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걸개대사(乞丐大事)
총타의 거지들은 외인이 다가왔음에도 흘깃 눈길을 주었을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돌아누워 버렸다. 자칫 잘못 찾아왔는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소명은 거지들을 둘러보았다. 안내도, 제지도 않을 모양이다. 그는 곧 닳고 닳은 돌계단을 밟고서 정문의 문지방을 넘었다. 그러자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거적이었다. 황량할지라도 드넓은 전정에는 수십, 수백에 달하는 거적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은 거적마다 퀴퀴한 냄새가 일었다. 어지간한 이라면 당장 코를 움켜쥐련만, 소명은 딱히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그저 흘깃 눈길을 주었을 뿐이었다.
개봉부뿐만이 아니라, 근동의 모든 거지가 다 여기에 모여 있는 듯했다. 널어놓은 거적 아래에는 노소를 구분할 것 없이 여러 거지가 각자 드러누워서 한낮의 단잠에 빠져 있었다. 다른 무엇을 하는 거지는 없었다. 하나같이 졸고, 또 졸았다. 소명은 곧 고개를 돌렸다. 잠을 방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까이 처마에 털썩 주저앉았다. 쏟아지는 햇빛을 고스란히 받는 자리였다. 그늘진 곳은 죄 거지들이 드러누운 판국이라, 달리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소명은 고요한 낯으로 눈을 감았다.
분명 일은 급하다. 마음은 요동친다. 그러나 개방 거지를 재촉한다고 될 일은 없었다. 애써 다잡으며, 기다릴 뿐이다.
“후우.”
짧게나마 뱉는 숨소리가 묵직했다.
소명이 정문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드러누운 네 거지는 번쩍 눈을 치떴다. 검댕이 가득하여서 지저분한 얼굴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언제 졸았느냐는 듯이 심각한 낯으로 문 너머에 귀를 기울였다. 하염없이 방만한 듯해도, 엄연히 일방의 총타였다. 경계가 소홀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귀 기울이는 거지들의 낯빛이 언뜻 기이했다. 코를 쥐어 잡고 뛰쳐나오든, 아니면 수상한 짓거리를 해야 마땅하련만. 안쪽에서 다른 기척이 없었다. 거지들은 드러누운 채 눈동자를 굴리다가, 손짓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처마 아래에 주저앉았다.’
‘다른 움직임은 확실히 없어.’
‘요상한 일인데.’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도 움직이기가 뭣하다. 오히려 낭패에 가까웠다. 꼼짝도 못 하고 외인의 움직임에 계속해서 집중해야 했다. 마냥 기다려야 하니. 잠든 척 드러누운 모습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거지들 속이야 어떻든. 정문 기둥에 들러붙은 매미가 한껏 울어 젖혔다. 늦더위 탓인지,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중천에 이른 햇빛이 서서히 기울었다. 그제야 거지들도 잠에서 깨어나 그늘 밖으로 기어 나왔다. 지저분한 눈가에는 여전히 졸음이 가득했지만, 꿈지럭거리며 각자 몸을 풀었다. 굶지 않으려면 이제부터 또 부단히 동냥질하러 다녀야 했다.
부스럭거리며 주변이 소란했다. 소명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내 햇빛을 받고 있었지만, 그리 힘겨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여상한 태도로 거지들이 오가는 것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거지들은 주저앉은 소명에게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서로 무리를 지으면서 개봉 거리로 나섰다. 우르르 지나는 통에 일어난 먼지가 뽀얗다. 소명은 휘휘 손을 저어 먼지를 밀어냈다. 앞마당은 이내 텅텅 비었다. 수백에 이르는 거지가 한 번에 빠져나갔으니, 폐허 꼴인 관제묘는 새삼 을씨년스러웠다.
어찌하면 좋을까. 소명은 자리에 앉은 채 잠시 고민했다. 그럴 새,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그리 계실 요량이오?”
고개를 돌리자, 몇 걸음 앞에서 거지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문간에서 졸음 시늉하던 거지였다. 그는 짙은 눈썹을 찌푸린 채, 소명의 위아래를 살폈다. 경계하는 속내가 솔직했다. 소명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두 손을 맞잡으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소림 속가,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러시구려.”
거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귓전을 긁적거렸다. 무슨 볼일인지 딱히 묻지도 않는다. 개방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것일 테니, 아쉬운 사람이 먼저 말문을 열든지 할 일이다. 그리 배짱 아닌 배짱을 부리는데, 다시 놀란 소리가 거지의 뒤에서 왈칵 터졌다.
“엑! 소명이라 하시면, 소림의 소명이시란 말씀입니까?”
“응?”
소명은 의아하여 고개를 들었다. 마냥 심드렁한 꼴로 있던 거지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 쓰러질 듯한 쪽문 아래에서 다른 거지가 놀란 눈으로 있었다. 제법 위치가 있는 거지인 모양인지, 문지기 거지가 움찔하며 꼿꼿한 허리를 수그렸다. 뭔 일인지, 동그랗게 뜬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뭔가 잘못을 저지른 듯한데, 소명이 다시금 두 손을 맞잡았다.
