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24)
7장. 검은 고양이 눈을 감다
경재학은 내외상을 입고 쓰러진 지 열흘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나마 천하제일가에서 좋다는 약은 다 쓴 덕분이다.
아마 천하제일가가 조금만 늦었어도 경재학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재학은 살아난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경재학은 자신이 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장경선에게 그렇게 당하고 살았다는 것 자체가 더 신기한 일이었다.
경재학은 그날 마지막으로 본 부친의 모습이 환영인 줄 알았다.
죽음에 직면해서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보니 경영자가 돌보아주고 있었다.
경재학은 대내외적인 모든 일을 경영자에게 맡긴 뒤 숙소를 비밀리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
경영자와 무림맹의 사람들에게는 장경선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곳에서 경재학은 비비재단의 수하들과 함께 마지막 반전(反轉)을
준비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장경선과 장소를 찾는 일이지만 장염과 칠대문파를 견제
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했다.
어느 한쪽이라도 실패했다가는 지금까지 벌여온 일만으로도 자멸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 경재학의 바람이 있다면 부친과 함께 명예롭게 정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실내가 조금 답답하다고 느낀 경재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포근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 밀려왔다.
계산을 해보니 무림맹의 모처로 숙소를 옮긴 지 이십여 일이 지났다.
열흘쯤 전에 장염이 무림맹으로 왔지만 경재학은 자기가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나가지 않았다.
수하들의 말로는 그가 사방으로 다니며 상비검 벽남천을 찾는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헛수고에 그치고 말 것이다.
벽남천은 비비재단의 수하로 무림맹에는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뒤로 육대문파 장문인들이 몰려와 자신을 찾았지만 역시 만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몰락하기만을 바래왔다.
그들에게 폐인이 된 모습을 보여주기란 죽기보다 싫었다.
겉으로는 애석한 척 위로의 말을 하겠지만 그 모두가 위선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속으로는 희희낙락(喜喜樂樂)하고
있을 것이다.
‘장염이 무림에 있으니 이제 나는 있으나마나 라고 생각하겠지.’
감히 신검 경영자가 와 있는데도 무림맹으로 몰려온 것은 그 때문이리라.
부친이 칠대문파가 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장염과
그들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구대문파가 뭉쳤다.
그것이 이제는 장염을 중심으로 칠대문파가 모인 것으로 바뀐 것뿐이다.
만약 장염이 자신처럼 무상(無上)의 권력을 얻게 되면 그때도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그를 좋아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칠대문파 사람들은 세력과 욕심이 없어 보이는 장염을 이용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장염이 지금이라도 자기 세력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칠대문파는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장염을 견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미련한 놈,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면서 협객인 양 날뛰니…’
어차피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 그리고 강한 자와 약한 자.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마지막에 실패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잃은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하늘은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늘이 나를 방해한담녀 나도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라는 것을 비웃어
보이겠다.’
경재학이 높고 푸른 하늘을 잠시 응시하다가 속삭였다.
“자리에 있느냐?”
어디선가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전 같으면 누가 어디에 은신해 있는지 알고 있을 터지만,
지금은 수하가 대답을 해도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말씀하십시오.”
“나를 미끼로 장경선을 불러들여야겠다. 우선 이매(夷昧)를 준비시키고
호북성 무한(武漢)에 장소가 천마후를 데리러 간다는 소문을 퍼뜨려라.”
“존명.”
더 이상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수하는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다.
부상을 입은 뒤로는 곁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답답하기만 하다.
괜히 눈치를 살피는 주변 사람들도 부담스럽다.
장경선과 장소의 문제를 끝내면 당장 정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염보다 먼저 장경선과 장소를 만나게 해야 한다.
처음에는 장경선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다르다.
역천(逆天)의 마물(魔物)이라는 오행혈마인으로 이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과 빌어먹을 천리를 마음껏 조롱할 것이다.
