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걸개대사(乞丐大事)
위지백은 세차게 발을 굴렀다. 꽝! 소리에 뱃전이 크게 들썩였다. 물결에 큰 돌을 던진 것처럼 나무바닥이 덜그럭 요동쳤다. 황가련 무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위지백은 날이 선 눈초리로 그네들을 둘러보고는, 곧 넋을 놓아 버린 황보도옥을 돌아보았다.
“거, 여기 이놈들을 부리시구려. 어찌 되었든 간에 내 후딱 내려가 봐야 하니.”
“예,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놀란 와중에도, 황보도옥은 과연 여걸이라.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저앉은 이들을 다그치듯이 일으켜 세워서는 각자 일을 맡겼다. 허투루 할세라, 그래도 상세가 덜한 선부들이 뒤에서 일을 시키고 거들게 했다. 소란이 그렇게 잦아들 참인데, 황보도옥은 부랴부랴 위지백을 다시 찾았다.
위지백은 처음의 자리에 그래도 주저앉아서 난간에 턱을 착하니 올리고 있었다. 무기력하여서, 촌각 전에 무용을 뽐낸 이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황보도옥은 한숨을 삼켰다.
‘기인은 기인이구나.’
“왜 또?”
잠시 주저하는데, 위지백이 먼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꺾고서 황보도옥을 빤히 보았다. 일은 다 수습한 마당에 무슨 다른 볼일이 있을까. 황보도옥은 바로 마음을 다잡고는 당차게 말했다.
“기왕에 힘 써주신 것, 한 번만 더 도와주시지요.”
“응? 뭔데 그러나?”
“물길이 막혔습니다.”
위지백은 영 시큰둥한 눈초리였지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 난간을 밟고서 훌쩍 선두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보신경이다. 아무리 큰 배이고, 또 멈춰 있다고 하지만, 흐르는 물결에 뱃전이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과연이라고 해야 할지, 황보도옥은 후미에서 멍한 눈으로 위지백을 바라보았다. 위지백은 발끝이 채 뱃전에 닿기 직전에 무광도를 움켜쥐었다. 벼락같은 발도와 동시에 요동치는 도경이 거리를 격했다. 배 아래에 뒤엉켜 있는 뗏목의 파편 따위가 그 일도에 산산이 박살 나고, 온갖 파편이 높게도 튀어 올랐다. 뱃전에서 선부이고, 황가련이고 떠나, 모두 망연한 눈으로 비산하는 나무 파편을 바라보았다.
강남불패도를 상대할 적에는 너무도 지고한 경지인지라, 범인으로서는 어찌 짐작할 수 없었으나, 지금의 일도로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서장제일도’는 그저 새외고수를 칭하는 간단한 이름이 아니었다.
능히 천하의 고수에 버금가는 것이니.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강량은 그 모습에 짧은 숨을 흘렸다.
“이런, 젠장.”
위지백은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진력은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강량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우르릉 소리가 들리고는 멈춘 대선이 강물을 타고 다시 흘렀다. 바람을 한껏 받아서 높이 세운 돛이 펄럭였다. 여기서 울상은 도망할 기회를 보던 세작이었다. 일이 영 뜻대로 되지 않는 통에 마냥 시무룩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바탕 난리로 쌓인 짜증을 해소한 모양이라, 계속 부르며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뱃길은 목적한 곳에 순조롭게 닿았고, 위지백은 광동 땅에 더욱 가까이 이르렀다. 다만, 그의 생각대로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가지는 않았다.
* * *
실로 염천(炎天)이다. 맑은 하늘에서 백일(白日)이 뜨겁게 이글거렸다. 지친 수목이 마른 가지를 길게 늘어뜨렸다. 무성한 잎사귀가 누렇게 타들어갔다. 그렇게 뻗은 산세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호남과 광동의 경계를 짓는 남령산맥(南嶺山脈)이다. 다섯의 산봉이 이어져서, 달리 오령(五嶺)이라고도 하는 산줄기로, 화중(華中)과 화남(華南)을 구분하기도 했다.
