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18)
1장. 그래도 역사(歷史)는 흐른다
쌓인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북산(北山)의 험한 계곡을 오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듯 고통스럽게 입과 코로 하얀 김을 내뿜었다.
사내의 분주한 걸음은 산등성이를 올라서면서 잠시 멈추어졌다.
“과연 여기가 북산이로구나. 강호가 어수선하여 삼 년 간 두문불출했으나
어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있단 말인가! 밤마다 나타나 나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는 황금의 절규를 생각하면… 암! 찾아주어야지.”
장천사 장염이 북산의 황금에 손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도 지난 삼 년 간
꼼짝하지 못했다.
오행혈마인과 그들을 잡겠다며 구석구석 들쑤시고 다니는 온갖 무림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낯선 사람만 보면 무조건 잡아 호패를 조사하고 짐을 들쑤셨다.
“나쁜 녀석들 같으니라구! 자기들이 무슨 관원(官員)이라구 호패에 짐 조사
까지… 완전히 강도가 따로 없다니까.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렇게 지랄맞은
건지 원.”
정확히 말해 현상금에 눈이 먼 무림인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기찰 활동을
하면서부터 강도와 도둑, 그리고 일반의 구별이 따로 없어졌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여행자의 짐을 빼앗아 조사를 했고,
간혹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도 나오면 압수해 갔다.
그래도 누구 하나 찍소리할 분위기도 아니다.
워낙 강호가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자고 일어나면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죄명(罪名)도 다양했다.
관인(官人)은 정적(政敵)에 의해 몽고족의 첩자로 몰려 죽었다.
밉보인 종교인은 귀문(鬼門)에 들었다고 맞아 죽었으며,
무림인은 오행혈마인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그 죽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은 워낙 사회 분위기
가 흉흉해서이다.
말 한 마디 잘못 거들고 나섰다가는 뭇매를 맞아 죽을 판이니 누가 함부로
죽은 자를 위해 입을 열겠는가!
“무공만 강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북산을 다녀갔을 것이다. 이제라도 찾아
왔으니 서둘러 황금을 찾아 돌아가야겠다.”
귀주성 제일의 도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손이 빠르고 달음질에
능해서 붙은 이름이다.
무공은 겨우 삼류 수준을 넘지 못하니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손해를 보지 않고 살 수 있다.
“그 지독한 놈들도 이제는 많이 사라졌으니 다행이다.”
귀주신투 박달재가 감회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앞에 보현보살의 상(像)이 서 있으니 황금을 감추어둔 동굴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황금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요즘 같은 때에 누가 이곳까지 찾아와 맨땅을 파겠나.’
박달재가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어깨를 활짝 폈다.
걸음걸이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
물론 이런 곳까지 한겨울에 찾아왔다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렇다고 드러내서 ‘내가 수상한 짓을 하고 있다’ 고 광고할
필요도 없다.
한겨울이라 드문드문 보이는 북산의 석굴들은 텅 비어 있었다.
시커먼 동굴 앞으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박달재의 가슴은 한차례씩 철렁
거렸다.
박달재는 호흡을 고른 뒤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곱게 쌓인 눈 위로 드문드문 산짐승의 발자국만 남아 있다.
사람의 흔적이 없다는 게 이렇게 감사할 줄 몰랐다.
바람이 휘몰아친다 싶더니 한두 개의 눈송이가 허공을 맴돌다가 사뿐히
가라앉았다.
박달재는 보현보살의 손끝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길게 꼬리를 이은 자기의 발자국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 온 이상 이제는 재빨리 물건을 파낸 뒤에 떠나야 한다.
마침내 박달재는 작은 동굴의 입구에 다다르게 되었다.
고개를 돌려 보현보살을 살피던 박달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시 확인해도 틀림없다.
과거 의혈단의 고수들만 아니었어도 이곳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박달재가 상체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 대단한 의혈단도 혈마사의 라마승에 의해 멸망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더니… 그렇게 사라질 것들이 왜 나를 괴롭힌
거야.”
그러나 결국 혈마사도 무림맹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고 보면 생겨난 모든 것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들이야 흥하든 망하든 나는 모르겠고… 어디 보자… 이쯤인데…”
박달재가 동굴 끝에 이르러 바닥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수 년이 지났으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지는 않은 듯,
동굴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아주 좋구나. 어디 보자. 벽에서 한 걸음 못미처 바닥을 팠으니…
여기로구나.”
쪼그리고 앉은 박달재가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다시 빼낸 그의 오른손에는 작은 쇠꼬챙이가 들려 있었다.
얼어붙은 땅바닥을 생각해서 미리 준비한 연장이다.
팍. 팍.
어느 정도의 고생을 각오하고 왔건만 땅은 생각보다 쉽게 파졌다.
‘동굴 속이라고 얼지 않은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박달재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이미 두 뼘쯤 팠지만 아직 멀었다.
