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126)
9장. 생사(生死)는 순간이다
장경선이 착잡한 표정으로 눈앞의 경재학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안겨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속히 은원을 종결 짓고 이곳에서 떠나고 싶다.
한번 그렇게 마음을 먹자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좋다.”
장경선이 흔쾌히 대답한 순간이다.
전각의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요란하게 웃으며 걸어나왔다.
“크하하하핫!”
“…”
장경선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뜻밖에도 마교 교주 장소가 나타난 것이다.
‘으음… 하남성 어딘가에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리도 빨리 나타날 줄이야.’
장경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되면 경재학을 죽이고 떠나려고 했던 계획에 조금 차질이 빚어질
판이다.
“헉! 마교 교주 장소!”
“제천혈마다!”
곳곳에서 비명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림에서 제천혈마 장소는 공포의 대명사로 그의 무공과 잔인한 성격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장소의 뒤로 십여 명의 마교 고수들이 걸어나왔다.
그들을 알아 본 무림인들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교 교주까지 나타났으니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지 알 수가
없다.
장소가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좌중을 쓸어 보았다.
아무리 봐도 오늘 자기를 막을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장경선의 오행지기를 얻는 일만 남았다.
조금 전 경재학이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보답을 해줘야 한다.
“섬전수야, 나도 오늘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마. 들어보겠느냐?”
장경선은 자기가 장소보다 빠르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다소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거라.”
“너는 경재학의 목을 원하고 나는 너의 심장을 원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 네가 먼저 경재학을 죽인 뒤 나에게 너의 심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 가지씩 원하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보다 좋은 방법
이 또 있겠느냐?”
경재학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장소를 바라보았다.
제정신이 아닌 놈인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장소는 뜻밖에도 자기의 목숨까지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소의 말에 경재학보다 더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천하제일가와 무림맹의 고수들이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무림의 정기가 쇠(衰)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장소 같은 마인이
대협객을 희롱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사악한 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마물(魔物)아! 맹주님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
“와아! 제천혈마를 죽여라!”
장소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장경선과 무림의 고수들을 둘러보았다.
경재학의 입에 발린 말 한 마디가 천하제일가와 무림맹을 똘똘 뭉치게 한
것이다.
그뿐 아니다.
복수의 화신 장경선조차 경재학을 보는 눈이 이전과 달라진 느낌이다.
경재학에 대한 원한이 사라지면 장경선은 아무 때라도 미련없이 달아날
것이다.
“크하하핫! 이러석은 놈들! 너희들은 맹주가 어떤 사람인 줄이나 아느냐?”
깜짝 놀란 경재학이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너 이놈!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
문득 장소가 말을 끊고 경재학을 바라보았다.
이미 폐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이용할 일도 없을 것이다.
자기에게 쏟아지는 무림인의 분노를 막고 장경선을 뜻대로 요리하려면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말을 하려고 생각하니 너무 많다.
저 한 사람과 이토록 오래, 그리고 복잡한 관계를 맺었던가 생각하니
놀랍기까지 하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귓구멍을 열고 잘 들어라.”
마침내 장소는 사람들 앞에서 지난 일들을 모두 밝히기로 했다.
자기야 어차피 세상에 알려진 대마인이니 새삼 감출 것도 없다.
이윽고 장소는 당고랍산맥의 만남과 경재학과 맺은 남북지약,
그리고 장가촌 사람들의 집단 살해 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어디 그뿐이랴!
내친김에 장소는 삼마가 자기를 제거하기 위해 경재학과 정사무림첩을
만든 일과 최근의 오색비연무 신호의 내막까지 남김없이 말해 버렸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하나 더 말해주마. 무림에 아직 오행혈마인이 나타
나지 않았을 때 경재학은 본좌에게 ‘너는 아직 오행혈마공을 완성하지
못했다’ 고 말한 적이 있다. 대체 저자가 그걸 어찌 알고 있었는지 그게
늘 궁금했다. 크크큭!”