“예, 소림 제자 소명입니다.”
“아이쿠, 아이쿠야, 당대의 용문제자가 직접 본타를 찾다니. 허허, 이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려. 이 사람은 개방의 우만이라 합니다.”
우만이라 밝힌 거지는 배시시 웃으며, 냉큼 앞으로 나섰다. 그도 두 손을 맞잡아 부단히 흔들어댔다. 뒤로는 배짱부리던 거지의 무릎을 냅다 걷어찼다. 윽! 소리가 울렸지만,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 자 이쪽으로 드시지요. 용문제자께서는 진즉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것이.”
소명은 머쓱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토록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이 싫어 굳이 용문 운운하지 않은 것인데. 과연 개방은 개방인 모양이었다. 귀가 밝고, 눈이 밝아서 세상 동냥보다 엿듣고, 귀담아듣는 것이 더욱 중하다고 하더니. 소명이라는 흔한 이름 두 글자로 설마 용문제자의 일까지 떠올릴 줄은 몰랐다. 여기에 난데없이 면박을 듣는 것은 소명을 처음 맞이했던 덩치의 거지였다. 그는 배운 값도 못한다면서 남은 문지기 거지들에게 마구 구박을 들어야 했다.
“야, 이 무식한 놈아.”
“지금 천하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을 그래, 몰라보고 무슨 배짱 질이야.”
“아니, 그냥 소림 제자라고 하니까.”
“그럼, 나 용문제자요 하고 어디 써 붙이고 다닌다던.”
“요놈의 자식. 요거요거. 아주 헛배웠어.”
문가에서 마구 구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민망하련만, 우만은 그저 살살 웃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풀어놓았다.
“헤헤, 저놈은 문을 지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견문이 박한 놈입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헤헤.”
“저는 괜찮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도 잘못이 있겠지요.”
“헤헤.”
소명이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음을 알고, 거지 우만은 머쓱하여서 머리를 벅벅 긁적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지붕 높은 관제묘에 들어섰다. 내당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복잡할 것은 없었지만, 무엇보다 퀴퀴한 냄새가 고약했다. 너른 앞마당에서 널어놓은 거적의 온갖 냄새가 수십 년은 족히 더 묶은 듯했다. 강호에서 말하기를, 자고로 개방을 적대할 적에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십만방도라 일컫는 끝없는 머릿수나, 그만큼 숨어 있는 기인이사가 아니라, 고약한 냄새라 하는데.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우만은 관제를 모신 본당을 빙글빙글 돌아서 뒤채의 한 귀퉁이로 향했다. 그는 공연히 마음이 쓰였는지, 머쓱한 얼굴로 소명을 돌아보았다.
“헤헤, 긴한 일이 있어서 여러 어른은 다 자리를 비우신 터입니다. 여기 계신 분이 지금 총타의 큰 어른인 셈이지요.”
변명처럼 하는 말이었다. 그러고는 떨어져 나갈 듯이 문짝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노야, 소림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답은커녕,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사람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거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층 조심하면서 문가로 다가갔다.
“저어, 노야?”
우만은 주춤거리다가, 마지못해서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크게 긴장한 낯이었다. 돌연, 문이 왈칵 열리며 우만의 면상을 거세게 후려쳤다. 퍽! 둔탁한 소리가 호되게 울렸다. 우만은 으악! 하고 얼굴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았다. 문틈으로 표주박처럼 생긴 노인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 한복판이 둥그렇게 빠져서 민머리가 햇빛에 반짝거렸고, 주변으로는 백발을 산발하여서 펄럭였다. 고희(古稀)는 훌쩍 넘긴 듯한데, 비틀린 콧망울에는 심술보가 그득했고, 우묵 들어간 입매에는 지금 못마땅한 기색이 솔직했다.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쇳소리인 양 카랑카랑하여서, 목소리가 날카롭다. 그러자 우만은 붉게 달아오른 콧대를 부여잡고서 배시시 웃었다.
“헤헤, 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손님이 왔으면, 온 거지. 그게 내랑 뭔 상관이야?”
“아이코, 지금 총타에 어르신이라고는 노야뿐인데 그럼 어쩌겠습니까.”
“뭐잇?”
혼자라는 말에 노걸개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희끄무레한 안색이 대번에 붉게 물들었다. 노인은 밖으로 뛰쳐나와서는 뼈다귀만 있어 앙상한 손가락을 들어 이쪽저쪽을 마구 가리켰다.
“아니, 건넛방에 두더쥐는? 뒷방에 지네는? 저짝 독사 늙은이는!”
사람을 뜻하는 것인지, 다그치는 이름이 다 괴상하다. 노걸개가 마구 따져 묻는데, 우만은 소명의 눈치를 보면서도 변죽 좋게 줄줄 읊어댔다. 누구는 무슨 일로 어디를 간지가 못해도 반년이요, 누구는 세상 떠난 지가 한참인데 새삼 무슨 소리냐는 둥, 말이 줄줄 길어지는 판이었다. 그래도 우만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노걸개는 성미가 참으로 고약도 하여서, 아주 사소한 핑계 하나만 붙잡아도 도망해버리거나, 내처 나 몰라라 해버리는 까닭이었다.