그날은 흙을 퍼내다가 팔꿈치를 긁힐 정도로 깊게 팠다.
“헉… 헉… 위치가 조금 바뀌었나… 왜 이리 안 나오냐?”
팍! 팍! 팍!
중얼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흙을 파내던 박달재가 잠시 멈칫거렸다.
손끝에 와 닿는 느낌이 달랐다.
마침내 쇠꼬챙이가 흙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건드린 것이다.
“으흐! 으흐!”
박달재가 실성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손톱니 조금 부러지고 손등도 긁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 흙 사이로 작은 나무상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박달재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지난 몇 년 간의 설레임은 모두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
나무상자는 가로세로의 길이가 한 자요, 높이는 한 뼘이었다.
북산에서 잡힐 때를 대비하여 급하게 만들었으니 볼품은 없다.
그러나 이 속에 든 황금은 귀주성에서 끌어 모은 박달재의 애장품으로
값을 매기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박달재가 상자를 움켜쥐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상자는 변함없이 묵직했다.
벅찬 감동으로 숨이 가빠왔지만 박달재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일이란 말인가!
혈마사와 오행혈마인의 소란 때문에 무던히도 참아야 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이처럼 달구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박달재는 오늘의 이 감동을 오래도록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한참 동안 히죽거리던 박달재는 다시 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나무를 열어야 그 속의 황금을 꺼낼 수 있다.
뿌드득.
나무상자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제 만든 듯 단단했다.
그것이 박달재의 마음을 더욱 즐겁게 했다.
이 볼품 없는 나무상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그래! 암… 그래야지.’
빠각.
가능하면 부서지지 않게 열려고 했지만 나무상자는 결국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상관없다.
어차피 상자를 가져가려고 온 것은 아니다.
부서진 나뭇조각을 떼어내던 박달재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귀주제일의 도둑이라는 칭호는 결코 헛소리가 아니다.
언뜻 엿보이는 상자 안쪽에서 황금의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하! 설마… 세월이 흐른다고 금이 돌로 변할까…’
박달재가 하얗게 탈색한 얼굴로 나무를 뜯어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있었다.
황금이 변하여 돌이 되고 만 것이다.
부들부들 떨며 돌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던 박달재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
졌다.
“어떤 개자식이!”
황금과 돌의 숫자가 같았다.
황금만 훔쳐 가도 분통이 터질 판인데 누군가 숫자마저 맞추어놓았다.
아마 그자가 상자도 단단히 밀봉했으리라.
그렇다면 누군가 자신에게 악의적인 수작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놈은 물건을 훔쳐 가는 것으로 부족해 정신적인 상처까지 입히려 들고
있었다.
“하하하! 이 개자식아! 나는 그저 금만 도둑맞았을 뿐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속이 상해서 미쳐 날뛸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박달재가 나무상자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콰직!
“이만한 일로 흥분해서 날뛸 내가 아니란 말이다, 이 자식아!”
퍽! 퍽! 퍽!
이번에는 쇠꼬챙이가 사정없이 동굴 벽을 찔러댔다.
흙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박달재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씨벌! 나는 그저 좀도둑에게 당한 것뿐이야! 아무렇지도 않아! 어떤
개자식인지 몰라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아라! 황금은 또
훔치면 되니까 나는 멀쩡하다고! 이 개자식아! 으흐흐흑!”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던 박달재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닦지도 않았다.
그보다 나무상자가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날 때 언뜻 하얀 종이를 본 것 같다.
“끙…”
비칠거리는 몸짓으로 겨우 일어나 바닥을 더듬던 박달재의 손에 과연 종이
한 장이 잡혔다.
“개자식아! 내가 이 종이를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더 이상 관심
을 가지지 않겠다. 네놈이 종이에 뭐라고 썼든지 그것으로는 나에게 충격을
줄 수 없다!”
종이를 들고 부르르 떨던 박달재가 몸을 돌렸다.
눈에서 불꽃이라도 내뿜지 않은 한,
입구를 등지고 서서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다.
– 내가 부순 진 대인(眞大人)의 옥불상 값이다. 개방 장로 소걸.
박달재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다.
개방에 상식을 떠난 기인(奇人)과 더러운 놈들이 많다지만 이럴 수는 없다.
“소걸이라는 개, 쌍, 호로 자식아! 지금까지 옥으로 만든 침상과 베개는
봤지만 옥불상은 본 적도 없다. 그리고 왜 네놈이 부순 옥불상을 내가
물어주어야 한단 말이냐! 게다가 그렇게 비싼 옥불상이 어디 있다고!
으흐흐흐흑!”
차라리 읽지나 말 것을 읽고 나니 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놈이 부수었다는 진 대인의 옥불상을 왜 내가 물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개방 장로 소걸이라니, 그런 이름은 들어본 기억도 없다.
