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21)
4장. 가질 수 없는 것은 부순다
달도 휘영청 밝은 어느 날 밤이다.
향이가 묵고 있는 객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기는 사람이 있었다.
톡. 톡. 톡.
어찌나 살그머니 손끝으로 건드리는지 깊은 밤이 아니면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공이 깊어진 향이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야심한 밤에 대체 누가 저리도 조심스럽게 찾아왔단 말인가!
향이의 가슴이 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
상대가 말이 없자 향이는 방문에 가만히 서서 다시 물었다.
“이 밤에 누구세요?”
“향 언니… 저… 소백이에요?”
그제야 향이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민소백을 바라보는 향이의 눈가로 뜻 모를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민소백은 어둠 속에서 머뭇거리며 들어가기를 주저했다.
아무래도 어색하지만 ?.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향이가 얼른 민소백의 손을 안으로 잡아끌며 다정히 말했다.
“어서 와요. 달이 밝아 나도 잠이 오지 않았아요.”
“네에…”
민소백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는 민소백이 들어오자 하나뿐인 등에 불을 밝힌 후 마주 앉았다.
이렇게 늦은 밤 자기에게 찾아왔으니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다.
물론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실은… 상의 드릴 일이 있어서요.”
“그래요, 무슨 일이죠?”
“…”
애꿎은 손가락만 오래도록 만지작거리던 민소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참 안됐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병이 있는지 바싹
마른 몸에 얼굴도 근심으로 가득했죠. 그는 일행과 함께 와서 음식을
먹었지만 돈이 없어서 몸을 저당 잡혀야 했어요.”
“네에…”
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소백은 역시 장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향이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장염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 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염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는 참 열심히 일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명인이라 불리게 되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 뒤로 저는 그의 의형인 헌원 숙수에게
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덕분에 같은 집에 살면서도 잘 모르고 지내던
헌원 숙수와 친해지게 되었죠. 물론… 그 덕분에 한때는 명인과 헌원 숙수와
저에 관한 고약한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말이에요. 후후!
향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장염과의 옛일을 떠올리는 소백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몇 년이 지나 그가 불쑥 돌아왔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에게는 이미
좋아하는 소저가 따로 있었어요. 귀하게 자란 아름다운 소저였어요.”
“네에… 착하기까지 하죠.”
향이가 허탈한 음성으로 말을 잇자 민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
“…”
두 사람이 약속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 영화에 대해 떠올리자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민소백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저는 장 소협에게 말할 거예요. 제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
향이는 멍한 얼굴로 민소백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괜히 두 사람 사이만 어색하게 될지도 모른다.
“민 매(玟妹)의 용기가 부럽군요.”
“언니, 이건 용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상한 거 있죠? 장 소협에게 제 마음
을 털어놓아야지 하면…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간의 소문
도 신경 쓰이고… 헌원 숙수와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말이죠.”
“장 소협에게요?”
“아니요. 헌원 숙수에게요.”
“아! 네에…”
“…”
민소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헌원일광을 남자로 생가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몇 년 간 함께 장염의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럴까?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주치는 헌원일광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는 늘 가까이 있어준 사람이지만 종종 장염만큼이나 낯설기도 했다.
“확실히 그는 너무 멀리 있는 느낌이에요.”
“헌원 숙수 말이죠?”
“아니, 장 소협이요.”
“후우… 맞아요…”
향이가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기에게 장염은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먼 느낌의 사람이었다.
문득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언니, 장 소협은 어떤 사람이지요?”
“후훗,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은 신선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이 같은 어른?”
“어머! 그래요?”
“그렇다니까요.”
“호호호!”
향이와 웃고 떠들던 민소백은 새백 미명(未明)에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민소백이 돌아가자 향이는 침상에 지친 몸을 뉘었다.
사방이 고요했지만 오히려 정신은 투명하게 맑아져 잠도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향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앉았다.
