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23)
6장. 다섯이 하나가 되면 지옥이 열린다
경재학은 더 이상 피할 수도 달아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서히 걸어
나갔다.
비록 예상보다 일찍 나타났지만 아직은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었다.
장소가 가까이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경재학은 위풍당당(威風堂堂)하게
걸어나왔다.
“네 이놈! 인성을 상실한 마인이라고 하더니 과연 하는 짓이 정상이
아니구나!”
장경선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경재학을 노려보았다.
자기를 실컷 이용해 먹고 가족마저 죽인 사람치고는 너무 뻔뻔했다.
“푸하핫! 나야 인성을 상실해서 그렇다 치고, 네놈은 어째서 그렇게 사는
게냐?”
장경선의 말을 듣고 무림인들이 웅성거릭기 시작했다.
오행혈마인이 천하제일가에서 나왔느?그가 모시던 가주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경재학은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재빨리 선수를 치기 시작했다.
“천하무림의 안위를 위해 너를 이용한 것이 죄라면, 오냐! 내가 죄를
범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들을 수백 명이나 죽인단 말이냐!”
“죽일 놈.”
할 말을 잃은 장경선이 이빨을 빠드득 갈아붙였다.
경재학은 자신의 행동을 너무도 교묘하게 꾸며대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그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
적어도 자신을 이용해 혈마사를 없애달라고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네 놈이 나의 가문을 몰살시켰으니, 이제 나도 그렇게 하는 것 뿐이다.
이제 그만 순순히 목숨을 내놓아라!”
장경선의 마지막 말은 허공에서 들려왔다.
어느 틈에 경재학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장경선은 자그마치 칠 장이나 날아가고 있었다.
“헛!”
경재학은 장경선이 코앞으로 날아오자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검을 잃어버린 뒤라 손에 무기가 없다.
황급히 둘러보던 경재학은 곁에 있던 사람의 검을 빼앗아 장경선에게
날렸다.
얼떨결에 검을 빼앗긴 사람은 화산파의 제자 백리영(百里榮)이다.
백리영의 검은 영월검(永月劍)이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검 자체는 그리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츠츠츠… 꽈꽝!
아니나 다를까!
잘 날아가던 검은 경재학의 공력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서 그만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지존검 같은 명검이 아닌 이상 경재학의 공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느닷없는 검의 폭발에 놀란 사람은 오히려 장경선이다.
장경선은 눈앞에서 검이 폭발을 일으키자 대경실색하여 수직으로 날아
올랐다.
파파파팟!
조각난 검의 파편은 장경선의 발 밑을 지나 뒤편으로 빛살처럼 날아갔다.
장경선의 뒤에는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서 있었다.
그러나 검편(劍片)에는 눈이 없으니 피아(彼我)를 구별하지 못한다.
“끄아악!”
멍하니 서 있던 서너 명의 무림인들이 그 자리에서 절명을 하고 말았다.
백리영은 얼이 빠진 모습으로 경재학과 죽어 넘어진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검을 빼앗기고 무림인들이 넘어지기까지 모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잔인한 놈! 아무 관계도 없는 선량한 무림동도들까지 죽이고 있구나!”
경재학이 다시 한 자루의 검을 취해 자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한 내력을 검에 실어 힘껏 던졌다.
츠츠… 꽈꽝!
검은 백리영의 영월검보다 못했던지 경재학의 손에서 떠난 즉시 폭발을
일으켰다.
검의 파편이 또다시 장경선에게 날아갔다.
이번에 부서진 검은 영월검보다 더 잘게 부서져 마치 한 무더기 암기를
뿌린 것 같았다.
“미친 놈!”
가만 보니 경재학이 검을 부수어 날리는 것에 재미를 들린 모양이다.
자기가 피하면 뒤에 서 있던 무림맹 고수들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장경선도 어차피 다른 사람들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악!”
장경선의 뒤편에 서 있던 무림인들이 또다시 죽어갔다.
워낙 잘게 부서진 검 조각인지라 이번에는 그 숫자도 두 배나 많았다.
“네놈은 이곳에 있는 무림인들을 죄다 잡을 생각이냐?”
장경선이 소리치며 경재학을 향해 날아올랐다.
