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
1화. 서(序) 무덤의 아기.
대일은 땅을 팠다. 마음이 급했다. 동이 트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그러나 서두르는 마음과 달리 손은 신중했다. 아무렇게나 땅을 파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흙이 무너질 수도 있고 흔적이 남을 수도 있었다. 그의 삽질은 노련했다.
땅을 파던 삽 끝이 뭔가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삽을 뒤로 치우고 조심스레 앞을 헤쳤다. 흙 뒤로 벽돌이 만져졌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긴 꼬챙이를 꺼내 벽돌을 살살 긁어냈다. 능숙한 손길에 앞을 막고 있던 벽돌이 한 장, 두 장 빠져나왔다. 행여나 벽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대일의 덩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입을 벌렸다. 그는 히죽 웃었다.
‘간만에 만나는 대어(大魚)로구나.’
지체 없이 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 땀이 식은 탓인지 들어서자마자 소름에 큰 덩치가 부르르 떨렸다. 지금 들어선 곳은 묘실(墓室)이다. 죽은 이가 편히 쉬어야 할 곳에 침범한 것이다.
마른침을 삼키고 불씨를 가져가 비췄다. 돈 될 만한 부장품을 찾는 것이다. 생전에 아끼던 귀금속이나 도자기, 혹은 명화 등등. 그러나 곧 허탈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런 지미. 허탕이라니.”
묘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텅 비어 석관 하나 덜렁 있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다른 곳도 아니고 망산에 묘를 쓰고 묘실까지 지을 정도인데, 아무것도 없다니.”
대일은 어이없어 중얼거렸다.
이곳은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하는 풍수보지(風水保持) 망산. 아무나 묻힐 수 있는 곳이 아닌 이곳에 이렇게 묘실씩이나 지어가며 매장할 정도라면 아무리 못해도 고관대작(高官大爵)이거나 부호거상(富豪巨商)일 것이 분명하련만.
차라리 다른 누구의 손을 탄 묘였다면 이렇게 허탈하지나 않을 것을. 이 묘는 매장한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은 새 묘였다. 사람들이 물러나는 것을 멀찍이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대일은 하나 있는 석관을 보았다. 큰 석관은 척 봐도 값비싸 보였다. 그렇다고 관을 챙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괜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힘이 쭉 빠져 석관 앞에 주저앉았다. 멍한 눈으로 빈 묘실을 바라볼 뿐이었다.
들고 있던 불씨가 잦아들며 다시금 어둠이 밀려왔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흘리며 불편한 몸을 일으켰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날이 밝기 전에 구멍을 막고 흔적을 메워야 했다. 챙긴 것은 없어도 도굴한 것은 사실이니 재수 없으면 그대로 감옥행, 적어도 십수 년은 하늘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둘러야 했다.
툴툴거리며 석관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끄으으…….”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땅속에서 소리라니. 대일은 석관을 짚은 채 굳어버렸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눈동자를 데룩거리며 굴렸다. 소리는 다시 들렸다. 그것은 그의 손 아래 석관 속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흐업!”
퍼뜩 정신을 차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가만 들어보니 이건 귀신 울음소리가 아니다. 그는 석관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주저하던 대일은 어디서 용기가 솟았는지 잔뜩 힘을 주어 관 뚜껑을 밀었다.
“흐으으읍!”
용을 쓰자 돌이 끌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관 속 모습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소복을 차려입은 미부의 시신이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강보에 싸인 아기가 빽빽거리며 울고 있었다.
“아, 아니. 이게?”
관 속에 아기라니.
대일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관 속에 아기를 같이 넣고 매장하다니. 세상 천지에 이런 일이.
그러나 지금은 영문을 따지기보다 아기를 챙기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급히 아기를 안아들었다. 이제 갓 백일이나 넘겼을까 싶었다. 관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다 쉬어버린 아기의 울음은 헐떡임처럼 들렸다. 정말 용케도 살았구나.
“어이구구, 어구구.”
대일은 품에 안은 아기를 가만히 얼렀다. 사람의 온기를 느껴서일까. 쇳소리를 내며 헐떡이던 아기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아기는 이내 눈을 말똥하게 뜨고는 대일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까르르.
손을 내밀고 웃는 아기의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허, 이 녀석 보게. 허, 허허.”
