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Witness RAW novel - Chapter (89)
40.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인다.(1)
향이는 이대의를 만난 그날밤 뛰는 가슴을 몇번이나 진정시키고 장염을 찾아갔
다.
장염은 한밤중에 찾아온 향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야심한 밤에 나를 찾아 오다니 참으로 맹랑한 아가씨로구나.’
그러나 안으로 들일수도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염이 향이에게 말했다.
“저를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장염은 향이를 데리고 다시 객청으로 나갔다. 이미 가을도 깊어 가는 터라 쌀
쌀한 기운이 온몸으로 밀려 들었다. 장염은 객청의 탁자로 다가가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향이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장염의 맞은편에 앉자 장염이 입을 열
었다.
“제가 지금부터 소저에게 무공을 가르치겠지만, 저는 아직 제자를 거둘 처지가
되지 못하니 사제의 연을 맺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소저가 저보다 한 살이 많다
고 하니 누이라고 부를까 하는데 소저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순간 향이가 깜짝 놀라 장염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기의 신분은 남들이 천하다
고 말하는 하녀였다. 의혈단의 사람들은 그녀와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면 주변을 의식해서 자리를 떠나갔다. 그런데 지금 이
젊은이는 자기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누이라고 모시겠다고
하니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찌 제가 감히 소협의 누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소협에게 누가 되
니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오히려 제가 이곳에 잡혀온 몸이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과는 교분을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장염이 그렇게 까지 말할 줄은 몰랐으므로 향이가 놀란 눈으로 장염을 바라보
자 장염이 달빛아래 웃고 있는 것이었다.
향이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향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
이자 장염이 자리에서 일어나 향이에게 깊숙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부족한 동생이 누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다른 재주는 없으나 약간의 무
공에 능하여 그것으로 누님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니 어렵더라도 제 청을 거절하
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향이는 이런 식의 무공 전수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저 얼떨떨한 표정
으로 앉아 있을뿐이었다. 사실 장염을 찾아 밤에 숙소를 떠나올 때 그녀는 불안
한 마음으로 온갖 끔찍한 상상을 다 해 보았었다.
‘이곳에서 도망치려고 나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는 척
하고 그를 도와 달아나야 하나?’
‘만약에 내 몸을 요구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에게 몸을 바치고라도 무공
을 배워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장염은 언제나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의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
다.
“저는 호북성 균현의 장가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위로는 부모님과 아래로 여동
생 하나를 두고 있지요. 일찍이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태어나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렸으나 스승님을 만나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향이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장염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스승님께서는 제게 가르침을 내리시고 곧 선경에 드셨습니다…”
향이는 장염의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장염은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이 고통스러웠던 자기의 지난 날들을 들려주었다. 마침내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향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말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슬픈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오늘 소협의 말을
들으니 나는 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누님이 제게 소협이라고 하시면 저는 누님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
을 것입니다.”
향이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배시시 웃자 달빛아래 한 송이 꽃이 만개한 듯
사방으로 화사한 기운이 넘쳐 났다.
“그렇다면 할 수 없이 저는 용기를 가지고 그대를 장동생이라고 부르겠어요.”
“하하핫… 누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강호에 나온 뒤로 가족에 대
한 그리움을 조금 덜게 되는군요.”
“나는 앞으로 장동생의 누이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겠으니 잘 지도해 주기 바
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제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오늘 이후로 하루도 쉬지 않
고 대공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장염이 다짐을 받은 후에야 비로서 일원무극심법의 삽백 육십 오자 법문을 가
르쳐 주었다. 향이는 장염의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앉아 법문을 외
우기 시작하는데 겨우 한 시진 동안 무려 백 개의 법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그야
말로 사막이 물을 빨아들이듯 향이는 법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 식경
쯤 지나자 향이는 이 백개의 법문을 외웠다.
“누님은 정말 타고난 사람이오.”
장염이 감탄사를 터뜨리자 향이가 웃으며 말했다.
“장동생이 몰라서 그래요. 나는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했지만 마땅히 책을 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외워두고 다음날 그것을 음미하며 시간
을 보냈지요. 그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글을 외우던 버릇이 있어 잘 외우는 것이
니 너무 나를 띄워주지 않아도 된답니다. 나는 지금 외운 이 법문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니 장동생이 이걸 가르치려면 아마 외우게 하는 것 보다 백
배는 더 힘이 들것입니다.”
