내고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먹고 살 만한데 욕심을 부려 자
기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퍽. 퍽. 퍽.
피가 홍건히 배어 나와 머리가 닿는 땅이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죽기를 각오한 관포삼이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신선에게 감히 도적의 식칼을 던졌으니 살기는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관포삼이 허망
하게 죽은 마누라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꽈광!
다시 한 번 머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굉음이 울리며 지축이 흔들렸다. 머리와 땅이 부딪혀 이런 소리
가 날 리 없다. 깜짝 놀란 관포삼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헛!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 그의 앞에 서 있던 젊은 신선과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관포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
러보았다. 눈길이 닿는 사방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아아…. 나를 살려두고 가셨는가….”
관포삼이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젊은 신선과 아이가 있던 자리로 갔다.
“헉! 열화반점!”
신선이 사용하던 커다란 탁자 위에 손으로 눌러쓴 듯한 글자는 분명히 열화반점이었다.
“천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관포삼은 미친 사람마냥 사방으로 절을 올렸다. 재물 앞에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어 주시기 위
해 천신께서 강림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이제 천신께서 친히 주막의 이름을 정해주셨으니 이제 평생 흔
들리지 않으리라! 관포삼은 조심스럽게 탁자를 뒤집어 주막 한 편에 세워놓았다. 그 뒤로 관포삼의 열화
반점은 십이월 중의 하루는 소면과 돼지고기볶음의 값을 받지 않았다.
“스승님, 왜 그런 도둑에게 간판을 만들어주셨서요?”
소걸 같은 어린 한량의 눈에도 텁석부리의 엉큼한 마음이 보였다. 저런 도둑놈은 그저 한주먹에 박살을
내야 하는데 자기에게는 힘이 없다. 마음 한구석으로 스승이 호되게 버릇을 가르쳐 주기를 기대했다. 그
러나 스승은 오히려 한술 더 떠 탁자에 열화반점이라는 글씨를 쓴뒤 자신을 안고 훌쩍 떠나왔다.
소걸이 아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힐끔거렸다. 저 텁석부리 사내는 만만한 사람에게 또다시 강
도 짓을 할 것이 뻔하다. 다시 생각하니 찬 데다가 음식을 차려준 것도 얄밉기 그지없다. 그런 도둑놈에
게 당도반점이 아니라 열화반점이라니! 계속해서 투덜거리는 소걸에게 장염이 대답했다.
“우리가 먹은 음식 값이라도 치러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하핫!”
“그래도 저 험상궂은 남자는 도둑이 분명한데….”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떠나면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는 말이 있다. 흠 없는 사람이 없는데 그때마다
정죄하면 누가 도를 얻겠느냐?”
소걸은 장염의 속 편한 생각이 마음에들지 않아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흥, 우리는 스승님의 무공이 고강해서 무사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 음흉한 사람에게 당할
것라구요.”
“하하핫! 네게는 그리 보이더냐? 내 눈에는 그저 마음 약한 사람으로 보이던걸. 조금 불친절했지만 소
면을 그처럼 맛있게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
소걸이 한심하다는 듯 장염을 올려보았다. 소면이 맛있기에 용서를 해준다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
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넷째 스승으로 모신 장염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었다. 운남의 뒷
골목을 전전할 때 무뇌아가 있다는 소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어쩌면 우리 스승도 어린 시절 별명이 무뇌아 인지도 몰라.’
그러나 아무렵 어떤가! 얼마 전까지 박학다식한 스승때문에 고초를 었으니 이제는 무뇌아 스승과 더
불어 즐겁게 살면 그만이다. 설마 하니 저런 바보 같은 스승이 꼬장꼬장하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려구!
조금 전의 일의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지만 자신의 앞날의 위해서라면 차라리 저런 편이 낫다.
“스승님이 무뇌아라서 저는 좋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소거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무심코 내뱉은 말을 귀가 밝은 장염이 들은 것 같다. 이럴 때
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걱정이 되네요. 곧 눈이라도 내릴 듯 찌뿌등한데 이러다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게 아릴까요?”
거의 엄살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날씨가 과히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좋은 장염이 낮게 가라앉
은 하늘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흐음, 눈은 내일 점심에나 내릴 것이다.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께 ‘화산여의 쾌니 바르게 행해야 겨우
길할 것이다’ 라고 했다. 오늘 우리가 좋은 일을 했으니 설마 하니 노상에서 눈이야 맞겠느냐?”
장염이 하는 말의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내일 눈이 내릴것이라는 말은 귀에 확 들어왔다.
“스승님, 정말 내일 눈이 내리는 건가요?”
“당연하지 않느냐.”
대체 내일의 날씨를 아는 것이 뭐가 당연하다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생각이 없다. 스승이 허투루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 눈이 내릴 것은 분명한데 어디에서 쉬었
다가갈 것인지 염려되었다. 차라리 돌아가 텁석부리 사내의 주막에서 묵어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미
모든 것을 알고도 떠나온 스승이니 들어줄 리가 없다.
‘휴우…. 스승만 모시지 않은 몸이라면 뜨뜻한 방에서 배를 지지며 밤이나 구워 먹을 터인데….’
그러나 이미 스승을 네 명이나 모신 몸이니 이제 와 무를 수도없다. 무슨 젊어진 짐이 많다고 스승들은
한결같이 번잡한 일들을 자처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텐데…..’
아니, 자기 같으면 누가 알아준다고 해도 귀찮아서 하지 않을 것이다. 소걸이 성큼성큼 앞서 가는 장염
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장염이 뒤쫓고 있는 장경선은 그 시간 귀주성의 검령산 인근을 헤매고 있었다. 오행지기 둘을 합체한
뒤 장염에게 덤볐다가 호되게 당하고 정신없이 달아나다 이곳까지 왔다. 평생을 천하제일가의 식솔로 살
아온 장경선이라 달리 갈 곳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귀주성을 헤매던 장경선은 얼마 전 오행지기의 괴인이 자신에게 이끌려 찾아왔
듯, 검령산으로 한없이 쏠리는 마음을 느꼈다. 이미 오행지기의 합체를 맛본 장경선은 그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오행혈마인이 이곳에 있다!’
확신이 생긴 장경선은 검령산 인근을 맴돌다가 마침내 비룡장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비룡장에 다가갈수
록 전해지는 가슴이 뻐근할 정도의 쾌감은 저곳에 오행지기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장경선이 산봉우리에 앉아 맞은편 아래로 보이는 비룡장을 노려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바라보고 있었지
만 타는 듯한 갈증만 더해갈 뿐이었다.
‘아깝다, 저 절진이 아니라면 벌써 끝났을 터인데.’
며칠 전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가 진기가 고갈될 때까지 이러저리 펄떡거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살아
나온 것이 기적이었다. 무림에 전해지길 ‘비룡금쇄진은 절진이라 허락없이 든 자는 필히 사망한다’ 라더
니 허튼 소문이 아니었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 것 같았는데….’
이틀 전이다. 그날도 밤새 지켜보던 장경선은 새벽이 되자 크게 마음먹고 비룡장의 담을 넘었다. 그러
나 막 두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장경선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기경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홍죽림!
붉은 대나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밖에서 보던 비룡장의 넓이는 이 정도가 아
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홍죽 너머로 지평선이 보일 정도였다. 말 그대로 홍죽의 바다라고 해도 과연이
아니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홍죽림에서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소리뿐이라면 어찌 생명의
위험이 있었으랴! 땅 밑에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 올라 붉은 대나무와 안개의 음산함이 최고조에 달했
을 때다. 안개를 가르며 땅 밑에서 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모두 환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체가 움직인단 말인가! 아니, 검령산 구석에 바다처럼펼쳐진 홍죽을 볼때무터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검령산이 높고 넓다 해도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던 것이다.
애써 환상이라고 떨쳐 버리려는 순간 가슴으로 파고드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시
체의 손끝이 파고들고 있었다. 한기를 동반한 섬뜩한 공격 앞에서 환상이라 믿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걸음
을 옮기고 말았다.
찌이이익.
앞섶이 길게 찢어져 나갔다. 환상은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경실색한 장경선이 시체를 향해 두 손
을 휘둘렀다. 오행지기기 담긴 회선장이 시체의 몸에 적중되었다.
콰드드득!
시체는 사지가 절단이 되어 다시 안개 자욱한 땅으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죽은 자의 최대 장점은 다시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지가 절단된 시체가 꿈틀대며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안개 속에서 일어난느 시
체는 한두 구가 아니었다.
‘헛! 저 얼굴은!’
시체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순간 장경선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송가려! 분명 저 긴 머리의 여인은 송가 포목점의 딸인 송가려다! 그녀는 오 년쯤 전 각별한 애정을 기
울이다가 흡혈한 여자였다. 상대했던 여자 중에 가장 미색이 고와 지금도 간간이 생각나는 여자이니 착
각했을 리가 없다.
‘과연 이것은 모두 환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오 년 전에 죽은 여자가 시체로 돌아다닌단 말인가! 더구나 여기는 하남성이 아
닌 귀중성 검령산이다.
고민하고 있던 장경선의 곁으로 다가온 송가려가 두 손을 뻗쳤다. 적갈색 긴 손톱이 장경선의 목젖으로
파고 들었다.
장경선은 좌로 비켜나며 다시 한 번 회선장을 날렸다.
퍽!
송가려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 나갔다. 머리를 잃은 몸이 두손을 들어 올린 채 고목처럼 땅에 붙박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개 속에서 일어서는 시체는 모두 자신이 흡혈을 한 사람이거나 그 와중에 죽인
사람들이었다.
“으아아악! 요망한 것들!”
장경선은 비명을 지르며 장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급한 마음과 달리 시체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장경선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느 틈에 다가온 괴인이 자신을 향해 녹슨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은 허공에 서른여섯 송이의 매화를 피워 올렸다.
장경선이 신법을 극성으로 펼치며 날아올랐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매와 몇 송이가 어깨와 옆구리
에 파고들었다.
퍼퍼퍽!
장경선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눈을 부릅떴다. 대체 무엇이기에 오행혈마기를 뚫고 신체에 상처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죽창이다!’
어깨와 옆구리에 박혀 있는 것은 끝이 날카롭게 잘려 나간 홍죽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시
체들 틈에서 허둥대던 중에 오행혈마기가 흩어진 것이 분명하다. 마음이 흐트러져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위기를 느낀 장경선이 오행지기 천간목을 끌어올렸다. 다른 것은 모르되 오행지기 목기의 주인이 나무
에 꿰어 죽는 다면 개도 웃을 일이다. 그제야 환상에 의해 닫혀있던 장경선의 눈이 열렸다. 사방에서 파
도처럼 굽이치는 것은 과연 끝이 잘려 나간 홍죽이었다.
그 짧은 고통의 순간 장경선은 환상의 실체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진식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
과 죽음을 부르는 죽창의 조화였다. 환상은 자신의 것이었지만 공격은 저 죽창이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서 환상과 홍죽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천간목으로 홍죽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히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그
러나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은 예리한 홍죽이 아니라 진세가 끈임없이 만들어내는 죽은 자들의 향연이었
다. 그 끔찍한 것들은 모두 장경선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던 사실었기에 끝내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했
다.
‘이 홍죽의 바다를 건너면 괴로운 환상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경선이 이를 악물고 몸을 날리자 사물이 선으로 변해 뒤로 물러났다.
츠츠츠츠츳!
다급한 나머지 단지 달아날 것에 집중하자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설에나 나옴직한 육
지비행술이었다. 괴도사에게서 흡수한 금기가 근골을 금석처럼 변화시켜 주었기 때문일까? 이제 겨우 초
입의 단계였지만 그 덕분에 장경선은 죽음의 홍죽림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그러나 홍죽림을 벗어난 장경
선이 도달한 곳은 홍죽림보다 더한 곳이었다.
장경선이 도착한 곳은 깊은 계곡의 밑바닥이었다. 물론 이것도 진식의 변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
로운 진세는 장경선에게 숨 돌릴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우르르릉!
천둥 소리와 함께 계곡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환영이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비룡금쇄진에서 환상과
실체의 구별은 의미가 없었다. 장경선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몸을 숨길 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
았다. 장경선은 바삐 움직여 떨어져 내리는 암석을 피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바위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별수없다. 올라가자!’
작정을 한 장경선이 떨어져 내리는 바위를 밝으며 위로 솟구쳤다.
“허억!”
비룡금쇄진은 말 그대로 ‘날아오르는 용도 가둔다’ 는 진식이다. 조금 몸을 솟구쳐 본 장경선은 더욱 절
망하고 말았다. 계곡 위쪽에서는 돌풍에 휘말린 바위들이 서로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고, 그 부서
진 조각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뜬 장경선은 항거할 수 없는 돌풍에 몸이 빨려 들어갈것 같자 오행지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오행혈마기로 온몸을 보호한 장경선은
돌풍의 흡입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파우우웅!
돌풍의 중아으로 몸을 날리자 그의 몸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장경선을 빨아들인
돌풍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순간 검령산의 뒤편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장경선이 꼴
사나운 모습으로 튕겨져 나왔다.
콰다당!
온몸이 상처투성이었지만 자릴르 털고 일어나는 장경선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비룡금쇄진 덕분
에 위기도 많았지만 전설의 육지비행술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아직 원하는 대로 펼치고 거둘 수 없었지
만 적어도 생명을 보존할 길이 하나 더 열린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정말 저 진식은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것인가!”
장경선이 눈팡에 펼쳐진 비룡장의 전경을 둘러보며 탄식했다. 이미 오행지기를 두 개나 모았으니 저 안
에 있는 하나를 거두기만 한다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 사실상 오행지기 셋을 모으면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오행지기는 모두 다섯이니 언젠가는 모두 모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급한 일이 아니니 시간ㅇ르 두고
천천히 거두어주면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먼저 세 개의 기운을 모아버리면 자신은 그의 밥
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비룡장의 오행지기는 무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나오라… 나와라…. 누구냐… 어서 나와봐라…..’
진식의 두려움을 경험한 장경선은 이제는 오행지기의 사람이 나와주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
게 하염없이 앉아 있기를 벌써 삼 일째다. 그동안 비룡장의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했지만 그것도 들어가 봐야 확인할 것이 아닌가!
제 5장 남쪽으로 가는 사람들
장염이 귀주성의 성도 귀양에 도착한 것은 열화반점을 떠난 지 칠 일째 되던 날이다. 장염은 장경선이
귀주성에 있다는 말만 들었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들은 바가 없다. 그럼에도 태평하게 귀양으로
접어들자 본래 느긋하던 소걸의 마음이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스승님, 오행혈마인이 대단하다면서요?”
“아무렴. 대단하고 말고.”
소걸은 장염에게서 어떻게 오행혈마인을 찾을 것인지 듣고 싶었지만 장염의 입은 더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오행혈마인을 어디서 찾지요?”
“귀주성에 있다지 않는냐?”
소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다행히 귀주성에 들어서면서 기온은 겨울답지 않게 온화하여 유랑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찌 한도 끝도 없이 귀주성 전역을 다 돌아다닐까! 그간의 귀동냥으로
듣기로 오행혈마인이 모이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는데, 어러다가 스승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
다.
‘제기랄, 내가 만난 스승들은 죄다 일찍 죽어버리니 이것도 팔잔가.’
그러나 지금의 스승은 무뇌아인지 모르지만 마음은 한없이 착한 것 같다. 어떻게든 잔머리를 굴려 돕
고 싶은데 아무런 방도가 없다. 이러다가는 네 번째로 얻은 스승마저 비명횡사하기 십상이다. 입술을 질
근질근 깨물던 소걸이 다시 말했다.
“스승님, 제가 전에 좀 돌아다녀 봐서 아는데요…. 귀주성은 굉장히 넓걸랑요?”
귀주성은 굉장히 넓으니 마음만 가지고는 원하는 사람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뭔가 그럴듯한 방
도를 물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걸은 장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 소걸의 애타는 마음이 전달되
었을까? 걸어가던 장염이 멈추어 서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 녀석아, 돌아다닌 것으로 치면 나도 너 못지 않다.”
사실 비슷한 또래에서 유랑의 기간이나 거리로 치면 장염을 따라올 사람이 흔치 않다. 직업이 유랑극단
이라면 모를까. 묻는 질문에는 대답을 않자 소걸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씨이, 걱정해 주었더니 이게 뭐야, 에라. 나도 이제 모르겠다.’
소걸은 장염이 무슨 일을 하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기사 지금까지 자신이 남의 일에 이처
럼 신경 쓰기도 처음 있는 일이다. 아무래도 연이어 사부를 잃은 터라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소걸이 발
끝으로 땅을 차올리자 먼지가 ‘풀썩’ 하고 피어올랐다.
“하핫! 녀석, 심심한가 보구나. 이제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참거라.”
소걸은 그냥 마주 웃어주었다. 자금 싸나이 십삼 세의 이 착잡한 심사를 스승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늘에 계신 세분의 스승은 자기의 마음을 알아줄 터였다.
‘아아….. 스승님들……’
사실 귀주성에 들어서면서부터 소걸의 마음은 어수선했다. 처음으로 스승을 만나 수련하던 곳이 귀주성
의 귀양이고, 그 스승과 사별한 곳도 귀양이다. 그런 귀양에 들어서니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심란할 판
인데, 엉성한 스승을 지켜보자니 또다시 속이 뒤집어진다.
장염이 다시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소걸이 우직하게 생긴 장염의 뒤통수를 보며 물었다.
“스승님, 지금 뭐 하세요?”
장염이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말이다.”
“뭘 물어보시려구요?”
“황보세가가 어디에 있냐구.”
“황보세가는 저쪽에 있어요.”
장염이 고개를 돌려 소걸을 바라보았다. 소걸의 작은 손이 우측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표정과 손
가락에 담긴 힘을 보니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엇! 귀주성에 대해 잘 아는가 보구나. 잘됐다. 어디 가보자.”
소걸이 앞장서 명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귀양이라면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다구요. 여기서 얼마나 고되게 일을 배웠는데요.”
오래전에 맞아 죽은 그의 스승이 들으면 입에 거품을 물 일이지만, 언제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염
은 소걸이 어린 시절 고되게 일을 배웠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일을 배운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고되게 배웠다니 안됐구나. 그래, 무슨 일을 배운거냐?”
장염도 여덟 살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으므로 어린 시절의 노동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
만 고아인 소걸이 배운 일이 무엇이었는지가 관심사다. 고아로 자랐다고 들었으니 보통일은 아닐 테고,
무엇인가 더 정밀하고 어려운 일을 배웠을 것 같았다.
소걸은 차마 ‘소매치기를 배웠습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리를 굴렸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마음씨
착한 스승이 놀라지 않을,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그건, 한마디로 물건 배달 같은 일이죠.”
소걸이 짧게 대답하고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더 길게 아야기해 봐야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어린 나이에 물건 배달이라니 힘들었겠구나. 간혹 받을 사람이 바뀌거나 한다면 그 또한 큰일
아니냐?”
장염이 뒤따르며 진지하게 대꾸하자 소걸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물건 임자가 바뀌면……”
소걸의 발이 문득 멈춰졌다. 첫 번째 스승이 맞아 죽은 이유도 귀주신투가 점 찍은 물건을 훔쳤기 때문
이다. 잠시 멈칫거리던 소걸의 발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한참 만에 소걸은 황보세가라고 쓰여진 편액 아래로 장염을 데리고 왔다.
“스승님, 여기서부터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어요.”
황보세가는 중원의 대상이라 수많은 무사들이 지키고 있다. 소걸은 과거 첫 번째 스승으로부터 이 집의
어려움에 대해 들었다. 스승은 이 집에 자유롭게 출입하기를 얼마나 소원했던가! 소걸은 설레이는 마음
으로 편액을 바라보았다.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자신은 이제 황보세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장염은 장염대로 황보장성을 떠올리며 황보세가라는 네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래전 겨울 유랑
때 그에게 입은 호의를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물론 장가촌 사람들도 황보장성의 도움으로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상념에 잠겨 편액 아래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때다.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제법 매서
운 호통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누군데 감히 나의 앞길을 막고 서 있는 게냐!”
장염과 소걸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자 이제 십대의 소녀가 말위에 앉아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작은 소녀가 말 위에 앉아 있으니 상대적으로 말이 커 보였다.
워낙 말의 위용이 대단했으므로 소걸은 조금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 이런 일에 오래
기죽어 있을 소걸이던가! 게다가 가만 보니 소녀는 자신보다 두어 살 정도 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으면 냉큼 내려와서 안내를 할 것이지 큰소리는…..”
특별히 소녀의 귀가 밝지 않더라도 이 정도 거리에서 듣지 못할 리가 없다.
“흥! 이놈이 … 어디 두고 보자!”
지금은 아무래도 수적으로 열세이다 싶은 생각이 들자 소녀는 말을 몰아 대문에 붙였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거꾸로 잡고 문을 두들겼다.
탕, 탕, 탕.
“대낮부터 다들 어디 간 거야? 왜 아무도 안 나와 있어?”
안쪽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연이어 장정 둘이
나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이쿠, 작은 아가씨. 큰어르신께서 위독하셔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저희는 방금 손님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느라 늦었습니다.”
“안채에는 사람이 없대? 왜 당신들이 손님의 길 안내까지 맡아야 해?”
일이 급하면 문지기도 안채로 사람을 안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소녀는 뒤에 멀뚱히 서 있는 두사람
앞에서 위세를 과시하느라 괜한 트집을 잡고 있었다.
“그것이…. 큰어른신이 너무 위중하셔서…. 저희가 안채에 통보도 없이 손님을 모시고 뛰었습죠.”
장정의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결코 나무랄 상황이 아니다. 소녀의 공격은 뒤에 서 있던 장염과 소걸에
게로 향했다.
“당신들이 일을 흐릿하게 하니까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이 남의 집 앞마당까지 찾아와 기웃거리는 것 아
냐!”
장정들은 그제야 성질 사나운 아가씨가 왜 화를 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이 닫혀 있는 동안 지금
찾아온 방문객들과 밖에서 한바탕 말싸움을 벌인 것이 틀림없다. 지금 열을 올리고 있는 황보옥은 황보
세가의 둘째 어른이 뒤늦게 본 딸이라 황보세가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아가씨다. 비록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황보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별수 없다.
“너희는 누군데 감히 황보세가에 찾아와 소란을 떨었느냐?”
장정 중 인내심이 조금 부족한 이사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헐레벌떡 뛰어나온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낯선 사람들 때문에 아가씨의 잔소리를 들었으니 짜증이 난 것이다. 한눈에 척 보니 행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황보세가에 물품을 배달하러 오거나 인사차 들르는 경우이니 문지기라 해도 이들
에게는 상전처럼 군림할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소걸의 얼굴이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입 안에
가득 찼다는 뜻인데, 그런 소걸의 얼굴을 못 본 척 장염이 포권하며 정중히 대답했다.
“저는 장염이라 하는데 황보 어르신을 찾아왔습니다.”
이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다시 소리쳤다.
“주인 어르신께 인사하러 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너희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어르신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또 안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 지금은 황보가의 큰 어르신이 위독하셔셔 손님을 들이지
않으니 돌아들가라.”
곁에서 듣고 있던 소걸이 마침내 참견을 시작했다.
“아니, 아저씨는 우리 스승님을 언제 봤다고 가라 마라 하셔? 우리가 큰 손님이면 어쩔려구 그러셔?”
이사가 찔끔하며 한걸음 물러나자 황보옥이 쏘아붙였다.
“흥! 네가정말우리 아버지의 손님이란 말이냐?”
소걸은 장염과 황보세가의 관계를 모르니 뭐라고 답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게다가 주인의 딸인 것 같
은 여자 아이가 스승을 모르니 세가의 주인과 아는 사이 같지도 않다. 스승의 몰골을 볼때 이런 대 상인
과 그럴듯한 관계가 형성됐을 리가 없다.
‘무림인이라면 모를까…. 장사꾼이라면 스승님이 알 턱이 없지.’
점점 위축되어 가는 소걸의 모습을 지켜보던 황보옥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주접을 부리더니 꼴 좋게 되었구나!”
황보옥의 말을 듣고 있던 소걸이 장염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걸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
호에 나와 처음으로 자기보다 말 싸움 잘하는 계집아이를 만난 것이다. 스승에게 능력이 있었다면 황보
세가 앞에서 더 큰소리 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잘못은 스승에게 있는 것 같다.
장염이 소걸과 황보옥을 번갈아 바라보며 웃음짓다가 이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모시고 간 분이 당문의 장로이신가 본데, 아무래도 일이 잘 안 되는 것 같소. 더 늦기 전에 황보
장성 어른께 장염이 왔다고 전해주시구려.”
이사의 눈이 휘둥르레졌다. 이 사람은 조금 전에 모시고 들어간 손님이 당움의 장로라는 것을 어찌 알
았단 말인가? 게다가 찾고 있는 사람이 가주가 아니라 그보다 큰어른인 황보장성이다. 잠시 생각하던 이
사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황보세가의 손님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필시 그놈들과 한패일 것이다.”
장염이 이사의 돌변한 태도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탄식을 터뜨렸다.
“허어, 그대는 어찌 그토록 생각이 짧으신가…”
장염이 이사를 보며 탄식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그 옆의 장정에게 물었다.
“보시오. 그대가 보기에도 과연 내가 황보 대인의 손님 같지가 않소?”
육대반은 사내가 물어오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아니오.”
말을 하고 보니 아가씨의 눈빛이 싸늘하게 쏘아져 왔다.
‘헉! 내가 대체 왜 아니라고 했을까?’
이사도 자기보다 선배이고, 더구나 이 자리에는 아가씨마저 있는데 어쩌자고 손님으로 보인다는 망발을
했단 말인가! 육소반의 얼굴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굳어져 갔다. 진작부터 두 사람이 수상한 사람으
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의식 중에 이렇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대반아. 너 많이 컸다. 오늘의 일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
“…………..”
육대반은 이사의 말에 뭐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그렇게 육대반이 자기의 말에 놀라 잠시 멍한 얼굴로
서 있을 때다. 싸늘한 눈빛으로 육대반과 소걸을 바라보던 황보옥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
했다.
“어머나, 이제 보니 진짜 황보세가의 큰 손님들이셨구나. 나고 모르는 사이에 여러 번 다녀간 모양이니,
오늘 아무리 집안이 어수선하다고 해도 큰아버지께 모시고 가지 않을 수 없겠네.”
육대반과 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천방지축의 아가씨가 집안 분위기를 생각하지 않고 외인
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끝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두 사람은 황보세가의 어
수선함에 일조를 하게 될 것이고 가주의 불호령은 그들 모두에게 떨어질 것이다.
