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20)
3장. 천하(天下)의 주인
천산의 마교는 지난 삼 년 간 아무런 소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어쩌면 시비를 일으킬 만한 고수가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년 전 장소가 다시 천산으로 돌아온 뒤로 마교 서열 백위 안에 드는
고수들 중 팔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삼마가 교주의 자리를 강탈할 때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이 우선적으로
척살되었고, 그 다음은 삼마가 공동으로 마교를 다스릴 때 그에게 동조한
사람들 순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천산파에 남아 있던 마교의 고수들은 거의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장소의 잔인함을 익히 아는 고수들 몇은 불똥이 자기들에게 튀기 전에
슬며시 달아나 버렸다.
설마 하고 남아 있던 중도적인 성향의 고수들은 마교가 정리된 뒤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검귀가 마교의 미래를 위해 그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만류했지만 소용
없었다.
장소는 ‘내가 곧 마교의 미래다’ 라는 말과 함께 원로 고수들을 척살해
버렸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고수가 사라졌으니 이전과 달리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신강성(新疆省)의 사람들도 이제는 마교가 아니라 제천혈마 장소 그 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회의실인 천마각(天魔閣)에 나와 있던 장소는 한가하게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처럼 느긋한 기분이 들기도 오랜만이다.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던 심마(心魔)도 사라지고 마교도 되찾았다.
어디 그뿐인가!
무공은 과거에 비해 세 배나 고강해져서 이제 더 이상 수하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마교의 교주로 세워진 뒤 한동안은 수하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자신 같은 시골뜨기를 교주로 세워놓고 뒤에서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전까지는 마도(魔道)의 인물들과 지내본 경험이 없기에
두려움은 더욱 컸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수하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장소는 그 점이 재미있었다.
‘흥! 벌레만도 못한 놈들.’
수하들을 벌레만도 못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낌없이 죽였는지도 모른다.
장소가 믿을 만한 수하라고는 검귀와 혈수서생 이면수,
그리고 순찰영주 정도였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몰락한 뒤에도 자기 곁에 남아 끝까지 따라다녔다.
비록 속으로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어차피 자기에게 해를 끼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너도 내가 왜 음산파를 그대로 두고 있는지 궁금하더냐?”
뜬금없이 던져진 질문에 검귀가 머뭇거릴 때다.
장소가 이면수와 순찰영주가 앉아 있는 쪽으로 몸을 천천히 돌렸다.
“마교는 신강성의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음산파는 내몽고(內蒙古)의
음산산맥(陰山山脈)에 있는 작은 분파지. 나는 기껏 음산파나 되찾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천하(天下)다.”
“…”
검귀가 긴장한 얼굴로 이면수와 순찰영주를 바라보았다.
교주는 천하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천하라면 역모라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
만약 장소가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의 소동은 아무것도 아니다.
“푸하하핫! 너희들은 내가 역심이라도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느냐?”
“교주님, 속하들은 그저 교주님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검귀의 대답을 듣고 있던 장소의 얼굴에 씁쓰름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이 역모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이렇듯 무공이 탁월한 교주의 곁에 있음에도 아직 이들은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다.
볼수록 어리석고 한없이 연약한 존재들이다.
“지금에 와서 음산파를 흡수하면 다시 사파와 정파의 견제를 받게 될 것
이다. 장경선을 찾게 되는 날 나는 천하의 주인이 된다. 적어도 그때까지
는 정파와 사파의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된다. 그 어리석은 놈들이 내가
계획하는 일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지.”
검귀는 교주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교주는 정파와 사파보다 먼저 장경선을 찾아 그의 오행지기를 흡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지금 정파와 사파가 단합하여 장경선을 척살이라도 하게 되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장소가 순찰영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지?”
“그렇습니다. 장경선과 닮은 자가 섬서성 상주에서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었음에도 장소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워낙 많은 허위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상주의 열래객점에서 현상금을 노리던 자들과 일전이 벌어졌는데, 그들이
모두 섬전십이장에 당했다고 합니다.”
장소의 눈에서 빛이 번득였다.
섬전십이장이라면 그야말로 장경선의 독문절기였다.
“그들이 섬전십이장에 당한 것을 어찌 알았다 하더냐?”
“무너져 내린 객점에서 생존자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입을 통해
강호에 소문이 나고 있는 형편입니다.”
“…”
잠시 침묵하던 장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주라면 대체 어디쯤이냐?”
“하남성과 섬서성의 경계에 있는 곳입니다.”
“음… 하남과 섬서의 경계라…”
장소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지난 삼 년 간 흔적도 보이지 않던 놈이 왜 갑자기 상주에 나타난 것일까?
게다가 자신의 행적이 드러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섬전십이장
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장경선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잠자코 듣고 있던 혈수서생 이면수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혹시 그가 지금 하남성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경선이라면
천하제일가의 오래된 심복 아닙니까?”