***
무림맹에 들어온 장염은 마침내 누군가 계획적으로 장경선에게서 자기를
떼어놓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무림맹의 사자를 자처하던 상비검 벽남천은 가공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장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설마 경재학이 그런 짓을 벌였을까?’
경재학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지만,
자기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 쉽게 단정할 수도 없다.
어쩌면 그는 마교의 고수일지도 모른다.
장소가 수하들을 풀어 교란 작전을 벌이고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마교의 고수라고 하기에는 기도가 단정했고,
무림맹의 사정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상비검 벽남천에 대해서는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프다.
마침내 장염은 그가 누구이며 왜 자신을 속였는지에 대해서 잊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것은 장경선과 장소가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장경선이 아니라면 장소라도 찾아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무림맹의 정보 체계가 엉망으로 꼬여 버려 진위(眞僞)를 구별하기 어려운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칠대문파의 제자들이 간혹 전해주는 것뿐이었다.
장염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다.
“장 사조(張師祖), 안에 계십니까?”
목소리를 들어보니 춘양진인의 제자 이원지 도인이다.
문을 열고 나가자 가만히 서 있던 이원지 도인이 허리를 숙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장문인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
장염이 묵묵히 이원지 도인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장문인들이 무림맹의 운영을 위해 회의를 열 것이라고 하더니
오늘이 그날인 모양이다.
“혹시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것 때문입니까?”
이원지 도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 사조가 장문인들의 회의에 나가지 않으려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검 경영자와 관계된 문제를 의논해야 하니 장 사조가
있어줘야 한다.
신검 앞에서 자연스러울 수 있는 사람은 장 사조 밖에 없다.
장 사조의 기도가 천인합일(天人合一)하여 그런 것도 있지만,
선대로부터 신검의 도움을 받아왔기에 칠대문파는 어느 정도 제약이 따랐다.
“부담스러우시면 그냥 자리만 지켜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신검께서도
선배의 자격으로 회의에 초대되실 겁니다.”
장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검 경영자를 선배의 자격으로 부른다는 것을 보면,
오늘 회의는 무림맹의 운영권을 두고 벌이는 장문인들과 신검의 신경전인
셈이다.
장문인들은 신검의 배분과 지고한 무공 때문에 자신을 곁에 두려고 한
것이다.
“먼저 가세요.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이원지 도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장 사조가 함께 간다니 이미 일은 끝난 셈이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원지 도인이 돌아간 뒤에도 장염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자리이지만 무림맹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무림맹의 체계가 허물어진 틈을 타서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를 온갖
방해 공작이 난무했다.
게다가 천하제일가의 사람들과 칠대문파 출신의 고수들,
그리고 시험을 거쳐 무림맹의 식구가 된 사람들이 제각각 따로 움직이고
있어서 이제는 누가 무엇을 지시해도 자신과 이해 관계가 얽힌 사람의 말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다.
안에서 듣고 있던 소걸이 답답하다는 듯 방문을 열고 나왔다.
“스승님, 가시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렇게 보이느냐?”
“아님 말구요.”
“하하! 녀석아! 어른이 되면 싫으면 자리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는 때가
있단다.”
“에구, 어른은 좋은 게 아니구나.”
“길의 끝에는 또 다른 길이 있어서 말이지, 사람은 언제나 배우고 적응하며
살아가게 되거든.”
“스승님은 지금 뭘 배우고 계신데요?”
“나는 화동(和同)을 공부하고 있단다. 좋은 것과 싫은 것 모두를 한번 받아
들여 보는 거지.”
“에이! 저는 좋은 것만 받아들일래요.”
“그러냐? 너의 관상(觀相)을 보건대… 후훗! 쉽지 않을 것이다.”
“헛! 스승님이 관상을 볼 줄 아세요? 어떻게 보는지 저도 가르쳐 주세요.”
“그건 배워서 뭐 하게?”
“나중에 처자들에게 밥이라도 빌어먹을 일이 생기면…”
장염이 소걸의 머리를 쥐어박은 뒤 마루로 내려갔다.