“저 두 사람을 손님이라고 했으니, 당신이 그들을 모시고 아채로 들어가세요.”
황보옥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육대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육대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한 걸
음 물러섰지만 이미 여우 같은 아가씨의 덫에 걸려든 뒤였다.
“어서 안내하지 않고 뭐 해요!”
마침내 육대반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장염과 소걸의 앞으로 나섰다. 장염이 육대반의 뒤를 따르자 소걸
도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물론 스승의 무공이 천하무적이라 들었으니 크게 염려할 바는 아니다. 그러
나 워낙 어려서부터 머리에 못이 박히도록 ‘황보세가는 위험하다’ 고 들었다. 사실 좀도둑들에게 황보세
가는 난공불락의 성이었기 때문이다.
당문의 장로 당정의 얼굴에 침통한 빛이 떠올랐다. 황보장성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
왔다. 애초에 당문 사람인 자신을 부른다는점이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그의 느낌은 여지없이 정확했다.
황보장성은 독에 당했는데 체력이 떨어진 뒤아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강호에 흔한 사독이라 약은 썼지만 황보 노형의 나이가 고령이라 견딜지 모르겠소.”
머리맡에 앉아 있던 황보장천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형님의 오랜 친구이자 당문의 장로인 당정이라면
의술과 독에 있어 달인이었다.그가 염려하는 것을 보니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다. 아니, 지금이라면 의술
의 문외한이라도 황보장성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누워있던 황보장성이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괜한 여유를 부렸다.
“허헛….. 내가, 뱀에, 물린 적이 없는데, 으음…. 요즘 사람들은, 기술도 좋아….”
“형님, 모든 것이 저의 불찰입니다. 저들이 설마 형님에게 손을 뻗칠 줄은 몰랐습니다.”
황보장천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귀주성의 상권을 놓고 몇 달째 대립하던 귀주상회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같은 상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인들의 세력 다툼에 무림이 개입될
줄이야!
“가주의 말씀을 들으니 그들이 흑사회와 손잡은 것 같소만… 하기사 그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평범한 사
독을 이처럼 절묘하게 다룬단 말인가….”
당정이 안타깝다는 듯 황보장천을 바라보았다.
“흑사회가 귀주상회를 도와 이처럼 악독한 짓을 하고 있는데 대체 귀주성의 명문정파들은 무얼 하고 있
단 말이오?”
본래 지역의 작은 상가들은 정파와 사파의 제자들에 의해 이런저런 명분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
나 상가의 경우 이미 그 자체의 힘이 대단하였기에 특별히 다른 문파의 손을 빌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상가에 손을 뻗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상가와 상가의 대립이 생기면 그들은 물건의
매입이나 판매를 통한 가격 경쟁으로 상대의 자금줄을 끊어 흡수 통합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전통적이 상가의 싸움이라고는 볼 수 없게 됐다. 몇 달 전 귀주상회는 일방적으로 황보
세가의 상단 운영을 금지시켰다. 황보세가에서는 그 결정을 따르지 않았고, 결국 상단의 책임자인 황보
장성이 중독되고 만 것이다.
“저들이 사파 무림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인명까지 해치고 있다면 상인끼리의 문제가 아니질 않소?”
황보장천이 옷깃으로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벌써 귀주성의 삼대무관에 사람을 보내 고수를 초빙했으나… 그중 두 곳이 이미 귀주상회 쪽으로 넘어
간 뒤였습니다. 상승문 홀로 우리를 돕겠다고 나섰으나 어찌 귀주성의 사파제일이라는 흑사회와 이대무
관을 당해내겠습니까?”
당정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정파와 사파가 같은 편에서 일을 하다니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일
어난 것이다.
“실은 귀주상회에서 정기적으로 천검문과 정무문에 보호비를 상납해 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정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돈이 문제인 것이다. 문파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
난 자금이 필요한데, 싸움밖에 모르는 무림인들이 어디서 돈을 마련할 것인가! 제자들의 입관비로는 겨
우 문파의 이름을 유지하기도 빠듯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주께서는 어찌할 생각이신지?”
명문정파의 힘도 얻을 수 없는데 상대는 인명을 가벼이 보고 있다. 이제 황보세가의 선택이란 자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묻고 있는 당정이나 그 질문에 한숨을 푹풋 내쉬는 황보장천이나 괴롭기는 마찬가지였
다.
“형님께서 이렇게 되셨으니 상단을 유지할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에 상단을 포
기할 걸 그랬습니다.”
상단을 포기한다는 말은 황보세가의 문을 닫는다는 말과 같다. 무력에 의해 상단을 내어주면 저들은 다
른 것도 요구해 올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이미 사파와 정파가 귀주상회 쪽에 섰으니 방법이 없다. 이번
일을 시작으로 황보세가는 아주 천천히 귀주성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장천아…. 으음… 흥망성쇠는 …. 하늘에 … 달린 것이 ….. 아니겠느냐? 헉헉, 어딘가에. 방법이… 있을
것이다…..”
“…….”
황보장성은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따. 흥망성쇠가 어디 가문의 일에만국
한될 것인가! 가쁜 호홉을 몰아쉬며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세상에 태어나 파란 많은 세월을 살았다.
‘그렇지만 그런데로 만족할 만한 인생이었다.’
몇 해 전 장염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회한 속에서 죽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겨울의 짧은
만남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로 가문에 돌아와 타인처럼 낯설던 친지들과 다시 교
제를 나누었다. 바라기는 죽기 전에 장염의 소식을 들어보는 것인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크
게 아쉬울 것은 없다. 그의 말 한마디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상 만나든 못 만나든 무슨 상
관이란 말인가!
황보장천이 점점 호홉이 약해져 가는 황보장성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오늘이 지나면 형님의 목숨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황보세가
가 그 이름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죽어버린 사람은 다시 살릴 수가 없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때다. 할 말을 잃고 앉아 있는 황보장천과 당정의 귓가로 총관과 육
반산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들은 누구냐?”
“큰어르신의 손님이라고 합니다.”
침통한 얼굴로 앉아있던 황보장천은 굳게 닫힌 방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독당해 누워 있는 형님의 손님이라니…..’
문밖에서는 총관과 낯선 사내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대는 뉘시기에 큰어르신을 찾는 것이오?”
“나는 사천성의 장염이라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황보장천은 황보장성의 얼굴에 별반 변화가 없자 다시주저앉았다. 형님이 내색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런 황보자청을 향해 당정이 씁쓰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은 어줍잖은 인연으로 상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것이다. 잠시 후
총관의 조심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어르신, 장염이라는 손님이 큰어른을 찾습니다만 어찌할까요?”
황보장천이 ‘그냥 돌려보내라’ 고 대답하려는 순간이다.
죽은 듯 누워 있던 황보장성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헉헉… 지금… 누가, 찾아왔다고… 헉헉 …. 한는 게냐…..?”
지켜보던 당정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황보장성의 숨이 더욱 가빠지고 청각 기능도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황보장천도 형의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따.
“형님, 장염이라는 사람이…”
황보장천이 큰 소리로 말하자 황보장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소원이 이
루어진 것이다. 처자식도 두지 않아 홀로 살다가 죽어갈 자신이 마지막 숨을 남기고 보고 싶었던 지인이
다.
“그를 …헉헉… 안으로…. 들어오라…..해라….”
총관은 황보장천이 문을 열자 당황하여 허리를 숙였다.
‘가주가 밖으로 마중을 나올 정도의 일이란 말인가?’
곁눈질로 장염이라는 사람과 어린아이를 보았지만 어디에도 특별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황보세가에
서 자라나 수많은 손님을 대했지만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어서 오시오. 안으로 들어갑시다.”
장염이 황보장천에게 읍을 해 보인 후 마루로 올라섰다. 총관은 혹시나 뭇슨 다른 분부가 있을까 싶어
장염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장염과 총관이 함께 방으로 들어가자 소걸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들어찼다. 황보세가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조마조마했던 기분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헹! 우리 스승님이 어떤 분이신데, 진작에 길 안내나 할 것이지.”
곁에서 듣고 있던 황보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채까지 데리고 들어온 후에 혼찌검을 내려고 했는데
진짜 큰아버지의 손님일 줄이야!
그와는 반대로 다 죽어가던 육대반의 얼굴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큰어르신의 손님이 분명하니
이사와 아가씨에게 당할 일은 줄어든 셈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 육대반을 향해 황보옥이 앙칼지
게 소리쳤다.
“안내를 마쳤으면 나가볼 일이지 여기서 뭘 해요!”
“아. 그렇지! 소인 그만 물러갑니다.”
어색하게 서 있던 육대반이 후다닥 사라지자 황보옥과 소걸은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금 두 사람
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눈앞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곱게 자란 황보
옥과 제멋대로 자란 소걸의 싸움이 시작된 날이었다.
황보장천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장염은 누워 있는 황보장성의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당문의 노
장로는 황보장성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장염은 황보장성에게 눈인사를 건넨후 노
장로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진작에 황보 대인을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많이 늦어졌습니다.”
장염의 손이 자연스럽게 황보장성의 우측 손목을 잡아갔다. 당정은 흠칫 긴장하며 장염이라는 사람의
옆모습을 살폈다.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고우의 옴이다. 아직 장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당정으로서는
장염의 행동이 꺼림직한 것이다.
“허허… 죽기 전에…헉헉… 자네의….모습을 보니, 후우…. 마음이 ….놓이는구먼…..”
황보장성의 말을 듣고서야 당정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무례한 놈, 곧 죽아갈 환자의 손목을 다짜고짜 잡아가다니……’
조심하고 신중히 해도 모자랄 판이거늘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경박하게 손목을 잡았다. 오래도록 환자를
대해온 당정에게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당정의 마음이야 어떻든 장염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핫! 대인의 천수야 아직 많이 남은 것을요.”
“헉헉…. 그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당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처음에 긴장했던 표정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
에 들어선 것은 불만이었다. 곧 죽을 사람의 수명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뻔한 인사말이거나 과장된 아
부에 불과한 것이다.
“대인께서는 한숨 주무신 연후에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헉헉…아무렴….나 …. 잠들거들랑…..헉 ….깨우지나 말게…..”
장염의 손이 머리에 닿자 황보장성은 곧 조용해졌다. 황보장성의 거친 숨소리가 멎자 방 안에서 낯선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불안한 고요함에 놀란 황보장천이 눈을 크게 뜨고 장염을 바라보았다.
“헉! 형님은?”
“주무십니다.”
당정과 황보장천의 눈이 불신으로 부릅떠졌다. 조금 전까지 숨가쁘게 헐떡이던 사람이 한순간에 깊은
잠에 들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죽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장염이라는 사람과 황보장성의 대화로 보아 죽었다는 것을 잔다고 하는 것인가?
당정이 재빨리 손을 뻗쳐 황보장성의 목에 가져갔다. 손끝을 통해 희미하게 약동하는 것은 분명 황보장
성이 살아 숨 쉰다는 증거였다.
“어찌 이럴 수가……”
당정이 감탄을 터뜨리며 장염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약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는데 깊은 잠에 빠져든 것
이다. 이 정도의 의술이라면 평생 연구한 자신보다 나은 듯한데 아직 중원에 이런 젊은 의원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그대는 의술을 배우셨소?”
“아닙니다.”
당정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나는 평생에 이런 고명한 의술을 본적이 없소만.”
“이것은 의술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오?”
“화기를 이용해 황보 대인의 몸에 있는 독을 태우고, 쇠약해진 원기를 조금 보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당정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며 듣고 있던 황보장천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장 대협, 형님의 몸이 곧 낫게 되는 것입니까?”
“만약 다른 질병이 있었다고 한다면 제가 손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독기는 외부에서 들어온
이질적인 기운이라 어렵지 않게 태울 수 있었습니다.”
어둡던 황보장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가업을 뺏길 수 없다는 자신의 고집 때문에 형님이 죽임을
당할 뻔했다. 그런데 이제 기적이 일어나 다시 생명을 건졌으니 그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감사하오. 참으로 감사하오.”
당정이 잠시 황보장천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소협은 무림인이시구려? 별호가 어찌 되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소이까?”
“그저…. 외호라 하시지만……”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여졌다. 이곳에서 자신이 누군지를 말하면 괜한 소란이 일지나 않을
까” 그러나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면 굳이 숨길 까닭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황보세가의 도움이 필요하
기도 한 때였다.
“저는….. 사천성의 장염이라고 합니다.”
사실 장천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저 지어서 부르는 것일뿐, 장염의 별호는 아니다. 장염은 스스
로를 장천사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내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장천사란 부적에나 나오는 신앙의 대상이지
사람이 차지할 이름이 아닌 것이다. 요리를 배우던 시절부터 사천성의 장염이라고 했으니 지금도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당정이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사천성의 장염이라는 특이한 별호는 귀에 익지 않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니 사천성 출신의 장염이라면 당금 무림에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당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헉! 대, 대협이 진정, 사천성에서 오신 장천사, 장염이라는 말씀이시오?”
오늘날 장천사 장염이라는 이름은 일반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요, 무림인에게는 지존이나 다름없었다.
무공과 인품에 있어 필적할 자가 없다는 그는 혈마사의 손에서 강호를 구하고, 구대문파 수장들과 어깨
를 나란히 한다고 했다. 그의 스승이 천하제일인 진원청인데, 청출어람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장사를 하는 황보장천 역시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장천사 장염이라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황보장성에게 더욱 신격화된 인물이다. 형님에게 ‘황보 대인’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 그저
한때 형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려니 생각했다.
‘형님이 언제 이런 사람과 교분을 나누었다는 말인가!’
황보장성은 숫기가 없어 사람을 사귀지 않음은 물론이요, 사람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몇 년 전
부터 세가로 돌아와 손님을 편하게 맞아주고는 있지만 그전까진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형님은 교역을 하느라 평생 유랑했는데…… 어디서 이런 기연을……’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염도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제가 사천성의 장염은 맞으나 장천사라는 이름은 너무 과장된 것입니다. 그저 편히 친구로 맞아주십이
오.”
이미 크게 놀란 당정과 황보장천은 허리까지 숙이고 말았다.
“저희가 어찌 감히 대협의 친구가 될수 있겠습니까?”
당정이 급히 말을 받자 장염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번졌다.
“제가 부덕하여 친구 사귀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군요.”
그러나 어찌 장염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랴! 지나치게높은 배분에 무공마저 범인의 경지를 떠난
터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할 뿐이었다.
빗자루 든 김에 마당 쓴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장염이 문가로 가며 말했다.
“저는 잠시 물러나 쉴 터이니 대인께서 일어나시면 제게 기별을 주시기 바랍니다.”
아까부터 문 앞에 서 있던 총관이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장염은 총관에게 편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문득 장염이 고개를 들어 회색
빛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이래서 사람들은 자연으로 가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사람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해준다. 어디 높고 낮음뿐이랴? 선한 사람이고 악
한 사람이고 가리지 않고 같은 혜택을 베풀어준다. 그러나 사람은 아주 잠깐의 순간이지만 피아가 구별
되고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다.
장염이 방문 밖으로 나오자 허둥지둥 총관과 당정, 그리고 황보장천이 뛰어나왔다. 황보장천이 총관에
게 눈짓을 한 뒤 장염의 앞으로 다가섰다.
“장 대협, 제가 별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황보장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총관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마도 별실로 뛰어가는 것이리라.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장염이 황보장천의 눈동자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황보세가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밖에서 들었다. 그
래서 더욱 그의 행동이 다급하게 보이는 것일까? 귀주상회의 뒤에는 독을 사용한 흑사회가 있따고 했다.
‘게다가 그런 귀주상회를 명문정파가 돕고 있다니…..’
어쩌면 이모든 것은 다 하늘의 뜻일까? 원하던 바는 아니지만 자기의 품 안에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무상신패가 있다. 인간의 이기적이 욕심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지금은 정파와 사파의
구별 없이 모두가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었다.
“호의를 베풀어주시니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장염은 오행혈마인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강호행을 시작한 자신의 생각이 짧은 것인지도 로른다고
생각했다. 오행혈마인과 흑사회와 위선적인 이대무관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경재학은 나의 스승이나 다름없구나!’
아는 사람의 어려움을 돕는다는 것과 무상신패의 주인으로 무림사를 둘러보게 되었다는 것은 다르다.
경재학이 무상신패를 떠맡기지 않았다면 무림인들의 분란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여전히 ‘세상의 가장 큰 문제는 오행혈마인이다’ 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몇 걸음 내딛던 장염이 소걸을 향해 손짓했다. 황보옥과 신경전을 벌이던 소걸이 쪼르르 달려왔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사람을 찾아야겠다.”
소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스승이 황보세가로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상
인들의 눈과 귀를 빌려 오행혈마인의 행방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귀주성이 드넓다 해도 상인들의 발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진기한 일은 금세 눈에 띌것이다.
장염과 소걸이 황보장천을 따라 별채로 향했다. 소걸이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혀를 날름거렸지만 황보
옥은 애써 못 본 척 외면했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보다 뜻하지 않게 잔개된 일에 더 신경이 쓰였다.
‘저걸 그냥…… 그나저나 이상하다. 왜 아버지는 저 거지 같은 사람들을 별채로 데리고 가는 걸까?’
별채는 세가 어른들이 어쩌다 한번 모일 때 외에는 개방을 하지 않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은
한둘이 아니다. 총관이 헐레벌떡 달려간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아버지가 손님의 길 안내를 자처한 것도
본 적이 없다.
황보옥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당정을 몇 번 힐끔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볼거리가 없는
데 텅 빈 안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 * *
소화촌에서 제갈위기의 오행지기를 흡수한 장소는 섬서성 서안 에 잠시 머루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오행지기를 흡수해서 광마신단의 광기를 억제하려고 했다. 광마신단의 광기를 억제해야
배신한 수하들의 온갖 사악한 수법에 걸리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무공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제갈위기의 오행지기를 흡수한 뒤로 계획을 전면 수정하고 말았다. 오행지기의 공능에 놀
란 것이다. 광마신단의 광기를 누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장소는 자신에게 일아난 변화를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자신의 의지대로 사물을 지배할 수 있게 된것이다.
장소는 검귀가 세를 얻은 장안객점의 특실에서 명상에 잠겼다. 몸 안에 갈무리된 오행지기는 서로 충돌
하지 않았다. 장소의 수기와 제갈위기의 토기는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합쳐져 있었다.
무상의 공력을 얻은 뒤라 이제 마교를 되찾는 것쯤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어느 때라도 되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오행지기의 합체였다.
‘내가 두 개의 오행지기로 이만한 능력을 얻었으니, 세 개의 오행지기가 합쳐진다면 나는 평생 그를 피
해 다녀야 할 것이다.’
그때는 자신이 마교의 주인이 되었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제 장소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피
튀기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내가 살아남으면 나는 신이 될 것이다.’
겨우 마교의 주인이나 무림의 재패 따위가 아닌 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장소의 가슴은 거세
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오행지기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 버린다면 누가 대적할 것인가!
‘그때는 장천사라 불리는 장염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수하들의 말에 의하면 ‘되살아난 장염은 무림의 전설이 되어 있다’ 고 했다. 당고랍산맥의 계곡에서 분
명히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지겨운 느낌이 들었다. 어디 그뿐인
가! 장염은 혈마사를 물리치고, 무림맹주와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콧대를 꺾은 뒤 천마후와 함께 사라졌
다고 한다.
다른 건 차지하고라도 천마후와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에 장소는 분노를 느꼈다. 무림의 명예는 어차피
관심도 없었으며 장염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영호화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이번에는 사지를 찢어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만들어주마.크하하핫!”
침묵하고 있던 장소가 웃음을 터뜨리자 특실의 지붕이 들썩거렸다. 검귀가 사방에 남긴 암호를 찾아 합
류한 수라마검과 사혼검 고명이 매복하고 있던 안뜰에서 긴장된 눈빛으로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내 그들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장소 교주가 기연을 얻어 광마신단과 마공의 광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들었으니 더 이상 무고한 죽음은 없을 것이다.
장소의 광소가 멎은 후 순찰영주와 검귀, 그리고 혈수서생 이면수가 찾아왔다. 그들은 서안에 도착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언제쯤 마교를 다시 접수하실 것인가를 물었다. 그들에게 배신당하고 쫓겨
난 기억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치욕스러운 것이다. 그들 중 아무래도 부상의 정도가 가장 심했던 이면수
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주님, 추잡한 놈들에게 너무 긴 단꿈을 허락하시는 게 아닌지요?”
“푸하하핫! 단꿈이라….. 그렇지. 놈들에게는 즐거운 시간이겠구나.”
장소가 웃음을 터뜨리자 마교 원로들의 고개가 깊이 숙여졌다. 이쨌든 자신들의 무능으로 그 즐거운 시
간을 허락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일이 있다. 이 일이 끝나면 나는 겨우 마교의 주인이 아니라 천하의 주인이 된다.
그때 잊지 않고 너희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마. 크하하핫!”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귀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천하의 주인이 된다라니, 장소 교주는 설마 하니
역모라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의 저 모습만으로도 나라 정도는 뒤엎을 수 있을 것이다.’
문득 검귀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얼마 전 소화촌에서 죽어간 제갈위기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다.
상대의 심장을 뽑아 먹은 이후에 교주는 한순간 마신처럼 보였다. 굉음과 함께 천지가 혼돈에 잠기고 땅
이 갈라졌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한 경지란 대체 무엇일까?
허리를 숙이 세 사람의 귓가로 장소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말코 도사들처럼 고상하게 천기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세상의 운명
이 변할 조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서 시작될 것이다. 내일부터 우리는 남진을 한다.”
“존명!”
세 사람은 반사적으로 머리가 터지도록 바닥에 처박으며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발현된 장소의 기운에
눌려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오고 만 것이다. 머리를 들어 올리던 세 사람의 원로 고수들은 서로 바
라보며 씁쓰름한 웃음을 지었다.
제 6장 도에 뜻을 두면 악은 생기지 않는다
각자 자기의 문파로 돌아갔던 오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원단이 되자 다시 경재학의 부름을 받았다. 혈마
사의 일로 지난해 원단에 무림첩을 받은지 꼭 일 년 만이었다. 소림사, 무당파, 화산파, 곤륜파, 아미파
장문인들은 서로 인사 나눌 때마다 탄식을 터뜨렸다. 이미 사대문파가 멸문을 당한 뒤라 오대문파도 겨
우 모일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 사대문파 중 다시 재건에 성공할 수 있는 문파는 과연
몇이나 될것인가!
정오가 되자 경재학이 의사청으로 나타났다. 몇 달 만에 다시 보는 경재학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장문인들은 경재학을 보며 저 모습이 오늘날 정파의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안녕들 하셨소이까?”
“……………”
경재학의 건조한 인사가 의사청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반갑게 마주 인사를 건네지 못
했다. 사실 안녕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사를 건넨 경재학조차도 자신의 인사가 낯설게 들릴 정도였
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오대문파 장문인들을 불러 모은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 달 전 마교의 삼존으로부터 사파와 더불어 그간의 일을 알리는 문서를 접수받았습니다.”
장무인들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그나마 마교 자체의 분란으로 일이 마무리 되었으니 망정이니
잘못하면 무림정파가 난리에 휩싸일 뻔하지 않았던가! 장문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삼존은 그나마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헌데 그 문서 속에 한 가지 경악할 사실이 들어 있었소이다. 여러 장문인들께서 직접 보시기 바라오.”
경재학이 탁자 위에 있던 목함을 열어 장문인들 앞으로 내밀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원정선사가 조
심스럽게 목함을 열었다. 목함 한가운데는 향목에 둥글게 말린 붉은 천이 놓여 있었다.
“아미타불…. 빈승이 꺼내보겠습니다.”
원정 선사가 주변의 장문인들에게 목례를 한 후 향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펼
친 후 신중하게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원정 선사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 읽기를 마친
원정 선사가 향목을 옆으로 건네주자 사대문파이 장문인들이 차례로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오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읽기를 마치자 의사청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미 보셔서 알겠지만 마교의 전대 교주 장소가 오행혈마인이라 하는데 그 능력이 하늘에 닿았다고 하
외다. 마교 원로 고수가 다 달려들었지만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니….. 믿어지지 않소이다만, 제갈위기의
경우를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이 가오. 정사가 그를 공적으로 선포하여 없애지 않으면 무림의 후환이 무
한할 것이라 하는데, 장문인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이다.”
대전에 자리한 어느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오행혈마인의 무위는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다.
그것은 같은 해에 있었던 혈마사와 비견될 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 오행혈마인이니 누가 감히 뭐라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어차피 무림맹의 분명한 태도가 요구되는 곳은 사실이었다. 한참
만에 화산파 장문인 상유천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어쨌거나 그간 숨겨져 있던 오행혈마인이 이처럼 공식적으로 드러난 일은 참으로 다행한 것이라 생각
하외다.”
다른 장문인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찾아내 제거해야 할 오행혈마인이니 하나라도 더
알게 되었다면 잘된 일이다.
“장소가 만약 다시 마교를 손에 넣으면 다시 정사대전을 일으키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니….”
상유천이 좌중을 둘러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너무 많은 피해를 입은 정파라 다시 싸움을 제안해야 하는
것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이번에는 정사가 공동의 적을 두고 싸우게
되니 그 피해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무림공적을 선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하오만…. 다른 장문인들의 생각은 어떠
하신지?”
“…………..”
상유천이 힘들게 말을 마치자 다시 의사청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무림공적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냥 말
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오대문파는 척살대를 조직해서 강호로 내보내야 한다.
정파의 척살대를 조직한다는 것은 다시 제자들을 싸움터로 내 몰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강호
에 나간 척살대의 생명은 누구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파의 고수들도 같은 목적으
로 강호를 떠돌고 있으니 불필요한 싸움을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라는 것 정도다.
이미 혈마사의 일로 큰 피해를 본 오대문파라 다시 제자들을 뽑아 살지 죽을지 모르는 일에 투입한다
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가 몇 배로 불어나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결국 장문인들은 상유천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원정 선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 대협의 말씀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 같구려. 우리의 척살대가 강호에서 장 대협의 도움을 받게 되
기를 간절히 바랄 분이오.”
경재학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결정된 것으로 알겠소이다. 그리고…. 장 대협에게는 무상신패가 있으니 무림맹의 척
살대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
장문인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장천사 장염이라면 굳이 무상신패가 아니더라도 곤경에 처한 무리들을 도
와줄 것이다. 장문인들의 눈에는 무상신패로 생색을 내는 경재학이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장소가 섬서성 방향으로 달아났다고 하니 내달까지 각 문파에서는 제자들을 서안의 모처로 보내주시기
를 바라오. 사파보다는 조금 늦어지겠지만 서안에서 추격을 시작해 보십시다.”
