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하늘의 먹구름
평소 성질머리라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할 것도 없겠지만, 성질이 통할 상대도 아니었고, 처지도 아니었다.
소명은 입을 꾹 다문 채, 공노의 말에 귀 기울였다. 노인은 낙양의 유서 깊은 살수집단, 낙수부의 주인을 알았다. 그의 죽음에 관한 행적으로 소명을 찾았고, 그의 공력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한 사정이 있네. 낙수부주를 해한 그 공력, 대체 어디서 터득한 것인가?”
공노는 야윈 눈동자를 크게 뜨고는 소명의 위아래를 살폈다. 소명은 무표정하게 있다가, 차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공노는 그 서슬에 괜스레 마른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거야 좋은 소리가 아니 나오겠다 싶었다. 소명은 당연하게도 입매를 비틀었다. 공노는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다. 낙수부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공력을 어찌 찾는지, 그 이유는 쏙 빼어놓고서는 자신에게 답을 구하고 있다. 하기야 소명이 굳이 관심 가질 바도 아니었다. 그는 잠시 조용하다가, 곧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낙수부주, 그의 죽음을 직접 보셨다니. 그 말은 곧 그날의 배후가 그쪽이란 말씀이구려.”
“응?”
공노는 답은 않고, 삐죽하게 자란 허연 두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날의 배후라니, 무슨 말인가. 공노는 낙수부주가 죽었다는 것과 그가 마지막으로 상대한 자가 자객불원이라 불린 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다른 일은 천룡세가의 둘째 소천룡이 하는 일이니. 일단은 작은 주인이라고 하나, 공노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공노의 입장이었고, 소명의 입장은 영 딴판이었다.
“낙양 땅에서는 그렇게 죽이려 들더니만, 이제 와 도움을 달라. 그것도 이런 식으로 말이오? 참으로 대단하시구려, 천룡이라는 이름은.”
소명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어지간한 인물이라면, 이 판국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공노는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싸늘하게 소리쳤다.
“허! 내 백 년 내에 내 앞에서 이렇게 뻣뻣한 종자는 처음 보는구나!”
“지난 십 년 내에, 이렇게까지 멋대로인 경우도 처음 당합니다.”
“뭐, 뭐얏!”
기죽기는커녕 더욱 싸늘하게 쏘아붙인다. 공노는 노하여서 빽 소리쳤지만, 그뿐이었다. 어이가 없어 노할 기운조차 잃었다.
아무리 강호도상에 모습을 감춘 세월이 목하 수십 년이라 하지만, 무려 일백 년 전 일대괴걸, 공중산의 이름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리 당당한 모습이라니.
노인은 그렇지 않아도 흉험한 얼굴을 한층 기괴하게 일그러뜨린 채, 소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공노는 마냥 기가 찼다. 소명은 그러나 더 대거리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용무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이만 실례하겠소. 공 노선배.”
“이잉? 아니, 잠깐, 잠깐!”
공노는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단박에 잘라 버릴 줄이야. 급한 마음에 손을 뻗었다. 앙상한 손끝이 그림자보다 앞서서 움직였다. 그대로 소명의 맥문을 제압하려 들었다. 급한 마음에 절기를 펼쳤는데, 노인의 손이 잡아챈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불과했다. 뚜렷한 보신경을 펼친 것도 아닌데, 공노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다.
공노는 빈 허공을 움켜쥔 채,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말을 잃었다. 소명은 그 사이 후원의 문을 지났다.
“아니, 지금. 지금 그건.”
한순간의 흔들림이 당년에 이매추영수(魑鬽追影手)라고까지 불린 손속을 무위로 돌렸다. 이제껏 공노의 긴 세월 중에 이렇게 간단히 헛손질한 것은 두 번째였다.
“저놈이 당년의 가주와 비등하다는 건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늙어 자신의 손끝이 무뎌졌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공노와 두 무사는 얻은 바 없이 빈손으로 백학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붙잡고 우겨대기에는 소명, 위지백은 간단하지 않은 상대였다. 더구나 공노는 무슨 영문인지 크게 심란하여서 굳이 고집하지도 않았다.