장소가 낄낄거리며 경재학을 바라보았다.
“…”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경재학은 변명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평생을 감추어두었던 과거가 백일하에 드러나자 눈앞으로 작은 불빛이
어른어른거린다.
가라앉았던 내상이 도졌는지 갑자기 복부가 팽만해지면서 비릿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꿀꺽. 꿀꺽.
입 안 가득 고인 핏덩이를 삼키던 경재학의 눈이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사상 최악의 궁지에 몰린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오행혈마인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 바람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경재학의 정신은 현실에서 떠나 마음속의 어느 한 점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역천(逆天)의 힘은 오직 오행혈마인이다. 역천의 힘! 역천의 힘!’
얼마 후 경재학은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단 두 마디만 계속
중얼거렸다.
“오행혈마인… 역천의 힘… 오행혈마인… 역천의 힘…”
경영자는 물론 천하제일가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경재학에게 돌아갔다.
그들에게는 생명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아들이며 소가주였다.
그러나 경재학이 했다는 일을 들으니 무림공적보다 더하다.
과연 한 사람이 그 모든 일을 다 벌였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재학아…”
경영자가 나직이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아들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가서 헤매고 있는 듯하다.
차라리 지금은 저렇게 얼이 빠진 게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화산파 장문인 상유천이 경재학과 천하제일가 모두를 불신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경재학이 지금까지 벌인 일의 배후에는 천하제일가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공적만 해도 수십 명의 전문 인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경재학과 교분이 두텁던 곤륜파 장문인 신룡진인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
경재학은 왜 그런 일을 벌인 것일까?
살짝 미쳤던 것은 아닐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꾸밀 수 있단 말인가!
영천상인도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간 경재학과의 교분을 생각하니 부끄럽기만 하다.
다른 오대문파 장문인들이 자기와 신룡진인을 어떻게 생각할지 벌써부터
염려가 된다.
이제 점창파와 곤륜파는 눈치 보는 일만 남은 것이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아미파, 화산파, 무당파, 공동파 장문인들이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간 장염과 경재학의 갈등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지만,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깊은 은원이 자리하고 있을 줄이야!
문득 화산파 장문인 상유천이 경영자를 향해 소리쳤다.
“오늘 이후로 우리 화산파는 하남성에서 천하제일가를 정파의 무가(武家)로
인정하지 않겠소!”
“헛…”
육대문파 장문인들과 장로들이 깜짝 놀라 상유천을 바라보았다.
화산파의 장문인 상유천이 사자검이라 불리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상유천은 모호함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어떤 때는 다소 모험적이기도 했다.
지금도 갑자기 무림의 판도를 뒤집을 소리를 하고 만 것이다.
화산파가 천하제일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슬아슬한 발언이었다.
상유천은 어차피 천하제일가의 누가 이 일련의 불의(不義)에 관계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관계를 끊을 생각이었다.
무림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런 종류의 일은 가문 내에서 흐지부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지난 뒤 누가 무슨 권리고 다른 문파 또는 가문에 들어가
지난 일의 시비를 가릴 수 있겠는가!
상유천의 말이 끝나자 아미파의 파경사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미파도 하남의 천하제일가를 정파의 무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곧 이어 무당파와 공동파의 장문인도 천하제일가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우리도 사자검(獅子劍) 상 장문인과 뜻이 같소이다.”
“…”
“아미타불… 빈승(貧僧)도 이번 일에 한두 사람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소림사의 고승 원정선사까지 그렇게 말하자 신룡진인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절친했던 이대문파가 멸문을 하고, 이제 천하제일가마저 무림에서 사라지는
순간이다.
영천상인을 보니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하제일가를 둘러보고 있다.
그도 자기만큼이나 충격을 받았으리라.
묵묵히 사태를 지켜보던 신룡진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리 곤륜파도… 하남성의 천하제일가가 그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던 영천상인은 신룡진인보다 더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
“점창파도 오늘 이후로 천하제일가와의 인연을 끊겠소.”