말을 마친 경재학은 오대문파 장문인들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의사청에서 빠져나갔다. 더 이상 마주
앉아 있어봐야 냉랭한 분위기가 나아질 리가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끌려 다니듯 장문인들의 눈치를ㅠ
ㅁㄷ 살피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역시 그놈의 장염 때문이다.’
장염이 그의 인생에 나타난 이래 곳곳에서 말썽이 벌어지고 있다. 혈마사가 중원으로 뛰어들고, 오행혈
마인이 제멋대로 날뛰는가 하면, 구대문파 장문인들도 은근히 자신의 권위를 침해해 오고 있다.
‘이놈을 대체 어떻게 없앤단 말인가……’
이미 무공이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어 자신조차 어쩔 수 없다.
몽고의 기마대로도 놈을 없애지 못했고 오행혈마인으로도 실패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이
대로 장염이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둔다면 언제고 자신의 목숨을 취하러 올 것이다.
“허어… 죽 쒀서 개를 주었구나.”
경재학이 탄식으 터뜨리며 집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바라던 모든 것을 장염이 슬그머니 가
져가 버렸다. 무림인들은 이제 장염의 말이라면 의심없이 따르고 있다. 아디 무림인만 그러한가! 일반인
들에게 장염은 거의 천신이나 다름없다.
꽝!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닫혔다. 한번 굳게 닫힌 문은 해가 저물도록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날 경재학은
오대문파 장문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지도 못하고 집무실에서 머리를 싸안고 있어야 했다.
* * *
비슷한 시간 황하수채와 구룡채에도 긴급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마교가 사자를 보내 전대 마교 교주
장소의 위험성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무림에 처음 있는 정사마의 공적 선포를 앞두고 황하수채 채주 서
문당은 긴장과 동시에 뿌듯함을 느꼈다.
천년마교가 일개 수적인 자신에게 사파의 무림첩 배포를 요청했던 것이다. 물론 ‘구룡채와 함께’ 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지만 말이다. 전통적으로 배첩의 주인은 그에 걸맞는 고수들을 자발적으로 파견해야 했
다. 그러나 이미 장소룡이 수하들을 이끌고 강호에 나간 뒤다.
서문당은 삼도회 회주 남궁척과 의논하여 우선 강호의 사파에 무림첩을 돌리기로 했다. 그 내용을 보면
‘마교의 전대 교주 장소는 오행혈마인으로 무림의 공적이다’ 라는 비교적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 아래 찍
힌 작은 글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무림맹, 마교, 화하수채, 구룡채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으니 말
이다.
곧 이어 서문당은 남궁척의 말에 따라 ‘장소룡이 수하들과 함께 이미 출발했다’ 라는 소문을 흘렸다. 남
궁척이 ‘무림에 황하수채의 무림첩이 돌면 장소룡은 분명 섬서성으로 가줄 것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문당은 ‘설사 장소룡이 가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고 생각했다. 어차피 섬서성으로 향했
다는 오행혈마인 장소도 당분간은 중원을 떠돌 것이니, 척살대의 위치는 별문제가 되지 않느다. 아니, 더
나아가 서문당은 장소룡이 제발 오행혈마인 장소와 조우하지 않기를 바랬다. 본래 무림대의 같은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터라 이번 일로 아끼는 수하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교에게 연락을 받은 구룡채의 채주 구천검마 진원도 입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산적 두목에 불
과한 자신에게 마교 삼존이 주변 삼성의 사파 무림첩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함께하는 황하수채라
면 사파인들이 흠모하는 제일의 방파가 아닌가!
구천검마 진원은 즉시 구룡채의 이름으로 무림첩을 돌린 후, 수하들과 함께 섬서성으로 떠났다. 먼 길
을 떠나는 진원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황하수채의 거물들과 교분을
쌓을 수도 있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무림사에 다시없는 이변이 발생했다. 정사마 모두가 오행혈마인을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하고 나선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오행혈마인은 마교의 제보로 알려진 제천혈마 장소와 무림맹이
제공한 섬전수 장경선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중원 각지에 있는 불교사찰과 도관으로 무당파의 도첩이 날아들
었다. 그것은 소림사 이래로 무려 오십 년 만의 일이었다. 도첩에는 ‘무당파의 속가제자 분광검 노호가
귀문에 들었으니 서둘러 제압해야 한다’ 는 글과 함께 노호의 인상착의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모인는 자리마다 무림공적 오행혈마인과 오십 년 만의 도첩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정작 오
행혈마인 장소와 노호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뒤 누구의 입을 통해서인지
는 모르지만 오행혈마인의 머리에 은자 백 냥이 걸렸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져 나갔다.
은자 백 냥이라는 소문에 현상금 사냥꾼들이 오행혈마인을 찾아 강호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무림에 알
려진 오행혈마인의 무위를 생각하면 목숨을 내놓아도 불가능한 일이련만, 거액의 현상금에 눈이 먼 사람
들은 요행을 바라며 떼를 지어 다녔다. 곧 이어 무당파의 노호를 생포하면 은자 오십 냥, 머리만 가져오
면 은자 열 냥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래저래 사람들의 흥미를 잡아끄는 소식이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보거나 잡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무공이란 게 보통의 수준을 훌쩍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 * *
지난 며칠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황보세가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귀주성 전역에 소문이 나기를 조만간
황보세가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는데, 다시 열린 황보세가는 오히려 잔치 분위기였다. 귀주상회와 이대무
관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황보세가의 허세라고 말했지만, 황보세가의 기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뿐
아니다. 중병으로 죽어가던 황보장성이 거뜬히 일어나 이전보다 왕성한 힘으로 업무를 보고 있다는 소문
도 나돌았다.
흑사회의 회주 탁곤은 귀주상회 회주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 뒤에야 황보장성이 죽지않고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아!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시는가!”
“………….”
귀주상회 회주 신광익의 호통이 떨어지자 탁곤의 머리가 슬쩍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탁곤은 신광익의
수하가 아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미안함은 표시하지 않았다. 지금 탁곤은 수하의 실패가 조금 수치스러
울 뿐이었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소량의 독을 써서 그리 된 모양인데… 이번에는 확실히 처리하겠소.”
사실 독의 양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탁곤은 속으로 ‘대체 어떤 놈이 해독을 했는지 대단하다’ 고 중얼
거렸다. 이번의 일은 자기가 아끼는 심복인 독낭자가 맡아서 해?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실수도 없었
건만 갑자기 체면 구겨질 일이라니! 사죄하는 탁곤을 보며 신광익이 제법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흑사회가 잘만 해준다면 ‘재물이 없어 수하를 돌보지 못했다’ 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오.”
“…………”
탁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면 바로 저 소리다. 흑사회는 그동안 관원에
게 붙들려 간 수하들의 뒷바라지를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돈이 없었기 때문인데 흑도에서는 그런 흑사
회를 두고 ‘재물이 없어 수하를 돌보지 못한다’ 고 조롱했다.
그러던중 귀주상회에서 흑사회에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귀찮은 일만 제대로 처리해 준다면 매달은
자 이십 냥씩을 보내주x다고 한 것이다. 사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대략 은자 한냥쯤 되니, 이십 냥
이면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탁곤은 결국 은자 이십 냥에 귀주상회의 은밀한 뒷처리를 담당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본좌가 직접 손을 쓰겠으니 회주께서는 염려 놓으시기 바라오.”
“하하핫!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흑사회에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소. 마침 나도 오늘 황보세가에 가려던
참이니 그대의 활약을 지켜보겠소이다.”
신광익이 호탕하게 웃으며 탁곤을 바라보았다. 귀주성에서 독심마수 탁곤이라면 모두가 한 발 양보해
주는 실력자다. 용독술도 그렇지만 그의 마영수라는 조법은 무림일절로 소문나 있었다. 아직까지 ‘그의
마영수에 손을 맞대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고 했으니 이번에도 잘 마무리될 것이다. 신광익의 기름진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져 나갔다.
탁곤와 헤어진 신광익은 수하들을 불러 모은 뒤 황보세가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가 낭인으로 황보세가
를 위해 신광익이 특별히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멀리 황보세가의 현판이 보이는 곳에 이른 신광익은 낭
인들에게 한마디 던지기를 잊지 않았다.
“오늘은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좋다.”
“흐흐흣! 알겠소이다.”
마침내 신광익이 이십여 명의 낭인을 뒤에 거느리고 정문으로 걸어갔다.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황보세
가의 대문은 활짝 열려있다. 그뿐 아니다. 열린 대문의 좌우에 서 있던 문지기들도 오가는 사람을 막지
않고 있었다. 이전 같으면 잔뜩 긴장해서 살기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을 문지기들이 오히려 웃으며 허리
를 숙였다.
“나으리, 어서 오십시오. 주인 어른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순간 신광익은 ‘집안이 망해가니 나에게라도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
정은 신광익을 안채로 안내한 뒤 종종걸음으로 물러갔다. 장정의 소리를 듣고 안채에 있던 총관이 마중
을 나왔고, 연이어 황보장천도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하하핫! 신 회주 아니시오? 어서 오시구려. 그래, 오늘은 어쩐 일로 예까지 오셨는가?”
신광익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황보장천을 바라보았다. 한 달쯤 전 황보장성의 상단을 오늘까지 넘기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이삼 일 간격으로 계속 수하들을 보내 독촉했으니 모를 리 없는데, 지금 시치미를 떼
고 있는 것이다.
‘주제에 자존심들은 살아 있어서……’
신광익이 마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허헛! 오늘이 황보가주께서 상단을 넘기시리로 한 날이 아니던가? 수고스러워도 내가 직접 오는 편이
낫겠다 싶어 왔다오.”
두 사람의 말이 아슬아슬하게 존대를 하고 있어 심기가 결코 편치 않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신광익이 거느리고 온 수하들은 연신 사방을 험악하게 쓸어보고 있으니,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황보장천은 빙글빙글 웃으며 신광익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 별채에 머무르며형님
과 함께 한담을 나누고 있는 인물이 장천사 장염이니 방문자가 누구라 한들 두려울 리가 없다.
“하하! 신 회주께서는 집을 잘못 찾아오신 게 아니오? 우리 황보세가에서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소
이다만.”
그 순간 신광익의 좌우에 있던 수하들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니, 저 자식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어르신 앞에서 무슨 지랄이야!”
“그러게 말이야, 이거 오늘 황보세가가 얼마나 튼튼히 지어졌는지 봐야겠는걸!”
이들은 오늘을 위해 신광익이 돈을 주고 고용한 유랑 무사들이다. 거칠게 살아온 그들이 사방을 향해
살기를 날리자 마당은 금세 살벌하게 변해갔다. 신광익이 좌우를 둘러보다가 혀끝으로 끌탕질을 치며 중
얼거렸다.
“쯧쯧!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그렇게 대범하게 나오는 줄 알았더니만….”
아무리 둘러봐도 따로 준비한 고수가 보이지 않으니 한심하게 여겨졌다. 무림고수를 불러 모아도 낭인
들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판국인데, 황보세가에는 특별한 방조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끝인 게지, 지금쯤 탁곤도 황보장성에게 갔을 테고……’
확실히 그 시간 탁곤은 별채에서 황보장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탁곤과 황보장성 사이
에는 당정이라는 당문의 장로가 버티고 서 있었다. 탁곤이 탐스럽게 자란 하얀 수염을 쓸어 올리며 소리
쳤다.
“당정! 네가 감히 나의 일을 방해하다니….”
당정도 당문의 장로로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었지만 독심마수 탁곤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
문의 장로는 무시할 수 없는 위치라 탁곤이 조금 망설이고 있을 때다.
“허헛! 나에게는 아직 골수에 깃든 사독을 해독할 능력이 없소이다.”
탁곤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정이 아니라면 그보다 더한 고수가 있다는 소린데, 그렇다면 오늘
의 일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당정의 뒤로는 단지 두 사람이 보일 뿐인데, 그중 한 사람은 이제
삼십 대의 평범하게 생긴 사내다. 그 옆에 불그스레한 얼굴로 앉아 있는 늙은이는 황보장성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당황해 하는 탁곤을 향해 당정이 물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그냥 물어보시구랴. 내 속 시원히 답해 드리겠소. 그러나 그분의 이름
을 들으면 그대는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오.”
탁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예상치도 못한 무림의 기인이 근처에 있는 것이다. 그
렇지 않고서야 당문의 장로가 저처럼 존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어찌 여기서 물러
날 수 있단 말인가! 상대가누구라도 길고 ?은 것은 대봐야 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간교한 당정의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탁곤의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가슴 어림을 긁었다. 그 순간 은밀하게 감추어두었던 오독분이 손톱 밑으
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출수할 준비를 끝낸 탁곤이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고인이 누구인지 이름이나 들어보세.”
황보장성의 곁에 있던 장염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곤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자
니 얼굴이 간지러워 견디기 힘들었다.
“그건 바로 접니다.”
기다렸다는 듯 탁곤의 좌수가 장염의 목젖을 향해 뻗어 갔다. 탁곤의 손은 아지랑이 속에 있는 것처럼
일렁거려 그 형체가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마영수로구나……”
뒤로 한 발 물러서던 당정이 중얼거렸다. 독심마수 탁곤의 성명절학인 마영수가 펼쳐진 것이다. 자신도
말로만 들었지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듣기로 마영수는 그 자체보다도 다른 것으로 더
무섭다고 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몰랐다. 지금까지 마영수를 상대한 사
람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당정은 마영수와 함께 무엇이 펼쳐졌는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꿈속처럼 몽롱하게 뻗어 나
가는 왼쪽 손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오른손에서 하얀 가루가 슬며시 피어 올랐던 것이다.
“아! 오독분!”
하얀 가루는 너무 미세했기 때문에 일렁거리는 손 그림자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당정도 암기와
독의 달인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다. 깜짝 놀란 당정이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화르르륵!
장염의 몸 근처에서파란 불꽃이 일어나 모든 가루를 한순간에 태워 버리고 만 것이다. 환상처럼 피어
오른 불꼿이 모두 가라앉았을 때 탁곤의 손은 장염에게 붙들려 있었다.
“나, 나, 나는 ….. 아직 이런 수법을 본 적이 없다…….”
탁곤이 부들부들 떨며 장염에게 잡힌 손목을 바라보았다. 오독분을 태워 버린 파란 불꽃도 처음이지만
상대방은 너무 쉽게 자신의 마영수를 깨뜨린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절정고수라 할지라도 삼 초식 정도
는 버틸 수 있다고 믿어왔던 마영수다.
탁곤이 제압당하자 숨어 있던 독낭자가 튀어 나왔다.
“어디서 감히 사술을!”
한편 안채의 마당에서는 마침내 마음을 정한 신광익이 낭인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오늘은 너희들 마음대로 깨부수어라! 황보세가의 상단이 상도의를 지키지 않으니 귀주상회에서 교훈을
내려야겠다!”
“크하하핫!”
“씨벌! 그렇지 않아도 돈푼깨나 만지는 놈들이 눈꼴사나웠다구!”
낭인들이 날뛰며 안채의 방문을 열어뽀仟?황보장천은 제지하지 않았다. 다른 황보세가의 노복과 호위
무사들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황보장천은 남의 집 불 구경하듯 구경하다가 곁으로 다가온 총관
에게 말했다.
“그저 사람만 안 다치면 된다니까….”
“나으리 말씀이 맞습니다.”
가주와 총관이 저항을 하지 않고 태연히 바라보니 다른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낭인들은 적들이 저
항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자 집 안으로 들어가 물건만 마구 부수웠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는 물건을 부
수는 것도 이내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크하흣! 워낙 재물이 많아서 별로 아깝지 않은 모양인데…..”
낭인들의 번들거리는 눈이 근처에 몰려 나온 황보세가의 여인들에게 돌아갔다. 그중에 몇은 얼굴이 반
반하여 꾹꾹 눌러두었던 음심을 동하게 했다.
“흐흐흐….. 저것들을 그냥 둘 순 없지.”
달아오른 낭인들이 서서히 여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노복 몇이 낭인들의 앞으 가로막
자 낭인들은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일단 병장기를 손에 쥐자 야릇한 분위기가 조
성되기 시작했다. 낭인들 중에 무공이 고강한 자가 기형의 도를 꺼내 허공을 향해 휘두르며 소리쳤다.
“형제들! 어치피 피를 볼 거면 모두 죽인 뒤 재물을 챙겨 떠납시다!”
“크하하핫! 형제의 말이 옳소!”
순식간에 분위기는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황보장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하니 일
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몰랐다. 물건이 부서지면 나중에 신광익에게 변상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분위기를 보니 낭인들은 떼강도로 돌변한 것이 틀림없다.
‘장 대협께서 오셔야 하는데…..’
낭인들을 이끌고 왔던 신광익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버렸다. 데리고 온 낭인들이 강도로 변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저들이 자신을 살려준다는 보장도 없다. 신광익이 달아날 길을 살피기 위해 눈알을 구리는
데 낭인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늙은 돼지야! 나는 처음부터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발, 살려주시오!”
다가온 낭인이 검으 뽑아 들어 신광익의 가슴에 박으려는 순간이다.
“모두 멈추어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천둥치는 듯한 소리에 낭인들의 움직임이 일순 정지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하던 황
보장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왔다. 안뜰을 향해 수백의 무림인들이 뛰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기
가 가득한 얼굴을 보니 그들은 모두 명문정파의 무림인들이다.
오줌을 지리며 뒷걸음질치던 신광익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낯익은 무림인들은 바로 귀주성
삼대무관의 사람들이었다. 저들 중 이미 이대무관이 자신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오늘이 일은
결과적으로 자기 뜻대로 해결될 것이다.
“에라, 이 강도들아!”
“염치없는 자식들 같으니, 꼭 데리고 온 놈이랑 닯았다니까!”
죽다가 살아난 황보세가의 사람들이 낭인들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낭인들은 한마디 대꾸도 못한
채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마침내 귀주성의 삼대무관 사람들이 촘촘하게 에워싸자 낭인들은 자신의 병장
기를 내던졌다. 이제 명문정파의 무림인들에게 갇힌 신세가 되었으니 처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
행히 기물만 부수고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중벌은 면할지도 모른다.
되살아난 신광익이 한달음에 천검문의 문주 만검 정운관 앞으로 달려나갔다.
“정 대협! 대협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소이다!”
그러나 정운관은 어찌 된 일인지 어색한 얼굴로 신광익을 외면할 뿐이다. 신광익은 다시 뒤에 서 있는
정무문의 문주 묵객 이언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 대협, 감사하오이다. 덕분에 살았소.”
이언걸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좌우를 살필 뿐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신광익은 주변에 사람이 많아 어
려워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재빨리 물러나 눈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살아났다는 기쁨에 들떠 주책맞게
도 너무 나선 것 같다.
한쪽에서 상승문의 문주 백마검 초운이 빙글빙글 웃으며 신광익을 바라보았다. 신광익은 그동안 그토록
재물을 보내도 움직이지 않던 초운이 이제야 자신의 편에 서주려나 보다 싶어서 마주 웃어주었다.
황보장천이 삼대무관의 문주들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여러분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황보세가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인사드리오이다.”
삼대무관 문주들도 허리를 숙여 황보장천에게 인사했지만 역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어정
쩡한 상황 속에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러나 삼대무관의 문주와 제자들은 마치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
듯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볼 뿐이었다.
괜스레 어색함을 느낀 신광익이 한마디 하려 할 때다. 별채로 향하는 문을 통해 몇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중 앞에 서있는 사람을 보던 신광익의 눈이 부릅떠졌다.
‘헛! 탁곤이다.’
탁곤과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독낭자였다. 그리고 그 뒤로 당정과 황보장성, 그리고 삼십 대의 젊은이
가 함께 나오고 있었다. 신광익의 안색이 잠시 흐려졌다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탁곤도 실패
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은 그러저럭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대충 사태를 얼버무리고 상단이나 인수하여 떠나야겠다.’
신광익이 나름대로 사태를 분석한 후 결심을 굳힌 순간이다. 귀주성의 삼대무관 문주들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신광익이 놀랄 틈도 없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귀주성의 삼대무관이 무상신패의 명을 받습니다.”
순간 황보세가의 사람들과 낭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광익은 상인이라 아직까지 무상신패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도 그럴것이 무상신패란 것은 정도 무림의 지존령패로 아직까지 일반에게
공개된 적이 없었다. 무림의 명숙이나 일문의 문주가 아닌 상인이 어찌 그 이름을 들어보았겠는가!
그러나 무림을 떠도는 낭인들은 달랐다. 무림에 장천사 장염이 무상신패의 주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지금 저기 어디쯤에 장천사 장염이 있는 것이다. 자기들의 처지도 잊고 장천사 장염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목을 빼고 기웃거리는 낭인들도 눈에 뛸 정도였다.
삼대무관의 제자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소문에 듣던 대로 장천사는 이제 삼십 대의 나이에 특별한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 사내야
말로 배분뿐만 아니라 무공에 있서서도 당금 무림의 제일 고수였다.
황보장성의 식솔들 속에 섞여 있던 소걸도 무상신패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 그러나 자기의 스승이 그
주인이며 그 앞에 문파의 문주들이 허리를 조아리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주
변을 둘러보던 소걸의 눈이 공교롭게도 황보옥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흥! 까불고 있어.”
소걸의 콧방귀 소리를 듣는 순간 황보옥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며칠 전 큰아버지의 손님으
로 들어올 때부터 단 한 차례도 저 꼬마를 이기지 못했다. 오늘 그의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자
더욱 우울해졌다. 이제는 저 기분 나쁜 녀석을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냐, 너, 어디 두고 보자.’
황보옥이 입술을 질근 질근 깨물며 삼대무관의 문주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참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 반드시 저 고약한 녀석의 콧대를 꺾어줄 날이 올 것이다.
황보장성과 걸어오던 장염이 슬쩍 손을 휘둘렀다. 즉시 부드러운 암경이 일어나 삼대무관의 문주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미 보셔서 알겠지만, 여러분의 선택은 옳지 않았습니다.”
“…………”
천검문과 정무문의 문주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장염이 귀주상회와 자신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잘못리랴 생각했었지만, 오늘 직접 신광익이 벌인 일을 보자
부끄러웠다. 다행히 무상신패의 부름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와 불행한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신광익의 뒤를 비호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두 사람의 귀에 장염의 말이
들려왔다.
“진실로 돌에 뜻을 두기만 한다면 악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
그 뒤로 더 이상 말이 없자 이대무관의 문주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의외로 큰 사건이 간단하게 넘아
간 것이다. 아무래도 미심쩍었는지 함께 부복하고 있던 백마검 초운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장 대협, 귀주상회와 황보세가이 일을 어찌하실 것입니까?”
황보장천이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일도 있고 하니 극악한 귀주상회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상인에게는 상인의 길이 있고 무인에게는 무인의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
초운이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는 황보장천을 힐끔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장염이 황보장천
의 편을 든다면 그 또한 삼대무관이 제각각 어느 한쪽에 서서 행사하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초운이 즉
시 고개를 돌려 신광익을 바라보았다.
“귀하는 장 대협의 말씀을 들으셨소? 당신들의 일에 더 이상 무력이 개입되어서는 안될 것이오. 귀주성
의 정도 문파는 오늘 이후로 상인들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오.”
독심마수 탁곤도 눈을 내리깔며 슬며시 한마디 던졌다.
“오늘의 일을 용서해 주신다면 이후로 흑사회도 그 뜻에 따르겠소이다.”
흑사회는 귀주성의 거대 사파 중의 하나이니 앞으로는 다른 사파도 더 이상 끼어들지 못하게 될 것이
다. 황보장천이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탁곤을 노려보았다. 까딱 잘못했으면 하나뿐인 형님을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에 비하면 지금 탁곤의 발언은 조금 뻔뻔한 감이 있었다. 혈도가 찍혀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독낭자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헤헤, 상인에게 상인의 길이 있듯 사도에는 사도의 길이 있어서 말입니다.”
“뭐라!”
평생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몸 바쳐 왔던 삼대무관의 사람들이 곱지 않은 표정으로 탁곤과 독낭자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감히 사도를 논하다니 한마디로 정신 나간 소리였다. 그러나 장염은 가타부타
말없이 황보장성과 함께 장내를 벗어날 뿐이다.
쏟아지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황보장성이 웃으며 말했다.
“장 소협, 왜 저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질 않는가?”
“하핫1 공을 이루면 몸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 라고 했습니다. 이제 더 말하는 것은 저의 허물이
될 뿐이지요.”
그것은 평생 손익을 계산하고 살아온 황보장성에게 더없이 상쾌한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겨
울 처음 장염을 만났을 때도 그의 말이 마음에 즐거웠다.
“허허헛! 자네의 말은 언제나 음악같이 들리는구먼.”
“황보대인의 마음에 악기가 가득해서 그런 겝니다.”
얼마 후 삼대무관과 낭인들, 그리고 흑사회와 신광익이 황보세가에서 떠나갔다. 신광익이 부서진 물건
에 대한 배상을 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은 장염에게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지만 두고두고 장천사 장
염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배웠냐고 하면 간단히 ‘도에 뜻을
두라’ 고 답했다.
실제로 장염이 그렇게 말을 했든 안했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염을 만났다는 사실에 만족했
고, 그것을 듣는 사람은 누군가가 장염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뒤로 귀
주성에서 상인들의 다툼에 끼어드는 무림문파는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떠나보낸 후 황보장천은 조촐한 연회를 열였다. 비록 형님의 손님이지만 황보장천은
황보세가의 가주로 장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다. 연회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지만 정작
장염은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황보장천이 천하의 명주를 앞에 두고도 마시지 않는 장염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니, 장 대협께서는 왜 술을 드시지 않습니까?”
“하하! 사실은 제가 한 잔의 술에도 쉽게 취해 버려서요.”
“듣기로 무림인들은 내공으로 취기를 다스린다고 하는데, 장 대협은 그러지 않으십니까?”
“내공으로 취기를 다스리려면 물을 마시고 말지요.”
장염이 워낙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지라 황보장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내공으로 취
기를 없애려면 물과 술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황보장천을 바라보던 황보장성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허헛! 녀석아! 장 소협이 워낙 술에 약해 하는 말을 그토록 진지하게 듣고 있다니!”
“엇! 그런 것입니까?”
화기애애한 가운데 몇 순배의 잔이 다시 돌았다. 적당히 쥐기가 오른 당정이 장염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의미다. 그러나 장염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기다리던 당정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대신 나서주기로 했다.
“하핫! 여보시게들, 이제 장 대협께서 며칠 전부터 벼르던 말씀을 들어봄세.”
