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25)
8장. 주인은 죽지 않는다
무림맹이 장문인과 장로들에 의해 정상적인 운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갑자기 무림맹을 긴장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호북성 무한을 떠나 무림맹으로 오던 영호화가 하남성에서 마교를 추종
하는 사파고수들에게 잡히고 만 것이다.
의사청에 모인 장문인들과 장로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영호화의 사건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하남성에서 탁발(托鉢)을 하던 소림사 출신의 승려 하나가 영호화의
납치를 목격하고 알려왔다.
영호화는 무당파의 사검사(四劍士)로 이름을 날렸였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몇 년 전에는 무림맹에 불모로 잡혀 있기까지 해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았다.
그 이후로 다시 몇 사람이 매화검 영호화를 목격했다.
의심할 나위 없이 매화검 영호화는 확실히 사파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매화검 영호화의 납치 사건을 담당한 이원지 도인이 황급히 의사청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소식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지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만, 사파에는 이미 영호화 소저가 난주로 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난주라면 아마도 천마방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리라.
며칠 전에 합류한 곤륜파의 신룡진인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들이 대체 누구요?”
“자세한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교 교주 장소를 두려워하는 사파
고수들로 보입니다.”
신룡진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의 눈치를 살피는 사파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장소가 마교를 다시 접수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언젠가 영호화의 문제가
다시 터질 줄 알았다.
그러나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비록 경영자와 천하제일가의 고수들이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장염이 무림맹을 비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염은 영호화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니… 골치 아프게
되었다.’
다른 장문인들도 거기까지 생각한 듯 가끔씩 장염을 바라보았다.
장염이라고 그런 장문인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무림맹에 남아 경재학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림에 남아 있는 것은 영화 소저를 구해야 한다면 장염은
당연히 영화 소저를 구할 것이다.
비록 그것으로 어떤 재앙이 뒤따르든 말이다.
“영화 소저가 어디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된다면 알려주십시오.”
이원지 도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목격자들이 잘못 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풍림장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
뭐라고 말을 하려던 장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며칠 전 영화 소저가 납치되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숙소로 돌아가
전이(轉移)를 했다.
풍림장은 이미 한차례 가본 곳이라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지경에서 찾아
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한줄기 바람에 마음을 싣고 풍림장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영화 소저는 없었다.
그 다음 날 밤도, 그리고 그 다음 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장염은 벌써 몇 차례 풍림장을 돌아보았지만 영화 소저는 물론 영호성의
가족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수일 내로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올 것입니다. 장 사조(張師祖),
모든 것이 헛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장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헛소문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이 하남성 안에 있을 때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무림맹을 비우는 시일이 짧아질 것이다.
영화 소저를 데리고 돌아오기까지 최소한 며칠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하남성을 벗어나면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장문인들이 장염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장염 개인은 물론 무림맹에도 정말 괴로운 노릇이었다.
지난 삼 년 간 장천사(張天師)가 실종된 틈에 장소의 영향력이 커진 탓이다.
녹림칠십이채에 들지 않은 사파의 중소(中小) 방파들이 마교의 장소에게
물리고 있었다.
이럴 때 천하제일가의 고수들이 나서준다면 좋겠지만 그들은 경재학의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천하제일가의 고수들과 경재학은 요즘은 보이지도 않았다.
경재학은 경영자가 무림맹의 운영에서 밀려난 뒤로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원지 도인은 그날 저녁에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칠대문파의 제자 중 하나가 매화검 영호화가 있는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전서구의 내용을 확인한 이원지 도인은 당장 장염에게 달려갔다.
어차피 영호화의 소식을 듣게 되면 구하거 갈 장 사조다.
그렇다면 매화검이 조금이라도 무림맹과 가까운 곳에 있을 때 보내야 한다.
장염의 방에 이르자 이원지 도인은 무조건 열고 뛰어 들어갔다.
“장 사조(張師祖)! 매화검이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그곳이 어딥니까?”
“무림맹에서 남쪽으로 위치한 평두산(平頭山)입니다. 그곳에서 마교로 전향
할 하남성의 사파고수들과 일차 회합을 가질 것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따라붙자 서둘러 세(勢)를 확장하련느 것이리라.
장염이 이원지 도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떠나고 싶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원지 도인이 장염을 향해 웃어 보였다.