내공을 익힌 뒤로 피부는 점점 더 고와져 이십 대의 나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벌써 삼십 대 중반이 된 자기 얼굴이 보인다.
“후우…”
거울의 표면을 몇 번 매만지던 향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 잠이 들면 늦잠을 자게 될 것 같으니 차라리 운기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
지난 밤 잠자리에서 오랫동안 뒤척여서일까?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장염의 표정은 어두웠다.
사천제일루에 돌아온 뒤로 한차례 천산을 다녀온 바가 있다.
다시 마교 교주가 되었다는 장소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천산의 마교 총단을 다 뒤지고 다녔지만 장소는 없었다.
‘수하들도 교주가 천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장소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천산에서 마교의 고수 몇 사람을 잡아 장소의 행방을 물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장소가 천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소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이 된다.
지금과 같은 때에 장소가 갈 만한 곳은 대체 어디일까?
장소가 천산에서 사라졌으니 이제는 장경선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장경선은 장소를 찾기보다 더욱 어려웠다.
장경선에 대해 소문은 무성했지만 대부분 거짓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장경선이라는 이름 아래 죽거나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확실한 정보가 있을 때까지 조금 기다려 봐야겠다.’
다행히 지금은 각 성의 무림고수들이 장경선과 장소의 흔적을 쫓아 돌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을 통해 두 사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제발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적어도 장소가 장경선을 찾기 전까지 그 둘 중에 하나를 찾아야 한다.
만약 장소와 장경선이 먼저 만나게 된다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누가 누구를 먼저 만나는가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니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다.
“그나저나 오늘은 헌원 형님을 한번 만나봐야겠다.”
요즘 들어 왠지 헌원일광과 자신의 관계가 서먹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몇 년 전 전이를 수련하다가 우연히 헌원일광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겉돌고 있는 헌원일광과 민소백을 보면 괜히
웃음부터 나온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냥 웃고 지낼 수만도 없다.
객실에서 나온 장염은 자신이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부터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상체를 넣었다.
뿌연 연기 속에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 멀리 헌원일광이 뭘가고 소리치고 있었다.
“헌원 형님, 잠시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요리사들에게 뭔가 열심히 지시하던 헌원일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장염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 본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어! 그래, 어쩐 일인가?”
헌원일광이 옷을 툭툭 털며 장염에게 다가왔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장염의 얼굴을 보니 뭔가 특별히 할 얘기가 있는
듯하다.
“오늘은 지난 번에 나누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습니다.”
“지난 번?”
헌원일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래에 들어 장염과 특별히 나눈 이야기란 없다.
게다가 어떤 이야기를 중도에 그만둔 적도 없다.
그런데 지난 번에 나누던 이야기라니?
여전히 선문답(禪問答) 같은 것을 즐기는 장염이었다.
‘대체 내가 장 아우와 무슨 이야기를 나우었더라?’
그러나 아무리 되짚어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장 아우, 대체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가 뭔지 물어도 되겠나?”
“하핫! 바로 형님에게 찾아온 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헌원일광이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봄이라니?
물론 계절적으로 지금이 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특별히 자신에게만 봄이 온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는 아우님의 이야기를 도무지 모르겠구먼.”
장염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헌원일광의 귀에 나직이 속삭였다.
“왜 일전에 형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민 소저를 마음에 두고 있다
면서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입니다.”
“헛! 무슨 소리를…!”
헌원일광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대체 자신이 언제 그런 이야기를 장염에게 했다는 말인가!
그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다.
“장 아우,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시게. 민 소저가 알면 큰일
난다네.”
“삼 년쯤 전, 그때도 달이 참 밝았죠. 제가 형님을 찾아온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함께 이야기 나눈 것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장염을 다시 만난 것은 겨우 한 달 전이다.
그 이전에는 장염을 만나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그런데 삼 년 전에 장염을 만났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 그러고 보니 삼 년쯤 전이라면 자신이 장염의 꿈을 꾸었을 때다.