“벼르다니요, 별말씀을요.”
황보장성이 그제야 정색을 하고 장염에게 물었다.
“그렇지. 나도 대충은 들었다네. 뭔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던데 편하게 말해 보게. 설마 하니 장 소협
의 부탁을 황보세가의 가주가 거절하겠는가? 허허헛!”
“형님, 거절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황보장천이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휘둘렀다. 황보장성은 본래부터 장염을 알고 있던 처지라 과거
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무상신패의 주인이며 장천사라고 불리는 장염 앞에서 황보장성처럼
편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장 대협의 말씀이라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라 해도 그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황보세가를 구해준 사람이라 황보장천도 가주로서 그 정도의 각오는 하고 있었다. 듣고 이던 장
염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중히 운을 뗐다. 오행혈마인의 문제는 생사를 좌우하는 것니 결코 소홀히 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히 그러시다면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
장염의 입에서 오행혈마인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혈마사에서 시작된 오행
혈마인이 이제는 중원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다’ 는 것으로 장염의 말이 끝나자 세 사람의 입이 벌어졌다.
오행혈마인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다. 당정이 마른침을 꿀꺽 삼킨후 물었
다.
“얼마 전에 무림공적의 선포가 있었소만, 오행혈마인이 그처럼 무서운 존재인 줄은 몰랐소. 현상금을
노리고 섣불리 덤벼들었다가는 목숨마져 위태롭겠구려?”
장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무림인에게 오행혈마인을 잡으라고 하다니, 대체 누구의 발상인지 답답
하기만 했다. 자신에게 무상신패를 맡기고 해결해 달라고 한 지가 언젠데 그사이에 현상금까지 걸었단
말인가! 경재학과 마교의 공생 관계를 알 리가 없는 장염의 속이 타 들어갔다. 오행혈마인 때문에 죽어
갈 무림인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상신패는 무림맹에서 오행혈마인을 제거해 달라며 제게 맡긴 것입니다. 맹주는 오행혈마인 섬
전수 장경선이 귀주성으로 달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로는 도무지 귀주성의 구석구석을 알 수
가 없으니 상인들의 눈과 귀를 빌려보고자 합니다. 정파의 무림인에게 부탁할까 했지만 괜히 긁어 부스
럼을 만들게 될까 봐…. 평범한 상인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잔뜩 긴장해 있는 장경선이니 정파의 무림인이 주변에서 얼쩡거리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잠시
생각하던 황보장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쾌히 대답했다.
“알겠소이다. 상인들에게 섬전수 장경선과 닮은 자를 보면 황보세가로 알리라고 하겠소.”
장염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 귀주성에서 장경선을 찾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상인들이야 어차피 무공
이 없으니 나서서 잡을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장경선에게 걸린 현상금이 적지 않으니 상인들에게 그
것을 돌려주면 될 것이다.
장경선에게 분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행혈마인도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장염이다.
막상 만나면 어떻게 도리지 모르지만 우선은 그를 만나봐야 다른 방법을 모색할 것이 아닌가! 장염은 황
보장천에게 몇 번 만나봤던 섬전수 장경선의 인상착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7장 진성이 붉은 구름에 덮이다
청해성을 출발한 황하수채의 장소룡 일행은 감숙성에 이르러 천마대를 놓치고 말았다. 천마대의 전력을
정면으로 상대할 자신이 없던 터라 멀찌감치 떨어져 뒤를 따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룡의 수하들은 의기양양하게 감숙성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좀체로 돌아가지 않
았다. 장소룡이 그간 청해성에서 고생한 수하들을 생각해 갑갑함이나 풀라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또다시 감숙성 일대는 황하수채의 이름으로 들끓었다. 마교의 임시 총단인 천마방이 난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하수채의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마교 잔당 천마대를 보지 못했느냐?’ 고 묻고 다녔
다. 그걸 보고 사파의 무림인들은 ‘과연 황하수채다’ 라고 입을 모았다.
마교의 삼존은 어차피 황하수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므로 수하를 단속하는 데 주력했다. 황하
수채가 찾으려 돌아다니고 있는 천마대는 삼존이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는 반역도들이니 오히려 고마
워해야 할 판인 것이다.
들판에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S고 있던 장소룡의 곁으로 삼도회의 오극렬이 다가왔다. 오극렬과 장소
룡은 마음이 잘 맞아 그동안 제법 친분을 다진 형편이었다. 물론 오극렬은 장염의 의형이었고 장소룡은
장염의 제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니 관계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플 일이지만 말이다.
“총호법께서도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오 당주께서 사파의 무림첩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어제 들었습니다.”
“그러시다면 섬서성으로는 언제쯤 출발하시려는지요?”
장소룡이 잠시 고개를 들어 회색 빛 하늘을 둘러보았다. 천마대를 찾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되
어버리고 말았다. 감숙성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교의 반란에 대해 들었다. 보나마나 천마대가
황급히 돌아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무 때고 돌아가면 되는데 그간은 수하들의 사기를 생각해서 조금 여유를 준 셈이다. 그러다가 감숙성
의 사파 고수들로부터 뜻하지 않은 소문을 들었다. 황하수채가 돌린 사파의 무림첩에 관한 것이었다. 소
문에 의하면 자신들은 섬서성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가야지요. 정사에 무림첩이 돌았다니… 섬서성으로 강호의 고수들이 죄다 모여들 것이오. 어찌 그
자리에 우리가 빠질 수 있겠소.”
장소룡은 섬서성으로 가면 이무심과 장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들리는 소문에 무림맹에서
장천사 장염에게 무상신패를 주어 큰일을 맡겼다지 않던가! 아마도 그 일이란 오행혈마인에 관한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요, 섬서성으로 가면 장 동생도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오극렬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원래대로 하자면 삼도회의 수하들을 이끌고 사천성으로 돌아가
봐야 하지만 오극렬은 섬서성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장천사라 불리는 장염을 한번 더 보고 싶
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는 장염은 아미파의 무공사부로 있던 비실비실한 모습뿐이다.
‘장천사 장염이라…. 장 동생의 성공한 모습을 한번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오극렬은 장염을 만나본 이후에는 황하수채와 헤어져 삼도회로 가볼 생각이었다. 일당백의 수하들을 데
리고 나왔으니 삼도회에 남아 있는 배신자들은 문제될 것이 없다. 이번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백건당 당
주였던 파면불권 이충식의 팔다리를 부러뜨릴 생각이다.
“이충식, 그 개자식이 감히 형제들을 배신하고 회주가 되다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거라.’
빠드드득.
오극렬의 이빨 가는 소리를 뜯던 장소룡이 문득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은원이 하
나둘 정점으로 향해 치달아 가는 느낌이다. 오극렬은 곧 사천성으로 돌아갈 것이고, 언젠가 노인도 장소
의 죽음을 확인하면 당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장소룡은 황하수채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한 이후로 장가촌을 애써 잊으려 했다. 장가촌을 생각하면
죽은 아들과 제자들 생각에 견디기 힘들었다. 그건 자신의 몸이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온몸에 깊게 새겨진 상흔으로 정상적인 삶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엉망으로 망가진 자신을 반갑게 맞아준 곳이 황화수채였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자기 모습을 인
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곳도 황하수채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도둑질을 일삼는 곳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황하수채를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조금 허전하고 슬펐지만 장가촌으로는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휘이이잉!
갑자기 몰아쳐 온 차가운 바람에 흠칫 떨던 장소룡이 몸을 돌려 세웠다. 아직 대낮임에도 수하들이 모
여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한가하고 평안해 보였다. 마침내 오극렬에게 고개를 끄덕
여 보인 장소룡이 십팔마룡을 불러 모았다.
“흩어져 있는 형제들을 불러 모아라. 우리도 섬서성으로 가서 장소의 목을 취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이백사십여 명의 황하수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장소룡은 그들 하나하나를 살펴본 후에 큰
소리로 말했다.
“황하수채와 삼도회의 형제들은 들으시오! 듣던 대로 천마대는 종적을 감추었소. 본래는 돌아가야 마땅
하지만 무림첩을 보니 우리는 섬서성으로 가야 할 것 같소. 가서 결코 쉽게 꺾이지 않는 사파의 기개를
보여줍시다!”
“옳소! 황하수채의 힘을 보여주자!”
“와아아!”
수적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손에 움켜쥐고 고함을 질러댔다. 도둑이 된 이후에 요즘처럼 신이 나 보기도
처음이다. 과거에는 원수가 달라들어 칼부림을 해댈까 봐 마음 놓고 돌아다니질 못했다. 어디 원수뿐이
랴! 같은 도적들 빼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적이나 다름없었다.
무림인은 강호 정의를 외치며 형제들을 잡아 죽였고, 관에서는 한번씩 관군을 동원해 잡아갔다. 수채에
들어간 되로 병장기를 밖으로 차고 다니며 대로를 활보해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수적이 병장기를 차고 무림을 종횡해도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있다.
“이번에는 노기인의 염원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별다른 표정이 없던 노인의 얼굴에 모처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이 어디 노부만의 바람이겠소. 장 호법께서도 원한을 갚고…..”
“………….”
노인이 말을 흐렸다. 눈앞에 서 있는 사파의 거물이 원수를 갚은 뒤에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무림의 큰 문제들이 해결되면 사파가 활개 치며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강호의 명문정파는 그
것을 허용하리만치 호락호락하지 않다.
‘장 호법이 도적으로 눌러앉을지는 알 수 없지. 이 사람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
그렇다고 지금 사파의 고인인 장소룡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날이 불분명한 것으로
치면 자신도 그에 못지 않앗다. 팔십이 넘어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은 자기도 마땅히 앞으로 해야 할 바
를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노인의 얼굴에서 다시 미소가 사라져 갔다. 그 쳐 죽일 장소 때문에 남은 삶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절학을 전할 후손이 없는데 당문으로 돌아간들 무엇 할 것인가! 손자가 뛰어놀던 집 안 구석구석이 오히
려 아픔만 전해줄 뿐이다.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오르자 노인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자신의 처지를 애써 잊으려던 장소
룡도 노인의 말을 듣다가 다시 울적해져서 눈만 끔뻑였다. 그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진눈깨비가 분분히
휘날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더 이상의 휴식을 원치 않는구나!’
장소룡의 컬컬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진눈깨비를 뚫고 들판에 울려 퍼졌다.
“섬서성으로.”
* * *
근 한 달이 자났지만 장염은 장경선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오가는 상인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진전이
없었다. 홀로 황보세가를 벗어나 귀주성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장경선의 흔적은 묘연했다. 그가 오행지기
라도 사용하면 감지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보장성과 한담을 나누며 보내던 시간도 오래지 앉아 그만두게 되었다. 황보장성이 얼마 후 다시 상단
을 이끌고 천산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몇 해 전의 장염과 인연이 닿았던 바로 그 대상을 이끌고 다시 교
역에 나선 것이다.
그때부터 조금 시간이 넉넉하게 남자 장염은 소걸에게 무공을 지도하면서 다시 귀주성 일대를 돌아다
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장염이 소걸에게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마당에서 조심
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장 대협,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던 중이라 장염은 무림인들이 왔으면 만나지 않을 요량으로 되물었다. 장천사 장
염이 황보세가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그간 적지 않은 손님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누가 오신 것입니까?”
“귀주신용금고의 작은 주인께서 오셨습니다.”
장염이 소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어, 이상하구나. 나는 귀주금고를 처음 들어보는데.,….. 그들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이미 정파와 사파가 모두 상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으니 더 이상 상인들이 방문할 이유가 없다.
잠시 생각하던 장염이 손님을 물리치려 할 때다. 총관과 함께 온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
다.
“안에 계신 분은 혹시 사천성 의혈단에서 함께 생활하던 장염 대협이 아니십니까?”
“허…..”
장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천성의 의혈단이라면 몇 년 전 경재학의 음모에 휘말려 갇
혀 지내던 곳이다. 의혈단에서 ‘함께 생활했다’ 고 할 만한 사람이라면 색마와 도둑뿐인데, 지금 찾아온
사람은 그들 중 하나라는 말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장염이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
“하하핫! 노형은 바로….”
“어헛! 과연 장 대협이셨군요!”
반갑게 맞이하는 장염의 말을 끊으며 사내가 마루로 올라섰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도둑이라는 말까지
나올 것 같았다. 총관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듯하자 장염에게 읍을 하고는 사라졌다.
“어서 오십시오. 이게 몇 년 만입니까?”
“허허. 나는 장 대협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박달재가 감탄한 얼굴로 장염의 요모조모를 살펴보았다. 의혈단에 함께 지내던 시절에도 장염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아미파의 무공 사부라는 자리가 허투루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 비실비실하던 장염이 장천사라고 불리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명하다뇨. 모두가 뜬소문에 불과합니다.”
“어이쿠! 아닙니다. 오늘날 장천사 장염 대협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중원에서 장천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달재도 장염의 소문을 듣
고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얼마나 대단하던가! 천하제일인 진원청의 제자로 무
당파의 가장 큰 어른이며, 아미파의 무공 사부이다. 얼마 전에는 혈마사를 패퇴시킨 공로로 무림맹으로
부터 무상신패까지 받았다고 했다.
“제가 오늘 염치불구하고 찾아온 이유는….”
박달재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소문을 듣고는 일단 달려와 봤지만 감히 장천사에게 ‘일전에 맡긴
황금은 어찌 됐소?’ 라고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장염이 의혈단에서 나와 강호를 주유한 지 수
년이 지났으니 황금도 찾았을 것이다. 한참 뜸을 들이던 박달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의혈단에서 제가 부친이 보낸 사람들을 따라 귀주성으로 가던 날, 장 대협에게 말씀드리지 않
았습니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박달재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장염이 황금에 눈이 먼 사람이라면 자신은 곱게 죽지도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번득 스쳐 지나갔다.
‘아뿔사!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그러나 무림에 소문나기를 장염은 진정한 도사로 살아 있는 신선이라고 했다. 박달재는 그 한마디 말을
믿고 다시 용기를 냈다.
“저기… 혹시 북산의 석굴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보현보살의 우측 끝에 있는 석굴 말입니다.”
그제야 장염이 무릎을 손바닥으로 ‘탁’ 소리가 나도록 때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이제 보니 숨겨두었다던 황금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네네, 잊지 않고 계셨군요. 바로 그 황금 말입니다.”
장염이 당연하다는 듯 박달재를 보며 대답했다.
“저는 아직 북산에 가본 일이 없어서…..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박달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사람인 이상 당연히 황금에 관심이 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장염은
태연히 마치 바빠서 들르지 못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황금이란 자고로 없는 시간도 쪼개서 찾아내
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설마……아직도 그곳에…..?”
“누군가 손을 대지 않았다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허허……”
박달재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장염의 표정을 보니 당연한 소리를 왜 하고 있는냐는 듯하
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바로 그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자
기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하기사, 때깔이 곱던 여자 노비를 누님이라고 모실 때부터 이상한 사람이란 걸 알았어야 하는데….’
“이런, 그것이 그토록 귀중한 것인 줄 알았다면 진작에 찾아둘걸 그랬습니다.”
“어허허, 그 귀한 것을 어찌…….”
장염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박달재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말 그대로 도만 생각하느라 황금의 색이 무엇
인지도 잊고 지냈다. 박달재의 말을 듣고 있는 지금도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나 싶은 생각이 머리
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은 세상이 뒤숭숭해서…. 귀주성에 돌아온 뒤로 집 밖을 나다니지도 않았습니다.”
귀주성까지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광경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판이다. 혈마사 마승들의 오
대참화란 그저 말뿐이 아니었다. 그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목도한 박달재니 어떻게 감히 다시 사천성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겠는가!
시일이 흘러서는 ‘장염이 북산에서 황금을 캐서 어디론가 갔을 것이다’ 생각하고 포기했다. 애써 북산까
지 헛걸음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북산에 가보시는 것이….”
“마음은 굴뚝같지만 강호가 이토록 뒤숭숭하니 오고 가는 길이 어찌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귀주 태생이라 워낙 추위에 약하답니다.”
“천하의 귀주신투께서 마음 약한 소리를 하시는 군요.”
“어허헛….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를 살피던 박달재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요즘은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수상한 사람을 잡아들였다. 게다가 현상금 사냥꾼까지 가세해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
었다. 이런 때에 재수없이 그들에게 뒷덜미라도 잡히게 된다면 애써 찾은 황금을 고스란히 뺏길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달재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장 대협께서 요즘 섬전수 장경선을 찾고 계신다지요?”
“그렇습니다.”
“무림맹에서는 그도 오행혈마인이라고 하던데요…….”
장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달재가 웃으며 말했다.
“어헛! 오행혈마인이라면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은 상대가하기 어렵겠지요?”
장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달제의 입에서 뜬금없이 나온 장경선의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박
달재는 그에 대한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경선에게 걸린 돈이 워낙 거금인지라
쉬이 말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박 형께서는 그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의 분수를 아는지라… 게다가 고작 은자 이백 냥에 목숨을 걸지도 않습니다.”
“………….”
장염이 미소를 짓자 박달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정오 무렵까지 장염과 대화를 나누던 박달재는 귀주신용금고의 사람들이 데리러 오자 바람처럼 떠나갔
다. 박달재가 사라지자 장염은 다시 소걸에게 도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소걸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저 사람이 분명히 귀주신투라고 했겠다!’
처음부터 스승을 찾아온 사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묻어둔 황금이라니! 그건 보통의 사람들
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뒷골목에서 자라온 소걸이라 본능적으로 사내의 말에서 풍겨나는 퀴퀴
한 냄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귀주신투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이다.
‘이제 보니 저 박달재라는 사람이 귀주신투였구나!’
보나마나 귀주신용금고라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소걸도 귀주성에서 좀도둑질을 하고 산 적이 있으나
귀주신용금고는 처음 듣는 상호였다. 황보세가의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임시로 지은 것이리라. 이제
원수를 만났으니 복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다시 도가 어쩌구 하는 장염의 말을 흘려들으며 소걸이
물었다.
“그런데요. 스승님은 아까 그 아저씨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그건 말이다. 음….. 오래전에 누명을 쓰고 갇혀 지낸 적이 있거든, 그때 그를 처음 알게 된 거란다.”
“저어….. 그 사람은 도둑이지요?”
“그래. 그렇다는 구나.”
소걸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스승과 지낸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표리부동한 사람과는 교분을 나누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저 귀주신투에게도 뭔가 봐줄 만한 것이 있다는 뜻인데, 그는 자신에
게 있어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스승님께서는 그를 잘 아시나요?”
“글쎄다. 오래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적지 않지.”
자염은 의혈단에서 생활하던 당시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조금 전해주었다. 부친이 황금을 모으는 광경
을 훔쳐본 뒤에 황금만 수집하는 괴도가 된 사연이었다.
“그는 늘 혼자 생활하기에 얼굴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의혈단에서도 곤욕을 치렀다 하더구나.”
소걸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그 사람이 옥불상을 탐내어 수하들을 시켜 사람도 때려죽였다고 하던데……”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이 슬쩍 운을 쩨자 장염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귀주신투가 황금에만 뜻을 두고 있다는 것은 본인에게 직접 들은 것이고, 의혈단의 사람이 그
에게 동조자가 없다고 했으니 누군가의 모함일지도 모르지. 본래 자기를 드러낸 사람보다 감추고 살아가
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법이거든.”
“………….”
소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귀주신투가 금 이외에 다른 물건에 눈독을 들였다는 얘기는 그
때 처음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첫 번째 스승이 누구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는 아
마도 하늘만이 알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불확실함 속에서 귀주신투에게 복수하기도 내키지 않았다. 또한 그대로 놓아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귀주신투는 그의 머리에 복수의 대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원망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스승의 비참한 죽음에 연루되었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귀주신투가 괴로워할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소걸의 얼굴에 큼지막한 미소가 걸렸다. 장염이 소걸
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 너의 깨달음이 제법 큰가 보구나. 나에게도 말해 주지 않으련?”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장염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통한 제자를 거둔 것이다. 비록 소걸이 무슨 깨
달음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다. 돌이켜 보니 자신은 소걸의 나이에 단지 잠
한숨 제대로 자기 위해 발버둥거렸을 뿐이다. 그에 비하면 제자의 성취는 얼마나 대견한 것인가!
“대도는 평범함 속에 있으니 그 깨달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네, 스승님!”
생각지도 訪年?귀주신투 박달재가 돌아간 다음날이다. 장염의 앞으로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서신이 한
통 전달되었다. 거기에는 정교한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검령산의 경치가 장관이라 합니다. 도둑들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 황보세가는 삼류가 넘지 못하고 비룡
금쇄진은 일류가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넘지 못했습니다.
장염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서신을 보낸사람은 귀주신투일 것이다. 그는 검령산
의 비룡장을 노리다가 된통 당한 것일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비룡장을 노렸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행혈마인의 얘기를 하고 난 뒤에 자신에게 검령산으로 가라고 한 것이다.
‘장경선이 검령산에 있구나!’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장염이 등 뒤에 청명검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장경선이 있는 곳을 알고 가
는 것이니 싸움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오늘 그의 오행지기를 파괴하지 못하면 앞일을 장담할 수 없다.’
황보세가의 별실을 떠난 장염이 검령산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
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 * *
장경선은 비룡장을 내려다보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너무 오래 한자리에 머물러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오행혈마인들은 서로의 오행지기를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다. 오행지기를 둘이나
모은 뒤로는 그 느낌이 더욱 뚜렸해졌다.
문제는 그것이다. 오행지기를 모은 뒤부터는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왠지 불안했다. 그것은 오행지기
를 합체했을 때부터 가속화 되기 시작한 영적인 불안이었다.
‘내부의 오행지기가 다른 기운을 갈망하고 있다.’
그것은 완전해지기를 바라는 자연의 이치였다. 오행지기가 하나 일때는 그 힘이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둘이 모이자 그 기운들은 좀 더 완벽해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마치 감모에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에
미열이 발생하며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았다.
‘빨리, 빨리 저 속에 있는 기운을 합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처럼 열병을 앓는 다른 자에 의해 저 기운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오행지기는 그 힘
맡큼이나 중독성이 강해서 시시때때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려 했다. 비룡금쇄진이 아니었으면 뎔두 번
도 더 들어가 뒤집어 엎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도 본능에 눈이 뒤집혀 비룡금쇄진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물론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날의 일이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는 데 있다. 아마도 오행지기가 푹주한 상태에서 진세
로 뛰어들었다가 겨우 살아 나왔을 것이다.
장경선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경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온몸에서 미
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오행지기가 또다시 끓엉오르고 있었다.
“으하하하!”
장경선이 크게 웃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차라리 내력을 발산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쏟
아지는 비를 뚫고 한참 날아오르던 장경선은 허공에서 서서히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과연 그냥 서 있던
것보다 한차례 공력을 쏟아 부으니 내부가 쾌적해졌다.
촉촉이 젖은 지면에 떨어져 내린 장경선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좌우로 빗발치는 물줄기 속에 낯익
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를 확인한 장경선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과연 검령산에 그대가 있었구려.”
“장천사…. 왜 나를 이렇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인가!”
“그대의 말에는 어폐가 있소. 지금까지 우리가 만난 것은 모두 그대가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소?”
“그건… 어쨌든 좋다. 내가 그대를 귀찮게 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대는 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장염과 가급적이면 부딪치고 싶지 않았던 장경선이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했다. 오행지기를 다 모
았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써는 장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에도 크게 낭패를 당했기에 다시 장염
에게 대적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오행지기가 세상에 이롭지 않게 사용되는 것을 막으려할 뿐이오.”
장경선이 이마를 찡그리며 장염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 장염이라는 사람에게는 오행지기를 모을 뜻이
없음이 분명하다. 아니, 뜻이 있다손 치더라도 오행혈마기를 연공하지 않았으니 모을 재간도 없을 것이
다.
‘그렇다면 정말 단지 오행지기를 모으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인데…..’
잠시 생각하던 장경선이 두 손을 늘어뜨리며 장염에게 다가갔다.
“그대는 오행지기가 이롭게 사용되면 그대로 둘 것인가?”
“…………”
장염은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장경선이 갑자기 그렇게 물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오행지기를 바르게 사용하면 그대로 둘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왜 대답이 없는가?”
“그러나….. 이미 그대들은 천리를 역행하며 오행지기를 모았소.”
오행혈마기를 연성하는 과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염이다. 제갈위기가 무림의 이단아로 찍
혀 가문마저 몰락한 이유도 그것에 있지 않던가!
“그대들이 모은 오행지기는 천지간에 있는 순수한 기운이지만, 그 담긴 그릇이 이미 흡혈로 더럽혀져
있어 미래를 점치기 어렵소.”
“무림에서 장천사는 사람들의 과오를 모두 용서한다고 들었다. 오행혈마인이 비록 흡혈로 오행지기를
모았다고는 하나, 경지에 들어서면 흡혈도 의지로 그만둘 수 있다. 그대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우리 인
간의 미래를 어찌 알겠는가?”
“…………..”
두 사람 사이로 빗줄기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장경선이 장염에게 다시 다가가며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오행혈마공으로 이성을 잃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피에 끌리지도 않고 무분별한 살
생은 피할 줄도 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해한 자도 세상에 많은데, 그대는 그
런 자들에게도 죄를 묻고 있는가?”
“그건……”
장경선이 돌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천하제일가의 사람으로 마경을 접하기 전까지 평범하게 살아왔소. 마경이 잠시 나의 인생을 바꾸
어놓았으나 이제 바르게 살려하오. 부탁하건대 나에게 기회를 주시구려.”
장염이 탄식을 터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후우…. 그대의 마음은 알겠으나…아니 되오.”
“왜 안 된다는 것인가?”
“나는 일찍이 혈마사의 노승에게 오행혈마경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 들었소. 흡혈로 연성한 오
행혈마기를 한곳에 모으면….. 그는 마신지체가 되어 인간으로 되돌아오지 못하오.”
“마신이든 인간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대는 마신이 어떤 존재인지 보았는가? 인간에게 가장 해악을 끼
치는 것은 인간이지 마신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마신을 본 적도 없다. 그대는 정녕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의 생명을 취할 것인가?”
“마신이 두려운 것은 그에게 절대적인 권능이 있기 때문이오. 그때 가서는 누가 그에게 감히 옳고 그름
을 따질 수 있겠소?”
“그렇게 말하니 그대도 나에게는 마신과 다름없다.”
“………..”
차가운 장경선의 말에 장염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경선은 지금 자신이 오랫동안 번민하던 핵심을 찌르
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능력으로 오행혈마인과 다를 바 없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비난이었다. 결
국 무림은 강한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힘 앞에서 언제나 정의인 것일까?
