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친구의 해후는 주먹을 부른다
소명과 이청은 무작정 내달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소명은 바로 알았다. 강시당의 본관으로 탁연수의 관을 놓아둔 청음관이다. 강시당의 수많은 술사들이 들러붙어서 향을 사르면서 탁연수의 백을 부여잡고 있었다. 뽀얗게 일어난 향연으로 마치 불이라도 난 것 같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강시당의 남은 역량이 그 한곳에 모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달리는 지금에도 짙은 향내가 남아서 코끝에 닿을 정도였다.
이청은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땅에 발을 딛는 것은 극히 한순간, 그의 두 다리는 연이어 허공을 밟아가며 앞으로 쑥쑥 나아갔다. 과거 상 부인에게 요지선자라는 별호를 안겨준 선기일선(仙旗一線)의 보신경이었다. 한 호흡의 공력만으로도 족히 수백 리를 내달린다고 하는데, 이청은 수백 리는 몰라도 수십 리는 일거에 주파할 만한 공력이었다. 그가 삼대절기 중에서도 특히 보신경에 공을 들인 결과였다. 그런데 이청은 퍼뜩 의아한 눈으로 소명을 돌아보았다. 워낙에 다급히 뛰쳐나가서 미처 깨닫지를 못하였는데, 소명은 그저 뛰고 있었다. 달리 보신경을 펼친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튼튼한 두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땅을 차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청을 훌쩍 앞질러서는 벌써 청음관의 높은 담에 닿았다. 무공이야 자신하는 바가 아니었으나, 보신경만큼은 남에 뒤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건만, 보신경도 아닌 달음박질에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이청은 불현듯 놀란 숨을 터뜨렸다.
“허엇!”
소명이 달리는 모습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가 훌쩍 앞서서 높은 담을 단박에 뛰어넘는 그 순간, 큼직한 그림자가 갑자기 솟구쳐서 소명을 덮쳤다.
청음관의 높은 담을 단박에 뛰어오르는 순간, 소명은 불쑥 덮쳐오는 검은 그림자를 마주했다.
“엥?”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소명은 와중에도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림자는 묵직한 석관이었다. 못해도 수백 근에 달하는 것이 마치 포탄처럼 소명을 노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나, 소명은 당황하는 바 없이 마주 손을 펼쳤다. 가볍게 내민 손끝이 석관의 끝을 툭 건드렸다. 채 한 푼의 힘도 실리지 않은 듯했지만, 나한십팔수의 정화가 손끝에 어려 있었다. 석관은 날아오는 방향을 잃고, 더욱 드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 뒤로 비쩍 마른 사내가 있었다. 그는 버럭 노성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소명!”
미처 몸을 가누기도 전이었다. 사내는 뼈가 앙상한 두 손을 바짝 움츠린 채, 매섭게 할퀴어댔다. 조공의 경력이 싸늘하게 치솟아, 무슨 말을 꺼낼 때가 아니었다. 소명은 내처 한쪽 팔을 빠르게 돌렸다. 언뜻 간단해 보이는 동작이나, 금강권 법륜무애의 일식이다. 일진의 경풍이 앙상한 사내의 두 손을 고스란히 맞이했다. 그런데 급습을 마주하는 데에도 당황한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소명은 한 팔로 사내의 두 손을 얽어내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려섰다. 소명이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섰지만, 목내이 꼴로 비쩍 마른 사내는 그 외견과 어울리지 않게도 둔중한 소리를 내며 발아래에 석판이 우지끈 깨져 나갔다.
이청은 뒤늦게 담 위에 올라섰다. 그는 헐떡이면서 소명과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그만 안도했다. 크나큰 걱정이 일거에 흩어지며, 괜스레 맥이 풀렸다. 그는 담장 위의 기와에 그대로 걸터앉았다.
“이놈!”
사내는 벼락같은 일성을 터뜨리며 얽어맨 소명의 팔을 뿌리치고, 거듭 공세를 펼쳤다. 좌우 손이 어지럽게 조영을 그렸다. 언뜻 뻣뻣한 움직임이었지만, 날래기 그지없어서 이미 소명의 면전으로 파고들었다. 쭉 뻗은 손끝에서 칼날처럼 싸늘한 예기가 솟구쳐 목을 노렸다.