가만히 서서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 보았지만 그런 지저분한 이름을 가진
사람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더러운 놈! 거지 같은 놈! 어디다 대고 개수작이냐! 으흐흐흑!”
박달재는 동굴 입구에서 한참 동안 대성통곡을 했다.
지니가던 사람이 보면 부모의 묘를 동굴에 쓴 줄 알 정도다.
그래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그나마 어느 놈이 훔쳐 갔는지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랄까?
“소걸! 개방의 장로라고 했겠다. 이 원한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에게 복수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선 상대가 개방의 장로라면 자신의 무공으로는 그의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진짜 도둑놈이 보란 듯 자신의 이름을 남겨놓았을 리도 없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주변에 원한을 품은 어떤 자가 있는 모양인데,
곰곰이 돌이켜 보니 후보자가 너무 많다.
그런데 도둑은 왜 자신이 개방 장로 소걸이라고 했을까?
어쩌면 개방 장로 소걸일 수도 있지만 그와 원한을 맺은 좀도둑의 짓일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대체 어떤 놈이야!”
***
소걸은 귀주신투 박달재의 황금을 훔친 뒤에도 여젼히 사천제일루에서
잔심부름이나 거들고 있었다.
스승인 장염이 사천제일루에 있으면 찾으러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삼 년이나 지났지만 귀신 같은 스승의 명령을 거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천제일루에서 견디지 힘들 만큼 박정하게 대했다면 그 핑계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사천제일루의 민주려와 민소백, 그리고 헌원일광과 이대추는 소걸을
집 나갔다가 돌아온 자식처럼 대했다.
지금 하고 있는 점소이의 일도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소걸이 자청하여
시작한 것이다.
비록 귀주신투의 황금을 훔쳐 내기는 했지만 아직 어린 소걸에게 그렇게
큰 단위의 돈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소걸에게는 하필 돈을 쓰는 재주가 없었다.
점소이의 일을 해서 받은 돈도 제때 다 쓰지 못할 지경이다.
비록 어린 나이에 강호를 제멋대로 떠돌았다고는 하나 그가 모신 스승들은
재물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유년 시절부터 그들과 생활해 온 소걸인지라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지금은 어린 나이인지라 황금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걸에게 귀주신투의 황금은 그저 복수를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소걸이 지금까지 만져 본 돈 중에 가장 큰 단위는 은전이다.
한두 번 만져 본 은전이라면 모를까 황금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결국 소걸은 황금을 사천제일루의 화원 한구석에 깊숙이 묻어두었다.
그리고 박달재가 허탕을 치고 돌아갈 무려베에는 자기가 황금을 묻었다는
사실조차 가물가물한 기억 저편으로 넘기고 말았다.
점심 무렵 객점의 탁자 사이를 오가던 소걸이 잠시 멈추어 섰다.
“우웅…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이리 간지럽냐…”
행주질을 잠시 멈추고 귀를 후비고 있는 소걸에게 홍칠이 다가왔다.
“후배, 귀가 가렵다고 탁자 위에서 후비면 되겠는가!”
사천제일루에 찾아온 지도 삼 년이 지났으니 소걸의 나이 어언 십육 세.
홍칠은 십팔 세다.
삼 년이면 어설픈 정이라도 들 판인데 두 사람은 날마다 아옹다옹하는
사이였다.
소걸이 삐딱하게 서서 홍칠을 바라보았다.
“홍 형(紅兄), 누가 귀를 후볐다고 그래요? 잠시 매만진 것도 후빈 거라고
하니 진짜 후비면 구멍 뚫는다고 하겠네.”
듣고 있던 홍칠이 한껏 인상을 썼다.
홍칠은 본래 허례허식이나 허황된 놀이를 싫어했다.
그런데 점소이 소걸이 마치 무림인인 양 자기에게 ‘홍 형’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후배가 귀를 후벼 탁자 위에 가루가 떨어졌으니 그걸 보고 말한 것뿐이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으면 다른 데 가서 귀를 파든지 삽질을 하든지 해라.”
“…”
홍칠이 끝내 후배라고 하자 소걸의 얼굴도 구겨졌다.
홍칠은 삼 년 전 부담스러운 첫 만남을 가진 뒤로 처음 몇 달은 ‘손님’
이라고 하더니, 단오절이 지나면서부터 ‘후배’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놀고 먹기가 심심하고 미안해서 점소이의 일을 거든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다.
홍칠이 괘씸해서라도 어지간하면 점소이의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만,
어떻게 된 사람들인지 객점의 식구들은 자신이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했다.
한술 더 떠서 사람들은 ‘스승인 장염도 주방 보조에서 명인이 되었으니,
너도 점소이의 일을 하다가 보면 언젠가 점소이계의 대형(大兄)이 될지
모른다’ 고 했다.
