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낙양에 저무는 달
어린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도 있었다. 소명도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있었다. 희멀건하니, 그때도 자신보다 더 여자아이 같던 아이 탁연수, 병약한 모습에 금을 끌어안고 있던 이청, 그리고 나중에 친해진 호충인과 호충연 남매. 그 시절은 이제 기억 속에서도 흐릿했다. 소명의 중얼거림에 퍼뜩 그때가 떠올랐다.
‘이청.’
눈가에 파랑이 일더니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맺혔다가 뚝 하고 떨어졌다. 소명은 당민이 흘리는 소리 없는 눈물을 그저 못 본 체했다. 자신도 이리 가슴이 쓸쓸한데, 당민은 오죽할까.
“나 사실 연수를 본 적이 있어.”
“연수를?”
소명은 눈을 크게 떴다. 급히 고개를 돌려 당민의 안색을 살폈다. 당민은 여전히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다른 기색은 없었다. 놀라는 당민의 눈초리에 흘깃 보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연수를 닮은 사람이었지만.”
“어디서? 누군데?”
“사천, 아미산.”
당민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것은 수 년 전의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기억을 돌이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는 막 녹면옥수라는 무명이 알려질 무렵이었다.
사천 무림에는 삼주회합(三柱會合)이라는 큰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사천 무림을 지탱하는 세 기둥인 아미, 청성, 그리고 당가의 화기를 지키는 자리였다. 오 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로 사천일대에서는 가장 큰 무림 행사였다.
“삼주회합에서 얼핏 스치면서 본 적이 있었어. 그냥 닮은 사람이었지만 말이야.”
당민은 마지막으로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우울해지는 까닭이었다. 외모는 분명히 탁연수와 흡사했지만 그 눈동자는 결코 연수의 눈이 아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이라니.
“삼주회합에서 봤다는 말은.”
“응, 나중에 듣자니 강시당 사람들이라고 하더라고.”
“강시당이면, 그 강시?”
“하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소명은 흠칫 놀란 얼굴을 하자 당민은 키득거렸다. 지금 소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강시당은 시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요괴, 강시가 아니었다. 도가의 등선수행 중 하나인 시해선(尸解仙)의 공력을 닦는 이들이었다. 도문의 정종 중 하나로, 강호상의 유명한 고수들을 여러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강시공은 천하에 짝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공력으로, 대성하면 금강불괴가 두렵지 않으며 천강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강시당이라는 곳에 연수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거지?”
“응. 그런데 정말 연수였을까?”
“글쎄…….”
당민의 목소리에는 확신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닮아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한 번의 스침이었다. 게다가 수년 전의 일이었다. 기억 속에 이목구비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당민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었다.
소명은 이내 히죽 웃었다.
“찾아가 보지 뭐.”
“응?”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보면 될 일.”
소명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웃는 얼굴과 달리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당민은 당황했다. 강시당은 극히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그 위명에 비하여 알려진 바가 조금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입당필사(入黨必死)의 전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곳을 찾아가겠다 하니.
“야, 강시당이 어떤 곳인 줄 알고!”
“뭐, 거기도 사람 사는 곳 아니겠냐. 하하.”
소명은 속 편하게 웃어 버렸다. 어쨌든 옛 친구들의 행방을 찾으려 하던 참이었다. 탁연수를 찾을 수 있다면 강시당이 아니라 천산에 숨은 성마교(聖魔敎)라 할지라도 기꺼이 찾아갈 수 있었다. 소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시당이라.”
“그런데 말이야.”
당민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마음을 다잡았던 소명은 그 어조에 움찔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당민의 눈꼬리가 새삼 솟구쳤다. 소명의 얼굴을 꿰뚫을 듯이 서늘한 눈빛이 일었다. 감정에 젖었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눈길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권야라는 이름은 대체 무얼까나?”
“하, 하하. 글쎄.”
소명은 모호한 미소를 보였다. 그 얼굴에 당민은 욱 하더니 아미를 와락 찌푸렸다. 짙은 눈썹을 모은 채 소명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제대로 말해주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그녀는 왈칵 성을 내며 앞의 탁자를 크게 내리쳤다. 단단한 자연석을 깎아서 만든 탁자가 부르르 떨릴 만큼 공력이 실려 있었다. 당민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이참에 확실하게 듣고 넘어가겠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자객들과의 일도 그렇고, 지금의 말도 그렇고. 대체 어디서 뭘 했던 거야?”
