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광음여류(光陰如流)
병사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흘깃 장 천호의 눈치를 살폈다. 명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마상에 턱을 치켜들고 오연한 눈초리로 주이청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렴 대단한 황자 저하라 하여도 이제는 역적에 불과하다. 그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보는 병사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쳐라.”
“흐읍!”
기어코 명은 떨어졌다. 병사는 당장 큰 숨을 들이켜고 한껏 칼을 치켜들었다. 높이 치켜든 칼끝이 햇살에 번뜩였다. 이제 칼날이 떨어지고, 목이 떨어진다. 그때였다.
―멈춰라!
하늘의 노성이 이러할까. 땅이 들썩이고 산천초목이 부들부들 떨었다. 일천의 정병이라도 고개를 움츠린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전마(戰馬)들이 놀라서 울어 젖히고 급하게 고개를 흔들며 들썩거렸다.
“히이익!”
장 천호의 전마도 다르지 않았다. 놀란 전마가 투레질하며 사방으로 날뛰는데, 그는 기겁하여서 말 목을 끌어안았다. 멋들어진 전포며 갑주가 무색했다. 그래도 위태한 판국에 부장 한 사람이 서둘러 달려와 고삐를 부여잡고 말을 달랬다. 말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여서 큰 눈동자를 뒤룩거리며 굴렸다. 외침 소리는 그 와중에도 힘을 잃지 않아서 모옥이 있는 깊은 산곡을 타고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뭐냐! 대체 무엇이야?”
장 천호는 마상에서 겨우 몸을 가누고는 신경질을 부리며 외쳤다. 그렇지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병사들은 창칼을 내린 채 사방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놀라기는 팽가와 다른 무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흠칫 굳은 얼굴로 소리의 방향을 헤아리고자 했지만, 도통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팽가의 소가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당황보다는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마치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온 것인 양 마른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냥 이대로 끝나서야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는 새삼 자신의 칼자루를 부여잡았다. 질 좋은 물소 가죽으로 감싸고, 그의 손아귀에 딱 맞게 제작한 보도였다. 칼은 주인의 심정을 헤아린 것인지 잘게 몸을 떨었다.
웅웅 울리는 소리가 가라앉을 무렵, 병사들은 금군의 정병이건 산서의 토병이건 가리지 않고 동요했다. 그들은 산신이 어쩌고 하늘의 노함이 어쩌고 하며 수군거렸다. 그러자 각 부장들은 언성을 높이며 불안해하는 병사들을 신경질적으로 다그쳤다.
“정렬! 정렬하지 못할까!”
“이놈들! 허튼소리를 떠들지 마라!”
다그침이 어찌 먹혀서 병사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불안한 눈초리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놀란 말들도 간신히 달래어서 붙잡았지만, 말들은 무엇이 불안한 것인지 계속 앞발로 땅을 긁어댔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조용했다.
주이청은 기이한 일이라 고개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희망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죽을 자리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장 천호가 다시 채근하니, 물러났던 병사가 칼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당장 참하라! 당장!”
무슨 변고가 일어나기 전에 일을 처리할 작정이었다. 그에게는 주이청의 목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악을 쓰며 다그치는 서슬에 병사는 머뭇거릴 것도 없이 칼을 치켜들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그렇지만 어쩌랴, 불호령이 떨어진 것을. 차라리 고통 없이 한 번에 끝을 내는 것이 자비이리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칼을 휘둘렀다.
“에잇!”
주이청의 목이 뚝 떨어질 참에 돌연 날카로운 쇳소리가 쩡! 하고 크게 울렸다. 동시에 병사는 그만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휘두른 끝에 닿는 것이 없어 앞으로 고꾸라질 듯했다. 간신히 몸을 가누고는 정신을 차리니, 칼날의 두터운 밑동이 뚝 부러져서 칼날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가까이에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굴렀다. 귀신의 장난인지, 놀랄 일의 연속이다.
“흐, 흐에에엑!”
병사는 그만 남은 칼자루를 집어 던지고는 도망하듯 뒤로 물러났다. 그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부장들이 달려 나와 다급하게 외쳤다.
“뭐야! 누구냐!”
“어느 놈이냐!”
답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웅성거리며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정렬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누군가 서두르며 파고들었다.
“잠깐 지나갑시다. 지나갑시다.”
“무슨?”
“어어?”
병사들은 당황했지만 사내는 마냥 서둘렀다. 거침없이 줄지어 선 병사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급기야 주이청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사내는 색이 바랜 남색장삼을 걸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흙먼지로 그득했다. 먼 거리를 헐레벌떡 달려온 모양이었다. 시커먼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젊은 장 천호와 부관들뿐만 아니라 늘어선 병사들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부장 하나가 성큼 나섰다. 그는 제법 위엄을 차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네놈은 대체 뭐라는 놈이냐! 감히 나라의 행사에.”