경재학은 지치지도 않는지 또다시 한 사람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경선의 근처에 있던 무림인들이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씁쓰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경재학이 장경선에게 대꾸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쥐새끼 같은 놈! 그러고도 네놈이 맹주라고 할 수 있겠느냐!”
경재학의 평생에 이와 같은 모욕은 처음이다.
천하제일가의 가주이며 무림맹의 맹주로 저런 소리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경재학의 턱이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피하기만 한다면 장차 무림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 마음을 굳힌 경재학이 장경선에게 말했다.
“네가 정정당당하게 원수를 갚고자 한다면 나에게도 정식으로 상대할
기회를 줘야 할 것이다.”
“오냐! 네놈이 말하는 정식이란 것이 무엇이냐?”
경재학이 아직도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의 지존검을 가리켰다.
“본 맹주의 절학은 검법인데 보다시피 지존검이 아니면 펼칠 수가 없다.
너는 나에게 감히 지존검을 넘겨줄 수 있겠느냐?”
장경선은 이미 경재학이 지존검으로 펼친 이기어검을 막아냈다.
이제 와 다시 지존검으로 무슨 수작을 벌이더라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크하하핫! 그렇게 하도록 해라. 그러나 지존검이 아니라 네 아비의 무상검
(無上劍)으로 덤빈다 해도 오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경재학이 손에 쥐고 있던 청강장검을 원주인에게 던져 주고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갔다.
지존검에 묻은 흙을 털어낸 경재학이 천천히 돌아섰다.
언젠가 오늘과 같은 날이 올 것에 대비하여 무검(無劍)을 연성했다.
무검은 손에 든 검을 잊는 경지이니 지존검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장경선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서는 지존검이 필요했다.
지존검을 움켜쥔 경재학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을 편안히 내리고 서 있는 모양새가 마치 ‘나는 여기 있으니 올 테면
오라’ 는 식이다.
지금까지 쫓겨 다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자세였지만
장경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기를 흘리며 바라보고 있던 장경선이 경재학에게로 달려가며 두 손을
휘둘렀다.
섬전십이장의 장풍(掌風)이 경재학에게 몰아쳐갔다.
콰콰콰!
장풍이 막 경재학의 몸을 때리기 직전이다.
경재학이 지존검으로 장경선을 천천히 찔러갔다.
동귀어진이라도 하려는지 몸 가까이 이른 장풍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헛!”
돌연 공격하던 장경선이 몸을 비틀었다.
그뿐 아니다.
장경선은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듯 몸을 비틀고 난 후에도 연거푸
세 걸음이나 옆으로 이동했다.
어찌나 그 움직임이 빨랐던지 원래 그렇게 움직이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기세 좋게 공격하던 사람이 미쳤다고 물러나 몸을 사리겠는가!
장경선이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길게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가늘게 나 있는 혈선이 보인다.
검보다 훨씬 앞선 무형(無形)의 검기에 혈마기마저 깨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여주던 이기어검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경재학이다.
자신의 필살기가 먹혀들어 장경선이 뒤로 물러났음에도 한숨을 쉬며
침통한 표정이었다.
본래는 심장을 꿰뚫었어야 하는데 어깨를 찌르는 데 그쳤다.
그데가 살갗에 상처를 내지도 못했으니 자신의 무검으로도 장경선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교활한 놈! 죽여주마!”
방심하고 있다가 당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 장경선이 오행지기를
끌어올렸다.
기의 태풍이 몰아쳤고 삽시간에 장경선이 주변은 진공 상태로 빠져들었다.
고오오오!
전각의 기둥이 흔들리고 지붕이 들썩거렸다.
살갗을 따갑게 할 정도로 강한 기운이 땅거죽마저 흔들고 있었다.
“끄으으…”
내공이 약한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귀를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뒷걸음응로 물러나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서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가랏!”
장경선의 두 손에서 무형의 장력이 쏟아져 나왔다.
오행지기를 담은 절정의 회선장(回線掌)이어다.
경재학이 지존검으로 무형의 장력을 비스듬히 받아냈다.
그러나 무검의 절학으로 회선장을 걷어냈지만 그 속에 담긴 오행지력
(五行之力)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크헉!”
오행지기가 검신을 타고 경재학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휘청거리며 물러나는 경재학에게 튕겨났던 회선장이
다시 날아들었다.