“어이쿠.”
소명은 어깨를 슬쩍 비틀었다. 그림자의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두 팔을 도검처럼 맹렬히 휘두르고 떨치는데, 그 위력이 사뭇 대단하여 궤적 끝에서 땅이 갈라지고, 벽이 갈라졌다. 사내는 이를 드러낸 채, 매섭게 치뜬 두 눈에서 새하얀 안광을 줄기줄기 흘려댔다. 어떻게든 소명을 붙잡고 말겠다는 일념이 솔직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니 소명도 가만히 있을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가 금강권의 보법을 좇아서 빠르게 물러나니, 일 촌, 단 일 촌의 거리를 더 파고들지 못했다.
“에잇! 이익! 이이잇!”
악문 잇새로 용 쓰는 소리만 계속 흘렀다. 그러기를 한참, 처음의 긴장은 이제 간데없었고, 지지부진하여서 법당의 앞마당을 마냥 맴돌기만 했다. 이청은 처마에 앉아 둘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쓴웃음이 그득했다.
“하, 하하하.”
급기야 웃음이 터졌다.
사내는 한참을 쫓고서도 결국 소명을 잡을 수가 없자, 발을 동동 구르며 마구 소리를 내질렀다.
“으, 으으윽! 이 자식, 거기 안 서!”
“친구야, 그렇게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니.”
“시끄럿!”
사내, 탁연수는 앙상한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버럭버럭 악을 썼다. 소명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긴장하여서 허겁지겁 달려온 모습은 없었다. 둘은 그러다가 언뜻 이청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주 남의 일이라고 높은 곳에 앉아서 마냥 웃는 낯이다. 죽다 살아난 터라, 한층 야윈 얼굴의 탁연수가 볼을 부풀리더니,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저놈의 자식. 아주 남의 일이지.”
“하하, 그래도 일국의 황자인데, 자식은 좀.”
이청은 머쓱하여 말했다.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그대로였다. 그러자 탁연수는 재차 외쳤다.
“너도 시끄럿!”
탁연수는 대뜸 손을 휘둘렀다. 웅크린 손이 허공을 긁어내듯 휘젖자, 일순 음산한 경풍이 일어서 이청이 앉은 자리를 덮쳤다. 이청은 당황하지 않고, 훌쩍 옆으로 건너 앉았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기왓장이 갈라지고, 담벼락에 다섯 줄기의 자국이 깊이 남았다. 이청은 그 흔적을 멀뚱히 보더니, 새삼 놀란 눈으로 탁연수를 돌아보았다.
“너, 너, 완성했구나.”
“흥!”
목소리에 감탄이 뚜렷했다. 그러자 탁연수는 높기도 한 콧대를 바짝 치켜들었다. 잰 체하는 모습이었지만, 해골에 거죽이나 씌워놓은 꼴로 그리 해봤자, 마냥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소명은 딱히 위협을 느끼지 못한 터라,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넌지시 물었다.
“뭐야? 뭘 완성했다는 거야?”
탁연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장의 경력을 뿌린 새하얀 손을 퍼뜩 치켜들었다.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웅크렸다. 눈가로 서늘한 기운이 흐르고, 손가락 끝에서 언뜻 백광이 번뜩였다.
“강시당 비전, 음풍찬영조(陰風鑽影爪).”
아주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흡사 천하제일의 무공을 연성해내기라도 했다는 투였다. 그렇지만 소명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는 탁연수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소명이라도, 강시당에서 전하는 무공내력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탁연수가 저렇듯이 자신만만하게 있으니, 이쪽도 손을 놓고 있어서야 친구의 도리가 아니다.
소명은 히죽 웃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는 퍼뜩 허공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땅이 내려앉을 듯이 세찬 발 구름과 더불어서 떨친 권경은 흡사 하늘을 꿰뚫어 버릴 듯이 세찼다. 마치 마른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우렛소리가 뒤늦게 퍼져갔다. 소명은 떨친 주먹을 가볍게 흔들면서 멍청한 얼굴로 있는 탁연수와 이청을 돌아보았다. 그는 보란 듯이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백보권이시다.”
