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86)
39. 봄은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온다.(1)
처음 만남 이후로 색마와 도둑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장염을 찾아왔다. 그들이
왔다가 가고 나면 장염은 굉장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들의 삶이 워낙 엽기적인
것이라 장염이 받아들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랐던 것이다.
의혈단에 온지 삼일 째 되던 날 점심 무렵 장염은 색마와 도둑의 방문으로
복잡해진 머리를 식힐 겸 객실 밖으로 나갔다. 객청 앞에는 잘 가꾸어진 작은
정원이 있었다. 장염이 밖으로 나와 사방을 둘러보니 경호하는 무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경비가 허술한 건가? 분명히 몇 사람이 측간까지 따라다닌다는 얘기를 들었건
만…’
장염이 눈앞에 보이는 작은 월동문을 통해 근처를 둘러보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세 명의 검사가 바람처럼 나타나 점잔케 길을 가로막았다.
“객청에 있는 분들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소.”
“…”
그제서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장염은
씁쓰름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되돌렸다.
장염이 정원으로 돌아와 걸으니 오십 보 를 다 못 걸어 담에 가로 막혔다.
‘나는 겨우 오 십 보의 자유만을 얻은 것이로구나…’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무심과 사공남매는 청해성으로 잘 가고 있을까?’
장염이 눈을 들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몸을 돌리고 보니 이십대의 단아하게 생긴 아가씨가 손에 작은 찻 상을 들고
서있었다.
“소협이 사색하시는데 방해가 되었나보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차를 내왔습니다. 아미파의 어른들은 차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장염이 희미하게 웃으며 객실의 대청(大廳)으로 올라가자 아가씨가 탁자 위에
차를 한잔 내려놓고 장염을 바라보았다.
“저는 향이라고 하옵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시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그렇습니까? 저는 장염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오니 여간 편안한 게 아닙니다.
태어나서 이처럼 편하고 좋은 곳은 처음입니다.”
장염이 속으로 ‘경재학만 아니라면 이곳은 천궁(天宮)과도 같은 곳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소협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소협은
아미파의 높으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습니까?”
이향이 슬쩍 질문을 던지자 장염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저도 그것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왜 제가 이곳에 와서 이처럼 지극한 대접을
받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장염의 말은 끝에 가서 처연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지라 이향이 슬쩍 눈을
돌려보았다.
‘그의 얼굴에 거짓이 없어 보이니… 묘한 일이로구나.’
“기왕에 소협께서 잘못하신 것이 없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향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장염이 장탄식을 터뜨렸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이곳에서 좋은 끝을 보기는 틀렸다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나쁜 일로 왔다가도 좋게 끝을 본 사람들 뿐이라
향이는 거꾸로 말하는 이 젊은 남자에게 흥미가 있기 시작했다.
“소저에게 득이 될게 없으니 말할 수 없습니다.”
향이가 문득 장염의 얼굴을 바라보니 피부를 보면 고생을 많이 한 사람 같은데
그 눈이 깊고 맑은지라 어찌 보면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귀공자 같기도 했다.
다만 여기 들어온 사람들 모두가 자기의 과거를 미화시키느라 쉬지 않고 말할 기
회를 찾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말하려 하지 않으니 그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소협께서 바르게 살아 오셨다면 어찌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도 세상이 종종 바른 것을 그르다고 할 때가
있답니다.”
“그래도 결국은 진실이 승리하지 않겠습니까?”
“살다보면 때로는 진실이 비참하게 끝나버릴 때도 있는지라 나는 그것이 염려
될 뿐입니다.”
“그렇게 낙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은 사람을 언제나 내려보고 있다고
합니다.”
“가끔은 단지 그 내려보기만 하는 것이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악한 자가 흥하
고 선한 자가 망해도 하늘은 단지 내려만 보고 있으니… 지금의 나에게는 그 내
려다 보고 있음도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다 보니 장염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부정적으로 되어 가는 지라 크게 심
호흡을 하고 눈을 부릅떠 보았다.
향이는 장염의 말을 들으며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왠지 인정하고 싶
지 않았다.
‘그렇다면 힘이 없는 사람은 억울해서 장차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향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장염의 음성이 들렸다.
“제게 이처럼 고마운 말씀을 해주시니 소저에게 무엇으로 보답을 하면 좋겠습
니까?”
“보답이라뇨. 보답을 바라고 한 소리는 아닙니다.”
장염이 향이라는 아가씨를 바라보니 담담한 기운이 전신에 스며 있는 가운데
두 눈 깊숙한 곳에 보일 듯 말 듯한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내 비록 관상을 보는 사람은 아니나 소저의 두 눈을 보니 말못할 근심이 있는
듯 한데,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소.”
향이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라 장염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설마 사람의 마음을 본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후훗… 괜한 말씀으로 저를 놀리시지 않아도 된답니다.”
“소저께서 저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건 스스로 하늘이 내린 기회를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두고두고 하늘을 원망하며 사시려하오.”
장염의 전신에서 말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일어나자 향이가 깜짝 놀라 한 걸
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다시 바라보니 그저 젊은 한 남자에 불과했다.
‘대체 이 사람의 전신에서 풍겨 났던 그 기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향이가 한참을 묵묵히 서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본래 장강 유역에 살던 작은 농가의 여식이었습니다. 홍수와 기근으로
연명하기 어렵게 되자 부모님은 저를 이곳에 하녀로 들여보냈습니다. 어느덧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돌이켜 보니 제가 무엇을 하며 살았나 괴롭기가 그지
없습니다. 이곳에 와서 틈틈이 문자(文字)를 익혔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 있
는 게 없으니 어찌 하루하루가 곤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향이의 말을 듣고 장염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다만 간신히 문자를 알고 살아가는 처지인데도 그처럼 괴롭지는 않으니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 소저께서 그토록 상심하시는 근본 이유를 알고싶군
요.”
향이가 머뭇거리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은 무림에 이름 높은 곳이니 지난 십 년 간 자연히 보고들은 게 무가(武
家)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녀에게 누가 무엇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평생 하녀로
살아간다면 더 아쉬울 것도 없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 다른 인생을 살아
보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데 그럴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이미 나이가
스물 여섯이니 무엇을 배우기에도 늦었을 뿐더러 누가 저 같은 것에게 가르치려
들겠습니까? 간혹 가르친다해도 그저 술자리의 눈요기로 쓰기 위해 검무(劍舞)나
가르치려 할뿐입니다…”
장염이 향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장가촌 사람들과 오래 지낸
바가 있어 밑바닥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남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장염 본인만 해도 숱하게 겪은 일들이 아니었던가.
향이가 말을 하다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얘기를 계속 하다보니 자신의 신
세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십 년 동안 생사조차 모르는 부모님과 동
생 생각도 들었고, 의혈단에서 십 년간 하녀로 있으면서 상처받았던 일들이 새록
새록 떠오르는 것이었다.
제 목:[연재] 천사지인39.봄은기다리는자에게찾아온다.(2) 관련자료:없음 [12863] 보낸이:조진행 (finitum ) 2000-12-20 00:50 조회:4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