영천상인의 말이 끝나자 천하제일가의 고수들 속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라고? 그럼 우리가 사파란 말인가! 그대들은 무림맹의 기반을 닦은 게
바로 우리 천하제일가라는 사실을 벌써 잊었는가!”
몇몇 천하제일가의 고수가 발끈했지만 경영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육대문파 장문인들의 말처럼 적지 않은 식솔들이 이번 일에 관계되었을
것이다.
무림맹에서 그런 천하제일가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한
일이었다.
“후우…”
참으려 했지만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남성에서 정파 무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서운 것이다.
정히 무가(武家)로 남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이다.
하남성에 있는 한 천하제일가는 사파(邪派),
혹은 정사지간(正邪之間)으로불리게 될 것이다.
수백 년 이어온 가업을 한순간에 모두 잃게 된 셈이다.
다른 곳으로 간다 해도 이미 얼굴이 널리 알려진 고수들은 강호의 출입을
하지 못할 것이다.
경영자가 자기만큼이나 늙어서 수염이 허연 경재학을 안고 허허롭게
웃었다.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이다.
한숨을 쉬던 경영자가 천하제일가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강호의 도리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오늘로 천하제일가는
강호에서 사라질 것이니 떠날 사람은 떠나도 좋소이다.”
“…”
경영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아 있던 삼십여 명 중에 이십 명이 떠나
버렸다.
모두 경영자의 인품에 반해 따라다니던 이른바 외부인들이다.
경영자가 남아 있는 십여 명의 친인척들을 향해 짧게 말했다.
“재학이도 우리의 가족이니 버리지 않을 것이다.”
“…”
한편 장경선은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경재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재학이 오행혈마경을 무림에 배포한 사람이었다니!
이십여 년 전 느닷없이 용문산(龍門山)과 향산(香山)으로 가서 제례를
지내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제사를 지내던 한 석굴에서 오행혈마경을 발견하고 하늘의 뜻으로 알았다.
그러나 오늘 보니 그것은 경재학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증스럽게도 그는 무림을 위해 자기를 이용하고 가족도 희생된
것이라고 했다.
자기 인생이 이렇게 처참하게 변한 것은 모두 저 찢어 죽일 경재학 때문
이었다.
화살에 꿰뚫려 죽어가는 부모 형제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놈을 대협객으로 알고 용서하려 했다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짐승 같은 놈! 죽이고 말 테다!”
마침내 장경선이 이성을 잃고 경영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장경선을 본 경영자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 차 올랐다.
모든 무림인들이 거들어줘도 살까 말까 한데 이제 겨우 열 명 남짓한
인원만이 남았다.
다른 무림인들은 더 이상 천하제일가와 장경선의 일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경재학의 몸뚱어리를 끌어안고 있던 경영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잘못 키웠으니 그 죄가 나에게도 있다. 함께 죽겠다.’
콰콰콰콰… 꽈꽝!
퍼펑!
경영자의 귀로 요란한 폭음이 들렸다.
경력에 휘말려 머리도 산발이 되었지만 정작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자기 머리 위에서 장소와 장경선이 두 마리 용처럼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빌어먹을 놈!
이렇게 살려줄 것이었다면 비밀이나 지켜줄 일이지!
장소에 의해 살아났음에도 전혀 고맙지가 않다.
좌우를 살피니 주변에 있는 무림맹의 고수들도 경천동지의 싸움에 넋을
잃고 있었다.
슬그머니 일어난 경영자는 경재학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계속 천둥과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이 망하든 말든 지금은 품 안에 안긴 아들의 생명을 지켜야 했다.
장경선은 갑자기 장소가 날린 권풍(拳風)에 내부가 진탕된 상태였다.
치사하고 야비한 게 사파(邪派)라고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영자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들다가 등짝을 된통 얻어맞은 것이다.
눈에서 불이 번쩍이는 순간 경재학은 보이지 않고 오직 장소만 보였다.
장소와 어우러져 정신없이 권장을 주고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손해
보는 것은 자신이다.