헌원일광이 놀란 눈으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설마… 장 아우… 그게 꿈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야! 그건 분명히 나의
꿈이었단 말일세.”
아무리 생생하다 한들 어찌 꿈이 현실이 될까!
장염이 헌원일광에게 빙긋이 웃어 보였다.
“형님, 바로 그날 제가 형님을 뵈러 왔습니다. 민 소저를 좋아하는데 차마
말할 수가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하핫!”
“어허!”
마침내 헌원일광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정말 자기의 꿈속에서 나눈 이야기를 장염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한참 만에 헌원일광이 장탄식을 토했다.
“하아! 내가 신선 앞에서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나. 그래, 장 아우의
말이 옳다고 인정해야겠지 그러나 나는 분수에 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네.”
“형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하질 않습니까?”
“그거야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장난일뿐… 사람마다 처지에 따라
살아가는 길이 다른 법이네.”
“형님의 처지가 어때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천 요리계의 유명한
숙수께서 너무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러나 민 소저는… 그만둠세. 자꾸 그런 말로 신세 한탄만 하고 싶지는
않네.”
“누가 감히 헌원 형님고 민 소저가 신분의 차이가 난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형님이 민 소저와 신분 차이 때문에 어울리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면 섭섭
합니다. 저와는 의형제를 맺으신 분이 민 소저에게 신분의 차이를 느끼시
다니요.”
“장 아우, 그건…”
헌원일광이 뭐라고 대꾸하려 했으나 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사실은 민 소저가 장염을 사모하는 것 같아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장염이 자신의 의동생이니 신분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장염에게는 대단히 실례가 되는 말일 수도 있다.
“장 아우, 아우의 신세가 나만큼 별 볼일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닐세.”
“형님이 민 소저를 사모하는 것을 두고 누가 비웃는다면 그것은 저를
비웃는 것과 같습니다.”
“하핫!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니 고맙네.”
헌원일광은 장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워낙 당사자나 주변 사람들이 말을 아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게를 드나드는 무림인들이 장염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장염의 말에 어설프게나마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신분 차이 때문에 민 소저를 어려워하고 있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네.
그러나… 사실 민 소저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자네가 아니던가?”
“하하핫! 형님의 눈에는 그렇게만 보이셨습니까? 제게는 오히려 형님을
더욱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던걸요. 사실 사천제일루에 와서 형님과
민 소저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이미 마음으로 정한 소저가 있습니다. 그녀 이외에는 누구도 생각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연의 이치라…”
헌원일광이 무심코 장염의 말을 받았다.
사실 자신은 아직 자연의 이치를 모른다.
그러나 장염과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네. 아우님의 말을 들으니 용기가 생기네만, 이게 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고…”
“서장을 여행할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먼 나라엔 이런 말도 있다고
합니다.”
“뭔가?”
“용감한 자만이 미녀를 차지한다.”
“허, 거참! 굉장한 말일세. 무슨 불경(佛經) 같은데 기록된 말인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비슷할 겁니다.”
“그 말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가겠네.”
“부디 효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척 듣기에도 영험해 보이네.”
***
검불게 타오르는 석양을 등에 지고 한 사내가 낙양(洛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죽립을 눌러쓴 사내는 낙양의 지리를 잘 아는 듯 망설임도 없이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은 바로 경재학이 가주(家主)로 있다는 낙양의 천하제일가
였다.
본래 낙양의 천하제일가는 정주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래서 아직도 나이가 지긋한 원로 고수들에게 천하제일가는 정주(鄭州)요,
그 다음 세대에게는 낙양이었다.
경재학이 분가(分家)해 나간 낙양의 천하제일가도 규모가 정주의 것 못지
않게 컸다.
전각이 이십여 채에 방만 해도 백 개가 넘었다.
사내는 낙양의 중심부에 있는 천하제일가를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죽립 사이로 사내의 검게 탄 얼굴이 언뜻 드러났다.
