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황가위난(皇家危難)
바람 소리가 윙윙 울렸다. 옷자락을 파고드는 새벽녘 찬바람에 퍼뜩 몸이 떨렸다. 하염없이 몽롱한 와중에 옷깃을 여미고자 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어깨에서 손목까지 뻐근하고, 발끝이 크게 저렸다. 그제야 정신이 어렴풋이 들었다. 온몸이 하염없이 무거웠다. 무슨 일인지. 그는 느릿하게 주름진 눈꺼풀을 깜빡거리다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으억! 이게 무슨 일이냐!”
날은 밝아서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점점이 흐르고 있었다. 산서의 누런 먼지구름이 낮게 깔려서 흘렀다. 다른 일이 없다면 참으로 조용한 날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하늘이 발아래에 있었고, 누런 땅이 머리 위에 있었다.
“이게, 이게 무어냐!”
노구가 단단히 결박된 채, 거구로 매달려 있었다. 봉 공공은 놀라 몸을 마구 흔들었지만, 그가 몸을 흔들수록 그의 야윈 몸은 좌우로 꺼떡거리며 더욱 요동치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묶어놓았는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없어!”
악을 쓰며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메아리뿐이었다. 봉 공공은 고래고래 악을 쓰다가, 결국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노인은 지친 숨을 거듭 몰아쉬었다. 침착하고자 애를 써보지만, 돌아가는 처지가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지, 온몸의 피가 머리 쪽으로 몰려서 지끈거렸다. 늙은 눈동자가 터질 듯이 따가웠다. 되돌아온 메아리 소리가 흩어질 새, 바람이 불어와 노구를 매단 동아줄을 흔들었다.
봉 공공은 축 늘어져서 지친 숨만 짓씹었다. 묶인 몸도 몸이었지만, 깊이 품은 내공기력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독문내공의 음유한 기운이 가득하여서 꿈틀거리고 있건만, 단 한 푼의 내력도 이끌어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집중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봉 공공은 결국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내공이 제압당했다는 것은 경지의 높고 낮음을 떠나, 무공을 지닌 무인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일이나 다름없다. 봉 공공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공공이 지닌 내공기력은 경지는 물론이거니와 남다른 공효를 지니고 있어서, 외력에 있어 제압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손을 쓴 상대의 경지가 자신을 훨씬 압도한다는 것인데, 그럴 리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럴 수는.”
봉 공공이 힘없이 우물거릴 새, 한 사내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색이 한껏 바래어 있는 남색의 장삼이 높은 산바람에 펄럭였다. 소명이다. 그는 거꾸로 매단 봉 공공의 위아래를 보더니. 툭 던지듯이 물었다.
“뭐가 이럴 수 없다는 게요?”
“흐으, 이 늙은이의 옥장공(玉藏功)은 대내제일의 무공, 타의에 의해서 공력을 제압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단 말일세.”
봉 공공은 소명이 다가오는 것에 놀라지도 않았다. 너무 지친 까닭인지. 그저 맥없는 채로 중얼거렸다. 옥장공인지, 무엇인지. 소명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세를 낮추어 매달린 봉 공공과 눈을 마주했다.
“자아, 이제 얘기해봅시다.”
“무, 무엇을?”
“아니면, 계속 그렇게 매달려 있을 테요?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소만. 어차피 볼일이야 다 봤고.”
볼일, 봉 공공은 그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몽롱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볼일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겠는가. 깊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봉 공공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화, 황자께서는.”
“음, 좋아하는 일을 잔뜩 하게 해드렸소.”
봉 공공은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거꾸로 매달린 몸이 좌우로 힘없이 흔들렸다. 그는 소명이 한 말을 알아들었고, 상황을 짐작, 아니 확신했다. 잠깐 사이에 족히 수삼 년 세월을 흘려보낸 것처럼 얼굴에 시름의 고랑이 깊었다.
“그럼, 편히는 가셨겠군.”
“그나저나, 그거 천산의 아편이더구려. 어디서 구했소? 아무리 황실이라도 쉽게 구할 만한 물건은 아닐 텐데.”
“그것이 중요한가?”
“아무렴, 중요한 일이지. 그놈들 짓이면, 당장 천산으로 달려가야 하거든.”
소명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지만, 눈가에 온기는 조금도 없었다. 봉 공공은 심상한 와중에도 일순 오한이 크게 일어서 퍼뜩 움츠러들었다. 그는 거꾸로 매달린 와중에 소명의 눈치를 보았다. 소명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어디서 구했소?”
“그것은, 그것은 무림 가문의 진상품이었소.”
“무림 가문? 어디를 말하는 거요?”
“그런 것은 아랫것들이나 알지 않겠소.”