그리 다그칠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잠자코 백학당을 나서는데, 그 모습은 처량하기보다는 못내 기이했다.
백학당 제자들과 식객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후에 그들의 눈초리는 소명에게로 향했다.
도대체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권야와 염마도라 하는데, 하남 무림에서는 크게 들은 바가 없는 이름이었다. 금시초문이기는 당주 배관걸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도움에 감사드리오.”
“아니, 도움이라니요. 이날의 화는 온전히 저희 때문이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허허, 그런 말 마시오. 비록 구석진 곳의 작은 무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소림파의 일문. 언제든 일은 벌어지기 마련이지요. 허허, 그래도 천룡의 이름이 오르내릴 줄은 미처 몰랐지만 말이오.”
배관걸은 정중히 고개 숙이는 소명의 모습에 손을 내저었다. 그는 아직 수그러들지 않은 웅심(雄心)을 드러내면서 애써 호탕하게 웃었다. 소림권에서 독문의 백학권을 이루어낸 권사요, 일당의 당주로서, 당연한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당한 내상이 바로 아물 수야 없는 노릇이다. 괜한 웃음에 그만 가슴이 울렸다.
“크윽!”
배관걸은 일순 움찔하며 이를 악물었다. 통증이 짜르르하고 울리면서 기껏 다독여놓은 기혈이 다시 들끓었으니. 이 무슨 미련한 짓인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허리를 세웠다. 그런데 마주하고 있던 소명이 어째서인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우선은 몸을 살피시지요. 저는 그럼.”
뭔가 민망한 모양인지 엉성하게 답하고는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배관걸은 이상하여서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어찌하여?”
“스승님, 그만 닦으시지요. 피 흐릅니다.”
보다 못해, 한 제자가 수건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입술 사이로 선홍의 핏물이 넘쳐서는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쿠, 이런.”
공노는 백학당의 정문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제대로 솜씨를 보이기도 전에 이렇게 속절없이 밀려나고 말다니. 천룡의 이름을 내건 행사라면 이렇게 물러나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썩을.”
잇새로 험한 말이 불끈 튀어나왔다. 사마청, 이충도는 면목이 없어 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노야, 어찌할까요?”
사마청이 고개 들어 물었다. 그 모습에 공노는 쯧, 혀를 찼다. 번듯한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얼룩덜룩한 데다가 울퉁불퉁하여서, 그야말로 사람 얼굴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이충도라고 별다를 것도 없었다. 위지백의 손속은 무자비했다. 일거에 기세를 몰아치더니, 제 속이 풀릴 때까지 계속 다그쳐대었으니. 굳이 따지면, 이렇게 엉망인 꼴임에도 내상 하나 당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용한 일이었다. 공노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 꼴을 하고선, 어쩌긴 뭘 어째?”
“양당이 도착하였으니.”
이충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 뒤로는 이백 무인이 줄지어 있었다. 번뜩이는 눈매에 정광이 가득했다. 소명과 위지백의 길을 막아섰던 흑백양당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한참 늦게 백학당에 닿은 참이었다. 이 정도 무력이라면 백학당을 제압하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이나 다름없으려나. 돌아온 것은 공노의 코웃음이었다.
“헹! 야, 야, 아서라. 아서.”
“허나, 노야.”
공노는 터무니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소림파와 전면전이 걱정되는 바는 아니나. 일이 일인 만큼.”
“뭐? 소림파? 전면전? 우스운 소리 하지 마라. 이 정도로는 너희 놈들 쥐어팬 칼잡이 한 놈 어쩌지 못해.”
공노는 딱 잘라 말했다. 심드렁한 어조라 하나, 가벼운 말은 아니었다. 사마청, 이충도는 물론, 부복한 이백 무인들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일견 모욕적인 언사려나, 다른 누구도 아닌 공노의 말이었다. 공노는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몽상순천도는 그런 칼이야.”
“몽상순천도?”