‘이미 무림의 지배자가 되어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꿈은 버렸다.’
무림공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평생 숨어 다녀야 한다.
게다가 자기의 오행지기를 노리는 마교 교주 장소가 언제 덮칠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삼 년 간이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강호를 떠돌아다니던 장경선은
가족을 구한 뒤 영원히 은거하기로 결심했다.
경재학이 순순히 가족의 행방을 불 리가 없으니 다시 한 번 직접 수고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처음 방문했을 때 확실히 뒤져 보는 것인데,
이제는 후회해도 늦다.
장경선이 훌쩍 몸을 띄웠다.
허공 속으로 장경선의 몸이 녹아드는 듯하더니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남들이 보면 눈이 뒤집힐 수법이지만 이런 경공으로는 단지 달아나는 데
유리할 뿐이다.
그나마 장소나 장염 같은 사람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경공에 자신이 생긴 장경선은 천하제일가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죄인들을 가두는 항마금전은 물론 이십여 채의 전각도 빼놓지 않고
수색했다.
천하제일가의 고수들은 장경선이 그들의 머리 위를 구름처럼 넘나들어도
누구 하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귀신 같은 경공으로도 이미 사라진 사람을 찾아낼 수는 없다.
전각을 다 조사한 장경선은 천하제일가의 식솔들이 머무르는 백여 개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역시 어느 방에도 가족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숨겼단 말인가!’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지만 애써 부인했다.
경재학의 머리가 그처럼 아둔하지 않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명이 걸린 일인데 가족들을 죽였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낙양의 천하제일가에는 없었다.
밤새도록 돌아다니다 지친 장경선이 어느 전각의 지붕 위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다.
아래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조용한 데다가 장경선의 내공도 평범하지 않으니 마치 곁에서 말하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작(對酌)을 하며 나누는 이야기는 대체로
‘천하제일가, 이대로 좋은가’ 라는 주제였다.
“그래서 하의도가 죽었단 말인가?”
“하의도를 죽인 사람들이 바로 가주의 친위대인 비비재단(??在團, 알고
있으나 차마 입으로 말할수 없는 단체)이라네.”
“그걸 자네는 어떻가 알았나?”
“하의도가 사라지기 전날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면 나를 찾아왔었지. 그때
까지 나는 가주께서 설마 하니 식솔들을 버리실 줄은 몰랐다네.”
“어허! 빌어먹을… 적어도 선대의 가주께서는 식솔을 내치지 않았건만…”
“그러게 말일세. 섬전수 장경선이 저토록 날뛸 줄을 누가 알았겠나? 이번
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지 벌써부터 염려가 되네.”
“이미 죽어 없어진 가족을 찾겠다고 난리를 부리고 있다니… 장경선이도
안됐구먼.”
“세상에 비밀이 없는 법이니 장경선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걸세.”
“대체 가주가 데리고 있다는 비비재단의 사람들은 정체가 뭐야? 같은
식솔도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하다니… 이래서야 어디 서로 간에 믿고
살 수가 있겠나! 그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다닌다는 게야? 본가
(本家)가 무림에서 무슨 몹쓸 일이라도 벌이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사내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지붕이 조용히 갈라지며 한 남루한 옷을 걸친 사내가 방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후두두둑.
사내의 머리 위로 뒤늦게 나뭇조각과 돌 뭉치들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사내는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헉! 섬전수!”
“그래, 가족을 찾기 위해 날뛰고 있는 장경성이다. 비밀이 없다는 너희들의
말은 잘 들었다. 고통없이 죽고 싶다면 소상히 말해 봐라.”
두 사내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이 스쳐 지나갔다.
섬전수 장경선의 이름만이 아니더라도 지금 그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대단했다.
강기(剛氣)의 보호막에 의해 나무와 돌 부스러기들이 장경선의 주변으로
곱게 쌓이고 있었다.