대일은 연신 웃으며 아이를 보듬었다. 차가워진 작은 손발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아우웅, 아웅.”
아기가 바동거리는 바람에 포대가 흘러내렸다.
“어이쿠쿠.”
대일은 급히 고쳐 안았다. 순간 드러난 아기의 등에는 불길에 덴 듯 큰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 모습에 대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구, 이런…….”
“아우우우…….”
대일은 급히 포대를 바로 하여 아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눈길을 돌렸다.
관에 누운 미부의 모습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처음의 두려운 마음은 많이 가라앉았다.
눈을 감은 미부의 하얀 얼굴은 마치 잠이 든 듯 고요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대일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겨우 한마디를 남겼다.
“편히 쉬십시오. 아이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순간, 기분 탓일까. 눈 감은 시신의 차가운 얼굴에 온화한 빛이 머무르는 듯했다.
* * *
아침이 밝았다. 작은 창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소명은 잠에서 깼다. 새집 머리를 한 채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적거렸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식탁에 다 식은 만두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딱딱한 만두를 입에 물고 방을 둘러보았다. 잠이 덜 깨 멍한 눈이다.
집은 단칸이다. 큰 침상 하나, 탁자 하나, 그리고 의자 둘이 세간의 전부였다. 그런데 방 한쪽에는 나뭇조각들이 산을 이룬 것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워낙 높이 쌓여 천장에 닿을 지경이었다.
소명은 만두를 우물거리며 나뭇조각을 뒤적거리다가 한 무더기를 집어 들었다. 얇은 나뭇조각은 세월이 오랜 듯 거뭇했고, 흐릿한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목편(木片)이다.
소명의 아비가 밤일을 할 적에 모은 것들이었다. 가치가 없어 처분치 못해 불쏘시개나 하려던 것을 어린 소명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여태 그대로 두고 있다.
소명의 나이 이제 열셋. 귀동냥으로 스스로 글월을 깨우치더니 목편들을 찾아 읽었다. 그 세월이 벌써 오륙 년이다. 여기에 있는 목편들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했다. 그러나 소명은 이 전부를 다 읽고, 또 몇 번이고 다시 찾아 읽었다. 다 읽고 외울 정도인데도 질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쯤 감겼던 눈동자가 이내 또렷해졌다. 입에 문 만두도 잊고는 빼곡한 글자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기 쌓인 목편들 중 온전한 것은 별로 없었다. 내용이나 시기가 전부 제각각으로 두서없이 뒤섞여 있었다. 어떤 것은 옛적 성현들의 말씀이나 문장을 남겼고, 또 어떤 것은 누군가의 일생을 적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있었고, 깊이 생각할 만한 이야기도 있었다.
소명은 가리지 않고 그 전부를 읽었다. 이해 못 할 문장은 담아두고 깊이 고민하기도 했다. 아이에게 목편을 읽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읽은 목편이 옆에 수북하게 쌓일 무렵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물고 있던 만두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핫! 오늘은 연수네 일 도와주기로 한 날인데.”
뭔가 일이 생각난 소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떨어진 만두를 다시 툭툭 털어 입에 물고는 달려 나갔다.
문밖으로 나서니 햇살이 밝았다. 맑은 하늘이었다. 봄이 아직 멀어서 찬바람이 싸늘했지만 소명은 볼을 발그레한 채 달렸다.
소명이 서둘러 간 곳은 상화촌 북쪽에 있는 장의사 집이다. 처마마다 검은 천을 드리워 을씨년스럽다. 꼭 닫힌 문의 좌우에는 염왕(閻王) 그림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연수야아!”
문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탁탁거리는 작은 발소리가 들리고 빠끔하게 문이 열렸다. 틈 사이로 얼굴이 새하얀 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장의사 집의 막내, 탁연수이다. 하얀 얼굴에 큰 눈, 붉은 입술까지 보기에는 계집처럼 보였지만 엄연히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소명을 보고 웃었다.
“왔어?”
“응, 늦었지.”
“아, 아냐. 이제 막 시작했어.”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한 마당에 서른 개나 되는 관들이 쌓여 있었다. 볼품없는 목관에서 값비싼 재질로 빛이 번쩍거리는 목관, 석관 등등. 앉은 먼지를 닦아내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옮기고 정리까지 해야 했다.
