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황가위난(皇家危難)
하늘 아래에서 번쩍번쩍하면서 기치를 드높였던 일천의 창칼이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서, 황토가 그득한 싯누런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여기 무수한 창칼의 주인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산서 땅의 성마른 모래바람이 쓸쓸히 불어들어 너른 들판 위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 복판에는 소명이 있었다.
풍상이 고스란하여서, 크게 색이 바래어 있는 청색 장삼이 찢길 듯이 거칠게 펄럭였다. 소명은 고요한 기색으로 부는 바람을 가만히 맞이했다. 사방에서 날붙이가 위험하게 번뜩이는 데, 소명은 주변과는 마냥 무관한 사람처럼 태연자약했다. 그는 걷어 올린 소매를 찬찬히 끌어내리고, 옷자락에 앉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이것 참. 힘쓸 일 한번 많기도 하다.”
찌푸린 입매에 쓴웃음이 선명했다. 괜한 불평이 아니었다. 무슨 업보인지, 친구 하나 찾을 적마다 일이 끊이지를 않는다. 당민을 만나서는 하남의 살수자객이라는 것이 죄 몰려오는 통에 자객불원의 전설을 다시 써야 했고, 잘 있다고 여긴 호충인은 난데없는 반도(叛徒)로 몰리는 통에, 그것을 수습한다고 소림속가 중 제일이라는 등용문의 풍파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탁연수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강시당을 단속하고 보니, 찾은 탁연수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처지이다. 그리고 지금이다.
소명은 치미는 한숨을 달래고서 고개를 돌렸다. 모래바람이 차츰 잦아들고서 새삼 드러난 주변 광경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버려진 창칼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창칼의 주인들이 들판 구석에 처박힌 채, 앓는 소리 한번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둘이 아니요, 일백, 이백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일천을 헤아리는 정예 금군의 꼬락서니였다.
그들 외에 산서의 토병이 있어서 외곽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소명이 일천 금군을 때려누이고는 버럭, 한 번의 큰소리로 죄 내쫓아버렸다. 그리고 다른 쪽에 남은 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복색도 제각각이고, 들고 선 흉기도 제각각이니, 속한 바를 굳이 가릴 것도 없었다. 그저 강호의 무부들이었다. 그저 자리나 지키고 가볍게 손이나 거들 요량으로 금군의 뒤를 따랐던 자들인데. 지금에는 그저 하나같이 질린 낯짝으로 소명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일이 좋지 않다. 아니, 완전히 글러 먹었다. 문제는 불똥이 어디까지 튈 것인가였다. 잔뜩 움츠려서 눈치만 보는데, 소명은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가까이 모옥에서 주이청과 상 부인이 넋을 놓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벌어진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음에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주이청은 금실이 수놓아진 비단 소매를 들어서 새삼 눈가를 훔쳐냈다. 그런다고 주변 풍경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명이 웃는 기색으로 다가왔다. 그는 하나 지친 기색이 없었다.
주이청은 맥없이 입을 벌리고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런 맹한 얼굴이라니. 다만, 상 부인은 소명이 모옥 마당에 들어서자 고개를 흔들며 하하,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웃음에는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목숨이 경각에 이른 위험을 모면했다는 안도감과 더불어서 기껏 죽기를 각오하였던 것이 쓸모없어졌다는 허탈함까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오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마주한 소명에 대한 놀라움이 가장 컸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그 어린 소명이 천하를 위진하는 고수가 되어서 돌아왔구나. 이야말로 실로 천운이 아니겠는가.”
“천하 위진이라니요.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소명은 걸음을 멈추고, 상 부인에게 두 손을 맞잡으며 깊이 고개 숙였다. 그러자 상 부인은 다시금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이라니. 그녀는 지난 세월에도 주름 하나 없는 눈매를 슬쩍 찌푸렸다.
“이런, 겸양이 과하다. 주변이나 둘러보고 그런 말을 하려무나. 일천의 금군을 죄 때려눕히고, 일천의 토병을 큰소리로 내쫓아버린 사람이 어디 할 소리란 말이더냐?”
상 부인이 한창때라고 하여도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면박 주듯이 하는 소리에 소명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눈길을 피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주이청이 여전히 눈코입 죄 벌린 채, 소명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놀란 심경은 상 부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십수 년, 그 지난 세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주이청은 짐작은커녕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텅 비어서,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렸을 적의 친우가 지금 일대 고수의 풍모로서 눈앞에 있다.
“소, 소명, 소명아. 너 대체?”
소명은 히죽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놀란 얼굴이라니. 반갑기도 했지만, 공연히 낯 뜨겁기도 했다. 그는 곧 쪼그려 앉아서, 주이청과 눈높이를 같이 했다.
“이봐, 아청.”
“으, 응.”
“너 한마디만, 딱 한마디만 해라. 그럼 저기 있는 놈들도 마저 싹 치워버리마.”
소명은 턱 끝으로 모옥 가까이 옹송그리고 있는 무부 무리를 가리켰다. 주이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들에게 눈길을 던졌다. 소명은 멍한 그에게 말을 이었다.