“잠깐.”
“뭣?”
사내는 대답 대신, 손가락 하나를 바짝 세워서 부장의 말을 끊었다. 그가 당황할 새, 사내는 당장 급한 숨을 터뜨렸다.
“잠깐만, 후우, 숨, 숨 좀 돌립시다. 아이고, 죽겠다. 정말 죽을 둥 살 둥 뛰어왔네. 허억, 허억. 뭐가 이렇게 멀어.”
사내는 그러고는 허리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치켜들고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의 일천의 정병이나 절정의 무부들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 천호가 말 위에서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악문 잇새에서 빠드득 소리가 나고 치뜬 눈에서는 아주 불똥이 일었다. 마치 주변의 모두가 안중에 없다는 듯 방자한 모습이 아닌가. 그는 급기야 노성을 터뜨렸다.
“에이잇! 뭘 멍청히 있느냐! 당장 저놈을 내쳐라!”
“예, 장군!”
병사들에게 맡길 것도 없다. 부장들 몇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때까지 사내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부장 한 사람이 그에게 험악하게 외쳤다.
“놈!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사내는 흘깃 부장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짧은 웃음인데 그 웃음과 동시에 부장은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사내가 냅다 손을 뻗더니 그대로 부장을 뒤로 던져 버린 것이다. 놀란 비명은 한참 나중에 울렸다. 사내는 가볍게 손을 썼다. 나머지 부장들의 옷자락을 잡기가 무섭게 뒤로 연이어 던져 버린 것이다. 돌조각으로 장난하듯 가벼운 손짓이었다.
“히에엑!”
가까이 있던 병사들은 그 모습에 놀라 후다닥 물러섰다. 아니, 가장 먼저 장 천호가 말을 몰고 뒷걸음질 쳤다. 삽시간에 열대여섯 걸음 이상의 거리가 벌어졌다. 사내는 가볍게 손을 탁탁 털고는 새삼스레 병사들과 무부들을 둘러보았다.
“많이도 모였다. 참 많이도 모였어.”
“누, 누구냐. 아니, 누구, 누구시오.”
“이 사람 말이오? 소명이라 하는 일개 무부올시다.”
권야 소명이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소명이라는 이름을 알 리가 없는 군부의 인사들은 주춤거리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한쪽에 따로 무리 지어 있는 강호 무부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네들도 이름을 모르기는 다르지 않았다.
소명은 당황한 그들을 놓아두고, 주저앉은 주이청을 돌아보았다. 주이청은 아주 넋을 놓고 있었다. 그는 소명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미 그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입을 벌린 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혀가 굳어서 ‘어, 어어.’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소명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하여서 주이청을 내려다보았다.
“계속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테냐? 내려다보는 것도 고개 아파.”
“참, 참으로 너냐? 너야?”
“야, 울지는 말자.”
“소명아!”
주이청은, 아니 소화촌의 이청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소명을 덥석 끌어안았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아쉬웠던 소명을 다시 마주하게 되다니. 이청은 요동치는 심중을 어찌 달랠 수가 없었다. 소명은 그런 이청을 부축해서 태연한 걸음으로 모옥을 향해 갔다.
“어, 어어?”
“저런, 저것을 어찌.”
부장들이나 병사들은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소명은 실로 병사들 모두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다. 모옥으로 다가가니 상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참으로 자네인가?”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상 선생님. 여전히 고우시군요.”
소명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상 부인은 눈가에 잔뜩 힘을 주고, 애써 마주 웃었다. 웃음 짓는 것도 제법 힘겨운 일이었다.
“좋지 않을 때와 와 주었구먼.”
“좋지 않을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잠시 쉬고 계십시오. 아청, 너도.”
“소명, 소명아. 안 된다. 저들이 어떤 자들인데.”
“에헤이, 이거 왜 이래. 나 상화촌의 소명이야. 괜찮아, 괜찮아.”
이청이 기겁해서 소명의 옷자락을 붙잡는데 그는 태연자약 웃으며 그를 달랬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터벅터벅 걸어와 물러난 병사들과 모옥 사이에 우뚝 섰다.
“너희 놈들, 감히 내 친구를 건드렸단 말이지.”
소명은 가볍게 손목을 풀어가며 중얼거렸다. 참 가당치 않은 모습이나 정병들은 눈치만 볼 뿐, 앞으로 나서지를 못했다. 장 천호도 기가 짓눌리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부장을 눈짓으로 재촉했다. 나서서 뭐라도 하라는 것이다. 높이 던져질 것이 두려웠으나 그는 상관의 독촉에 못 이겨 마지못해 나섰다.