소명은 주저 없이 관을 닦기 시작했다. 몸놀림이 익숙한 듯했다. 탁연수는 끙끙거리며 걸레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소명이 콧노래를 부르며 관을 닦고 있다. 자신이 하나를 채 끝내기도 전에 소명은 다른 관으로 손을 옮겨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지 소명이 나서면 금방 끝났다. 그렇다고 해서 일을 허투루 하는 것도 아니었다. 요령도 좋고, 힘도 좋아서 무슨 일이든 거뜬히 해낸다.
“응차.”
소명이 바짝 힘을 쓰자 묵직한 석관이 밀려났다.
“와아.”
그 모습에 탁연수는 손을 멈추고 소명이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왜소한데, 소명은 이상할 정도로 힘이 좋아서 마을 어른들과 비교될 정도였다. 지금처럼 큰 석관도 밀고 당겨서 정리한다.
“아이구, 이럴 때가 아니지.”
이러다가 소명 혼자 일을 다 하게 생겼다. 딴생각을 접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오에 높았던 해가 채 기울기도 전에 마당에 가득했던 관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둘이 부지런을 떤 덕분이다.
소명이 마지막 관 뚜껑을 닫았다. 옻칠을 단단히 한 값비싼 목관이다. 아무리 목관의 뚜껑이라고 해도 그 무게가 상당했지만 소명에게는 너끈했다.
“헤헤, 다 했다.”
손을 탁탁 털며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보니 분칠한 듯 새하얗던 탁연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소명이 히죽 웃어보이자 탁연수도 따라서 웃었다. 둘은 자신들이 정리한 관들을 둘러보았다. 대충 서른이나 되는 관들이 말끔해져 있다. 이렇게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소명이 도와준 덕분이다.
탁연수는 기다리라 하고 안채로 달려 들어갔다.
“할아버지!”
외치는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그러자 문가에서 비쩍 마른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탁 노인이다. 앙상한 얼굴에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가 있다. 그 성미가 고스란한 얼굴인데, 번뜩이는 눈초리가 탁연수에게 닿으니 순간 호선을 그리며 매서운 기세를 지웠다.
“그래, 우리 아가. 벌써 일을 다 끝냈누?”
“예, 할아버지. 소명이가 와서 도와줬어요.”
“소명이가 왔어? 그렇구나.”
소명이 왔다는 말에 탁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도 소명의 솜씨를 잘 알았다. 탁연수는 헤헤 웃었다.
“그래, 내 나중에 확인할 터이니 나가 놀려무나.”
“다녀오겠습니다!”
탁 노인의 말에 힘차게 대꾸하고 뛰어나갔다. 그 모습이 귀여워 헐헐 웃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예의 싸늘한 인상으로 돌변해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제 손주에게만 웃음을 보이는 탁 노인이었다.
그사이 소명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챙겼던 목편을 읽고 있었다. 지금 보는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에 대해 남긴 문장이었다.
그는 자신을 여공(呂公)이라 칭했다. 집에 무수하게 쌓인 목편 중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정확히는 그중 1893편이었다.
망실된 부분이 많았지만 남은 목편들만 읽어도 여공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자신 넘치던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여공은 자신을 두고 천하인(天下人)이라고 했다.
세상 무엇도 그를 구속할 수 없었고, 세상 어떤 것도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만했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비록 소명으로서는 이해 못 할 어려운 문장이나, 허무맹랑한 내용도 많았지만 그래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여공이 남긴 문장 중에는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라 남긴 문장이다.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소명은 항상 문구를 가슴에 품고 이를 행해왔다. 그것만으로도 언제나 기운이 넘쳤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힘든 줄을 모르고 깊이 집중할 수 있었다. 또, 그 덕인지는 몰라도 이제껏 고뿔 한 번 걸린 적도 없었다.
“소명아, 가자!”
목편에 집중하고 있던 소명은 외침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달려온 탁연수는 소명의 손에 들린 목편을 보고는 물었다.
“또 읽어? 저번에 다 읽었다고 했잖아.”
“헤헤. 재밌어서.”
“정말? 난 집에 있는 책 보는 것도 머리 아파서 싫은데.”
소명의 말에 탁연수는 이맛살을 한껏 찌푸렸다. 책 읽을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것이다. 그 모습에 소명은 그저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