장소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이면수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장경선을 수배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가 경재학이 가주(家主)로 있는 천하제일가의 사람이었다니!
“장경선이 정말로 천하제일가의 사람이었단 말이냐?”
이면수가 당연하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하남성 정주(鄭州)의 천하제일가에 속해
있습니다. 후에 경재학이 낙양으로 분가(分家)를 할 때 그의 집안도 옮겨간
것이라 합니다.”
“그거 참 공교롭구나. 장경선이 천하제일가의 사람이라니… 그러고 보니
제갈위기는 무림맹에 있던 사람이지? 천하제일가와 무림맹이라… 나는
오래전 당고랍산맥에서 경재학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경재학은 그때
이미 오행혈마인을 알고 있었거든.”
검귀와 이면수, 그리고 순찰영주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만약 장소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무림에 오행혈마인을 만든 것은 경재학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림맹주가 왜 역천(逆天)의 오행혈마인으로 무림을 어지럽힌단
말인가!
지금 그들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장소의 말을 듣고 있던 이면수의 가슴이 갑자기 요동 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오행혈마인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경재학이 집마령주라는 말인가!’
이면수가 순찰영주를 향해 눈을 돌렸다.
순찰영주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제야 집마령주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그동안 너무 어리석었다.
무림에서 자신과 순찰영주를 삼 초 안에 패배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 간단한 이치를 왜 몰랐을까!’
이면수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무림맹주라는 선입관(先入觀)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그간의 체증이 모두 사라지는 듯했다.
흥분한 검귀가 탁자를 ‘탕’ 하고 내려치며 소리쳤다.
“교주님의 말씀대로 경재학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자입니다!”
검귀는 이미 오래전 당고랍산맥에서 장소와 경재학의 남북지약(南北之約,
남쪽과 북쪽을 나누어 지배함)을 목격한 바가 있다.
경재학에게 어떻게 마경이 흘러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그자의 인간성
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장소가 문득 이면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경재학의 끄나풀이 강호는 물론 천산에도 있었다는 말이 아니냐?
그렇지 않고서야 마경이 어찌 천마동에 있을까?”
장소에게 오행혈마경을 찾아 익히라고 권유한 사람은 혈수서생 이면수다.
지금 장소는 문득 그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깜짝 놀란 이면수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소리쳤다.
“교주님, 그것은 속하도 모르는 일입니다! 전대 교주께서 익히시던 절세
마공이 그것이라는 사실 외에 제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교의 원로들도 모두 알고 있던 내용입니다!”
“이 장로의 말이 맞습니다.”
순찰영주가 한 마디 거들자 장소도 더 이상 이면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에게 마경을 권유한 사람은 이면수였지만, 순찰영주의 말을 들으니
더 이상 그를 의심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전대(前代)에 누군가가 마경을 천마동에 가져다 놓았다는 말이다.
그게 누구인지는 어차피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상관없다. 마경을 터득한 자가 천하의 주인이니… 경재학은 자기
무덤을 판 꼴이지.”
이면수가 장소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장경선이 하남으로 가는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수하들을 보내 무림맹과 천하제일가를 감시하겠습니다.”
“서둘러야 할 것이다. 장염이 무림에서 사라진 지 삼 년이 흘렀다. 지금
까지 그놈이 장경선과 동귀어진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장경선이 멀쩡한
것을 보면 터무니없는 소문이다. 내가 천산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은
장염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경선이 나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머지않아 장염도 불쑥 나타날 것 같다. 아무래도 비가 그치는 대로
난주(蘭州)의 천마방으로 거처를 옮겨야겠다.”
신강의 천산과 하남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게다가 자신이 천산에 칩거한 지 두 해가 지났으니 이제 슬슬 거처를 옮길
때도 되었다.
장염이 언제 천산으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행지기를 다 모으기 전까지는 장염을 피해 다녀야 한다.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 끝까지 속을 썩이는구나.’
그러나 이제 팽팽한 줄다리기의 끝도 보이는 듯하다.
최후의 승자는 경재학도 장염도 아닌 자신이 될 것이다.
잠시 중얼거리던 장소는 수하들을 한번 둘러본 뒤 느긋하게 숙소로
돌아갔다.
다시 마교 교주의 자리를 되찾은 장소는 이전에 비해 많이 여유가 있어
보였다.
세월이 흘러서 그리된 것인지, 마공이 무르익어 그리된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장소가 느긋해질수록 수하들은 살맛이 났다.
검귀도 곧 장소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장소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는 검귀였다.
이면수와 순찰영주는 검귀의 뒷모습을 보며 씁쓰름하게 웃었다.
검귀와 달리 자기들은 잠시 외도를 했기 때문이다.
한참 만에 순찰영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경재학이 그 정도로 지독할 줄은 몰랐소.”