소명은 남령산맥의 깊은 산세를 묵묵히 걸었다. 발걸음에 한껏 삭은 수풀이 흔들거렸다. 그는 크게 먼지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크게 지치지도 않았다. 차분한 걸음이었다. 그렇게 무성한 수풀을 조용하게 넘어서자, 소명은 후, 짧은 숨을 흘렸다.
광대하게 뻗은 산줄기가 멀리 보였다. 이제야 광동이었다. 하남의 개봉에서 쉴 틈도 없이 걸음을 재촉한 끝에 못해 삼천리 길을 주파한 셈이었다. 아무리 소명이라도 한숨이 절로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가까이에는 거지가 있었다. 그것도 수많은 거지였다. 일백, 이백, 아무리 그래도 일천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어디서 그리들 모였는지, 수많은 거지가 하나같이 그늘을 찾아서 나른한 모양새로 퍼질러 있었다. 개봉부의 개방 총타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소명은 잠시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기 거지들이야말로, 개방의 정예라고 할 수 있었다. 광동 마녀를 잡기 위해서 천하 방방곡곡에서 결집한 개방의 고수들, 용호풍운이다. 모골개와 개방 사걸은 그들에게 소식을 알리고자 먼저 나선 터라, 여기에 서 있는 것은 소명 혼자였다. 방만하기 이를 데가 없는 용호풍운의 모습이었지만,
“좋아, 그만 가 볼까.”
소명은 거지들 모습을 둘러보고는 곧 앞으로 나섰다. 걸음은 당당하여서, 주저하거나, 움츠러드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한참 게으름에 취해 있던 거지들은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소명이 다가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죽장이나, 두 주먹, 두 발로 일제히 땅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무슨 의식과도 같은 것인지, 쿵쿵, 울리는 소리가 깊은 산세를 휘저었다. 그 소란 속으로 소명이 들어섰다.
‘환영 인사치고는 과격하군.’
소명은 한층 입매를 비틀었다. 마구잡이로 두드리는 듯했지만, 내밀한 박자가 있어서 귀를 흔들고, 둔중한 울림이 쉴 새 없이 내기를 뒤흔들려 했다. 언뜻 두서없는 소음에 지나지 않은 듯하나, 경지에 이른 음공(音功)이라 할 수 있었다. 소림파에서 전하는 고심종(叩心鐘)이나, 불문사자후(佛門獅子吼), 혹은 항마음(降魔音)이 이에 속했다. 개방의 만걸가(萬乞歌)라 하는 것인데. 굳이 소명을 앞에 두고 이 소란을 보이는 것은 요컨대, 시험을 해 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일제히 일어나는 음파는 계속해서 소명을 짓눌렀다. 한걸음, 또 한걸음, 거지 무리 속으로 파고들수록 압력은 배가 되었고, 그 배가 되었다. 그러나 소명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다. 만걸가의 공력에 마주 대거리를 하거나,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허공에 힘을 쏟아 내는 것인 양 한참 고요하여서, 제아무리 대단한 만걸가라도 차츰차츰 기운이 다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소명이 마냥 태연한 것은 아니었다. 깊이 품은 공전무융의 공력이 진력을 드러내어서, 만걸가의 공력을 낱낱이 상쇄하는 까닭이었다.
일천여 거지를 가로질러, 소명은 구석진 자리에 이르렀다. 그곳은 백발이 성성한 늙은 거지 여럿이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모골개도 그중 하나였다. 모난 눈초리가 잠시 소명에게 향했다가, 이내 히죽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계피학발이라는 말 그대로 왜소한 거지 노인이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몸을 가누는 것도 힘겨워 보일 정도로 노쇠하여서, 주변 노인이 오히려 나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개방의 용두방주이며, 당대의 뇌공이 눈앞에 있는 비루한 거지 노인이다.
“소림 속가, 소명이 방주를 뵙습니다.”
