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19)
2장. 바람처럼 구름처럼
“크윽!”
장력에 스친 이무심이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고개를 돌리던 장소룡은 이무심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금거산의 오른손을
보았다.
“멈추시오!”
소리를 빽 내지른 장소룡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쯤 되면 명예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지체했다가는 의형의 목숨이 날아갈 판이다.
다행히 금거산은 더 이상 살수를 쓰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미 승부가 났는데 어찌 정파의 고인께서 상대의 생명을 취하려 하시오?”
“으음… 그대도 장가촌의 사람인가?”
장소룡이 이무심과 금거산의 사이를 막아서며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
살기를 띠고 이무심을 바라보던 금거산의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절룩이며 걸어나온 장소룡을 보자 다시 한 번 장가촌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순박한 사람들이 이렇게 변한 것은 모두 조카의 실수 때문
인지도 모른다.
휘리릭!
잠시 고민하고 있던 금거산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이무심을 안고 있는 장소룡의 뒤로 열여덟 명의 무림인이 떨어져 내리는데
그 기세가 삼엄했다.
‘이들에게도 저만한 세력이 있었던가.’
그러나 정작 금거산을 놀라게 한 것은 손바닥에 박혀 있는 작은 은침 하나
였다.
이 은침 때문에 태산장법을 더 이상 펼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무심의 목숨을 건진 것은 장소룡의 외침이 아니라 은침인
셈이다.
‘대체 누가 이것을 날렸단 말인가!’
최후의 순간 은침은 풀잎을 스치듯 날아와 발 밑에서 솟구쳐 올랐는데,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놀랄 틈도 없이 장심(掌心)에 박혀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상대에게 다른 뜻은 없는 듯했다.
상대가 악의를 품고 치명적인 독이라도 발랐다면 자기는 이미 한쪽 팔을
잘라야 했을 것이다.
금거산은 한순간 마음을 가라앉혔다.
비월장의 명예와 조카의 복수를 위해서는 이무심을 끝장내고 싶었다.
그러나 눈앞에 버티고 선 열여덟 명의 고수와 보이지 않는 암습자를
생각하면 물러서야 한다.
금거산이 손바닥의 은침을 뽑아 품 안으로 넣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다시 만나는 날에는 인정을 기대하지 마라.”
“…”
상대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금거산은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그제야 장소룡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상대는 끝까지 살의(殺意)를 보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뜻을 꺾고
돌아간 것이다.
눈치를 보니 벌써 당문의 노기인이 수를 쓴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팔이 무겁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무심이 팔에 안겨 의식을 잃고 있었다.
장소룡은 십팔마룡에게 숨소리마저 흐려져 가는 이무심을 업게 한 뒤
숙소로 돌아왔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이무심은 다음 날 아침에야 깨어났다.
“후후… 내가 아직 살아 있던가…”
“형님, 제발 몸을 돌보시구려. 내 꼴을 보시우. 이렇게 되는 것이 뭐가
좋다구 함부로 몸을 굴리시는 거요?”
“허헛! 이렇게 살았으니 된 것 아냐? 그래도 장 사부의 명은 어기지
않았으니 되었다. 비무를 통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한 가지 욕망을
끝내 극복했다. 진짜 꼭 이겨보려고 했으면 나는 반드시 죽었겠지만
상대도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장소룡이 애매한 얼굴로 이무심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무심은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그만 이곳에서 떠나자꾸나. 너와 함께 갈 곳이 있다.”
“형님, 몸조리도 해야 하고 장 사부도 만나야 하지 않겠소.”
“으음… 괜찮다. 장 사부도 우리가 가는 곳을 잘 알고 있다. 소걸이 이곳에
남아 있으니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사천제일루에서 아미산의 움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요양을
시작했다.
십팔마룡이 근처를 경계하는 것은 물론 두 사람의 수발까지 들어주었다.
덕분에 장소룡과 이무심은 서로 도와가며 망가진 몸을 치료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장소룡은 삼 년 전 이무심의 목숨을 건진 것이 천행(天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장염이 없는 세상에서 치러진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비무인 셈이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장소룡이 문득 멈추어 서서 소걸에게 말했다.
“막내 사제도 형님 앞에서는 입 조심을 해야 할 것이다.”