“이놈아, 나누어 주면서 살 생각을 해라.”
“…”
멀어져 가는 장염을 향해 소걸이 소리를 빽 질렀다.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그리고 얻어먹는 것도 다 마음의 공부라구요!”
모퉁이를 돌던 장염이 손을 머리 위로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알아들었다는 신호다.
***
장로들과 장문인들이 마침내 한 자리에 모였다.
며칠 전에도 일차 회동을 가졌지만 그때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아직 천하제일가를 향해 무엇인가 요구하기에 이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각오를 단단히 한 듯 장문인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곤륜파의 구마상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앉아 있는 장염을 힐끔 쳐다
보았다.
지금까지 장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곤륜파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곤륜파는 장염과 다소 어색한 관계였다.
“곤륜파가 워낙 멀리 있는지라 장문인께서 오시는 데 시일이 제법 걸릴
것입니다.”
조심스런 구마상인의 말에 의사청(議事廳)에 모여 있던 중문인들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룡진인의 성격으로 볼 때 이런 일에 나 몰라라 할 사람이 아니다.
구마상인이 머뭇거리자 화산파의 장문인 상유천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화답했다.
“허허헛! 알다마다요. 그나저나 무림맹의 장로들께서 그토록 화급히 청하신
사유나 들어보십시다.”
사전에 약속을 한 장로들이 일제히 고정선사를 바라보았다.
장로들의 시선이 모아지자 고정선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빈승이 그간의 일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사를 나누며 다소 떠들썩하던 좌중의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제 무림맹의 주인들이 모두 모였으니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칠대문파라고 해도 천하제일가와 오행혈마인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이십여 일 전 장경선과 장소가 무림맹에서 한차례 격전
을 벌였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데, 아직 이렇
다 할 소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섬전수 장경선입니다. 장소가
나타나기 전까지 장경선은 무림맹에 잠입해 천하제일가 사람들을 살해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맹주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는데…
모두가 원한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삼 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천하제일가와 맹주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듣고 있던 장문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께서는 그날 장경선에게 당해 무공을 잃은 상태입니다. 맹주를 구한
사람들은 천하제일가의 선배들인데… 그분들은 장경선에게서 맹주를 보호
하신다는 명목으로 무림맹에 남으셨습니다.”
고정선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헛기침을 몇 번 하던 고정선사가 계속해서 말했다.
“문제는 무림맹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맹주
께서 쓰러지신 뒤로는 무림의 선배들에게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장로회에서는 장경선과 장소의 소재를 파악하려 했지만 천하제일가에서
모든 무림맹 고수들을 경계하는 일에 투입시켰기 때문에…. 지금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춘양진인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천하제일가의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지금은 장경선과 장소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주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가만히 듣고 있던 원정선사가 춘양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봐야지요. 오행혈마인이 하나가 되면 무림에 다시없는 대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제천혈마 장소라면… 무림의 정사양도(正邪
兩道)는 삼 년 전 혈마사의 난입이나 삼십 년 전에 있었던 이패(二覇)의
중원행(中原行) 때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
원정선사의 말을 듣고 있던 장문인들의 등줄기로 전율이 스쳐지나갔다.
장소가 오행지기를 하나로 모으게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재앙
이었다.
상유천이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방긋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아! 다행히 장 대협도 곁에 계시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나 논의해
봅시다.”
침울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삼 년 간 실종되었던 장염이 돌아와 그들의 곁에 있었다.
장염이 함께 있는 한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무림맹의 고수들을 낙양과 정주에 풀어 장경선과 장소를 찾아
봐야지요.”
춘양진인의 말에 원정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혈마인들의 소재를 찾는 것이 지금으로써는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맞습니다. 오행혈마인이 어디에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맹주의 신변을 지키는 일도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대충 방향이 정해지자 상유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신검(神劍) 노선배를 이리로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림맹의 고수들을 신검 경영자가 움직이고 있다고 하니 그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장문인들의 얼굴에 가벼운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신검 경영자에게 ‘앞으로는 무림맹의 지시에 따라달라’ 는 요청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영원히 신검과 천하제일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다.