퍼엉!
경재학이 피를 토하며 뒤로 길게 날아갔다.
털썩.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경재학이 지존검을 의지해 다시 일어섰다.
입술로는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지만 얼굴 전체에 깃든 것은
묘하게도 웃음이었다.
“쿨럭… 크흐… 이것이 바로… 쿨럭… 오행지력이었구나… 과연…”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냐?”
장경선이 웃고 있는 경재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크흐흐… 어서… 죽여라…”
자기가 만든 오행혈마인에게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통탄해할 경재학이 아니다.
‘나를 죽이고 내가 경영하던 세상을 모두 파괴해라!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경재학이 흐려져 가는 눈으로 장경선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온통 붉은 것을 보니 눈에도 피가 가득한 모양이다.
장경선의 오행지기가 짜릿한 여운을 남기며 단전(丹田)을 갉아먹는 느낌이
든다.
습관적으로 운기를 해보려 했지만 단전은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떨구고 바라보니 돌아온 회선장에 맞은 곳이 단전이었던 모양이다.
길게 찢어진 하복부에서 솟구친 피가 땅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장경선이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죽어가면서도 연신 피를 게우며 웃고 있는 경재학의 얼굴을 보니 짜증이
밀려들었다.
“추악한 머리통을 날려주마!”
장경선의 손이 막 경재학의 머리 위에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검 한 자루가 날아들어 장경선의 다리를 쓸어갔다.
깜짝 놀란 장경선이 공중으로 훌쩍 몸을 띄워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세 자루의 검이 날아들었다.
‘무림맹에 이 정도의 고수가 남아 있었던가!’
하공에서 섬전십이장으로 세 자루의 검을 쳐낸 장경선이 그 여파로
경재학에게 조금 떨어지게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장경선의 정면으로 네 사람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 내렸다.
스스스슷.
상대를 확인한 장경선이 뜻밖이라는 듯 다시 몇 걸음 물러섰다.
뒤로 물러나 있던 무림맹의 무사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새롭게 나타난 사람들을 바라보던 무림인들의 눈에 존경과 흠모의 빛이
떠올랐다.
“신검(神劍) 경영자(經營子)께서 오셨다!”
장경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바로 경재학의 부친이자 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경영자였다.
“네가… 오행혈마인이 되었다니….”
경영자가 안쓰럽다는 듯 장경선을 바라보았다.
경영자는 아직 장경선과 아들의 일을 알지 못한다.
어쩌다가 경재학과 원한을 맺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혹시라도 아들의 치부가 드러나게 된다면 곤란하다.
장경선은 착잡한 눈빛으로 경영자를 바라보았다.
낙양으로 분가하기 전까지 식솔들을 자상하게 돌봐주던 경영자였다.
그러나 운명은 이미 그들을 원수로 갈라놓았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마음을 정한 장경선이 경영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지만 당신들의 천하제일가와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게
되었소.”
“그런가? 우리 천하제일가도… 무림공적은 용서하지 않는다.”
잠자코 듣고 있던 장경선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당신들 네 사람이, 감히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장경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영자의 곁에 있던 세 사람이 검을
뽑았다.
차차창!
“무례한 놈!”
그러나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초인적인 장경선의 무위(武威)를 한차례 경험한 까닭이다.
경영자가 탐스럽게 자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어찌 우리 네 사람이 너를 막을 있겠느냐? 우리는 너를 위해 사람들을
조금 더 데리고 왔다.”
경영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사방에서 무림인들이 뛰어나왔다.
장경선이 유심히 보니 뒤늦게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백여 명으로 하나같이
기도가 출중하다.
‘저들이 말로만 듣던 정주 천하제일가의 식객(食客)들이구나.’
평소 무림의 기인(奇人)들과 교분이 두텁던 경영자는 은거한 뒤에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주에 내려와 천하제일가의 손님으로 머무르며 지냈는데,
말이 손님이지 경영자의 수하를 자처하며 천하제일가로 편입된 사람들
이었다.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정주까지 가야 하는가로 고민하던 참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천하제일가의 씨를 말려주마!”
“쳐라!”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천하제일가와 오행혈마인 장경선의 격돌이 시작된 것이다.
콰콰콰콰!