“네에…”
장소룡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장 사부의 사람됨이 남다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런 제자까지 거둘 줄
몰랐다.
왠지 막내 사제에게서는 음흉한 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황하수채가 수적들만 모인 곳이라서 그런지 장소룡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민감했다.
‘허… 나야 그런 막내가 훨씬 편하지만 형님도 그럴까?’
아마 이무심은 소걸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았지만 자신의 제자인 사공철에게도 얼마나 딱딱하게 대했던가!
그런데 가만 보니 사공철과 소걸의 사람됨이 비슷해 보인다.
그렇다면 소걸도 형님에게 사랑받기는 틀린 것이다.
잠시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움막 앞까지 이르렀다.
소걸 보다 먼저 마당에 들어서던 장소룡이 중얼거렸다.
“형님이 수련을 위해 또 나가셨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인기척이 마당에 있는데 내다보지 않을 리가 없다.
가까이 다가가니 과연 섬돌 위에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
“눈만 뜨면 연공을 하시니… 그 체력이 부럽구만.”
장소룡이 돌아서서 몇 걸음 뒤에 떨어진 소걸에게 물었다.
“사제, 젊다고 무리하게 연공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럼요.”
그 대답이 너무 시원스럽다.
장소룡은 왠지 잘못 물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말았다.
음흉한 아이들의 간단명료한 대답의 뒤에는 다른 심계가 깔린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달리 속셈이 있을 리가 없다.
장소룡은 방긋방긋 웃고 있는 소걸을 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 이무심은 아미산의 정상에 올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바위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날리던 이무심이 문득
허리를 곧게 세우며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후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맞은편으로 힘껏 내던졌다.
휘익!
검은 계곡을 지나 건너편 산 정상에 있는 나무를 향해 곧바로 날아갔다.
검과 나무가 충돌하기 직전 이무심의 왼손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검은 곧바로 날아가 나무의 중심에 깊이 박혀 버렸다.
퍽!
다른 사람이 본다면 훌륭한 비검술이라며 입을 쩍 벌렸겠지만 이무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가 의도한 것은 검이 나무를 돌아 다시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과 자신을 잇고 있던 한 가닥 기운은 계곡을 건너갈 무렵
희미하게 사라진 뒤였다.
“휴우… 나의 공력으로는 아직 검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가 ‘검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이다.
공력은 시간이 지나면 얻게 되는 것이니 괴롭지 않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렇지 않다.
하루가 걸릴 수도 있고 십 년, 혹은 영원히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언젠가 공력에 의해 이기어검을 펼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어검술이 아니다.
이제 그 정도를 알 경지에 올랐기에 이무심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이무심이 황급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검이 날아간 맞은편 산봉우리까지 이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부지런히 신법을 펼치며 이무심은 비무를 회상했다.
삼 년이 지났지만 금거산과 비무를 생각하면 아직도 부끄럽고 아쉽다.
자신의 수준이 금거산에 미치지 못함을 거듭 확인한 데서 오는 부끄러움과
최후의 순간에도 이기어검을 펼쳐 보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이다.
“그 덕에 장 사부가 말한 바를 어느 정도 깨달았지만… 아직 멀었다. 맞은
편 산봉우리를 돌아올 때까지 나의 이기어검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지금 이무심의 비도술(飛刀術)은 이기어검의 초입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근거리에서의 조절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무심이 원하는 것은 원거리에서도 검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경지였다.
모두가 삼 년 동안 아미산에서 아침저녁으로 검을 수련한 결과다.
이무심의 검술 수련은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동이 트기 직전가지 호흡법으로 내공을 수련했다.
그리고 사방이 밝아오면 처음 한동안은 태극양의검의 전반 사식과 후반
삼식을 연공한다.
그리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을 무렵이 되면 다시 호흡으로 진기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검술과 호흡으로 한나절을 보낸 후에야 어검술이 시작된다.
검을 날린 후 이쪽저쪽 산봉우리를 열세 번 왕복하고 나면 땅거미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이무심은 어두워 더 이상 사물이 구분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움막으로
돌아가곤 했다.
겨울 산은 금세 어두워져 언제나 아쉬움을 남긴다.
