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32)
18. 가다 보니 다 잊었다.(1)
장염이 사천성을 떠나 향하고 있는 곳은 헌원일광이 예측한대로 서장이었다.
돈도 한푼 없는 장염이 서장까지 걸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
는 어느덧 십 이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가다가 얼어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염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사천에 있다가는 그 신비
의 복면인에게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장염은 복면인에게서 도망
친 이후로 사천제일루는 물론 사천성에서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과 연락을 끊
었다. 그 이유는 신비인이 복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면을 한다는 것은 상
대가 나에게 자기의 얼굴을 알려 주기 싫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 상대
와 내가 생활 속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이미 만났던 것일까? 생각하던 장염은 혹시 이미 만나지 않았다면
조만간 만나게 될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
가 복면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차피 장염의 말을 믿
든 믿지 않든 장가촌 일행을 모두 찾아 죽일 거였으면서 왜 복면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복면 사이로 보이던 광기까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
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단 하나 분명한 건 서장으
로 간 영화를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왜 그녀를 만나야 하는지, 그녀를 만나
면 그녀가 반겨 줄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장염은 목숨을 걸고 서장으로 가
고 있었다.
길이 나오면 걷고 마을이 보이면 들어가 구걸을 했다. 구걸이란 이상하게도 처
음 한번이 어렵지 그 다음 두 번 째는 쉽고, 세 번째부터는 일도 아니었다. 장염
은 구걸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원래부터 빈둥거리며 놀고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불쌍하다고 밥을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고, 거지라고 욕을 하면 한 귀로 흘려
들었다. 그렇게 길을 가던 장염이 대상(大商)의 무리를 만난 것은 아미산(峨嵋
山) 근처에서였다.
황보장성(皇甫壯星)은 나이 오십이 되도록 평생 대륙을 종횡하는 것만 유일한
낙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상인집안이었
다. 황보장성도 어려서부터 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워낙 주관이 뚜렷하다
보니 상인으로는 오히려 힘든 점이 많았다. 모든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되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문제를 알고있던 그는 가업을 물
려받을 때가 되자 동생에게 권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상단(商團)을 이끌고 돌아다
니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단 한사람의 친구도 없었다. 대륙을 떠돌면서부터 사람
을 사귀지 못하고 친구가 없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황
보장성은 자기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믿거나 인정하려하지 않는 아주 괴팍한 사
람이 되고 말았다.
귀주성에서 출발한 상단이 사천성 경계를 막 빠져나갈 때였다. 십 이월의 눈보
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황보장성은 상단을 아미산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언젠
가 아미산자락 아래의 산야(山野)에서 작은 마을과 토지신묘를 보았던 기억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황보장성은 일행을 독려하여 눈보라를 뚫고 가다가 마침내 마
을 입구의 토지신 묘를 찾았다.
“모두들 근처에서 쉴 곳을 찾도록 하시오. 나는 저곳에 있겠소.”
황보장성이 말하며 가리키는 곳은 작고 오래되어 쓰러져 가는 토지신 묘였다.
각헌잡록(覺軒雜錄)이라는 책에 보면 토지신은 마을의 신으로 시골 마을 곳곳
에, 석실이나 조그만 토담집에 모셔져 있었다. 마을의 공정하고 정직한 사람이
죽으면 대게 그 마을의 토지신이 되는데, 토지신의 신상을 만들지 못했으면 길이
가 한자에 폭이 두 치쯤 되는 나무판자에 ‘어디 어느 곳의 토지’ 라고 써 놓으면
되었다. 토지신은 대게 백발이 허연 늙은이고 그 옆에 토지마님이 함께 서있었
다. 제사할 때는 백지나 향초, 그리고 술과 안주 또는 수닭 한 마리를 올렸는데,
마을 사람들은 토지신이 영험하면 늑대나 호랑이가 마을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
었다. 그리고 토지의 용도가 다르듯 토지신도 청묘(靑苗) 토지신, 장생(長生) 토
지신, 또는 묘당(廟堂) 토지신등 종류가 다양했다.
