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무책(無策)이야말로 상책(上策)
소명은 흙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뭇 위사들 십여 명이 어깨를 움츠린 채 소명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햇빛이 저물어 가는 마당이었다. 하루 일과를 정리해야 하는 때에, 소명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호명해 끌고 나갔다. 그 면면을 보자니 서로 간에 익숙한 얼굴들이라 크게 당황스러웠다. 마치 뭔가를 알고 부른 듯하지 않은가.
주저하는 그들에게 소명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자자, 설명들 해 보시구려.”
“예?”
“설명을 해 보시라고. 그날부터 시작을 해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소명은 어리둥절한 그들을 채근했다. 그들은 눈치를 볼 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두려운 것이었다. 당장의 소나기보다는 나중에 올 태풍이 무서운 법이니.
“하하, 이들을 너무 겁박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뭐라 하여도 내 수하들이니.”
돌연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령백삼(圓領白衫)을 걸친 그는 문기정이었다. 그가 등장하니 잔뜩 얼어 있던 위사들이 냉큼 두 손을 맞잡았다.
“대공자를 뵙습니다!”
“대공자를 뵙습니다!”
“하하, 되었네.”
“예, 대공자!”
옆에서 보자니 참 일사불란한 것이 엄정하다 할 모습이나, 소명의 눈에는 그저 석연치 않게 보였다. 엄정함과 두려움은 엄연히 별개인바 대공자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무사들의 가슴이 급하게 뛰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무엇을 뜻하겠는가.
소명은 의미심장하게 올라가는 입매를 지그시 눌렀다. 그는 곧 다가선 문기정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문 대공자이시군요. 필부 소명이 인사드립니다.”
“아, 소명 공이시군. 문주께서 이번 일을 맡기셨다지요.”
“예.”
“수완이 상당하신가 보구려.”
말 속에 칼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소명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문기정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문 대공자께도 청이 있던 참이었는데, 이리 찾아 주시니 감사하군요.”
“청이 있으시다? 나에게?”
“예, 그날 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소명은 더욱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문기정의 눈은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그는 입으로는 웃고 있으나 눈으로는 강한 빛을 발했다. 뒤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무사들이 움찔하고 물러섰다. 그들이 보기에 소명은 철모르는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어쩌자고 벌집을 건드리다 못해 들쑤신다는 말인가. 그들은 문기정의 입에서 어떤 호통이 터져 나올지 몰랐다. 잔뜩 얼어서 긴장해 있자니, 문기정의 입이 열렸다.
“하, 하하하!”
뜻밖에도 그에게서 호호탕탕한 웃음이 터졌다. 곧 웃음을 거둔 그는 앞에 선 소명을 바라보았다.
“정말 수완이 상당하시군. 좋아요, 좋아. 허면, 어디부터 시작하면 좋겠소?”
“갑자조가 보고를 마친 때부터 시작하지요. 듣자 하니, 그들은 원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지요?”
“음.”
문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기억을 돌이키는 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에 내리는 달빛이 스산했다.
소명은 문기정의 말을 들으며, 또 옆에서 거드는 무사들의 말을 들었다. 그들의 말은 잘 꾸며져 있었고, 앞뒤가 딱 맞아떨어졌다. 다른 소리를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십여 명의 인원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는 셈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럼, 그때의 상황을 한번 보여 주시겠습니까?”
“음?”
문기정은 이해 못 해 소명을 다시 돌아보았다. 소명은 성큼 걸었다. 그는 후영각의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씀하시기로 호충인, 그놈이 먼저 살수를 썼다지요?”
“그렇다오.”
“정확히 어떤 식이었습니까? 호조쌍수(虎爪雙袖)였나요? 아니면 용형단파(龍形斷派)였습니까?”
“그것이.”
문기정은 얼핏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신색을 회복했다. 그리고 소명이 묻는 말에 싫은 기색 없이 답했다. 그는 가볍게 손짓해 보이며 물러서는 시늉을 했다. 그에 따라서 무사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소명은 한가운데에서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입으로 말하며 그때의 일을 어색하게 재연했다. 문기정 마저 하니, 아니 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무슨 광대놀음인가 싶었다. 얼굴에 마뜩잖은 기분이 솔직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소명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무사들의 엉거주춤한 움직임을 낱낱이 쫓았다.
그사이, 해는 한참 전에 저물어 사방이 어둑했다. 급하게 불길을 밝혀서 여기저기 그림자가 어지러웠다. 각자의 설명을 끝낸 위사들은 한쪽으로 물러나서는 돌아가는 눈치를 살폈다.
소명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이 벌어지고 한참이었다. 무슨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저렇게 살피는 것인지.
위사들은 내심으로 불만이 그득했다. 찔리는 바가 있어 어려워하던 것은 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소명이 다른 기색 없이 하는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거리니 더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쳇, 빨리 끝내기나 할 것이지.’
‘뭘 찾는다고 저 지랄이야?’
‘찾기는, 문주께 잘 보이려고 저러는 게지.’
위사들은 숨죽인 목소리로 저들끼리 구시렁거렸다. 그러던 차에 소명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혼자 심각하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문기정을 바라보았다.