그런 걸 보면 사천제일루에서는 아직도 장염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책임도 없지 않다.
사람들이 ‘요리 명인이 장천사 장염이냐?’ 고 물었지만 대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스승과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관계된 무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제풀에 지친 사천성 사람들은 장염 스승이 요리 명인이라는 편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는 편으로 갈려 단오절을 기다렸었다.
그러나 끝내 스승은 나타나지 않고, 그렇게 삼 년이 지나 버렸다.
그 삼 년 간 소걸은 서열을 굳히려는 홍칠의 무한 신경전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저게 끝내 나를 후배라고 부르네.’
스승의 당부만 아니었더라도 벌써 요절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은 일반인에게 절대로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소걸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홍칠을 노려보았다.
‘대체 저 홍씨는 나를 후배로 만들어 얻을 게 뭐가 있다고 틈만 나면 후배
라고 부르냐.’
키가 소걸보다 한 뼘이나 더 큰 홍칠도 눈알에 힘을 주고 마주보았다.
그동안 소걸이 점소이의 일을 하면서도 강호의 기인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자기가 뭐라고 손님과 점소이를 오락가락한단 말인가!
한번 점소이는 영원한 점소이이며 그런 의미에서 홍칠은 소걸의 선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자식아! 뭘 쳐다보느냐! 우리 점소이계에 입문했으니 너는 영원히
나의 후배다.’
두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노려보고 있을 때다.
계산대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민주려가 크게 소리쳤다.
“이제 그만들 해라! 칠(七)이는 가서 일을 마저 끝내고, 걸(乞)이는 이리
오너라.”
“…”
소걸이 다시 한 번 타는 듯한 눈길로 홍칠을 노려본 뒤 계산대로 걸어갔다.
민주려의 염소수염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였다.
다소 어색한 시작이었지만 지난 삼 년 간 따뜻하게 돌봐주고 있는 민주려다.
그래서 소걸도 그의 말이라면 잘 따르려고 애를 썼다.
“아직도 장 명인(張名人)에게서 연락은 없는 것이냐?”
“예…”
“흠…”
염소수염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민주려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스승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유난히 정이 많은 것 같다.
소걸이 알고 있는 인간은 본래 정이 없고 남의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스승 주변의 사람들은 연락도 끊긴 스승을 기다렸다.
그리고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꼭 스승의 이야기를 묻고 또 물었다.
‘민 대인(玟大人)도 그렇고 장 사형도 그렇고…’
장소룡은 삼 년 전 자신이 장염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꼭 ‘사형’
이라고 부르게 했다.
천애고아로 무림을 떠돌던 소걸에게 갑자기 형제가 생긴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이 하나 더 생겼다.
단오절에 찾아온 이무심이 장소룡 앞에서 ‘앞으로는 나에게도 이 사형이라고
해라’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무심이나 장소룡은 자신처럼 무공이라도 배웠으니 스승을 기다린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사천제일루의 사람들은 대체 왜 스승이 오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일까?
스승이 사천제일이라는 요리 명인이라서?
민주려의 얼굴을 볼 때 그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주방의 사람들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들까지 기다리니…’
아마 스승에게는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경쟁자이기도 한 요리사들끼리 스승을 기다릴 리가 없지
않은가!
‘음… 요리를 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일까?’
생각이 막혀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소걸에게 민주려가 말했다.
“네 스승은 기인이다.”
“…?”
소걸이 뜬금없는 민주려의 말에 얼굴을 쳐들었다.
민주려가 아득한 눈빛으로 주방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공의 고수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네 스승은 전도사(傳道師)다.”
“전도사요?”
민주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상에 도(道)를 전하는 참스승이지. 그가 전하는 도(道)는 평범해서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고… 장 명인을 보면 가끔씩 도(道)라는 게 도사
들만 닦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 허허헛!”
소걸은 다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스승과 함께 생활하던 짧은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일들을 겪었다.
강호의 명숙(名宿)에서 시작하여 건달과 도둑과 강도,
그리고 협잡꾼까지 만났다.
그런데 그들에게 보여주었던 장염의 모습은 따라하기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그게 평범한 건지 모르겠는데….’
장염은 모든 사람에게 한결 같은 자세를 보여주었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죄를 지은 사라도 뉘우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갔다.
심지어 자기를 벗겨먹으려던 강도에게 새 출발 하라고 그 자리에서 간판
까지 만들어주었다.
‘으으…. 생각할수록 열불난다. 그건 진짜 도사들이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스승님은 도사가 분명해. 그렇다면 나는 절대로 도사가 되지
말아야지.’
소걸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얼굴을 바라보던 민주려가 빙그레 웃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하더니 과연 어린 나이에 벌서 스승의 뒤를
따르겠다는 굳은 각오를 보이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미산으로 들어간 네 사형들은 어찌 지내시느냐?”
