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24)
12. 나타난 전설의 세면(細綿)
무림맹 사천지부 의혈단에서는 장고(長考)의 회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회의의
주제는 사천혈사와 새로 선출된 일룡이봉삼절사검에 관한 문제였다. 의혈단의 심
처에는 지금 단주와 부단주, 그리고 내외 순찰총감과 두 명의 정무부장(情武部
將, 정보부와 무력부 부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천 경계에서 죽어간 무림 동도중 구대문파 사람만 칠십 이 명이오. 다른 대
소문파까지 합치면 거의 백 오십 명이 죽었소. 이는 제 이의 환란징조라 하지 않
을 수 없소.”
의혈단의 단주 건곤일척(乾坤一擲) 김다주(金多州)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
다.
“후… 대체 누가 이런 만행을 저질렀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후에
맹주께 무어라 말씀 드려야 할지…”
외단 순찰총감인 청송검객(靑松劍客) 상일검(像一劍)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단주, 모든 것이 저의 부족함 때문이오… 모든 인력을 동원했으나 흉수를 찾
을 길이 없었소이다…”
내단 순찰 총감 벽력장(霹靂掌) 왕지(王旨)가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꽝 내리쳤다.
“대체 어떤 놈들이 그토록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제가 추측컨데 이패의 잔당들이 아닌가 싶소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부단주 철혈판관(鐵血判官) 종피리(種披理)가
확고부동한 음성으로 부연설명을 했다.
“생각해 보시오. 의혈단의 행사는 이패의 강호행 때문에 생긴 것 아닙니까? 그
렇다면 이 행사가 원활히 운영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패
뿐이외다.”
“허나 그것은 이미 이 십 년 전의 일이 아니오?”
단주 건곤일척 김다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만일 그들의 잔당이 다시 세력을 모은 것이라면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김다주가 생각해 보니 부단주의 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금 무
림에 의혈단을 적으로 돌릴 정도로 강한 사파 세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의
혈단과 무림맹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오직 이패 뿐이다’ 라는 것
이 어쩌면 모두의 공통된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좌중은 단주가 주제를 바꿔 신진고수에 대한 이야기로 돌리자
그제서야 다시 활기를 띄었다. 한동안 좌중에 오가던 얘기를 들은 김다주가 책상
을 한번 탁 쳐서 시선을 모은 뒤 조용히 말했다.
“일룡이봉삼절사검은 이번에 우리 의혈단에 입단한 신진 고수들이오. 물론 그
들의 무공은 여러 원로들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다음세대의 주역인 것은 틀림이 없
소. 본좌는 그들에게 이번 사천혈사의 조사를 맡겨보고 싶소이다.”
어차피 정답도 없던 문제라 다들 이구동성으로 ‘단주의 고견에 탄복할 따름입
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얘기는 그들을 위해 마땅히 축하 연회를 열어야 한
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외단 순찰총감 상일검이 ‘근래에 마침 요리명인이 한 명 출현했는데 사천제일
루에 머물며 요리를 전수하고 있다’고 하자, 무리들은 일제히 사천제일루에서 신
입단원 환영식을 열자고 요청하였다. 김다주는 엄숙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본 후
회의의 최종 결론을 발표하였다.
“상대협은 삼일 후 신입단원 환영식을 사천제일루에서 열겠다고 통보하시오.
본좌가 그날 신입단원들에게 사천혈사의 처리임무를 맡기도록 하겠소.”
거의 비슷한 시간 사천성 성도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중한 운현궁(雲玄宮)에서
도 관부 특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의 주재자는 성주 왕가위였다.
“그대들은 이번 사천성 일대에서 벌어진 참극에 대해 왜 관부가 늑장대응 하고
있는지 말해보시오.”
“전하, 본시 무림과 관은 우물물과 강물과 같아서 서로 침범하지 않는 관례가
있사옵니다.”
성내의 치안을 맡고 있는 이풍진(李風塵) 제독이었다.
“이제독은 그들의 죽음이 무림인들 끼리의 행동이라는 물증이 있소?”
성주의 추궁에 문득 이풍진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죽은 사람이 대소무림방파
사람들인 것은 분명했으나 죽인자들이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전하, 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성내에서 벌어진 집단살인사건을 재조사하겠
나이다.”
그제서야 왕가위 성주의 굳은 얼굴이 펴졌다.
“그리만 해주신다면 그대가 나의 큰 근심을 하나 덜어 주는 것이오. 어찌됐든
나는 인명을 그처럼 경시하는 무리들이 어떤 자들인지 꼭 알고 싶소. 수고해 주
시기 바라오.”
