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44)
23. 천리(天理)는 지켜지는가?(2)
그날 저녁 노라마는 좌선하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오늘쯤이면 사내가 그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지금 혈마사를 향해 다가오는
이 기운은 결코 그 사내가 보여주던 무극지도(無極之道)가 아니었다. 이 기세는
아직까지 느껴보지 못한 끈적 끈적한 혈마기였다. 노라마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자신이 그들의 운명을 사내에게 맡겼을 때 천운을 시험하기로 했던 것이
다. 어쩌면 노라마도 이 피의 수레바퀴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보고 싶었
는지도 몰랐다.
“나 무 아 미 타 혈…”
노라마가 나가서 확인하고 싶은 갈등을 염불로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내
가 빨리 일을 처리하기를 바랬다. 이 호기심이 더 커지기 전에 그들을 데리고 혈
마사에서 나가주기를 빌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혈마사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땡! 땡! 땡! 땡!”
긴급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곳곳에서 라마승들이 뛰어 나왔다. 순식간에 조용하
던 혈마사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라마승들이 뛰어나와 한곳의 불길을 잡을
때 쯤이면 다시 다른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한동안 그렇게 불꽃을 따라 다니던 혈마사 주지는 마침내 이 불이 뇌옥에 갇힌
중원인들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 고의로 저지른 방화란 걸 깨닫게 되었다.
“감히… 으드득…”
혈마사 주지인 마하륵(摩遐肋)이 물을 나르던 라마승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서둘러 뇌옥으로 가라.”
불을 끄던 라마승 중 절반이 뇌옥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뇌옥에 갇혀있던 매화검 영화는 그날도 꿈을 꾸었다. 한 사내가 자기의 발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영화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결국 사내의
등에 업혔다. 사내는 영화를 업고 한걸음에 산을 하나씩 넘더니 어느 작고 아담
한 골짜기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는 여기
가 장가촌 인가요? 물었다.
“여기는 뇌옥이야, 영매.”
그 소리에 영화가 눈을 뜨니 이봉 중에 첫째인 한려가 웃고 있었다. 그녀의 뒤
에서 초췌하지만 밝은 얼굴로 수도가 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행복한 꿈을 꾸었나봐요?”
둘째인 수도가 멀리서 말했다.
영화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한 꿈이었을까? 나는 그의 얼굴
을 보지도 못했고, 그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는데, 그것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
을까? 영화가 잠시 생각에 빠지자 한려가 다시 말했다.
“우리는 영매만 보면 자꾸 웃음이 나서… 호호호… 사방이 막힌 곳에서 웃을
수 있게 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후훗…”
영화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동안 한려와 수도 자매는 많이
변했다. 자기들이 얼마나 사내에 대해 부정적이었는지, 그리고 아비에 대해 혐오
했는지 영화에게 말했었다. 그녀들은 ‘남자란 믿을 수 없고 혐오스런 동물이다.
씨앗만 아니라면 세상에 남자를 다 쓸어 버려야 비로서 평화가 찾아온다’고 배우
며 자랐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남자를 마음에 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다.
말끝에는 죽을 때가 되서 그런가봐 하며 웃었지만, 누구도 함께 웃지 않았다. 진
짜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음식을 가
져다주던 라마승이 그녀들을 야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은 마치 조각가가
나무를 앞에 두고 어떻게 잘라낼까 고민하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던 것이다.
“언니두…, 내 잠버릇이 그렇게 안좋았나요?”
영화가 묻자 뒤에서 수도가 영화목소리를 흉내내서 말했다.
“여기가 장가촌 인가요…? 호호홋…”
영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자매는 그런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웃
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세 사람이 웃고 있을 때였다.
“곧 죽을텐데 뭐 그리 재밌다고 웃는 게요…”
삼절중 하나인 독절 당휴였다.
당휴의 싸늘한 말이 퍼지자 뇌옥은 다시 음침한 분위기로 변했다. 당휴의 지적
이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것이다. 환영검 노호는 당휴를 한
번 바라보았다.
