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33)
18. 가다 보니 다 잊었다.(2)
눈보라가 멈추자 황보장성은 장염에게 두툼한 옷을 한 벌주었고 가는 곳까지
함께 동행할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장염은 얼떨결에 황보장성이 이끄는 상
단(商團)에 끼이게 되었다.
가는 길에 둘은 종종 자리를 함께 했다. 그것은 황보장성의 요구에 의해 그렇
게 된 것이었다. 황보장성으로서는 이 재미있는 사내와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
고 싶었지만 워낙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상인들이 잠깐씩 쉬거나 먹
기 위해 모여서 불을 피울 때 만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었다.
한 사람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장염이 볼
때 황보장성이라는 사람은 조금 이해 못할 구석이 있었다. 장염이 그간 구걸을
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사람은 원래가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空手來空
手去)라는 것이었다. 염려한다거나 조바심을 낸다고 해서 하늘에서 무엇이 뚝 떨
어져 내리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춥다고 해서 겨울이 하루아침에 여름으로 변하
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맞춰 어디론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원래의 자기 하나
(眞體) 뿐이었다. 그래서 장염은 지금 당장 간절히 필요한 몇 가지 이외에는 더
바라지도 욕심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황보장성은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두 손에 움켜쥐려고만 하고 있었다.
선두에 가던 사람이 뭐라고 외치며 멈췄다. 아마 쉬었다가 가자고 하는 것 같
았다. 상인들은 한곳에 모여들어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후… 날씨 정말 춥구먼… 이런 날은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이 최고인데…”
황보장성이 모닥불 앞에서 육포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일행은 당고랍산맥(唐古
拉山脈)에 들어서자 움직임을 멈추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장염을 바라보는 황보
장성의 눈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이제 이쯤에서 갈라져야 하는 것이다. 상단
(商團)은 신강을 통과하여 대륙 넘어 신세계로 전진해야 했다.
“참, 자네가 사천에서 왔다니 요리광인의 소문은 알고 있겠구먼…”
장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래 어려서부터 귀한 것만 먹고 자라 한동안 미식가라 자처했었네
만…”
황보장성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모닥불을 발로 툭툭 찼다. 잠시 뜸을 들이
던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렇게 오래도록 객지에서 상인을 이끌고 돌아다니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
구먼… 사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에 맛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먹으면 그만인 것을… 지금 이 육포와 건량처럼 말
일세.”
장염이 ‘맞습니다’라고 말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황보장성은 장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현들이 ‘함이 없음을 함으로 삼고, 일이 없음을 일로 삼고, 맛이 없음을 맛
으로 삼는다(爲無爲 事無事 味無味)’고 했으니 황보대인께서는 가히
미식(美食)의 도(道)에 이르신 것 같습니다.”
황보장성이 껄껄 웃으며 장염에게 말(言) 하나로도 먹고 살 수 있겠으니 세상
을 떠돌아도 굶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 두 개 있네… 젊은 시절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었
지. 훗날… 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가업을 동생이 물려받도록 해주었다
네. 그날 밤 그녀가 찾아와 헤어지자고 하더군. 그때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말
을 했다네. 혼인은 사랑만 가지고 하는게 아니라고 한 것이야… 그 일이 있은
뒤 상단을 만들어 천하를 떠돌기 시작한 게 오늘까지 계속 되었구먼. 세월 참 빠
르군…”
황보장성이 눈을 들어 먼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난 모든 걸 가지고 싶었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얼마나 헛된 바램인가
알게 되었지. 그래도 그걸 그만둘 수 없었는데 왠 줄 아나?”
장염이 궁금하다는 듯 황보장성의 얼굴을 바라보자 처연한 웃음으로 말을 이었
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덧 그게 내 삶이 되 버린 게야… 그걸 바꾼다는 것은
이전까지 살아온 생(生)이 헛된 것이 되고 마는 거지. 아하하하핫…”
황보장성의 공허한 웃음이 차가운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근처에
서 떨어져 있던 다른 일행들이 힐끔거리며 황보장성을 바라보았다. 황보장성의
말을 듣던 장염이 갑자기 탄성을 터뜨렸다.
“아! 본래 큰 모습은 모습이 없으며(大象無形), 길이란 숨어 있어서 이름조차
없다(道隱無名)고 합니다… 대인께서 모든 것을 비워내었을 때 비로서 바라시던
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
황보장성이 깜짝 놀라 장염을 바라보았다. 특이하게 마음에 와 닿는 사람이었
지만, 이토록 심오한 말이 쥐고기를 물어뜯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장염의
한 마디 말은 그간 황보장성의 심중에 있던 모든 괴로움을 날려 버렸던 것이다.
본래 장염은 학문이 깊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배움이라고는 천자문과 아버
지 장삼이 소장하고 있던 몇 권의 도가 서적뿐이었다. 자라면서 진원청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억지로 다시 몇 권의 권법서와 의서를 읽어보기도 했지만 명문대가
의 사람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장염에게는 비장(秘藏)의 절기가 있
었으니 그것은 경천일기공이었다. 자나깨나 머리에서 늘 떠나지 않는 경천일기공
에 그와 같은 법문이 있었던 것이다.
장염은 강호에 나온 뒤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간 미처 깨닫지 못했
던 경천일기공의 법문을 체득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저절로 ‘원래
이런 것이었구나’ 싶을 정도로 경천일기공의 구결이 새로웠다. 그리고 그만큼 장
염의 인생도 성숙해 지고 있었다. 신공(神功)은 이제 장염의 삶에 있어서 거의
생활이었다. 지금도 그는 황보장성과의 만남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대상무형(大象
無形) 도은무명(道隱無名) 이라는 경천일기공의 법문을 깨닫고 탄성을 터뜨렸던
것이다.
식사 후 그들은 서로 갈 길을 달리 해야 했다. 상단(商團)은 신강으로 가야했
고 장염은 서장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황보장성은 장염과 헤어지는 것을 크게
아쉬워했고, 나중에는 귀주성(貴州省)의 황보세가(皇甫勢家)로 찾아오지 않으면
영원히 아는 척을 하지 않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제 목:[연재] 천사지인18.가다보니다잊었다.(3) 관련자료:없음 [12638] 보낸이:조진행 (finitum ) 2000-11-29 00:59 조회:4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