“네가 용상(龍床)을 원한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황도로 달려가 거치적거리는 것들도 죄 쓸어버릴 것이다.”
주이청은 홱 고개를 돌렸다. 목에서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는 크게 뜬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소명의 태연한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싶은 얼굴이었다. 일백의 무부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모습에 더해서 용상에, 황도 운운이다. 상 부인도 당황하기는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리 허언일지라도 쉽게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볍게 여기기에, 지금 소명의 기세는 묵직했다. 진정으로 남은 무부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그대로 황도로 내달릴 듯했다.
소명은 재촉하지 않았다. 입가에는 흐린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지켜보는 두 눈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주이청을 직시하며 답을 기다렸다. 주이청은 입을 벌린 채, 소명의 눈길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숨처럼 힘없는 웃음이 흘렀다.
“하, 하하. 하하.”
아니 웃을 수가 없다. 용상을 거론하는 바는 곧 혼자 천하를 상대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그 웃음소리에 모옥을 향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무부들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황자 전하!”
그들은 냅다 고개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일백이나 되는 무부가 모였음에도, 조금의 용기조차 낼 수가 없었다. 무인의 웅심은 온데간데없었다. 소명이 보인 신위는 그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소명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웃고 있는 주이청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명의 눈은 진지했다. 주이청이 고개만 끄덕이면, 용상에 그를 앉히고 말 터였다.
지닌 모든 이름을 다하고, 그 이름을 전부 탁류 속에 처박는다고 하여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이청은 웃음 끝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마라. 소명아, 너마저 그러지 마라.”
주이청은 속삭이듯 말했다. 처연함이 그득했다. 십여 년을 헤아리는 세월, 그 세월 만에 마주한 옛 친구에게 용상이 어떻고, 황위가 어떻고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주이청은 괴로울 뿐이었다. 그는 금 위에 올린 두 손을 단단히 움켜쥐고서 바르르 떨었다. 소명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히 아무 욕심도 없는 거냐?”
“나에게 단 일 푼이라도 욕심이 있다면, 어디 이놈, 저놈 하는 소리를 얌전히 듣고 있을까.”
주이청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슨 괜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찌푸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 아래는 축축하게도 젖어 있었다. 소명은 히죽 웃었다. 십삼황자 주이청, 아니 옛 친구 이청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난장판을 벌이는 친구들 옆에서 조용히 앉아 금을 뜯던 모습이 새삼 선명했다. 소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다. 대단하신 황자 앞에서라면 이렇게 편히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변하지 않았구나, 아청.”
“네 녀석이야말로, 속에 구렁이 너덧 마리 품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
“어허, 어디 그런 서운한 말을.”
소명은 손사래 치며, 너스레를 떨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상 부인이 인제야 마음을 놓은 듯이 고요한 미소를 머금고서 둘을 보고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기세가 일거에 사그라지고 나서야, 소명의 웃음이 비로소 밝게 보였다. 그녀는 문득 치미는 짧은 한숨을 삼켰다.
‘심중의념(心中意念)이 기세로 드러나다니.’
어쩌면, 소명의 경지가 상상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잠시 머뭇거릴 새, 소명이 물었다.
“이 녀석이야 그렇다 치고, 상 부인께서도 괜찮으신지요?”
“왜, 이 늙은이 말에 황성으로 달려가 줄 텐가?”
“아무렴요.”
“하하, 일없네. 일없어. 황자께서 마음 편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할 따름이야.”
소명은 웃음 짓는 상 부인에게 공손히 고개 숙였다.
어느 일에도 흔들림 없는 고아한 모습이 옛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세월이 남긴 흔적이라 흑옥같이 검었던 머리카락이 세어서 하얗게 반짝일 뿐이었다. 소명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남은 정리를 하겠습니다.”
“너무 험하게는 말거라.”
“그리하지요.”
당부 아닌 당부에, 소명은 가만히 웃음 지었다. 사정을 두라는 것이 아니고, 너무 험하게는 말라 하시니. 고개 돌리는 순간 만면에 그득하였던 웃음이 차갑게 돌변했다. 묵직한 눈초리가 얼기설기 엮은 조악한 울타리를 넘었다. 지금 이때에 남은 정리라면 과연 무엇을 가리키겠는가.
소명이 나서자, 무부들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아, 누구랄 것 없이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소명은 그네들의 놀란 심정을 굳이 헤아리지 않았다. 그저 성큼성큼 다가가 엉거주춤한 그들을 둘러보았다.
자리한 무부들은 다들 저 있는 곳에서 그래도 한 가락씩은 하는 인사들이었다. 적 둘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낭인, 용부 따위가 아닐, 하북무림에서 이름 좀 알려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즉, 금군의 일에 나서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위세고 나발이고, 다가오는 소명의 걸음에 바짝 긴장하여서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으니, 그 모양새는 스스로 생각해도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생각 있는 자들은 소명의 정체에 대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언뜻 떠오르는 바는 추호도 없었다.