이면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로 자신의 수하인 장경선까지 오행혈마인으로 만들다니 보통 심성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오행혈마경을 익히다가 미쳐서 자결한 전대 교주를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극악한 무공인지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교주님을 빼면 지금까지의 오행혈마인은 다 정파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순찰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도 정파의 인물일 것이다.
“아마도 경재학의 손길이 미치는 곳이라 그러리라 보오.”
“본 교에도 경재학의 수하가 아직 남아 있을까요?”
순찰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관계없지 않겠소? 어차피 교주님께서 장경선의 오행지기를
흡수하시면 더 이상 경재학의 무림맹과 녹림칠십이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말이오. 그때가 되면 무림의 모든 문파는 재구성될 것이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우리 앞에서 집마령주 행세를 한 경재학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후우… 나도 지금까지 별의별 종류의 사악한 놈을 만나봤지만 그런 놈은
처음이오.”
두 사람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들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악행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경재학과 비교하니 오히려 건전한 구석이 있다.
***
“상주라면 여기서 얼마나 되는 거리요?”
“넉넉잡아도 보름이면 도달하리라고 보오만… 지금의 우리만 가지고 과연
섬전수 장경선을 감당할 수 있을지…”
“도존(刀尊)께서 그리 심약한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소.”
평소에 조금 소심한 경향이 있던 사람은 혈해신마다.
오히려 풍소곡은 대범하게 큰일을 계획하고 추진해 왔다.
그런데 지금 혈해신마가 풍소곡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허헛! 그렇소? 혈존(血尊)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부끄럽구려.”
독수마존이 곁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섬전수 장경선도 오행지기를 모았다는 소문이 있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도 열래객점에서 맞아 죽은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거요. 그러나…”
풍소곡이 독수마존을 바라보았다.
독수마존의 말처럼 자기들 세 사람만으로는 장경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 여운을 남기는 것을 보아 좋은 방책이 있는 듯하다.
마교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처지에 대체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단 말인가?
“독존(毒尊)의 말씀을 들으니 뭔가 계책이 있는 듯하오만?”
“계책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소. 그저 내가 잘하는 독(毒)을 좀 사용해
볼까 생각 중이오.”
풍소곡과 혈해신마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독을?”
그러나 상대는 오행혈마인으로 이미 마신체(魔神體)를 이루고 있는 자다.
그런 자에게 과연 독이 통할까?
두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독수마존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신체에 아무런 이상 없이 단지 잠만 들게 하는 것이오. 이른바
미혼독(迷魂毒)이라고 하는 것인데… 미혼독을 백배쯤 연하게 하면
하오문에서 사용하는 미혼향(迷魂香)이 되오.”
풍소곡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그렇소. 순수한 미혼독을 장경선에게 주입하는 거여. 우리는 어차피 그자
와 생사를 가릴 게 아니지 않소? 그가 잠든 틈에 품을 뒤져 마경만 찾아낼
것이오.”
혈해신마가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그런데… 만약 그의 품에서 마경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 것이오?”
“어찌 되긴요. 천산으로 돌아가 천마동과 교주의 숙소를 샅샅이 뒤져
봐야지요.”
“헛!”
혈해신마가 어이없다는 듯 탄식을 터뜨렸다.
그러나 듣고 있던 풍소곡은 오히려 감탄사를 연발하며 독수마존을 추켜
세웠다.
“독존의 고견에 탄복했소이다. 그처럼 간단한 일을 왜 생각하지 못했는지.
천산이야 우리가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가 있는 곳이 아니오? 오히려
천산이야말로 역도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기가 훨씬 수월할지도 모르오.
게다가 장소가 마경을 익히고 없앴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것은 마교의
교주를 위한 것 중 하나이니 천마동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풍소곡이나 독수마존은 마경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와서 마경을 찾아 연구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제 와 익히기도 겁이 날 뿐 아니라 그처럼 대단한 무공의 허점을 알아
내기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마치 마경을 찾아 장소에게 대단한 복수를 할 것 같이
떠들어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역도들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게 되었는데 이왕 피할 수 없는 방랑이라면
야무진 꿈이라도 꾸는 편이 나은 것이다.
실질적인 삼존의 바람은 장경선과 장소가 동귀어진하는 것과 장염이 돌아와
장소를 끝장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장경선의 곁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어부지리라도 얻기 위해서다.
그들은 ‘장소와 장경선이 싸우다 보면 뜻하지 않은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고 믿고 있었다.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삼존은 허탈하게 웃어 보이고는 걷기 시작했다.
장경선의 흔적을 쫓아 상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상주에서도 쥐죽은 듯 숨어 지내야 할 것이다.
섣불리 장소나 마교 고수들 눈에 뜨이느니 차라리 세월을 까먹으며 유랑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
사천제일루에 투숙해 있는 손님 중 가장 오래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딱
두 사람이 있다.
건성으로 점소이 노릇을 하며 건들거리는 소걸과 주방에서 열심히 잔 일을
거들고 있는 향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천제일루에서 떠났다.