위기를 몇 번 넘기니 그제야 달아지 않고 뭘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내상을 입었는데 장소를 따돌릴 수 있을까?’
장경선이 뒤로 훌쩍 몸을 날리며 장소의 상태를 살폈다.
오행지기 셋을 모은 장소는 어젼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그러나 이미 자기는 팔다리가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장경선이 막 몸을 날리려고 할 때다.
장소가 벼락 같이 호통을 치며 날아왔다.
“네가 오행지기 둘을 모아 육지비행술을 터득했다면 셋을 모은 나는
어떻겠느냐!”
“헛!”
달아나려던 장경선의 몸이 멈칫거렸다.
괴인의 금기(金氣)를 흡수한 뒤로 근골이 강철처럼 단단해져 경공의 극치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이미 세 개의 오행지기를 모았으면
자신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가벼온 내상까지 입은 지금 다시 한 번 등을 내주면 내부가 완전히 파열
될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장경선은 그만 달아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장소가 너무 가까이 이른 것이다.
장경선이 이를 뿌드득 갈며 오행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장소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기 전에는 달리 피할 길이 없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이판사판이다.
“내가 쉽게 당할 것 같으냐!”
장경선이 두 손을 들어 올리자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의 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휘우우웅!
장소의 몸이 바람벽에 닿은 순간이다.
장경선이 손바닥을 밖으로 밀어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두 개의 손 그림자가 벽에서 튀어 나갔다.
콰콰콰콰콰!
갑자기 섬전십이장이 날아오자 대경실색한 장소가 두 손을 휘둘렀다.
기이하게도 장소의 손에서는 불기둥이 쏟아져 나왔다.
화르르륵!
화기(火氣)를 담은 장소의 천마폭열장과 장경선의 섬전십이장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콰콰쾅! 콰쾅!
쩌저저적-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갈라져 나갔다.
그뿐 아니라 천마폭열장의 조화로 하늘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쏟아져
내렸다.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전각들이 권풍과 장풍에 무너져 내렸다.
장소의 화기는 평범한 불이 아니어서 한번 붙으면 다 탈 때까지 꺼지지도
않았다.
꺼지지 않는 불꽃은 계속해서 건물과 사람들을 불살랐다.
불비가 그친 것은 거의 한 식경이나 지나서다.
무림인들은 장소와 장경선이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밤인데다가 두 사람이 워낙 빨리 움직였고,
꺼지지 않는 불비까지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이런 천외천(天外天)의 무공을 들어본 적도 없는지라
그저 악몽으로 여겼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악몽은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도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한편 장경선은 계속되는 장소의 공세를 받아내고 있었지만 이미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있었다.
장소의 공세는 점점 가볍고 빨라졌지만 자신은 정반대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져 갔다
인시 말에 이르자 몸이 어찌나 무거워졌던지 얼굴로 날아오는 장풍을
보고도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빠각!
장풍에 맞은 장경선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한번 쓰러진 장경선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장경선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끔뻑였다.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눈에는 검은 하늘이 보였다.
목이 완전히 부러져 한 바퀴 돌아가고 만 것이다.
온모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팠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었다.
“끄으으…”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몸은 저 혼자 경련을 일으키며 울고 있었다.
뒤이어 장소가 허공을 밟으며 서서히 내려왔다.
장소는 반대로 뒤집혀 있는 장경선의 얼굴과 몸통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냥 심장을 내어주지 그랬느냐? 그랬더라면 몸뚱어리는 온전히 보존했을
것이다.”
“으흐…”
장경선은 끔찍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피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숨거나 사람을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기나긴 세월이 큰 짐처럼 느껴졌는데 이렇게 누우니
너무 홀가분하다.
좀 더 일찍 짐을 내려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라도 쉬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으으으… 심장이… 없는 몸을… 어디에… 쓰려구…”
장경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받자 장소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섬전수 장경선은 생각보다 특이한 자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여유를 보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장경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크흐흐흐! 머리가 나쁘면 몸뚱어리가 고생한다고 하더니… 여하튼 도망가지
않아줘서 고맙다. 그래도 가져갈 건 가져가야지?”