“장 사조, 이곳은 염려 말고 다녀오십시오. 무림맹의 고수는 물론 하남에
있는 정파 무관(武官)의 고수들까지 모두 불러 모으기로 했습니다.”
“…”
장염이 조용히 이원지 도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사조의 행동에 당황한 이원지 도인이 재빨리 몸을 비켜섰다.
“사조…”
이원지 도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장염이 허리를 숙이던 모습 그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원지 도인이 홀연히 사라진 장염을 보며 탄식했다.
때때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누가 그를 인간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이원지 도인은 즉시 장문인들과 무림맹의 장로들에게 장염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장문인들은 이원지 도인의 연락을 받고 의사청으로 모여들었다.
장염이 평두산으로 떠났으니 고수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물론 경계도
강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문인과 장로들이 분주하게 앞으로의 일을 준비할 때다.
화산파의 장문인 상유천이 칠대문파 장문인과 장로들을 향해 한 가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천사가 무림맹을 떠났다는 사실은 극비에 붙여야 할 것이외다. 만약
장천사가 장경선이나 장소의 귀에 들어가게 되는 날이면 무림맹은 한바탕
소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오.”
신룡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말을 받았다.
“상 장문인의 말씀이 옳소이다. 장 대협의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다만…”
신룡진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점창파의 영천상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맹주와의 교분을 생각해서라도 자신과 영천상인이 천하제일가를 위해 배려
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신검 노선배께는 내가 따로 찾아뵙고 말씀을 올려야겠소. 아무래도 맹주
의 보호를 위해 천하제일가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니 말이오.”
“좋은 생각이오.”
영천상인이 다른 장문인드르이 눈치를 슬쩍 살피며 동의했다.
이제 비록 맹주가 무림에서 은퇴하게 되었지만 그간의 의리를 생각하면
두 사람만으라도 천하제일가를 안아주어야 한다.
경재학은 무공을 잃었지만 천하제일가는 무림제이l 무가(武家)로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신룡진인의 말에 다른 오대문파 장문인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제 무림맹에 예기치 못한 사단이 생긴다면 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경영자라도 미리 알아둔다면 더 큰 피해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 신룡진인의 방문을 받은 경영자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과 같은 때에 장염이 무림맹을 떠났다니 그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무림맹의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한 날 장염의 무공을 체험한 경영자다.
크나큰 모멸감도 느꼈지만 아들을 위해서는 장염과 같은 고수가 곁에
필요했기에 모든 것을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이제 와 갑자기 무림맹에서 떠나다니!
“오행혈마인의 완성보다 앞서는 그렇게 중용한 일이 있소이까?”
신룡진인이 씁쓰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걸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장염에게 매화검은 강호인에게 무림과 같은 존재였다.
몇 년 전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무림맹에 뛰어들었던 장염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장천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뭐랄까… 보통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많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경영자가 노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어찌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자가 대의(대의)조차
구별하지 못한단 말이오!”
신룡진인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경영자를 바라보았다.
경영자가 맹주의 부친만 아니라면 그의 협의지심(俠義之心)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지금은 아들의 안위를 위해 분노하는 아버지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게다가 자신은 과거 장염과의 일전(一戰)을 통해 마음으로 그를 존경하고
있다.
장염이 없는 자리에서 경영자와 함께 그의 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것이라도 보는 처지에 따라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평두산이라고 해봐야 장천사의 걸음이면 오고 가는 데 나흘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
경영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가만 보니 신룡진인은 장염에게 별 불만이 없어 보인다.
이런 자리에서 혼자 비난을 해봤자 자기만 초라해진다.
“장염이 떠났다는 사실은… 비밀에 붙여야 할 것이외다.”
경영자의 말에 신룡진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말로 자기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맹주를 만나본 지 오래되었지만 요즘 사람들을
피하신다고 하니…”
“감사하외다.”
신룡진인이 돌아가자 경영자는 급히 경재범을 불러들였다.
“지금 장천사라는 장염이 무림맹을 떠나 평두산으로 갔다고 한다. 그가
돌아오기까지 적어도 사나흘은 걸릴 것이라고 하니 경계를 강화하라.”
“아니, 그자는 이런 때에 왜?”