장경선은 천하제일가 전부를 남김없이 죽이겠다는 듯 전신의 공력으로
사방으로 기(氣)의 그물을 쳤다.
천하제일가의 사람들은 장경선과 같은 공력은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의 태풍에 휘말려 허둥대다가 장력에 맞아 죽어갔다.
천하제일가의 사람 오십여 명은 싸움이 시작된 지 한 식경 안에 죽임을
당했다.
상대적으로 공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오십여 명은 장경선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어서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경영자가 어이없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땅에 쓰러진 식솔 오십여 명이 보인다.
지금까지 수많은 싸움을 치렀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해보기도 처음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오행혈마인에 대한 소문은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었다.
‘이런 자를 고작 백여 명으로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니…’
경영자가 탄식을 터뜨리는 동안에도 두세 사람이 쓰러지고 있었다.
장경선에게는 검(劍)과 도(刀)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경영자 자신의 무상검도 몇 번이나 튕겨났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 끔찍한 살육을 누가 막아주어야 하는데…’
경영자의 간절한 바람을 하늘이 들어준 것일까?
사방으로 장풍을 날리던 장경선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한순간 마치 석상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검과 도가 빗발치듯 몰아쳤다.
카캉! 챙!
날아든 병장기에 몸을 찔리면서도 장경선은 끝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의외의 사태에 놀라면서도 경영자는 숨을 조절했다.
장경선의 넋이 나간 틈을 이용해 절기를 발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경영자가 검에 내력을 다 불어넣기도 전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갑자기 장경선의 몸이 서너 개로 늘어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순간,
각각의 장경선은 사방으로 흩어져 장력을 날려댔다.
펑! 펑! 펑! 펑!
잠시 후 늘어났던 신형이 하나둘씩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경선의 모습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 더 이상 그의 주변에 도검
(刀劍)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까이에서 공격하던 절정고수 대여섯 명이 모두 나가떨어진 것이다.
“아아…”
신검 경영자가 절망의 탄식을 터뜨렸다.
경공이 극에 달하면 이형환위보다 더 높은 경지라는 환영분체술(幻影分體術)
을 펼칠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오늘 장경선이
보여준 것이다.
오행지력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마당에 이 무슨 통탄할 일이란 말인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경영자가 검과 하나가 되어 장경선에게 날아갔다.
죽음을 각오한 경영자의 신검합일이 두려워서 일까?
장경선은 뒤로 십 장이나 물러나 버렸다.
삽시간에 목표를 잃은 경영자가 허공에서 보니 멀리 떨어져 있는 장경선이
보인다.
그런데 장경선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
모욕을 느낀 경영자가 다시 검끝을 돌려 장경선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장경선은 다시 몸을 날려 피한 뒤 여전히 두리번거릴 뿐이다.
그제야 경영자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정을 하고 자세히 바라보니 장경선의 표정이 야릇하다.
‘놈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단 말인가?’
한숨을 돌린 경영자는 재빨리 경재학을 감싸 안았다.
경영자의 주변으로 천하제일가의 고수들이 물샐틈 없이 에워쌌다.
“재학아…”
“쿨럭… 으으… 아버님…”
경재학은 경영자의 품에 안겨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한 뒤 정신을 잃어
버렸다.
경영자는 즉시 경재학을 안아 올렸다.
“놈의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 이 자리를 피해야겠소.”
“알겠습니다.”
천하제일가의 사람들이 경영자와 함께 천천히 이동을 했다.
경영자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장경선이 눈을 돌리면 경재학은 구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늘은 경영자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했다.
장경선의 몸이 경영자를 향해 천천히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서둘러라!”
경영자가 버럭 소리를 지른 뒤 장경선을 향해 신검합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경영자의 검보다 조금 빠르게 장경선을 향해 몰아쳐 가는 권풍
(拳風)이 있었다.
콰콰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장경선의 몸이 다시 돌아갔다.
동시에 장경선의 두 손바닥이 권풍을 마주 해갔다.
섬전십이장으로 날린 열두 개의 장풍이 권풍을 향해 날아갔다.
꽈꽝!
권풍과 장풍이 만나는 순간,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주변에 있던 전각이
바스러져 날아갔다.