“그, 그는 나라의 역적이오. 역적을 감싸려는 게요?”
“어떤 놈이 감히 역적 운운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명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무형의 권력이 요동치니, 나선 부장은 그만 호된 힘에 떠밀려서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뒤에 있던 정병들은 그 여력에 휩쓸려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마치 사람 몸뚱이가 그대로 포탄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내지르는 비명이 길어질 새, 부장의 몸은 그대로 모여 있는 무부들에게까지 닿았다. 그 앞에 서 있는 팽가의 소가주는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가볍게 손을 내밀어 부장을 막아 세우려고 했다. 허우적거리는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당황한 침음이 터졌다.
“크흑!”
상상 이상의 거력이 실려 있었다. 그는 대번에 공력을 더했지만, 버틴 두 발이 주르륵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는 발악하듯 일성을 내지르며 단숨에 공력을 드러냈다.
“크아악!”
그제야 부장의 몸이 멈추고, 밀려나던 발끝도 멈췄다. 다만, 복사뼈 어림까지 두 발이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떠밀린 부장이 그만 선홍의 핏물을 왈칵 쏟아내더니,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팽 소가주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입가에 선홍의 핏물이 줄줄 흘렀다. 심각한 내상에 그만 숨이 끊긴 것이다. 그러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소명이 쯧쯧 혀를 찼다.
그는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런 모자란 놈. 가만히 놓아두면 어련히 알아서 힘이 다할 것을. 뭘 굳이 나서서 괜한 생목숨을 끊어놔?”
실로 미련하게 여기는 투였다. 팽 소가주는 빠득거리며 이를 갈았다. 일생의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한낱 무명잡배가 발한 공력을 어찌하지 못하여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소가주가 두 눈에서 아주 불길을 쏟아낼 참인데, 소명은 쓴웃음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는 팽 소가주를 어찌 알아본 터였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팽가의 모자란 소가주 아니신가? 간만이오.”
“나, 나를 알아?”
팽가의 소가주, 팽곽도 이때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명은 히죽 웃었다. 백마사의 회합에서 혼자 멍청하게 굴던 그를 어찌 모를까. 있는 대로 거들먹거리다가 한밤의 습격에 그만 검댕 꼴을 하지 않았던가.
소명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당황하는 팽곽을 잠시 보았다.
“쯧, 대가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있던가.”
“뭣!”
당황한 참에도 이죽거리는 말은 용케도 들은 모양이었다. 팽곽이 불끈해서 고개를 치켜드는 데, 찰나 소명은 주먹을 짧게 내질렀다. 주먹이 허공을 때리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팽곽의 고개가 뒤로 홱 젖혀지더니, 곧 무릎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좌우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뚝 끊겼다.
팽가의 도객들조차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새삼스레 놀란 눈으로 소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예 금군과 강호의 무부들 앞에서 소명은 내친 주먹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 다음은 누구냐?”
* * *
석관을 가운데에 두고, 신향은 이제 기운을 다하였는지 다 사그라져서 향로마다 재가 수북했다. 강시당 부주파에 속한 여러 어른이 종을 울리고 주문을 외웠지만, 그들도 이제 기력을 다한 탓에 사방이 고요했다.
어린 문수는 큼직한 신향을 들고 조심스럽게 높은 문지방을 넘었다. 다 탄 신향을 다시 태우기 위함이었다. 향연이 한없이 무겁게 고여서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다른 이들은 숨을 돌린다고 잠시 자리를 비워놓고 있었다. 아이는 주춤주춤 신향을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 언뜻 놓인 석관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방울 달린 금줄을 사방에 두르고 가운데에 관을 놓았다. 뚜껑을 반쯤 열어 놓아서 안에 누운 연수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는 행여 금줄을 건드릴까 조심하면서 고개를 빠끔하게 내밀었다.
연수의 창백한 낯빛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수는 이내 입술을 삐죽거렸다. 비록 소당주라고 하지만, 마을 아이들과 가장 잘 어울려 놀아주던 탁연수였다. 이렇게 시체 꼴로 누워 있는 모습이 마냥 서글펐다.
“탁 아저씨, 얼른 일어나서 놀아줘요. 아이들이 모두 아저씨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들릴 리 없건만, 아이는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속삭였다. 그리고 한숨을 푹푹 내뱉었다.
“소명 아저씨도 얼마나 기다리는데요. 빨리 일어나요.”
문수는 마지막 말을 하고는 단 아래로 내려왔다. 아이의 힘없는 발소리가 타박타박 울리고, 이내 내당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내내 미동도 없던 연수의 눈꺼풀이 불현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다가, 눈이 열리며 새파란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굳은 혀를 간신히 움직이며 속삭였다.
“소명? 소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