신검의 말이라면 지금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고인(高人)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 모두와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야겠지요.”
원정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신검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신검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무림맹은 사사로운 원한의 해결이나 어느 한 사람의 보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강호에 몸담고 있는 무림인들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가주, 화산파 제자 백리영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맹주의 집무실에 나와 있던 경영자가 경재범을 바라보았다.
화산파의 백리영이라는 자와는 안면이 없으니 드디어 때가 된 것이리라.
오래전 경재범이 장로들의 불손한 마음을 지적했지만 무시했었다.
장문인들이 위험을 각오하고 무림맹으로 모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묻고 돌려보내라.”
“알겠습니다.”
이제 와 화산파의 어린 제자 따위에게 들을 말이란 없다.
어차피 장문인들과 자신의 일이다.
‘젊은이라고?’
장문인들이 벌이고 있는 일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민다.
옛날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장문인이 아니면 하다못해 장로라도 왔어야 한다.
이런 세상을 만들자고 그처럼 일했었나 생각하니 허탈하기까지 하다.
“허… 엉망이 되어버렸어…”
조금 후에 경재범이 돌아왔다.
그러나 경재범의 얼굴 역시 밝지 못했다.
“장문인들이 지금 의사청에서 뵙자고 합니다.”
“그래… 시간이 된 게지. 오래 참은 편이야.”
경재범이 경영자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가주는 아직 이렇다 할 의사 표시를 하지 않고 있지만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실 것인지…”
“무림에 장천사의 이름이 드높더군. 우리가 세상에서 등진 동안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겠지.”
“장문인들이 저처럼 나오는 것도 뒤에 있는 장염 때문입니다.”
“얼마 전 그를 보았지. 재미있는 친구야. 세상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더군. 그런 사람이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니 우습지 않나?”
“관심이 없는 척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나이에 그와 같은 무공을
익히려면 보통 결심으로 되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마침내 경영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으면 늦는다고 욕을 하겠지.”
“가주께 불경한 자는 저희가 용서치 않습니다.”
경재범의 눈에서 광채가 번득였다.
신검은 단지 가주일 뿐 아니라 자기 삶의 중심이었다.
“고맙네. 그러나 그 이전에 내 검이 먼저 죄를 물을 게야.”
경영자가 의사청으로 들어서자 장문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영자의 나이와 무림에서의 배분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경영자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장문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간에 인사가 끝나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경영자였다.
“그래, 여러 장문인들께서 노부를 이리로 부른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오?”
화산파 장문인 상유천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하하! 무림이 어수선하여 신검 선배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함입니다.”
“노부 같은 퇴물에게 배울 것이 있겠소이까?”
스스??퇴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후배들에게 휘둘리게 생겼다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리라.
상유천이 미소를 잃지 않고 되받았다.
“퇴물이라니요?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을 남겨주시리라 믿습니다.”
“허허허! 내가 꼭 좋은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구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달든 쓰든 모두 잘 새겨듣겠습니다.”
경영자가 상유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렇게 돌려 말하니 부담이 덜한 느낌이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크게 나빠지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의외로 장문인들은 그저 웃으며 바라볼 뿐 싸움의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경영자는 장문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여유를 자신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장문인들이 원하는 바를 알고 있소이다. 맹주를 돕기 위해 가솔들을
이끌고 달려왔소. 천하제일가가 무림맹에 남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맹주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니 위험이 사라지면 돌아가리다.”
원성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고 나섰다.
“맹주의 일은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천하제일가에서 친히
맹주를 보호하신다고 하니 듬직합니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장경선과 장소
의 행방을 찾는 데 주력하겠다고 하니… 신검 노사(老師)께서도 양해해
주시겠지요.”