‘차가운 놈…’
당휴의 말이 맞기는 했지만 영화와 함께 있는 일행에게 큰소리를 칠 필요까지
는 없었다. 다들 갇혀 있었고, 곧 죽을 것도 알고 있었다. 자기 처지를 모른다면
모를까, 다들 당휴만큼 절절히 느끼고 있는 바에야 ‘뭐 하러 저런 소리를 해서
여자들의 기를 죽이나?’ 싶었다. 그러나 귀찮았다. 만사가 귀찮았다. 심지어는
영화를 향하던 마음마저도 귀찮았다.
죽음 앞에서 노호는 자기 자신만 갈증이 나도록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
게 하면 살수 있을까? 그것만이 노호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때였다. 노호의 귀에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혈마사에 갇힌 이후로 이런
종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종소리에는 치는 사람의 긴박한 마음이 담겨 있었
다. 노호는 그 종소리가 자기들 때문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가끔씩 오래된 뇌옥
의 천장에서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져 내려도 누군가 그들을 구하러 와서 천장을
파다가 그리 된 것이라면 하는 상상을 했었다. 노호는 정말 끔찍하게도 살고 싶
었다. 만약 함께 갇힌 모든 사람이 죽어야 자기가 살수 있다면 그렇게 되도 괜찮
다고 빌기도 했다. 종소리는 몇 번을 더 울리다가 잦아들었다. 노호의 마음속에
서도 희망이 사라져갔다.
“영화 소저!”
처음에 영화는 꿈속에서 듣는 소리인줄 알았다.
“영화 소저!”
두 번째야 영화는 눈을 번쩍 떴다. 어찌 이 음성을 꿈엔들 잊을 수 있단 말인
가! 영화가 일어나 보니 벌써 뇌옥 안에는 묘한 긴장으로 팽팽했다. 누군가 영화
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오라버니!”
영화가 마주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멀리서 우당탕 하는 소리와 비명이 연속으
로 들려왔다. 사람들은 처음에 영화의 오라비인 영호진이 그들을 구출하러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후 뇌옥의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사람들은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인물들이었다.
“장 오라버니!”
영화가 장염을 보며 소리쳤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랬는데,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무당 사검사의 얼굴은 각양 각색으로 변했다. 환영검 노호의 얼굴에는 온갖 복
잡한 감정이 엉켜 찡그린 듯 했고, 설상검 소소는 희안한 사람을 본다는 듯이 장
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광검 이청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랐다. 불가능한 일이
지금 그의 눈앞에 벌어진 것이다. 저 장가촌 사람이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그의 고생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청은 장염과 영화의 얼굴
을 바라보면서 인정하기 싫지만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는 눈물을 흘리며 장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뒤에서 장소가 다가오더니
영화일행을 가두고 있던 뇌옥의 쇠창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우드드득..!”
“헉…”
뇌옥 안에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신음을 터뜨렸다. 두꺼운 쇠
기둥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벌어졌던 것이다.
무당 사검사는 특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장소가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장가촌의 촌무지렁이라고 생각하던 그 사람이었다. 장소는 놀란 표정
의 노호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더니 천천히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노호 등이
갇혀 있던 쇠창살도 사정없이 벌리는 것이었다.
“모두들 속히 나가시오!”
장소가 짧게 소리쳤다.
사람들은 위엄이 묻어나는 장소의 말을 따라 우르르 밀려 나갔다. 밖에는 화광
(火光)이 충천했는데 멀리서 수 십 명의 라마승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십 이 마인은 저들을 막아라!”
“존명!”
허공을 향해 장소가 나직이 소리치자 그들의 눈앞에 흉악하게 생긴 열 명의 사
람들이 땅에서 솟아난 듯 나타났다. 원래는 열두 명이던 마인들 중 두 명은 계속
돌아다니며 불을 지르고 있었고, 지금 마교 교주의 명에 따라 열 명이 나타난 것
이었다. 마인들은 나타나자 마자 곧바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라마승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이 서로 어우러져 혈전을 벌이기 시작할 때였다. 멀리서 한사
람의 외침이 들렸다.
