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31)
17. 서장으로 가는 사람들.(2)
장가촌 일행이 사천을 떠나갈 때 의혈단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일룡이
봉삼절사검이 실종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 정한 날짜에 소식을 보내왔었다. 그러
나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칠일에 한번씩 연락하기로 했었
기 때문에 의혈단은 침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납살(拉薩 서장의 도시)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끝으로 더 이상 아무 연
락이 없소. 벌써 한 달이 지났으니 아무래도 변고가 생긴게 틀림이 없소.”
“부단주의 말씀은 혈마사가 회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까?”
부단주 종피리의 말에 김다주가 되물었다. 만약 혈마사의 재기라면 몇 사람 죽
어서 끝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피리가 철혈판관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냉
정하게 사태분석을 잘한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었다. 종피리를 바라보는 김다주의
얼굴은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현 무림의 정세를 볼 때… 그들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세력이… 중원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런 종피리의 말은 옳았다. 사파의 최강이라는 마교는 지난 십 년간 발흥
을 하지 않았다. 십 년 전 마교 교주 천마무적(天魔無敵) 고성기(高成器)는 마교
비전의 무공을 익히다가 마공의 마기를 견디지 못하고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신비스런 죽음이후 마교는 내분으로 원조마교(元朝魔敎)와
신마교(新魔敎)로 나뉘어졌다. 두 파벌은 서로가 적통이라고 내세우며 세력을 키
우기 위해 무공비급 쟁탈전을 벌였는데 그 혼돈의 와중에 마교의 무공비급을 모
아놓은 비천무고(飛天武庫)에 불이 나고 말았다. 부랴부랴 불은 껐지만 이미 여
러 권의 절정마공들이 불타 없어진 뒤였다.
그 뒤 두개의 파벌은 완전히 원수가 되어 갈라섰다. 스스로 원조마교라 주장하
는 사람들은 마교의 발원지인 신강(新疆)의 천산(天山)으로 들어갔고, 신마교라
주장하는 무리들은 몽고에 접한 음산(陰山)으로 들어가 서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
다. 그렇게 최강악질이라는 마교의 힘이 분산되자 그 밖의 다른 방문좌파는 무림
맹 앞에서 더욱 힘을 못쓰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마교가 통일되지 않은 지금 무
림맹을 견제할만한 사파의 세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즘 마교의 상태는 어떠하오?”
김다주의 질문에 종피리가 대답했다.
“그들은 지금 마교의 호신무공을 찾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선대에 누군가에게
전해 주었을 거라는 생각으로 사파를 일일이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중원의 모든
사마세력을 확인하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한참만에 종피리가 김다주에게 말했다.
“포달랍궁으로 사자를 보내 의혈단 사람을 찾는데 협조해 달라고 부탁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혈마사라면 저희보다는 포달랍궁이 더 잘 알고 있지 않겠습
니까?”
종피리의 말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한 김다주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들 묵묵
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의혈단 수뇌부는 즉시 서장의 포달랍궁으로 보낼 다
섯 명의 고수들을 선발했다. 김다주는 그들을 떠나보내며 제 이의 환란을 예감하
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랬다.
과연 김다주 단주의 예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한달 전부터 일룡
이봉삼절사검이 혈마사의 지하뇌옥에 갇혀 있었다는 점에서는 맞았지만, 그것이
혈마사의 부활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색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먼 훗날 장염에 의해서 밝혀지게 될 문제이지만 말이다.
일룡 소신룡(小神龍) 명원(明元)은 햇빛조차 들지 않는 지하 뇌옥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았다. 그는 귀주성(貴州省)에 있는 비룡장(飛龍莊) 장주
명오(明悟)의 둘째아들이었다. 어린시절에는 형과 함께 즐겁게 가전(家傳) 무공
을 배웠다. 그런데 둘째인 명원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자라면서 문제가 생겼다.
점점 비룡장이 두 패로 나뉘어 갔던 것이다. 형제의 사이도 나빠졌다. 마침내 명
원은 형을 위해 스스로 집을 떠났다. 그리고 점창파(點蒼派)의 문하생이 되어 무
술을 더 익힌 뒤 사천무림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미 비룡장이 무림의
삼장(三莊)으로 무명(武名)이 혁혁한데 비룡장의 무공과 점창파의 무공을 익힌
그가 최종 우승자가 되는건 당연한지 몰랐다. 사천무림에 이름을 날린 명원은 이
제 자신의 가업을 사천에서 일으키겠다고 맹세하였다. 형 때문에라도 집으로 돌
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낮선 땅 서장의 혈마사 지하 뇌
옥에 갇혀있는 것이다.
