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분명히 그녀는 흑선당에 속한 사람으로, 이렇게 강시당에서 중지와 외인이란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고 소명의 눈을 피했다. 그녀에게는 밝히기 어려운 나름의 깊은 사연이 있으니. 소명은 어려워하는 매향과 여인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둘의 사연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다만 말해둘 뿐이었다.
“백 소당주가 곧 당주의 자리를 맡게 될 것이오.”
“소, 소당주께서요? 노선께서는 그것을 어찌?”
“백 소당주와 흑선당주의 언질 덕분에 강시당을 찾을 수 있었소.”
“그렇군요.”
매향은 그제야 상황을 짐작하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슨 의미인지, 짧은 한숨을 흘렸다.
“이 사람도 그렇지만, 두 분 또한 사정이 있으시겠지.”
“예.”
매향은 그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답이 없었다. 그리고 소명은 곧 고개를 돌렸다. 바위 높은 곳은 마르고 황량하여 달리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 곳이 소명의 눈을 끌었다.
“동백암이란 저곳인가?”
비스듬히 솟아 있는 바위에 시커먼 동혈이 하나 보였다. 소명이 그곳을 정확하게 바라보자, 두 여인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곳에서는 북풍한설의 차디찬 바람에 비견할 만큼 서늘한 바람이 내내 불어오고 있었다. 넋을 얼린다는 동백이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매향과 여인이 아무리 높은 곳이래도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옷을 갖춰 입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음, 폐관 때문이라 하였던가.”
“그것도 있습니다만, 저곳은 외인이 발을 들여서는 아니 되는 곳이니…….”
소명은 다그쳐 묻기보다는 그저 물끄러미 매향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압박해오는 눈빛이 묵직하여서, 결국 매향은 하려던 말을 다 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소명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들이 어떤 사정인지 알 바 아니나, 내 앞을 막지는 마시오.”
“그러나.”
“친구를, 옛적의 친구를 만나고자 할 뿐이오.”
매향은 흠칫하여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곧 옆에 서 있는 백의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매향을 대신해서 넌지시 물었다.
“저어, 친구분이라 하시면,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연수, 탁연수라 하오.”
소명은 주저할 것 없이 이름 석 자를 밝혔다. 그러자 매향은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백의 여인 또한 흠칫하여 한숨을 삼켰다. 두 여인의 안색에서 난처한 심정이 드러났다. 소명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표정이 지워졌다. 차분함을 잊지는 않았으나 마냥 태연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것이.”
“무슨 일이오.”
매향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소명은 거듭 물었다. 세 번 묻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매향은 숨을 삼켜내고 옆으로 비켜섰다. 차마 말로 할 수는 없으니, 직접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소명은 동혈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차마 뒤를 따르지 못하고 입구 쪽에서 서성거릴 뿐이었다. 백의 여인은 소명의 정체가 의아하여서 매향에게 계속 눈짓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소명이 들어간 추운 동혈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평소의 매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매사에 정확하여 추호의 주저함이나 머뭇거림이 없었지만, 소명에 관하여서는 도리가 없었다. 워낙에 그녀의 머리를 뛰어넘는 사람인지라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그녀 또한 정주 백마보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백마보를 강시당과 어딜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만, 소명이라면 전혀 거리낌 없이 손을 쓸 듯하니.
매향이 가슴을 졸이며 시름겨울 때, 소명은 동혈의 외길을 따라서 깊이 내려갔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매섭게 올라왔다. 바람 우는 소리는 음산하여서 유부의 흐느낌이 이와 같을까. 절로 스며드는 한독이 발목을 붙잡을 듯하나, 소명은 터벅터벅 걸었다. 아래로, 또 아래로. 좌우로는 작은 굴이 있어서 그곳에서 불빛이 흐리게 새었다. 내려갈수록 올라오는 한기는 더욱 지독해졌다. 그러나 소명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이미 지음한천의 한독을 극복하였고, 오로지 얼음만이 가득한 세상의 끝에도 이르렀던 소명이었다. 그리고 이내 동백암의 끝, 바닥에 닿았다.
좌우로 빛이 밝았다. 그곳에는 흡사 우물처럼 보이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하얀 안개와 함께 냉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찬바람이 거세었으나 갓을 씌워놓은 등잔은 어렵게 불빛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우물 옆에 팔각의 석대가 있었고, 그 위에 깡마른 노인이 팔괘를 새긴 좌우흑백의 도포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노인은 흡사 좌화(坐化)한 것처럼 고요했다. 마른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러나 노인은 숨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소명은 눈 감은 노인에게서 흐린 생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인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상화촌 장의사인 탁 노인이었다. 십수 년 세월에도 노인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세월의 서리가 짙었고, 매섭게 솟았던 눈매가 축 처져 있었다.
“노야.”