강시당의 음풍찬영조가 실로 대단한 공력으로 절전된 세월이 백수십 년이라고 하지만, 어디 소림사의 오랜 절기인 백보권에 비할까. 탁연수는 비록 앙상하더라도 원판의 잘생긴 얼굴을 와락 구겼다. 히죽 웃는 소명의 낯짝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이청은 담장에서 내려오다가 그만 어이가 없어서, 소명과 탁연수를 번갈아 보았다. 이십여 년의 세월 만에 마주하여서 죽일 듯이 손을 쓰더니, 이제는 서로 익힌 재간이나 자랑하다니. 어릴 적에도 안 하던 짓거리를 뻔뻔하게 하고 있으니. 그러나 그것 또한 잠시에 불과했다. 그들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십여 년 세월, 그 세월을 훌쩍 넘어서 옛적의 친구가 얼굴을 맞대었으니. 웃음이 어찌 안 나올까. 죽일 듯한 살기가 요동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 웃음이 한껏 드높을 새, 뒤늦게 상 부인이 매향과 채유영을 뒤에 두고 천천히 다가와 그들 웃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서 햇빛이 밝았고, 서늘한 바람이 휘돌아 여름날의 풀 냄새가 길게 흩어졌다. 상 부인은 문득 고개를 들어 풀잎이 흩어지는 바람을 헤아렸다.
“좋은 바람, 좋은 날이다.”
하늘을 태울 듯하던 노을빛은 다 젖어들고서, 강시당에도 밤하늘은 깊은 어둠을 드리웠다. 한바탕 난리에 엉망이 된 청음관을 두고서, 소명과 탁연수, 그리고 이청은 다른 처소로 자리를 옮겼다. 마구잡이 주먹질 끝에 기껏 자리를 마련해서 마주 앉았건만,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저 술잔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산서의 독하디독한 분주에 몇 가지 소박한 찬이 전부였지만, 소명은 말할 것도 없고, 이청 또한 어떤 불평도 없이 잔을 기울이고, 젓가락질했다. 십여 년 세월을 어찌 한 번에 풀어낼 수 있을까. 그리움과 또 그만큼의 원망을 주먹질로 달래었으니. 그저 마주하고 있는 지금을 소중하게 여길 따름이다.
술을 나누다가 언뜻 눈을 마주치자 피식피식 헛웃음이 흘렀다. 오히려 그들의 고요한 술자리를 버거워하는 것은 멀지 않은 자리에서 지켜보는 두 여인이었다. 매향은 영 불안한 얼굴이었고, 채유영은 자리에 같이 앉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전에 없이 볼을 부풀리고, 입술을 불쑥 내민 채였다. 그러나 어쩌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청이 허락하지 않으니. 그녀는 불만 가득한 속내를 한숨으로나 풀어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매향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매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달리 마음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적어도 화급을 다투는 겁난은 얌전히 잦아들지 않았던가. 어수선하다고 하지만, 강시당도 차츰 안정을 되찾고 있었고, 황자 또한 무사하니. 매향은 그것으로 다행이라 여길 뿐이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에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아.”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무슨 얼굴로. 매향으로 말하자면, 흑선당이라는 이름 이전에 이미 황궁의, 그것도 요지선자 상 부인에게 속한 처지였다. 채유영처럼 제자로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흑선당에 들어설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흑선당에서 다른 이권을 바란 것은 아니었고, 그런 행동 또한 추호도 마음먹은 적이 없건만.
매향은 거듭 한숨을 흘렸다. 속인 사람의 답답한 심경을 누가 알아줄까. 매향은 흘깃 소명의 안색을 살폈다. 다들 얼굴이 붉고, 또 붉게 달아올랐지만, 소명의 낯은 딱 그대로였다. 조금의 취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나가는 듯한 말로 전한 한 마디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이제 당주가 되었소.’
흑선당 당주,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백운당이라면 그라면 능히 해낼 수 있을 터였다. 굳이 그녀가 필요하지 않을 터, 흑선당에 대단한 인재가 얼마나 많겠는가. 매향은 오래 고민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와장창!’ 소리가 터졌다. 한참 술잔을 나누다가, 그만 탁연수가 폭발한 것이다.
“야, 이 썩을 놈아! 내가 얼마나 너를 걱정한 줄 알아! 아느냐고!”
“잠깐, 잠깐!”
