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홍천(紅天)의 백마사(白馬寺)
“대단하시군요.”
“하하, 그저 조그만 성취를 얻었을 뿐이라오.”
팽오성은 손을 흔들며 겸양했다. 그는 곧 소명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아니, 가만, 은공이야말로 뭔가 달라졌구려.”
팽오성은 가만히 눈매를 모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부족한 뭔가를 채우셨구려.”
그는 소명의 진면목을 직접 목격한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소림에서의 수행이 어떤 성과를 보였는지 그는 당장 이전과의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팽오성 역시 또 다른 진경에 나아갔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아마 예전의 성취였다면 영 몰라 뵈었을 것이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팽 대야.”
“과찬이라니. 소명 공, 그대라면 팽가도를 눈 아래에 두어도 결코 오만이 아니외다.”
담담한 말이었다. 그러나 여파는 컸다. 뒤에 있던 팽가의 가인들이 발끈한 것이었다.
“아니, 오숙! 그것이 대체 무슨 망발이십니까! 팽가도가 저런 비루한 자의 눈 아래에 있다니요!”
“…….”
얼굴을 붉힌 채 발끈하는 팽가의 젊은이를 팽오성은 조용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를 악문 채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들 듯했다.
소명은 낮은 한숨을 흘렸다. 팽오성의 속셈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짐짓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아, 짓궂으시군요.”
“부탁드리오. 여기 아이들은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있다오.”
“하하, 그렇다면 내가 대신 나서도 되겠습니까?”
“응, 그대는?”
위지백이 껄껄 웃었다. 그도 눈치가 있어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는 단박에 꿰뚫은 참이었다. 그 역시 도객, 중원 도법의 대명사라 하는 팽가의 도법에 관심이 아니 갈 수 없었다.
팽오성은 전혀 다른 눈으로 위지백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같은 도객으로서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안목이었다. 위지백이 품은 서늘한 도기가 너무도 선명했다. 팽오성의 눈꼬리가 흔들렸다.
‘어디서 이런 자가.’
이만한 도기를 지닌 도객은 천하에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문득 위지백의 투박한 도갑으로 향했다. 보기에는 다른 장식이 없는 그저 고풍스런 옛적의 물건으로 보였다. 그러나 팽오성은 경험 많은 강호의 인사였다. 그는 한눈에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광, 무광?”
“오호, 이놈을 알아보시다니.”
“허면, 당신은.”
팽오성은 해연히 놀란 눈으로 위지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지백은 배시시 웃었다.
“안목이 상당하십니다. 그려.”
“하하, 이거야 엎드려서라도 부탁하고 싶은 일이구려.”
팽오성은 한 차례 웃더니 이내 진지한 낯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위지백은 싱글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엉거주춤한 채 성나 있는 팽가의 젊은 가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까딱까딱 손짓하며 말했다.
“자, 얘기는 들었지? 자, 아가들아, 어서어서 덤벼 봐라.”
“이런 무례한!”
그들은 불끈 성을 냈다. 이제 이립이나 갓 넘겼을 법한 위지백이었다. 얼마 나이 차이도 나지 않아 보이는데 어린아이 다루듯이 나오다니. 당장에 기세가 흉흉했다. 그러나 위지백은 싱글벙글하니, 만면에 여유가 만만했다.
처음 나섰던 팽가 가인은 그 여유를 더 참아 줄 수가 없었다. 당장 도를 뽑아 들었다.
츠앙!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그는 도첨으로 위지백을 가리켰다.
“도를 뽑으시오.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 인사인지 어디 한번 겨뤄 봅시다!”
“쯧쯧쯧.”
위지백은 혀를 찼다. 그는 도갑을 뒤로 돌려 두 어깨에 척하고 걸쳤다.
“자네 하나로는 안 돼. 객기 부리지 말고 다 덤벼.”
명명백백히 눈 아래로 보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소명은 쓴웃음을 흘렸고, 팽오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광도의 주인이라면 응당 그럴 자격이 있었다.
“크악!”
팽가의 가인들이 일제히 발끈했다. 그들 열다섯은 팽가의 젊은 정예들로, 특출한 무재를 인정받아 소가주의 호위를 맡은 자들이었다. 고작 약관을 넘었을 뿐이지만 개중에는 절정경을 바라보는 자도 있었다. 이들을 일컬어 팽가에서는 거친 바람이라 하여 황풍영(荒風英)이라 했다. 그 이름에는 자신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겼지만, 이들은 오히려 마음에 들어 일제히 도갑에 황풍의 글자를 새기고 다녔다.
위지백이 보기에는 그들은 영 싹수가 노랗기만 하다.
“이거야, 원. 팽가도의 위명은 익히 들었지만, 어린것들은 한참 모자라고만. 쯧쯧.”
혀를 찼다. 그는 설렁거리는 걸음으로 칼을 뽑아 든 황풍영들에게 다가갔다. 주변에서 여타 무가련의 가인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이 소란을 지켜보았다.