영화는 일 년쯤 투숙해 있다가 이듬해에 풍림장으로 돌아갔다.
모친인 연화부인이 병을 얻어 쓰러졌기 때문이다.
연화부인은 영화의 간병을 받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영화는 사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겨우 몸을 회복한 연화부인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마침 장소가 마교 교주 자리로 복귀하는 등 강호 정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장소에게 크게 당한 기억이 있는 영화는 당분간 어머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무림에서 장소를 상대할 사람이 없으니 어디에 있으나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이무심과 장소룡은 단오절의 비무 이후 은밀히 아미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후연과 지염도는 용마표국으로 들어갔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잘 풀린 건 아니다.
삼 년 전 돈이 떨어진 하후연과 지염도는 여름 내내 노숙을 했다.
민주려가 공짜로 묵어도 좋다고 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두 사람은 듣지
않았다.
두 사람이 지붕 아래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장소룡 덕분이다.
아미산에서 하산(下山)하여 사천제일루에 들렀던 장소룡이 두 사람을
용마표국에 소개해 주었다.
총표두 낙장불패 곽자연은 즉시 두 사람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사천에서만 일한다’ 와 ‘장염이 돌아오는 날까지만 일한다’
라는 조건을 붙이고 용마표국의 표사가 되었다.
“허어! 그 아가씨 일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저렇게 바지런하네.”
주방에 들렀다가 계산대로 돌아가던 민주려가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장 명인(張名人)의 누이라는 아가씨는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간다.
삼 년 전 처음 사천제일루를 찾아와 자기 이름은 향이인데 장염의 누이
라고 했다.
언뜻 보아도 귀태(貴態)가 흘러 의외로 장염의 집안이 좋은가 보다 생각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장염과는 의남매를 맺은 사이란다.
그 소리를 듣던 날 장염의 평범한 안면과 아가씨 같은 미색(美色)이 같은
태(胎)에서 나왔을 리가 없다고 크게 웃었다.
그러자 아가씨는 화들짝 놀라며 ‘그런 농담을 함부로 하시다가는 큰일
납니다’ 라고 했다.
단오절을 넘긴 지 한 달이 되었을까?
아가씨가 심각한 얼굴로 찾아왔다.
대책없이 장기 투숙을 하다 보니 여비가 떨어진 것이다.
“돈이 없으니 일을 해서라도 갚아 나겠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떻게 장염의 누이에게 일을 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냥 투숙하고 계셔도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막무가내였다.
그냥 놀고 먹을 수 없으니 일을 시켜달라는 것이다.
‘그 말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두고 봐야겠다’ 는 생각으로 주방에 들여
보냈다.
아기씨는 그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부터 주방으로 나가 잔 일을
거들었다.
그러기를 삼 년이다.
삼 년이면 지칠 법도 한데 도무지 지겨워하거나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주방 일을 거들며 헌원일광과 이대추와도 제법 친해진 눈치다.
특히 자손이 없던 이대추는 향이가 자기 친손녀라도 되는 양 눈에 띄게
싸고돌았다.
‘젠장… 전생에 부부였을지도 모른다구?’
언젠가 ‘왜 그렇게 향이를 감싸고 도느냐?’ 묻자 이대추가 정색을 하고
대답한 말이다.
“흥! 자기 얼굴이나 보고 그런 소리를 하지… 그 얼굴로 전생에 무슨 저런
아가씨와 부부였다는건지 원.”
오늘도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민주려가 이대추의 농지거리를 떠올리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다.
식당 안쪽에서 또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그… 지겨운 녀석들 같으니… 오히려 하는 짓을 보면 저놈들이 전생에
부부인지도 모른다니까.”
소걸과 홍칠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또다시 다투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오늘은 홍칠이 단단히 작정을 했는지 다소 과격한 몸짓까지
곁들이고 있다.
“이른 아침이라 마침 손님도 없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봐라. 어느 놈의
대가리가 터지는지 오늘은 꼭 좀 봐야겠다.”
삼 년 간 입씨름만 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본래 사내들의 세계란 치고 박고 하면서 서열과 의리가 생기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많은 홍칠에게 바득바득 덤비는 소걸이 못마땅하던
참이다.
민주려는 오늘은 싸움을 말리지 않고 관람하기로 마음먹었다.
‘얼씨구! 그렇지!’
두 녀석들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자니 괜히 덩달아 흥이 오른다.
자고로 싸움 구경과 불 구경이 최고의 낙이라고 하던가?
다 늙은 민주려의 입이 저도 모르게 헤죽헤죽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 고 녀석들… 좀 더 화끈하게 못하나?’
멀리서 민주려가 구경하는지도 모르고 홍칠과 소걸은 핏대를 올려가며
말싸움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늘은 왠일로 홍칠이 한쪽 손을 허공에 치켜세우고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손찌검까지 가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이다.