“…”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장경선이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장소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장경선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이 미련한 녀석아, 네놈은 사실 오행지기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를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나면 억울해서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본좌의 마음이 너그러우니 특별히 가르쳐 주마.”
“으으으…”
잠시 말을 끊은 장소가 장경선의 등을 더듬었다.
심장 어림을 찾고 있는 것이다.
머리와 몸통의 방향이 맞질 않아 허파로 손을 넣을 뻔했다.
“만약 내가 세 개의 오행지기로 너를 앞지를 수 있었다면 어찌 처음부터
구차하게 입씨름을 했겠느냐? 나는 그저 수, 화, 토의 기운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네놈은 너에게 오행지기를 빼앗긴 상대와의 싸움을 잘 생각
해 보아라. 그가 목기(木氣)나 금기(金氣)를 이용해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
말이다.”
장경선은 어렴풋이 장소가 하려는 말을 감지했다.
달아날 기회가 한번 있었는데 바로 그때 장소의 말에 놀라 멈칫했었다.
“으음… 으으으…”
“만약 네놈에게 하나의 목기(木氣)가 있었다면 어찌 하나의 오행지기로
상대와 같은 공능을 얻지 못했는가 생각해 본 적은 없느냐? 크하하핫!
네놈은 어찌 숫자로 오행지기의 우열을 가리려 들었단 말이냐! 너 같이
어리석은 놈에게 심장을 내어준 바보가 세상에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크하하핫!”
장소는 오랫동안 마인들과 생활하며 적지 않은 술수를 익혔다.
그러나 장경선은 명가(名家)의 무인으로 키워져 나중에 길을 잘못 든
것뿐이다.
아직 속고 속이는 술책에 익숙하지 않은 장경선이 장소의 속임수에 넘어
가고 만 것이다.
게다가 장경선과 상대했던 화산파 제자 공야숙은 이미 오행지기의 공능
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생각이 없던 사람이다.
그날도 공야숙은 화산파의 무공으로만 장경선을 상대했다.
그러다 보니 장경선은 오행지기 각각의 공능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다.
그에 비해 장소는 제갈위기의 무극토(無極土)와 명오의 화염천(火焰泉)이
보여주는 오행지기의 공능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그런 뒤에 다시 흡수를 했으니 오행혈마인 중에서 융합한 오행지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장경선은 문득 자신에게 오행지기를 빼앗긴 괴인을 떠올렸다.
그는 끝까지 화산파의 무공만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승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보여주지
않은 금기(金氣)의 공능으로 다시 자기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으으으… 생사(生死)가 순간임을 알라고 했던가…’
생각해 보니 그의 심장을 얻었다고 기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자신은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었다.
아마 삼십 년이 지난다 해도 변화가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아등바등 살려 했던가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푸흐흐흐…”
장소는 돌연 장경선이 웃음을 터뜨리자 냉소를 날렸다.
“흥! 네놈도 죽음을 앞두고 미쳐 가느냐! 특별히 너는 이제껏 하지 않은
방법으로 다루어주마!”
말을 마친 장소가 마침내 장경선의 널찍한 등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푸욱!
“끄으으으…”
등으로 파고든 장소의 손끝이 몸통을 지나 심장에 도달했다.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지만 장경선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가… 으으으… 나에게 했던 말이… 이제야… 떠오른다… 장소야…
으음… 너도 생가… 순간임을… 알아라…”
“미친놈! 지금까지 온갖 사악한 일을 벌여온 주제에… 혼자서 갑자기
도사라도 된 듯 지껄이지 말아라!”
장소가 움켜쥔 심장을 우악스럽게 잡아 뜯었다.
콰드득!
“끄윽! 그렇지… 그래… 그…”
장경선의 커다란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잃어갔다.
장소가 약간 멍한 표정으로 장경선을 바라보았다.
