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소명은 동백암 밖으로 나섰다. 이제 일어난 붉은 노을이 머리 위의 파란 하늘을 활활 태울 듯했다. 드높은 바위 아래를 노을이 저 멀리까지 비추었고, 완만한 산 능선에 내리는 붉은빛은 핏빛을 닮아 선홍의 반사광이 어지럽게 번뜩였다. 수많은 인영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소명은 고요한 눈으로 이를 지켜보다가 곧 짧은 숨을 끊어냈다. 여하간에 상황은 뻔했다. 적아(敵我)의 구분은 분명했고, 서로의 목적 또한 더없이 분명했다. 다시 뜬 소명의 두 눈에서 고요한 열기가 서서히 일었다.
“손을 쓰기로 하였으면 주저할 이유야 없지.”
그는 자신에게 말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수백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대군이 몰려온다 하여도 소명의 걸음에 주저함은 없었다. 무릇 고수(高手)라 하는 자의 걸음이란 그러한 것이다. 소리 없이 내딛는 걸음이나 가히 파천(破天)의 기세가 일었다. 소명은 본래 기세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렇듯 많은 자를 상대로 한다면 굳이 감추고 아낄 것이 없었다. 그는 깎아지른 절벽을 차분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열다섯 장 높이의 절벽을 내려오는데 다른 길은 필요하지 않았다. 좌우 손을 늘어뜨린 채, 이제는 색이 바래다 못해 곳곳이 닳은 장삼의 옷자락을 한껏 펄럭이는 소명의 보보에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흐읍!”
형형한 안광을 드러낸 채 기세 좋게 올라오던 선두의 전열이 순간 멈칫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갑작스레 솟아서 앞길을 막아서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나, 누구 하나가 아니라 선두 열의 전부가 그러했다. 심지어 숨 쉬는 생자가 아닌, 무수한 강시마저 그러했다. 그것들은 술사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우뚝 멈춰 섰다.
“무어냐? 무슨 일이야?”
“선두는 왜 멈추는 거야?”
사정을 모르는 뒤쪽에서 소리가 터졌지만 고개 돌려 답할 정신은 없었다. 하얗게 솟은 바위 산봉, 그곳에서 한 인영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허공을 밟으며. 단순히 절정이니 무엇이니 하는 경지로는 헤아릴 수 없었다. 무경 이상을 이룩한 고수가 분명했다.
웅성거림이 뚝 그치고,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데 소명은 바닥으로 내려왔다. 바위를 에워싼 수많은 눈길이 당혹감으로 젖어들었다. 그들은 소명이 바닥에 내려설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수백의 조용한 눈길 앞에 소명은 오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곧 차분한 눈으로 수백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몰려온 이들에게는 서두른 기색이 역력했다. 한쪽에는 시체처럼 비쩍 마른 고수가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북악신묘에서 마주했던 목장시와 흡사한 자들로, 강시공이라 불리는 강시당의 진산절기를 연마한 자들이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상복 차림을 한 자들이 꼿꼿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혼백이 떠난 시체를 연마하여 술사의 명을 듣게 한 것, 바로 강시였다. 산을 오르며 마주한 썩어가는 시체들과 달리 진짜 강시라 할 것들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이하여 수가 수백을 헤아리니, 그들은 멀리까지 늘어서 있었다.
소명은 그들의 면면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계속 걸었다. 터벅터벅 다가오는 모습에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강시당 요인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자들은 여전히 어이가 없어, 소명의 모습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 수백을 마주하고도 태연히 다가오는 일인이라니. 그때, 잿빛의 득라를 걸친 초로인이 서둘러 나섰다. 그는 요선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방비가 단단하다 자부하였던 도사였다. 그 또한 시체처럼 납빛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굳은 얼굴은 익힌 공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멈춰라!”
회도사(灰道士)는 한껏 공력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것은 소명에게 경고함이기도 했으나, 넋을 놓은 동료를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좌우에서 흠칫 어깨를 들썩이는데, 정작 소명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 이런! 멈추라 하지 않는가!”
아무리 기운을 드러내고 악을 써도, 소명은 귓등으로 흘릴 뿐이었다. 걸음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십여 장의 절벽 위에서 허공을 밟고 내려와 그대로 다가오는 모습은 공히 일대 고수의 면모였다.
회도사는 주저하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잿빛의 득라를 걸친 이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다른 강시당 제자들은 여전히 망연한 얼굴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자리에 모인 자 중에서 무학에 일천한 자는 없었다. 오히려 강시당의 정예라 할 자들이니, 눈앞의 외인이 보인 보신경과 더불어 드러내는 기세의 막대함을 감지하지 못할 자는 없었다.