“이 얍삽한 자식아! 선배님께서 분명히 바닥을 깨끗이 쓸고 닦으라고
했는데, 아침나절 내내 눈에 띄는 덩어리 몇 개를 줍고, 뭐? 다 했다고?”
“어이, 홍 형! 그 손은 그만 내리고 얘기하시지. 그렇게 바닥에 신경 쓰이면
홍 형이 직접 하면 되잖아? 홍 형이 바닥 하면 내가 탁자를 할게!”
“야! 이 자식아! 니가 더러운 머리를 자꾸만 탁자에 털어대서 어제 나하고
바꾼 거 아냐! 그리고 이 자식이 걸핏하면 홍 형이래! 내가 니 친구냐!”
마침내 흥분을 참지 못한 홍칠이 소걸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말았다.
퍽!
사람이란 자고로 처음 한 번이 중요하다.
얼떨결에 소걸을 후려친 홍칠의 손은 자동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 자식아! 너도 객점에서 일하는 점소이면 점소이다운 행동을 해라!”
퍽!
“너 같은 놈들이 있으니까 너도나도 점소이 알기를 우습게 아는 거 아냐!”
퍽!
소걸은 우두커니 서서 자기 머리통 위로 떨어지는 홍칠의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지금 소걸이 저항의 의지를 상실한 것은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홍칠의 손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소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아… 씨발… 나 같은 무림의 고수가 점소이 따위에게 머리통을 내주다니…’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어설프게 휘두른 홍칠의 주먹을 왜 피하지
못했나!’ 생각하니 분하고 떨린다.
스승 복이 텨졌는지 어려서부터 많은 스승들을 만나 쉬지도 못하고 무공을
익혔다.
대충 계산해도 팔구 년은 족히 무공을 수련한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무공 문외한인 홍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씨이! 대체 써먹지도 못할 개수작은 왜 배웠을까.’
무공을 배우면 일반인이 휘두르는 주먹쯤은 본능적으로 피할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 속의 자기 몸은 그렇지 못했다.
홍칠이 주먹으로 내려치는 순간, 자신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몸이 저절로 피해주지 않아서 자존심에 상처를 크게 입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력을 이용해 상대를 패대기치자니 후환이 두렵다.
잘못해서 홍칠이 내상이라도 입게 되면 누가 그를 치료한단 말인가!
뒤를 돌봐줄 스승도 없으니 잘못했다가는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나이 열여섯에 살인자가 되면 그 다음은 뻔했다.
홀몸으로 유랑을 하다가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추위와 허기를
달래야 하는 것이다.
퍽!
“우씨! 홍 형… 그만 때려라.”
계속해서 맞다 보니 내가 왜 맞으면서 서 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살인자는 둘째 치고 일단 머리통이라도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한 소걸이
홍칠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어쭈! 이 자식이 이제는 아래위도 없네!”
홍칠이 힘을 써 보았지만 한번 잡힌 손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 선배님을 쳐라 쳐! 이 막돼먹은 자식아! 기운 좀 세다고 다냐! 아예
죽여라 죽여!”
손목을 잡힌 홍칠이 악다구니를 쓰며 소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팍팍팍!
소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홍칠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혼자 때리면서 마치 얻어맞는 사람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멀리서 누가 보면 자신이 홍칠을 붙들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홍 형! 나 화나면 스승님도 못 말려!”
벼락 같은 소걸의 일성에 홍칠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그러고보니 싸가지없는 평소의 행도에 비해 용케도 잘 참아주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했다가는 정말 미친놈처럼 덤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해진다.
보기에는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접촉해 보니 의외로 손아귀의 힘이 장사였다.
‘이 자식이 언제 용(龍)의 뼈라도 삶아 먹었나…’
잠시 후 홍칠이 더 이상 버둥거리지 않자 소걸은 잡았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풀려난 홍칠이 씩씩거리며 소걸을 노려보았다.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자기보다 작은데 어디서 저런 힘이 넘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 요즘 아침저녁으로 비질을 조금 걸렀더니 손목에 힘이 쫙쫙 빠지네
그려. 너, 짜샤!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한 번 더 내 앞에서 뺀질거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때 가서 눈물 질질 짜지 마라!”
“…”
홍칠은 큰소리를 치며 재빨리 계산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뒤늦게라도 소걸이 본격적으로 덤벼들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소걸은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민주려가 앉아 있는 계산대까지 걸어가도록 소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놈아! 나이도 많은 놈이 아침부터 왜 동생하고 싸우고 지릴이냐!”
“…”
노상 까불대던 소걸이 넋을 잃고 서 있자 그게 또 안돼 보이는 민주려다.
조금 전까지는 혼찌검을 내주었으면 하고 바랬는데 마음이 영 개운치
못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만 소걸은 장 명인의 제자이며 따지고 보면 손님인
것이다.
민주려가 씁쓰름한 표정으로 주판을 툭툭 치고 있을 때다.