소리가 어찌나 컸든지 근처에 있던 천하제일가 고수들은 고막이 터져
귀에서 피가 줄줄 흘리고 있었다.
뜻밖의 충격을 받은 장경선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천혈마 장소로구나!”
과연 저 멀리서 두 팔을 대붕(大鵬)처럼 벌리고 날아오는 사람은 장소였다.
장소가 천마파천권으로 장경선의 공력을 시험한 뒤 곧바로 들이닥친 것이다.
“크하하핫! 네가 섬전수 장경선이냐?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더냐!”
장소의 뒤를 따라온 마교 고수 십여 명이 장경선의 뒤에 길게 늘어섰다.
장소를 위해 장경선의 퇴로를 차단한 것이다.
장경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경재학과 천하제일가를 모두를 끝장냈을 것이다.
그러나 장소가 나타났으니 경재학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한다.
한 번의 맞닥뜨림이었지만 장소의 공력은 자신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나의 장력을 받아낸 뒤에나 허튼소리를 해라!”
장경선이 양 손바닥을 정면으로 쭉 뻗었다.
콰아아아!
두 줄기 장풍이 꿈틀거리며 장소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장소가 다시 천마파천권으로 장풍을 때려갔다.
그러나 장풍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스스로 몸을 비틀어 장소의 가슴에
박혔다.
퍼펑!
“크음…!”
충격을 이기지 못한 장소의 상체가 뒤로 꺾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장소는 다른 사람들처럼 내상을 입지 않은 듯 오히려 한 걸음 걸아나왔다.
“크흐흐,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 마공이 아니면 나의 몸에 흠집도
낼 수 없을 것이다.”
장소가 자연스럽게 손을 아래로 휘둘렀다.
오행지기 무극토(無極土)를 시전한 것이다.
장경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의아한 얼굴로 장소를 바라보았다 .
장소의 손에서는 어떤 변화도 읽을 수 없었다.
‘대체 저놈이 왜 손을 휘둘렀을까?’
장소쯤 되는 자가 허튼 손짓을 할 리가 없다.
장경선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온몸이 땅 밑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헉!”
깜짝 놀란 장경선이 두 발을 쾌속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첨벙거리며 흙만 요란하게 튈 뿐 몸은 떠오르지 않았다.
장경선은 그제야 이것이 오행의 변화임을 알아차렸다.
“어디서 감히!”
휘우우웅!
장경선의 주위로 기(氣)의 태풍이 회오리처럼 형성되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주변의 흙들이 빨려들어 거대한 흙 기둥처럼
보일 정도다.
이미 경공의 극치에 이른 장경선은 소용돌이치는 흙을 밟고 하늘로
솟구쳤다.
흙 기둥은 거의 십 장이나 수직으로 솟아 있었다.
마침내 흙 기둥 위까지 도달한 장경선은 목금기(木金氣)로 흙을 굳힌 뒤
겨우 두 발로 버티고 섰다.
“어디 그렇다면 이것도 막을 수 있겠느냐?”
장소가 조롱하며 다시 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장경선이 서 있던 흙의 기둥에서 화염(火焰)이 솟구쳤다.
장경선은 오행혈마기로 전신을 보호한 뒤에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미 장경선의 옷과 몸은 크게 그슬려 있었다.
흙 탑에서 뛰어내린 장경선이 막 지면에 내려선 순간이다.
장소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천마폭열장(天魔暴熱掌)을 펼쳤다.
뜨거운 기운이 전신으로 밀려들자 장경선은 본능적으로 섬전십이장을
펼쳤다.
두 사람 다 오행지기를 운영하여 펼친 장력이라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대폭발이 일어났다.
꽈쾅!
충돌로 장소의 화기(火氣)가 담긴 천마폭열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근처는 삽시간에 불구덩이가 되고 말았다.
전각은 물론 천하제일가와 무림맹의 고수들조차 불길을 피하지는 못했다.
화르르륵!
“끄아아악!”
“으악!”
장소가 감탄한 눈으로 장경선을 바라보았다.
명오와 제갈위기를 상대할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상대가 오행지기를 두 개나 흡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더욱 장경선의 오행지기가 탐이 났다.
저 두 개의 오행지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면 천하의 주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차례 위기가 지나가자 장경선은 뒤로 물러나 천천히 호흡을 조절했다.