그 하나만 보더라도 장경선의 무위(武威)가 어떠하리란 걸 짐작할 수 있다.
“나, 나는…”
한 사내가 한숨을 쉬는 순간 다른 사내의 몸이 빗살처럼 창밖으로 날아갔다.
순간의 틈을 노려 달아나고 있는 것이다.
“미련한 놈.”
장경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사내의 뒤통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에 곱게 쌓여 있던 돌 가루들이 허공으로 치솟아올랐다.
돌 가루들은 이내 한 자루 석창(石槍)으로 변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퍼억!
푸시시.
머리를 관통한 석창은 허공에서 다시 돌 가루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아차! 달아나려고 한 녀석을 고통도 없이 죽여 버렸구나. 저런저런…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겠지?”
“후우… 섬전수 장경선을 만났으니 살기를 바라겠소? 천하제일가의 행사가
근래에 들어 이상해지는 듯하더니 결국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구려.
알고 싶은 게 뭐요?”
“내 가족들은 어찌 된 게냐?”
사내는 잠시 장경선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 그것은 사고라 했소. 어느 날 밤 항마금전에 갇혔던 일수탈백
(一手奪魄) 장태수(張泰守)가 가족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고 하오.”
“그래서?”
장경선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날 밤 항마금전을 지키던 내전의 무사들은 그들이 일반 죄수인
줄 알았던 모양이오. 달아나는 장태수 일가에게 화살을 쏴서… 그날 밤
장태수와 그 가족들이 모두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들었소.”
“…”
“그날 내전을 지켰던 위사들은 나중에 영문도 모르게 하나둘 사라져 갔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자가 바로 하의도요. 물론 하의도 역시… 다른 사람
들가 마찬가지로 어느 날 사라졌지만. 하의도는 아무래도 불안했던지 한
동안 내전 근무를 함께하며 친분이 있던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오.
가주께서 지시하신 일도 함께 말이오.”
“경재학이 뭐라고 시켰다던가?”
“혹시라도 섬전수 장경선을 만나면 장태수 일가는 이미 다른 곳으로
모셨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장경선의 눈에서 살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경재학의 술수에 휘말려 엉뚱한 일을 벌이고 다닌
셈이다.
경재학은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하며 혈마사와 장염을 상대하게
했다.
혈마사는 그렇다 치고 대체 장염과는 무슨 원한이 그토록 깊은 것일까?
물론 이제는 다 소용없는 짓이지만 말이다.
“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
“내 가족이 사라졌으니… 네게는 안됐지만 천하제일가도 오늘로 끝이다.”
장경선이 정면에 서 있던 사내를 향해 손을 슬쩍 휘둘렀다.
사내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곧 폭발하고 말았다.
퍽!
이미 오행지기(五行之氣) 목기(木氣)와 금기(金氣)를 체내에 융합한 장경선
이다.
전신 공력을 끌어올린 후 허공으로 치솟은 장경선의 눈에 이십여 채의
전각이 들어왔다.
장경선의 두 팔이 천천히 벌어졌다.
“무너져라!”
외마디 고함과 함께 장경선의 몸이 풍차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장경선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경력이 사방으로 휘몰아쳐 갔다.
멀리서 보면 마치 회오리바람이라도 부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전과 외전을 지키던 무사들도 미친 듯이 몰아쳐 오는 회오리바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사들과 부서진 전각이 한데 어울려 솟구쳤다가 이내 땅바닥에 처박혀
갔다.
콰지지직! 콰쾅!
“으아아악!”
경력에 휘말린 전각이 무너지자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혹 무너지는 전각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나무와 돌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맞아 이승을 하직해야 했다.
자정에 시작된 죽음의 회오리바람은 일각이 지난 뒤에야 가라앉았다.
바람이 가라앉자 사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죽음의 신(死神)은 부상자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장경선은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조차 찾아다니며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낙양의 천하제일가는 완전한 무덤이 되고 말았다.
과거 혈마사가 쓸고 지나간 자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처참한 광경
이었다.