“이쪽이오. 속히 이리로 오시오!”
소리친 사람은 전의기였다. 전의기는 풍림장과 무당파 사람들을 떠나 장염 일
행에 합류하여 퇴로를 담당하고 있었다. 혈마사의 동쪽 끝 쪽문이 크게 열려 있
었다. 전의기가 그곳에 마차를 세워놓고 일행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황급히 전의기가 소리친 곳으로 달려갔다. 전의기는 일행이 모두 마차에 올라타
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채칙을 날렸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는 혈마사를 벗어
나 포달랍궁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마교의 무적고수라는 열 명의 마인 중 벌써 절반이 목숨을 잃었고, 그
틈을 타서 몇 명의 라마승들이 일행의 뒤를 바싹 따라붙고 있었다.
“흥!”
전의기 옆에 앉아서 뒤를 보던 장소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라마승들을 보더니
쌍장을 들어 올렸다. 한순간 장소의 옷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장소의 손바닥이 라
마승들을 향했다. 그리고 다음순간 ‘펑!’ 소리와 함께 라마승들의 몸이 갈갈이
찢겨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전의기는 속으로 ‘이 사람이 벽력탄이라고 던졌나 보
다’ 생각하며 더욱 힘껏 채칙을 내리쳤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야 살
수가 있는 것이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갑자기 말들이 앞다리를 들고 버둥거리자 서고 말았다.
네 마리 말은 고통스러운 듯 ‘히히힝’ 거리며 괴로워 하다가 옆으로 쓰러지고 말
았다. 마차가 멈추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다.
“헉… 독이다.”
당효가 독절이라는 별호답게 대번에 말의 상태를 알아 차렸다.
당효가 독이라고 외치는 순간 허공에서 일곱 명의 라마승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나이든 라마승이 유창한 한어(漢語)로 소리쳤다.
“허허헛… 중원인들은 겁이 많다고 들었는데, 오늘 여기모인 열 세 분은 어떤
가 모르겠소. 본승이 말에게 쓴 것은 ‘일 곱 걸음에 죽는다’는 칠보단장(七步斷
腸)인데, 이미 말이 여덟 발자국을 뛰었으니 죽었고…”
중인이 라마승을 바라보자 라마승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본승을 바라보며 무슨 말하길 기다릴 때 삼분요충(三分蟯蟲)
을 전개했으니 이제 여러분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으음…”
일행이 라마승의 말을 듣고 ‘삼분요충이 무얼까?’ 생각하는데, 제일먼저 장소
가 안색을 찌푸리며 배로 손을 가져갔다.
“오호… 그대의 공력이 가장 심후하구려…”
“요승아, 이것이 무엇이냐?”
장소가 배를 부여잡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라마승이 ‘흐흐’하고 웃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본승이 그대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기생충이오. 삼분요충이라고 하는 이것은
목구멍이나 콧구멍을 타고 들어가서 제일먼저 사람의 위에 자리잡고, 그 다음에
구불구불한 장, 마지막으로 심장에 자리를 틀게 되는 것이오. 위에 자리를 잡았
을 때는 죽을 확률이 세 명 중 하나, 다시 장으로 내려갔을 때는 세 명 중 둘,
심장으로 갔을 때는 반드시 죽게 되어 삼분요충이라 불리는 것이오. 이 요충은
본래 내력이 심후할수록 더욱 빨리 반응을 하는데 그대가 제일 먼저 배가 아픈
듯하니 그대의 공력이 무리 중 제일이오.”
제 목:[연재] 천사지인23.천리는지켜지는가?(3) 관련자료:없음 [12678] 보낸이:조진행 (finitum ) 2000-12-03 01:02 조회:4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