주루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
습관적으로 인사를 건네려던 민주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민주려가 얼어붙자 홍칠이 재빨리 나서며 설레발을 쳤다.
“아이구! 손님, 어서 옵셔! 저희 사천제일루로 말하자면 요리면 요리,
술이면 술, 어느 것 하나…”
“하핫! 나도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너의 선배다. 그렇지 않습니까,
민 대인(玟大人)?”
선배라니?
홍칠이 상대의 말뜻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의 선배라면 점소이였다는 말인데 주인에게 자연스러벡 민 대인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이해 못할 것은 민주려의 얼굴이다.
온통 감격으로 가득해서 잘하면 눈물이라도 쏟게 생겼다.
“장 명인(張名人)!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오?”
마침내 민주려의 입이 힘들게 열렸다.
살아가며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남자.
같은 사내가 봐도 좋아지는 장염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민 대인의 풍체는 여전히 보기 좋으십니다.”
민주려가 계산대에서 걸어나오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나보다는 장 명인이 훨씬 보기 좋습니다. 그간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요?”
“그동안…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지요.”
민주려가 장염의 손을 움켜쥐고 탁잘호 걸어가며 홍칠에게 말했다.
“너는 속히 주방과 안채의 사람들에게 장 명인 오셨다고 기별해라.”
홍칠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얼굴로 장염과 민주려를 번갈아 보았다.
장 명인이라면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사천성 제일의 요리사 아닌가!
그 전설을 흠모하여 일찍이 사천제일루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했다.
언젠가 요리도 배워 장염과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꿈을 품고서 말이다.
“알겠습니다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한 홍칠이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홍칠의 요란한 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은 소걸이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던 소걸의 몸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스, 스승님…”
장경선과 함께 죽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 장염이 돌아온 것이다.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삼 년 간 어찌 흔적이
없을까?’ 싶어 내심 불안했다.
스승이 없는 동안 홍칠의 무한견제(無限牽制) 속에서 보낸 지난 삼 년 간의
기다림이란 또 어떤 것이었던가!
“씨이! 스승님! 어디 갔다가 이제 와요!”
“…”
소걸이 달려가 장염의 앞에 버티고 서서 숨을 헐떡거렸다.
두 사람 다 특별히 반가움을 표시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장염은 그저 두 손으로 소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고,
소걸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는 짓이 어린아이 같으니 이렇게 키도 안 자라는 거 아니냐.”
다시 본 소걸은 정말 키가 작았다.
장염이 보기에 지난 삼 년 간 거의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건 제가 어려서부터 못 먹고 떠돌아다녀서 그래요 뭐.”
소걸이 자기 딴에는 키가 작은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소걸의 과거를 아는 장염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삼 년 간 요릿집에 너를 맡긴 게 아니냐? 그동안 돌아다니
느라 먹지 못한 음식을 실컷 먹으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아직 요만하구나.
하하핫!”
“씨이… 맨날 죽어라고 일만 했는데… 무슨…”
장염에게 지지 않으려고 투덜거리던 소걸이 말끝을 흐렸다.
곁에 서 있던 민주려가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푸하핫! 누가 너에게 그렇게 일을 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분께 너를 맡기고
싶구나.”
“씨이…”
소걸이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질근질근 깨무는데 뒤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주방문이 열리며 향이 소저와 헌원일광, 그리고 이대추가 뛰어
나오고 있다.
그동안 궁지에 몰려있던 소걸이 뒤로 슬쩍 물러섰다.
“장 동생… 정말… 돌아왔군요.”
“하핫! 향 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호를 여행하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장염은 향이 소저와 장가촌에서 나와 헤어진 이후로 처음 보는 셈이다.
그때 향이 소저와 하후연, 그리고 지염도가 북쪽으로 떠났다.
물론 향이 일행은 그 뒤 단오절의 비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사천으로
돌아왔지만 장염은 그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건… 기대 이상이었어요. 그런데… 몸은 괜찮아요? 다치거나 내상을
입거나 한 건 아니죠?”
향이는 과거 장염이 내상을 입어 힘겨워할 때 함께 있었다.
지금도 오행혈마인과 싸우다가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건강한걸요.”
장염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향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아! 나도 아까부터 이곳에 나와 있었다! 몇 년 지났다고 사부님도
몰라보는 거냐?”
“어이쿠! 이 사부님! 제가 어찌 사부님을 잊겠습니까? 제가 오늘날 이렇게
빌어먹지 않고 잘 지내는 것도 다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요리 덕분인걸요.”
갑자기 장염이 뒤에 서 있는 이대추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무림인들이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지만 이대추는 껄걸 웃으며 절을
받았다.
자기가 가르친 요리사 중에 장염처럼 잔소리가 필요치 않았던 사람도 없다.
그간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이전보다 좋아진 것을
보니 대견하기만 하다.
“장 아우! 그날 이후로 늘 꿈자리가 뒤숭숭했는데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살 것 같구먼.”