탁연수는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뜸 멱살을 부여잡고 난리를 쳤다. 그러나 상대는 소명이 아니라, 죄 없는 이청이었다. 소명은 여전히 자리에 주저앉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청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소명은 이내 박장대소하며 웃어젖혔다.
“우하하하!”
“야, 소명! 좀 말려봐!”
이청이 급하게 외쳤지만, 소명은 숫제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웃기만 했다.
“와하하하!”
* * *
천하가 한차례 소란했다. 오랜 세월 조용했던 천룡세가의 기지개 덕분에 강호는 요동쳤고, 구중천(九重天)의 황실 또한 그러했다. 암중에서 조용하게 벌어지던 황자 간의 다툼이 다급하게 드러나며, 삽시간에 수백, 수천의 목숨이 휩쓸렸다. 특히나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던 칠황자가 돌연 횡액을 당하면서, 그를 따르는 무리가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어찌 수를 쓸 틈이 없었다. 서슬 퍼런 칼날은 심지어 내명부(內命婦)에까지 이르러서, 몇몇 비빈(妃嬪)이 화를 입었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모든 것이 벌어지는 데에 걸린 시일은 기껏 보름 닷새에 지나지 않았다. 여름 한 철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대도에서는 무더위에 앞서서 피바람이 일었다. 떠들기 좋아라하는 이들은 모든 것이 숨어 칼을 갈던 황태자의 솜씨라 했고, 몇몇이 십삼황자를 조심스럽게 거론했지만,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여러 황자 중에서도 기반이랄 것 하나 없는 십삼황자가 칠황자와 그 무리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뿌리 뽑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한바탕 휘몰아친 서슬에 산서에 일어난 조그마한 소란도 잦아들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알았다.
천룡세가가 침묵을 끝낸 것도, 황실에 피바람이 인 것도, 모두가 전조에 지나지 않으니, 천하를 뒤엎을 크나큰 태풍이 멀지 않았다. 다만 어디서 시작할지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번화한 시장통이면 어디나 그렇듯이 사방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온갖 소음으로 요란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리쬐는 햇볕이 뜨겁고, 무더운 날씨라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시장통은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바다가 가까운 탓인지, 습하고 더운 바람에는 역한 비린내마저 실려서 흩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다들 머릿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무릎까지 오는 짧은 단삼에 검게 탄 웃통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남녀랄 것 없이 햇빛을 피하고자 양산을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굵은 땀방울이 줄줄 흘렀다. 그네들은 마치 싸우듯이 대화했고, 간단한 말에도 손짓이 컸다. 달리 바닷사람의 기질을 열혈이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시장길 한가운데에 한 여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서, 평범한 유군(襦裙)의 차림이었는데, 윗옷은 소매가 맞지 않는 백유를 그대로 걸치고 아래에는 새빨간 붉은 치마를 둘렀다. 시장통의 더운 바람에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데, 맨발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가는 사람들은 우선 여인의 차림새에 화들짝 놀라거나, 크게 당황했다. 더구나 남방에서는 여인이 두 발을 그대로 내어놓고 다닌다는 것은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의 남다른 외모에 딱 숨을 멈췄다. 인세의 사람이 아닌 듯했다. 쏟아지는 햇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백설같이 하얀 피부에 검은 눈동자가 영롱했고, 연한 붉은색을 띤 입술은 같은 여인이래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릴 지경이었다. 여인은 주변의 눈길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냥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참으로 무방비한 모습이어서, 피 끓는 사내라면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호의(好意)에서든, 음심(淫心)에서든, 아니면 다른 악의(惡意)에서든 몇몇이 은근슬쩍 다가섰다가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바로 뒤에는 마치 곰 같은 사내가 험악한 인상으로 사방에 살기를 쏘아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눈에도 여인을 수행하는 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큼지막한 눈동자를 살벌하게 부라리는데, 그 위세가 사뭇 대단하여서 완력 있는 왈짜패라도 도리가 없었다. 그의 차림새도 맨발의 여인 못지않게 기이했다. 더운 바람이 부는 바닷가 시장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모피가 달린 두터운 겨울 장포를 걸쳤다. 정말로 곰처럼 위압적인 덩치와 차림새에 한 손에는 검 한 자루를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 생각과 달리, 청년은 여인을 호위하기보다는 그녀가 무슨 말썽을 일으킬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는 두렵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