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홍천(紅天)의 백마사(白馬寺)
팽가를 제외한 무가련의 후인들은 백마각에 다시 모였다. 짧고도 소란한 밤이라, 함께 자리한 그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다들 불길에 그슬렸거나 피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팽곽을 제외하고 백청광, 황보순, 육기,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때 남궁유가 들어섰다.
“오, 남궁 동생.”
셋은 드물게 화색을 드러내며 그를 반겼다.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남궁유는 차분히 말했다.
“정리는 모두 끝났습니다.”
“산 자는 있는가?”
육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남궁유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청광이 옆에서 말했다.
“그저 베라 하였네. 생존자는 필요 없다고 말이야.”
“이런 배후를 캐물었어야 했을 것이 아닌가.”
황보순이 눈살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남궁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이 가능할 자들이라면 애초에 이런 짓은 벌이지도 않았겠지요. 백 형님의 조처가 옳습니다.”
남궁유는 고요한 신색으로 말했다. 그런 남궁유의 모습을 백청광을 비롯한 뭇 소가주들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견제하는 눈초리였다.
‘남궁가에 또 다른 용이 등장했군. 후계 구도가 복잡해지겠는데.’
그들은 곧 속내를 감추었다. 다른 가문의 후계에 관하여서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들은 곧 백마사의 상태를 살폈다.
남궁유의 조치가 적절한 까닭에 다행히 큰 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담벼락 서넛이 폭발로 무너지고 약간의 불길이 법당을 그슬렸을 뿐이었다. 화재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도 크지만 그들이 준비한 폭발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도 큰 이유였다.
“이상한 일이군.”
백청광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은 한숨을 돌렸다는 표정이었지만 백청광은 그렇지 못했다. 다른 무언가가 더 있었을 터인데. 그는 복면인들이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의 눈빛을 새삼 돌이켰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단순히 일의 실패 때문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어긋났기 때문인 듯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것일까.
백청광은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 고민할 일이 아니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누군가 배후가 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백청광은 처음에는 자리에 없는 팽곽을 의심했다. 그러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팽곽에게는 이러한 배짱은 없었다. 무엇보다 팽곽이 있는 처소가 제일 호되게 당했다. 팽가의 황풍영이 죄 자리보전하고 있는 판국이니 그들로서도 다른 도리는 없었을 터였다.
팽곽은 검댕이를 잔뜩 뒤집어쓴 낭패한 몰골로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백청광은 심유한 눈으로 복면인들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이름 하나가 맴돌았다. 다른 소가주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소…… 천룡.’
백청광은 말없이 검갑을 틀어쥐었다.
* * *
당민은 부상자들을 돌보고 잠시 짬을 내어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싸늘했다. 매캐한 냄새가 바람에 섞여서 코끝을 간질였다. 당민은 백마사 한 곳의 정원석에 걸터앉았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자.”
누군가 당민의 뒤로 기척 없이 다가와 죽통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흘깃 고개를 돌리니 소명이 서 있었다. 그녀는 슬쩍 미소 짓고는 죽통을 받아들었다. 미적지근한 물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볍게 목을 축인 그녀는 잠시 숨을 돌렸다.
“고생했다.”
“고생은 무슨.”
약간의 화상 환자가 전부였다. 크게 다치고 부상 입은 자는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자들뿐이다. 무가련의 손속은 단호했다. 그들은 용서 없이 칼을 휘둘렀다. 습격했던 이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둘은 말이 없었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깊어가는 밤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상화촌에서 당민과 우연히 조우하고 벌써 보름여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여러 자객들을 상대하여 여럿의 생목숨을 거두기도 하였으니. 실상 서장에 있었던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았지만, 중원에 들어선 이후로는 처음으로 여는 큰 살계였다.
자객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으나, 목숨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씁쓸한 것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내린 침묵은 어색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그것이 또한 서로에게 위안이었다.
둘은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죽을 자리를 알고 오는 자들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피곤한 일은 없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자객들을 상대함에 그만큼이나 단호한 손속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백마사를 습격한 자들은 달랐다.
수많은 미련을 끌어안고도 죽어라 달려드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소명이 그저 달래어 보낸 것은 그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객살수들과 같은 족속이 아니다.
“하아.”
문득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당민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한숨은 대체 뭐야?”
“기껏 차 한 잔에 너무 힘을 쓴 것 같아서 말이지.”
소명은 대꾸하며 히죽 웃었다. 당민이 실소를 흘렸다. 소명이 망원 선사의 차를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노선사가 당부하여 부탁한 일이니.