경영자가 장문인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 손이 부족하다고 하시니 맹주를 지키는 일은 본가에서 맡아야
겠지요. 지금까지 천하제일가가 무림을 위해 헌신했는데 보살핌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오.”
“…”
장문인들이 슬그머니 경영자의 시선을 외면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분하고 억울할 수도 있다.
장문인들의 귀로 경영자의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가는 토끼를 잡으려다가 잡은 토끼를 놓친다 했소. 무림맹이 맹주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서 나중에 무림세가들을 어떻게 다스릴지 지켜보겠소이다.”
“…”
이번 일로 무림세가들이 칠대문파에서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경영자와 그를 따르는 고인들의 역량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무림세가들은 과거에도 구대문파를 강호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었다.
“선배님의 고언(苦言, 도움이 되는 쓴 소리)에 감사를 드립니다.”
춘양진인의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즐기듯 이리저리 둘러보던 경영자가 뒤쪽에 앉아 있던
장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번에 보는 것으로 벌서 두 번째 만남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장염이라는 젊은 고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이 눈에 거슬린 경영자가 장염에게 슬며시 전음을 날렸다.
“그대가 이 사냥개들의 후견인(後見人)인가?”
조용히 있어서 존재감이 없던 상대가 고개를 돌린 순간이다.
경영자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상대의 눈에서 시퍼런 광패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빛이 얼마나 시리든지 경영자는 몇 번이나 눈을 끔뻑여야 했다.
연이어 낮게 가라앉은 전음이 사방에서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섬전수 장경선만 경재학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으음…”
듣고 있던 경영자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전음 속에 실린 무형의 힘이 계속해서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경재범이 다가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가주, 불편하신 데라도?”
“…”
그러나 경영자는 아무 대답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문인들과 경재범이 보는 앞에서 정중히 물었다.
“경재학은 지금까지 무림의 맹주로 공평무사(公平無私, 공평하여 사사로움
이 없다)하게 일을 해왔다. 맹주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은 모두가 마인들
뿐인데, 어찌 그대가 원한 운운하는 건가?”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한 마디로 경재학에게 원한이 있는 자는 그 정체를
의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듣고 있던 춘양진인은 물론 파경사태와 상유천까지 어이없는 표정을 해
보였다.
장염과 더불어 지금까지 구경만 하고 있던 화산파의 노기인(老奇人)
서검자가 참지 못하고 톡 쏘아붙였다.
“듣자 하니 강짜가 심하시구려. 장천사(張天師)의 스승은 무당파의 신선
으로 그대도 잘 알고 있는 도문일검(道門一劍) 진원청 대협이시오.”
서검자는 신검 경영자와 배분뿐 아니라 무공마저 비슷한 경지다.
경영자는 서검자를 무시하지 못하고 몸을 틀었다.
“무당파의 진원청은 알지만 장천사는…”
서검자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뒷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아직 모르겠다는 말이리라.
장문인들에게 무림맹을 그냥 내어 주자니 배알이 뒤틀린 모양이다.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칠대문파와는 정면으로 시비를 일으키기가
어려우니 장염을 물고 늘어지구나. 그러나 너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장염이라면 자신이 덤벼들어도 삼 초를 넘기지 못한다.
신검 경영자라고 해봐야 자기와 평수이거나 한 수 위일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것을…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그런지 얄미우면서도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서검자는 더 나서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시비를 일으켜 자기 무덤을 파겠다는 데야 도리가 없다.
장문인들도 자기와 같은 생각인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경영자는 조금 신경 쓰이던 서검자가 한 걸음 물러나고 장문인들도
가타부타 말이 없자 장염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승의 이름을 빌어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있어도…”
“그냥 노선배께서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지요.”
장염이 경영자의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
어차피 상대가 원하는 것을 피해갈 수 없다면 어서 들어주는 편이 낫다.
지루한 말싸움을 해봐야 아무 죄도 없는 스승님의 이름만 더렵혀질 뿐이다.