“자기 여자를 구하러 갔다고 하니 어쩌겠느냐? 천하의 절반이 여자인데…
어리석은 것들 같으니. 너는 맹주에게 가서 장염이 없으니 더욱 조심하라
일러라.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섬전수의 눈에 띄었다가는 큰일 날 게다.”
“알겠습니다.”
경영자의 거처에서 물러난 경재범은 곧바로 경재학을 찾아갔다.
그리고 경영자의 당부를 그대로 전했다.
경재범의 말을 들은 경재학의 펄쩍 뛰며 화를 냈다.
“저런 지독한 놈! 내가 제놈의 친인(親人)이 아니라고 이렇게까지 홀대를
하다니! 섬전수라도 찾아오는 날이면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그러니 소가주(小家主)께서도 사나흘 간 밖으로 나다니지 마시게.”
“알겠소. 내 방에서 쥐 죽은 듯 지내겠소이다.”
경재범이 안됐다는 듯 마주 앉은 경재학을 보며 혀를 찼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촌 동생인 경재학을 부러워했다.
차기 가주인 그는 어려서 벌모세수를 하고 천하제일이라는 경영자의
무공을 익혔다.
강호에 출두하자 사람들은 그를 불사신검(不死神劍)이라 불렀다.
경재학의 모습 속에서 신검 경영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맹주가 되어 무림을 지배했다.
그것은 과거에 그의 부친인 신검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화려했던 시간도 이제는 다 끝이 났다.
불사신검 경재학은 무공을 잃고 원수를 피해 숨어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한숨을 내쉬던 경재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재학의 몰락은 장차 천하제일가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신검이 이루어놓은 것을 불사신검이 다 말아먹은 셈이다.
“후우… 이만 가겠으니 나오지 마시오.”
“…”
탄식을 터뜨리던 경재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경재학은 멀어져 가는 경재범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제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오행혈마인의 완성을 보아야 한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경재학이 창가로 걸어갔다.
“들었느냐?”
“예.”
“내일 아침까지 낙양의 구석구석까지 소문이 돌게 하라. 늦어도 사흘
이내에 장경선이 나를 찾아오게 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이다.
의사청으로 모여든 칠대문파 장문인들과 장로들은 기가 막힌 소식을
접해야 했다.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원지 도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요? 하룻밤 동안에 그런 일이 어찌 가능하단 말이오?”
상유천의 질문에 이원지 도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도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빈도(貧道)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나 분명 무림맹 안팎으로 소문이 난
것은 사실입니다.”
“어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미파의 파경사태가 조용히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어쩐지 누군가 오행혈마인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듯
합니다.”
“…”
다른 장문인들도 파경사태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누군가 조직적으로 밀어붙이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대체 무림맹에서 누가 그런 일을 꾸민단 말인가?
지난 밤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러나 칠대문파 장문인과 장로들이 그랬을 리는 없다.
천하제일가의 사람들은 더 더욱 아니다.
그들은 당장 장경선이 오면 경재학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는 할 일을 다 하면 되는 거겠지요.”
파경사태의 말에 춘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의 말씀이 옳습니다. 당장 하남의 무림인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십시다.”
칠대문파 장문인들은 즉시 무림맹 인근에 있는 무관(武官)으로 배첩을 발송
하기로 했다.
명단을 뽑아보니 그래도 이십여 개의 크고 작은 무관이 있다.
그 이외의 곳은 거리가 너무 멀어 오고 가는 데만 열흘 이상씩 걸리니
초대한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다음 날부터 무림맹의 전각으로 무림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첫날에만 열 개 무관의 제자 백오십이 모였다.
그리고 둘째 날 다시 일곱 개의 무관에서 오십 명이 찾아와 도합 이백여
명이 숙소를 배정받았다.
이백여 명이 무림인들은 서로 아는 체를 하며 마냥 들떠 있었다.
지금까지 무림맹의 행사에 참가한 적은 많지만 정식으로 숙소를 배정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림맹에서 자기들을 위해 숙소까지 마련해 준 것이다.
무관에서 모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무공을 연마했다.
식사를 하거나 잠자는 시간을 빼면 거의 무공만 수련했다.