‘하, 어떤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범한 것인가? 아니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것인가?’
‘혹시라도 팽가에서 낭패를 본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겠군.’
다들 꿍꿍이들이 비슷비슷했다. 소명은 그런 눈치를 읽고는 팽오성에게 넌지시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이 일은 오히려 기연이 될 것이오. 그저 은공에게 면목이 없을 따름이오.”
“하하.”
소명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사이, 팽가 황풍영의 칼날이 흉광을 번뜩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흥이라 적힌 칼날, 그리고 도갑에는 황풍이라 적혀 있다. 건흥도의 주인 팽흥은 힘을 다해 내쳐 달려들었다. 그러나 달려들수록 그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를 틀어 문 채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러 보지만 칼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색이 바랜 장포 자락이 펄럭였다. 눈으로 쫓는 것만으로도 바쁠 지경이었다.
열다섯의 일류 이상의 도객들이 펼치는 칼질은 한 명의 고수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니, 무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쯧쯧쯧, 한심해. 한심해.”
위지백은 신형을 돌리며 연신 혀를 찼다. 무슨 대단한 보신경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신법의 기본인 삼재보와 반삼재보를 번갈아 펼치는 것에 불과한데도 팽가의 젊은 바람들은 칼질다운 칼질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용들은 다 쓴 건가? 아니, 전력으로 휘두르는 것도 이각 이상 유지를 못한단 말이야?”
“크, 크윽!”
수치심에 침음했다. 그러나 차마 대거리하지는 못했다. 지금의 일로 그들이 얼마나 바닥에 있는지 처참하게 깨달았으니. 그들도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밥통들은 아니었다. 나름 기재라 촉망을 받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헐떡거리면서도 위지백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나마 눈빛 하나는 봐 줄 만했다. 그러나 위지백은 쯧쯧 혀를 찼다.
“미련한 것들, 솜씨가 없으면 수그릴 줄도 알아야 목숨도 부지하지.”
미련하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팽흥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닥치시오! 당신 따위가 명문의 법도를 알까!”
“호오라.”
손은 무딘 것들이 위세만큼은 제법이다. 하기야 보고 배운 것이 그따구인 것을 누구를 탓할까. 위지백은 껄껄, 한 번 크게 웃고는 어깨에 걸쳤던 도갑을 내렸다.
“자, 그럼 명문가의 법도를 가르쳐 주시지. 이 위지 모, 기대가 무척이나 크네.”
실실 웃는 모양새는 황풍영의 젊은이들을 크게 자극했다. 그러나 그들은 천둥벌거숭이일지언정 우둔한 백치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은 분명했다. 당황해 주춤해 있자니, 위지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오나? 그럼 내가 갈까?”
위지백은 건들거리며 다가섰다.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워질수록 황풍영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호기롭던 기세는 간데없었다.
“이, 이익!”
팽흥은 이를 악물었다. 함부로 달려들었다가는 호된 꼴을 당하리라는 것이 불 보듯이 뻔했지만 팽가 직계의 자존심은 그보다 더욱 거대했다. 주춤하는 다른 황풍영들 앞에서 더 이상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저 건들거리는 모양새를 향해 팽흥은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크합!”
곧게 뻗어 오는 칼날이 이내 어지러운 변화를 일으켰다.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일도를 떨쳤다. 화려한 변화 속에서 위험한 일도를 숨긴 일초였다. 그러나 위지백은 이제 순순히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칼집을 휘둘렀다. 오철로 만든 도갑이었다.
쾅쾅! 소리가 크게 났다.
작정한 절초(絶招)가 채 변화하기도 전에 무참히 박살 났다. 놀랄 겨를 따위는 없었다. 시커먼 도갑이 그대로 팽흥의 턱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황풍영을 향해 거침없이 몰아쳐 갔다. 일초반식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짧게 휘두르는 도갑에 무참히 쓰러져갔다. 위지백은 절묘하게, 아니, 실로 고약하게 손을 썼다. 닥치는 대로 처맞아 쓰러지면서도 정신을 잃은 이는 없었고, 어디 한 곳 부러지는 일도 없었다. 다만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아악!”
“끄어억!”
철혈도가, 팽가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럼에도 지켜보는 팽오성은 과연이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격이 완전히 달랐다.
‘서장에 일도가 있어 십 년 내 천하를 굽어보리라 하더니.’
위지백은 도갑을 들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끙끙거리는 팽가의 가인들이 흙바닥에 처박힌 채 꿈틀거렸다. 안쓰러운 일이나, 위지백의 얼굴에는 그저 설렁한 웃음만 걸려 있었다.
“쯧쯧, 실력이 안 되면 길 줄이라도 알아야지. 달리 강호무정이라 하는 줄 아나.”
“큭.”
소명은 위지백의 웅얼거림에 쓴웃음을 흘렸다. 강호무정, 스승 장우상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한데 별생각 없는 그 한마디에 황풍영 중 한 명이 울부짖었다.
“다, 닥…… 쳐!”