“그대도 지금 나보다 강한 힘으로 나를 심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대는 나에게 마신과 같은 존재
이다. 나는 그대에게 저항할수 없으니…. 원하는 대로 하라.”
자리에서 일어난 장경선이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런 장경선의 몸 위로 비가 휘몰아쳤다. 어떻게 보
면 마치 순교자와 같은 모습이라 장염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지금 장경선의 모습은 혈마사의 노
라마가 말한 오행혈마인과 달랐다. 그렇다면 마신지체가 되어서도 인간의 의지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장염은 자기의 마음에 일어나는 의심을 떨쳐 버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이들은 사람의 피르 마셔가
며 오행지기를 흡수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들이 서로의 오행지기를 흡수하는 방법은 또 얼마나 끔찍하
던가! 괴도사도 이 사람에게 심장이 뽑혀서 죽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과연 오행지기를 다 모은 뒤에도 이처럼 인간적일 수 있을까?’
장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선뜻 그에게 손이 가지 않는 것은 ‘너도 나에게는 마신과
같다’ 는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 역천의 오행혈마기를 눈앞에 두고 옳고 그름조차 혼동하겠는가!’
마침내 장염이 장경선의 단전에 손을 대려는 순간이다. 두 사람 사이로 다시 한차례 빗줄기가 몰아쳐
왔다. 뜻하지 않은 비바람에 장염의 손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콰드드득!
발 밑에서 솟아난 나무뿌리가 장염의 사지를 결박했다.
“하앗! 네가 기어이 힘으로 눌러보겠다면 내가 어찌 당하고만 있겠는가!”
호통과 함께 장경선의 섬전십이장이 장염의 가슴을 때렸다.
퍼퍼펑!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나무뿌리가 토막나자 매여 있던 장염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장경선이 다시 장
염을 따라붙을 때였다. 날아가던 장염의 몸이 한차례 회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장경선 앞으로 쏘아왔다.
“허억!”
장경선이 헛바람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장염의 청명검이 단전을 향해 일직선으로 찔
러왔던 것이다.
쩡!
청명검은 오행혈마기를 뚫지 못하고 퉁겨났다. 그러나 청명검의 검기에 의해 장경선의 몸을 두르고 있
던 오행혈마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장경선이 충격에 빠져 잠시 움직임을 멈춘 그 찰나의 순간이다.
장염의 왼손 중지손가락이 장경선의 단전을 향해 살짝 뻗었다.
퍽!
“끄윽!”
장경선의 단전은 두 번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허망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단전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
치자 장염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대의 단전을 파괴했으니 무림인으
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지면에 내려선 장염이 장경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통으로 서 있지도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장경선은 멀찍이 서서 장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단전이 파괴되었음에도 장경선의 공력은 여전했
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단전은 장경선의 공력과 무관했다. 머리를 절제절레 흔들던 장염이
오른손을 정면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장경선도 허공으로 훌쩍 뛰어 올랐다.
“너는 소문과 달리 냉정한 구석도 있구나! 이제 알았으니 어찌 네 곁으로 가겠는냐! 크하하하1!”
웃음소리와 함께 장경선이 서 있던 공간이 일그러졌다. 청명검이 그 자리를 쓸고 지나갔지만 이미 늦었
다. 허공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청명검이 장염의 등 뒤로 날아갔다.
찰칵.
“설마…. 저것은 육지비행술?”
청명검을 수습한 장염은 장경선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시진 이상을 같은 방향
으로 나갔지만 잔경선은 없었다. 비마저 퍼붓고 있어 더 이상의 추격이 어렵게 되자 장염은 황보세가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검령산을 떠난 장경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후로 몇 번이나 검령산을 둘러보았지만 더 이
상 소득이 없자 포기할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장염은 장경선이 아직 귀주성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
로 황보세가를 떠나지 않았다.
장경선과의 싸움 이후로 장염은 방에도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어렵게 찾은 오행혈마인을 눈앞에
서 놓쳐 버렸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그 기이한 공력이라니, 그는 단전이 파괴되었는데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마당에서 밤늦도록 천기를 살피던 장염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진성(토성)을 붉은 구름이 덮었구나…..”
“스승님, 그러면 안 좋은 건가요?”
방문 사이로 소걸의 까치집 같은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머리만 닿으면 곯아떨어지는 소걸도 오늘은 쉽
게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오래전 서장을 여행하던 중에 수도승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게 뭔데요?”
“진성으로는 불행과 질병을 알 수 있는데, 액운이 끼면 재앙의 전조라고 하더구나. 그때는 그 말을 미
처 몰랐는데 오늘 보니 과연 진성에 붉은 구름이 서렸다.”
“웅…….”
소걸이 장염의 말을 듣고 하늘을 보았지만 뭐가 진성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보아도 밝은 별이 촘촘
히 박혀 제각기 아름다운 빛으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스승님도 그런 미신을 믿으세요?”
“허헛! 세상의 모든 일을 어찌 한두 가지 이론으로 판단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진성이 붉은 기운으로
덮여 있지 않다 해도 나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조만간 큰일이 벌어질 것인데, 아무래도 나는 그것에
관계될 모양이다.”
듣고 있던 소걸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어디선지 저런 느낌의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다.
‘아! 그렇지!’
일전에 소화존에서 스승과 헤어지기 전에도 이런 기분이었다. 문고리를 붙들고 앉아 ‘또다시 스승을 잃
게 되지는 않을까?’ 생각하자 몸이 축 늘어졌다.
‘옥황상제님, 부처님, 그리고 … 에, 또 아무라도…. 저희 스승님에게 아무 일도 없게 도와주세요.’
장염은 왠지 엄숙해진 소걸의 표정을 살피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녀석아, 조리면 문이나 닫고 들어가렴.”
“치, 아닌데…”
중얼거리던 소걸이 방문을 슬며시 닫았다. 어찌 스승을 위해 하늘에 빌었다고 말할 수 있으랴! 지금까
지 단 한 번도 하늘에 무엇을 빌어본 적이 없던 소걸이다.
‘이상하네. 다른 스승님들과 있을 때는 이런적이 없는데….’
무공이 제일 강하다고 알려진 장염가 함께 있는데 왜 하늘에 의지하게 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
이다. 다른 스승들은 자기 스스로 뭔가 해보려고 끙끙거리다가 횡액을 당했다. 그에 반해 장염 스승은
오해려 아무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사람 같은데 가끔씩 하늘을 향해 중얼거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스승님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뭔지 몰랐다. 그저 입만 열면 하늘의 도가 어쩌구 하는데, 하늘이 도와 대화라도 나누시는 것이란
말인가?
‘에라. 모르겠다.’
소걸이 따뜻한 방바닥에 등짝을 비비다가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바닥을 몇 바퀴 돌던 소걸이
가물가룸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장염은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곤하게 잠들어 있는 소걸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장염은 소걸을 통해 오행혈마인에게 남은 마지막 휘망을 발견했다.
장경선은 끝까지 자신을 속이려 들었지만, 인성을 상실한 것 같았던 제갈위기는 소걸을 데리고 다니며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마치 진원청 스승이 자신을 제자로 삼듯 아무런 조건없이 말이다.
‘사람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아니, 어쩌면 그 모두가 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인지도.’
장염이 곤하게 잠든 소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한쪽에 몸을 뉘었다. 내일이면 원하지 않던 손님이 찾아
올 것이다. 자신이 느낀 천기의 불길함은 그의 방문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니, 당분간 소걸과 헤어져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소걸을 먼저 사천성으로 보내야겠다.’
마음을 정한 장염도 곧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대지를 쓸고 다니던 서늘한 밤바람이 방문을 흔들다가
멀어져 갔다.
컹컹컹!
어디선가 덜컹거리는 소리에 놀란 개들이 사방에서 어댔다. 잠시 후 바람 소리가 잦아들자 개들도 숨
을 죽였다. 차가운 달빛을 받은 마른나무가 겨울 마당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끔씩 그림자에 놀란 개들
이 간헐적으로 울음을 흘려댔다.
제 8장 다시 서장으로 가다
날이 밝자 장염은 황보장천을 찾아갔다. 사천성을 통과하는 상단이 있다면 소걸도 동행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허헛! 다행히 삼 일 후에 북경으로 가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사실은 제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자를 먼저 사천성 성도로 보내려고 합니
다.”
황보장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쾌히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가는 것으로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장 대협은 어디로
가시는지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황보장천이 웃으며 슬쩍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장염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
이다. 수많은 무림인들은 물론 형님도 장염이 어디로 갔는지 반드시 물어볼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오늘 손님을 맞아보면 알게 되겠지요.”
“아, 네, 오늘 오시기로 한 손님이 계신가 보지요?”
“하하핫! 그건 아닙니다만, 왠지 오늘 저를 찾는 손님이 계실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장 대협께서는 필요한 것을 말씀만 하십시오.”
“다른 것이 아니라, 오늘은 상대가 누구든 무조건 제게 안내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어떤 손님이라도 장 대협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장염이 저렇게 까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렇게 까지 미리 당부를 하는 것으로 보아 결코
평범한 손님은 아닐 것이다.
‘대체 어떤 손님이 오길래 저러는 것일까?’
그러나 어떤 손님이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장염이 돌아가자 황보장천은 총관을 불러 장염의
당부를 다시 전해주었다.
정오 무렵 황보세가를 찾은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낮 근무를 서던 이사는 한 라마승이 다가오자 섬뜩
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지난해 있었던 혈마사의 마승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라마승은 망설임없이 이사
에게로 다가왔다.
‘설마 그들이 쫓겨난 지 몇 달 되었다고 다시 귀주성에 나타날까?’
이사가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스님께서는 어쩐 일이시오? 탁발 중이시라면 안채에서 일하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겠소.”
이사의 기대와 달리 라마승이 어눌한 한어로 대답했다.
“빈승은 장염 대협을 만나보러 왔소이다.”
“헛! 그러시오? 들어오시구려.”
처음에는 조금 경계하던 이사가 대뜸 문을 열자 수호존의 얼굴에 살짝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혈마사의
일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라마승을 이렇듯 의심없이 안으로 인도하다니! 그러나 이미 호랑이 입까
지 뛰어들었으니 갈 때까지 가야 한다.
이사가 라마승의 앞에 서서 걸으며 중얼거렸다.
“허, 거참! 댁은 운도 좋소. 마침 오늘 아침 장 대협이 손님을 무조건 안으로 모시라고 했기에 망정이
지…..”
“나무아미타….”
수호존이 들릴 듯 말 듯 염불을 외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천사라더니 자신이 올 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앞일을 내려다본다면 혈마사의 준비를 알지도 모른다.
‘장천사가 과연 혈마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함정을 피해 갈 수 있을까?’
혈마사를 떠나올 때만 해도 장천사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왠지 지금 그
자신감이 조금 허물어져 감을 느꼈다. 그러나 장천사는 서장에서 생명을 마칠 것이다. 왜냐면 이번 일엔
ㄴ 바로 혈라마께서 직접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한생한 강쪼라마(큰 바다와 같은 지혜의 스승, 티벳 어로 관세움보살) 께서 하시는 일이니…’
본래 라마교의 이단인 혈마사는 환생한 진정한 라마가 혈라마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백 년
에 이르는 동안 혈라마는 단 한 차례도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별채에 이른 이사가 굵직한 음성으로 외쳤다.
“장 대협, 라마승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안에서 두런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잠시후 소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스님께서는 들어가시구요, 아저씨 ,스승님께서 이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아달라고 하시네요.”
“알겠다. 분명히 이제는 손님을 들이지 말라 이거지?”
이사는 소걸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없자 대문을 향해 바삐 걸어갔다. 돌아가는 이
사의 발검음이 가벼웠다. 별채와 대무의 거리가 상당한데 다리 품 팔 일이 줄어든 것이다.
소걸은 한동안 중년의 라마승을 무례할 정도로 살펴보다가 안채로 뛰어갔다. 스승님이 바깥바람을 쐬다
가 오라고 했으니 오늘은 황보세가를 돌아다녀 볼 참이다. 도사와 중이 만나 무슨 할 얘기가 있는지 몰
라도 어차피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염이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수호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먼 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뜻밖의 인상에 수호존이 머뭇거리다가 합장을 했다.
“나무아미타혈, 마하륵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다행히 혈라마의 도우심으로 장 대협을 쉽게 찾았소.”
“………..”
장염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의 호의를 본 수호존은 한순간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장
염과 혈마사는 이제 공존할 수 없는 관계다 비록 마하륵께서는 원치 않으셨지만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
는 노릇이다.
“마하륵과 스승이신 반야승께서 이단을 설파하시다가 토굴에 갇히셨소이다. 새로 선충되신 주시는 귀하
도 본 적이 있는 혈마륵이시오. 빈승은 양쪽 모두를 따르는 편이라…. 무고한 희생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예까지 왔소. 미하륵과 반야승께서는 장 대협의 도움으로 토굴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있소이
다.”
“마하륵의 스승이시라면 노라마가 아니십니까?”
“그렇소. 반야승께서는 일찍이 장 대협에게 오행혈마인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고 하셨소.”
장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인연이 닿았던 혈마사의 두 라마승이다. 신앙은 다르다 해도 인간적으
로 배울 점이 많았던 두 사람이라 장염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스님께서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아니오, 다만…..”
“말씀해 주십시오.”
“혈라마께서 중원의 원정이 실패로 끝난 것은 그 두 분의 이단 신앙 때문이라고 하시며…..”
“설마…?”
“그렇소이다. 강쪼라마의 환생 기념일인 삼월 십오일에 희생 제물로 드려질 것이오.”
장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단지 토굴에 갇힌 것이라면 모를까 제물로 바쳐질 것이라면 시간이 얼마 없
는 셈이다. 비록 강호에 오행혈마인이 셋이나 남아 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없
다. 그렇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서장에 다녀오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혈마사를 찾아가 두 분을 구해내겠습니다.”
“나무아미타혈……”
수호존은 결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최선의 예우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에 ‘
속아주어 고맙다’ 는 말보다 염불 소리가 더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었다. 그것이 신의와 협기로 죽
어갈 상대에게 향한 자신의 진심인지도 모른다. 그 마지막 염불을 끝으로 수호존은 황보세가를 떠났다.
수호존이 떠난 후 장염은 오해도록 명상에 잠겼다. 수호존의 이야기는 모두가 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 현자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 위기는 그 두 사람과
자신을 포함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행혈마인을 만나본 장염은 아직도 오행혈마인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그들은 미친
듯 보였지만 이성이 있었고, 자기의 의지도 살아 있었다. 과거 혈마사 앞에서 생활하던 때에 찾아온 노
라마는 오행혈마경은 우주의 이치며 내공술이라 했다. 대체 그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멀쩡한 사
람을 초인으로 만들며, 또한 이성을 상실케 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서장에 가야 한다.
모든 질문의 답은 서장의 혈마사에 있는 것이다.
수호존과의 만남이 있은 지 삼 일째 되던 날, 장염은 곤히 자고 있는 소걸을 흔들어 깨웠다.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아우웅, 스승님, 해도 안 뜬걸요…….”
“하핫! 해야 언제고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으냐.”
“제자의 해는 아직 멀었습니다.”
“너와 말장난하고 있을 틈이 없구나. 네가 늦게 일어나면 준비 할 것이 없어 너만 손해다.”
소걸이 눈을 비비며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래도 스승이 그냥 깨우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님, 또 여행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 이제 네가 나의 마음을 다 아는구나.”
“이렇게 이른 새벽에 어디로 가죠?”
“세수를 하고 오면 알려주마. 설마 그 얼굴로 사천성까지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사천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소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하늘은 과연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자
리를 박차고 일어난 소걸이 번개처럼 마당으로 내달았다. 그리고 장염이 숨 두어 번 내쉴동안 벌써 고양
이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허어! 이 녀석, 사천성에 꿀단지라도 묻어두었나. 가자기 호들갑은……”
“키키킥! 제가 원래 사천성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냐?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너는 당분간 혼자 있을 수 있겠느냐?”
“무슨 일이 있나 보죠? 제자는 당연히 혼자 있어도 무서움을 타지 않습니다.”
“더욱 잘됐다. 너는 조금 후에 상인들과 함께 사천성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헉! 스승님은 안 가세요?”
“나는 서장에서 볼일을 마친 후에 사천성으로 갈 것이다.”
소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난단 말인가! 이것
은 혹시 스승이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부리는 수작 같은 게 아닐까?
“무엇이 그리 걱정이라고 인상을 찌푸리느냐?”
“저… 스승님, 어린 제자는 사천성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염려 말거라. 사천성 성도에 사천제일루라는 객점이 있다. 그곳에 가서 헌원일광이라는 분을 찾아라.
그분께 이 서찰을 가지고 가면 잘 대해주실 게다.”
장염이 곱게 접은 서찰을 소걸에게 내밀었다. 서찰을 받아 든 소걸ㅇ ㅣ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대충 구겨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녀석아, 그렇게 해서 혹시 잃어버리길도 하면 어쩔 셈이냐?”
“어이구, 걱정도 팔자시네요. 제자가 이래 봬도 품 안에 들어온 것은 한 번도 밖으로 내돌린 게 없는
사람이네요.”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은 원숭이라더라.”
“아, 참, 염려 마시라니깐요. 저는 나무 같은 데는 안 올라가요.”
장염이 미덥지 못하다는 얼굴로 소걸을 노려보았지만 눈에 꿈쩍하지 않았다.
‘천성이다, 천성’
마침내 포기한 장염이 사천제일루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곳이 가 있는 동안 사
고를 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리 사부나 헌원일광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
인데 어느 쪽이 더 대단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 *
비룡금쇄진 안의 명인은 요즘 들어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하러 나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전 같으면 기쁜 마음으로 진을 빠져나갈 판인데 지금은 아니다. 왠지 감옥 같던
진법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진법 밖의 세상이 두려워졌다는 것과 같았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두려움을 느끼다니….’
명인은 천하제일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비룡금쇄진을 깨고 나갈 일만 벼르고 있
었는데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니! 이번에 다시 출진하게 되면 세상을 한바탕 흔들어
놓고 오리라.
“소장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문밖에서 비룡장의 총관인 천외비룡 마룡의 음성이 들렸다.
“알겠소. 곧 나가리다.”
마룡의 음성을 듣는 순간 또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이 불안의 기원은 대체 무엇일까? 명인이 애검인 묵
검을 허리에 비끄러맸다. 그제야 다시 패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흔들렸던 자신감이 가슴을 두
근거리게 만들었다.
방문을 나서자 마당에 도열한 비룡장의 무사와 일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사 열 m에 일꾼 이십 명
이니 도합 삼십 명이 장원을 나가는 것이다. 언제나 이 숫자를 잘 세어두어야 하는 것은 진 속에 남겨두
는 사람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멀찍이 서 있던 비룡장주 명오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들 명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나가고 들어
올 때마다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길 떠나는 아들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명인이 부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에 몸을 돌렸다.
“가십시다.”
명인이 짧게 말한 뒤 비룡금쇄진의 생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톱니바퀴처럼 정해진 순서에 따라 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그 걸음을 내딛는 위치는 게절과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다. 다른 때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명인은 진식을 뚫고 나갔다.
검령산에서 나온 명인과 비룡장 무사들은 사흘 동안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였다. 한 번씩 나
올 때마다 구입하는 물품도 새로웠지만 강호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것도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번에 듣게 된 소식 중에는 명인에게 충격적인 것이 하나 있었다.
“소장주, 그 오행혈마인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지만 대단히 비쌉니다그려.”
마룡의 말이 끝나자 주변에 서 있던 무사 하나가 떠들어댔다.
“하하핫!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비룡장의 손에 걸리기만한다면 일 년은 그냥 놀고 먹을 수 있겠는걸
요.”
“와하하핫!”
떠들썩하게 웃어 젖히는 무사들을 둘러보는 명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쩐 일인지 너무 갑작스럽게
오행혈마인에 대한 경계가 전 무림을 흔들고 있다. 자기의 생각처럼 오행혈마인은 혼자가 아닌 것이 확
실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이 이렇게 무림인들의 이목을 끌게 될 줄이야!”
‘아니, 어쩌면 내가 귀주성을 들었다가 놔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장소라는 사람이 마교에서 큰일을 벌였던 것이나, 장경선이라는 사람이 무림맹에서 사고를
치고 달아난 것은 자기가 하려는 일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귀주성에서 그들보다 먼저 무공을 사용했어도 오행혈마인이란 것이 밝혀져 무림의 공적
이 되었을까?’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대체 오행혈마인은 왜 생겨난 것일까? 비록 마
경을 터득하여 천하제일이 되어도 사람들에게 무림 공적으로 몰릴 것이다. 은밀하게 마공을 익히는 자들
이 많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무림공적은 아니다.
어떤 이는 한 지방의 패주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문파를 창설하여 뜻하는 대로 세상을 좌우했다.
그런데 왜 유독 오행혈마인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낙인찍혀 무림의 공적이 되어야 하는가! 알려지지 않
은 마공 중에는 인간의 심장을 먹으며 연공하는 것도 있으며, 더 나아가음기를 취하기 위해 수백 명의
여인을 살해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무명을 떨쳐 사파의 지존으로 대접받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제거될 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대체 어느 미친 작자가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제아 명인은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
는 그물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비룡장을 벗어나 무림을 흔들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다. 마경을 익힐수록, 그리고 익
혀서 강해질 수록 죽음은 더욱 가까이 있는 셈이다. 한참 동안 멍한 얼굴로 서있던 명인이 어두운 얼굴
로 돌아섰다.
“준비를 하시오.”
마룡이 깜짝 놀란 얼굴로 명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룡장을 나온 이래 먼저 돌아가자고 한 적이
없는 소장주이다. 돌아갈 시간이 되면 뭔가 미진한 것이 남은 듯 꿈지럭거렸고, 그래서 늘 자신의 마음
을 졸이게 했다. 그런데 지금 철이 들었는지 스스로 돌아가자고 독려하는 것이다.
‘쩝….. 이제는 무림이 조용하여 조금 더 눌러 있다가 돌아가도 되는데…..’
그러나 소장주의 명은 지엄한 것이니 어찌 다른 말을 입에 올릴 것인거! 마룡이 무사와 짐꾼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소장주께서 돌아가자고 하시니, 서둘러 짐을 꾸려라!”
객점 안뜰에 물건을 모은 뒤 그 숫자를 세어본 마룡은 모든 점검이 끝나자 명인에게 보고했다.
“소장주, 물건과 사람이 모두 틀림없습니다. 언제라도 하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즉시 장으로 돌아가겠소. 쉬지 않고 움직일 것이니 뒤쳐지는 자가 없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명인이 수하들의 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가면 다시 비룡금쇄진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가게 된다면 평생 강호를 떠돌며 유랑하리라.
‘결코 비룡장 명인의 이름으로 귀주성을 들락거리지는 않겠다.’
과거에는 감옥처럼 여겨 불평했지만 지금은 비룡금쇄진이 고맙기만 했다. 비룡장의 절진을 감히 누가
뚫고 들어올 것인가! 이제는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명인이 어금니를
악물고 굳게 결의하고 있을 때다.
귀양을 벗어나 검령산 방향으로 향하던 수하들이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기보다 겨우 십여 걸음
앞서 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넘는 순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뿐이 아니다. 일꾼들이 끌던 수레와
지어 나르던 짐들도 보이지 않았다. 관도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그대로인데, 마치 홀로 다른 세상에 던
져진 것 같았다.
휘이이잉!
명인이 눈앞으로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소리쳤다.
“마 총관! 무슨 일인가!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냐!”
그러나 아무 데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삼십 명의 수하들은 마치 바다에 빠진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명인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지나온 길 저편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기세를 느꼈다.
백여 명의 무림인들이 마치 퇴로를 차단하듯 뒤를 막아서고 있는데, 하나하나가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무리들의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본좌는 천년마교의 수호사령 검귀라 한다.”
“나는 순찰영주 귀도신영이다.”
“혈수서생 이면수.”
각자 짤막하게 말을 마친 세 사람이 관도로 넓게 퍼졌다. 그리고 다시 그 뒤를 백여 명의 마인들이 촘
촘하게 늘어섰다. 긴장한 명인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정면의 땅속에서 한 사내가 솟구쳐 올랐
다.
쏴아아아!
땅속에서 올라오는데 마치 바닷물이 가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환청인가!’
얼마 후 사내가 지면에 버티고 서자 주변의 마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무림지존! 제천혈마!”
“만세! 만세! 만세!”
명인은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었다. 비룡장으로 돌아가 나오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저 사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무심한 하늘은 그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오늘….. 다시는 진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오늘… 저자를 만나다니.’
제천혈마 장소가 다가오며 능글맞게 말했다.
“지난 삼 일 동안 그대의 뒤를 따라다니며 내 눈을 의심했다. 왜 명문정파의 후계자가 마공을 익히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뭐 나름대로 사연이 있겠지.”
“내 수하들은 어찌했는가?”
장소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아래에 깊이 모셔두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번거로운 일을 시키지 못하거든, 공자가 그랬다던가?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 맞나?”
“무고한 생명을 생매장하다니, 미쳤구나!”
“크하하핫! 이거 왜 이러실까? 그대 입에서 무고한 생명이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되지. 귀주성에 머물며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거든. 몇 해 전까지 한 달에 한 명 꼴로 처녀들이 사라졌다면서? 다행히 기연을 만
난 모양인데, 우리끼리는 협객인 척하지 말자구.”
이미 잡아놓은 먹이라고 생각한 듯 장소는 느물거리며 명인을 살펴보고 있었다. 명문정파의 잘 나가는
후계자가 왜 이런 저주받은 마공을 익혔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아랫배에서 웃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
다.
‘그놈이 그놈이지. 정파와 사파의 씨가 따로 있던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명인의 오행지기는 화기가 분명하다. 자신이 수기와 토기를 모았으니 화기가 어떨
지 알 수 없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아, 이제 순서대로 해야쥐. 어디 한번 덤벼볼 테냐? 그냥 심장을 내줬으면 좋겠는데.”
명인이 오른손으로 묵검을 꺼내 지면과 수평이 되게 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수하들의 복수는 해주고 싶
었다. 물론 그것이 인간에 대한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동정심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오행지기 화염천!
사방에서 지면을 뚫고 불기둥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사방에서 일어난 불꽃은 마교 고수들과 장소의 몸으로 옮겨 붙었다. 마치 거대한 산불이라도 일어난 듯
불길은 거침없이 번져 나갔다.
“크아악!”
“으악!”