오죽하면 칠대문파 장문인들은 무관에서 무림맹으로 연수을 온 것 같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무관의 사람들이 이처럼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오후가 되자 맹천(孟川) 건너에 자리 잡은 맹천무관(孟川武官)의 관주(官主)
천무덕(千武德)은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너희들의 어깨에 무림의 안위가 달려 있다. 장천사께서 평두산으로 떠난
지 오늘로 사흘째다. 우리가 왜 무림맹에 와 있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장천사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무림맹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이다. 부지런히 몸을 만들어두어야 유사시에 자신의 목숨과 무림의 미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오냐, 가서 수련을 계속해라.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장천사께서
돌아오실 것이다. 그때까지만 자리를 지켜주면 자손 대대로 오늘의 일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나가다가 맹천무관의 이야기를 듣게 된 신룡진인이 한숨을 폭푹 내쉬었다.
도무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잘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장천사 장염이 평두산으로 갔다는 소리나 늦어도 내일쯤 돌아올 것이라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 비밀은 겨우 삼 일 만에 하남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는 어린아이들조차 장천사가 언제 오는지를 두고 내기를 할 정도다.
물론 마음의 각오를 다지는 모습은 보기가 좋지만 아무래도 찜찜하다.
장경선이나 장소가 들이닥치면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차라리 소문이 나지 않고 저들이 오지 않은 것만 못하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내전으로 걸어 들어가는 신룡진인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저들의 말마따나 오늘로 사흘째다.
장천사가 평두산에서 매화검을 만났다면 지금쯤 거반 돌아왔어야 한다.
‘만약 매화검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 찾아다니고 있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상상만으로도 뒷목이 뻣뻣하다.
어느 놈의 농간인지 몰라도 참 대담하다.
그는 정말 지옥이 열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래 봐야 자기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문득 신룡진인의 걸음이 멈춰졌다.
‘만약 이미 모두 잃어버린 자라면… 그래서 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자라면…’
그런 사람이라면 무림맹 안에 딱 한 사람이 있다.
“설마… 설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한번 떠오른 경재학의 얼굴은 지워지지 않았다.
***
그 시간 장염은 무림맹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평두산의 사파인들을 만난 뒤부터 단 한 차례도 쉬지 않았다.
‘모두가 속았다.’
평두산의 사파인들은 듣던 것처럼 마교의 추종자들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사파인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워낙 다양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이와 기도가 각각 다른 열다섯 명의 무림인이 한 여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수십 개의 붉은 깃발이 꽂혀 있었는데, 깃발마다
‘제천혈마와 천마후의 무병장수를 기원합니다’,
‘마교가 천하의 근본이다(魔敎天下之大本)’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근처에 여자라고는 그녀 하나뿐이니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마음을 정하자마자 무림인들의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람 소리에 놀란 여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날아가던 몸을 틀어 여자와 무림인들의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누가 꾸민 것이오?”
“…”
그러나 그들은 대답 대신 각자의 병장기를 손에 말아 쥐었다.
그들의 눈 속에 가득한 것은 회한(悔恨)이었다.
이들은 대체 무엇을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저들이 살아온 삶을 모르니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열다섯 개의 병장기를 하나씩 빼앗으며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들의 무공을 모두 폐(廢)하고 다시 물었다.
“누가 시킨 일이오?”
영화 소저를 쏙 빼닮은 여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다시 물으신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
그들에게는 생명 같은 무공을 잃고도 지켜야 하는 비밀이었다.
그녀가 영화 소저를 닮아서 그랬을까?
한 번 더 물으면 대답을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대신 평두산에는 열다섯 구의 시체가 남겨지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그의 이름보다 그대들의 생명이 더 가치가 있소.”
“…”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막 떠나려는데 여자가 중얼거렸다.
“주인은… 죽지 않습니다.(不死).”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주인이 죽지 않는다’ 는 것을 불사신검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장염의 눈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타올랐다.
처음부터 그는 자기를 무림맹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정주에서 허탕을 쳤을 때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설마 자기 목숨까지 걸고 그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는 지금 장경선과 장소를 한 자리에 모으려 하고 있었다.
단지 장경선을 죽이기 위해 장소에게 오행지기를 모아주려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장염이 크게 소리쳤다.
“결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경재학!”
장염이 다시 한 번 경천일기공의 법문을 운용했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유성처럼 공간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장염이 무림맹을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밤이다.