그런데, 문득 소명은 입매를 찌푸렸다. 무가련의 가인들이 꽤나 살벌한 기색으로 복면인들의 시신을 뒤지고 있었다. 정체를 파악하기 위함이니 뭐라 할 일은 아니겠지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 참. 상인(上人)은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무가련이라는 자들은 잘 먹고 잘살면서도 왜 이렇게들 다투어 대는 것인지.”
“…….”
당민은 한숨이 섞인 소명의 말 속에 뼈를 느끼고는 멈칫했다. 그녀는 흘깃 소명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흐린 달빛에 드리운 음영이 짙었다.
깊은 눈길이 먼 곳을 헤아리고 있었다. 당민은 소명의 눈길에 퍼뜩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맺혔다. 그녀 또한 고개 돌려 소명과 같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떠나려고?”
“노선사와 남궁 공자에게는 대신 인사 전해 줘.”
당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어디로 가?”
“등용문, 아충 녀석이나 끌고 가려고.”
“내 안부도 전해 줘.”
“그럴게.”
소명도 당민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소명이 곧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날이 밝아 오려는지 멀리 동녘 하늘이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소명은 고개 돌려 앉은 당민을 내려다보았다.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백마사의 차는 오지게도 맛없더라.”
“큭큭.”
당민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망원 선사의 솜씨는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 웃음을 삼켰다. 소명이 깊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말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응.”
“꽤나 흉흉하더라.”
“글쎄 말이야. 네 말대로 있는 것들이 더한다니까.”
“하하.”
농이라고 한 말일 테지만, 그녀의 모습에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소명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소명과 위지백은 백마사를 나섰다. 채 날이 밝아 오기도 전이었다. 간밤의 흉험한 일로 정신이 없던 터라, 무가련은 물론 백마사의 승인들 중 누구도 두 사람의 떠남을 알지 못했다. 죄다 지쳐서 뻗어 있었다. 둘을 배웅하는 사람은 오직 당민뿐이었다.
캄캄한 새벽, 어둠 속에서 당민의 녹금색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녀는 백마사의 정문에 우뚝 선 백마상 앞에서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녀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멀어지는 소명과 위지백의 모습에 그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불현듯 바람이 불어 왔다. 새벽바람은 쌀쌀하고 거세어, 당민의 삼단 같은 머리채를 크게 흩뜨렸다.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그사이에 새벽 어슴푸레함 사이로 둘의 모습은 사라졌다.
당민은 눈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매정한 자식, 어떻게 한 번을 안 돌아보냐.”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소명과 위지백이 멀어진 곳에서부터 하늘은 점차 밝아 왔다.
당민은 한참을 그리 있다가, 이내 짧은 실소를 흘렸다. 그녀는 느릿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녹색의 가면을 천천히 눌러썼다. 녹면 사이로 드러나 두 눈동자는 서늘하여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당가의 녹면옥수, 그 본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출(日出)의 햇발을 받은 백마사의 전경은 눈부셨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적지(敵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촌음의 방심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망원 선사는 당민으로부터 소명과 위지백이 이른 새벽녘에 길을 나섰음을 들었다. 그러자 망원 선사는 염주알을 굴리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선재, 선재로고. 두 시주가 아니었다면 백마사의 청정에 원념이 가득하였으리라.”
망원 선사는 소명과 위지백이 생을 거두지 않고 그저 물러가게 한 것을 잘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속진에 찌들어서 선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백마사였다. 이곳에 원념이 더한다면 어찌할까. 선학들 보기가 심히 민망한 일이라. 망원 선사는 온화한 기색으로 불호를 읊조렸다.
“허허, 아미타불.”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 부처님 미소인 양 가만한 미소가 머물렀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주름진 노안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에이잉, 저거, 저 못난 놈들은 쓸데없이 칼질들이나 할 줄 알았지. 호생지덕이라는 걸 몰라, 한심한.”
망원 선사의 성난 눈길이 닿은 곳은 백마각, 무가련이 머무는 곳이었다. 생각이 있네, 없네 하며 잇새로 험한 말을 쏟아 냈다. 그 앞에서 당민은 민망하여 그저 못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루 후, 천룡세가의 사람이 백마사의 문을 두드렸다.
* * *
궂은 날씨였다. 잿빛으로 흐린 하늘에서 가루눈이 흩날렸다. 초봄의 햇살은 멀었다.