민주려의 얼굴에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그 방면에 문외한(門外漢)인 자기가 보아도 삼 년 전 단오절의 비무는
굉장했다.
어디 싸움만 대단했던가!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무림인들이 사천성 성도(成都)로 물려들어 숙박업을
겸하는 사천제일루도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두 사람과는 진작부터 안면이 있던 터라 장염이 올 때까지 머물러도 좋다고
했지만 비무가 끝난 뒤 이무심과 장소룡은 사천제일루를 떠나갔다.
말은 안 했지만 아무래도 이무심의 부상이 심해 보였다.
소걸에게 그동안 몇 번이나 들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되묻게 된다.
“요즘은 아미산에 들러보질 않아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대협의 몸은 다 나았느냐?”
“그럭저럭 나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날 금거산이 봐주었기에
망정이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듯 소걸이 몸을 떨었다.
소걸은 그날 태산장법의 금거산이 왜 천하십대고수 중의 하나인지 알았다.
어찌나 놀랐던지 ‘무림에 이름이 난 사람과는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한다’ 고
거듭 다짐까지 했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더니,
그러고 보면 세상에 완전한 헛소문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날도 장 대인(張大人)이 아니었다면 벌써
장사를 치렀을 게야. 그나저나 무림인으로 산다는 것도 고역인 것 같은데
왜들 그 길을 가는지…”
“맞아요. 좀 쉽게 살아도 되는데 너무 고생스럽게 살려고 하신다니까요.”
소걸은 이무심의 고집스러운 일면을 떠올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날의 이무심은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았다.
그러나 처참한 비무 이후에도 이무심의 투지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세상이 편할 텐데, 이무심은 끝까지 무공으로
천하십대고수를 꺾으려 하는 것일까?
“겨울이라 손님도 뜸하니 내일은 아미산으로 가서 두 분이 어찌 지내시는지
둘러보고 오너라. 명색이 너의 사형인데, 내가 먼저 찾아보라고 해야 가볼
게냐?”
“헤헤, 워낙 객점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그만 깜빡깜빡….”
“열심이라… 푸헐! 그만 돌아가 짐이나 꾸리도록 해라.”
민주려의 다소 과장된 듯한 웃음을 듣고 소걸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농담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실없는 말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무지하게 딱딱하네.’
투덜거리며 걸어가는 소걸의 뒤통수로 홍칠이 소리쳤다.
“어이, 후배! 다른 데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몰라.
우하하핫!”
소걸이 발끈하여 몸을 돌렸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홍칠이 배를 움켜쥐고 웃고 있다.
소걸은 이를 빠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스승님은 복도 많아서 주변에 널린 게 호인(好人)인데, 내 근처의 사람은
왜 모두 저 모양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육식 동물처럼 ‘으르릉’ 거리며 잡아
먹으려고 덤벼들었다.
이런 짐승들 틈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악착 같은 자기 방어가
필요할 것이다.
“홍 형! 행주질 다 했으면 밖에 나가서 손님이라도 모셔와요. 내가 일하던
운남성에서는 그렇게 빈둥거리면 주방에서 칼을 던져요.”
“뭐라? 내가 빈둥거려?”
홍칠이 되받아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소걸은 밖으로 나간 뒤다.
홍칠은 파르르 떨다가 계산대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큰 소리에 놀란 민주려가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실내에 서 있기가 민망해진다.
“하하… 손님이 없네요.”
홍칠은 민주려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주인에게 눈치가 보이니 손님이라도 끌어볼까 하는 마음에서다.
그러나 사천성은 사시사철 훈훈한 운남성과 사는 법이 다르다.
홍칠이 오랫동안 객점 앞을 서성였지만 한겨울이라 오고 가는 사람도
없다.
휘이잉!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살갗으로 파고들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밖으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들어갈까!
홍칠은 동상에 걸려 죽더라도 조금 더 버텨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홍칠이 바들바들 떨고 서 있을 때다.
보다 못한 민주려가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이놈아! 주접 그만 떨고 안으로 들어오거라!”
기다렸다는 듯 홍칠이 몸을 돌려 비척비척 걸어 들어갔다.
홍칠의 등 뒤로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다시 한 번 몰아쳐 갔다.
***
다음 날 소걸은 괴나리봇짐을 어깨에 메고 사천제일루를 나섰다.
솜옷으로 두툼하게 몸을 감싼 소걸의 발걸음은 보기보다 가벼웠다.
홀로 여행길에 나서니 점소이에서 다시 무림인이 된 기분이다.
봇짐 속에는 민주려가 사형들에게 전해주라며 챙겨준 건량과 약간의 은자가
들어 있다.
이 음식과 은자를 받고 즐거워할 늙은 사형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온몸에
힘이 뻗쳤다.
“가자, 가! 이게 몇 달 만의 외출이냐!”