맹천무관의 관주 천무덕은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방 안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내일이면 기다리던 장천사가 오는 날이다.
드디어 장천사라는 일대기인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이가 젊다고 하는데 진짜 젊은 걸까?
실제로는 반로환동한 무림의 원로고수가 아닐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데 펑 소리와 함께 창밖이 한순간 환하게 밝아왔다.
“누가 불꽃놀이를 하는 건가?”
검은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것은 보기에도 아름다운 다섯 가지 색깔의
불빛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상하다.
그것은 마치 주야간겸용(晝夜間兼用)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뭉게뭉게 연기를
날리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요즘은 기술도 좋아…”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타종(打鍾)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헉! 설마!”
얼마나 급하게 쳐대는지 종이 깨질 듯한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그렇다면 저 오색의 불꽃은 자기가 아직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무림맹의 비상신호탄 오색비연무(五色飛煙茂)다!
천무덕이 한쪽 벽에 걸어두었던 검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미 다른 무관의 사람들도 병장기를 들고 나와 있다.
어디로 갈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무림맹의 고수들이 한쪽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천무덕이 우르르 몰려나온 제자들을 향해 용감하게 소리쳤다.
“나를 따라오너라!”
천무덕과 맹천무관의 제자들이 달리자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누구도 이 길의 끝에서 지옥이 열리게 될 줄은 모르고 있었다.
***
장경선은 경재학이 쏘아 올린 오색비연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경선은 장염이 떠났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무림맹으로 잠입했다.
그의 경공이 워낙 뛰어난지라 사람들은 그가 머리 위로 날아다녀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마음 편히 돌아다닌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숨어 있을지 모르는 장소를 생각해 여간 조심한 게 아니다.
“아름답군. 그러나 저 불꽃이 너를 지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배은망덕한 놈…”
경재학의 주변에는 이미 십여 명의 천하제일가 고수들이 쓰러져 있었다.
장경선은 단번에 경재학을 죽이지 않고 있었다.
이 기회에 경재학을 지키고 있다는 천하제일가의 사람들도 모조리 없애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천하제일가의 사람들과 경재학을 처치하고 나면 더 이상 강호를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때부터는 장소가 찾지 못할 곳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낼 것이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다시 십여 명의 고수가 경재학의 앞을 막아섰다.
그중에 섞여 있던 경재범이 호통을 쳤다.
“섬전수 이놈!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게냐!”
“크크크! 너는 일검진천 경재범이로구나. 잘 왔다. 애써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게 마중을 나와주다니. 나의 원한은 저승에서 경재학이 잘
설명해 줄 게다.”
장경선이 벼락처럼 두 손을 흔들었다.
파파파팟!
장풍이 쏟아져 나왔지만 어두운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열두 명의 천하제일가 고수들은 일단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장경선이 발출한 것은 절정의 회선장이었다.
장풍(掌風)은 수직으로 솟아올라 고수들의 발목을 타고 하복부에 이르렀다.
펑! 펑! 펑! 펑!
“크윽!”
“악!”
한 번 손짓에 네 사람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공중으로 솟아올랐던 경재범이 검끝을 장경선에게 향하게 한 뒤 떨어져
내렸다.
어금니를 악물고 머리 속으로는 끊임없이 검신합일(劍身合一)의 구결을
떠올렸다.
단전(丹田)에서 일어난 기운이 손목을 지나 검끝에 이르렀다.
문득 검끝이 커다랗게 확대되는가 싶더니 밝은 빛이 온몸을 가득 에워쌌다.
어디가 검이고 어디가 자기 몸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파앗!
검신합일을 이룬 경재범의 가슴으로 회선장이 날아들었다.
장경선의 눈에는 검과 경재범이 모두 보였던 것이다.
경재범은 강한 충격을 가슴에 받고 진기를 흐트러뜨리고 말았다.
진기가 흩어지자 눈을 부시게 했던 빛무리도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어둠 속을 떨어져 내리던 경재범은 눈앞으로 지면(地面)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악!”
퍽!
목이 부러진 경재범은 영영 일어서지 못했다.
경재범이 허망하게 죽자 남은 일곱 명의 고수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들었다.
“으아아! 죽어라!”
장경선은 큰 소리로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휘우우웅!