“하하핫… 저는 일찍이 이 법문을 배울 때 반나절을 외웠으나 스무 자도 외
우지 못했습니다. 스승님이 어찌나 허탈해 하셨던지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을 할때
면 혼자서 배를 잡고 뒹굴며 웃는 답니다. 그러니 누님은 너무 겸양을 부리지 않
으셔도 됩니다.”
장염이 향이와 대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무공을 전수하기 시작한 뒤로 시간이
제법 흘러갔다. 얼마쯤 지나 마침내 향이가 심법의 법문을 모두 외우자 장염이
일어나 다시 인사를 올렸다.
“본문의 심법은 일반과 달라 생활하며 익히는 것이니 지금부터 누님께서 게을
리만 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동생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립니다.”
향이가 마주 절하자 장염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누님이 진기의 흐름을 느끼게 되시거든 다시 저를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가 한가지 검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향이가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객청을 떠나갔다.
“아… 달빛이 참으로 좋구나…”
가을밤은 깊어 갈수록 하늘마저 파랗게 변해 강물이 흐르는 듯 했다.
“마치 푸른 강에 달이 잠긴 듯 하니 이 정취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
가!”
장염이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문득 영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사히 잘 지내고 있을까?’
장염이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장소야, 네가 나에게 한 모든 짓은 내가 물에 새겨 흘려 보낼 수 있다. 그러
나 영화소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결코 너와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생각하니 마음이 다시 조급해져서 뒷짐을 지고 마당을 걷고 있는데 걸
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협, 이 야심한 밤에 홀로 어인 흥취란 말이오… 그러려면 그 아가씨는 왜
그냥 돌려보냈소?”
장염이 뒤를 돌아보니 유달산이 어슬렁거리며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향 누님이야 내일 할 일이 태산 같으신 분이니 어찌 제가 늦도록 모실 수 있
겠습니까?”
유달산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아니 그 하녀를 누이로 모셨단 말이오? 허어, 이런 기사(奇事)가 있나… 내
무림을 돌아다니며 육바라밀(몸의 보시)의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활동을 해왔지
만 소협을 보니 가히 독보적이오.”
장염이 빙긋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아마도 내일은 바람이 심하게 불 것 같습니다.”
“그걸 어찌 아오?”
“해가 지면 날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이는 이치이지요…”
장염이 유달산을 뒤에 남겨두고 대청위로 올라갔다.
회양목 아래에 서있던 유달산이 객실로 사라지는 장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사천성 서쪽의 서장과 경계한 부근에 가장 큰 무가(武家)를 물어보면 사람들은
서슴없이 유성검(流星劍) 백리웅(百罹雄)이 세운 만검산장(萬劍山莊)을 우선으로
말한다. 장주가 강호에서 무명이 드높기도 하지만 규모에 비해 명민한 문하생의
숫자가 자그마치 이 백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휘이잉…”
“어찌 이렇게 바람이 부는 건가?”
백리웅이 서재에 앉아 있다가 문밖으로 들리는 거센 바람소리에 문득 불안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허어… 내 나이가 들더니 이제는 바람 소리에도 이처럼 소심해지는구나…”
그러나 새벽부터 일기 시작한 바람은 문짝이 흔들릴 정도로 거세게 불어오고
있었다.
“안되겠다. 사람들에게 주의를 하라고 일러둬야겠다.”
백리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자 바람이 어찌나 불어 오는지 눈도
뜨지 못할정도였다.
“누구 없느냐!”
백리웅의 내력이 담긴 음성이 퍼지자 근처에서 쉬고 있던 몇 사람이 달려 나왔
다.
“장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바람이 이처럼 몰아치니 장원 이곳 저곳을 잘 손봐야 할 것이다.”
“염려 마십시오. 저희가 이미 새벽부터 손을 보아 두었습니다.”
백리웅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이키는 순간 장원의 대문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와지직…”
“헉… 저런 변괴가 있나!”
제 목:[연재] 천사지인40.바람이불면물결이인다.(2) 관련자료:없음 [12880] 보낸이:조진행 (finitum ) 2000-12-21 00:51 조회:4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