지난 해 가을 이후로 한차례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돌아다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강호가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현상금 사냥꾼들은 오행혈마인과 노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행혈마인은 마교로 돌아간 장소를 제외하고는 종적이 묘연했다.
“지긋지긋한 마교 놈들 같으니라구… 또다시 사파를 통일하겠다고 법석을
떨까?”
그러니까 정확히 이 년 전의 일이다.
스승이 사라지고 일 년쯤 지나서 무림은 발칵 뒤집혔었다.
마교에서 축출되었던 장소가 다시 천산(天山)의 마교를 접수한 것이다.
소걸은 사람들이 그를 잡기 위해 천산으로 몰려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게 웬걸?
그 후로 그의 뒤를 따라붙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쯧쯧, 그저 강해야 사는 세상이라니까.”
장소가 마교에서 쫓겨났을 때는 천하를 위해 죽여야 할 놈처럼 어중이
떠중이까지 잡겠다고 설쳐 댔다.
그러나 장소가 다시 마교 교주 자리를 찾았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을 끊어버렸다.
죽고 싶지 않은 다음에야 누가 감히 천산의 마교로 찾아갈 것인가!
그런 일련의 현상을 빗대 무림에는 한동안 ‘죽고 싶으면 천산엘 가지’ 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사실 마교로 돌아간 장소를 상대할 곳이라면 무림맹이나 사파연합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혈마사가 쓸고 지나간 뒤의 무림맹은 예전과 달랐다.
구대문파 중 삼대문파가 멸망했기 때문에 고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물론 공동파가 재기에 성공했지만 겨우 칠대문파만으로는 강호를 운영할
수가 없다.
결국 무림맹도 장소의 문제에서 손을 떼야 했다.
“남은 칠대문파가 본산(本山)의 제자들도 부족하다니 말 다했지 뭐.”
역사적으로 정파가 쇠(衰)하면 사파가 흥(興)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파에서라도 장소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법도 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정파와는 대조적으로 사파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이 넘쳐서 주체하지 못하게 된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다.
사파는 마교대전 이후로 부흥기를 맞아 자그마치 이백여 개의 크고 작은
방파들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지역 분할의 문제에만 관심을 쏟았다.
어쩌면 마교가 천산파와 음산파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통합한 마교도 사파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했으니 그들의 자신감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사파의 지역 분할과 서열 다툼은 무려 삼 년 만에 막을 내렸다.
천하의 도둑들은 모두 칠십이채로 모였고,
그것은 다시 지존삼채와 육십구채로 구별되었다.
정사(正邪) 양측에 다행인 것은 천산으로 돌아갔다는 장소가 더 이상 강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애꿎은 장경선과 노호만 수많은 무림인의 표적이 되었다.
두 사람이 장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넓은 대륙에서 꼭꼭 숨어버린 두 사람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일확천금과 마경을 노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장소가 마교의 고수들을 이끌고 또다시 무림으로 나오면 난리가
나겠지.”
자기가 내뱉은 말에 놀란 소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만약 장소가 한바탕 싸움을 일으킨다면 지금 이렇게 마음 놓고 돌아다니
지도 못할 것이다.
장경선과 노호만으로도 겁이 나서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게 되는데,
마교까지 강호를 헤집고 돌아다닌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늘은 살 길을 꼭 열어두신다니까.”
스승이 실종된 이후 무림의 일에 신경을 끊었지만,
이렇게 유랑길에 오르니 자연 관심이 쏠린다.
다행히 마교는 천산에서만 활동을 해서 지금까지 접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장소가 마교의 교주가 되고 난 이후 그 세력이 얼마나 커졌는지 누가 알까!
“설마… 백주대낮에 뭔 일이 있으려구.”
그렇게 말하면서도 겁이 나는지 소걸은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았다.
쓸쓸한 한겨울의 관도 위로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간 적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느릿하던 소걸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째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겁만 늘어나냐… 이럴 때 스승님이라도 곁에
계셔야 하는데…”
등줄기가 오싹해지자 자상한 스승의 얼굴이 떠오른다.
스승은 정말 죽은 걸까, 아니면 크게 부상을 입어 치료 중인 것일까?
가끔씩 아미파의 사람들이 슬며시 찾아와 ‘장 사부가 이미 선계로 올라갔을지
모른다’ 고 해서 깜짝깜짝 놀랐었다.
그러나 아미파 사람들의 말은 차라리 들어줄 만하다.
사천제일루에 드나들던 손님 중에는 ‘장천사 장염이 장경선과 동귀어진했다’
고 떠들어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무상신패를 가지고 오행혈마인을 잡으러 다니던 스승이 사라져 버렸으니
무슨 소문인들 나지 않을까!
게다가 스승과 함께 장경선도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추측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자기는 그런 손님들이 음식을 시키면 내오기 전에 꼭 그 위에다
머리를 털었다.