자기와 함께 강호를 진동시켰던 마인의 최후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제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장소가 장경선의 심장을 입으로 가져갈 때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 자루 검이 쾌속하게 날아왔다.
검에 실린 기운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장소가 몸을 훌쩍 날려 피했다.
그러나 검은 눈이라도 달린 듯 장소의 뒤를 따라붙었다.
츠츠츳!
“이기어검?”
장소가 놀란 얼굴로 날아오는 검을 바라보았다.
강호에서 이기어검을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검은 장소의 손에 들린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흥! 어림도 없다!”
장소가 왼손으로 검을 잡아갔다.
검과 장소의 손이 만나는 순간이다.
돌연 장소의 손목이 돌아가며 손끝으로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날아가던 검은 그 손끝에 막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어느새 장소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어 있었다.
“헛!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 맨손으로 칼을 받는 기법)!”
서검자(書劍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이없게도 장소는 자기가 날린 이기어검을 손으로 잡아낸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오행혈마인의 완성을 막아보려 했지만 저 정도라면 불가능
하다.
장염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들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패할 줄은 몰랐다.
“크크크, 이것이 네 것이냐? 가져가라!”
장소가 서검자를 향해 들고 있던 검을 집어 던졌다.
검은 장난하듯 빙글빙글 돌며 서검자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헛!”
서검자가 황급히 몸을 날렸지만 회전하는 검은 마치 자기가 펼쳤던
이기어검처럼 끝까지 따라왔다.
검을 피해 미친 듯이 몸을 움직이던 서검자가 문득 멈추어 섰다.
그리고 마치 꽃을 뿌리듯 두 손을 부드럽게 흔들기 시작했다.
검끝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맞부딪치기로 작정한 것이다.
파파팟!
화산파의 절기 산화무영수(散花無影手)가 검을 때렸다.
그러나 검은 날아가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서검자의 몸에 박혀
들었다.
“크윽!”
서검자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자신이 날렸던 검이 박혀 있었다.
그래도 서검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산화무영수로 검의 방향을 바꾼 덕에 위기를 넘긴 것이다.
“크크큭! 제법이군.”
본래는 노인의 가슴을 노렸다.
그런데 보이지 않은 힘에 막혀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살려주마. 꺼져라.”
장소가 손을 휘두르자 무지막지한 돌풍이 서검자를 향해 몰아쳤다.
콰콰콰콰!
어깨에 밖힌 검을 미처 뽑기도 전이다.
돌풍에 휘말린 서검자가 불타고 있던 전각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서검자를 날려 버린 장소는 즉시 입으로 심장을 밀어 넣었다.
장문인들도 방해를 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옥의 불길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육대문파 장문인들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육대문파 장문인들이 도착했을 때는 장소의 목구멍으로 심장이 넘어간
뒤였다.
장소가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알 수 없는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칠대문파 장문인들은 그 기운에 막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아무리 걸어가도 제자리였다.
소용돌이는 시간과 공간을 같은 자리에 잡아두고 있었다.
다급해진 춘양진인이 검을 뽑아 장소를 향해 날렸다.
그러나 춘양진인의 내력이 담긴 검도 기이한 소용돌이에 닿자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아아! 어떻게 저런 일이…!”
가까이 갈 수도 없고 검을 날려도 정지한다.
말 그대로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도리밖에는 없었다.
정말 이대로 지옥이 열리는 것일까?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절망한 얼굴로 장소를 바라보았다.
장소의 몸이 소용돌이 안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장소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이번에 찾아온 고통은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끔찍했다.
고통이 극에 달한 장소는 온몸을 쥐어뜯다가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장소는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한 가운데 나른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너무 편안하고 만족스러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였다.
“장소야.. 장소야…”
아주 낮고 끈적한 음성이 하늘 저편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누구요?”
“나는 너의 주인이다.”
“미쳤군! 나에게 주인은 없다!”
“지난 십여 년 간 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지 않았느냐? 이제 흩어졌던
오행의 공력이 모두 모였으니 내가 너의 주인이다.”