나직이 부르자, 탁 노인은 앞으로 굽은 등을 천천히 피면서 고개를 들었다. 굳게 닫힌 두 눈이 서서히 열렸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서 흐린 빛이 흘렀다. 그리고 굳은 얼굴이 서서히 풀리면서 노인은 입매를 비틀었다. 노인 또한 소명을 알아본 것이다.
“살아 있었구나. 그래, 명줄이 그렇게 짧은 녀석이 아니었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대일은 편히 갔느냐?”
“예.”
소명은 흐린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지혜는 과연 깊어서, 무사히 자란 소명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사연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탁 노인은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두 부자(父子)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고 오랜 세월이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인데, 이제 그때의 어린아이가 헌앙한 장부로 자라서 이리 노인 앞에 섰으니 십수 년의 세월이 새삼스럽다.
소명은 흐린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깊은 세월이 고인 심유한 눈으로 소명의 위아래를 보았다.
먼 길을 와서 군데군데 흙먼지로 지저분한 꼴이라지만, 소명의 안색은 평온했다. 용담호혈 정도가 아니라 처처가 사지나 다름없는 강시당의 금지에 들어선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쩡한 모습이었다. 노인은 찬찬히 소명의 위아래를 보고는 짧은 탄성을 흘렸다.
“허어, 대단하구나.”
노인은 소명에게서 어찌 헤아릴 수 없는 경지를 엿볼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력은커녕 일신의 무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노쇠함을 느낄 새, 아이는 청년이 되어서 눈앞으로 돌아왔으니. 탁 노인은 그때가 언제였을까 세월을 헤아렸으나, 곧 옛적의 상념을 거두었다.
“어찌 알고 왔느냐.”
“아민을 기억하시는지요?”
“음, 대장간 당씨의 여식 말이지. 그 녀석도 같이 어울려 다니고는 하였지, 그래.”
탁 노인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은 흐린 미소를 보이며 여기까지 이른 경위를 말했다. 그는 당민의 내력을 잠시 밝히고, 그녀가 사천에서 연수와 닮은 이를 보았다는 말을 전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산서에 들어서 흑선당을 거쳐, 이곳 강시당까지 닿았으니. 탁 노인은 그 일련의 과정을 듣다가 허허,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인연이란 과연 난측(難測)이니, 대장간의 당씨가 사천당가라는 것도 당민이 연수와 닮은 이를 사천에서 마주한 것도, 모두 기이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소명이 흑선당과 연이 있을 줄이야. 탁 노인은 곧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사천이라면 삼주의 회합이 있었던 때로구나. 군수, 그 아이를 보았던 게야.”
군수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그리고 신비일세라 하는 강시당에서 무슨 이유로 사천삼주의 회합에 모습을 보였는지 또한 의아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명은 물을 수가 없었다. 노인의 앙상한 어깨가 한층 무겁게 내려앉았다. 앞으로 기운 목 언저리에 시름의 추가 무게를 더한 듯했다. 무엇이든 좋은 일이 아니었다. 소명은 애써 표정을 다잡고, 밝은 기색으로 물었다.
“노야, 연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녀석은.”
탁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노인이 올라앉은 팔각 석대 뒤로 그림자가 짙었다. 주변의 불빛이 미처 닿지 못한 곳에 큼직한 석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명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연수였다. 바로 탁연수의 모습이었다. 그는 석관 속에 누워서 눈 감은 채 말이 없었다. 소명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핏기 하나 없는 낯에, 파란 입술은 말라 있다. 어릴 적 앳된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소명에게 성을 낼 듯한데, 단단한 검은 석관 속에 몸을 누인 채 아무런 말도 없다. 소명은 주춤 흔들리다가, 그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명은 온 힘을 다해서 분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탁 노인은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본 당에서는 이것을 사문에 들었다고 한다. 스스로 가두는 폐관인 셈이지.”
“사문이라면, 요선이란 작자가 이겨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아래에서 석에게 들은 모양이구나.”
반생반사의 경계 속에서 자신을 이겨내지 않으면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 바로 강시당에서 말하는 사문의 단계였다. 탁 노인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소명의 눈은 다른 무엇을 짐작하고 있었다.
“연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탁연수가 스스로 폐관에 들 위인이 아니지 않은가. 좋게 말하면 낙천적이고, 달리 말하면 뺀질거리는 연수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한들, 사문에 직접 들어서는 짓거리를 할 리가 없었다.
“허허허.”
탁 노인은 소명의 의중을 잠시 헤아리고, 이내 너털웃음을 흘렸다. 차디찬 동혈 위로 노인의 힘없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소명이 짐작하는 것처럼 탁연수는 제 발로 사문에 든 것이 아니었다.
“독이 문제였다.”
“독?”
“사문에 이르기 위해서 약간의 독을 쓰는데, 누군가 이것을 연수에게 썼단다.”
“그렇다면, 해독을?”
“허허, 해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문을 떨쳐내는 수밖에는 없지.”
탁 노인은 애써 담담함을 지키며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차마 석관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그저 눈을 감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이겨낼 수 있을까요.”