봉 공공은 다 포기하여 답했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몰랐다. 천산의 아편이든, 곤륜의 향이든, 그저 칠황자가 마음 편히 있고, 말이나 잘 들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에게 선을 대고자 하는 이가 어디 한둘일까. 넌지시 말을 건네면, 즉각 충분한 양이 올라오고는 했다. 봉 공공은 자세한 사정을 참으로 모른다고 거듭 말했다. 노인에게는 굳이 감출 것도, 중요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소명은 웃음을 거두었다. 이청의 일을 돌보고자 나선 걸음에 또다시 천산의 흔적을 마주할 줄은 몰랐다.
이제까지 일을 돌이켜보아도, 단순히 우연의 중첩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등용문과 강시당에 이어서, 황실에까지. 소명은 퍼뜩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냈다.
“이것들이 대체 어디까지 손을 쓰려는 거야?”
소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퍼뜩 허리를 세우고 매단 줄에 손을 뻗었다. 묶인 줄이 풀려나며, 봉 공공의 지친 몸이 뚝 떨어졌다. 축 늘어진 채, 거꾸로 처박히려는 것을 부축해 앉혔다. 두 발에 땅에 닿기가 무섭게 봉 공공은 흐느적 주저앉았다. 오금 어림에 바람이 들락거리는 것 같았고, 두 어깨와 등줄기에는 수백 근의 추가 매달린 것 같았다. 그리고 옥장공은 여전히 요지부동, 내기는 노쇠한 몸속을 맴돌았지만, 뜻에는 전혀 따르지 않았다. 크게 기대한 바는 아니나, 새삼 처지를 깨닫자 노구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봉 공공은 불과 하룻밤 사이에 뒤바뀐 자신의 처지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용한 소명의 모습을 흘깃 보았다.
‘과연, 십삼태자에게는 마지막, 마지막의 한 수가 있었구나. 어찌 산서 땅으로 도망하는가 하였더니.’
봉 공공은 감당 못 할 허탈함에 허허, 힘없이 웃고 말았다. 마땅히 연고도 없음에도 굳이 산서로 도망한 것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저 헛된 도망이라 여겼건만, 이러한 고수가 떡하니 등장할 줄이야. 십수 년 세월 동안 공들인 모든 판이 단 하룻밤 새에 끝장이 나고 만 셈이다. 앙상한 어깨는 허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그런데 앉은 자리 앞에 무엇이 턱턱 놓였다. 서탁과 지필묵이었다. 봉 공공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새삼 소명을 바라보았다. 드러내던 싸늘한 기세는 간데없고, 혼자 분주했다.
“이건 뭔가?”
“쓰시구려.”
“무엇을?”
“이제껏 저지른 일들, 모두.”
소명은 천천히 말했다. 봉 공공은 하룻밤 사이에 한층 야위어서 큼직한 눈동자를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소명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하얀 백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진으로 눌러놓은 종잇장이 부는 바람에 잠시 들썩거렸다.
조용히 있던 노인의 마른 입술 사이로 힘없는 웃음이 맴돌았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막막한 일이었다. 한평생 황궁의 암투 속에서 살았다. 그 속에서 바른 일이란 과연 무엇이 있을까.
끝없는 모략과 모략 속에서 인의는 수단이었고, 인명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붓을 잡았다. 그 붓을 놓았을 적에 밝은 햇살은 이제 한참 기울어 있었다.
소명은 봉 공공이 남긴 길고 긴 문서를 굳이 챙겨 읽지는 않았다.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이것은 노인의 유서이며, 또한 이청을 평안케 할 문서였다. 종이를 곱게 접으며, 소명이 고개를 떨군 봉 공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붓을 놓은 손끝이 서안 아래에 축 늘어졌다.
“고생하셨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명은 퍼뜩 쓴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노을이 지기에는 하루가 길었다. 소명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산 아래에서 몇의 인영이 올라오고 있었다. 앞장선 사내는 단삼 차림에 싯누런 머릿수건을 둘러 촌부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바로 흑선당의 황씨였다. 그가 흑선당 요원 몇을 데리고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뒤에는 이청과 상 부인이 있었다.
황씨는 서둘러 소명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습관처럼 배시시 웃었다.
“헤헤헤, 권야 나으리.”
“도움에 감사드리오.”
“아이쿠, 도움은요. 그 무슨 민망한 말씀이십니까. 저희야 그저 뒷정리나 하였을 뿐인데요.”
황씨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납작 엎드렸다. 다 지은 죄가 있는 까닭이라. 소명이 흑선당 본점을 찾을 적에 뻔히 함정으로 안내했던 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서 아니 눈치를 볼 수가 없었다. 소명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사이 한걸음 늦게 올라선 상 부인이 봉 공공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봉 공공.”
눈길에 회한이 짙었다. 황실에 골육지정이 무슨 말이겠느냐만, 유독 앞장서서 황자를 탄압하였던 것이 바로 봉 공공이었다. 칠황자를 제 손에 넣고는 그렇게 위세를 부리더니. 결국, 외딴 산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상 부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소명아.”
