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광음여류(光陰如流)
소명은 서두르지 않고 물러서며 요선의 낯빛을 살폈다. 짙게 화장한 얼굴인데 눈 아래가 언뜻 납빛으로 물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요선 또한 강시공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뻣뻣한 움직임이라고는 하나 없으니, 강시공의 한계를 돌파한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요선은 두 손끝을 유려하게 펼치며 마치 춤사위를 펼치듯이 휘저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자수 침과 자수의 색실이 어지럽게 춤을 췄다. 사방이 오로지 색실로 그득하여서, 삼백여 강시와 강시당 제자가 펼치는 팔문사쇄진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소명을 몰아붙였다. 자수 침이 땅을 파고들었다가 다시 솟구치는 소리가 요란도 했다.
“언제까지 물러설 참이오, 권야!”
천약요선은 불현듯 크게 외치며 두 손을 급하게 치켜들었다. 긴 소맷자락이 펄럭일 새, 소명의 발아래가 크게 들썩거렸다. 이내 ‘드드드’ 기괴한 소리가 울리더니, 방원 다섯 장의 땅이 마치 뿌리가 뽑히듯이 뽑혀 나왔다. 소명은 날래게 물러났다. 그러자 주변의 흙이며 바위가 수백, 수천 가닥의 색실에 휘감긴 채 높이 솟구쳤다. 족히 두세 장 깊이의 큰 구덩이가 생겼다. 천약요선은 높이 웃더니, 흙과 바위 무더기를 그대로 소명에게 던졌다.
“쯧!”
소명은 짧게 혀를 찼다. 과한 힘을 아낌없이 펼치는 것은 경지를 자랑하기 위함인지. 그는 이내 한 손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불끈하니 금강권의 공력을 일점에 집중했다. 땅을 세차게 구르며 허리가 돌아갔고, 허리춤에 머물러 있던 주먹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뻗어 나아갔다. 주먹의 끝에서 일만 근의 공력이 폭발했다. 벼락 소리가 이럴까. 흙무더기는 굉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서 흡사 흙모래가 섞인 우박이 떨어지는 것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천약요선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린 바였다.
“여전하시군. 아니, 이전보다 더욱 위력적이고 빠르시구려.”
소명은 가볍게 손목을 흔들며 깊이 파인 구덩이 너머에서 웃고 있는 천약요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수가 남으셨소.”
“아무렴요, 아무렴요. 아직 한참은 남았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약요선은 다시금 두 손을 좌우로 떨쳤다. 대체 몇이나 되는 바늘과 실을 품고 있는 것인지 또다시 한 뭉치의 실이 좌우로 날았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이자, 그 손짓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열 구의 강시였다. 멀리 떨어졌던 것들이 펄쩍 뛰어올라 소명을 덮쳐왔다. 유심히 살피니, 각 부의 요혈에 요선의 자침과 색색의 자수 실이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이런.”
성마의 괴뢰술사가 쓰는 법을 고스란히 따온 셈이다. 열 구의 강시는 본래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움직임을 보이며 소명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진세를 구축하였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소명은 힘을 주어서 한주먹에 강시의 머리를 거듭 박살 냈다.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리며 마른 뇌수와 골편이 끔찍하게 튀어 올랐지만, 강시들은 쓰러지지 않았을뿐더러 움직임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머리 없는 시신이 두 손을 펼치고 달려드는 모습은 기괴할 뿐이었다. 소명은 코웃음과 함께 손을 써 강시들을 냅다 집어 던졌다. 회도사들을 주저앉힌 금나연환수였다. 팔다리를 꺾고 부러뜨려도 계속 움직이는 강시였다. 그저 달려드는 기세대로 툭툭 밀치고 던질 뿐이다. 그러나 하나를 던지면 둘이 되고, 셋이 되어서 재차 달려들었다.
“호호호호!”