“휴우…”
명원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함께 끝까지 자웅을 겨
루었던 이봉과 삼절, 사검이 모두 갇혀있었다. 그들의 비참한 몰골을 보면서 명
원은 한 달 전의 어이없는 싸움을 떠올렸다.
한 달 전 납살에 이르렀을 때도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서장
은 거의 대부분 티베트족(族) 이었고 그 속에 약간의 한족(漢族)과 회족(回族),
그리고 몽고족(蒙古族)이 섞여 살았다. 서장의 그 거칠고 투박한 사람들 속에서
중원의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어떤 시선을 끌게 되는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장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머리를 두 갈래로 따고, 거칠고 허름한 ‘추바푸르’
라고 불리우는 모직물 옷을 입었다. 그러나 이 영기발랄한 젊은이들은 모두 화려
하고, 날렵하며 세련된 경장 위에 검거나 갈색 빛이 도는 가죽 피풍을 두른채 서
장 이곳 저곳을 쓸고 다녔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혈마사의 라마승들은 바보가 아
니었다. 혈마사는 중원에서 온 이들의 행적을 처음부터 놓치지 않고 추적하다가
마침내 그들이 대소사에 도착하여 긴장을 풀고있을 때, 모조리 잡아들이고 만 것
이다.
명원 일행이 소림 방장의 서신을 가지고 납살의 중심에 있는 대소사(大昭寺)를
방문한 것은 더 이상 납살을 돌아다녀도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해서 다들 지쳤을
때였다.
대소사는 서장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으로 납살의 중심에 있었다. 의혈단
에서 서장을 조사한다고 했을 때 무리맹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라고 소림사
방장의 협조서신을 하나 보내준바 있었다.
원래 이 대소사는 서장을 통일한 송첸 김포왕이 자기에게 시집 온 당나라 문성
(文成)공주의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그 뒤로 중원의 사찰
과 빈번한 왕래가 이루어 졌고, 현재 대소사 방장은 과거 몇 년간 소림사에서 불
경을 연구한 적도 있었다.
서찰을 받아본 대소사 방장은 비록 여자도 네 명이나 포함 되 있었지만 개의
치 않고 장기간 머물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채 여독을 풀기도 전
에 그들은 원하지 않던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소신룡 명원은 그날 밤 자기 앞에 서있던 노혈승(老血僧)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과 패기로 가득차 있던 명원 앞에 적포(赤袍)를 휘날리며 노승은 그
림처럼 서있었다.
“대라마는 누구십니까?”
“나 무 아 미 타 혈…”
명원은 처음에 포달랍궁의 고수가 방문한 줄 알았다. 그만큼 그의 기도는 자연
과 완전히 동화된 경지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의 육장에 떠오른 공포의 혈광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비룡장에는 비룡현신(飛龍現身)이라는 신법과 그 신법을 바탕으로 펼치는 비룡
광무(飛龍光武)라는 독보적인 검법이 있었다. 노승의 육장에 혈광이 어리자 마자
명원은 본능적으로 비룡현신으로 팔방의 방위를 밟으며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혈광은 한줄기 뇌전처럼 그의 몸에 떨어졌다.
“커헉…”
단 일초만에 명원은 상처 입은 자존심과 함께 땅에 곤두박질 쳐졌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점창파 비전절기인 료료검법(了了劍法, 점창파 검리를 깨우
친 자 들의 검법)이나, 요요사검(曜曜四劍, 가볍게 쏟아지는 검기에서 수없이 밝
은 빛이 나는 연환검) 같은 것은 펼칠 틈도 없었다. 그는 땅에 처박힌 채로 저
노혈승이 일장씩 휘두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밤하늘에 혈광이 한번
씩 번득일 때마다 한 명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일룡이봉삼절사검은 혈마사의 지하뇌옥으로 옮겨졌다. 명원이
좀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었다. 노혈승은 그들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
다. 그들의 지나온 행적을 살펴볼 때 그것은 기적이었다. 살인, 약탈, 방화, 인
신제사, 생혈흡입의 오대참화(五大慘禍)로 악명을 떨치는 혈승들이 입안에 기어
들어온 먹이를 씹지 않고 있는 것이다. 명원 일행은 단지 자유가 없을 뿐 고문이
나 희롱도 당하지 않았다. 명원은 맞은편 옥사에 갇힌 네 명의 여협(이봉과 소소
와 영화)을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기적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는 피와 저주의 혈마사인 것이다.