해가 지자 여느 때처럼 움막으로 돌아온 이무심은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작은 가죽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 저렇게 작은 신발을 신는 사람이라고는 소걸밖에 없다.
이무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둔한 녀석.’
만약 장 사부가 돌아온 것이라면 혼자서 왔을 리가 없다.
이무심에게 소걸은 조금 특별한 아이였다.
장 사부를 스승으로 두었으니 보통의 아이라면 아주 점잔을 빼거나 혹은
오만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소걸은 스승이 누구인지 종잡을 수 없게 행동했다.
‘아마 강호에서 마주쳤더라면 절대 장 사부의 제자인 줄 몰랐을 것이다.’
문제는 소걸 자신이 장 사부라는 존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머리가 나쁜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것인지 소걸은 자기 스승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종종 잊는 것 같다.
그리고 가끔씩 찾아와 보여주는 행동은 얼마나 유치한가!
‘장소룡의 제자들이 조금 사악하다면… 저 녀석은 얄미운 구석이 있다고
할까?’
그것은 악하거나 못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얄미움 그 자체였다.
제법 욕심 부릴 만한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버려도 될 만한 일에는 악착같았다.
“소걸이 왔나 보구나.”
섬돌 위에 올라서며 넌지시 운을 떼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입에 가득 음식을 문 소걸이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어! 어어 오에요(어서 오세요)!”
이무심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저 녀석은 매사에 저런 식이었다.
조금 동작을 빨리하든지, 혹은 늦게 해야 정상이다.
입 정리를 마치고 반듯하게 인사를 나누면 서로 좀 좋은가!
그러나 녀석은 아무 생각 없이 덜컥 문을 열고 제 딴에는 반가운지 뭐라고
계속 웅얼거렸다.
“그래, 급하지 않으니 음식은 삼키고 말해라.”
“…”
부끄워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히 마주 보던 소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무심이 방 안으로 들어가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서 이런 얄미운 녀석이 생겨났을꼬?’
어쨌든 이 녀석이 오랜만에 찾아왔으니 며칠은 함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장 사부와 관계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무심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따뜻한 아랫목으로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그곳에는 소걸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어른이 온다고 자리를 내줄 소걸이 아니다.
어차피 소걸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 이무심인지라 그 곁에 슬쩍
주저앉았다.
잠시 후 작은 움막 안에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소걸과 두 사형의 관계란 것이 긴요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어서
바라볼수록 서로 피곤하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움막의 기름 등불이 한차례 요란하게 흔들리더니 꺼져 버렸다.
어두운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소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렇게 며칠을 늙은 사형들 틈 속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다.
‘미치겠네…’
***
장염은 사천성 방향으로 나 있는 관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서장에서 멀어질수록 날씨는 풀리기 시작했지만 장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제야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다.
장염은 적멸존자의 법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혹 마주치는 상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삼 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을 알았다.
‘망자(亡者)의 산’ 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야 삼사 일이니 하루에 일 년을
산 셈이다.
그 삼 년 간 강호에는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객점에 들를 때마다 사람들으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도 장염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세상에서 과거의 일을
떠벌릴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궁벽한 산촌 마을의 허름한 객점에서 삼 년 전에 있었던
사천제일루의 비무나 오행혈마인의 동향에 대해 물어볼 수도 없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직접 사천(四川)으로 가볼밖에…”
결국 모든 대답은 자신의 두 다리에 달린 셈이다.
장염은 사천성 경계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걷고 또 걷던 장염이 사천성 외곽의 영월객점(迎月客店)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날씨가 우중충한 것이 마음에 걸린 장염은 더 이상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객점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며 좌우를 둘러보니 객점 주인이 잔심부름까지 하는 아주 작은
규모다.
자리에 앉자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이 다가와 뜨거운 차를 내려놓았다.
“어서 오시우. 뭘 드시려우?”
“소면과 만두를 부탁합니다.”
“만두는 마침 돼지고기가 떨어져 힘들고… 술은 필요없수?”
“예. 그저 허기만 채우고 쉬렵니다.”
“알겠수. 그런데… 보아하니 지나가는 길 같은데,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제발 참아주슈.”
아마도 타지인들 때문에 분위기가 많이 뒤숭숭한 것 같았다.