상상할 수도 없ㄴ느 화기에 휩쓸린 마교 고수 이십여 명이 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모두 천마대의 마
인들로 이 자리에서 무공이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장소가 불의 벽을 두르고 있는 명인에게 달려가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이제 그만 내놓아라!”
그 순간 명인의 두 발이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뿐 아니다. 명인의 주위에 형성되어 있던 불기둥
이 치치칙 소리와 함께 사그러들었다. 장소가 오행지기 공령수로 화기를 잠재우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피어 오르던 불길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으으…..”
명인은 모든 공력을 두 다리에 쏟아 부었지만 소용없었다. 불길이 걷히자 하반신이 흙에 잠긴 명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때 바람같이 나타난 장소가 명인의 두 손을 일검에 베어버렸다.
‘크윽!”
명인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 차 올랐다.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이제 죽게 된 것이다. 마공을 익혀 천하
에 적수가 없다. 여겼건만, 장소 앞에 서니 자신은 어린아이같이 보잘것 없었다. 이것이 오행지기 하나와
둘의 차이란 말인가!
“슬퍼 말아라. 너와 나는 하나이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소가 다가와 속삭이며 명인의 심장 어림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 장소의 손끝이 명인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콰드득.
“끄아아아아!”
명인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뽑혀 나가는 자신의 심장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넘치던 공력은 이미 느꺼지
지 않았다. 이렇게 덧없는 것이 인생인줄 알았다면 질투와 욕심도 버렸을 것이다. 흐릿해지는 명인의 눈
앞에 어린 시절의 광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대체 무어라고…….’
명인의 거친 호홉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얼마 못 가 땅 밑으로 가라앉았다. 명인을 삼킨 땅이 다시 딱딱
하게 굳기 시작했다. 장소가 근처에 발산했던 오행지기를 거두어들인 것이다. 장소가 오행지기를 거두어
들였음에도 수하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마지막 의식이 남은 것이다.
장소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아직도 펄떡이는 심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
오리라! 그러나 그 아픔은 끝이 아니라 더 큰 능력을 얻게 하는 밑걸음이 될 터이다.
‘크흐흐…. 고통없이 얻어지는 영광은 없다.’
잠시 후 장소는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명인의 한을 풀어주려는 긋 땅이 폭
발하며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퍼퍼퍼펑!
귀양에서 검령산으로 가는 길목에 다시 바위와 흙이 녹아 기이한 형상을 이루어 놓았다. 사람들은 근처
의 흑룡담에 살던 만 년 묵은 용이 승천하며 남긴 자국이라 말했다. 공교롭게도 용이 승천하던 날 비룡
장의 식솔들도 함께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흑룡이 그들을 데려갔다’ 고 수군거렸다. 그 흉측한 모양은 한
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다가 서서히 잊혀져 갔다.
* * *
서장에 들어선 장염은 그날 더욱 붉게 물든 진성을 보며 탄식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노
릇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늘의 뜻대로 변해갈 뿐이다. 지금 다시 사라진 한 사람이 장경선이든 혹
은 또 다른 오행혈마인이었든 자신과는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며 찾았으나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지그믄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그동안 만났던 오행혈마인은 장소와 제갈위기, 괴도사, 그리고 장경선을 포함해 모
두 넷이나 된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의 오행지기도 없애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능력이 있고 없음
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서장에 접어든 지 이미 열흘이 지났으니 삼월 오일이다. 열흘후면 두 사람의 현자가 제단에 세워질 것
이니 이제부터는 혈마사의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오행혈마인의 신비를 풀어봐야겠다.’
보통 사람이라면 짧은 시간에 오행혈마인과 같은 절세고수를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공력은
전대미문의 경지였고, 단전이 파괴되어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새벽이 되도록 생각해 보았지만 아
무래도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답을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서장에서 바라본 밤하늘은 중원보다 더 하늘에 가까운 듯했다. 그래서 사람들도 하늘을 닮은 것일까?
다시 여행하는 서장은 복잡한 인간사와는 달리 정겹기만 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거칠지만 활기있
게 살아가고 있었고, 차가운 공기는 상쾌했다.
다음날 장염이 서장의 동부지역 마을을 지날 때였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늙은 라마승을 묶어
돌로 쳐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 라마승이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그의 초연함에 호기심이 생긴 장염은 즉시 ?명검을 뽑아 들었다.
어의통검의 묘! 풍산검기!
장염이 청명검의 검신을 살짝 흔들자, 사방에서 태산도 허물 듯한 바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직 방목하던 가축들이 근처에 방치되어 있으니 서두르
지 않으면 안 된다. 한떼의 사람들이 돌풍을 피해 흩어지자 그 자리에는 사지가 결박당한 라마승만 남겨
지게 되었다.
장염이 청명검을 빈 들판으로 휘두르자 돌풍도 들판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돌풍에 눈
도 뜨지 못하고 있던 라마승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 형제여! 그대는 부처님께서 보내어 이리로 온 게 틀림없다! 그대에게 전할 법보가 있으니 나를 풀
어다오!”
라마승의 곁에 다가선 장염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는 도를 닦는 사람이라 그대의 부처님과는 아직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네, 형제여. 지금 나를 풀어주면 우리 부처님이 그대에게 전하는 법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
네.”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죄를 물으면 어찌합니까?”
늙은 라마승이 즉시 대꾸했다.
“형제에게는 빠른 두 다리가 있으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면 된다오.”
한마디로 자신을 풀어주고 달아나라는 얘기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늙은 라마승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죄가 있으니 잡힌 것이 아닙니까?”
“허허헛! 형제여, 죄가 있다면 하늘이 돌풍으로 저들을 물리치셨겠는가!”
장염이 웃으며 늙은 라마승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라마승은 묶였을 때의 초연함은 다 어디로 갔는지 풀
리자 마자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과는 달리 허둥대기만 하는 발걸음으로 보아 무공을 익
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장염이 느긋하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당신의 부처님께서 제게 준다던 법보는 무엇입니까?”
그제야 늙은 라마승은 장염을 다시 바라보았다. 늙은 라마승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젊은이는 한인
이며 무공을 익힌 사람이었다. 이 근방에서 무공을 익힌 한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데 젊은이는 제법 유창한 서장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한참 달리던 늙은 라마승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헉헉, 형제는 ….. 헉헉, 이곳 사람이…..아닌데……헉헉, 말을 …..헉헉, 참 잘하시는구먼.”
“하하하! 숨 쉬시는 것을 보니 곧 열반에 드시겠습니다.”
“헉헉… 무슨….헉헉, 그런 섭섭한 ….헉헉, 말을…….”
늙은 라마승은 숨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했다. 장염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호홉이 진정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궁금한 것은 그때 가서 물어도 되는 것이다. 삼월이라 하지만 고원의 날씨는
아직도 한겨울과 다르지 않아 혹독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움직임을 멈추자 금세 살갖을 에일 듯한 냉기
가 몰아쳐왔다.
장염이 걱정 어린 눈으로 늙은 라마승을 바라보았다. 자기야 무공으로 단련되어 걱정이 없었으나 늙은
라마승도 이 추위를 견딜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장염의 기우에 불과했다. 본래부터 서장에서 고행을
하던 라마승이라 이 정도의 추위는 시원한 바람에 불과했다. 나무 둥치에 걸터앉아 한동안 숨을 고르던
늙은 라마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제에게 솔직히 말하지. 사실 나는 뵌포의 백본진류파 라마라네.”
“………..”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서장에 널린 수백 개의 사원이 뵌포의 라마사원이다. 장염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본 늙은 라마승이 다시 발했다.
“나는 백본진류파라고 말했네.”
“네, 잘 들었습니다. 탁발을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늙은 라마승의 벌어진 입으로 겨울바람이 밀려들었다. 이 젊은 구원자는 백본진류파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형제여, 내가 사람들에게 죽을 뻔한 이유를 말해 주었던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럼 들어보게.”
자칭 뵌포 라마라고 칭하는 늙은 라마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탁발하러 들어간 집에서 한 사람이 하늘에 비는 소원을 듣게 되었네. 멀리서 양젖을 짜고 있는 아가씨
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저 여자를 갖게 해주십시오’ 라고 빌더군. 그 소리가 나에게 들린 것을 보아 부처
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네. 나는 즉시 여자가 그에게 자발적으로 갈수 있는 주술을 걸어주었다
네. 자네가 아직 젊으니 그 방법은 말하지 않겠네만…….”
“술법으로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내가 죽을 뻔한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여자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던 게야. 공교롭게도
하필 그날따라 일찍 돌아온 남편이 우리 셋을 보게 되었네.”
“그 자리에 스님도 계셨군요?”
“그렇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거든. 어떤 주문도 그렇지만 남여가 상합하는 것을 본 지도 오랜
만이라,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었네.”
장염이 장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노라마승이 하늘의 뜻을 잘못 안 것이나 네가 노라마승을 구한 것이나 모두가 같은 실수였구나.’
그렇다고는 해도 과연 주문으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장염이 고개를 돌
려 노라마를 바라보았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늙음 속에 자신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계가 담겨 있
는 것이다. 그것은 무당파의 법술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우리 뵌포 라마의 백본진류파는 몇 사람 되지 않아 라마승들 사이의 신비라네. 술법은 물론이고 누가
백본진류파인지도 비밀이지.”
“그렇겠군요.”
상상을 초월한 술법을 지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장염이 새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늙은 라마승의 얼굴
에 미소가 어렸다. 아무래도 조금 더 소개를 해주면 더 존경의 눈으로 봐줄 것이다.
“진정한 술법을 하는 뵌포 라마는 얼마 되지 않는데, 우리는 흑마술과 백마술이란 것을 사용한다네. 애
가 익힌 것은 주로 백마술로, 이미 자네가 들은 대로 좋은 일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형제여, 모르는 소리 말게. 흑마술을 익힌 흑본마류파의 얘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
좌우를 살피던 늙은 라마승이 마른침을 꼴깍 삼킨 후 은밀하게 속삭였다.
“라마승들 사이에서 흑본마류파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네만….. 나도 술법을 하는 뵌포니 한
마디 해줌세.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깊은 감옥에 가둔 뒤 굶어 죽인다네. 사람이 죽으
면 어찌 되겠나? 썩어 액체가 되겠지? 흑본마류파의 뵌포 라마들은 그 썩은 액체를 몸에 발라 죽지 않
는 술법을 터득한 자들이라네.”
장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가히 강호의 극악한 사파들이나 할 짓이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
면 어째서 뵌포 라마승들은 흑본마류파들을 그냥 두는 것일까?
“형제의 표정을 보니 라마승들이 왜 그들을 그냥 두고 있냐고 묻고 있구먼. 허허허, 서장에서는 사람과
죽음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네. 모두가 ‘과 죽음 그 이후에 무엇이 있는가?’ 알기 위해 수행할 뿐이지.
그것이 어떤 식의 수행이든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네. 게다가 흑본마류파의 본포 라마들이 너무 강해서
이 문제에 관여한 사람치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도 커다란 이유지.”
“포답랍궁에서도 그대로 두고 있는 건가요?”
“그들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네. 흑본마류파의 흑마술에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들이 그 정도나 대단합니까?”
“허허헛! 형제여, 흑마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적멸존자는 몇백 년 전의 사람인데 아직도 죽지 않고 살
아 있다고 하네. 그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를 그저 ‘음름’ 이라고 부르
지. 자네도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저 ‘음음’ 이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음음’ 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 ‘음음’ 이 무얼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오직 귀신뿐일게야.”
“…………”
늙은 라마승이 흠칫 몸을 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흥에 겨워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말았군. 그나저나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탁발은 그만두고 다
시 산으로 올라가 세상에 내려오지 말아야겠어.”
“…………..”
말을 마친 늙은 라마승은 장염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훌쩍 떠나 버렸다.
“허, 거참, 백본진류파의 뵌포 라마라…. 그러고 보니 아직 노라마의 이름도 묻지 못했군.”
장염은 늙은 라마승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흑마술의 뵌포 라마를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랑을 하며 중원과 변경을 다 둘러보았지만 이런 신기한 얘기는 처음이다.
역시 세상은 넓고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이다.
‘그나저나 그 적멸존자라는 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몇백 년을 살았다고 했으니 이미 인간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의 눈에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일까? 사람을 죽여 그 시체를 이용한다고 하니 사람
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던 장염이 다시 서쪽으로 이동했다. 늦어도 내일쯤이면 혈마사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제사가 임박하면 감시가 대단할 테니, 그 이전에 두 라마승을 구해내야 했다.
장염이 사라진 자리로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주지의 방에서 자고 있던 혈마륵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몇 번이고 들은 바 있
던 혈라마의 음성이었다.
“혈라마시여! 말씀하옵소서!”
혈마륵의 머리 속 깊은 곳에 울리는 음성이 있었다.
“장천사라 불리는 장염이 왔다. 때가 되었으니 제물을 망자의 산으로 인도하라.”
나.무.아.미.타.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염이 혈마사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설마 혈라마께서 두 노라마를 망자
의 산으로 데리고 가라고 할 줄은 몰랐다. 혈마륵은 자리에서 일어나 날이 밝도록 명상에 잠겼다. 그리
고 새벽 여명이 밝아오자 아침 법회에 참석한 라마승들에게 말했다.
“혈라마께서 말씀하시길를 장천사 장염이 왔다고 하신다. 죄인들을 망자의 산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망자의 산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혈승들 가운데 부들부들 떠는자도 있었다. 망자의 산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며, 혈라마의 법체가 머무는 곳이다. 망자의 산은 서장에서 죽음의 의미이다. 지금까지 망자의 산
에 발을 디딘 자는 반드시 죽었기 때문이다.
수호존이 조심스럽게 혈마륵에게 물었다.
“혈마륵이시여, 두 노라마를 그곳으로 모시게 되면…….”
혈마륵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망자의 산에 오른 자치고 살아난 자가 없으니 그 두 노라마도 십중팔구
죽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장염을 없앨 생각만 했지 두 노라마가 죽을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
찌하랴! 이미 혈라마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그저 관대한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이제 와 어쩌겠느냐. 이미 혈라마께서 그렇게 결정하셨으니 따를밖에…. 두 분의 노라마를 살리고 싶으
면 독경이나 부지런히 하고 있거라. 혈라마께서 들으시고 살려주실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말하는 혈마륵이나 듣고 있는 수호존 모두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두 노라마도 이번 일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존경하는 노라마라 하여도 혈라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혈라마는
이미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제 9장 망자의 산
장염은 혈마사의 혈승들이 한 줄로 걸어가는 광경을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에게 따라오라는
듯, 선두에 긴 행렬은 느긋하게 한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행렬의 한가운데로 나무로 만든 들것이
있는데 그 위에 두 사람의 노라마가 누워 있었다.
‘이상하다. 마치 내가 이미 도착한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장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 십 일인데 닷새나 빨리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다.
‘여기까지 와서 저들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지.’
다행히 혈마사의 행렬은 오래가지 않았다. 느긋한 걸음으로 걸은 지 일각쯤 되었을까? 북쪽으로 거대한
바위산이 보였다. 바위산 앞에 이른 혈승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염불이
울려 퍼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 바위산 입구에 안개라 피어 오르다니!’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어 오른 안개는 흩어지지 않았다. 들컷을 바위산 입구에 내
려놓은 혈승들은 안개가 몸에 닿을까 봐 두려워하는 몸짓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입구에 가득 찬 안개
가 두 사람의 노라마를 감싸자 혈승들이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예식은 끝이었다.
혈마사의 승려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황급히 되돌아갔다. 입구에 자욱한 안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흐려졌다.
‘앗! 두 노라마가 없어졌다.’
안개가 걷힌 바닥에는 혈승들이 메고 온 들것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인기척이 없었는데 언제 누가 데리고 간 것일까?’
잠시 망설이던 장염이 바위산의 입구로 떨어져 내렸다. 작은 석비에는 ‘망자의 산’ 이라고 음각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바위산 안쪽으로 들어갔으리라. 장염이 천천히 바위산으로 진입하자 다시 안개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장염이 안쪽으로 들어간 뒤 혈마륵과 수호존이 다시 나타났다. 노라마들과 장염이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자기들이 할 일은 모두 끝난 셈이다. 망자의 산은 인간계와 영계가 맞닿은 곳이라 산자의 생명이
오래가지 못한다.
나.무.아.미.타.혈.
문득 혈마륵이 염불을 외자 수호존도 따라 외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두 노라마를 오늘 이
승에서 떠나보낸 것이다. 망자의 산 이편과 저편으로 삶과 죽음이 갈리니 이곳이야말로 세상의 끝인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염불을 외우던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 후에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 * *
감숙성을 출발한 장소룡 일행이 섬서성에 도달한 것은 이월 중순이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장염이 서
장으로 떠날 때쯤 섬서성에 도달한 것이다. 장소룡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파 고수들과 연합하여 섬서
성 일대를 뒤졌지만 장소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했다.
섬서성은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의 고수들로 들끓어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현상금을 노리는 사람
들까지 끼어들어 섬서성일대는 일반인보다 무림인이 더 많다고 할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장소가 머무르고 싶어도 머물지 못하겠구나.”
장소룡이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곳에서 장소의 행방을 찾지 못한 채 삼월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
나 그보다 장소룡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지금 섬서성의 무림인들이었다. 워낙 많은 무림인들이 한꺼
번에 몰린 터라 이곳저곳에서 삐그덕 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파가 장소룡의 말을 따라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정파의 무림
인들과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장소가 사라진 섬서성의 가장 큰 문제는 상대를 찾지 못한
무림인들의 남아도는 힘에 있었다.
“장 호법, 장소가 이미 이곳을 뜬 것 같소이다. 소문에 장천사 장염 대협이 귀주성에 있다고 하니 설마
장소가 그리로 갔을 리는 없다고 보오. 그렇다면…… 사천성 아니면 호북성인데…. 사천성으로 가보는 것
이 어떨지…..”
장소룡이 당문의 노기인을 바라보았다. 사천성과 호북성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자신은 당연히 사천성이
다. 왜냐하면 호북성은 자꾸만 고향인 장가촌이 떠오?1?때문이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장소룡에게 사천성의 기억은 그래도 유쾌한 편이다. 그곳에서 짧지만 표사 생활도 했고, 좋은 친구도
사귀었다.
‘용마표국의 총표두 낙장불패 곽자연이 도적들의 총호법이 된 나를 보면 반겨줄까?
생각만 해도 괜히 웃음이 나는 장소룡이었다.
“하핫! 당장 떠납시다. 이곳에 머물러 봐야 정파와 사파의 시비에 휘말릴 뿐이니, 괜히 몸만 상할 일이
어디 있겠소?”
어차피 장소가 섬서성에서 떠났다는 소문이 강호에 돌고 있으니 자유롭게 행선지를 정할 수 있다. 사천
성이라면 청해성의 옆이니 여차하면 황하수채로 돌아가기도 쉽다.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사천성이야말로
가장 적격이지 싶다.
장소룡이 수하들을 불러 모아 다시 사천성으로 떠났다. 사파의 지도자인 장소룡이 사천성으로 떠나자
무림에는 금세 장소가 사천성으로 간 것 같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장소룡의 뒤를 따라 다시 무림맹
과 현상금을 노리는 무리들이 따라붙었다.
장소룡은 마침내 삼월 초에 사천성 성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장소룡이 성도로 진입한 그 하루는 사천
성 사파의 날이나 다름없었다. 기세등등한 사파를 피해 정파의 무림인들은 유흥지를 피해 다녀야 했다.
비록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이미 사파의 종주 격인 되어버린 황하수채의 총호법 신분이라, 장소룡은 무
림에서 오대문파 장로들과 거의 비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성도에 도착한 장소룡은 수하들을 물리고 당문의 노인과 함께 용마표국으로 향했다. 장소룔에게는 사천
제일루보다는 용마표국이 심정적으로 더욱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용마표국의 총표두와는 생사를 함
께한 사이가 아니던가!
“뉘시오?”
용마표국의 문지기가 장소룡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가왔다. 어차피 용마표국에서 떠날 때는 짐꾼의 신분
이었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표국에 총표두께서 나와 계신가?”
장소룡의 말에는 어느새 거역하기 어려운 위엄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계십니다만, 뉘시라고 전해드릴까요?”
문지기가 금세 고개를 숙이며 되물었다.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무림에서 결코 낮지 않은 위치일 것이다.
“총표두께 가서 장소룡이 왔다고 전해주시게.”
“알겠습니다.”
문지기가 쏜살같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모름지기 손님 접대는 눈치가 빨아야 하는 법이다. 말을 하
는 사람이나 그 곁에 선 사람이 모두가 범상치 않은데 어찌 우물쭈물할 것인가! 과연 안으로 들어가 말
을 전하자마자 총표두가 뛰어나왔다.
“아니! 장 대협께서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이미 수 년 전 천하에 보기 드문 무공을 보여주었다. 그간 보낸 세월이 적지 않으니 얼마나 고수가 되
어 있을 것인가! 요즘처럼 고수가 필요한 시기에 장소룡이 찾아오다니, 용마표국으로써는 맨발로라도 나
가 맞을 판이다. 한달음에 정문까지 달려온 총표두 곽자연이 장소룡의 두 손을 움켜 잡으며 인사를 했다.
“장 대협! 이게 대체 얼마 만이외까!”
“하하핫! 살아 있으니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요.”
장소룡이 곽자연에게 당문의 노기인을 소개하려는데 돌아보니 어느 틈에 사라졌다. 아마도 번거로운 것
을 싫어해서 은밀하게 숨은 모양이다. 장소룡은 좌우를 둘러보다가 곽자연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곽자연은 아랫사람들에게 술상을 봐오게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몇 잔 들이켰을 때다. 아무래도 장소룡의 모습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곽자연이 조심스럽
게 물었다.
“장 대협의 몸이 어째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장소룡이 씁쓰름하게 웃으며 그간의 일을 간단히 들려주었다. 물론 황하수채의 도움으로 총호법이 되었
다는 말은 생략했다. 한참 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곽자연이 탄식을 터뜨렸다. 천하에 이름을 날릴수 있
었던 한 무림인이 재기 불능에 빠진 것이다.
“허허, 그런 일이… 그러시다면 이제 무공은?”
“모두 잃은 게지요. 이제 와 다시 무공을 익히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장소룡의 근골은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려 굳어버렸다. 만약에 정상으로 되돌아오려면 누군가 다시 그
때처럼 온몸을 처참하게 박살을 내주어야 하는데, 아마도 그랬다가는 제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그것
을 알게 된 곽자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그간 장 대협에게 그런 변고가 생겼을 줄 몰랐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곽모에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곽자연은 이무심과 장소룡이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오늘날 장소룡의 불행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하핫!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저야말로 모처럼 만에 찾아와 총표두님
의 도움이 되지 못하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미 한번 구함받은 생명인데 장 대협을 위해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허탈하기는 했다. 명문정파의 속가제자 출신의 표두들이 혈마사의 일로 쓸려
다니다가 대부분 생명을 잃었다.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혈마사가 물러간 뒤로 사파의 기세가 욱일승
천하여 오가는 길목마다 표물을 빼앗기지 않은 적이 없다.
중요한 표물은 자신이 직접 운반한다고 하지만 모든 표물을 일일이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 사람들에
게 ‘요즘 가장 힘든 직업이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표국업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총표두님의 표정이 어둡군요. 섬서성에서 오는 도중 들으니 도처에 도적이 들끓는다 하더니만 표물을
많이 잃으신 모양입니다.”
장소룡은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화끈 거렸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 도적들을 이끄는 두목 중의 하나
아닌가! 게다가 이제는 사파의 어른이 되어 무림에 있는 도적치고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모른는 자가 없
다. 다만 곽자연은 자신의 과거 모습이 도적과 싸우는 것이었고, 지금 무공을 상실한 뒤라 사파의 장소
룡과 자신을 동일 인물로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어차피 거짓은 오래가지 못한다. 곽 총표두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던 장소룡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생각해 주니 그저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하하핫! 비록 근래 들어 표국업이 나관에 봉착했다고는 하나 용마표국은 문제 없습니다. 염려해 주시
니 감사하외다.”
장소룡이 웃으며 곽자연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호탕하고 남아다운 기개가 넘치는 사람이다. 몇 해 전
오화산에서 산적들을 만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도 그는 비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소룡은 즐거운 마음
으로 곽자연과의 마지막 술자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
곽자연이 내미는 은자를 끝내 사양하고 객점으로 돌아온 장소룡은 십팔마룡을 불렀다. 그들은 하나하나
가 사파의 고수들로 천마대를 상대하기 위해 황하수채가 총력을 기울여 만든 장소룡의 친위대다. 강호에
서 장소룡의 십팔마룡은 이미 유명하여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칠 정도였다. 요즘 집안이 어려운 아이
들의 최고 소망은 장소룡의 삽팔마룡과 같이 되는 것이다. 곽자연을 만나고 돌아온 그날 밥, 열여덟 명
의 마인들에게 장소룡이 명을 내렸다.
“너희는 녹림의 형제들에게 앞으로 삼 년 간은 용마표국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해라.”
“명을 따릅니다!”
장소룡은 물러가는 십팔마룡을 보며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삼년이면 곽자연의 호의에 대한 자신의 의
리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황하수채가 사파의 종주 격이니 적어도 삼 년 간은 그의 명이 지
켜질 것이다. 장소룡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날이 밝자 장소룡은 사천제일루를 찾았다. 용마표국 다음으로 그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바로 이 사천
제일루의 주방에서 장 사부가 일을 했다. 멀리서 객점의 간판을 바라보는 장소룡의 얼굴에 회한이 서렸
다.
“총호법, 저 객점에 사연이 있으시오?”
당문의 노기인이 웃으며 장소룡을 바라보았다. 어제 용마표국에 이어 오늘은 사천제일루를 방문하는 장
소룡이다. 어젯밤에는 장소룡이 수하들을 불러 특이한 지시를 내리는 것도 보았다. 지금 사천제일루의
간판을 보는 장소룡의 표정이 심상치 않으니, 이곳도 남다른 인연이 깃든 곳이리라.
“그렇다고 할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모시는 사부께서 이곳에서 일을 했었지요.”
“아!”
아마도 무림의 장천사 장염을 말하는 것이리라. 언젠가 술을 마시며 과거를 털어놓던 날 그에게서 스승
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젊은 나이에 도통한 사람이라고 했지.’
자신은 어차피 뚜렷한 종교가 없고, 종인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장소룡 같은 사람이 두고두고 그리
워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보통은 아닐 것이다.
앞서 들어가던 장소룡이 걸음을 멈추어 섰다. 다가가 살피니 계산대 앞에서 어린 소년과 주인장의 말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손님을 맞아야 할 점소이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꼬마를 바라보고 있다. 장소
룡은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자리로 가지도 않고 뒤에서 지켜볼 따름이다.