“아이고, 친구야. 뭐 이렇게 성을 내고 그러냐.”
“지금 화 안 내게 생겼어!”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서는 소명의 모습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 참 시기도 좋게 그들 뒤로 낙뢰가 꽈르릉 하고 떨어졌다.
쏴아아!
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차게 떨어졌다. 정자의 기와를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소명은 탁자 위에 한쪽 발을 쾅하고 올린 채 기세 좋게 내려다보는 당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겠다. 소명은 편히 앉으며 긴 숨을 흘렸다.
“길게 얘기하자면 긴 사연이지만.”
담담한 어조로 지난 일을 당민에게 펼쳐놓았다. 일부러 감추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딱히 내놓고 자랑할 이름도 아니라 생각했다.
권야라.
수년 사이에 서장을 비롯한 새외 어디서나 들리던 이름이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특히 유명한 것은 서장의 암흑을 군림하던 ‘붉은 밤’ 자객들을 전부 도륙해 버린 사건이었다. 붉은 밤 자객들뿐만 아니라, 서장에서 내놓으라 하는 모든 자객들이 그때에 몰살당했다.
근접한 사천에도 그 일은 알려져 있었다. 붉은 밤 자객들의 살행으로 사천 무림도 꽤나 피해를 입었던 터였으니. 멍청하니 듣고 있던 당민이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황급히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붉은 밤과 싸우게 된 거야?”
“그건 의뢰를 받았었거든.”
“의뢰?”
“보표 일이라고 해야 하나?”
소명은 턱 어림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는 까닭이었다.
붉은 밤의 목표가 되었던 일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하여 하다못해 어린아이만이라도 살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붉은 밤의 목표라는 것을 모두 아는 판국에 누가 그들 가족을 도우려 할 텐가. 그때, 소명과 위지백이 들렀던 것이었다. 그들은 일가족의 전재산을 받고 붉은 밤과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끈질기게 달려드는 자객들을 전부 상대하여 종국에는 붉은 밤, 그 자체를 지워 버렸던 것이다.
당민은 어이가 없어서 더듬거렸다.
“대, 대체 전재산이 얼마나 되었기에.”
“응? 그게 말이지. 하, 하하하.”
소명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답했다.
“양 세 마리.”
“뭐?”
“양 세 마리였어.”
당민은 소명의 답에 너무 놀라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입을 쩍 벌린 채 소명을 바라보았다. 소명은 그 눈길을 피하며 구시렁거렸다.
“쳇, 이럴까 봐 말하기 싫었다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힘없이 중얼거리는 말에 소명은 항변했다.
“아니, 우리도 일이 그렇게 크게 될 줄은 몰랐지.”
정말 몰랐었다.
그 아이 하나 죽이고자 붉은 밤이 전력을 다할 줄은, 그리고 그 아이가 화염산 성녀의 마지막 후예였다는 것도.
소명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흘렸다.
당민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소명의 어두운 안색에 흠칫하여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새삼 질린 눈으로 고개 툭 떨군 소명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객불원.
그 이름은 사천에서도 유명했다. 그 이름 앞에서라면 녹면옥수라는 이름도 빛을 바랬다. 헌데, 그 이름이 고작 양 세 마리에 의해서 세워졌으리라고 대체 누가 상상이나 할까.
당민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이 내리던 빗물이 점차 잦아들었다.
“어, 해 나왔다.”
소명의 말에 당민은 흘깃 눈을 들었다. 짙은 먹구름이 갈라지며 밝은 햇살이 젖은 정원을 비추었다. 빗물 머금은 꽃잎들이 반짝거렸다.
* * *
황량한 땅 너머에 붉은 불길이 높이 솟구쳐 있었다. 이는 바람에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불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면 그것이 붉은 바위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삐죽하게 솟은 날카로운 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그곳은 험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화염산(火焰山)이라고 했다.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화염산의 산정(山頂)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붉은 바위에서 먼지가 부스스 떨어졌다. 재차 소리가 울렸다.
쿠웅!
한층 묵직한 소리였다. 바위가 들썩였다.
높이만도 십여 장, 좌우의 너비는 다섯 장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였다. 아니, 그 자체가 하나의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에 땅이 들썩이고 산이 들썩였다.