한쪽으로 물러난 문기정은 뒷짐을 진 채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하, 상황은 이제 알겠습니다. 아쉽군요. 그때에 문 대공자께서 건사하셨다면, 호가, 그놈쯤이야 능히 제압하셨을 터인데.”
“헛, 흠.”
문기정은 헛기침을 흘리며 슬쩍 고개 돌려 외면했다. 소명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지, 네놈도 낯짝이 있으니 그리 태연할 수 없는 노릇이지.’
눈가에 스산한 빛이 스치고 지나쳤다.
“감사합니다. 제 무리한 요구에 선뜻 응해 주시니.”
“별말씀을. 소명 형, 그놈을 꼭 잡아 문주의 우환을 처리해 주시구려.”
“아이코, 아무렴요.”
문기정은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지그시 보는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그는 내원 무사들을 이끌고 후영각을 벗어났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는 흘깃 눈을 돌렸다.
어둠 속에 맺힌 붉은 안광이 요사하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매가 크게 비틀렸다.
“등용소패? 흥!”
문기정의 눈에 비친 소명은 어리숙하고 우둔한 모습이었다. 책이라도 잡힐까, 안달복달하면서 하는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니. 그는 친부 등용문주를 떠올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겨우 저런 자를 믿으셨습니까?”
문기정과 무사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소명은 혼자 남아 헤실거리는 얼굴로 그들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얼굴에서 문득 웃는 기색이 사라져갔다. 그는 멀어지는 문기정을 유심히 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굳은 눈매에 한광(寒光)이 머물렀다.
“동생 얘기는 없으시군. 확실히 끝을 보셨다 이거지.”
문주의 우환을 말하면서 같이 사라진 동생의 안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 자신의 손속에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소명은 한광을 거두고 새삼 어둑한 후원을 둘러보았다. 내원의 무사들은 주변을 정리한답시고 죄 갈아엎었다. 당시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으련만 소명의 눈은 침착했다.
‘상황은 그렇군.’
소명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후원 입구로 호충인이 들어섰다. 원행으로 지친 모습이었지만 얼굴은 밝다. 기원원과 문혜선이 들어서는 그를 반겼다. 셋이서 잠시 대화를 할 새, 문기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태연히 다가왔다. 아무도 위험을 몰랐다.
웃는 얼굴로 갑작스레 일장을 떨쳤다. 그 일장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친동생 문혜선을 향했다. 아무도 방비하지 못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호충인, 기원원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문혜선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문기정의 암수가 두 사람을 덮쳤다.
이때에 사실상 일은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문기정은 확실하게 끝을 내고자 했다. 그의 수하들이 달려들었다.
내원의 호원 무사들, 그들은 선후 없이 달려들었다.
계통이 없는 자들, 부나방과 다를 것이 무언가.
평소의 호충인이라면 능히 일당백이다. 그러나 당시의 그는 원행에 기진한 상태에 더해 문기정의 암습을 당한 상황, 평소의 기량이 아니다. 더구나 문기정의 손에 문혜선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심지가 흔들린 마당이니, 필패(必敗)였다.
소명은 느릿하게 걸었다.
그는 어지럽게 움직이는 무사들 모습에서 그날의 일을 유추해 나갔다.
내원 무사 열대여섯. 그들이 동시에 치고 들어왔다. 앞서 내원 무사들이 말한 것과 시작부터 달랐다. 아무리 호충인이 암습을 당한 처지라 하여도, 맹격호완의 이름은 그들에게도 부담이었다. 내원 무사들은 막무가내로 달려들기에 급급했다. 이에 호충인은 피를 쏟으며 물러섰다.
소명은 어느 한 곳에서 잠시 멈춰 섰다. 땅을 다시 다진 흔적이 있었다.
발을 밀어내며 급히 물러서던 호충인의 반격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강렬한 발 구름과 함께 발한 일권의 경력, 그것은 몰아쳐 오는 내원 무사들을 일시에 날려 버렸다. 내상을 각오한 것이다. 그 서슬에 무사들은 움찔했다. 처음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지 못하고 좌우로 흩어져 호충인을 포위했다.
차륜전, 그렇지 않아도 지친 호충인을 기진케 하겠다는 의도였다. 생각은 훌륭하다고 하겠지만.
‘미련한 짓, 덕분에 아충에게는 기회였겠군.’
그때의 호충인은 이른바 상처 입은 맹호였다.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런 이에게 차륜의 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호충인이 몸을 던졌다. 원진을 이루었으되 뒤를 받치지 못하였으니,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내원 무사들은 각오한 호충인의 돌격을 막지 못했다. 애초에 이들로 호충인을 어찌하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기원원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앞에서 멈칫한 흔적이 보였다.
싸움의 흔적을 정리하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사소한 흔적은 덮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소명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원원이 문혜선을 돌보라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의 머뭇거림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성난 문기정의 공격이 거칠어졌다. 그가 뻗어 낸 장력이 좌우로 흩어져서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흔적을 지운답시고 흙으로 메웠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소명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흙으로 메운 자리를 더듬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후영각은 여기저기 밝힌 불길로 그림자가 어지러웠다.