“흥! 스승님은 다시 나를 찾아오실 것이다!”
소걸이 씩씩거리며 발 밑의 흙을 차올렸다.
팍!
얼어붙은 흙덩이는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이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소걸이 앞으로 달려가며 떨어지는 흙덩이를 다시 차올렸다.
두 번째 발길질에 흙은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씨이…”
이번에는 오행지기를 끌어올린 뒤에 다른 흙덩이를 걷어찼다.
흙덩이는 더욱 높이 올라갔지만 몇 번을 걷어차도 깨지지 않았다.
그렇게 서너 번 발길질을 거듭하던 소걸은 마침내 스승에 대한 염려도
잊었다.
신이 나서 달려가는 소걸의 머리 위로 흙덩이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소걸이 아미산에 닿은 것은 사천제일루를 떠난 지 사흘 째 되던 날이다.
여전히 한풍(寒風)이 불었지만 소걸은 추운 줄 몰랐다.
이미 오행지기를 오래도록 수련한 데다가 솜옷까지 두툼하게 입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걸의 공력에 이 정도로 옷을 걸쳤으면 오히려 몸에서 열이 치솟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오행지기의 공능은 놀라워 소걸의 체온을 자동으로 조절해 주고
있었다.
지금 소걸의 오행지기는 한서불침(寒暑不侵)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하나를 입으나 둘을 입으나 셋을 껴입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소걸은 계절에 따라 습관적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남들이 두 개를 입으니 그저 같이 입는 것이다.
가끔씩 엄살이 심한 소걸은 남들이 두 개를 입을 때 세 개를 입기까지 했다.
오행지기의 공능은 하나를 입어도 적절하고 둘을 입어도 적절하니,
누가 강제로 소걸의 옷을 벗겨보기 전에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오랜만에 오르는 아미산인지라 소걸은 계속해서 좌우를 살폈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들이 잔설을 머리에 이고 있다.
바람이 한차례 불어올 때마다 나무들은 서로의 몸을 부딪쳐 가슴 시린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럴 때 스승이 곁에 있었으면 뭐라고 가슴 뭉클한 말 한 마딜를 해주었을
것이다.
“장염 스승께서는 도(道)가 어쩌고 했을 거구…. 셋째 스승께서는 시를
읊었을 거야.”
가만 생각해 보니 스승들은 다들 한 가지씩의 개성이 있는데 자신은 아직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음… 나는 이럴 때 뭐라고 하지… 음…”
한참을 생각해도 마음에 꼭 드는 그런 말이 없다.
결국 소걸은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기로 했다.
“에라! 밥이나 먹으며 생각하자. 도저히 안 되겠다.”
조금만 더 걸으면 사형제들이 있는 움막에 도착할 테지만,
아무래도 그때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한번 허기를 느끼자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한다.
소걸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 봇짐을 끌렀다.
누런 헝겊을 풀어헤치자 곱게 뭉친 주먹밥이 하얀 몸을 드러냈다.
“우헤헤… 나도 개성을 정했다.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가슴이 쓰리니
밥이나 먹자꾸나.”
소걸이 히죽히죽 웃으며 한 입 베어 무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내 사제, 집 앞까지 와서 이게 무슨 처량한 모습이냐? 혹시 주먹밥 속에
귀한 영약이라도 집어넣은 건 아니겠지?”
소걸이 재빨리 일어나 몸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장소룡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걸이 황급히 밥알을 삼킨 후 아는 체를 했다.
“웅… 쩝쩝… 나이 많은 둘째 사형이시군요. 얼었지만 하나 드릴까요?”
“아니, 됐다. 그걸 먹다가 이라도 부러지면 어떻게 하라구. 그나저나 여기
까지 어쩐 일이냐? 장 사부에게서 소식은 있고?”
소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스승님의 소식은 없구요, 민 대인께서 한번 다녀오라고 해서 왔어요.”
“그래…”
맥 빠진 소리로 중얼거리던 장소룡이 절룩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직도 장소룡은 지팡이를 의지해야 할 정도로 몸이 불편했다.
“추운데 들어가서 먹지.”
“네에.”
소걸이 다시 봇짐을 어깨에 둘러메고 우물거리며 장소룡의 뒤를 따랐다.
안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작은 움막이 눈에 들어왔다.
“큰 사형께서는 좀 어떠세요?”
장소룡이 잠시 멈추어 서서 움막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금거산과의 비무로 산을 하나 넘으셨다고 하던데…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구나.”
“에고… 산 두 번 넘으면 바로 죽겠네요.”
“허…”
문득 그 날의 일을 떠올린 장소룡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삼 년 전 단오절을 전후로 벌어진 일들이다.
장소룡은 우연히 만난 소걸이 장염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사천제일루를
숙소로 정했다.