“경재학아… 특별히 너의 숨통은 아주 천천히 조여주마.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겹고 고통스러운지 느껴보거라.”
이미 장소를 만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 뒤였다.
경재학과 천하제일가에 복수할 수 있다면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장경선은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떠나갔다.
장경선이 떠나간 자리 위로 매캐한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관하던 불씨가 바람을 타고 번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태울 것도 마땅치 않았던지 연기는 불꽃이 되지 못하고 아침 안개에
섞여 버렸다.
***
낙양의 천하제일가가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는 소문은 강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목격자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천하제일가가 폐허로 변한 것을 둘러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부대(大部隊)
가 밀고 지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몽고족이든 영락제의 군대든 하남성에서 목격된 바가 없으니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낙양 본가(本家)가… 사라졌습니다.”
“알고 있다.”
총관 산전수전(山戰水戰) 목불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아플진대 가주의 속이야 오죽할 것인가!
남아 있던 자신의 가족들도 몰살당했지만 분가(分家)한 경재학의 친지들도
일시에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설마… 황군(皇軍)입니까?”
황제의 군대가 아니면 누가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몽고족이 하남성까지 들어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림과 담을 쌓고 지내고 있던 황실이 천하제일가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인데,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몽고족만으로도 벅찬 영락제가 할 일이 없어서 무림세가와 등을 지겠느냐?
당금 무림에서 낙양의 천하제일가를 하룻밤 사이에 폐허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다.”
“…”
“장소와 장경선… 그리고 장염이다. 그러고 보니 죄다 장씨로구먼.”
목불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재학을 바라보았다.
대체 그들이 왜 낙양의 천하제일가를 없애려 한단 말인가!
“장소는 야심이 있으니 남들의 눈에 띌 서투른 짓은 하지 못할 것이고…
장염은 제 놈이 마치 신선(神仙)인 양 위선을 떨고 다니니 역시 아니다.
지금에 와서 본강 이렇게 잔인한 짓을 벌일 수 있는 놈은 오직…”
“섬전수 장경선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습니까?”
“아직 오행혈마인을 상대해 보지 못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지. 나도
장경선이 오행지기 하나를 가지고 있을 때 겨우 목숨을 부지했었다.그런데…
듣자 하니 장경선은 이미 오행지기 둘을 모았다더구나. 오행지기가 둘이
모였으면 나 같은 사람 다섯이 덤벼야 겨우 평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헉! 장경선이 그 정도입니까?”
“아마도 장경선이 제 가족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벌일까.”
“그렇다면… 가주께서 몸을 피하시는 것이…”
경재학이 목불인에게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낙양의 본가가 초토화되었는데 나마저 몸을 숨겨보아라. 아버님이 계시는
정주의 천하제일가가 남아나겠느냐? 그리고 천하제일가의 가주이며 무림맹
맹주인 내가 적이 무서워 달아난다면 사람들은 또 뭐라고 하겠느냐?”
그렇지 않다도 요즘 들어 맹주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아 고민이다.
만약 여기서 몸을 숨기게 된다면 맹주는 물론 더 이상 무림에 관여하기도
힘들 것이다.
경재학은 이렇게 은거를 하느니 장경선과 대면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
목불인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맹주의 말처럼 이제 여기서 아무도 달아날 수가 없다.
만약 장경선이 정주의 천하제일가로 향한다면 그곳 역시 화(禍)를 입게 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수백 년을 이어온 천하제일가도 멸문이 위기에 놓이게 된다.
경재학이 침묵하자 목불인도 길게 읍(揖)을 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목불인이 집무실에서 나가자 경재학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이제는 정면 돌파만이 남은 셈이다.
비록 무림사에 전설로 내려오는 무검(無劍)을 터득했지만 장경선은 이미
마신(魔神)이다.