이봉(二鳳)은 무림 제일 신비라는 봉황곡(鳳凰谷)에서 함께 자란 자매였다.
그녀들은 봉황곡주 임시녀(林始女)의 딸이기도 했는데, 처음 무림에 출도했다가
영광과 비참을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이봉의 이름은 각각 한려(閑麗, 짝짓기를
막았다)와 수도(受度, 제도를 받아들였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좀 이해하
기 어려운 이 이름은 그녀의 어머니 임시녀가 지은 것이었다. 봉황곡은 남자가
없는 여자들만의 세계였다. 한려와 수도도 어머니의 성을 따서 임한려, 임수도
라고 불리웠다.
그녀들은 자라면서 남자들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누군
지 어머니에게 물어 보지도 않았다. 이름 그대로 ‘짝짓기를 막은 제도를 받아들
인’ 형국이었던 것이다. 한려와 수도의 나이가 차자 봉황곡주 임시녀는 두 딸에
게 봉황곡 전통의 강호행을 시켰다. 세상과 남자를 알아야 나중에 필요한 만큼의
자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간혹 가다가 강호행을 하다가 남자와 달아난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녀들을 통해서 봉황곡의 비밀이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언
제나 그렇듯 죽은 자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殺人滅口).
봉황곡 제자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강호행을 하다가도 때
가되면, 즉 남자를 하나 사귀어 씨앗을 배에 담으면, 조용히 봉황곡으로 돌아와
살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처음에는 미친 듯이 봉황곡의 여자들을 찾아다니다가
도 곧 그녀들을 잊어갔다. 그래서 봉황곡의 여자들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두 자매 한려와 수도도 씨앗을 배에 담아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런데 지금 그녀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노혈승의 일장을 맞고 혈마사
의 지하뇌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녀들은 속으로 절대 혈승의 씨앗은 담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다행히 두 자매의 미색이 고왔음에도 혈승들은 두 자
매의 배에 씨앗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때가 되면 식사로 마른 빵과 물을
갖다가 던져 줄 따름이었다.
그후로 한려와 수도 자매는 함께 갇힌 매화검 영화와 친해졌다. 영화는 무당파
사검사 중 막내였는데, 둘째인 환영검 노호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아 평
소 두 자매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여자라고 찍혀 있었다. 그녀들이 보기에 노호
는 매우 훌륭한 사내였던 것이다. 물론 삼절(三絶)이라 불리는 세 남자 독절(毒
絶) 당휴(唐烋)와 창절(槍絶) 조운(朝雲), 그리고 장절(掌絶) 위지천평(魏志千
平)도 훌륭했지만 천하제일보의 소보주이자 무당파 제자인 노호라는 이름이 주는
매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두 자매는 만약 노호가 자기에게 접근해서 저토록 열렬히 구애를 한다면 자신
은 그의 씨를 받을까 안 받을까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울 만큼 그는 능력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자매는 영화의 마음속에 이미 어떤 남자
의 씨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를 볼 때마다 씨를
마음에 받는 것과 몸에 받는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영화가 말
할 때마다 생글거리게 하는 한 남자의 이름을 통해 자신들의 아버지에 대해 처
음으로 궁금함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이봉과 함께 갇힌 매화검 영화는 비교적 담담하게 생을 마무리 하리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추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
이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죽으리라. 그러기 위해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인생
에 있어 가장 화려했던 때를 생각해 냈다. 언제였을까, 짧은 내 인생의 절정은
? 그렇게 그녀는 행복한 기억 속에 죽고 싶었다. 그러나 시냇물에 발을 담구고
있던 때의 그 서늘한 생의 감각과 물결에 쓸려 간간이 마주 닿던 발끝의 짜릿한
감촉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어떻게든 살고 싶어졌다.
영화가 떠올리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크게
웃으며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는 것으로 그녀의 환상은 끝이 나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그녀는 왜 꿈에서 조차 그에게 불가능한 부담을 지워 줬을까? 하며 미안해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살아 나간다면, 아니 반드시 살아 나가서, 그에게 왜 나를 구해주
러 오지 않았느냐고 따지겠다고 영화는 거듭 다짐하며 매번 잠이 들었다.
제 목:[연재] 천사지인18.가다보니다잊었다.(1) 관련자료:없음 [12636] 보낸이:조진행 (finitum ) 2000-11-29 00:58 조회:4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