울컥거리며 목구멍으로 피가 올라왔지만 장경선은 억지로 삼켰다.
먹이를 눈앞에 둔 짐승처럼 장소의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자기가 내상을 입은 줄 알면 더욱 기를 쓰고 덤빌 것이다.
장경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소리쳤다.
“나의 오행지기를 가져가고 싶다면 너도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크하하핫! 오냐! 어디 한번 마지막까지 버둥거려 보아라!”
장소가 크게 웃으며 장경선을 향해 달려갔다.
어차피 둘 중에 하나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장소는 무림맹의 고수들이 보는 앞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장경선이 장소를 향해 두 손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
그러나 요란한 동작과 달리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나 느낌이 없었다.
“헉!”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장력(掌力)이라고 생각한 장소가 재빨리 뒤로 몸을
뺐다.
만약 정말 그런 장력이 있다면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속았다!”
어느 틈에 장경선은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장소가 욕설을 퍼부으며 미친 듯이 뒤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신형은 한줄기 선(線)으로 변해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행지기의 주인인 장소가 사라지자 치솟던 불길은 즉시 수그러들었다.
천하제일가와 무림맹의 고수들이 넋을 잃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가까이에서 오행혈마인의 무공을 구경한 사람은 거의 없다.
저 오행혈마인들을 상대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게다가 이제 저 두 사람이 만났으니 그간 무림을 떠돌던 전설도 재현될
것이다.
– 오행혈마인 다섯이 하나가 되면 지옥이 열린다.
***
경영자는 오십여 명의 절정고수들을 데리고 무림맹에 남기로 했다.
무림맹 자체의 인원으로 경재학을 지키는 것은 무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경재학을 정주로 옮기고 싶었지만,
당장 무림맹에서 니간다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무림맹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칠대문파의 장로와 그들의 제자다.
그러나 천하제일가에서 온 고수들은 이미 은거한 전대의 고인(高人)들
이었다.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무림의 세계는 비교적 간단한 법칙에 의해 지배
당한다.
그것은 ‘법(法)보다 주먹이 가깝다’ 라는 것인데,
무림맹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전대 고수들이 대거 등장하여 어영부영 무림맹을 장악하고 만 것이다.
그날 밤 칠대문파의 장로들은 한 자리에 모여 긴급 회의를 열었다.
잘못했다가는 천하제일가에 무림맹을 고스란히 내어주게 생겼기 때문
이었다.
현재 무림맹의 운영을 위해 파견된 칠대문파의 장로급들은 소림사의
고정선사와 무당파의 이원지 도인(道人), 화산파의 벽운(碧雲)과 곤륜파의
구마 상인(臼磨上人), 아미파의 원로(元老) 영진사태(榮進師太)와 점창파의
망아도인(忘我道人) 등이었다.
삼 년 전 무림맹은 대대적인 세대 교체 작업을 벌였다.
멸문한 사대문파 출신의 고수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고,
칠대문파에서는 새로운 고수들을 파견했다.
소림사의 고정선사와 곤륜파의 구마상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롭게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곤륜파의 구마상인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과거에 구대문파가 다 모여 있을 때는 신진사대 문파의 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다시피 했지만 이제는 다른 문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욱일승천하던 신진사대문파 중에 이 개 문파가 삼 년 전 멸문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으니 구마상인은 자신이 먼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러분,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해도 천하제일가가 무림맹의 주인
행세를 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소?”
조심스런 구마상인의 말에 이원지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습니다. 천하제일가가 무림맹을 좌우하게 내버려 둔다면… 칠대문파의
수치일 겁니다.”
이원지 도인의 말이 끝나자 나머지 사대문파 사람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이 세워진 이래 단 하나의 단체가 전체를 장악한 역사는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장로회의 힘만으로는 무림맹을 운영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봅니다. 맹주께서 크게 부상을 입어 의식이 없으시고, 천하제일
가가 무림맹에 상주하고 있으니… 이제는 장문인들이 오셔야 사태가 수습
되지 않겠습니까?”
고정선사의 말에 영진사태가 조용히 되물었다.