“그대가 원한이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떳떳하게 밝혀라.”
장염이 경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영자의 은빛 수염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폐인이 된 아들의 명예를 위해 대신 분노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경영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것을 알기에 경영자와 마주한 장염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노선배께서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입니다.”
“…”
경영자와 장문인들의 얼굴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경영자는 장염이 이 자리를 회피하기 위해 말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감히 노부를 기만하려 드느냐!”
장염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경영자가 분노할수록 그의 부성(父性)이 느껴져 더욱 곤혹스러웠다.
처음부터 아무런 대꾸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경영자의 전음을 듣는 순간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폐인이 된 경재학에게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입니다.”
“말하라!”
장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노선배의 삼 초(三招)를 받아주겠습니다.”
경영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천리(天理)를 따를 뿐입니다.”
경영자의 눈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태연하게 대꾸하는 장염을 보면 그 대범함에 기가 질려온다.
자신의 삼 초를 받겠다는 것은 허장성세(虛張聲勢)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 무림의 대선배가 되어 까마득한 후배에게 삼 초나 양보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참아 넘기자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들이 건강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자도 쓰러지면 까마귀의 밥이 된다.
이 순간 장염과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폐인이 된 경재학에게 모여든 까마귀
로 보였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아들의 명예와 사라진 무림의 도의를 위해 경영자는 자신의 선배 됨을
포기하기로 했다.
조금 뒤에 떨어져 있던 경재범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장염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의사청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뒤로 서검자와 칠대문파 장문인, 그리고 장로들이 따라나섰다.
“준비는 되었는가!”
장염이 착잡한 표정으로 경영자를 바라보았다.
삼 초를 날린 뒤 경영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차라리 그에게 진실을 말하는 편이 나은지도 모른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장문인들과 칠대문파 장로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구대문파 장문인들과 낯을 붉히며 겨루었으니
참으로 인생은 요지경이다.
자신은 또 어떠한가!
경재학을 잡아 죽일 듯 설쳐 댔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부친에게 삼 초를
허락하고 말았다.
“시작하십시오.”
“노부는 검을 쓰는 사람이니… 막거나 피해도 좋다!”
권장(拳掌)이 아니라 검을 쓰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살의(殺意)를 짐작케
하는 말이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경영자가 지존검을 뽑아 장염에게 날렸다.
건곤삼식의 마지막 절초인 건곤무해(乾坤無解)를 펼친 것이다.
파츠츠츳!
장염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지존검의 검기가 그물처럼 펼쳐져 날아오는데 과거 당고랍산맥에서
경재학이 펼쳤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대하는 것이라 해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을 텐데,
건곤삼식은 이미 처참하게 겪어 각인되 초식이다.
장염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리는 순간 수많은 검기가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아! 이형환위(以形換位)…!”
주변에 있던 장문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무림에서 이형환위의 수법을 보기는 처음이다.
검기가 몸을 관통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장염의 그림자만 베고
지나간 것이다.
장염의 그 한 수만으로도 경영자를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경영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끝으로 장염을 가리켰다.
그간 저만치 스쳐 지나갔던 지존검이 허공을 선회하여 장염에게 날아갔다.
츠츠츳!
지존검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장염의 몸으로 파고들 때다.
장염이 훌쩍 몸을 날려 지존검의 검신에 올라타 버렸다.
“헛!”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자 경영자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이기어검이라면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처음 보는 수법으로
그것을 막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기가 막힐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장염이 검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어헉! 어검비행술(於劍飛行術)이다!”
계속 지켜보고 있던 장문인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장염이 경영자의 검신(劍身)에 두 발을 디디고 서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자기의 검이 아니라 상대의 검을 빼앗아 날고 있으니 저것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옷깃을 날리며 수직으로 날아오르던 장염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염이 검신을 떠나 지면에 착지하자 지존검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경영자에게로 돌아갔다.