그런즉, 우만이 조목조목 말하고 나자 표주박 노인은 걍팍한 입매를 비틀어 물고서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이었다. 노인의 화살은 이내 멀뚱히 있는 소명에게로 향했다.
“아니, 그래. 대체 얼마나 잘난 놈이라고, 개방의 큰 어른인 내가 나서기까지 해야 하는 거냐? 어디 방장이라도 행차하셨다니?”
“용문제자입니다요.”
“뭐? 뭔 제자?”
“본산의 용문제자라니까요.”
노걸개가 한껏 쭈구렁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우만은 더욱 숨죽여서 속삭였다. 소명의 눈치가 더욱 보이는 판이다. 그 난처함을 헤아렸는지, 소명이 한걸음 나섰다. 그는 노걸개에게 공손히 두 손을 맞잡으며 고개 숙였다.
“소림 제자, 소명이라고 합니다.”
노인은 모난 눈으로 소명을 돌아보았다. 별다른 감흥 없는 눈초리로 소명의 위아래를 살폈다. 아무리 뜻이 없다고 해도, 흘겨보는 눈매는 고약하기도 했다.
“소림 제자?”
“용문, 용문제자라고요.”
우만이 거듭 소곤거렸다. 당대의 용문제자가 어떠한 인사인지는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었다. 위태한 등용문을 구하고, 한 주먹에 마인을 때려눕혔다던가. 듣기로는 백보권을 복원하였다고도 하니. 그 이름값이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걸개는 심술 달린 콧대를 이리저리 찌푸리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뱉었다.
“이런 염병할! 알았어, 알았다고. 이놈아! 귀 간지러워, 고만 좀 속닥거렷!”
빽! 소리 한번 지르고. 노걸개는 곧 삐딱하니 고개를 기울인 채, 흰 눈으로 소명을 노려보았다.
“그래, 대단한 소림 용문제자가 뭔 일로 거지 판에 행차하셨나그래?”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명은 그 앞에서 달리 마음 상할 것도 없이 웃었다.
“도움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그래, 도움이시라. 무슨 도움?”
“광동의 일입니다.”
노걸개의 안색이 일변했다. 표정이 싹 사라졌고, 기울인 고개가 천천히 바로 섰다. 소명이 말한 광동의 일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노인의 어깨에서 곧 삼엄한 기운이 일더니, 슬금슬금 주변을 잠식해 들었다.
소명은 내심 ‘과연’ 하며 감탄했다. 개방의 노고수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일시에 발목을 휘감으면서 간단히 상대를 제압할 만했다. 그러나 소명은 달리 내색하지 않고 노걸개의 기세를 그대로 마주했다.
개방의 뒷방 장로, 모골개(侮骨丐)는 눈을 얇게 떴다. 경계가 솔직하다. 우만 또한 훌쩍 물러나서는 새삼 긴장한 눈으로 소명을 노려보았다. 둘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에 얼마나 있었던지, 여러 거지가 불쑥불쑥 고개를 들거나 모습을 드러냈다. 삽시간에 포위당한 형국으로 볼품없는 뒷마당이 다시없을 호굴이 된 셈이다.
과연, 천하제일방. 소명은 흔들림 없이 마주한 모골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모골개는 잠시 우물거리다가, 느릿느릿 말문을 열었다.
“그래, 광동의 일이라. 예까지 찾아와 광동 운운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
“예, 노사(老師).”
개방의 제일사명은 협의지도(俠義之道), 제세안민(濟世安民), 그리고 마도재래(魔道再來)를 막아내는 일이었다. 개방의 시조로부터 이제껏 단 한시도 소홀하지 않았으니. 개방의 명운이 위태할 지경이 되어서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개방을 천하제일방이라 하는 것이고, 개방의 걸개를 달리 협개라 일컫는다. 그런즉, 광동에서 마녀가 등장하였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빠르게 손을 쓴 참이었다. 이런 때에 소명이 찾아와서 광동의 일을 거론하였으니. 모골개는 경망스러운 모습을 거두고, 한층 신중하여서 물었다.
“소림의 용문제자가 광동의 일을 입에 내었으니. 그래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
“화염마녀라 일컫는 그 아이, 결코 마도의 마녀가 아닙니다. 노사.”
“마녀가 아니다? 자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물론이지요.”
“허허, 이것은 자칫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네.”
모골개는 은연중에 소명을 압박했다. 여부에 따라서는 소림 본산에 따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소명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유심히 지켜보던 모골개는 곧 픽,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싯누런 가래침을 바닥에 탁 내뱉고는 고대로 주저앉았다.
“좋아, 어디 한번 들어나 보세.”
기회를 주는 셈이다. 소명은 정중하게 고개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마도는 다른 곳에서 암약하고 있습니다.”
“으잉!”
모골개라도 이참에는 시큰둥할 수 없었다.
야윈 눈을 한껏 치떴다. 심술이 가득한 볼살이 절로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