다음 순간 오랫동안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 들어보니 그것은 자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오행혈마경의 법문
(法文)이다.
장소는 그 소리를 들으며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찌 저럴 수가!”
아미파의 파경사태가 정면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믿을 수 없게도 하늘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장소의 머리 위로 검은 공간이 갈라지며 새파란 도깨비불이 쏟아져 내렸다.
파란 불덩이들은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보는 앞에서 장소의 몸으로 파고
들었다.
그럴 때마다 장소의 몸은 펄떡펄떡 경련을 일으켰다.
마침내 모든 불덩이가 장소의 몸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불덩이가 사라진 뒤 장소의 몸은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왔다.
장소의 두 발이 땅에 닿자 장문인들을 막고 있던 기의 소용돌이도 서서히
가라앉져 갔다.
칠대문파 장문인들이 주춤거리며 장소에게 다가갈 때다.
장소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장소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그윽했다.
장소가 기지개를 켜듯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쉬지 않고 몇 번이나 숨을
들이마셨다.
“흠… 정말 좋은 공기로구나. 기온도 적당하고… 이것이 나의 세상인가?”
장소는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장문인들을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헛! 너희가 칠대문파 장문인들이로구나!”
“…”
장문인들은 대답하지 않고 병장기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언제 공격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탓이다.
장소가 고개를 치켜들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장문인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소림사의 원정선사다.
“무슨 짓을 하는 게냐!”
돌연 원정선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금강경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미파의 파경사태가 다른 장문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장문인들께서는 마음을 지키세요! 저것은 고대(古代)의 심령금제술
(心靈禁制術)입니다!”
본래 아미파의 파경사태는 무공보다는 심령술(心靈術)에 더 뛰어났다.
장문인들은 파경사태의 말에 즉시 각자 사문의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장소의 심령금제술에 당한 뒤라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상승의 공력을 끌어오렸다가는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
원성선사를 제외한 육대문파 장문인들은 전신의 공력을 흐트러뜨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계속 공력을 운용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화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슴은 점점 더 두근거려 숨 쉬기도 힘들었고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미 칠순에 다다라 어지간한 일에는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던 장문인들
이다.
그러나 이 순간 몸과 마음은 아득한 과거로 돌아가 사춘기 시절의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원정선사를 제외한 육대문파 장문인들이 공력을 풀고 앉아버리자 장소가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근처에 떨어져 있던 수십 개의 도검(刀劍)이 하늘로 말려 올라가는 듯
하더니 이내 장문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파파파팟!
육대문파 장문인들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심장이 이리도 벌렁거리고 있으니 지금 공력을 사용하면 반드시 걷잡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주화입마냐 당장의 죽음을 면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당황한 장문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다.
홀로 서 있던 소림사의 원정선사가 입으로 끊임없이 독송(讀誦)하먀 허공으로
두 팔을 휘저었다.
“마땅히 색(色)에 주(住, 거처)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와
맛과 부딪침과 법에 주(住)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주(住)한 바 없는
마음을 낼지니라. 만일 마음이 주(住)하는 바 있으면 곧 참으로 주(住)함이
아닐지니, 이런 고로 불타가 말하되 보살이 마음을 마땅히 색에 주(住)하여
보시하지 아니한다 하였느니라.”
장문인들의 머리 위를 수백 개의 손 그림자가 덮어갔다.
원정선사가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으로 장문인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콰과광! 쾅! 쾅!
천수여래장에 맞은 검들이 사방으로 튕겨났다.
그 대신 장소의 공력을 감당하지 못한 원정선사는 뒤로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혀야 했다.
콰직.
떨어져 내리는 순간 힘을 잃은 선사의 두 팔이 부러져 나갔다.
원정선사는 피부를 뚫고 밖으로 튀어나온 자기의 뼈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바닥에 고개를 떨군 원정선사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선사(禪師)!”
“대사(大師)….”
육대문파 장문인들이 황급히 원정선사에게 달려갔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