팍!
경영자가 일 장쯤 앞에 꽂힌 지존검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검은 되찾았으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평생 동안 무림에서 쌓아온 업적과 체면이 삽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
경영자가 땅에 박힌 지존검을 뽑아 들고 묵묵히 돌아섰다.
검을 갈무리하는 경영자의 손이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검을 부러뜨리고 당장 정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쓰러진 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을 참으며 조용히 사라져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경영자를 보는 장염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처음부터 검을 잡아타고 날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다만 검이 다가왔을 때 올라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로써 말이다.
이미 여의신행(如意身行, 뜻을 따라 몸이 행한다)의 경지에 이른지라
생각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일단 검에 올라탄 뒤로는 검이 가는 대로 잠시 몸을 맡겼다.
그리고 되돌아와 검을 넘겨준 것인데 상대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후우…”
장염의 한숨 소리를 들은 서검자가 슬며시 다가왔다.
“자네, 아는가? 검은 고양이 눈 감듯 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서검자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흣! 검은 고양이가 눈을 감으면 감았는지 떴는지 알게 뭔가! 세상 일
이란 게 그래. 뭐가 뭔지 구별할 수 없는 게 허다하지. 지금 자네는 ‘뭔가
저 노인네에게 실수한 게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그 역시 모를 일이지.
그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하늘만 알걸세.”
“감사합니다.”
서검자의 말을 듣자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곧 이것도 스스로 편하게 생각하려고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든다.
어쨌든 상대는 사악한 경재학이 아니라 영문도 모르는 그의 부친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면서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느낌은 끝내 지워
지지 않았다.
***
낙양의 작은 장원에 은신하고 있던 장소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경선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지난 번 무림맹에서는 거의 다 잡은 것을 놓치고 말았다.
달아나는 장경선을 쫓았지만 일각이 되기도 전에 놓치고 만 것이다.
수하들과 함께 장경선에 대한 대책을 세워보려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무공을 모두 검토해 봤지만 장경선이 보여준 그런 경공술은
없다.
그것은 경공기술이 아니라 경지의 문제였던 것이다.
“너무 빨라…”
멀찍이 앉아 있던 검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경선은 확실히 빨랐다.
어쩌면 무림에서 장경선보다 빠른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교주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장경선의 속도였다.
모두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을 때다.
마교의 군사(軍師)를 자처하던 혈수서생 이면수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님, 빠른 놈은 따라가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럼?”
“놈이 달리지 못하게 해야지요.”
“어느 미친놈이 죽을 판인데 달리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면 혹시 그놈이 달아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교주님이 놈보다 빠르다고 믿게 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한 소리냐?”
“…”
이면수는 장소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교주 앞에서 감히 허언(虛言)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면수를 묵묵히 바라보던 장소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으니 입으로라도 후려쳐야겠지.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이면수가 즉시 장소에게 한 가지 계책을 일러주었다.
며칠 후 장소와 마교 고수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무림맹을 출입하던 수하 중 하나가 마침내 경재학이 은신하고 있는 장소를
알아낸 것이다.
경재학의 주변을 맴돌다 보면 반드시 복수에 눈이 먼 장경선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이면수와 함께 장경선에 대한 대책을 세운 뒤라 장소의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무림맹에 남아 있을 장염이다.
만약 장염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자기를 죽이려 든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오행혈마인 두 사람 중에 반드시 하나를 죽여야 한다면 장염은 자신을
택할 것이다.
과거 당고랍산맥에서 경재학과 자신은 장염과 씻지 못할 원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가장 중요한 순간이면 언제나 그놈이 방해를 하는군.’
모두 경재학을 축으로 돌고 있으니, 최악의 경우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될 수도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대략 피아(彼我)가 구별된다.
장염은 공공(公共)의 적(敵)으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경재학은 장경선의 죽음을 원하고 자기는 장경선의 오행지기를
필요로 한다.