“선사의 말씀은 우리가 장문인들을 모셔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섬전수 장경선이 맹주와 천하제일가를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천하제일가가 무림맹에서 떠날 리가 없겠지요. 설상가상(雪上加霜)
으로 마교 교주 장소가 장경선을 노리고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 터이니…
언제 어디서 무림맹으로 불똥이 튈지 모릅니다. 그러니 장문인들께서
오셔서 천하제일가와 오행혈마인들의 문제에 나서주셔야만 원만한 해결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제야 영진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들은 천하제일가에게 떠나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지시를 내릴
수도 없다.
워낙 천하제일가에서 나온 사람들의 배분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에게 뭔가를 주장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장문인들 정도
였다.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화산파의 벽운이 이원지 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사의 말씀대로 우리 모두 장문인들을 모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대로
있다가 신검 노선배의 지시를 받들어야 할 상황이 온다면…”
벽운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림의 일대기인이라는 신검 경여자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행혈마인이 무림의 공적(公敵)인 것은 틀림없으나 어제오늘의 일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왠지 내막을 알 수 없는 천하제일가의 은원에 휘말려 든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날 밤 늦게까지 칠대문파 장로들은 장문인들을 모시는 시기와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한편 같은 시간 신검 경영자는 숙소에서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재범이 찾아와 지금 칠대문파 장로들이 대책 회의를 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허어! 아무리 내가 일선에서 물러섰다고는 하나 너무들하는구먼.”
삼십 년 전만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할까요?”
경재범이 경영자의 안색을 살폈다.
만약 신검이 그들을 모두 가두어두라고 하면 그 말에 따를 작정이다.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은거에 들어갈 터이니 뒤에서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천하제일가의 고수들이 무림맹을 접수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장문인들이 몰려와서 무림맹에서 떠나라고 하든지,
혹은 자기들 멋대로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내리게 되면 입장이 곤란해진다.
지금은 떠날 수도 없고, 무림맹의 이름으로 오행혈마인을 추격하라고 지시
하면 따를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내버려 두거라. 어차피 나약한 장문인들이 오리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괜히
나중에라도 천하제일가가 칠대문파의 제자를 감금했다는 소문이라도 돌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오행혈마인의 문제에 직접 나서지 않으려 한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 자신이 무림맹에 나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있으니 말로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네.”
경재범은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기의 생각은 신검과 조금 달랐다.
장문인이 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부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체 그들은 장문인이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그보다 재학이의 상태는 어떠하더냐?”
“갈비뼈가 내려앉은 것이야 그런대로 괜찮으나… 내장이 뒤틀리고 기해혈
(氣海穴)도 파괴되었습니다.”
“어허…”
경영자가 장탄식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무공을 사용할 수가 없는 몸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무림인에게 죽음보다 고통스런 일이다.
무공이 높았던 자일수록 상실감은 더욱 클 것이다.
아들이 느낄 절망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우리가 무림맹에서 나가는 것은 장경선과 장소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가에 달려 있다. 경계를 강화하고 주변을 탐문하여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알아보거라.”
“알겠습니다.”
경재범이 돌아가자 경영자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서늘한 밤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감당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아들은 왜 피하지 않았을까?
천하제일가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장소가 장경선을 없애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도 대체 왜 장경선이 천하제일가에 원한을 품게 되었을까?
모든 것은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이 깨어나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영자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이유야 어떻든 무림의 절대고수였던 아들은 재기 불능이 되고 만 것이다.
***
그 무렵 정주(鄭州)의 춘원객점(春園客店)에 짐을 풀고 천하제일가를 관찰
하던 장염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무림맹에서 나온 사람은 계속해서 장경선이 정주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났지만 장경선은 물론 사파(邪派)의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는다.
만약 장경선이 정주에 있다면 마교의 고수들도 더러 눈에 띄었을 것이다.
‘장경선이 벌써 잠적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장소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강호에 나올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모습을 드러낸 장경선이다.
그런 장경선이 경재학과 천하제일가가 건재한데 벌써 사라질 리가 없다.
무림맹의 고수가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답답해서 하남성
곳곳을 뒤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춘원객점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상비검 벽남천이 가끔씩
찾아와 장경선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장염은 멀찍이서 천하제일가를 관찰하거나 장경선이 목격되었다는 지역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봄바람에 들떠서 하루도 가만히 있지 않던 소걸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었다.
“헉헉! 스승님!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일이냐?”