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화염이 타오른다 하여 서장의 사람들은 불타는 산, 화염산이라 하였다. 그 화염산의 한줄기에 이와 같은 기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소리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 산줄기에 머무는 모든 사람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그들은 천으로 머리를 감싼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은 들썩이는 바위산, 붉은 석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리 들썩이던 바위가 순간 쩌적! 균열이 일었다. 약간의 균열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재차 일어난 소리에 바위는 더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붉은 바위는 산산이 부서졌다.
쿠르르릉! 와르르릉!
마른하늘에 벼락 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짙은 모래 구름이 와락 일었다. 그러자 앞에 모여 두리번거리던 모든 이들이 당장 납작 엎드렸다. 오체투지(五體投地)의 모습이었다.
바위가 무너지며 일어난 굉음은 멀리까지 메아리쳤다.
그들은 주춤하며 고개를 들었다. 바위가 무너진 자리 뒤에는 거대한 동혈이 있었다. 짙은 흙먼지를 헤치며 한 인영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호리호리하여 얼핏 가냘픈 모습이었다. 그림자는 아래에 부복한 무수한 사람들 모습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허리에 척 하니 손을 올리고는 다른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홀연 일어난 바람이 짙은 먼지 구름을 남김 없이 쓸어냈다.
그 모습에 부복하던 이들이 일제히 외쳤다.
“산주(山主)께서 대공을 완성하셨다!”
“산주께서 대공을 완성하셨다!”
사내들은 한목소리로 거듭 외쳤다. 그러자 여인들이 이어 외쳤다.
“화염산이 무성해지리라!”
그리고 남녀 할 것 없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산주께서 대공을 완성하셨다!”
고개 든 그들의 눈에는 희열마저 어려 있었다. 그 뜨거운 시선을 받은 산주라는 이는 뜻밖에도 어리다 싶은 여인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짙은 눈썹은 산마루를 닮았고 훤한 인당에서는 총기가 어려 있었다.
이제 약관에나 가까웠을까. 깊은 두 눈동자에는 흐릿한 붉은빛이 번뜩였다. 그녀의 옆으로 한 중년 여인이 총총 뛰어 올라왔다. 그녀의 걸음은 날래기 그지없었다. 화염산의 뾰족한 바위를 밟아 신형을 솟구치는 데, 조금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녀는 산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공손한 모습이었다.
“산주, 경하드립니다.”
이는 격동 때문인지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산주라는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흙먼지가 앉은 어깨 어림을 툭툭 털어냈다. 곧 여인의 뒤로 다섯 사람이 나타나 똑같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산주, 경하드립니다.”
그네들은 육대산인(六大山人)이라는 자들로 화염산의 주인을 보필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산주는 딱히 감정 없는 눈으로 고개 숙인 산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작은 입술이 열렸다.
“위지 형은 어디에 있지?”
아리따운 외견과는 어울리지 않는 걸걸한 목소리였다. 육대산인은 목소리가 아니라 그녀의 물음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네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산주는 나직이 웃었다.
“흐, 흐흐흐. 그래? 소식이 없다, 이 말이지?”
“사, 산주.”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웃음소리였다.
육대산인의 수장인 중년 여인, 홍화선자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찰나 전에 격동이 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뭐라 변명하려는 순간, 산주가 홱 고개를 돌렸다.
검고 맑은 가운데에 흐릿한 붉은빛이 머물렀던 눈동자가 온전히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약속했지? 내가 출관할 때까지 위지 형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가기로.”
“산주! 산의 주인께서 산을 비우시면!”
홍화선자는 비명처럼 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얼굴은 울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산주는 버럭 소리쳤다.
“몰라! 더는 못 기다려!”
“…….”
순간 산주로서의 위엄은 간데없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쾅쾅 구르며 소리쳤다.
육대산인들은 찔끔했다. 산주가 작은 발을 구를 때마다 절벽이 들썩였다.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푹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한숨을 흘렸다. 홍화선자가 순간 욱해서는 한 사내를 욕했다.
‘망할 자식! 그렇게 자신만만해서는 길을 떠나더니!’
산주는 주변 육대산인들의 시선을 모두 외면했다. 그녀는 멀리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크게 일었다. 화염산의 붉은 모래가 솟구쳐 올라 하늘은 붉었다. 그러나 산주의 하얀 얼굴은 그보다 붉었다. 그녀는 달뜬 얼굴로 높이 소리쳤다.
“상공, 이제 소녀가 가요!”
“산주!”
뒤이어 육대산인의 기겁한 외침이 속절없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