상단의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근처의 폐
가로 이동하였다. 황보장성은 잠시 서서 그들이 한곳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나서야 토지신 묘로 걸어 들어갔다. 어차피 황보장성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
았기 때문에, 그저 이곳에서 잠시 눈보라나 피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황보장성은 토지신 묘의 안으로 들어가던 움직임을 잠깐 멈췄다. 안에서 훈훈
한 온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겨울에 이렇게 외진 곳까지 사람이 오다니…’
황보장성은 내친 걸음이라 토지신묘 안으로 들어갔다. 몰골이 마르고 흉한 이
십대의 사내 하나가 작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아 있었다. 그는 때가 끼고 너덜
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표정만은 그렇게 천하태평(天下泰平)해 보일 수 없었
다. 사내는 황보장성이 다가가자 그제서야 자다가 깬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는
황급히 일어나 넙죽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 사내가 어찌나 자연스럽고 정성스
럽게 인사를 했던지 황보장성은 순간적으로 조카를 만난 줄로 착각하고 ‘어 그
래, 잘 지냈느냐’ 라고 말할 뻔했다. 사내는 인사를 마치자 다시 자리에 앉아 모
닥불을 바라보았다. 언제 인사를 했냐는 듯한 무심함에 황보장성은 난생 처음으
로 섭섭함을 느껴야 했다.
“나는 황보장성이라고 하네만…”
“원래 황보대협이시군요, 저는 장염이라고 합니다.”
장염은 그간의 구걸로 입에 바른 말이 더욱 늘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도
친근하게 아는 척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거지 근성이 발달한 것
이고, 좋게 보면 사교성이 개발된 것이었다.
몇 마디 말을 나눈 황보장성은 장염이라는 사내를 유심히 보았다. 거지같지만
거지가 아니고, 빈털터리인 것 같은데 모든 걸 가진 듯 자족해 하는 것이 신기했
다. 그런 사내에게 황보장성이 완전히 질린 것은 그가 모닥불을 다른 곳으로 옮
긴 후 보여준 행동이었다.
사내는 모닥불의 불씨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옮겨 불을 다시 살리고 그 동안 불
씨가 있던 자리를 나무꼬챙이로 살살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속에서 작
은 진흙 덩어리를 꺼내더니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게 대체 뭔데 그리 좋아하나?”
“아, 네… 그저… 남의 살(肉)입니다.”
황보장성은 사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의 살이란 게 대체 뭔가?
“그게 무엇인지 나도 알 수 있겠나?”
황보장성은 물으면서도 자신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에
게 사적인 질문을 던져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황보장성은 다른 사람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누가 자기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싫어했었다.
“이건 서육(鼠肉 쥐고기) 입니다. 오늘 아침에 잡아서 진흙을 바른 뒤 은근한
불에 굽고 있었죠. 아시겠지만 서형(鼠兄)의 근골이 워낙 약해 쎈 불에서는 오래
견디지 못하거든요.”
황보장성은 그제서야 그 작은 진흙 덩어리가 쥐를 감싼 것임을 알았다. 사내는
진흙을 벗겨낸 뒤 반을 뚝 잘라 황보장성에게 내밀었다.
“드셔 보시겠습니까?”
황보장성은 얼떨결에 쥐고기 반 토막을 손에 받아들었다. 얼어 있던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자네는 자주 쥐고기를 먹나?”
“고기를 자주 먹으면 이렇게 마르겠습니까?”
“…”
할말이 없었다. 자신은 쥐고기라고 했는데, 사내는 그냥 고기라고 했다. 토지
신묘 밖으로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황보장성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
내가 맛있게 고기를 뜯어먹는데 자기는 한입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럽고
역겹다고 생각되면 그냥 버리면 되는데 왠일인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문득 황보장성은 그가 부러웠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를 부러워 해본 적이 없었
다. 그런데 지금 저기 거지같은 사내의 식성이, 그의 태평스러움과 넉넉함이 자
기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봤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내가 입가의 기름기를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안드실 겁니까?”
그제서야 황보장성은 사내가 자기에게 쥐고기를 잘라 준 것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손은 황보장성이 들고있는 쥐고기 반토막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두 눈은 마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보장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도 먹고 싶네…”
황보장성은 ‘오늘은 손바닥을 녹인 것만으로 만족하자’ 생각하며 쥐고기를 사
내에게 건네 주었다. 사내는 크게 기뻐하며 고기를 받아들고 우물우물 씹어먹기
시작했다. 황보장성은 이 사내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제 목:[연재] 천사지인18.가다보니다잊었다.(2) 관련자료:없음 [12637] 보낸이:조진행 (finitum ) 2000-11-29 00:59 조회:4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