그는 핏발 선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맞아서 사지 놀리기가 쉽지 않으련만 도를 단단히 틀어쥔 채 억지로 허리를 세웠다. 얼핏 봐도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어린 녀석이었다. 부러져라 이를 악문 채 위지백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되도 않는 오기를 부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위지백은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뿐하게 웃었다.
“그 패기만큼은 인정하지. 그런데.”
“컥!”
말 끝나기가 무섭게 위지백의 도갑이 명치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썩은 집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너 머리는 나쁘구나.”
고스란히 때려눕힌 위지백은 흘깃 팽오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녀석은 이름이 뭐랍니까?”
“그 아이는 팽세영이라는 아이로, 황풍영의 막내라오.”
“그나마 이놈이 제일 싹수가 있겠소이다.”
그리 말하고는 껄껄 웃었다.
무가련의 모든 고수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위지백을 바라보았다. 팽가의 황풍영이 비록 손색이 있다하여도 팽가를 대표하는 무력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저렇게 놀듯이, 아이 다루듯이 할 만한 자들은 아닌 것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그들 자신이 더욱 잘 알았다. 무가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경쟁하는 처지였으니 서로의 무력에 대해서는 강호상의 다른 누구보다 더욱 탐색하는 판국이었다.
여기 있는 누구도 홀로 팽가 황풍영을 감당할 수 없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종자가 저런 무위를 지녔을 줄이야. 안색이 대번에 돌변했다. 남궁가와 팽오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경계하는 얼굴로 위지백을, 그리고 소명을 노려보았다.
“어허, 이런.”
팽오성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주변 세가의 가인들의 기세마저 심상치 않게 돌변하다니…… 그러나 위지백은 태연했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들을 하나하나 마주하고는 피식 웃었다. 마치 같잖다는 듯한 미소였다. 위지백이야 별반 의미 없이 흘린 미소였지만 그만 무가련의 가인들을 발끈하게 만들었다.
“아니, 저자가!”
“방자하다!”
“팽가의 애송이들을 상대했다고 무가련이 우습게 보이는 가!”
절정으로 유명한 섬서백가의 가인들마저 불편한 심경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러자 위지백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히려 잘됐다 하는 기색이었다.
소명은 아차 싶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대책 없이 일만 키울 줄 아는 위지백이었다. 그가 과한 행동을 하기 전에 나서서 말렸어야 했는데.
‘저런 빌어먹을 인간.’
위지백은 다시 한판 벌려 볼까 하는 얼굴이다.
서장에서 말하기를 서장제일도에게는 특출한 재주가 셋이 있는데. 첫째는 당연 칼부림이요, 둘째는 말술이며, 마지막 셋째는 작은 일도 크게 만드는 말재주였다. 특히 마지막 말재주는 입이 화를 부른다고 해서 달리 구화공(口禍功)이라 불렀다. 그냥 넘어갈 것 같은 일도 꼭 위지백이 끼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니.
소명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새삼 골치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남궁가를 제외하고 백가, 황보가, 육가의 가인들이 몸을 일으켰다. 도광이 사라진 자리에 험악한 기세가 내려앉았다.
“이것이 무슨 소란인가?”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수염이 허연 노승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사는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뚜렷했다. 으리으리한 백마사의 전경과는 그리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하나 범상치 않은 기세에 자리한 뭇 가인들이 멈춰 섰다.
망원 선사였다. 선방을 나선 그가 소란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다들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는데, 노선사는 바닥을 구르는 팽가의 가인들을 돌아보았다. 눈을 가린 허연 눈썹을 슬쩍 치켜들며 중얼거렸다.
“허허, 이것 참. 승려들이 수행하는 장소를 내주었으면 자중할 줄을 알아야지.”
웃음과 함께 말했지만 염연히 책망하는 기색이었다. 자존심 드높은 팽가의 가인들이었으나, 지금에는 도리가 없었다. 엎어진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처지가 아닌가. 이때에 팽오성이 서둘러 나섰다.
“선사, 죄송합니다. 제가 욕심이 과하여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서슴없이 허리를 숙였다. 참으로 극진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망원 선사는 슬쩍 고개를 뒤로 빼고 팽오성의 위아래를 보더니만 환히 웃었다.
“응? 자네는 오성, 오성이군.”
“소인을 기억하십니까.”
“하고말고. 팽가의 그 천둥벌거숭이가 아닌가. 대뜸 칼을 뽑아 들더니 백가의 절정검을 한수 가르쳐 달라 했었지.”
“크흠!”
팽오성은 어깨를 떨었다. 소싯적의 일이라 심히 민망하여 얼굴을 크게 붉혔다. 강호의 선배인 동시에 무가련의 어른이라. 뒤늦게 깨달은 뭇 가인들은 분분히 허리를 숙였다.
“하하, 되었어. 가문도 떠난 마당인데 무슨 대접을 받겠다고.”
망원 선사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황풍영의 뻗은 모습을 흘깃 둘러보고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