그리고 곧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이무심과 금거산의 비무 소식도 접하게
되었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사천제일루에 있다 보면 이무심과 장 사부를
모두 만나볼 수 있다!
당고랍산맥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니 벅찬 감동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장소룡은 그때부터 오행혈마인의 문제에서 손을 떼고 이무심과 장염이
오기를 기다렸다.
성도에 있던 수하들은 모두 수채로 돌려보냈지만 십팔마룡과 당문의 노기인
은 남아주었다.
십팔마룡은 ‘장 호법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남겠다’ 라며 떠나지 않았다.
당문의 노기인은 비무와 장 사부에 대한 호기심으로 당분간 남겠다고 했다.
장소룡은 단오절에 즈음하여 영화 소저와 재회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염의 누이라는 향이 소저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토록 기다리던 장 사부와는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단오절 아침.
멀리서 이무심을 본 장소룡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이무심의 기도가 이전과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강호에서 만난 수많은 사파의 고수들도 저런 기도는 보이지 않았다.
의형이자 사형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소룡은 금거산과 이무심의 비무가 해볼 만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뒤이어 나타난 금거산을 보는 순간 절망해야 했다.
과거에는 견식이 짧아 상대의 기도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천하십대고수 금거산은 의형인 이무심이 미치지 못할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장소룡이 이무심의 옷깃을 붙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형님, 다음 기회를 노리셔야 합니다.”
“장 아우… 남자로 살아감에 있어 이런 일에는 다음이 없다. 일찍이
장 사부는 언제나 현재만 있다고 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끝내 의형인 이무심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여기까지 온 이상 상대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소룡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당부했다.
“형님, 비무에 목숨까지 걸지는 마시구려.”
“비무에 걸린 것은 생명이 아니라… 나의 신념이다.”
금거산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이무심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한차례 손을 섞어본 적이 있지만 자기의 상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의 검법과 내공은 비범했지만 자신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했다.
‘오 년쯤 지난다면 모를까… 아직은 나의 상대가 아니다.’
자기가 상대방과 같은 처지였다면 지금의 자리는 어떻게든 피하고
오 년 후 다시 찾아왔을 것이다.
경험에 의하면 어차피 강호는 최후의 승자를 기억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 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상대는 그 오 년을 견디지 못할 만큼 초조해 보였다.
‘도전을 하는 사람이 초조하다면 볼 것도 없지.’
금거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쉬운 비무가 될 것이다.
“준비는 되었는가?”
이무심이 대답 대신 성큼 나서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금거산의 눈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상대가 자신의 앞에서 검을 뽑아 든 이상 이제는 승자와 패자만 남게 될
것이다.
상대에게는 안됐지만 오늘은 패자의 생명을 보존시켜 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살기를 감춘 금거산이 천천히 태산장법의 기수식을 펼쳐 보였다.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금거산의 태산장법이 이무심을 향해 현란하게 휘몰아쳐 갔다.
이무심의 검이 즉시 은빛 광채를 뿌리며 장세(掌勢)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금거산은 자신이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절학인 장풍(掌風)을 쏟아
부었다.
파파팟!
“아! 장풍이다!”
금거산의 손바닥에서 쏘아져 나온 희미한 손 그림자가 이무심에게 휘몰아칠
때마다 사람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무림에 전설로나 전해지는 장풍의 실체를 구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무심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무심의 검끝에 실린 은빛 광채가 번번이 장풍을 깨뜨렸던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 은빛 광채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검기가 유형화돠어 검신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검강(劍剛)이라 한다.
그러나 아직 무림에서 검강을 사용했다는 사람은 없고,
확인해 줄 역량을 가진 무림인도 없다.
사람들은 그저 은빛 광채가 장풍을 하나씩 부술 때마다 ‘아!’ 하고 탄성을
질러댔다.
츠츠츳!
펑! 펑!
은빛 검강과 장풍이 마주칠 때마다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경기(勁氣)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공력이 약한 사람들은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여 뒤로 나薩센杵?했다.
정오에 시작된 비무는 황혼이 뉘엿뉘엿 질 때까지 팽팽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장소룡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처음부터 이무심은 금거산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했다.
승패는 이미 나 있었지만 금거산은 느긋하게 이무심을 몰아가고 있다.
장소룡은 장 사부가 나타나 이 위기를 수습해 주기만 바랬다.
그러나 장 사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비무 막판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무심은 목숨을 걸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것이 혼자 다짐한다고 될 일인가!
금거산의 눈에 가득한 살기를 보고 애가 타서 발을 구르는 장소룡의 귀로
전음이 흘러들었다.
“금거산이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오. 황하수채의 이름과 노부의 무공이면
살생은 막을 수도 있겠소만…”
“…”
전음의 주인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당문의 노기인이었다.
이무심의 자존심이 걸린 일에 제삼자가 나서도 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