“아무렴, 아무렴, 누구 손자인데, 아무렴.”
노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은 관 앞에 무릎을 꿇고 내부를 바라보았다. 관 속에 누운 탁연수의 얼굴은 시체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지만, 흐린 숨결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혼자 속 편히 누워 잠든 듯하니.
“혼자 누워 있으니, 좋냐? 좋아?”
소명은 억지웃음을 그리며 한 마디 농을 던졌다. 당연히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이내 침착한 눈으로 탁연수의 창백한 낯빛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소명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관 속으로 고개를 내밀어 탁연수의 목 뒤를 살폈다. 도문의 관례를 좇아서 머리를 올려 목잠(木簪)을 꽂았는데, 언뜻 남은 잔 머리카락에서 약간의 번뜩임이 있었다. 눈의 착각이 아닐까 싶었지만 소명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축 늘어진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러자 소명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낯선 물건이 아니었다.
탁 노인은 탁연수가 어떻게 독에 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였는데, 소명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잔 머리카락이 축 늘어진 것과 같은 가는 실낱을 손에 들고 더운 숨을 토했다. 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아주 모르는 기물이 아니었다. 소명은 복심 깊은 곳에서 잠시 달랜 노기가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것들이 정말 해보자는 것이지?’
소명은 노기와 살기가 뒤엉키는 것을 잇새로 씹어 삼키고, 곧 고개를 돌렸다. 탁 노인도 고개를 들어서 머리 위를 헤아렸다.
“바깥이 소란스럽군요.”
깊은 동혈 속에서 어찌 바깥의 소란이 들릴까마는, 소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매향과 백의 여인, 둘이 급하게 들어섰다.
“노야! 밖에서 요선의 무리가!”
“갑작스러운 일이군. 더 지켜보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외인의 침입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탁 노인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저 흐린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매향의 뒤에서 백의 여인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리고 흘깃 소명을 곁눈질했다. 의미하는 바가 깊었으나, 소명은 석관에 누운 탁연수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향은 여인에게 잠시 눈치를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산정의 뒤편에서 급히 몰려오고 있습니다. 귀무(鬼霧)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기껏해야 길목 하나 간신히 막을 정도이니.”
탁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백암에서 일어나는 한기를 이용하여 구축한 귀무진이라는 것은 산정의 바위를 간신히 뒤덮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번에 몰아붙인다면 어떻게 도리가 없었다.
“노야.”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몸을 피하든, 다른 수를 찾아봐야 마땅하나 실상 매향도 알고 있었다. 다른 방편이란 없었다. 동백암은 배수진이었다. 그리고 탁 노인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석대 위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매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소명이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예?”
“그들이 오는 곳이 어디냐 물었네.”
“동백암을 에워싼 채 올라오고 있습니다. 어디라고 할 것이 없지요.”
“알겠네.”
매향은 소명의 굳은 낯에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순순히 답했다. 그러자 소명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걸음을 돌렸다. 그때, 탁 노인이 물었다.
“괜찮겠느냐?”
“예, 맡겨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연수에게는 동문이고, 이 늙은이에게는 어리석은 후배들이다.”
“예, 유념하겠습니다. 노야.”
탁 노인은 차마 소명을 돌아보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자 소명은 담담하게 답했다. 겉보기로는 어떤 심정인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탁 노인은 마른 눈썹을 잠시 모았다가 이내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미안하구나.”
“별말씀을요.”
탁 노인은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한 일이다. 노인은 소명을 돕지는 못할망정, 행동에 제약을 걸어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삿된 다툼이라 하여도 아낌없이 손을 쓸 수야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명은 다만 맡겨 달라 할 뿐, 주저 없이 동혈을 나섰다. 천천히 내려온 동백암의 비탈진 동굴을 소명은 한걸음에 빠져나갔다. 이제 동혈에 남은 인물들 중 영문을 모르는 것은 백의 여인뿐이었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다가 퍼뜩 소리를 높였다.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에요.”
“아니, 그렇지만.”
바깥에 즐비한 자들이 어디 보통 이들이란 말인가. 자신과 매향 또한 죽을 각오를 하고서 겨우 숨어든 판이었다. 저 이가 어떻게 들어섰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인이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백의 여인은 불끈하여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 했지만, 매향이 그녀를 붙잡았다. 매향은 조용했다. 마치 사내가 혼자서 강시당의 정예를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하늘 아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아무리 절세의 고수라 하여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련만, 대체 무엇을 믿고 저 사내라면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백의 여인, 채유영은 눈매를 바르르 떨었다. 꼭 깨문 입술이 뭔가를 말하고자 했지만, 강호의 일에 있어서 매향의 식견을 따라갈 수는 없으니 그녀는 입매를 찌푸리고 여우 털로 된 옷자락을 두 손으로 꼭 여몄다. 북쪽에서 온 그녀에게도 동백암은 정말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