“장염… 그놈이라도 제때에 와준다면…”
그러나 장염은 자신과 장경선의 은원 관계를 모르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소라도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장소가 원하는 것은 무림이니 자신이 조금 양보한다면 직접 부딪칠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천하의 안위니 어쩌니 하는 것은 관심이 없다.
당장 자기가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확실히 장염보다는 장소나 나타나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장염이 장경선과 만나게 된다면 대화가 오갈 터인데,
그랬다가는 자신이 장염을 죽여달라고 했다는 사실도 드러날지 모른다.
“아무렴. 장염 그놈의 성격이라면 부질없는 말로 시간을 질질 끌 것이고,
그러다 보면 별 소리가 다 나올 수 있지.”
그렇다면 장소에게는 장경선의 정보를 흘리고 동시에 장염의 귀는 막아야
한다.
일단 이 위기를 넘기고 나면 무림과 완전한 오행혈마인 장소가 전쟁을
치르든 말든 관계없다.
어디 그뿐이랴!
힘에 부치면 그때 가서 화산파의 상유천이나 소림사의 원정 선사 같은
이에게 맹주의 자리를 넘겨주고 한 걸음 물려나도 된다.
‘만약 내가 맹주 자리를 넘길 정도의 상황이라면… 그런 대전쟁 후에 과연
누가 살아남을까.’
낙양 천하제일가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비비재단의 수하들을 이용한다면
장소를 부르고 장염을 막는 것은 일도 아니다.
“흐흐흐!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이왕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부서지는
것도 좋지.”
***
그 즈음 정주에 있는 천하제일가에도 낙양의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경재학이 식솔들을 데리고 낙양으로 분가해 갔다고는 하나 아직도 많은
친지들이 정주에 남아 있었으니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슬퍼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경영자는 가문의 원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본래 자식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으나 아무래도 무림맹으로 본가의
고수들을 보내야겠다. 낙양의 분가가 멸문했다면 그 다음은 재학이가
표적이 될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흉수들이 정주의 본가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경영자는 처음에 가문의 원로들 모르게 아들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 일이 커져 분가가 멸망하고 말았다.
이제는 원로들 모르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도움이 있어야 할 판이다.
원로 고수이자 무림에 일검진천(一劍震天)이라는 외호로 알려진 경재범이
즉시 화답했다.
“어찌 가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흉수가 낙양의 식솔들을 노리고
있다면 그 다음은 반드시 무림맹이 될 터. 마침 친지들의 원한도 갚아야
한다고 중지가 모아졌으니 고수들을 보내야 마땅하지요.”
“그렇습니다.”
원로들이 저마다 찬성하고 나서자 경영자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주 천하제일가의 고수들이 활동을 재개하면 무림의 판도가 바뀔지도
모른다.
초원으로 돌아간 몽고족들조차 탐을 내던 무력(武力)이니 경재학의 호위는
물론 정주본가(鄭州本家)를 위협할 세력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몽고족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 탄로 나서 황제의 비밀 조직에 당한
것은 아니겠지.’
경영자는 아직 경재학과 오행혈마인이 얽힌 일을 알지 못한다.
그저 지난 번 몽고족으로부터 사신이 왔을 때 그를 아들에게 맡긴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릴 뿐이다.
만약 황제의 비밀 조직에 당한 것이라면 이 참에 초원으로 도망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조직이든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무림세가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멸문시킬 것이며,
만에 하나 무림맹의 산하 조직이 관계되었으면 무림맹을 와해시킬 것이다.
무림맹에서 천하제일가의 비밀 세력이 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면 적어도
견제를 할 만한 상대는 제거해야 할 것이다.
“천하제일가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늦지 않도록 하여라.”
“가주께서도 가시려고 하십니까?”
경재범이 깜짝 놀란 얼굴로 경영자를 바라보았다.
“식솔을 사지(死地)로 보내는 마당이니 당연히 함께 가야지.”
경재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경영자가 무림에서 손을 뗀 지 어언 오십 년이 넘었다.
