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28)
14. 기다림은 어렵다.(1)
민주려의 고명딸이자 옥돌 민(珉)자를 쓰는 소백이 근래 들어 자주 객점을 드
나들었다. 민주려가 왜 그렇게 객점을 드나드느냐고 하면 어머니 오씨의 심부름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도 민주려는 계산대에 앉아 있다가 문턱을 넘는 소백을 발
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소백아.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느냐? 애미가 양념을 잊은게 있다
더냐?”
소백은 빙그레 웃으며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아니요, 오늘은 사슴 고기를 좀 가지러 왔어요. 어머니가 사오라고 하셔서.”
“그럼 정육점으로 가야하지 않겠느냐?”
“제가 고기를 볼 줄 알아야죠, 좋은 고긴지 나쁜 고긴지 어찌 알겠어요? 주방
의 고기는 믿을 수 있지 않겠어요?”
민주려는 생글생글 거리며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백은 그런 아버지를 향해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 후다닥 주방 쪽으로 뛰어갔
다.
‘저런… 다 큰 녀석이 아직도 하는 짓이라곤… 쯧…’
민주려는 딸이 왜 객점을 드나드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민주려가 쯧쯧거리
다가 다시 장부로 눈을 가져갔다. 요즘 들어 매상은 평소의 세배 가까이 늘어 있
었다. 모든게 다 장염 덕분이라고 생각한 민주려는 기분이 좋아졌다. 진짜 굴러
들어온 보배 같은 녀석이었다.
‘기특한 녀석…’
의혈단의 손님을 보낸뒤 들어가 쉬라고 해도 ‘나온김에 일하고 가겠다’며 주방
으로 들어간 장염이었다. 민주려는 그런 장염을 생각하면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이제 나흘 걸러 한 번씩 질러대는 비명은 사천성 성도 일대의 명물이 되었
다. 전설의 요리명인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괴로워한다는데 누가 뭐라
고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어느 날 밤 인생의 실패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의 비명을 들은 뒤 크게 감동을 받고 돌아가 성공을 거두었
다더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러자 그후로는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밤마
다 사천제일루 객잔 근처를 배회하며 장염의 비명을 기다리기도 했다. 근래 들
어 민간(民間)에는 장염의 심야비명(深夜悲鳴)에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능력이
깃들어 있다는 설(說)까지 떠돌 정도였다.
민주려가 요즘 들어 퍼지는 새로운 소문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을 때, 그
의 딸 소백은 주방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주방은 음식 냄새와 연기로 앞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 였다. 지금은 저녁 무렵이라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
고 있었다. 소백의 눈이 한쪽에 고정되었다.
한 남자가 바닥이 둥근 작은 철 솥을 한 손으로 흔들며 시선을 야채에 고정시
킨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손목이 움직일 때마다 야채덩어리가 한번씩 허
공으로 치솟았다. 야채 사이사이로 공기를 집어넣기 위한 동작이었다. 그의 마른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요리가 저렇게 좋은 것일까?’
소백은 장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염이 어떻게 객점에 남게 되었는
지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는 그녀였다. 어찌 보면 비참한 상황에서 그는 훌륭
하게 자기 인생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것이 소백의 눈에 비할 수 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그녀의 즐거움
이 되어 버렸다. 이 마음이 나중에 눈물의 근원이 될지 무한한 기쁨의 근원이 될
지 알 수 없었지만 소백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살기를 원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 날 밤 장염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화의 모습이 아른거렸기 때문
이다. 낮에 영화는 심각한 얼굴의 의혈단 사람들과 함께 객점을 떠났다. 분위기
가 엄숙해 장염은 그녀에게 작별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언제 다시 그녀를 만
날 수 있을까? 장염은 영화의 이름을 몇 번 읖조리다가 진원청을 만났다.
장염은 스승의 목소리를 들었다. 경천일기공…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오늘
은 왜 이렇게 조용할까? 눈을 감으면 들려오던 스승의 권법 구결도 들리지 않았
다. 장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룡곡 사방 어디에도 스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
았다. 장염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데 진원청이 검을 들고 초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늘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선사하는 스승인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스승님…”
장염이 중얼거리자 진원청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신비의 검무였다.
실타래 가 풀리듯 진원청의 검에서 검기가 솔솔 풀려나와 사방을 감싸기 시작했
다. 이전에는 검기에서 살기마저 느꼈었는데 오늘 진원청의 검기는 따듯하기만
했다. 장염은 진원청의 검기 앞에 조용히 서있었다. 신기하게 검기 속에서 진원
청의 마음이 느껴졌다.
“스승님…”
장염이 다시 한번 진원청의 이름을 불렀을 때 장염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원청의 춤이 점점 현란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진원청의 두 손이 다시 하늘과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염은 가슴을 향해 밀려오는 하얀빛을 보았다. 황급히
두 손을 모아 가슴을 막아 보았지만 빛은 그대로 장염의 가슴을 관통하고 말았
다.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장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가슴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장염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영화를
다시 만난 이후로 스승의 검기가 따뜻하게 느껴진 것일까? 아니면 낮에 깨달은
만물일체(萬物一體) 심물일여(心物一如)의 법문 때문일까? 장염은 어쨌든 우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일이라고 책망하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날 밤 사천제일루의 담장 아래에 앉아 장염의 심야비명을 듣고 있던 한 인생
의 실패자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헌원일광이었다.
이른 새벽 장염은 한 낮 익은 사내의 방문을 받았다. 주방 칠 년 선배 헌원일
광이었다. 그는 장염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오늘은 ‘물론 자네도 알겠지만…’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장염은 헌원일광이 주연공주의 생일연회 전에 중경삼
림에 찾아가서 사실을 털어놓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던 일 중의 하나는 바로 그날 자신이 남들을 속이는데 앞장섰
다는 것이었다. 장(腸)이 상할 정도로 요리에 몰두했던 것은 바로 그런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자네가 나더러 이곳을 떠나라고 한다면, 떠나겠네…”
“떠나시다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헌원형님께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
도 누군가에게 꼭 진실을 말하고 싶었거든요. 헌원형님의 얘기를 들으니 제게도
용기가 생깁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장염이 대뜸 형님이라고 불러주자 헌원일광은 수없이 고맙다는 말을 하다가 자
리에서 일어났다.
“헌원형님, 그런데 고향의 그 처자는 어찌 되었습니까?”
헌원일광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곧 고향에 내려가 그녀를 만날 계획이라고 말
했다. 장염은 헌원일광이 나가자 가부좌를 틀고 잠시 명상에 잠겼다. 다른 사람
은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장염은 헌원일광을 보며 아무래도 지금
자신이 헌원일광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랬다. 이제 헌원일광을 보니 마음을 정리하고 자기의
길을 발견한 것 같았다. 장염은 자기도 앞으로 좀더 용감하고 당당하게 살아야겠
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나서 스승의 검기가 부드러워진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 보
았다. 아직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그 답을 찾으면 금제에서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제 목:[연재] 천사지인14.기다림은어렵다.(2) 관련자료:없음 [12614] 보낸이:조진행 (finitum ) 2000-11-27 01:00 조회:4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