밤이 깊어 갈수록 민주려는 잠이 오지 않았다. 과연 내일 아침 장염은 자리에
서 떨쳐 일어날 수 있을까? 그 부랑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천제일루를 위해서라
도 몸이 회복되야만 한다고 중얼거려보는 민주려였다.
객잔의 특실에 누워있는 장염도 잠을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선을 다해
살아 왔는데, 내일은 정말 어찌될지 자신이 없었다. 사천오절은 이미 다 터득했
으나 일어서 있을 기력이 없었다. 허리를 조그만 세워도 아랫배 윗배가 팽창하며
내장이 배배 꼬이듯 아파 왔던 것이다. 장염은 속으로 끊임없이 ‘내일은 다 나을
것이다’ 중얼거렸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늘 그렇게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장염은 더욱 내일 몸이 완쾌되기를 기원했다.
장염의 옆방에 머물게된 이대추도 잠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기억하
는 한 내일의 행사는 사천제일루 창업이후 최대 행사였다. 만일 행사를 망치게
된다면 민주려는 진짜 청부 살인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장염을
생각하면 마음이 놓였다. 낮에 보여준 장염의 신위는 대단했다. 이대추 자신도
그만큼 빠르게 요리를 할 자신은 없었다. 민주려는 못 보았지만 이대추는 잘려나
간 사슴고기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펄떡거리는 생명을 느꼈다. 저 녀석은 고금에
보기 드문 재료 다듬기 실력을 가졌던 것이다. 언젠가 사부에게 들었던 말이 떠
올랐다.
“대추야, 너는 잘 알아 둬라. 이 사부는 평생에 단 한번 진정한 요리 명인을
만나 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다듬어진 재료는 죽은 것도 산 것 같았고, 산 것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았다. 요리명인의 싹은 맛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다듬
은 재료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맛이 아닌 재료에서 요리명인의 싹을 볼 수 있다는 노사부의 마지막 말은 그대
로 유언이 되었다. 그날 밤 이대추의 품안에서 노사부가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이대추는 저 거지같은 놈에게 있는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드디어 대망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사천제일루는 아침부터 묘한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준비된 수레 두 개에는 음식 재료가 수북히 쌓
여 있었고, 주방의 요리사들은 일손이 손에 안잡히는지 괜히 안뜰과 객점을 오락
가락했다.
제일 먼저 안뜰로 나온 사람은 민주려였다. 그리고 이대추가 나왔고, 마지막으
로 장염이 나왔다. 민주려는 일단 장염이 거동하는 것을 보자 입이 귀까지 찢어
졌다. 민주려는 다른 요리사들에게 객점의 주방을 맡기고 이대추와 장염을 데리
고 운현궁으로 출발했다. 점심 연회였지만 이런 일은 미리 가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 우환(憂患)이 적은 것이었다. 더구나 장염이 남들 앞에서 만들 수 있는 요
리란 다섯 가지 뿐이니 기본적인 요리들은 몰래 만들어 놓아야 했다.
세 사람 모두 묵묵히 소가 끄는 수레를 따라 관도를 걸어갔다. 장염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장이 꼬이는 듯 했지만 무극일원심법의 내가요상법에 따
라 호흡을 조절하였다. 운현궁은 성도 중앙에서 약간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짐들을 주방에 내려놓았다. 이미 아침 식사 후
라 주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대추는 주방문을 닫아걸고 장염과 함께 본격적으로
연회에 쓰일 사천요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십 여종의 연회요리가 서서히 모
습을 갖춰갔다. 대충 기본 요리가 완성되자 민주려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요리
사들을 불러 운현궁의 중심부에 있는 백화각(百花閣)으로 나르게 했다.
백화각의 가운데는 임시로 만든 화덕과 요리 기구들이 진열되 있었고, 그 주변
으로 이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나무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정오가 되자 주연공주가 좋아한다는 백화각의 마당에는 특별히 초대받은 사천
성 유명인사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고관대작을 지내다가 낙향한 중앙관료 출신
부터, 사천경제인연합회(四川經濟聯合會) 회원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가족들
이었다. 그래봐야 그 수가 이 백을 넘지 않았는데 요리명인을 위해서 왕가위 성
주가 손님을 이 백 명으로 못 박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그동안 성도의 호사가(好事家)들 입에 오르내린 사천제
일미녀 민소백과 쌍벽을 이룬다는 금상첨화(錦上添花) 왕주연과 경천동지(驚天動
地) 요리광인(料理狂人)에게 있었다.
요리사들이 날라 온 이 십 여종의 요리는 백화각 위와 아래에 수북히 진열되어
있었다.