경영자가 무림을 종횡하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를 신검(神劍)이라 불렀다.
낙양을 멸문시킨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신검이 함께 간다면 염려할
바가 아니다.
“가주께서 직접 나서주신다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허허헛! 서둘러 함께 갈 고수들을 준비시켜라.”
“알겠습니다.”
경재범은 칠순이라는 나이도 잊고 씩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경재범과 원로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고수들은 대부분 이미 삼십 년에서
오십 년 전에 무림에서 은거한 사람들이다.
회의를 주재하는 경재범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경영자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의 오른팔로 일하던 자신의 인생도 끝이
났다.
글너데 지금 비록 가슴 아픈 동기로 시작되었지만 무려 오십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신검 경영자의 시대인 것이다.
***
급박하게 돌아가는 천하제일가와 대조적으로 사천제일루에는 때 아닌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장염이 민소백과 헌원일광의 중매인(中媒人)을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염의 말이라면 하늘처럼 받드는 민주려라 해도 그것만은 받아
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민소백이 장염과 헌원일광을 각각 만난 후에 ‘헌원일광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 고 하자 마침내 민주려의 고집도 꺾이고 말았다.
민주려와 헌원일광은 때가 때인지라 혼인식을 다음 해로 미루고 간단히
약혼만 하기로 했다.
주루와 객전이 무림인으로 바글대는 마당에 무슨 혼인식을 벌인단 말인가!
그래도 정작 약혼을 하는 날은 대단했다.
헌원일광이 장염의 의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인근의 요리사와 무림인
들이 몰려들었다.
헌원일광의 뒤편에 마련된 가족석으로 화산파의 기인(奇人) 서검자와
장문인 상유천이 자리를 잡았다.
그뿐 아니다.
머무르고 있던 아미파와 공동팡의 장문인은 물론 소림사의 원정 선사까지
찾아와 헌원일광의 가족석에 한자리씩 차고 들어갔다.
이대추는 칠대문파의 장문인 사이에 앉아 어색하게 웃었다.
요리 제자인 헌원일광을 축하하려고 했는데 그 자리에 설마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이제 와 다른 곳으로 슬그머니 사라질 수도 없다.
어색해진 이대추는 그저 만만한 장염만 연신 불러댔다.
“장염아! 여기 우육(牛肉, 소고기)과 채(菜)가 떨어졌다. 서둘러 가져오라고
해라.”
“아, 녀석아! 사부님께 술 한잔 올리지 않고 어딜 그리 쏘다녀?”
이대추가 큰소리를 칠 때마다 좌우에 앉은 무림고수들이 감탄한 얼굴로
포권(包拳)을 해 보였다.
이대추는 그 재미에 더욱더 장염을 불러댔다.
그럭저럭 먹고 마시느라 떠들썩한 약혼식이 끝날 무렵이다.
헌원일광이 슬그머니 장염에게 다가왔다.
“장 아우, 내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날 민 소저가 아우님께 뭐라고
하던가?”
그날이라면 중매를 서겠다고 너선 뒤 민소백과 둘이 면담을 한 날일 게다.
장염이 헌원일광을 보며 대답했다.
“아,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민 소저는 혼자 여아홍(女兒紅)
한 병을 비우고 일어났습니다.”
“그랬던가? 나는 민 소저가 자네에게 할 말이 많은 줄 알았는데…”
“형님도 참… 그나저나 그날 형님이 뭐라고 하셨기에 민 소저가 혼인을
승낙한 겁니까?”
그날 여아홍을 비우고 나간 민소백은 곧바로 헌원일광과 만났다.
그 뒤로 민소백은 오직 헌원일광하고만 혼인을 하겠다는 선언했었다.
“뭐…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자네와 같은 사람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네.”
“하하하! 다행입니다. 형님도 옛날의 저처럼 광인(狂人)이 되면 큰일
아닙니까? 저와 같은 사람이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푸하핫! 그런가?”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