장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은 금세 주방 쪽으로 걸어가 음식을
주문한 뒤 계산대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고 난 뒤에도 주인은 영 신경이 쓰이는 듯 힐끔힐끔 장염을
바라보았다.
실내의 손님은 장염을 포함해 겨우 세 명뿐이어서,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가끔씩 울렸다.
제법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장염이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덜컹.
“여기는 어떤가! 누구 낯선 사람 오지 않았나!”
한풍(寒風)과 함께 험악한 인상의 무림인들이 우르르 걸어 들어오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어이쿠! 어서 오십시오. 이곳에 외지인은 하나도 없습니다요. 이렇게
작은 객점에 누가 들어오려굽쇼. 자리에 앉으시면 후딱 음식과 술을
대령하겠습니다요.”
주인의 말에 만족한 듯 네 명의 사내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자리를
잡았다.
“하하핫! 하기사 이 지역엔 우리 강남사마(江南四魔)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당신, 운이 좋은 거야!”
“그렇고 말굽쇼. 그저 편안히 머무시기 바랍니다.”
주인장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자 그중의 한 외눈박이가 호통을 쳤다.
“떽! 이놈! 우리가 뭐 할 일 있다고 이렇게 지저분한 곳에 머물겠느냐?
서둘러 가야 하니 후딱 한상 차리거라.”
“예, 예. 알겠습니다요.”
주인장이 급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문을 받지도 않고 들어가는 모양새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 듯하다.
장염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저 대단한 손님들 때문에 자기가 시킨 소면이 조금 늦을 것
같다.
‘그래도 뭐 상관없지. 어차피 오늘은 이곳에서 묵어야 하니.’
장염이 시비에 휘말리기 싫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다.
다시 한 번 찬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에는 세 명의 무림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조금 전에 들어온 강남사마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있었다.
‘이거 한바탕 소란이 일겠구나.’
장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객점의 식당에 있는 자리래야 겨우 열 개 정도다.
한 마디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 먹게 되었다는 것인데,
한 산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앉아 있을 수 없다.
주인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벌써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다.
그러나 영월객점에 대복이 터진 것일까?
새로 들어노 세 명의 무림인은 보기와 달리 얌전했다.
그들은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의 기세가 워낙 날카로운지라 강남사마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강남사마라 했으니 강남을 무대로 활동하는 자칭 열혈남아들일 것이다.
‘그나저나 강남사마라는 호걸들이 사천성 서쪽까지 나오다니… 무림대회
라도 열리는 것일까?’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중대한 행사가 있을 때에만 자신의 활동 지역을
이탈한다.
그렇다면 이 근방에서 어떤 무림대회라도 열리고 있는 것일까?
장염의 궁금은 이내 강남사마가 떠들어대는 소리에 의해 풀렸다.
턱밑에 가시 같은 수염이 가득한 사내가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우하핫! 아우들! 드디어 섬전수 장경선과 닮은 자가 섬서성에서 목격되었
다고 하네. 우리도 언제까지 예서 죽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조금 마르고 날카롭게 생긴 자가 입을 열었다.
“형님 말씀이 옳소. 우리처럼 그놈의 뒤를 따라 사천성까지 온 자가 한둘이
아닌데, 이미 대부분 섬서성으로 떠나 버렸소. 만약 우리가 늦게 갔다가
그놈을 다른 자들이 잡기라도 한다면 그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말
거요. 돈은 그렇다 쳐도 그놈의 수중에 있다는 마경(魔經)은…”
사내는 자기가 생각해도 말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 싶은지 주변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자기들이 현상금 추격자라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 대형의 말에 화답한 것
뿐인데, 말이 술술 풀리다보니 너무 쓸데없는 부분까지 지껄인 것이다.
멋쩍은 얼굴로 좌우를 살피던 장한과 깜짝 놀란 듯 고개를 쳐든 장염의
눈이 마주쳤다.
‘어딜 똑바로 보는 게야! 이놈이!’
장한이 눈알을 부라리자 장염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염이 눈을 내리깔자 그제야 장한은 목소릴 낮추며 속삭였다.
“게다가 마교까지 이전의 세력을 회복했는지 슬금슬금 강호로 나오고
있다니… 서둘러 이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흠…”
대마(大魔) 주안역(朱顔驛)이 고개를 끄덕이며 둘째인 이마(二魔) 오인천
(吳仁川)을 바라보았다.