왕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상대의 준비는 상당했다. 공들여 일을 꾸몄다. 결코 하루, 이틀 만에 뚝딱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탈출한 직후에 바로 팔법당이 움직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모두 준비가 된 것이다.
소명은 결국 호충인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호충인, 이 미련한 놈. 이렇게 명명백백했는데 이것 하나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냐.”
악문 잇새로 원망 섞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아래에서 울화가 일었다.
풍진의 강호라, 소명은 장우상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겼던 당부를 새삼 떠올렸다.
강호무정이라.
적아의 구분조차 모호한 곳이 강호라 하지 않은가.
“한심한 놈.”
소명은 씁쓸한 심정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흙모래가 부스스 흘러내렸다. 그는 곧 손을 털고 몸을 일으켰다. 날은 깊이 저물었다. 티 없는 검은 하늘에 별빛이 총총하다.
소명은 눈을 얇게 떴다.
다만, 한 가지 저들이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다. 호충인이 감쪽같이 숨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안도할 일은 아니었다. 남은 흔적과 들은 이야기, 그리고 유추한 상황을 보건데, 호충인에게 남은 시일은 그리 길지 않을 듯했다.
‘길어야 이틀, 사흘? 그 정도일까?’
행여나 그 안에 호충인을 찾지 못하면……. 소명은 잠시 눈을 감았다. 더 생각하지 않았다.
“후!”
소명은 맺힌 심화를 불어서 꺼뜨리려는 것처럼 숨을 강하게 토해 냈다. 그리고 다시 뜬 눈동자는 끝을 헤아릴 길 없이 깊고, 고요했다.
다음 날, 날 밝기가 무섭게 소명은 다른 곳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등용문의 모든 계통을 남김없이 뒤집어 놓았다.
내원과 이각(二閣), 삼당(三堂), 오사(五舍)로 구분하는 등용문을, 소명은 한 곳이라도 빼먹으면 서운해 할까 배려라도 하는지 부지런히 찾아갔다.
그 앞을 막아서는 자는 없었다.
등용소패를 들었다는 소식이 반나절 만에 쫙 퍼졌음은 물론, 밤 깊을 때까지 내원 무사들을 들들 볶아댄 일도 널리 알려져서, 뭇 무사들은 무슨 꼬투리라도 잡힐까 싶어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내원과 삼당 중 이당, 감위당과 팔법당은 전날에 엎어 놓았고, 이제는 목화토금수의 오사를 죄 들쑤시고는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나와서 나른한 얼굴로 하는 말인즉.
“흠, 그다지 실속이 없네.”
무리도 아니었다.
오사라는 곳은 엄밀히 따지면 등용문의 직속이 아니었다. 천하에 널리 산재한 각 소림 속가들이 파견 온 곳이었다. 이들 역시 공과(功課)에 급급하여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지만 아무래도 뚜렷한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소명이 하는 일은 그야말로 막무가내인지라 어찌 기대를 갖고 있던 자들도 그가 하는 양이나, 들리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절래 내저었다.
소명은 오사 중 마지막인 북수사(北水舍) 앞에 섰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는지, 다섯을 빠짐없이 둘러엎고도 아직 햇살이 머리 위에 못 미쳐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각과 마지막 일당이다. 그러나 이각의 경우에는 들이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본래 호충인이 속해 있던 무룡각은 자체적으로 근신 중이라 문을 닫아건 지가 한참이고, 다른 이각인 정룡각(精龍閣)은 외부 활동이랍시고 죄 자리를 비우고 있단다.
“그럼, 싫든 좋든, 마지막 당으로 가 봐야겠지.”
소명은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이 사뭇 음흉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꿍꿍이가 있는 속내였다. 그는 곧 헛기침을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소명은 창룡장의 넓은 길을 아주 태연하게 걸었다. 얼핏 허세를 부리는 모양새인데, 지나가는 등용문의 뭇 무사들은 그 모습에 오만상을 쓰며 고개 돌리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문득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말없이 소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위지백이었다.
“어떻게 됐냐?”
“됐어.”
“고생했네. 고맙다.”
“뭐, 고생이야 나보다는.”
위지백은 말끝을 흐리며 흘깃 고개를 돌렸다. 소명은 따라서 눈길을 돌렸다가 실소했다.
사색이 된 얼굴로 헐떡거리는 도기영의 모습이 있었다. 뭘 하다가 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로 가득했다. 품에는 무광도를 꼭 끌어안은 채였다.
소명은 어째 안쓰럽다는 눈으로 도기영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힘겨워하는 것이 꼭 부탁한 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명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어때 보여?”
“뭐, 무광을 들고 있는 걸 보면, 꽤 싹수가 있는 거지.”
“흠, 아주 악연은 아니겠네.”
소명은 묘한 말을 하고는 앞서 걸었다. 나란히 걷던 위지백이 문득 물었다.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냐?”
“저기.”
소명은 길게 말하는 대신에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창룡장의 고색창연한 처마 사이로 봉긋하게 솟은 가산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