헌원일광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염의 손을 움켜쥐고 세게 흔들어댔다.
복면의 괴인들에게 끌려갈 때만 해도 장염이 죽을 줄 알았다.
“하핫! 형님 덕분에 장가촌의 일행을 만나 구사일생(九死一生)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서장으로 간 것 같다고 하셨다면서요. 대체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형님 재주도 대단하십니다.”
“푸하핫! 이 사람아, 자네가 매일 ‘서장, 서장’ 하면서 노래를 불러놓고
이제 와 그게 무슨 소린가! 그때 자네가 찾아 나섰던 서장의 소저도
이곳에 머물다가 돌아갔다네.”
“하하! 제가 그랬습니까?”
그러고 보니 사천제일루에 영화 소저도 머물다 간 모양이다.
장염이 무안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데 안채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가볍게 달려오던 발걸음은 객점에 들어서며 차분해졌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민소백이 문가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있다.
“장… 소협…”
홍칠의 연락을 받고 달려나온 민소백은 정작 장염의 근처에 이르러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많기도 했지만 어색한 것이다.
장염이 민소백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민 소저를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그간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 늘 감사
하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민소백이 황급히 허리를 마주 조아렸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소협께 감사해야 할 사람은 저와 아버지입니다.
보세요. 가게도 이전보다 훨씬 커졌지요? 모두 소협께서 저희를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사천제일루가 성도의 유명 요릿집이기는 했지만 사천성은 물론 중원까지
이름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요리 명인의 소문으로 인해 사천제일루는 세인의 관심을 끌었고
더불어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다.
“그렇지. 장 명인이 아니었다면 사천제일루는 오늘날 사천의 명소가 되지
못했을 거야.”
민주려가 큰 소리로 맞장구를 치자 장염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때도 제가 소란을 떠는 통에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거지요. 오히려 제게 기회를 주신 두 분께서 큰 모험을 하신
거지요. 다행히 이제는 그 병도 나았으니 더 이상 심려를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대추가 소걸을 장염의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소걸에게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다.
“아참! 소걸아! 너는 속히 짐을 꾸려 아미산으로 가야겠다. 이 대협과
장 대협에게 장 명인이 돌오왔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용마표국에 들러서 하후 소협과 지 소협에게도 알려주고.”
“쩝…. 알았어요.”
소걸이 못내 아쉬운 듯 장염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쩝쩝거렸다.
스승과 재회의 기쁨을 다 나누기도 전에 다시 혼자 먼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아미산의 거처를 아는 사람이 자신뿐이니 별 수 없다.
그럭저럭 장염이 사천제일루에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장염의 주변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근처의 용마표국에서 일을 거들던 하후연과 지염도가 돌아왔고,
얼마 후 아미산에서 수련과 재활 치료를 하고 있던 이무심과 장소룡도
합류했다.
얼마 후 장염의 귀환 소식을 들은 서검자와 화산파 장문인 상유천이
찾아와 객실을 얻었다.
그 다음 무당파 장문인 춘양 진인과 아미파 장문인 파경 사태가 투숙을
했고, 공동파의 추료도 세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찾아왔다.
갑자기 무림의 지배자라는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놀란 것은
민주려다.
무림의 칠대문파 장문인 하나만 모셔도 대대로 자랑을 하고 다니는데,
지금은 자그마치 사대문파 장문인들이 제자들을 이끌고 사천제일루에 투숙
하고 있는 것이다.
사천성 성도의 객점 주인들은 저마다 민주려에게 계속해서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입을 모았다.
몇 해 전에는 요리 명인이 머물며 사천성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칠대문파 장문인들까지 줄지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사천제일루에 가면 은거기인들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장염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지만 영화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았다.
장염이 영화를 사천으로 부르지 않은 까닭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했지만 장염은 특별히 설명을 하지 않았다.
“장 동생, 어디를 다녀오세요.”
안뜰을 지나던 향이가 마주 오던 장염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난 며칠은 너무 바빠서 서로 얼굴 대할 시간도 없었다.
장염이 손에 들린 작은 꾸러미를 흔들어 보였다.
“네, 풍림장으로 편지를 보내려구요.”
영호화(英豪花)를 부르지 않고 계속해서 편지만 보내는 장염이었다.
“화 매(花妹)도 오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누님. 아직은 영화 소저가 풍림장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화 매가 장 동생과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텐데요.”
“영화 소저에게 찾아갈 때까지는 풍림장에서 나오지 말아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
향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장염을 보았다
그토록 서로를 그리워하던 두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장염은 영화를 자기 곁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
“장소가 다시 마교 교주가 된 마당에 영화 소저가 강호를 돌아다닌다면
다시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교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파에서 영화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장담할 수 없게 되지요. 지금은
그런 일로 장소가 영화 소저에게 시선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염의 말처럼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영화를 아끼는 장염의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럴까 싶지만 마음의 일은 어떻게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다.