“꼬마야, 너 음식 잘못 먹었니?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데, 왜 아까부터 남의 일급 주방장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이냐?”
염소수염의 민주려가 애써 욕설을 참으며 소년에게 묻고 있었다. 아마도 주변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벌써 요절났을 것이다. 그러나 꼬마는 그 지독한 눈빛을 받으면서 태연하기 그지없다.
“아저씨, 침 튀기니까 살살 말하세요. 누가 귀먹었어요?”
“이 자식아!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러냐구 어른이 묻고 있잖아!”
마침내 민주려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자기의 욕에 놀란 민주려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송구한 표
정을 지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손님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애타게 만드는 꼬마가 더 얄밉게 보였다.
‘이런 씨벌! 어디서 이런 찐드기 같은 놈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건지…..’
민주려가 턱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꼬마를 바라보았다. 뺀질거리게 생긴 상판을 보니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놈 같지가 않다. 혹시 돈푼이나 뜯어내려고 엉겨 붙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그런 쪽으로 관록이 붙
은 말투다.
‘차라리 한 푼 쥐어주고 쫓아 보낼까?’
이내 민주려의 고개가 설레설레 돌아갔다. 그랬다가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꼬마 거지들로 난리가 날 것
이다. 그저 조상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인내하며 끝까지 달래보는 수밖에 없다.
“헤헤헤, 그래, 대체 왜 우리 주방장을 찾는 건데?”
“그건……..”
꼬마가 우물거리며 말을 않자 구경하던 장소룡이 참견을 했다.
“하하핫! 꼬마야, 주인장에게 주방장을 찾는 이유를 말하면 될일 아니냐?”
민주려가 장소룡의 얼굴을 보며 ‘저 사람이 대체 누굴까?’ 열심히 떠올릴 때다. 꼬마가 계산대를 탁 치
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스승님이 주신 이 서신을 보고…..”
그러나 일단 품 안으로 들어간 꼬마의 손은 다시 나올 줄 몰랐다.
‘커억! 없다! 없어! 큰일 났다! 진짜 원숭이 됐다!’
소걸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해갔다. 헌원일광이라는 사람에게 스승의 서신을 전해야 하는데, 그 가벼운
서신이 만져지지 않았다. 그러나 본래 소걸은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즉시 빈손을 빼
낸 소걸이 뻔뻔하게 말했다.
“앗! 서신이 어디로 갔을 까? 그렇다면 제가 간단하게 저의 이야기를 돌려드리겠습니다.저의 나이는 이
제 십삼 세로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
소걸의 인사가 시작되자 민주려가 표독한 눈빛으로 점소이를 바라보았다. 민주려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
덕여지자, 기다리고 있던 점소이가 달려들어 소걸을 번쩍 들어 올린 후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어엇! 뭐예요? 이제 막 본격적으로 제 소개를 하려는 참인데!”
소걸이 소리치며 버둥거렸지만 이미 늦었다. 점소이가 소걸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친 뒤에 소리쳤다.
“에라,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자식아! 다시 한 번 이 문턱을 넘어 들어오면, 너의 선배님께서 용서치 않
을 것이다!”
홍칠도 꼬마처럼 부모를 잃고 유랑을 하다가 점소이로 대성한 경우다. 그러나 이렇게 대성하기까지 그
의 인생에 결코 요행이란 없었다. 홍칠은 ‘끊임없는 노력만이 오늘의 자리를 보장해준다’ 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길바닥에 내던져진 소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홍칠을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난생처음 듣는 부드
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멋! 대 낮에 사람을 길바닥에 내던지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응원해 주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소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난생처음 보는 미녀가 눈물이 글썽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 무지하게 쪽팔린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소걸은 자신을 사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나이가 미녀 앞에서 흉한 몰
골을 보이고 만 것이다. 한순간에 튕겨지듯 벌떡 일어난 소걸이 홍칠에게 고함을 쳐냈다.
“이봐요! 선배님이라구요? 우리가 언제 함께 지냈다고 선배님이에요? 우씨이!”
장염 스승이 말하기를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힘을 쓰지 말라’ 고 했다. 단전에 가득한
오행지기가 흥분으로 필펄 끊어오르는데도 소걸은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파르르 떨 뿐이었다. 스승의 가
르침을 지키겠다는 가상한 마음에서가 아니다. 이곳에서 함부로 무공을 썼다가는 반드시 스승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씨이,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소걸의 불타는 마음도 모른 채 홍칠이 훈계를 내렸다.
“이놈아, 나이 한 살이라도 많으면 인생의 선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홍칠도 어린 시절부터 세파에 단련된 얼굴이니 거칠 게 없다. 소걸과 홍칠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
보았다. 마침내 소걸이 어이없다는 듯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으이구! 스승님만 아니었으면…….”
“끄끄끄! 네놈의 스승님이 누군데 그러냐?”
“스승님은 장 자 염 자를 쓰신다. ‘도란 숨어서 이름이 없다’ 말씀하시며’ 절대 다투지 말고 있는 듯 없
는 듯 지내라’ 고 하셔서 내가 참는 것뿐이다.!”
그 순간 문간에 서서 재미있게 구경하던 장소룡이 뛰어나왔다.
“소형제의 스승님 함자가 정녕 장 자 염 자 이시던가?”
“네, 그런데요?”
“혹시 소형제는 스승님에게 장소룡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모샜는가?”
“아, 장가촌에서 함께 무술을 공부하셨다는 장 대협이요?”
황보세가에 머물던 때에 장소룡과 이무심 대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가 스승에게 은혜를 베풀
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스승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그런데 지그 ㅁ이 중
년인이 그것을 왜 묻는 것일까?
“허허헛! 드디어 장 사부의 전인을 만나게 되다니!”
갑자기 장소룡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다리에 맥이 풀리고 만 것이다.
장소룡이 쓰러지자 바람처럼 당문의 노기인이 다가와 일으켜 세웠다. 천하의 장소룡이 길거리에서 쓰러
졌다면 체면이 서질 않는다.
“고맙습니다.”
당문의 노기인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장소룡이 소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소형제, 나의 이름이 바로 장소룡으로 장 사부를 모시던 못난 사람이다.”
소걸이 깜짝 놀라 복장을 단정히 하고 인사를 올렸다. 장 사부와 관계된 어른이시니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소걸이 장 대협께 인사드려요. 저는 장 사부님의 제자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민소백이 떨리는 음성으로 소걸에게 물었다.
“저어 …. 소형제, 나도 한가지 물을 게 있어요. 소형제의 … 스승님이 …. 혹시 장염이신가요?”
“네”
민소백의 환하게 밝아 오는 얼굴을 보던 소걸의 머리로 문득 향이 소저가 떠올랐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함박웃음을 짓던 민소백은 곧 장소룡을 향해 다소곳이 인사를 드렸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민소백이라 하옵고 사천제일루 민주려의 여식입니다. 이곳은 명인께서 머무르시며
요리를 공부하던 곳이지요. 명인의 손님이시니 안으로 들어가시면 모두가 기뻐할 것입니다.”
소걸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장소룡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바다. 오래전 장 사부가 ‘이곳에서
요리 명인의 소리를 들었다’ 고 했는데, 과연 아직도 이곳에서는 요리 명인 장염이었다.
“반갑소이다. 나는 장소룡이라 합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소걸의 좌우에 서서 다시 사천제일루로 걸어 들어갔다. 홍칠은 네 사
람의 앞으로 후닥닥 뛰어 들어 허리를 굽히며 크게 외쳤다.
“어섭쇼! 가장 좋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민주려도 사람들이 모여들 때부터 관심있게 지켜보던 터라 소걸과 장소룡에 대해 들은 뒤다. 슬그머니
홍칠을 뒤로 물린 민주려가 만면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민주려도 소걸도 이 바닥
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기만 했다. 민주려를 따라가던 소
걸이 홍칠의 곁을 지나가며 소곤거렸다.
“선배님, 계속 수고하셔.”
* * *
장소룡과 소걸이 사천제일루에서 첫 대면을 한 무렵, 이무심도 짧은 폐관을 마치고 장가촌을 떠나고 있
었다. 단오절에 갖기로 한 금거산과의 비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장가촌을 떠나느 이무심의 마음
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이무심이 장가촌의 마을 어귀에 서서 뒤들 돌아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아아! 아직 이기어검을 다룰 만큼 마음의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공이 급증한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시간만 훌쩍 지나가고 만 것이다. 그
렇다고 어찌 한번 내 뱉은 약속을 어길 것인가! 금가와 장가 두 집안은 쉽게 풀릴 수 없는 은원으로 묶
여 버렸다. 이제는 혼자서 몸을 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장 사부를 뵈었으면 좋겠는데, 사천제일루에 돌아와 계실까……”
오행혈마인이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올 수도 못 올 수도 있다. 장염이 곁에 있으면 천하십
대고수 모두가 몰려온다 하여도 마음 든든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장소룡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싸움을 앞두고 의지할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
폐관 내내 그때 조금 더 참았어야 했다고 반성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제와 되돌릴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는 바가 있다.
‘다음에는 결코 이렇게 성급하게 뛰어들어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겠다.’
그러나 과연 다음이라는 기회가 자기 인생에 다시 찾아올 것인지 알 수 없다. 금거산은 조카의 손목을
끊은 자신에게 살수를 쓸것이 분명하다. 이미 장 사부의 앞에서도 그처럼 무자비한 수법을 펼친 바 있는
데, 하무며 단둘이 마추하게 될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래저래 장가촌을 떠나는 이무심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봄기운이 사방에서 아른아른 올라오는데 그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호는 오행혈마인 장소와 장경선의 일로 떠들석 했지만, 이무심의 귀에는 아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무심의 최대 관심사는 ‘이번에 금거산과 겨루워 살 수 있을까?’ 에 있었다. 금거산의 태산장법을 생각
하면 절로 오금이 저려왔다. 대적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럴진대 금거산과 마주한다면 어떨 것인가! 그
런 생각들로 더욱 괴로운 이무심이었다.
그런 이무심의 심정과는 무관하게 벌써부터 사천성에는 한 가지 큰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것은 ‘그
것은 금거산과 이무심이 단오절에 비무를 한다’ 는 것이었다. 금거산은 태산장법으로 이미 십여년 전부
터 천하십대고수로 인정받았다. 그에 비하면 상대는 복마대협이라는 협명을 떨치고 있는 신진고수로 검
법의 달인이다.
사람들은 금거산이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이무심의 승산을 꼽아보곤 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오래 두고 보면 은근히 질리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자기가 아니라도 누군가 끊임
없이 위로 치고 올라가 주기를 바랬다.
그 바람에 이무심은 갑자기 천하십대고수와 겨루는 절정고수로 인식이 되고 말았다. 물론 내용을 알고
보면 여러 사람의 과장된 기대가 반영된 것이지만, 본래 무림의 소문이란 그런 것이니 누구를 탓할 것인
가! 급기야 ‘복마대협 이무심은 장천사의 제자다’ 라는 이야기가 나돌면서 파장은 더욱 확산되었다.
* * *
호북성에서 장염과 헤어져 북상하던 향이 일행도 강호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혈마사의 일로 한동안 잠
잠한가 싶던 세상은 금세 오행혈마인으로 달아올랐다. 항애는 금거산과 이무심의 비무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방향을 사천성으로 바꾸었다.
“아무래도 장 동생과 가까운 사이이니 우리가 참관을 해야 할것 같아요.”
향이의 말에 하후연과 지염도는 당연하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장염과 아는 사이라 그런 것이겠
는가! 장염과 헤어져 황산까지 오는 동안 향이는 수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바람에 하후연
과 지염도가 몇 번이나 길을 돌리려 했는지 모른다. 짐을 반대 편 어깨에 둘러메던 지염도가 씩씩하게
소리쳤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서 한팔이라도 거들어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과 개인의 비무니 돕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하후연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지염도를 보았다.
“비무가 무슨 패싸움인 줄 아는냐?”
“형님! 따지고 보면 어치피 다 같은 싸움이지 거기에 무슨 구별이 있소?”
“비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 이 대협과 금거산이 사이가 좋아 친목을 하는 것이오?”
“끙…..”
하후연이 신음과 함께 입을 꾹 다물었다. 이무심과 금거산의 은원에 대한 소문이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디 그 두 사람이 친선으로 비무를 한느 것이랴! 이를 갈며 싸우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
만 둘 다 이미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람들이니 숫자로 비겁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싸우는 일에 다른 사람은 관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가 관여한다고 했소? 편을 든다고 했지.”
하후연이 머리를 흔들며 휭하니 앞서 나갔다. 머리는 나쁜 놈이 말싸움에서만은 꼭 이기려 들었다. 괜
히 항이 소저 앞에서 지염도와 오래 말싸움을 하고 있으면 똑같은 사라으로 보일 것이다. 세상에는 의외
로 이런 놈들이 많으니 모든 것을 한 귀로 듣고 흘려야 한다.
지여도가 대꾸하지 않고 앞서 가는 하후연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람을 바보로 안다니까.”
‘후훗!”
향이가 바라보며 웃음을 흘리자 지염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괜히 몇 번을 더 툴툴거리던 지염도
는 다시 하후연에게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형님! 삐지셨소?”
두 사람이 다시 티격태격하며 말싸움을 시작했다. 그래도 두 사람의 사이가 워낙 좋으니 저런 것도 가
능할 것이다. 향이가 빙긋이 웃으며 발길을 서둘렀다. 단오절이라 했으니 서둘러 가면 늦지 않게 당도할
것이다. 향이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천제일루레 장염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망자의 산에 들어선 장염은 안개를 헤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했다. 두 노라마를 만난다는 생각만
으로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면 오행혈마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참이다.
휘이이잉!
바람이 한차례 불고 지나갔지만 안개는 흩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이 안개가 평범하지 않은 것을 알았지
만 그렇다고 어찌 되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잠시 걸음을 멈춘 장염이 전신으로 무극지기를 돌려보았다.
이미 어지간한 독에는 끄덕도 않는 몸이지만 조심해서 손해 볼 것이 없다.
“다행이다. 이건 단지 안개일 뿐이구나. 그런데 어찌 흩어지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것일까?”
장염이 잠시 생각하다가 걸음을 빨리했다. 한참을 들어가자 안개는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장염이 발걸
음을 멈추었다. 드디어 처음으로 사람의 손이 깃든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돌로 만든 거대한 제단
위에 방울과 거울, 그리고 해골로 만든 북과 뼈로 만든 피리 등이 놓여 있었다.
“왠지 귀기가 흘러넘친다. 이것은 분명…. 짐승의 뼈가 아니다!”
다가가니 북 뒤로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가면과 인형도 눈에 띄었다. 이것들은 모두 제의를 지낼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제물과 제사장은 어디 있단 말인가?
장염이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한때 좁아졌던 길이 다시 넓어지느가 싶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거대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흥! 기괴한 것을 좋아하는 자로구나.”
동굴로 뛰어들려던 장염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굴 안족에서 두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
위산 입구에서 사라졌던 두사람의 노라마였다
“노라마님!”
반갑게 다가가려던 장염이 흠칫 떨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럴수가!”
동굴에서 나온 두 노라마의 전신에 살기가 가득했던 것이다. 이미 천지교태의 지경에 든 노라마들이 살
기를 뿌리자 살갖이 찢어질 듯 따가왔다.
“여러분! 접니다!”
그러나 이미 마하륵과 반야승은 장염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마하륵과 반야승이 서로를 바로본 후에
좌우로 갈라져 상대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어떻게든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마하륵과 반야승은 손아귀에 움켜쥔 강철 선장에 공력을 주입하였다. 그리고 장염을 향해 힘껏 집어 던
졌다.
부우우웅!
강철 선장이 회전하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 크게 들려왔다. 장염은 두 개의 강철 선장이 날아오자 크게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죽임을 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꿈틀거리며 날아오는 강철 선장을 보니 기에 의해 방향과 속도가 조절되고 있다.
“두분께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마침내 장염이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정면으로 곧게 뻗었다.
츠츠츠츳!
장염의 등 뒤에 매어져 있던 청명검이 유성처럼 날아가 두 개의 선장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어의통검의 묘! 검기산화!
청명검이 마치 폭발을 일으키듯 한순간에 사방으로 검기를 부렸다. 청명검의 검기가 좌우의 강철 선장
과 부딪치자 귀청을 울리는 폭음이 주변에 진동했다.
콰콰콰쾅!
강철 선장이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 내리자 청명검은 다시 장염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마하륵과 반야승이 떨어져 내리는 선장을 발로 힘껏 찼다. 선장은 이전보다 더욱 바
르게 장염이 전신으로 날아갔다.
“헛! 강하고 큰 것은 내려가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올라간다!”
장염이 다시 손끝을 정면으로 가리켰다. 돌아오던 청명검이 허공에서 한바퀴 돌아 선장 사이로 날아갔
다. 청명검과 선장이 서로 엇갈려 지나칠 때였다. 돌연 강철 선장이 자신의 무게를 담당하지 못한 듯 땅
바닥으로 처박혔다.
퍽! 퍽!
청명검은 선장을 지나쳐 계속해서 두 라마승에게 날아갔다. 달려오던 마하륵과 반야승은 강철 선장을
잃자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네 개의 붉은 손바닥이 청명검의 검신을 때렸다. 혈마사의 전륜혈
영장이었다.
따따따땅!
전설에나 나옴직한 장풍에 연이어 얻어맞은 청명검이 힘을 잃고 허공으로 팅겨졌다. 마하륵과 반야승이
선장을 잃고, 장염도 청명검을 잃었으니 서로 비긴 셈이다.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마하륵과 반야승
이 돌연 몸통으로 장염에게 부딪혀 갔다. 건곤혈마기를 두른 뒤라 몸통에는 선장보다 더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장염이 다가오는 두 라마승의 몸통으로 두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함이 없음의 이로움이여, 함이 없음으로 망녕되지 않는다.”
마침내 세 사람의 몸통이 격렬하게 맞부딪혔다. 무지막지한 건곤혈마기의 충격 속에서도 장염은 경천일
기공의 법문을 되뇌었다. 전신으로 파고드는 혈마기에 혈관이 터져나갈 듯 했지만 장염은 두 라마승의
몸통을 놓지 않았다.
지옥 같은 시간이 계속되었지만 장염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두 라마승을 놓게 되면 다시 혈전이
벌어질 터였다. 기억을 상실한 두사람이라 지금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무공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대로 계속되다가는 셋 중에 적어도 하나 혹은 둘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경천일기 제일기공 무위! 무사!
장염이 ‘하려 하는 자는 패하고 잡으려는 자는 잃게 된다’ 는 법문을 붙들고 끈질기게 버틸 때다. 문득
마하륵과 반야승의 얼굴에 난처함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마치 바람을 때린 듯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
런데 문제가 생겼다. 언제부터인지 무극지기가 흘러 들어와 건곤혈마기가 깨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끄윽!”
“으으윽!”
마하륵과 반야승이 신음을 흘리며 상대를 밀쳐 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태산인 것처럼 사대
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라마승이 끙끙대며 장염에게서 떨어져 나가려고 노력할 때였다. 두 사람
을 끌어안고 있던 장염이 돌연 소리쳤다.
“생각하라! 그대들은 누구인가!”
장염의 호통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고통조차 잊은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장염의 음성에 담겨 있던 경
천일기공의 파사신기가 두 사람의 정신에 충격을 준 것이다.
반야승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 올랐다.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아아. 나는 누구이던가!
반야승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낯익은 경치가 서서히 떠올랐다. 서장의 초원 위에 한 어린아이가 뛰
놀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아이의 눈에 불타오르는 천막이 보였다. 그 속에 말 탄 도적들에 의해 죽어가
는 부모가 있다. 초원을 유랑하던 아이의 걸음이 멈춰진 곳은 포답랍궁이다.
나는 누구이던가!
포답랍궁에서 자란 아이는 청년이 되어 다시 유랑을 시작했다. 대체 삶과 죽음이 무엇이란 말인가? 답
을 찾지 못한 청년의 눈에 혈마사가 보였다. 청년은 혈마사에서 나약한 인간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것
이 인간인가! 이것이 삶이고 죽음인가! 그러나 자신의 삶 속에 생명이 없듯 힌간의 죽음 속에는 죽음이
없었다.
“으으으윽!”
반야승이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가
알기를 포기한 순간이다. 반야승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반야승, 피와 죽음의 유혹을 극복한 혈마사 최고의 라마 반야승이다.
마침내 반야승의 얼굴에서 고통이 사라져 갔다. 상대의 기운은 더 이상 반얏ㅇ의 렬마기를 깨뜨리지 않
았다. 아니, 이제 보니 무극의 기운이 자신의 혈마기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혈마기가 깨지는 느낌과 고
통은 모두가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옴. 마. 니. 반. 메. 훔.”
반야승의 입에서 나직한 진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장염의 얼굴이 밝아졌다. 노라마가 정신을 차린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가 외우고 있는 것은 더이상 혈마사 특유의 염불이 아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지금 반야승이 읊은 옴마니반메훔은 육자대명황진언 이라 불리는 것으로 서장에서 가장 많은 승려들이
외우고 다니는 것이었다. 비록 저 여섯 자의 옴마니반메훔은 가장 밝고 최고인 진언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염이 놀란 것은 노라마가 입에 담고 다니던 혈마사의 염불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반야승이 아직도 괴로워하는 마하륵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어리석다! 실제가 아니니, 번뇌도 고통도 없다.”
마하륵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적의는 오직 젊은 사내에게서만 느끼고 있었다.그런
데 느닷없이 반야승이 자기를 때린 것이다. 반야승은 스승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리라. 잠들어 있던 마하륵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마하륵의 표정이 부드러워지자 장염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두 노라마가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두 노라마가 자신을 도와준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위산에서 벗어나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만사가
그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 10장 오행혈마인의 비밀
“아아! 이제 보니 장천사셨구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시오?”
제일 늦게 깨어난 마하륵이 장염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마하륵이여, 그대와 내가 서 있는 이곳을 알지 못하느냐?”
마하륵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이제 보니 자신의 두 발로 서 있는 곳은 지하 뇌옥이 아니었던 것이
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나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대와 내가 반쯤 미쳐서 장 시주에게 손을 쓰려 했던 것 같다.”
“그런 일이…..”
장염이 반야승과 마하륵에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두 분께서 사술에 당하신 것 같은데,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 같군요.”
“……………”
반야승과 마하륵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공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편했다. 어차피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길에 무공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간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난 뒤라 더 그런지 몰랐다.
“시주, 사실 우리는 공력이 이미 사라졌소. 아미도 사술을 펼친 자는 우리에게 공력을 오래 남겨두기가
싫었던 모양이오. 그나저나 이곳이 어딘지 알아야 시주를 도울 텐데….”
“그렇군요. 그러나 너무 상심 마십시요. 반드시 공력을 다시 찾을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단전이 멀쩡한 데다가 조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일순간 사라지
게 된 것은 분명 어떤 작용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다시 공력을 찾게 될지도 모른
다. 장염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두 분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보았는데, 석비에 ‘망자의 산’ 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으헉!”
공력을 잃고도 별로 놀라지 않던 두 노라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염이 의아한 얼굴로 두 노
라마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반야승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진언을 외웠다.
“옴. 마. 니. 반. 메.훔.”
“…………..”
반양승이 허탈한 얼굴로 마하륵을 바라보았다. 마하륵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서렸다. 반야승이 더이상
혈마사의 염불을 입에 올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야승은 혈마사의 교리를 포기한 것일까? 그
러나 두 사람 모두 ‘망자의 산’ 에 들어섰으니 아무렴 어떠한가! 마하륵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망자의 산’ 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오. 이제 보니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오신 것이구려.
우리의 죄가 참으로 크오.”
“설마 그런 곳이 세상에 진짜 있겠습니까?”
“시주께서는 도문의 사람이라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시주는 무릉도원이 없다고 생각하시오?”
장염은 도인이니 무릉도원은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스승인 진원정처럼 선계로 가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곳은 우리 서장의 모든 라마승들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 라고 믿는 곳이오. 여기는 참과 거짓이 없
으며 시간과 공간의 흐름도 다르다오. 나와 마하륵와 같은 경지의 사람이 겨우 사술에 기억과 공력을 잃
는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그제야 장염은 노라마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두 노라마의 무공은 이미 극치에 이르렀으니
누가 감히 사술 따위로 이들을 흘릴 수 있을까? 사술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곳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면 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망자의 산은 언제 생긴 것입니ㄲ?”
“수백 년 되었다고도 하고 이 세상의 기원과 같다고도 하오. 인간의 수명이 고작 백이십이니 그 이상
지속된 것이라면 누가 자세히 알 수 있겠소?”
장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들어온 자가 모두 죽어버렸다면 아무도 알 수 없겠지.’
망자의 산이 언제 생긴 것인지 뒤늦게 묻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공포에 공포가 가중되어 끝없이 고
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전해지는 인간의 역사란 것이 그렇지 않던가!
“그런데 노라마께서 오행혈마경이 우주의 이치를 담고 있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반야승이 눈을 지그시 감고 대답했다.
“혈마사의 역사 오백 년 가운데 그 마경을 익혀보려고 한 자가 하나둘이겠소. 그러나 모두가 그만둘 수
밖에 없던 것은 그 마경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오. 세상의 이치는 따지고 보면 결국은 두 개라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휘이잉!
동굴 안쪽에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장염은 동굴을 힐끔 바라본 후 다시 노라마의 말에 귀를 기울
였다.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
“마경은 그 두 세계의 가료 같은 것이라오. 마신의 의지와 접신하여 우주의 근본 힘인 오행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이오. 그러고 보면 그들이 공부하는 것은 무공구결이 아니라 주문일 수도 있소.”
장염은 어렴풋이 노라마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왜 갑자기 오행혈마인의 무공이 급성장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림에도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초월적인
힘을 얻기 위해 산에서 백 일, 혹은 천 일 동안 수련한다. 그러나 그들이 접신한 신이란 것이 거의 잡귀
신의 수준이라 세상에 큰 해악을 끼치지는 못했다.
물론 그런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경우에도 뜻하지 않은 접신은 있을 수 있다. 내공 수련 중에도 많은
사람이 접신하여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접신은 일반 무림인들에게서 많이 일어났다. 마
음의 공부가 선행되는 도가나 불가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고, 가끔 그런 사람이 나올라치면 귀문에 들
었다고 하여 발칵 뒤집어졌다.