천산(천산)의 마교가 중원으로 진출하려면 청해성과 경유해야 한다.
그런데 청해성은 이미 지존삼채 중의 하나인 황하수채와 그 휘하의 십삼 채
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마교가 그들과 직접적으로 마주치지 않고 피한다면 그 다음은 바로 사천성
과 섬서성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심심치 않게 낯선 무림인들과 조우하곤 했다.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려고 했다.
오늘까지만 사천성에서 놈의 흔적을 찾아보자. 그간 장경선을 닮았다는
놈이 어디 한둘이었느냐? 애꿎게 목숨을 잃은 자가 이미 수십 명이니,
너무 서두를 것도 없다.”
지난 삼 년 간 강남에서 사천까지 여러 현상금 사냥꾼들과 어울려 돌아
다녔다.
돈이 많아서 그처럼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디든 만만해 보이는 무가(武家)를 골라 ‘장경선의 뒤를 따라 여기까지
왔노라’ 고 하면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물론 떠날 때 여비까지 두둑히
챙겨주었다.
그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강호를 유랑했는데,
아무래도 이제 다시 사천성을 떠나야 할 때가 된 듯하다.
그런데 강남사마가 사천성을 떠나는 시기에는 예정보다 조금 앞당겨져야
했다.
지금까지 잠자코 앉아 있던 세 명의 사내 중 한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강남사마가 앉은 자리로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실내의 공기는 급속도로 차가워져 갔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막내인 사마(四魔) 반수원(半水源)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자신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지만 뒤통수가 따끔할 정도의 기파(氣波)가 느껴졌다.
크게 놀란 반수원은 자리에서 엉덩이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우리는… 강남사마라 하오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지금까지 기세등등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었지만 상대는 그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榜?듯했다.
중년인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묻겠다. 섬전수 장경선이 있는 곳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라.”
아무리 강남사마의 명성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
상대가 너무 심하게 나오자 반수원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당탕.
의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계산대에 앉은 주인이 주판으로 자기 볼따구니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기물을 부순 값이라도 받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본 적이 없다.
싸움판의 무림인들에게 돈 얘기를 꺼냈다간 밥상 대신 제사상을 받게 될
것이다.
“뭐라고 했… 소?”
성질 같아서는 이미 열두 번도 더 쳐 죽여야 하지만 반수원에게도 이성은
있다.
정중히 되물으며 제발 상대가 예의를 갖추어 주길 바랬다.
그렇지 않다면 뭐라고 대답해 주려고 해도 체면이 서질 않는다.
‘씨벌, 뭐든 다 말할 테니 제발 좀…’
그러나 상대는 반수원의 개인적인 감정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린 놈의 귓구멍이 벌써 막혔느냐? 장경선이 있는 곳을 불어라.”
“이런, 씨벌… 으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헉! 헉!”
이번에는 아예 ‘말해라’ 도 아니라 ‘불어라’ 다.
‘말해라’ 와 ‘불어라’ 는 둘 다 반말이지만 그 차이가 심히 크다.
‘말해라’ 는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은 상태지만,
‘불어라’ 는 아니다.
너는 이미 잡힌 몸이니 순순히 다 털어놓으라는 협박인 것이다.
강남사마가 모두 사십 대니, 중년인과의 나이 차이는 많아야 고작 서너
살이다.
그런데 상대에게 ‘어린 놈’ 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가만히 있으면 정상이
아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반수원은 숨을 헐떡이며 의형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의형들은 반수원이 일을 잘 처리할 줄로 믿는다는 듯 아무도 호응
하지 않았다.
“헉! 헉! 묻는다고 내가 호락호락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나는
강남사마의 넷째인 반수원으로 노모(老母)를 모시고 있는 이대 독자요!
씨벌, 귀하가 찾는 장경선이라는 개자식은 섬서성 상주(尙州)에서 목격
되었다고 합디다. 으아! 씨벌, 내 입에서 뭔가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거요.”
연신 씨벌씨벌거리며 말을 마친 반수원이 사내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의자에 앉아도 되겠소?”
중년인은 반수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수원이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세운 뒤 엉거주춤 앉았다.
사내는 자리에 서서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곧 자리로 돌아갔다.