견문이 짧은 탓인지. 두 사람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공노는 의아한 둘을 남겨두고, 흑백양당이 몰아온 마차로 홱 들어가 버렸다. 뜻은 분명했다. 더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것이다. 또 어찌 고집할 수 있을까. 능력이 안 되는 것은 이미 보인 바이니. 이충도는 고개 숙인 채, 잇새가 부러져나갈 듯이 턱에 잔뜩 힘을 주었다.
“복귀한다.”
사마청은 의기소침하여서 나직이 말했다.
* * *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일이 이렇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갑작스럽다면 정말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위지백은 한숨을 흘렸고, 소명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 사내는 아직 백학당의 객방에 앉아 있었다. 안채까지 내주려는 것을 겨우 만류하고서, 허름하더라도 하루나마 편히 쉬고자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둘의 안색은 하염없이 어두워서 쉬는 사람의 낯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젠장.”
골머리를 부여잡은 끝에 그만 앓는 소리가 흘렀다. 딱히 누군가를 향해서가 아니었다. 들은 소식이 문제였다. 천룡을 운운하는 이들이 물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흑선당에서 다급하게 전해온 소식이었다. 둘 앞에는 문제의 꼬깃꼬깃한 전서 한 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용은 이미 확인했다. 흑선당에서 다른 눈치를 보지 않고 전할 정도이니, 소식의 다급함은 헤아릴 만했다.
“일이 고약한데. 이제 어쩌냐?”
위지백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창틀에 걸터앉은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상황이 못내 고약했다. 소명은 다시금 한숨을 흘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쩌기는 뭘 어째.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붙잡아봐야지.”
남쪽 끝에서 일어난 소식을 북쪽을 거쳐서 들었다. 시차가 얼마나 날지, 아무래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저 서두를 뿐이었다. 소명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서자, 위지백도 부랴부랴 뒤를 따랐다. 짐이랄 것이라고는 달리 없어 가벼운 두 사람이었다. 걸음은 그만큼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백학당주는 물론이고, 여러 문인과 식객들조차 소명과 위지백을 하루만이라도 붙잡고자 했지만, 더는 걸음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소명은 정중히 마다할 수밖에 없었다. 백학당을 나서고 얼마나 내달렸을까. 소명은 불현듯 먼지 흩어지는 휑한 길목에서 우뚝 멈춰 섰다.
시든 수풀이 더운 바람에 잔뜩 고개를 숙이고 맥없이 흔들거렸다. 흙바닥은 작열하는 하얀 태양에 달아올라서 딛고 선 발밑으로 열기가 고스란히 올라왔다. 그는 문득 위지백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응? 왜, 왜 이러냐?”
돌연한 일에 위지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붙든 손아귀가 유독 억세다. 소명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안광이 새삼 일었다. 새파랗게 전광이 번뜩이는데, 위지백은 딱히 이유도 없이 움츠러들었다.
“지금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지.”
“그, 그렇지.”
번뜩거리는 안광은 물론이거니와 목소리조차 매우 진지했다. 위지백은 묵직한 기세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무게를 잡는단 말인가. 불안한 예감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자칫하면 전쟁이나 다름없는 흉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판이다. 그 녀석이 상하면 서천에서 들고 일어날 테고, 그 녀석을 달래지 못하면 동쪽 바닷가가 온통 불바다가 되겠지.”
“그, 그렇겠지. 아니, 그러고도 남겠지.”
위지백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이 말하는 그 녀석은 폐관에 들기 전에도 한바탕 큰일을 저지르기도 했었다. 폐관을 무사히 마친 지금에는 어느 정도일지. 분명 더하면 더할 일이지, 덜할 리야 없다. 위지백은 덜컥 가슴이 묵직하여서는 긴 한숨을 뽑아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한층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래, 내 잘못도 있지. 그래서 어쩌면 좋겠냐. 말해 봐.”
“난 이쪽 일을 붙잡아볼 테니까. 저쪽은 너한테 맡기마.”
“뭘 맡겨?”
“그 녀석. 더 일이 커지기 전에 머리끄덩이를 움켜잡아서라도 붙잡고, 말리란 말이야.”
“윽!”
위지백은 소명의 과격한 말에 질린 소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알았어. 무슨 난리가 일어나더라도. 내 꼭 붙잡아 놓고 있으마.”