“예, 말씀하십시오.”
“이리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할 줄은 몰랐다.”
“그저 시운(時運)이 따랐을 뿐입니다.”
“시운, 시운이라고? 하하.”
상 부인은 웃고 말았다. 제아무리 시운이 있다고 한들, 능력이 되지 않는 자가 경계가 엄밀한 아문에 들이닥쳐서 이렇게 수괴라 할 자를 굴복시킬 수 있겠는가. 그녀는 새삼 고개를 돌려서 푹 고개를 떨군 봉 공공을 다시 바라보았다. 지난 세월 동안 황궁의 암중에서 온갖 위세를 부리던 자의 마지막이라 하기에는 참으로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이다. 이제 와 미움이건, 분노건 드러낼 게 무어 있을까. 상 부인은 남은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황씨와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봉 공공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제 남은 정리는 흑선당의 몫이다.
이청은 말없이 고금을 쓸어내리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산서의 마른 바람이 아래에서 흩어졌다. 칠황자와 봉 공공, 처처에 정적이 가득한 황궁에서도 유독 자신을 백안시하였던 두 사람이었다. 그 질긴 악연의 고리가 하룻밤 사이에 끊길 줄이야. 그렇다고 마음 편할 수는 없었다. 남보다 못하다 하여도, 같은 핏줄의 형제가 끝을 맞이하였으니. 더욱이 친우의 손을 더럽힌 것만 같아서 마음이 한층 무거웠다. 백 근이고, 천 근이고, 헤아릴 수 없으려나. 소명은 태연히 다가와 옆에 앉았다.
“마음 풀어라.”
“소명아.”
“네가 심란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청은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고맙다.”
소명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머리 위에서 새파란 하늘이 노을빛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소명은 무슨 일인지 불현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여튼, 네놈들은 왜 다 그 모양이냐?”
느닷없는 면박에 이청은 빠끔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의아한 얼굴이었다.
“호충인 녀석은 문파 후계자로 거론되는 통에 생매장될 뻔하고, 연수 녀석은 지금 산송장 꼴에다가, 너까지 그 모양이니.”
“하, 하하하. 면목 없다.”
이청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혼자 멀쩡한 것은 아민 정도군.”
“아민? 민이를 만난 거냐?”
이청은 당민의 이름에 그만 어깨를 들썩거렸다. 드물게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자 소명은 턱을 괸 채, 이청의 낯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청은 놀란 얼굴로 있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속내가 튀어나와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자 소명은 아주 몸을 돌려서 이청을 마주했다.
“이봐, 황자 나리.”
“아니, 새삼 무슨 황자 운운이야?”
이청은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온갖 면박, 구박은 다하고서 황자라니. 더구나 소명을 비롯한 옛적 친구들에게 황자라 불리는 것만큼은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런 이청의 속내야 어찌하든, 소명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넌지시 건넸다.
“너 말이다. 아민을 잡으려거든, 꽤 서둘러야 할 거야.”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이청의 눈 아래가 일순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명이 갑작스럽게 아민과의 일을 말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급히 고개를 돌리는데, 소명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혼담이 오간다고 하던데. 무가련과 말이지.”
이청의 입가에 머무른 어색한 웃음이 일순 흔들렸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소명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혀가 굳었는지, 뻣뻣하게 말했다.
“무가련, 무가련 어디?”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소명은 손을 내저었다. 심드렁한 모습인데, 그것이 이청의 심사를 더욱 흔들고 말았다. 드리운 그늘은 간데없고, 넋이 나간 채, 입술만 뻐금거렸다. 소명은 그런 이청의 어깨를 툭툭 다독거리며 지나쳤다.
“그러니까, 알아서 잘하란 소리다.”
이청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텅텅 비어서, 혼담이라는 한 마디만 두둥실 떠돌아다녔다. 소명은 그런 이청의 모습이 사뭇 흥미로웠지만,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자고로 남녀상열지사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상책 중의 상책이라. 그는 옛말에 공감하며 심란한 이청을 남겨두고 걸음을 옮겼다.
산서의 무더위가 끝자락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고, 부는 모래바람은 따가웠다. 흐린 하늘을 보고 있는데, 소명의 얼굴에 웃는 기색이 차츰 흐려지더니, 곧 사그라졌다. 입매가 지그시 일그러졌다.
강시당을 떠나오고 이제 며칠이었다. 이청을 구원하고자 작정하고 내달린 참이었지만, 그동안에도 강시당에 있을 탁연수의 안위를 단 한시도 잊지 않았다. 메마른 입술이 절로 일그러졌다. 치미는 한숨을 꾹 짓눌렀다.
“빌어먹을 놈. 돌아갔을 때에도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다.”
소명은 이를 악물고서 살벌하게도 중얼거렸다. 치렁한 소매 아래에서 움켜쥔 두 주먹이 부르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