중년인이 자리에 앉자 실내 분위기는 다시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주문한 소면이 나오자 장염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후룩, 후룩.
강남사마는 세 사람의 기도에 완전히 눌린 뒤라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장염보다 먼저 와서 음식을 먹던 두 사람도 소리없이 차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실내에 오직 장염의 소면 먹는 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곧 이어 강남사마의 자리로 없다던 돼지고기와 술이 가득 차려졌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가짓수의 요리가 세 람의 식탁 위에도 차려
지기 시작했다.
음식이 나오자 세 사람도 더 이상 강남사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먹는 듯했다.
강남사마는 정말 바쁘다는 듯 정신없이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삽시간에 식탁의 음식이 절반쯤 사라지자 강남사마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도망이라도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강남사마를 꽉 붙들었다.
“누가 가라고 했더냐.”
털썩!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강남사마가 남은 음식을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대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다가는 제명대로 살지 못할 것
같다.
대마 주안역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틈새를 찾아보았지만 좁은 객점이라
저들의 시야에서 달아날 수가 없다.
‘씨벌… 미친 척하고 그냥 확 들이받아 볼까?’
그러나 괜한 죽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주안역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이마(二魔) 오인천을 바라보았다.
오인천의 얼굴도 썩은 대춧빛이 되어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오인천도 감을 잡은 것이다.
강호의 오랜 경험상 이런 분위기에서 남아 있으라는 말은 죽이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어험… 험.”
대마 주안역이 헛기침을 터뜨리며 젓가락으로 음식만 쑤셔댔다.
소면을 다 먹은 장염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애꿎은 차만 홀짝홀짝
마셔댔다.
저 세 사람이 아무도 나가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뭐, 어차피 오늘은 이곳에서 쉬려고 했으니…’
장염이 한 잔의 차를 다 비운 뒤 다시 주인에게 손짓했다.
“여기 차 한 잔 더 주세요.”
계산대에 숨어 머리만 내밀고 있던 주인이 장염을 노려보았다.
‘미친놈아! 지금 한가하게 차를 처마실 때냐!’
잘못하면 모두가 화를 입을 판인데 젊은 놈이 눈치가 없어 보인다.
마음 같어서는 주판으로 대가리라도 쳐주고 싶다.
주인은 눈으로 욕을 한 바가지나 더 퍼부은 뒤에야 주전자를 들고 조심
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예 들고 간 주전자를 장염의 탁자 위에 내려놓고 계산대로 돌아가
버렸다.
중년인은 살벌한 분위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는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강남사마가 아니라 저 젊은이를 염두에 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젊은이의 탁자로 걸어갔다.
“주전자를 다오.”
“…”
젊은이가 빙그레 웃으며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그 짧은 순간 중년인은 내공을 끌어 올려 젊은이의 손으로 흘려보냈다.
타인의 내공을 특별한 연공법 없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고수들 사이에 내공의 겨룸은 도검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위험하다.
문득 내공을 발출한 중년인의 눈에 당혹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젊은이의 몸으로 흘러 들어간 자신의 내공이 망망대해에라도 빠진 듯
소멸되어 갔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내력만 잃게 되니 길게 끌수록 손해다.
“후우…”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단순히 내공만 비교해도 상대는 이미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중년인은 즉시 손을 돌려 주전자를 움켜쥐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장염이 모른 척하고 찻잔을 들어 시큼털털한 차를 마실 때,
오십 대의 중년인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느닷없는 질문에 놀란 듯 대마(大魔) 주안역이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나… 나는… 대마 주안역으로 사람들은 대마불사(大魔不死, 대마는 죽지
않는다)라고도 부르오.”
가만 듣고 있던 장염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하하핫! 이런이런… 실례를…”
강남사마가 놀란 얼굴로 일제히 장염을 바라보았다.
대마 주안역은 ‘저 젊은 녀석이 공포로 돌아버렸다’ 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성한 고수들의 대화에 끼어들 리가 없다.
자기 같은 고수도 이렇게 오금이 저린데 저놈은 오죽할까!
‘아무래도 저 젊은 놈도 살인멸구(殺人滅口)를 눈치 채고 미친 모양이다.’