‘아니, 대명천지에 이런 괴물이 대관절 어디서 떨어졌단 말인가.’
괴물이 달리 괴물이 아니었다.
소명이 차라리 뚜렷한 무공이나 절기를 드러내기라도 하였다면, 이렇게까지 쪼그라들지는 않았을 터였다. 진신무공은커녕 아무렇게 내지르는 주먹질, 발길질에 수많은 금군이 나가떨어졌다. 거기서 무슨 내력을 짐작할까.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더욱 큰 두려움이었다.
눈치만 보며 마른침이나 삼킬 새, 소명은 그들 앞에 와서 물었다.
“딱 봐도, 무슨 체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으시고. 대표하는 사람은 누구요?”
대표를 찾자, 무부들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누구랄 것 없이 일제히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부들 뒤로 따로 무리를 이룬 이들이 있었다. 팽가의 도객들이다. 그들은 쏟아지는 여러 눈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들 뒤에 팽가의 소가주, 팽곽이 인사불성으로 쓰러져 있었다.
소명은 흘깃 그쪽을 보고는 낮게 혀를 찼다.
“이런.”
팽곽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소명, 자신의 주먹이 아니었던가. 하기야 여기 모인 여러 무부 중에서 나설 만한 이라면 하북 팽가 정도였다. 그러나 정신 못 차리는 작자를 두고 무슨 말을 할까. 그 사이, 팽곽을 에워싼 팽가의 도객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소명의 눈길에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불끈 움켜쥐었다. 그러나 차마 뽑아 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그들로는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일천 금군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경거망동할 수 없다. 팽가의 혈기가 일어 부득불 칼을 잡았으나, 상대의 신위가 떠올라 절로 손목이 굳었다.
‘빌어먹을!’
팽가 도객 중 연장자로서 가장 앞서 있는 중년의 도객, 팽우기는 내심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짧지 않은 강호인생이었으나 이런 난처함은 없었다. 본래는 소가주를 호위해 잠시 외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건만,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로는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일천 금군이 복날에 개 패듯이 두드려 맞고 죄 나가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등을 보일 수도 없었다.
팽가의 엄한 가규(家規), 그중에도 특히 삼죄가 있어서 그들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적에게 등을 돌려서도, 사정을 구하여도, 구명을 받아도 아니 되는 일이었다. 애타는 속내가 그들 얼굴에 고스란했다.
불현듯 소명이 한 걸음 다가서자, 팽우기를 제외한 다른 도객들은 놀라 칼을 뽑아 들었다.
차차창! 스치는 쇳소리가 날카롭다. 서슬 퍼런 도광이 번쩍거렸지만, 들이민 칼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팽가라는 이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팽우기의 얼굴이 일순 피가 몰려 확 달아올랐다.
‘이, 이 미련한 것들이!’
그는 치미는 욕설을 간신히 삼켰다. 제대로 겨누지도 못할 바라면, 차라리 뽑지를 말 일이다. 흔들리는 칼끝이라니. 이게 무슨 창피인지.
소명은 자신을 겨누는 여러 자루의 칼날을 물끄러미 보더니, 한숨을 푹 내뱉었다. 패기도, 결기도 없이 그저 뽑아든 것이 고작이니. 그는 문득 나이 있는 중년 도객, 팽우기에게 눈길을 주었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이 되레 안쓰럽다. 그는 곧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비록 당신네 소가주를 저 지경으로 만들긴 했지만, 이래 보여도 팽가의 친구를 자처하는 사람이오. 더는 탓할 생각 없으니, 당신들은 그만 물러가시구려.”
“그, 그것은 어인 말씀이시오? 본가의 친구? 대체 당신 정체가.”
“지금은 십삼황자의 친구,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소?”
소명은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하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팽가의 직계와는 연관이 없으나, 팽지도를 비롯해 팽가의 젊은 영웅 셋과 나름의 교분을 나누지 않았던가. 소명은 그들을 기억하며 팽가에게 다른 책임을 묻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잔뜩 달아올라 있는 팽우기의 처지가 나름 안쓰럽기도 하였으니.
팽우기는 헛바람을 집어삼키고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진의를 헤아리고자 함이었지만, 찌푸린 눈매 너머 흑백이 또렷한 눈동자를 암만 들여다보아도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팽우기는 결국 긴장한 허리를 세우며 가만히 한숨을 흘렸다. 심주가 흔들린 마당이었다. 억지로 한다고 어디 전의(戰意)가 바로 서겠는가. 그는 볼썽사나운 꼴로 나자빠진 소가주 팽곽을 흘깃 보았다. 두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는 콧대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어차피 소가주가 요 꼴이라 어디 떠들고 다닐 처지도 아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흔들리는 칼끝을 들이밀고 있는 젊은 녀석들 꼴이 더 갑갑하다.
가랄 때에 순순히 가는 것이 백번 나으니.
팽우기는 재차 땅이 내려앉을 듯이 한숨을 푹 내뱉고는 소명을 향해 두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