요선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높았다. 그는 끝도 없이 손을 써서 술사를 잃고 널브러진 강시들을 있는 대로 부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사방천지가 강시들투성이였다. 소명은 강시를 대하여 금나연환으로 던지기를 거듭했지만, 이래서야 끝이 나지 않을 듯했다. 강시들은 거듭거듭 튀어나왔다. 술사들이라면 이미 기력을 모두 소진하여서 비쩍 마른 해골 꼴로 죽어 나갔을 터이나, 요선의 재주는 끝도 없었다. 자수실이 있는 한 끝도 없이 강시를 부리니, 그 수가 급기야 온백을 헤아릴 지경이었다.
사문사경을 돌파하여 생사지공을 득했다는 것은 과연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소명은 눈살을 크게 일그러뜨린 채, 무작정 몰려드는 강시들을 한껏 뿌리쳤다. 강시들끼리 뒤엉켜 쓰러지면 또 다른 강시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내처 일기로 부숴버리지만, 머리가 박살 나고 손발이 떨어진다고 하여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무참한 광경이었다. 아무리 숨이 없는 강시라 하여도 수십 구가 육편(肉片)이 되어 흩어지니, 강시당 제자들도 이때에는 잔뜩 질려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강시들이 끝도 없이 덮쳐드는데, 소명은 어느 순간 던지기를 관두고 다만 금강권 법륜무애로 일체의 공세를 마주했다. 강시 위에 강시가 달려들고, 휘젓는 손발은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 덩어리로 뭉쳐가는 찰나, 소명은 퍼뜩 어깨를 크게 뒤흔들었다. 그러자 쌓여가는 강시가 와르르 무너지고 사이로 길이 훤히 열렸다.
강시들이 저들끼리 뒤엉키는데, 소명은 그들 사이를 한 번 박차는 것으로 몸을 뺐다. 그는 깊은 구덩이를 단숨에 뛰어넘어서 천약요선의 면전으로 쇄도했다. 코앞에서 땅을 짓밟으며 좌우 주먹을 짧게 내질렀다. 허공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무엇보다 거셌다. 그러나 자리에 요선의 자취는 없었다. 그는 이미 소명의 뒤로 자리를 옮긴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손을 쓸 수는 없었다. 소명은 빈자리를 때리는 것과 동시에 신형을 비틀었다.
삽시간에 요선의 행적을 쫓아 노려보는 눈길이 삼엄하다. 요선은 주춤했지만, 이내 웃음을 내비쳤다. 그는 한 조각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사문사경 속에서 얻은 이능의 하나였다. 요선은 보란 듯이 턱 끝을 치켜들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아니, 그런 것이 아니군.”
보신경이 극에 달하면 찰나의 나를 돌아볼 수 있다 하는데, 지금의 요선은 그와는 궤를 달리했다. 요선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요선이 있는 자리가 움직인 것이다. 소명은 그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한순간 사라졌다가, 배후에 다시 나타났으니. 실로 비인의 경지였다. 소명은 언뜻 감탄의 기색이 일었으나 그뿐이었다.
결국, 사라지는 것은 위해가 되지 않는 법이고, 나타날 곳은 뻔했다. 소명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일 터이나 그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달리 없었다. 소명은 짧은 숨을 흘리고, 내처 주먹을 내질렀다.
“커억!”
허공에 훌쩍 나타난 요선은 그만 명치를 꿰뚫는 듯한 소명의 주먹에 왈칵 피를 토했다.
그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단단한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고작 한주먹에 강시공을 완성한 단단한 육신이 무너진 것이다.
그는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공력을 유지할 수가 없어, 그의 자수 실에 연결된 수많은 강시가 다시금 시체가 되어서 나동그라졌다.
천약요선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완벽한 허점이라 여겼건만, 이토록 허망하게 당한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치뜬 눈동자에 불신이 그득했다. 이능을 얻은 순간, 그는 언제 어느 때라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명의 주먹은 정확히 그가 나타날 곳, 그가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에 흠뻑 젖은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대, 대체 어찌?”