강남사마가 놀라거나 말거나 장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누구인가를 물은 것이라면 듣지 않는 편이 낫소. 그저 눈도 귀도
없는 바람이나 구름이라 생각하시구려.”
“…”
중년인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어갔다.
상대는 자기 이름을 가르쳐 주는 대신 못 보고 못 들은 척할 테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한다.
자신이 듣기로 지금까지 젊은 나이에 저렇듯 기이한 무공을 터득한 사람은
장천사 장염 뿐이었다.
강호란 넓어서 기인이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더니 오늘 그 말을 직접 경험
하게 된 것이다.
“무림에 바람이나 구름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고 듣기는 했으나, 오늘 또
그와 같은 사람을 보게 되었구나.”
그 말을 끝으로 중년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만에 중년인의 곁에 앉았던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주, 저들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
무영혈장(無影血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파천대의 대주
혼세마왕을 바라보았다.
지난 이 년 간 오가다 마주친 사람들 중에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살아난
사람은 없다.
대주는 살아남기 위해 무림인이든 일반인이든 가리지 않고 죽였다.
글너 조심성 때문에 지난 이 년 간 무사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들은 우리가 상주로 가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다. 너는 사람이 구름이나 바람을 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
하느냐?”
그제야 무영혈장은 혼세마왕이 저 젊은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교 제일의 돌격대 파천대의 대주이며 마교삼존의 공동전인인 혼세마왕이
말이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무영혈장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다.
참다못한 무영혈장이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한눈에 가까이 앉은 젊은이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어디 하나 특별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몰골이다.
‘대주께서 마음이 약해지신 건가…?’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몇 마디 말에 상대에게 꼬리를 내릴 수는 없다.
비록 마교에서 도망쳐 강호를 유랑하고 있지만 혼세마왕이 이름도 모를
젊은 놈을 무서워하다니!
무영혈장이 탄식을 터뜨리며 돼지고기를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
무언(無言)의 시위인 셈이다.
“기억하느냐? 그가 돌아오던 날… 모두 죽었다. 사부님들을 제외한 모든
원로가 그의 손 동작 하나에 허무하게 이승을 하직했다. 그날 나는 멀리서
그를 보았다. 남루한 옷과 산발한 머리… 놈에게서는 내외공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 태양혈이 튀어나오고 그럴듯한 병장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은 어디서나 자연스러운 사람들
이다. 오래전… 풍 사부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경지를 천인합일(天人
合一)이라고 했던가… 혹은 그 이상인지도 모르지…”
입 안 가득 고기를 물고 있던 무영혈장이 다시 젊은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혼세마왕 정도의 공력이라면 칼부림을 하지 않아도 상대를 알 수 있다.
과연 이 정도로 살기 어린 분위기 속에서 소면을 남김없이 먹고 느긋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라니!
무영혈장은 더 이상 혼세마왕의 말에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묵묵히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일각쯤
지나서였다.
무영혈장의 뒤를 따라 걸어나가던 혼세마왕이 문 앞에 이르러 문득 멈추어
섰다.
“나는… 그대가 삼 년 전에 실종되었다는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삼 년 전에 실종되었다는 사람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장염은 말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데 대체 저 사파의 고수가 자신을 기다리는 이유란 뭘까?
무림맹이나 칠대문파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파와는 교분을 맺은
기억이 없다.
“하늘은 공평해서 함부로 인명을 살상한 자는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오.”
“그가 돌아온다면 우리가 어찌 후환이 두려워 살인을 저지르겠는가?”
“…”
사실 지금까지 세 사람이 자기들과 대면한 사람들을 죽인 이유는 마교에
꼬리를 잡히기 싫어서다.
장소는 천산의 마교로 돌아오던 날 수백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삼존과 관계를 맺고 있던 원로와 그 휘하의
고수들이었다.
그날 장소의 손에서 벗어난 사람은 겨우 열 명을 넘지 않았다.
장소는 천산의 마교를 접수한 후에 제일 먼저 달아난 삼존과 그 추종자
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삼존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찌나 교묘히 숨어 지냈던지 혼세마왕도 영원히 은퇴한 것은 아닌가 걱정
했을 지경이다.
그러나 삼존은 강호를 유랑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의 자신과 무영혈장처럼 말이다.