“여러분, 오늘의 연회에 참석해 주어서 감사하오.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당대
의 요리명인을 초대해 준비한 것들이니 많이 드시기 바라오.”
성주가 말을 마치자 사람들은 ‘성주님과 공주님이 천세(千歲) 만세(萬歲) 하시
기를 바랍니다’외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충 자리에 앉아 가볍게
차를 마시거나 술잔에 술을 따르는데 어디선가 징소리가 났다.
“징~~~~~~”
그리고 드디어 장염과 민주려, 이대추가 장내에 들어섰다. 장염과 함께 무대에
입장해 고관대작들과 지역유지들을 둘러보던 민주려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흠칫
놀랐다. 상상도 못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바로 사천제일을 두고 치열하게 경
쟁하던 중경삼림의 주인 왕정문(王正門) 이었다.
‘저자가 어찌 이 자리에…?’
민주려가 알기로 이 자리는 성도에서도 겨우 이 백 여명만 초대된 자리였다.
그만큼 신분과 지체가 높지 않으면 구경도 하기 어려운 자리인데, 일개 객잔 주
인이 와있는 것이다.
왕정문은 민주려가 자기를 쳐다보며 놀란 눈을 하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네놈의 수작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오늘 이후로 사천제일루는 내 것이
다…’
왕정문은 원래가 왕가위 성주의 먼 친척이었다. 일찍부터 정치에 뜻이 없어 가
문을 떠나 천하를 방랑하다가 요리계에 뛰어든 그는 주방 보조에서 시작하여 일
급 숙수까지 이른 자수성가형 요리사였다. 그는 나이가 들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
시 객점을 시작하여 오늘의 중경삼림을 건설하였다. 물론 사천으로 돌아온 뒤로
는 성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거의 자기 힘으로 사천 요식업계를
이끌어 왔었다. 그런 만큼 요식업에 대한 소명감이 남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사
천제일루가 눈에 가시였는데, 헌원일광이라는 사내가 찾아와 털어놓은 이야기를
듣고 벼르던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사천제일의 모든 영화를 다시 되찾을 기회가
제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민주려는 무대에 이르자 성주에게 읍을 해 보이고, 장염을 소개한 뒤 이대추
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이제부터는 장염이 책임져야할 독무대였던 것이다. 장염
이 불붙은 화덕 앞에 홀로 서있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한 것 보
다 나이가 적다는 것과 역시 광인답게 몰골이 특이하다는 것이 입을 다물지 못하
게 했다. 사람들은 내무대신이 나와서 ‘요리명인이 주연공주를 위해 몇 가지 요
리를 선보일 것이다’ 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잠잠해 졌다.
“이제 요리명인이 시연하실 요리는 다음과 같소. 선포유채심(鮮鮑油菜心), 은
아록육사(銀芽綠肉絲), 명주유채심(明珠油菜心), 어향육사(魚香肉絲), 담담면(擔
擔面)… 이오.”
장염이 요리재료 앞에 가서 눈을 감았다. 머리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 내렸
다. 장(腸)에서 또다시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
은 요리광인의 심오한 모습에 숨을 죽였다.
‘죽일놈, 연기 하나는 명인급이로군…’
왕정문조차도 장염의 얼굴에 비오듯 흐르는 땀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민주려와 이대추는 똥씹은 얼굴이 되었다. 또다시 쓰러지면, 사태는 수습 불능
이었다. 잔칫집에 마(魔)가 끼게 하는 것보다 더 재수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꽃다운 십 육세 소녀의 생일에 말이다.
“굉장하군요…”
누각 위에서 장염을 지켜보던 성주의 부인 오씨가 중얼거렸다.
성주는 부인 오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고금 제일이라 할 수 있겠소…”
장염은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눈을 번쩍 떴다. 주기적으로 밀려오던 통증이 잠
시 사라진 것이다. 이틈에 최대한 음식을 만들어 둬야 한다. 장염이 두 손을 하
늘로 치켜들었다. 지금까지 남들 앞에서 무공을 쓰지 않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
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무공초식이 필요했다.
‘스승님, 아주 잠시 만이라도 제게 힘을 주십시오.’