장경선과 일곱 명의 고수들 사이에 열두 개의 바람벽이 생겨났다.
바람벽은 눈 깜빡할 사이에 장풍으로 변해 일곱 명의 몸으로 날아갔다.
콰콰콰콰!
일곱 명의 고수들이 황급히 검과 도로 몸을 가렸지만 장풍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부수고 말았다.
콰쾅! 쾅!
일곱 명의 고수들은 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주변으로 혈우(血雨)가 쏟아져 내렸다.
가까이에 있던 경재학은 그 피를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다.
“크흐!”
경재학의 입에서 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토록 많은 죽음을 보았건만 자기는 아직 살아 있다.
능력이 있어서 살아난 것이라면 자부심이라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친인들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느니 죽는 게 나은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경재학은 장경선에게 죽여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이 저주받은 세상과 제멋대로인 하늘을 위해 자기가 특별히 연출한 마지막
행사를 지켜봐야 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경재학은 등 뒤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느꼈다.
잠시 후 경재학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부친 경영자가 장경선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다.
경영자의 무공으로 장경선을 당할 수는 없다.
경재학은 물러서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장소! 이 찢어 죽일 놈은 어디에 있는 걸까?’
장소의 무공이면 이미 장경선 앞에 나타나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장소 대신 무림맹의 고수들이 나타났다.
화산파의 서검자가 무림맹에 남아 있던 칠대문파의 고수 이백여 명을
데리고 온 것이다.
서검자는 무림맹의 고수들을 장경선의 좌측으로 데리고 갔다.
칠대문파 고수들이 장경선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동을 마쳤을
때다.
이번에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천무덕과 백오십 명이 무사들이 들이
닥쳤다.
장내를 휘둘러보던 천무덕은 눈치껏 제자들을 이끌고 장경선의 우측으로
걸어갔다.
앞서 가던 맹천무관이 우측으로 향하자 다른 무관의 사람들도 슬금슬금
따라갔다.
그러자 그럭저럭 장경선을 삼면(三面)에서 에워싼 형태가 되었다.
장경선은 무림맹의 고수들이 뜻밖에 많이 보이자 살짝 인상을 썼다.
상대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들과는 은원이 없었다.
“나는 오직 경재학과 천하제일가의 목숨만 원할 뿐이다. 살고 싶은 자는
물러나라.”
“…”
그러나 아무도 장경선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한쪽에서 수치와 분노로 떨고 있던 경재학이 장경선을 향해 소리쳤다.
“섬전수 장경선! 내가 무림을 위한답시고 너를 이용한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너의 가족이 희생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마!
바라건대 원한이 있다면 나에게만 풀어다오. 지금이 인시 초니 머지않아
장천사가 돌아올 것이다. 장천사가 돌아오면 너에게도 어려움이 따를 터,
나는 오늘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았다. 차라리 지금 나를 죽이고 우리의
은원을 끝내는 것이 어떠하냐!”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이 장탄식을 터뜨렸다.
누가 들어도 대협객의 풍모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방에서 ‘맹주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찍이 서 있던 신룡진인도 한때나마 맹주를 의심했던 것을 부끄러워했다.
경재학이 담담한 얼굴로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장소야! 너는 내 말뜻을 알아들었느냐?’
감동적인 말과 달리 지금 경재학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장소가 자기 말을 알아듣고 이제 그만 나와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 자기가 목을 내어주면 장경선은 훌쩍 떠나 버리고 말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장소에게 불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섬전수가 무림고수들을 죽이다 보면 시간이 점점 흘러갈 것이고,
그러다 보면 부지불식간(부지불식간)에 장염이 들이닥칠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죽기를 바라는 모양인데… 쉽지 않을 것이다.’
독하게 마음먹은 경재학이 장경선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나섰다.
정말 장경선의 장력이 닿을 만한 곳으로 걸어나간 것이다.
뜻밖의 대담한 제의에 장경선도 갈등하기 시작했다.
경재학이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무림인들을 구하기 위해 대신 죽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정말 경재학의 진심이라면 지금까지 그를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속에서 천하제일가에 대한 증오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아무래도 너와 나의 집안은 악연이었나 보다.’
장경선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마침내 경재학을 죽임으로 모든 은원에 종지부를 찍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