성시대로(城市大路), 복작거려야 마땅할 그곳에 수상하게도 인기척 하나 없었다. 때아닌 눈발이 날린다고 하나 바깥 걸음을 삼갈 정도로 험한 날은 아니련만.
하남의 대도, 허창(許昌)이 언제 폐성(廢城)이 되었는가 싶을 정도였다. 한낮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을씨년스러운 대로에 두 그림자가 들어섰다. 그들은 죽립을 깊이 눌러쓰고 피풍의를 걸쳤다.
먼 길을 온 듯, 죽립과 어깨에는 가루눈이 뽀얗게 쌓여 있었다. 그들은 대로 한가운데에 서서는 조용한 주변 모습을 바라보았다. 객잔이건 노점이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문을 닫아걸었으니, 들어갈 곳은커녕 앉아 쉴 곳 하나 없다.
먼 길을 온 두 사람에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 사내가 죽립을 풀어내며 구시렁거렸다.
“이거야 원, 개새끼 한 마리 안 뵈이네. 뭐가 이리 을씨년스러워?”
죽립을 벗은 그는 위지백이었다. 그는 죽립으로 눈가루에 젖은 옷자락을 탁탁 털어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살 찌푸린 얼굴에는 짜증이 솔직했다. 궂은 날씨에 따끈한 술 한 잔을 기대했던 터라 표정은 더 좋지 않았다.
“요상타. 뭔 돌림병이라도 돌았나.”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끅!”
말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소명이 냅다 발길질이다. 위지백은 속절없이 앞으로 굴렀다. 소명은 얼굴을 가린 두건을 끌어 내리고는 나자빠진 위지백을 쏘아보았다.
저놈의 입방정이라니.
위지백은 비척비척 일어나며 툴툴거렸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냅다 발길질할 건 또 뭐야?”
소명은 불만 남은 위지백의 모습을 싹 무시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낙양 백마사를 떠나 이제 막 허창에 닿은 참이었다.
낙양에서는 춘삼월이랍시고 봄바람에 살랑거리는데, 이곳 허창은 가루눈이 쏟아지고 있으니. 봄철의 변덕이야 알아줘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날씨 때문에 성내가 죄 무인지경(無人之境)인 것은 아닌 듯했다. 위지백의 입방정처럼 돌림병도 아닌 듯한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소명은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 있는데 위지백이 채근했다.
“언제까지 눈 맞고 있을 거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쏟아지는 눈가루를 보아하니 당장 멈출 것 같지도 않았다. 달리 피할 곳도 없으니. 위지백이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찾아가지. 늦은 시간도 아니잖아. 뭐, 설마 문전박대나 하겠냐?”
“모르지. 네놈 면상에 당장 칼부터 뽑아 들지도.”
소명은 농 한마디 던지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실실 웃던 위지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내 얼굴이 어때서? 야!”
“하하.”
정색하고 따져 들었지만, 소명은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웃음소리만 남기며 앞서 걸었다. 그 모습이 하도 여유인지라 성내는 위지백의 꼴만 이상하다. 다른 도리 없이 뒤를 따라 걸으면서, 이만 빠득빠득 갈아붙였다.
‘에잇, 젠장!’
두 사람은 허창 대로를 지나 성내로 더 들어갔다. 목적한 곳에 닿았다. 높은 담 위로 고루거각이 즐비하다. 창룡장이라, 그곳의 위용은 여전했다.
위지백은 눈썹 위에 손을 척 올리고는 두리번거렸다.
“오호라, 저기가 그 이름 높은 등용문이시군. 그러한데.”
살피던 그는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창룡장의 전경이 하수상한 까닭이었다. 위지백은 소명을 돌아보았다.
“뭔 일이라도 벌어진 모양인데?”
“뭐든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소명 또한 눈가를 찌푸린 채 말했다.
창룡장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고, 여럿의 위사들이 앞에 모여 있었다. 어쩐지 그들의 낯빛이 심각했다. 더구나 단단히 무장한 채 사위를 경계하는데, 그것은 일반 위사들의 무장이 아니었다. 기세가 사뭇 흉흉하여, 마치 전장의 복판에라도 서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명은 저들의 모습에서 허창 성내의 상황이 등용문과 크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연유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허창까지 여정 중, 등용문에 무슨 변고가 생겼다는 소문은 들은 바가 없었다.
‘대체?’
의아한 일이었지만 소명은 곧 발걸음을 옮겼다. 상황이 기이하나 소명은 소림의 ‘용문제자’로서 등용문에 방문하는 것이다.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정문으로 다가서자, 위사들은 퍼뜩 눈을 치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