“그대가 경험이 없는 까닭이오.”
소명은 그리고 더 말하지 않았다. 경험이 없다. 비등한 고수, 혹은 그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고수와의 경험이 부족하니, 약간의 우세에 들떠서 뻔한 수를 쓰다가 자멸한 꼴이었다.
“커헉! 커헉!”
요선은 쥐어짜는 기침과 함께 핏덩이를 거듭 토했다. 억지로 공력을 돌리려다가, 그동안 이룬 강시공의 근간이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검게 죽어가는 등, 색색으로 물들었다. 금장으로 장식하고 화려한 꽃잎을 수놓은 화려한 성장이 온통 엉망이었다. 요선은 흐린 눈동자를 들어 소명을 올려다보았다. 무참한 패배, 그 자체였다. 요선이 드러낸 온갖 신위는 결코 소명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요선은 이내 공력을 포기하고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채를 곱게 쓸어올렸다. 엉망이 된 모습을 감당할 수 없었다. 천외요선, 그리고 강시당의 수장, 모든 이름이 권야의 주먹 아래에 헛되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나, 달리 생각하면 마땅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과거의 요선이 아니듯 눈앞의 권야 또한 과거의 그가 아니다. 지난 수년 세월을 생각하니, 요선은 사지에서 힘이 헛되이 스러지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권야에 의해서 사계의 문을 열었으나, 또한 그에 의해서 사계의 이능을 잃고 말았으니.
요선은 고개를 들었다. 소명이 한 걸음 다가와, 무릎 꿇은 그와 눈을 마주했다.
“결국 이런 꼴이라니. 권야는 과연 권야이시오. 호호호, 성마가 결국 나를 죽이는구나.”
요선은 소명이 찾아온 모든 이유가 성마에 있음이라 여겼다. 피를 토하며 웃어젖히는데, 소명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요선. 성마가 있음은 이곳에 와서 알았소.”
“그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요선은 웃음을 뚝 그치고, 새삼 일그러진 얼굴로 소명을 올려다보았다. 소명은 흐린 웃음을 보이며 먼지 그득한 남색 장삼의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이곳의 소당주라는 탁연수 말이오.”
“소당주가 왜?”
“그는 내 죽마고우 중 한 사람이라오. 그대와 성마는 내 친구를 건드렸소.”
느릿느릿하게 말할수록 소명의 눈빛은 차츰 가라앉고, 서서히 일어난 기세가 이미 내상을 입은 천약요선의 복심을 크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강시를 한주먹에 부숴버린 주먹이었다. 요선조차 한주먹을 감당하지 못해 강시공이 깨지고 말았다. 그는 질린 채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한참 끝에 겨우 한마디를 쥐어짰다.
“죽이시오. 차라리 죽여 주시오.”
요선은 일그러진 얼굴로 거듭 말했다. 경지를 잃은 것은 곧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명은 입매를 비틀었다. 그리고 그러쥔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는 무릎 꿇은 요선에게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말했다.
“그대에 대한 처분은 내 몫이 아니외다.”
“그건, 무슨 소리요.”
“탁 어르신께서 판단하실 터.”
“태상장로.”
천약요선은 소명이 말하는 탁 어르신이 누군지 알고는 망연하여 중얼거렸다. 소명은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소명이 허공을 밟고 내려온 언덕 높은 곳에 세 인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매향과 백의 여인, 그리고 탁 노인이었다. 그는 앙상한 모습이었으나 불빛을 등에 지고 있어서 기이한 풍모를 강시당 제자들 앞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태, 태상장로를 뵙습니다!”
“태상장로를 뵙습니다!”
탁 노인을 알아본 어느 제자가 버럭 소리치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무릎을 꿇었다.
깊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에 남은 자들은 어안이 벙벙하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 상황은 끝이 난 셈이나, 남은 미련이 있어서 그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었다.