“잠시 경재학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어차피 필요에 따라 손잡고 등 돌리기를 반복하는 세상이다.
어차피 경재학과는 신의나 배신 따위의 위선적인 단어를 초월한 지 오래다.
필요에 따라 손을 잡거나 혹은 칼을 들이밀어도 부담이 없는,
실용적이고 바람직한 관계인 것이다.
“순찰영주는 경재학에게 즉시 수하를 보내 나의 뜻을 전해라. 장경선을
넘겨주면 정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지만, 만약 장경선과 장염을 만나
게 하면 후에 정주의 천하제일가를 피로 씻겠다고.”
“존명!”
장소는 곧 이어 이면수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너는 경재학과 장염의 동향을 세밀히 관찰하여야 할 것이다.”
“존명!”
***
경재학은 무림맹의 내전 무사인 공정한(孔情恨)의 방문을 받았다.
공정한을 바라보는 경재학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의 거처가 무림맹 내에 알려지지 않았고, 평소 공정한과도 교분이
없었으니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공 협사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으셨소?”
이미 무공을 잃은 경재학이지만 몸에 배인 기도은 여전해서 공정한은
약간이나마 긴장해야 했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제가 모시고 있는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남북지약(南北之約, 과거 장소와 경재학이 맺은 남북 분할의 약속)의
당사자라고 말하면 아신다고 했습니다.”
경재학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측했던 대로 공정한은 무림맹에 잠입한 마교의 밀정이었다.
무림맹의 무사들을 공채(公採)할 때 과거를 다 조사했지만 옥(玉) 속에
돌이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 무림에서 떠나야 할 자신에게는 관계없는 일이다.
“말해 보십시오.”
“섬전수 장경선이 장염을 먼저 만나게 된다면 맹주와 천하제일가를 피로
씻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정한이 잠시 경재학의 눈치를 살폈다.
비록 무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평소에 지존으로 모시던 경재학이다.
그를 협박하고 조건을 제시하자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뭐요?”
경재학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공정한이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섬전수를 그분께 넘기면 천하제일가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시겠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경재학이 공정한을 바라보았다.
“오색비연무(五色飛煙茂)를 아시오?”
공정한도 무림맹의 공채 무사이니 신호탄으로 사용하는 오색비연무를
모를 리가 없다.
“알고 있습니다.”
“장경선이 홀로 나타나면 신호를 하겠으니 그때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시오.”
장경선은 장염과 장소가 없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찾아올 것이다.
바로 그때 장소가 나타나 장경선을 상대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수고하셨소. 더 이상 다른 것은 없소?”
“그것이 전부입니다.”
경재학이 앉았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배웅을 하겠으니 이만 나가달라는 뜻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공정한이 습관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경재학은 글너 공정한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뜻밖에도 예의가 바른 젊은이였다.
공정한이 돌아가자 홀로 남은 경재학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장소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고맙게도 그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비록 남북지약은 자신이 깼지만 장소는 천하를 얻을 욕심으로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바라던 대로 천하를 쟁취하면 금세 무료해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일(消日)거리로 은원(恩怨)이라도 갚으려 들 것이다.
‘무림맹에서 벗어나도 천하제일가가 갈 곳은 없는 것인가?’
문득 산다는 게 뭔가 싶다.
무림맹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었고 겨우겨우 빠져나간다 해도 갈 곳이
없다.
자신의 인생에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많은 사람들을 무림맹에 잡아둔 것은 있으나 자기가 갇힐 줄은 몰랐다.
“있느냐?”
“예.”
“풍림장에 새로운 소식은?”
오래전부터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에 ‘마교 교주 장소가 천마후 영호화
를 데리러 간다’ 는 소문을 흘렸다.
예상했던 대로 영호성의 가족들은 매화검 영호화와 함께 은밀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갔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워낙 비밀리에 빠져나간지라 아직…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화검이 있는 곳을 알아내라. 더불어 ‘평두산(平頭山)
의 행사’ 를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