소명은 공손히 두 손을 맞잡으면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뇌공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계피학발의 앙상한 모습에서 천하를 아우르는 고수의 풍모를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주름 가득한 노안은 백탁이 가득했다. 까마득한 세월이 고스란했다. 노인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얘기는 들었네. 그대가 소림의 용문제자로군. 흘흘, 소림에서 용문의 이름을 듣다니. 이게 몇 년 세월만이던가? 참 오래도 살았어.”
“그러니 그만 물러나셔서 편히 여생이나 보내시지요.”
“그렇지, 그렇지. 이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다 늙어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고 그러십니까.”
“그래요, 괜히 우리까지 우르르 끌고서.”
주변의 거지 노인들이 이죽거리며,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하나같이 불만이 그득했다. 그러자 뇌공은 헐헐 웃었다.
“너희 녀석 중에서 하나라도 나서줘야, 이 늙은이가 그만 물러날 것이 아니더냐.”
“크흠.”
괜한 말을 꺼낸 셈이었다. 뇌공의 면박에 먼저 말 꺼낸 거지 노인은 헛기침을 흘렸다. 말인즉, 누구라도 물려줄 놈이 있어야 물러나지 않겠느냐는 것이니. 뇌공은 새삼 번뜩이는 눈매로 둘러앉은 다섯 노인을 흘겨보았다.
행여 뇌공과 눈을 마주할세라, 다섯 노인은 재빠르게 고개를 휘휘 돌리며 딴청이다. 모골개는 슬쩍 물러나서는 키득키득 웃었다. 용두방주 뇌공의 애제자이자, 또한 개방의 오랜 골칫거리인 다섯 마리의 이무기, 오교룡(五蛟龍)이 여기 다섯 노인이다. 젊었을 적에야 각자 영명 넘치는 별호로 불렸지만, 그 세월이 벌써 반 백여 년에 이르니 달리 기억하는 이도 드물었다. 이제는 같은 개방에서도 그저 교룡이라 칭할 뿐이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딱 그네들의 처지였지만, 말하는 것과 달리 용이 되고 싶어하는 이는 이들 사형제 중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스승인 뇌공이 일평생 동안 그리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뭘 굳이 그네들까지 해야 하는가 싶은 까닭이었다. 그 속내가 참으로 빤히 보이는지라, 뇌공은 끌끌 혀를 찼다. 탁한 눈매를 샐쭉하게 뜨고는 주저앉은 다섯을 흘려보자, 하나같이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속 긁는 소리를 해 대는 것도 실상은 그만 좀 놓아달라고 하는 것이니. 다 늙어서도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성질머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냥저냥 딴청 피우는 기색이 어찌나 얄밉던지, 뇌공은 급기야 노성을 터뜨렸다.
“너희 놈 중 아무라도 그냥 맥을 이어주면 아니 되겠느냐? 다른 놈들은 목숨 걸고 달려들 일인데, 왜 너희 다섯 놈만 죽자고 싫다는 게야?”
소명이라는 외인이 앞에 있건만, 다 늙은 거지는 맨 손으로 흙바닥을 마구 두드렸다. 야윈 몸이 무너질 것처럼 요동치면서 성질을 터뜨리는 모습은 남에게 보일 만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먼 길을 함께해온 모골개도 짐짓 민망한 모양인지 고개를 모로 돌리고 모른 체했다.
왁자한 일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에 뇌공이 제풀에 지쳤다. 노인은 더 말하기도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앙상한 목뼈가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멀뚱히 서 있는 소명을 향해서 눈을 돌렸다.
“그래, 용문제자가 무슨 용무로 개방대사에 굳이 찾아오셨는고?”
치를 떨어대면서 노화를 터뜨릴 때에는 언제고, 용두방주는 히죽 웃었다. 한순간에 돌변한 노인의 모습은 기가 찰 정도라, 개방 거지들이 아무리 철면이래도, 이때만큼은 하나, 둘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마주한 소명은 쓴웃음을 잠시 억누르고 새삼 고개를 숙였다.
“방주께 삼가 청하고자 왔습니다.”
“오호, 청이라?”
“제자들을 거두어주십시오.”