요선은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은 분명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다만 축 어깨를 늘어뜨린 채, 소명을 다시 바라보았다.
“태상장로까지 알다니. 권야, 당신은 대체 누구란 말이오.”
소명은 묻는 말에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탁 노인이 등장한 이상 다른 말썽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러난 몸이라고 하지만, 전대의 당주이자 강시당의 전설이기도 한 탁 노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먼저 고개를 조아리는 판이었다. 무슨 소요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천약요선은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끝났군, 끝났어.”
삼일천하라 할 수는 없으나, 이제야 온전히 강시당을 수중에 넣었다 여긴 참에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이야.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강시들이 제 몸을 불살라 태우는 불길이 곳곳에서 일렁이며 그림자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소명은 물끄러미 천약요선의 다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되었소?”
“그대가 있는 줄 알았다면. 그랬더라면.”
천약요선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채 말을 맺지는 못하였으나, 속내를 헤아리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 * *
강시당은 옛적의 모습을 빠르게 되찾기 시작했다. 탁 노인이 태상장로의 이름으로 나서서 천약요선에 의해 문란해진 체계를 다시 정비했다. 그러면서 내쳤던 이들이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어찌 메울 수 있을까. 돌아온 이들도 옛적의 역량이 아쉬웠다. 결국, 그 공백을 메우고자 사람들이 움직이고 그만큼 강시당은 전에 없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비록 소명의 주먹 아래에 비장한 강시 여럿을 잃었지만 적어도 사람은 잃지 않았으니. 이제 남은 강시당의 어려움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후계자의 안위였다.
탁연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관에 누운 채였다. 다만, 금지라 하는 동백암이 아니라 강시당의 본당인 청음관(靑陰觀)이라는 도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관의 내당에 석관을 놓고, 그 주변에 몇이나 되는 신향(神香)을 세워서 한참이나 태웠다. 보랏빛의 향연이 흩어졌다. 신향은 흔들린 넋을 다잡고, 떠난 혼백을 다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 아울러 강시당 부주파의 여러 어른이 관 앞에 몇이고 자리를 잡아서, 끝없이 귀부주(歸附呪)를 읊어가며 탁연수의 정력을 마르지 않게 북돋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사문을 이겨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로지 본인에게 걸린 일이었다.
소명은 청음관의 마당에 있었다. 머리 위로는 노을빛이 짙었다. 그는 정원에 놓인 바위에 걸터앉아서, 망연한 얼굴로 내당의 모습을 한참 바라만 보았다. 내당은 문창을 모두 열어놓아서 실내를 가득 메운 보랏빛 향연이 서서히 솟구치고 있었다. 이때에 소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저 자리를 지킨 채 기다릴 뿐이었다. 하기야 이제 고작 하루의 낮과 밤이 지났을 뿐이다. 그 사이에 강시당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소명이 감히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후우.”
소명은 속내를 다잡을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무겁고 무거운 한숨을 거듭했다. 그런데 등 뒤로 기척도 없이 마른 그림자 둘이 불쑥 나타났다. 탁 노인과 석 노인이었다.
“어르신.”
“듣자 하니, 내내 이곳에 있었다고 하더구나. 그리 불안하더냐?”
“예, 노야.”
“허허, 그리 가슴 졸일 것 없다. 연수, 저 녀석이라면 능히 사문을 이겨낼 터인즉. 이제라도 네 녀석이 와서 도와준 것이 얼마나 천운이었는지 모를 것이다.”
탁 노인은 흐린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향연이 가득한 내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보기로는 평온한 듯하나, 뒷짐을 진 앙상한 손가락은 계속해서 꿈지럭거렸다. 하나 남은 손자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어찌 마음이 가벼울 수 있을까. 그때에 조용히 있던 석 노인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마냥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태상장로.”
“음, 그렇지. 그렇지.”
탁 노인은 곧 한숨을 삼키고, 다시 소명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