두려움, 두려움이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흡사 독처럼 퍼져 나가 강시당 제자의 손발을 굳게 만들었다. 먼저 나선 회도사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죽은 자를 나서게 할 뿐이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천망, 고월은 나서라!”
그러자 관을 끄는 뭇 강시들이 쿵쿵 묵직한 소리를 울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울러 관 뚜껑이 밀려 나오며 색 바랜 천으로 염한 모습의 시신이 튀어나왔다. 천망은 강시 중에서 제일 날랜 움직임을 지녔고, 고월은 독(毒)을 품은 독 강시였다. 아껴둔 수단을 초장부터 내밀 수밖에 없다니. 회도사는 속이 쓰렸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외적을 맞이할 깜냥은 없었다. 초로의 도사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가라! 외적을 제압해!”
두 종의 강시들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가 없으나, 소명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계속 걸었다. 살점이 줄줄 흘러내리는 시체도 마주한 마당이었다. 강시들 모습이야 아무렴 어떨까. 이들은 그래도 사람 꼴은 하고 있었다.
소명은 눈을 얇게 뜨고, 다만 한 손을 펼쳐 보이더니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다섯 손가락을 차례로 접어서 마지막 엄지를 힘주어 다잡을 때에 소명의 주먹은 한차례 떨림이 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슨 대단한 무공을 보일 것도 없었다.
소명은 나아가며 움켜쥔 주먹을 냅다 내질렀다. 둔중한 울림과 함께 마른 뇌수가 치솟았다. 한주먹에 강시의 머리를 박살 낸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소명은 가던 걸음 그대로 걸어가며, 좌우로 주먹을 끊어치니, 강시들은 어김없이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고꾸라졌다. 하나같이 머리가 없었다.
“끄억!”
“아악!”
고통에 찬 비명은 강시 무리의 뒤에서 터졌다. 강시당의 술사들이었다. 그들은 머리 잃고 쓰러지는 뭇 강시의 모습에 괴성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강시를 부린다는 것은 곧 영의 교감을 나눈다는 것이라, 강시가 당한 큰 충격이 고스란히 술사에게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퍽! 퍽!
둔탁한 소리에 머리가 터지고 우지끈 소리에 팔다리가 바스러졌다.
천망과 고월 중, 앞으로 나선 열 구의 강시는 지닌 힘을 채 드러내기도 전에 진정으로 죽은 시신이 되어서 널브러졌다. 소명은 전혀 감흥이 없는 모습으로 쓰러진 시신들을 지나쳤다.
강시의 육신은 일컫기로 동두철갑이라, 금강신(金剛身)에 가깝다고 한다. 그러나 소명의 곤음수는 이미 경지를 넘어섰고 본래의 공력에 아낌이 없으니, 진짜 금강신이라도 우스울 뿐이다.
소명은 그리고 선두 열에 우두커니 선 잿빛 득라의 도사 대여섯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이제 멈췄으니 어디 말해보라는 투였다. 그 당당함은 일순 도인과 수백의 기세를 흔들어서 누구도 바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으, 으음.”
기껏 나오는 것이라고는 한줄기의 신음이 전부였다. 불과 서너 걸음을 앞에 두고 우뚝 서 있는 소명의 모습은, 드높은 철탑이 우뚝 버티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심중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강시당의 비전으로 연마한 강시가 허망하게 부서졌다. 물론 강시에도 단계가 있었고, 전부가 아니라 일부가 당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용이 문제였다. 고작 한주먹이었다. 소명이 드러낸 매서운 손속은 강시당 제자들의 기를 한층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회도사는 간신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에게는 새파랗게 어린 소명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비롯한 수백의 강시당 정예 앞에서 당당할 뿐만 아니라, 되레 위세를 부리고 있으니.
회도사는 이내 가자미 눈을 뜨고는 좌우의 동료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도 서로 눈치를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눈짓을 나누고, 회도사는 부러 이를 갈아붙였다. ‘빠득!’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크, 크흠! 이곳은 강시당의 금지. 강시당의 제자는 물론이거니와, 외인이 들어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 외적은 당장 정체를 밝히라!”
소명은 억지 위세 앞에서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우습게도 수백 중에서 산 자는 모두가 고개를 돌리며 소명의 눈을 피했다. 그 면면을 보고, 소명은 다시 회도사에게 눈을 돌렸다. 회도사의 엉성한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고요한 눈매와 일그러진 눈매가 마주쳤다. 그리고 소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림사 속가 제자, 소명.”
“소, 소림.”
소림사라는 이름은 과연 무겁다. 삽시간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일곱의 회도사도 마찬가지였다. 강시당의 칠요라 하는 일곱은 곧 놀란 심사를 다잡고, 한층 묵직한 어조로 꾸짖듯이 입을 열었다.