문제는 오행혈마경의 경우 접신의 파급 효과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접신에 성공한 사람들은 초월적인
능력을 얻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자신의 의지마저 마신에게 저당 잡혀야 했
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이 접신으로 마신의 영력을 받은 거로군요. 그렇다면 그 마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헐헐…시주. 오행혈마인과 마신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지금까지 말한 것이
내가 아는 전부외다. 우리 둘이 여기에 있으니 그나마 이것을 아는 사람도 이제는 없겠구려. 이제부터는
시주의 몫이오. 망자의 산과 오행혈마인과 마신의 관계를 알아내 주시구려.”
다시 한 번 동굴 안쪽에서 음산한 바람이 몰아쳐 왔다. 이번에는 바람 속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기
에 장염은 깜짝 놀라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분도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말이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반야승과 마하륵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염이 두 노
라마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에게 오라!”
“헉!”
너무도 선명한 소리에 장염이 놀라 신음을 터뜨렸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숨결마저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 동굴 안쪽에 제가 찾는 것이 있는 듯 합니다.”
반야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고 하니 아마도 혈라마의 부름일 것이다. 혈
마사의 전해지는 말로 ‘망자의 산’ 에 혈라마의 법체가 있다고 하더니 혹시 저 동굴이 그곳인지도 모른
다. 어차피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누구라도 혈라마의 앞까지는 가야 할 것이다. 다만 자신과 마하륵
은 이미 공력을 잃었으니 함께 가봐야 짐만 될 것이다.
“부디 조심하시오. 우리는 이곳에서 시주를 위해 기도하겠소.”
장염이 착잡한 얼굴로 두 노라마를 바라보았다. 동굴로 들어가는 자신도 그렇지만, 이 흉험한 곳에 남
아 있어야 하는 두 노라마의 운명도 알수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모두 어찌 사람의 계획대로 되겠는가.’
마침내 장염이 두 노라마를 향해 읍을 해 보이고 동굴로 걸어갔다.
장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반야승과 마하륵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장염이 들어선 순간 동굴이 일
그러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뿐 아니다. 지금까지 솟아 있던 바위산이 서서히 땅
밑으로 갈앉았다.
“움 .마. 니. 반. 메. 훔.”
“움. 마. 니. 반. 메. 훔.”
두려움에 빠진 마하륵은 저도 모르게 반야승의 진언을 따라 외웠다. 사방의 흙이 갈아 엎어지며 바위산
이 침몰하고 있었다.
“움. 마. 니. 반. 메. 훔.”
바위산과 함께 몸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흙은 무릎을 지나 곧 가슴까지 차 올랐다. 마하륵은 마지막으
로 반야승을 바라보았다. 반야승은 이미 열반에라도 든 표정으로 진언에 집중하고 있다.
“움. 마. 니………”
반야승의 입에서 더 이상 진언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미 입까지 묻힌 것이다. 마하륵은 흙이 눈 밑까
지 이르자 눈을 감았다. 한순간에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 망자의 산이 있던 자리는 평지로 변했고, 근
처의 평지는 계곡으로 바뀌었다.
장염은 동굴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몸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땅이
라 믿었던 바닥은 온데간데 없고 좌우로 끝없는 암흑이 평쳐져 있을 뿐이다.
“누구이기에 이 같은 장난을 하는 것이냐!”
동굴로 들어왔건만 지금의 외침에는 되울림이 없었다. 장염은 그제야 눈에 보이는 광경이 결코 환상만
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당황한 장염의 눈에 멀리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리로 가봐야겠다.’
다행히도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여 주었다. 암흑의 공간을 날아 도착한 곳은 제단 앞이었다. 멀리서
본 빛은 제단의 사방에 밝혀놓은 횃불이었다.
‘대체 누가?’
아니, 누구는 둘째 치고 어떻게 이 공간에 제단을 설치할 수 있었을까? 생각할 수록 미궁으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다.
“헛! 저 제단은 !”
장염이 탄성을 터뜨렸다. 지금 눈앞에 놓인 제단은 바위산으로 들어왔을때 보았던 바로 그 제단이었다.
제단에 놓인 물건도 모두 낯익은 것이다.
“방울과 거울, 그리고 해골로 만든 북과 뼈로 만든 피리……”
인형과 가면을 뺀 모든 것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누가 이런 곳에 제단을…..”
‘그런 바로 나다.”
언제 나타났는지 돌로 만든 제단 옆에 라마승이 서 있었다. 라마승의 얼굴에는 바위산에서 보았던 가면
이 씌워져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가면의 라마승이 다가오며 대답했다.
나는 일체에 뛰어나고 일페를 아는 사람이다.
무엇에도 더렵혀짐 없는 사람이며,
모든 것에 사리하여
애욕을 끊고 해탈한 사람이지.
스스로 체득했으니,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할 것인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같은 이도 없으며
이 세상에 비길 자도 없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이라.
나 홀로 정각을 이루어 고요롭기만 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미파에 있을때 정현 스님에게 들은 말이다. 우파카라는 운명론자가 부처에게 ‘당
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부처가 저렇게 대답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라마승은 자신이 부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대가 이곳의 주인인가?”
“아니, 나는 이곳뿐만 아니라 천지의 주인이다.”
탈을 쓴 라마승의 대답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마치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사방에서 귀곡
성이 들려왔다.
“으흐흐흐!”
“히히히힛!”
“헛! 천지에 어찌 주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장염아, 아직 네가 모르는 것이 있구나. 천지를 이루는 것이 오행인데, 내가 오행의 주인이니 천지의주
인이 아니냐?”
장염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오행의 주인이라는 말을 듣자 왠지 오행혈마인이 떠올랐다. 그렇
다면 저 라마승이 오행혈마인의 주인이라는 말인가? 게다가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그대가 비록 오행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해도 그대 역시 인간이니 영원히 천지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왜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사는 인간을 본 적이 있느냐?”
“………….”
장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정말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살고 있다면 인간이라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대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는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이곳은 그대의 법력으로 만든 망자의 산이 아니냐! 나를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허허허헛! 과연 너는 무극의 도를 이룬 것이냐?”
장염이 흠칫 노라 가면의 라마승을 바라보았다. 무극은 천지의 근원인 태극이 형성되기 이전의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무극의 도를 이룰 수 있겠는가! 장염이 알고 있는 도
는 단지 이루어갈 뿐,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무극의 도를 이루지는 못한다.”
“허허헛! 너는 아직 자신을 잘 모르는구나. 이곳은 인간도 영혼도 머물 수 없는 곳이다. 네가 이곳에 나
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미 네가 나와 비슷하다는 것인데….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허튼소리일 뿐이다.”
“자기에게 신의 권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다니…. 인간으로 남는 것이 그토록 소원인가?”
장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간혹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자신의 무위때문에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게 생
각하면 저 람마승의 말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찌 사람의 무공이 강하다고 신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초월적인 힘이 있다고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신이 되기를 소원하는 인간일 뿐이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자, 태극 이전의 혼돈이며, 태극이며, 사람들이 말하는 도이며, 부처다.
너도 곧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가면의 라마승이 문득 손을 들어 제단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장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단 위에 흙투성이의 마하륵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마하륵에게 다가선 가면의 라마승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허공으로 치켜세웠다.
“무슨 짓이냐!”
깜짝 놀란 장염이 달려들어 단검을 빼앗으려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장염은 온몸이 보이지 않는 밧줄에
단단히 매여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어처구니없게도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밧줄은 다욱 강하게 사
지를 죄어왔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장염은 자기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일수록 고통스러우니 그냥 두고 보는 편이 나을 게다.”
“멈춰!”
그러나 단검은 이미 마하륵의 가슴에 박힌 뒤였다. 마하륵의 몸이 짧게 경련을 일으켰다. 가면의 라마
승이 마하륵의 가슴에서 심장을 끄집어냈다.
“악마! 네놈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장여이 고함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럴수록 가면의 라마승은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무극의 도에 이르면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이제보니 너는 아직 멀었구나.”
가면의 라마승이 마하륵의 심장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우적우적.
“사악한 놈! 하는 짓거리를 보니 오행혈마인도 네놈이 만들어 낸 것이로구나!”
“나는 이미 오행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너는 누구냐! 스스로 천지의 주인이라며 왜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이냐?”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혼돈이며, 태극이며, 도이다. 나는 진원청이며, 경재학이며, 오행혈마인이다.”
“………..”
장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가면의 라마승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수
가 없다.
“이제보니 너는 완벽하게 미친 라마승이었구나!”
“허헛! 오백 년 만에 듣는 욕이로군.”
“…………”
장염이 가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면의 라마승은 분명히 오백 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백 년이
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말 오백 년을 살았다면 저 가면의 라마승은 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가만, 어디선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장염의 머리로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알았다! 나는 이제야 네놈이 누군지 알았다!”
가면의 라마승이 고개를 들어 허공에 달린 장염을 바라보았다.
저 어린아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서장에서도 이미 몇백 년 전에 잊혀진 이름을
어찌 중원의 어린아이가 알수 있단 말인가!
장염이 가면 속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네놈은 뵌포 라마인 적멸존자가 아니냐!”
“헛!”
가면이 제법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사대를 알게 되자 조금
여유가 생긴 장염이 비웃었다.
“겨우 흑본마계류의 수법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주제에 신이라도 되는 양 떠벌리는냐!”
“크크크크! 아가야, 네가 죽음을 재촉하는 구나.”
장염은 상대가 확실히 적멸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보니 적멸존자가 오행혈마경을 만든 장본인이구나. 그렇다면 혹시 저자는….’
장염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 현실은 더욱 끔찍하겠지만, 역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네놈의 또 다른 이름을 알고 있다.”
“크큭!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
“네놈은 혈마사의 시조이며, 스스로 환생한 라마인 척하는 혈라마가 아니냐!”
“크하하핫! 한낱 중원의 핏덩이가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다니 놀랄 일이다.”
감탄인지 분노인지 모를 탄식과 함께 가면의 라마승이 말을 이었다.
“흐으….. 아가야. 네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숨기지 않으마. 본존은 확실히 과거에 적멸존자라는 이
름으로 불린 적이 있다. 지금은 물론 환생한 혈라마로 더 알려져 있지. 오행혈마경은 혈마사를 창건할때
에 본존이 만든 것이다. 뵌포 라마 흑본마계류의 흑마술을 아느냐? 본존은 시체의 액을 바르며 오랜 기
간 살다가 마침내 인간과 우주의 신비를 알게 되었다.”
“때달음의 끝이 이런 사악함이더냐!”
“아가야, 들어라. 무극에서 태극이 나오고,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오행이 나와 마침내 세상
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본존은 오래전에 오행의 기운과 흑본마계류의 술법으로 영계와 물질계를 자유롭
게 오갈 수 있는 법술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
었지. 본존은 혈마사를 세운 뒤 오행혈마인을 만들어 오행지기를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왠일인지 번번
히 실패……”
“너는 설마…..”
“크크큭! 오백 년이 지나자 본존은 이미 육체를 떠나 순수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인간들
은 도 라고 하고, 악 이라고 하고, 신 이라고 하고, 부처 라고하지.”
“제때에 죽지 못한 마물아! 무림에 오행혈마경을 풀어 넣은 것도 너더냐?”
“오백 년 동안 본존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뜻한 일은 다 이루었고, 모든 사
람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도 다 들어주었다.”
“마물아! 과연 너더냐!”
“중원의 맹주라는 경재학은 나의 마음과 잘 맞는 사람이지. 본존은 사악한 자에게 순수한 악이며, 선한
자에게는 영원히 신선일 뿐이다. 크하하핫!”
장염이 치를 떨며 가면을 노려보았다. 적멸존자의 술법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다.지금 장염
은 대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경재학 조차도 자신의 마음에 일어
난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지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적멸존자가 육체를 벗어나는 경지에 이르러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오싹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동굴 입구에서 두 노라마가 목숨을 걸고 덤볐던 일이 이해가 되었다. 적멸존자는 사람의 마
음과 기억을 자유롭게 조종하는 자였다.
“이제 중원의 오행혈마인이 하나가 되면…. 그는 본존에게 오행지기를 바치게 될 것이다.”
“오행혈마인은 마신지체이니 순순히 너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것이다.”
“크크크! 아가야,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있는 법문은 나에게 생명과 영혼을 바치겠다는 복종의
서약이다. 오래전 그들과 나의 영혼이 하나로 결합하였는데, 이제 와 상대의 뜻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
냐?”
“이제보니 너는 마겨의 주문을 통하여 세상에 강림하는 마물이었구나!”
“그렇다. 본존과 오행혈마인의 관계는 실로 오묘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흑본마계류의 진수이다. 그들
이 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힘을 주고, 그 대신그들의 영혼을 자양분으로 삼아 되살아나게 되는 것이
다.”
장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기이한 술법이 많다고 하나 이런 일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귀
신의 접선이라 하면 접선이고, 신적인 존재의 현현이라 하면 현현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이름이든 이
술법의 힘을 빌린 사람은 결국 자기 정기를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다.
“아가야, 네가 이미 모든 것을 알았으니 이제 그만 가주어야겠다.”
적멸존자가 가라는 곳은 아마도 저승의 세계이리라. 장염이 결박을 풀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그물은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더욱 강한 힘으로 조여들었다. 이곳이 적멸존자가 만든 ‘망자의 산’ 이기에 오직
그의 힘만 통하는 것일까?
“으음…..”
마침내 고통을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장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힘은 성령독요의 경지
에 이른 뒤로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공중에 매달려 요동 치는 장염에게 가면의 라마승이 다가왔다.
‘아가야, 내 눈을 보아라.”
장염이 무의식적으로 적멸존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치자 적멸존가ㅡㄴ 서서히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염아, 두려워 말아라!”
“스승님!”
놀랍게도 가면 아래 드러난 얼굴은 스승인 진원청이었다.
‘내가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장염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정면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진원청 스승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제 편히 쉬도록 해라.”
마침내 진원청 스승의 손이 단전에 닿았다. 장염은 두 눈을 스르륵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장염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장염은 나비가 되고 새가 되고 물고기가 되었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깊은 잠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갈 때다.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요
란하게 치장한 날개옷을 입은 사람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방울이 짤랑짤랑거
리자 점점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 저 사람은 바로 그 백본진류파의 뵌포 라마!’
쭈글쭈글한 얼굴의 라마승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의 몸이 뒤뚱거리며 돌아갈 때 장염은 그의
손에 들린 작은 거울도 볼 수 있었다. 거울이 한 번씩 반짝일 때마다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하핫! 다 늙은 노인네가 날개옷을 입고 춤이라니…..’
웃으며 춤 구경을 하다 보니 귀에 북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목소리에 흥이 오른 장염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짜
릿한 전율이 온몸을 관통했다.
둥! 둥! 둥!
흥과 전율에 몸을 맡긴 장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라마를 따라 춤추기 시작했다. 어차피 꿈이니까
부끄러울 일이 없다. 그저 손과 발이 가는 대로 장염은 내버려 두었다. 많이 움직일수록 고통과 쾌락도
늘어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원청 스승이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보고 있다.
“스승님! 이곳은 어디 입니까?
“아직 몰랐더냐. 속세의 사람들이 저승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스승의 뒤로 하나둘씩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타난 사람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과연
저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러나 스승님은 …. 분명 선계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선계는 없다.”
스승의 뜻밖의 대답에 놀란 장염이 말을 잃고 서 있을 때다. 다시 작은 북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북소리를 따라 다시 어깨를 덩실거리던 장염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선계가 없으면…. 망자의 산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
날개옷을 입은 뵌포 라마가 점점 멀어져 갔다. 북소리가 멈추고 사방이 적막해 졌다. 흐릿하지만 사물
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는 요요롭게 타오르는 횃불 하나가 제단을 비추고 있었다. 장여이 제단의
맞은편에 서 있는 가면의 라마승을 바라보았다.
“적멸존자여! 망자의 산은 대단한 것이었다.”
“흥! 백마술의 뵌포 라마는 누구냐?”
“나를 제압해야 그 이름도 들을 것이 아니겠느냐!”
“겨우 살아난 주제에 광오하다!”
적멸존자가 손에 들고 있던 뼈피리를 휘두르자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일어났다. 그림자들은 알아듣
지 못할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장염에게 몰려들었다.
우우우우!
장염이 등 뒤에서 청명검을 뽑아 정면에 대고 세차게 흔들었다.
어의통검의 묘! 풍산검기!
휘우우웅!
검에서 일어난 돌풍이 그림자들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림자들은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듯 어기적
거리며 다가왔다.
적멸존자의 손에 들린 뼈피리가 한차례씩 휘둘려질 때마다 바닥에서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어느새 동굴은 검은 그림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저 뼈피리를 없내는 편이 낫겠다.’
장염이 뒤로 물러서며 청명검을 날렸다. 청명검은 다가오는 그림자를 뚫고 제단 뒤에 있는 적멸존자에
게 날아갔다.
적멸존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뼈만 남은 손을 들어 올렸다. 청명검과 적멸존자의 손이 맞부딪치
자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따땅!
‘헉!”
청명검이 튕겨나자 장염의 입에서 다급한 헛바람 소리가 터져나왔다. 무림에 나온 이래로 청명검의 검
기를 맨손으로 받아낸 사람은 처음이다.
‘아차! 저 마물은 이미 오백 년 동안 오행혈마기를 연공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한 오행혈마인들과 달랐다. 적멸존자의 오행지기는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원리에 충
실한 완전한 것이었다. 뜨끔한 장염은 그림자들을 피해 뒤로 몸을 훌쩍 날렸다.
청명검을 받아낸 적멸존자는 여전히 멀리서 뼈피리를 휘둘러 댔다. 그림자들이 바닥에서 일어나 장염의
전신에 달라붙었다. 그때마다 장염은 자리를 바꾸어가며 검을 휘둘렀다. 그림자는 검기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릴 뿐 특별한 충격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크크큭! 아이야, 그만 쉬느 것이 어떠냐? 망자에게 검을 휘둘러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과 몸이
닿으면 고통스럽겠지? 그건 그들이 네 원기를 빨아들이기 때문이야. 네 원기가 다 빠지면 너도 그들과
같은 모습이 될 게다.”
웃음과는 달리 적멸존자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손을 써서 장염을 없애고 싶었
지만 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조금 전 술법을 과도하게 사용한 뒤라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백마술에 의해 술법이 파괴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터라 피해는 더욱 컸는지 모른다.
적멸존자가 그림자만 가지고 일격에 장염의 숨통을 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적멸존자는 쉬
지않고 뼈피리를 휘둘러 그림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자연히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소강 상태에 빠
져들었다. 장염은 적멸존자가 고강한 내공을 가지고도 시간을 끄는 듯하자 의아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 마물이 왜 덤벼들지 않을까?’
지금처럼 그림자에 밀려 허둥대고 있을 때라면 자신이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적멸존자는 뼈
피리만 휘두르고 있었다. 문득 ‘조금 전 법술이 깨질 때 원기를 상실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더 큰 술법을 펼치려고 준비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대가 어느 경우이든지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장염은 적멸존자의 내외공이 자신보다
뛰어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가 시간이 지나 그가 내공을 회복하거나, 다른 법술을 펼친다면 상대하
지 못할 것이다. 장염이 마치내 경천일기공을 끌어올렸다. 어차피 급한 쪽은 자신이니 서두르지 않는다
면 기회조차 없을 지도 몰랐다.
“나의 뜻이니, 검이여! 적멸존자에게로!”
청명검이 장염의 손을 떠나 다시 한 번 적멸존자에게 날아갔다. 그 순간 검기를 피해 주변을 돌던 그림
자들이 장염에게 달라붙었다. 몸에서 내공이 소멸되기 시작하자 장염은 몸을 날려 그림자들에게서 멀어
져 갔다.
“흥!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적멸존자가 오행혈마기를 모은 손으로 청명검을 잡아갔다. 허공에서 손과 청명검이 만나는 순간이다.
어의통검의 묘! 검기산하!
갑자기 청명검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적멸존자의 몸을 덮었다.
콰콰콰쾅!
적멸존자의 몸에 부딪친 검기가 말 그대로 꽃잎처럼 흩날렸다.
검기는 적멸존자의 몸에 치명적이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당황하게 만들었다. 적멸존자가 주춤거리
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이다. 검기를 뿌리고 사라졌던 청명검이 어느새 다시 날아와 적멸존자의 단전으로
파고들었다.
쉬이익!
지금까지 이토록 당해본 적이 없던 적멸존자다. 분노한 적멸존자는 손에 잡힌 뼈피리에 공력을 주입하
여 아래로 힘껏 내리찍었다. 오행혈마기를 담았으니 저 꼴 보기 싫은 장검이 두 동강 나리라!
“부러져라!”
뼈피리와 청명검이 부딪치자 ‘콰직’ 하는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적멸존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
다. 법술을 부릴 때 반드시 필요한 인간의 뼈로 만든 뼈피리가 뚝 부러지고 만 것이다. 다시 이와 같은
법보를 만들려면 적어도 십 년은 걸릴 것이다. 적멸존자가 이를 갈아붙이며 스쳐 지나가는 검을 노려보
았다.
‘대체 저 검이 무엇이기에!’
날아다니는 검이 보통의 검이 아님을 알아도 너무 늦게 알았다. 뼈 조각은 부러졌건만 튕겨났던 검은
쾌속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적멸존자는 두려움과 분노로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두 손을 모았다. 몇백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사용
하지 않았던 절학 오행불영장을 펼치기로 작정한 것이다. 오행혈마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적멸존자의
승포가 부풀어 올랐다.
검이 다가오자 적멸존자가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었다. 그러자 즉시 두 개의 손바닥에서 장풍이 쏟
아져 나갔다.
부우우웅!
장풍은 서로의 그림자를 감싸고 돌며 합쳐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두 개의 장풍 속에 오행지기의
상생, 상극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오행지기의 무쌍한 변화에 휘말리면 병기는 물론 이기어검의
시전자도 내상을 입게 될 것이다.
장풍의 모양을 바라본 장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제 와 검을 돌리면 저 장풍은 자신에게 날아
들 것이다. 이제는 최후의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자들에 의해 빼앗긴 공
력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경천일기 제일기공 유생어무!
경천일기공의 법문을 생각하자 새로운 진기와 흩어져 있던 진기가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충만한
내력만으로 어찌 저 장풍을 상대할 것인가! 오행의 변화를 흐트러뜨릴 수 있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조화
가 필요했다.
‘무량검이다! 어의통검으로 자유로워진 검에 가볍고 무거움을 더하다면 능히 오행의 장풍도 뚫을 수 있
을 것이다.’
어의통검의 묘!
대중무량의 변!
무의무욕 기천기검!
마침내 검과 장풍이 한곳에서 마주쳤다. 거대한 두 개의 손바닥이 삼 척의 장검을 덮었다. 손바닥에 가
려 장검은 보이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기파 부딪치는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오행의 변화에 맞서 청명검
이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콰콰콰콰!
첫 접촉의 충격으로 장염이 먼저 내상을 입었다.
“크윽!”
장염의 입술을 비집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어찌 여기서 공력을 거둘수 있으랴! 지금 여기
서 공력을 거두웠다가는 곧 죽게 될 것이다.
적멸존자가 만족한 표정으로 피르 쏟는 장염을 바라보았다. 조금 버거운 상대였지만 이제 승부는 난 것
이나 다름없다. 사실 법술에 실패하지 않았으면 이런 싸움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염
은 꽤나 애를 먹인 상대였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승리를 장담하며 앞을 바라보던 적멸존자의 눈이 불신으로 부릅떠졌다. 삼 척 장검 하나가 오행혈영장
을 뚫고 천천히 날아 들어왔다. 아니, 적멸존자의 눈에 느리게 보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몸
을 피했을 테니 말이다.
피웅!
번개같이 날아온 삼 척 장검은 적멸존자의 단전을 뚫고 동굴 뒷벽에 깊숙히 박혔다. 적멸존자가 어이없
다는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느 아직도 무한에 가까운 공력이 남았다. 쿨럭!”
적멸존자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천제일우의 기회를 놓칠 장염이 아니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 장염이 다시 오른손을 곧게 뻗었다. 동굴 벽에 박혔던 청명검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적멸존
자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핫! 아이야, 오늘은 본존이 방심하였다. 망자의 산에서 살아 나간 첫 번째 사람이 되겠구나. 그
러나 너도 이미 망자의 산을 무시한 대가를 치렀다. 본존과 만난 기념이라고 생각하거라.”
“흥!”
장염이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듯 콧방귀르 뀌며 손을 좌에서 우로 휘둘렀다. 동굴 벽에서 빠져나온 청
명검이 적멸존자의 가슴을 꿰뚫고 검집으로 돌아왔다.
찰칵!
장경선에게 당한 경험이 있던 장염이라 단전과 가슴을 모두 파괴한 것이다. 적멸존자가 천천히 바닥에
몸을 뉘었다. 얼마 후 적멸존자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장염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가면을
벗겨냈다. 누군지 확인할 틈도 없이 가면 아래 숨어 있던 얼굴은 순식간에 삭아 가루로 떨어져 내렸다.
그 허망한 죽음을 확인한 장염이 되돌아섰을 때다.
히죽.
모래처럼 흘러내리던 얼굴이 실룩거리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왠지 섬뜩한 느낌에 장염이 황급히
돌아보았지만 한 무더기 뼛가루만 남았을 뿐이다.
‘그나저나 내가 치른 대가라는 것이 무엇일까?’
마하륵의 시체를 안고 동굴을 빠져나오는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밖으로 나온 장염이 주변을 살펴보았
지만 노라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위산 주변을 둘러보아도 노라마의 흔적이 없었다.
‘큰일이다. 노라마는 이미 내공을 잃었는데…’
마하륵을 묻은 뒤 반야승의 안위를 염려하여 혈마사까지 염탐했지만 노라마들은 없었다. 며칠 동안 혈
마사와 바위산을 둘러보던 장염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대협의 비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돌아가야겠다.’
삼울 십일에 노라마들을 구하기 위해 ‘망자의 산’ 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대충 어림잡아 오 일이 흘렀
으니 이제 십오 일쯤 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느긋하게 가더라도 단오절 전까지는 사천제일루에 도착
할 수 있다. 두 노라마의 신변이 궁금했지만 적멸존자가 죽었으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관도를 걷던 장염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반사적으로 옷깃을 여미었다. 입춘이 지난 지 여러날 되었
건만 오히려 더욱 쌀쌀해지는 날씨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 봅이니 곧 풀리겠지’
날씨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은 혈마사를 떠난 지 삼 일째 되던 날이다. 갈수록 기온이 떨어지더
니 밤에는 폭설마저 쏟아졌다.
‘지금 눈이 내릴 때이던가?’
휘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는 장염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뭔가 이상했다.
“후우….. 눈이라…..”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