장염의 손이 신들린 듯 재료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실전(失傳)된지 오
래된 십단금의 절정 금나수가 전복과 유채, 노루고기, 메추리알, 돼지고기, 목이
버섯, 죽순 등을 다듬어 갔다. 그리고 세 개의 화덕 위에 무쇠 솥과 전골 냄비
등을 올려놓기가 무섭게, 노루고기를 향해 달려들어 천마파천권의 파자결을 운용
하여 식칼을 휘둘렀다. 노루고기는 허공에서 잘게 갈라져 도마 위에 떨어져 내렸
는데 피를 뺀 것임에도 불구하고 혈향과 함께 은은한 광택이 돌기 시작했다. 다
시 몸을 돌려 돼지고기 앞에 선 장염이 칼을 바꿔 구궁연환검의 검결에 따라 돼
지고기를 다지기 시작했다. 돼지고기는 수백 번의 칼질이 있었음에도 전혀 형체
가 변하지 않았다. 끝으로 무영신나수의 수법으로 메추리알과 유채 사이를 몇 번
오가자 마침내 탁자 위에는 아무 재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많던 재료가 몇 번
호흡할 동안에 모두 다듬어져 솥과 냄비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오옷!”
“오오오…”
사람들은 장염의 신기에 넋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왕정문 마저 입을 쩍 벌리
고 있었다. 이추수와 민주려도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장염
은 진짜 요리명인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장염이 다시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했다. 담담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밀가
루는 금새 반죽되더니 장염이 몇 번 내리치자 가늘은 수타면이 되어 갔다. 그 순
간 장염의 얼굴이 또다시 찡그려 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다시 밀려오
기 시작한 것이다. 심기를 과다하게 쓰자 이번에는 복통과 더불어 먹은 음식까지
목구멍으로 넘어오려 했다.
장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반죽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무
극일원심법의 구결을 떠올리며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지속되자 장염의 허리가 조금씩 구부러졌다. 장염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신물을 되새김질하며 더욱 쉬지 않고 면을 쳐댔다.
“어허헉… !”
중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장염의 손에 잡혀 있던 면이 점점 가늘어져 나중에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면발은 머리카락보다 가늘었는데, 햇
빛을 받자 은빛을 내며 출렁거렸다.
“전설의 세면(細綿, 가늘은 면발)이다…”
이대추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왕정문도 눈이 찢어져라 부릅떴다.
중원 제일 숙수들 사이에 은밀히 회자되던 전설의 세면이 당대에 나타난 것이다.
요식업계 역사상 세면은 단 두 번 나타났다고 했다. 그중 가장 최근에 나타난 것
이 이미 오 백 년 전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눈에 다시 세면이 등장한 것이
다.
장염이 상체를 탁자아래에 처박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장염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세면을 잡은 손가락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대추와
민주려가 황급히 뛰어 나갔다. 장염은 반죽을 치던 탁자 밑의 재료통에 머리를
박고 기절해 있었다. 이대추가 장염의 머리를 들어올리자 시큼한 냄새가 확 퍼졌
다. 재료 위에 장염의 토사물이 가득했다. 장염을 부축하는데 야릇한 냄새가 풍
겼다. 장염의 아랫도리 뒤쪽이 조금 젖어 보였다.
‘헉, 쌌다…’
장염이 구토를 하고 장신을 잃는 순간에 참았던 설사가 터진 것이었다.
눈칫밥 오 십 년의 민주려가 장염을 들처업고 장내를 황급히 빠져나갔다. 다행
히도 사람들은 사천요리 특유의 매운 양념냄새 때문에 장염의 변 냄새를 맡지 못
했다. 나머지는 이대추가 마무리할 차례였다. 이대추는 황급히 솥과 냄비에 있는
요리들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간은 장염이 맞춘 것을 믿고 너무 익지 않게끔
꺼내어 섞고 담아 내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어향육사가 문제였다. 장염이 머리를
박고 토한 재료통에 다듬어 놓은 어향육사의 마무리 재료가 있었다. 이대추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재료를 무쇠 솥에 쏟아 부었다. 전분을 넣지도 않았는데 재료는
벌써 걸죽 했다. 이대추는 서둘러 전분을 털어 넣고 졸이기 시작했다.
잔치는 성대하게 끝났다. 성주와 그 가족은 이대추가 담아준 사천오절을 남김
없이 먹어 치웠다. 주연공주는 특히 어향육사의 맛이 독특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연공주의 칭찬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정문과 기타 미식가들이 앞다투
어 어향육사를 맛보았다. 매콤 새콤한 그 맛은 일찍이 누구도 먹어보지 못한 것
이었다. 이대추는 속이 뒤집히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자리를 떴다.
연회가 끝난 뒤에야 왕정문은 전설의 세면 때문에 사천제일루의 사기행각을 고
발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장염이 보여준 요리의 세계
는 과연 명인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헌원일광이라는 놈이 자기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했다.
‘죽일놈…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왕정문은 헌원일광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제 목:[연재] 천사지인13.풍운의사천성(1) 관련자료:없음 [12603] 보낸이:조진행 (finitum ) 2000-11-26 01:01 조회:46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