장소만 사라지면 마교가 다시 삼존의 것이 될 터인데 중도에 포기할 이유가
없다.
장염이 입을 다물자 잠시 머뭇거리던 혼세마왕도 멀리 사라져 갔다.
세 사람이 빠져나가자 객점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곧 떠날 것처럼 서두르던 강남사마가 주저앉아 목소릴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 잡담도 시들시들해질 무렵이다.
대마 주안역이 목소리를 낮춰 오인천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저자가 뭐라고 씨부린 거냐?”
“바람이 어쩌고 구름이 어쩌고 하지 않았소?”
“그 말이 괜찮아 보이던?”
“대형도 어디 가서 써먹으시게요?”
“계집과 헤어질 때 여운이 길게 남지 않겠느냐?”
“크흐흐흐! 대형이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소. 벌써 싫증이 나신
게요?”
강남사마가 대화를 음담패설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장염은 찻잔을 비운 뒤 조용히 일어나 계산대로 다가갔다.
주인은 허리가 부러져라 굽실거리며 장염을 특실로 안내했다.
눈으로 욕했길 망정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승냥이를 피하려다 호랑이에게
물릴 뻔했다.
장염이 객실에 들어가 창문을 열자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약하게 내리던 비는 십시간에 굵어져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쏴아아!
창가에 기대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다.
지난 삼 년 간 저만치 앞서 가 있는 세상을 며칠 만에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없는 삼 년 동안 지인들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우선 알아야
했다.
‘일단은 사천제일루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다음에는 장소를 찾아 그가 오행혈마인을 완성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행히 장소가 마교 교주로 돌아갔다고 하니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마신지체를 이루지 않았다면 장소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렇게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가만 생각해 보니 인생이란 것이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토록 숨 가쁘게 달려왔건만 손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아니, 영화 소저와 향이 누이와 소걸, 그리고 이 대협, 장 대협…’
***
한편 객점에서 장경선의 행방을 알게 된 세 사람은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대주께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본 교와는
공존할 수 없는 사람인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무림에서 마교 교주 장소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천사 장염
뿐이다. 다행히 장염과 장소가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하나… 장염이
돌아와 준다면 스승님들과 함께 교(敎)로 돌아갈 날도 멀지 않다.”
“제 생각이 깊지 못했습니다.”
혼세마왕이 무영혈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안 되겠다. 우선은 비를 피하고 다시 가도록 하자.”
마침 저 멀리에 작은 관제묘가 어렴풋이 보인다.
혼세마왕이 관제묘를 손으로 가리킨 후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이 신속하게 몸을 날렸다.
세 사람이 사라진 자리로 빗줄기가 요란하게 떨어져 내렸다.
쏴아아아!
세 사람이 뛰어든 낡은 관제묘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혼세마왕이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있었다면 다시 그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낯선 젊은이의 말을 들은 뒤로 왠지 부담스러웠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살기 위해 타인을 죽여왔다.
그러나 꼭 죽여야만 했을까?
하늘은 공평하다는 말이 자꾸만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허물어진 관제묘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온 무영혈장이 품 안에서 부싯돌을
꺼냈다.
잠시 후 어둡고 눅눅하던 관제묘 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삼존께서 그리고 오실까요?”
혼세마왕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른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니 문득 이 년 전의 참사가 떠오른다.
장소가 돌아오던 날 천산 마교의 절반이 불타 없어졌다.
누가 고의로 방화를 해서가 아니다.
장소의 손이 한차례씩 휘둘러질 때마다 땅 밑에서 화기(火氣)가 치솟아
사람과 건물을 집어삼켰다.
그날 큰 스승 풍소곡이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라! 저놈은 인간이 아니니 그에게 등을 보인
다고 해서 수치스러울 것도 없다. 우리도 달아나 목숨을 보존하게 되면…
저놈이 익히 마경을 찾아내서 약점이 있는지를 연구할 것이다. 청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는 법이니 너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 않도록 해라!”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러나 장소가 건물을 파괴하며 바람처럼 휘몰아쳐 올 때 혼세마왕은
비로서 마신(魔神)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날의 처참한 광경을 떠올리지 혈관 속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제천혈마 장소는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마신을 보았으니 이제는 신선도 부처도 믿는다. 그리고 이건 그들의 싸움
이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