“장 동생…”
“네?”
잠시 머뭇거리던 향이가 아내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화 매를 생각하는 모습의 보기 좋아요.”
“하하… 별말씀을요.”
“…”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상념에 잠겨 있는데 멀리서 점소이들의 요란한 음성
이 들려왔다.
보아하니 또 어느 대단한 손님이 들어온 모양이다.
장염이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향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이 객실의 뜰이니 어물거리다가는 또다시 귀찮은
일에 말려들지 모른다.
장염이 밖으로 황급히 걸어나가자 향이는 곧 주방으로 향했다.
얼마 전에 민주려가 주방 출입을 금지시켰지만 사실 주방이 가장 마음
편했다.
주방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향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해 묻지
않았다.
주방문 앞에 이른 향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밀려드는 손님으로 주방의 일손이 부족해서 다행이다.
만약 주방마저 한가해진담녀 더 이상 사천성에서 자신이 있을 곳은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결단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후우… 후우… 후우…”
문고리를 잡고 몇 번 심호흡을 하던 향이가 환한 얼굴로 주방문을 열어
젖혔다.
음식 냄새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얼굴로 확 밀려들었다.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이 반가운 얼굴로 향이를 바라보았다.
향이가 인사를 건네며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얼마 후 마당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병장기를 휴대한 것으로 보아 무림인들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씩씩한 생김새에 비해서 마음잉 소심한 듯,
뜰을 가로지를 때도 발뒤꿈치를 들어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고
있었다.
요즈음의 사천제일루는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식탁 사이를 오가며 주문을 받는 점소이들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높아진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로 들끓어 그렇게 된 것도 있지만 폭군 같은 손님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탓이다.
그에 비해 많은 무림인들은 자기가 마치 점소이의 보조라도 된 양
점소이들을 어려워했다.
게다가 자기들끼리도 사소한 시비 하나 일으키지 않았다
그뿐 아니다.
점소이들의 크고 작은 실수에도 무림인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어쩌다가 주문한 것과 전혀 다른 엉뚱한 것을 가지고 가도 ‘허허’ 웃으며
넘겼다.
점소이들 가운데 목소리의 크기나 투덜거림이 특히 심한 사람은 소걸과
홍칠이다.
소걸은 스승이 돌아왔음에도 자기가 점소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으로
인해 투덜거렸고, 홍칠은 소걸만큼 소리치지 않으면 남들이 자기를 소걸의
후배로 볼지도 모른다 생각해 자주 고함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홍칠은 ‘대체 왜 점소이와 손님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가야
하는가?’ 에 대해 늘 고민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무림인들이 거칠었는데… 요즘은 소걸 같은 점소이가
지랄을 해도 너그럽게 다 받아준다. 아무래도 우리 요식 보조업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많이 개선된 모양이다.’
하릴없는 무림인들이 주루와 객점에 꼬이는 것이 사회 현상의 하나라면,
갑작스런 무림인들의 겸손과 너그러움도 그런 것이리라.
점소이들의 입지가 그 정도로 향상되었다면 더 이상 허리를 숙이지
않으리라!
누가 말하기를 ‘진정한 점소이는 동등한 사람에게 결코 허릴 굽히지 않는다’
고 했다.
그렇게 다짐하고 적극적으로 변화했지만 아무도 자기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역시! 세상이 변했어!’
믿을 수 없게도 사회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드디어 자신의 꿈인 점소이 천하가 시작된 것이다.
홍칠과 소걸 같은 점소이들이 싸가지가 있게 행동을 하거나 말거나
사천제일루는 무림인들로 들끓었다.
나중에는 객실이 다 차서 더 이상 손님을 받지 못했다.
뒤늦게 몰려든 손님들은 식당과 주루에서 밤새 술을 마시거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경선이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문만으로도 강호는 다시 벌집을 쑤신 듯
들끓기 시작했다.
장경선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니 마교 교주 장소도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그러나 무림에서 장경선이나 장소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장천사 장염
뿐이니 이래저래 사천제일루로 무림지사들의 발걸음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손님이 늘어나니 즐거워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사람은 민주려다.
드디어 많은 경쟁 업소를 물리치고 사천성에서 제일 가는 주루요,
객점이 된 것이다.
요즘 같아서는 하루하루가 즐거워 미칠 지경이다.
비록 점소이들이 점점 건방져 가고는 있지만 손님이 오히려 늘어나니
기묘한 일이다.
‘바보들 아냐?’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학대를 받을수록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깊이 생각하면 찜찜하지만 지금은 어떤 손님이든 가리고 싶지 않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했다.
손님도 뜸한 겨울이 오기 전에 한몫 잡아야 하는 것이다.
민주려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다니는 것과 반대로 얼굴에 그늘만
깊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옥돌 민 자를 쓰는 민주려의 외동딸 민소백이다.
민소백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서 나중에는 무슨 병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