따지자면, 그에게도 책임이 적지 않았으니.
소명은 믿는다, 그 한 마디를 다시 남기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따로 향할 곳이 멀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두르는데, 위지백은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나저나, 광동까지는 또 어찌 가야 하나그래.”
애도를 어깨에 걸치고서 어기적 걸었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채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위지백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봐, 광동까지 어찌 가야 하느냐 묻잖아.”
한구석을 또렷하게 노려보면서 다시 물었다. 아무도 없는 곳인데, 그는 분명 누군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쏘아보는 눈길에 드리운 그림자가 잠시 일렁였다. 주저하는 듯한 모습에 위지백은 히쭉 웃으면서 말했다.
“히히, 안 튀어나올 참이면, 다시는 따라오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웃는 얼굴과 달리 서늘한 살기가 어느 한 곳에 집중되었다. 그러자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냉큼 뛰쳐나와 위지백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예이! 제가 모시겠습니다. 대협!”
“흐음.”
위지백은 기세를 거두고서 묘한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부름을 받자마자 달려 나온 것처럼 극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두려운 속내는 어쩔 수 없어서, 고개 숙인 목덜미에 땀방울이 흥건했다. 그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목 뒤에 얹어 있는 듯했다.
눈앞이 마냥 깜깜했다. 은신이랍시고 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 임무는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한 셈이었다.
‘이, 이리 한심할 데가.’
* * *
소명은 다급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무더운 햇볕이 중천에 이를 즈음, 그는 다른 성시에 이르렀다. 낙양이나 허창이 아닌 또 다른 하남의 고도, 개봉부(開封府)였다. 황하의 누런 물결에 면하여서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솔직한 곳이었다. 북송 때에는 황도로서 천하의 중심이었으나, 그 시절은 한참 옛적이었고. 당대에는 크게 쇠락하여서 빈궁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개봉부의 검은 성벽에는 먼지가 그득했다.
소명은 개봉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주작대로를 따라서 걸었다. 슬쩍 고개를 들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새하얗게 쏟아지는 햇볕이 눈가를 찔렀다. 그의 그림자는 발아래에서 짧았다.
“후덥지근하군.”
아닌 게 아니라, 지독한 무더위였다. 주변에 다른 인적은 전혀 없었다. 길가에서 햇빛을 받고 있는 것은 소명 한 사람이 고작이었다. 어디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그늘진 곳에서 지친 몸을 쉬며, 날 저물기는 기다리는 듯했다. 습한 바람은 열기를 남겼고, 누런 먼지가 발목에 휘감았다가 흩어졌다.
어찌하면 좋을까.
소명은 대로의 복판에서 잠시 고민했다. 이곳 또한 하남이었지만, 소림파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소림과 더불어서 천하무림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또 다른 일세가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소명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돌아갈 이유도, 여유도 없는 판이다. 그는 내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로에서 한참을 돌아서 외진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반쯤 허물어지다시피 한 관제의 묘였다. 규모는 실로 상당하여서, 고관대작의 저택과 비교할 만했다. 옛적의 번성을 헤아릴 만했지만, 지금은 쇠락하고, 또 쇠락하여서 기와 하나, 기둥 하나가 용케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무너질 듯한 문가에는 시커먼 거지 서넛이 그늘에 드러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보기에는 그저 거지 소굴로 보일 뿐이었다.
소명은 차분한 눈으로 거지소굴인 관묘의 황폐함을 잠시 바라보았다. 거대함과 남루함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에 더하여서 세월마저 묵직하게 짓눌러서,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은 이유 모를 위압감마저 들었다.
소림파와 더불어서 천하를 아우르는 일세, 천하 거지의 방회(幇會)인 개방(丐幫)의 총타가 바로 이곳이다.
‘개방’이라는 이름은 송조 때에 시작하였으나, 이전에는 궁가라는 일맥이 있었다. 시작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오래었던 일맥이 세상에 나서서 천하의 거지들을 아우르면서 개방이 시작한 셈이다. 당대에는 개방의 걸개가 못해 십만을 헤아리며, 말 그대로 천하의 방방곡곡,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