“감히, 소림파가 지금 본 당을 욕보이려는 것인가!”
“그리고 당신들의 소당주, 탁연수의 친우로 이곳에 있다. 친우의 복수를 하고자 하니, 그대들은 물러나시오.”
“닥쳐라!”
“무슨 개소리냐!”
소명의 말에 회도사를 비롯한 일에 연관된 자들이 놀라 다급히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새삼 전의를 일으키려던 자들이 이내 어안이 벙벙하여서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그러자 요직에 있는 자들이 거듭 소리를 높이며 수하들을 단속했다.
“이놈들! 정신 차려라! 외적이 코앞에 있다!”
마구 다그치는 참인데, 소명은 고개를 비틀었다. 그는 떠드는 자들의 면면을 유심히 보았다.
“너희 것들을 치우면, 그 작자가 나타나려나?”
“뭣이?”
“요선 말이야. 그 잘난 요선.”
“이노옴!”
회도사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때, 소명이 퍼뜩 손을 펼쳤다. 서슬에 회도사는 화들짝 놀라 후다닥 물러났다. 저 손에 금강석같이 단단한 강시의 머리가 박살 나지 않았던가.
절로 움츠러들어 물러나는 순간, 좌우의 다른 회도사들이 앙상한 손아귀에 살기를 머금고 달려들었다.
다들 강시공의 공력이 절정에 이른 노고수들이다. 손짓 한 번에 능히 철판을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소명은 귀찮다는 듯이 대충 손을 휘저었다.
막 휘두르는 것 같아도, 그의 손짓에는 금나연환수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강호도상에 흔한 금나수법을 연환하여서 절기라 할 것은 아니었으나 소명의 손에서 펼쳐지는 금나연환수는 경지가 달랐다. 절정의 강시공으로 강철 같은 손발이 닿기가 무섭게 무참히 꺾이더니, 그만 자리에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흐어억!”
노인의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혔고, 고통에 찬 비명이 뒤늦게 터졌다. 소명은 그들을 헤집고 더욱 다가가 회도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개진! 개진하라! 어서! 켁!”
회도사가 사색이 되어서 소리를 드높이는데, 소명의 손이 그의 멱통을 덥석 움켜쥐었다. 일순 사지에서 힘이 쭉 빠지며 숨통이 꽉 틀어막혔다.
회도사는 소명의 손아귀에 붙들려서 무엇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켁켁’거리며 숨 막히는 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소명은 회도사를 일수에 제압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개진 운운하며 다급한 외침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강시당의 뭇 제자, 강시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하나의 진열을 갖추었다. 소명을 가운데에 두고 여럿의 원진이 사슬처럼 이어진 하나의 큰 원진을 이루었는데, 소명은 조용히 그들의 진세가 제대로 드러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뒤에 엎어져 있던 다른 노도사들은 각자 어긋나거나, 부러진 팔다리를 부여잡고는 땅을 기다시피 하여서 몸을 피했다. 회도사는 소명의 손에 붙들려 있어서 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숨통이 콱콱 막히는 중이었으나 그래도 실실 웃으며 말했다.
“케켁, 케헤헤! 어떠냐, 이것이 강시당의 팔문, 팔문사쇄진이다. 케헤, 케헤헤. 네놈이 아무리 대단한 재간이 있더라도 도망할 곳은 없어!”
회도사는 납빛의 얼굴이 잔뜩 달아올라서는 버럭버럭 악을 썼다. 그러자 소명은 차분한 눈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물었다.
“강시공의 고수는 목이 잘리기 전에는 죽지도 않는다지?”
“뭣?”
분명 강시공이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하면 어지간한 일에 숨이 끊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왜 지금에 그런 말을 할까. 뜬금없는 말이다. 회도사가 잠시 멍청한 얼굴로 소명을 바라보는데, 그는 잡은 손에 잠깐 힘을 주었다. 우드득, 뼛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커흑!”
회도사는 숨이 턱하고 막히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무엇 하나 할 수는 없었다. 손짓 한 번에 목뼈가 어긋한 것이다. 그래도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회도사는 입을 벌린 채, 숨을 찾아 간절하게 헐떡거렸다. 소명은 그를 지나치며 나직이 속삭였다.
“볼 수는 없겠지만, 들을 수야 있겠지. 잘 듣고 계시오.”
소명은 그리고 강시당의 전력이 이룬 진세를 향해서 걸어갔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명이라는 상대에게는 그것조차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회도사는 새된 숨소리를 흘리며 귀를 바짝 세웠다.
‘뭘, 뭘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