소걸이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객점에 들른 무림인들이 그러는데 섬전수가 무림맹에서 난동을 부렸
답니다.”
장염이 깜짝 놀라 소걸을 바라보았다.
정주에 있다던 장경선이 무림맹에 나타났다니 어이가 없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냐?”
“벌써 사흘 전의 일이랍니다.”
“그럴 리가… 사흘 전이라면 벽 대협이 찾아왔던 날이 아니냐? 그날
벽 대협은 장경선을 망산(邙山)에서 본 자가 있다고 하질 않았느냐?”
소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스승님 말씀은 맞는데요. 여하튼 지금 무림맹이 발칵 뒤집어졌답니다.
맹주도 죽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하던데요?”
“허어… 또 다른 이야기는 없느냐?”
“신검 경영자가 도와줘서 겨우 위기를 넘겼답니다.”
“어떻게 그런…”
장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소걸도 덩달아 일어섰다.
“지금 무림맹으로 가시려구요?”
“아니, 그보다 먼저 확인할 것이 있다. 내가 돌아오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거라.”
“네에.”
소걸의 대답을 들은 장염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장염의 뒷모습을 보며 소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급하면 무림맹으로 먼저 가야 하지 않나 싶어서다.
스승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소걸이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따분한 일상의 반복보다는 스승과 함께하는 여행이 차라리 즐거운 것이다.
객점에서 나온 장염은 경공을 펼쳐 한달음에 천하제일가로 달려갔다.
자기 추측이 맞는다면 정주에 와서 지금까지 속았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벽남천은 계속해서 장경선이 정주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시간 장경선은 물론 자신이 지키고 있던 천하제일가도 무림맹에
있었다.
하지만 벽남천은 계속해서 장경선이 정주에 있으며 천하제일가를 노리고
있다고 했다.
벽남천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하제일가는 주력을 무림맹으로 빼돌리지
않았어야 한다.
당장 장경선이 자기들을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무림맹으로 고수를
보내겠는가!
자신이 도착한 뒤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으니 최소한 그 이전에 자리를
비운 것이 된다.
그리고 신검 경영자가 고수들을 이끌고 무림맹으로 간 게 사실이라면,
적어도 무림맹과 천하제일가는 장경선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무림맹에서 나를 따돌리려 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무림맹에서 천하제일가의 이동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선은 신검 경영자와 그를 따르는 절정고수들이 정말 이곳에 없는지를
확인해야겠다.’
천하제일가에 도착한 장염은 십여 개의 전각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천하제일가의 사람에게 묻는 것이 가장 빠르겠다.’
장염은 화려한 전각을 경비하고 있는 무사의 등 뒤로 소리없이 다가갔다.
“으헉!”
내전을 경비하던 동인지(東認知)는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자 흠칫 놀랐다.
낙양의 천하제일가가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라 더 놀랐는지 모른다.
즉시 몸을 돌리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땀을 흘리고 있는 동인지의 귓가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몇 가지만 물어봅시다. 가주께서는 이곳에 계십니까?”
“으음…”
상대의 음성을 듣는 순간 벌렁거리던 가슴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오행혈마인이라면 이런 느낌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웬지 음성에는 호감이 담겨 있어 가주를 해하려고 찾아온 사람
같지도 않다.
게다가 어차피 가주는 이곳에 없으니 바른대로 말한다 해도 손해 될 것은
없다.
“가주께서는 오래전에 고수들을 이끌고 무림맹으로 가셨소.”
“왜 갔는지 알 수 있습니까?”
“맹주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소.”
“고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상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던 동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까지 나를 잡아둘 것이오?”
“…”
미풍(微風)이 불어와 동인지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걱정스럽게도 상대는 여전히 말이 없다.
다소 소심한 동인지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상대의 목소리가 아무리 부드럽다 해도 그는 침입자였다.
이대로 허망하게 죽는 건 아닌가 생각하자 처와 자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줄 것을…’
흙냄새를 실은 바람이 다시 한 번 뜰을 가로질렀다.
봄 햇살이 등 뒤로 그림자를 길게 만들 때까지 동인지는 홀로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다.
장염은 오래전에 객점으로 돌아갔지만 가주의 처소 앞에 홀로 남은
동인지는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