방주 뇌공은 조용했다. 그는 딱히 성을 내지도,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묻는 표정 그대로 소명을 빤히 볼 뿐이었다. 세월에 백태 어린 눈동자가 물끄러미 소명의 눈가를 헤아렸다. 희뿌연 시야에 무엇이 보일까마는 소명은 뇌공의 눈초리가 자신의 속내를 깊이 파고드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제자들을 거두어달라. 다시 말하지만, 개방대사일세. 자네는 소림의 이름으로 개방을 겁박하려드는 겐가?”
“제가 어찌 감히.”
소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턱 밑에 덥석 살기가 와 닿았고, 만걸가처럼 은근하게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세가 목덜미를 짓눌렀다. 이것이 뇌공이다. 과거에 무신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 고수의 진면목인 셈이었다. 그러나 마주하는 소명에게 흔들림은 없었다. 그는 흔들리는 앞 머리카락 사이로 곧은 눈길을 내비쳤다.
“광동에서 소란을 일으킨 화염마녀는 마도의 후인이 아닌 까닭입니다.”
“응? 그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뇌공은 백탁 어린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그는 이내 손을 내저었다. 어느 틈엔가 사위를 점하고 있던 개방 거지들이 순순히 기세를 풀고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마냥 나른하여서 방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오교룡 또한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언제든 손을 쓸 채비를 갖춘 참이었다.
“마도의 인물이 아니다? 화염마녀라 불리는 이가?”
개방의 행사였다. 경솔하게 움직일 리가 만무했다. 지나온 행사를 낱낱이 살폈고, 일어난 피해의 전후사정을 파악하기에 소홀하지 않았다.
천산에서부터 비롯한 행보와 지난 자리에서 일어난 온갖 소동을 헤아렸을 적에, 마인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소림의 제자가 그런 이를 비호하려 들었으니. 뇌공은 물론이거니와 개방 거지들은 도끼눈을 뜬 채, 소명을 노려보았다. 그네들 눈초리에는 의심마저 어렸다.
소명은 쏘아보는 눈초리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더욱 차분하여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그 아이?”
“산의 주인입니다. 노방주.”
“산주, 산주, 화염마녀. 산주, 화염.”
방주는 거듭 되뇌었다. 그러자 오교룡 중 한 명이 슬그머니 일어나 귓가에 속삭였다. 소곤거리다고 하지만, 앞에 앉은 소명도 똑똑히 들을 정도의 목청이었다.
“서천 양대 전설, 화염산주를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음, 그래, 그렇지. 양대 전설.”
그제야 방주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천산을 거쳐서 온 행보와 불길이 마구 일어나는 요술에 대해서도 헤아릴 만했다. 그러나 의문이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방주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의아함을 솔직하게 드러내었다.
“좋다. 내 양보하여서 자네의 말을 믿는다고 하지. 그렇다면 소림의 용문제자가 무슨 인연이 있어서 화염산주의 행방을 짐작하고 있단 말인가?”
노인의 의문은 깊고도 날카로운 바가 있었다. 무학의 조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소림사, 그곳에서도 특히 인정하는 것이 바로 용문제자였다. 소림사의 용문제자가 무슨 연유로 서천의 전설인 화염산주와 인연을 맺었으며, 또한 그의 편을 들고자 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가 뒤엉킨 일이었다. 결코, 개인의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소명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일도 아닐뿐더러, 굳이 감추고자 할 것도 아니었다. 소명은 속을 떠보는 듯한 뇌공의 탁한 눈길을 받으며 새삼스럽게 다시 두 손을 맞잡았다.
“응? 뭐하자는 게냐?”
“다시 인사 올립니다.”
소명은 소림 용문제자가 아닌, 서역의 이명(異名)을 새삼 밝혔다. 슬쩍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장중하다. 속삭일 듯 낮은 한 마디에 뇌공은 처진 눈꺼풀을 번뜩 치켜들었다.
“이런 용문제자 운운하기에 새끼 용인 줄 알았더니.”
이상한 침묵이 이어졌다.
소명은 태연했고, 뇌공은 오만상을 쓴 채 말이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개방 거지들은 쉽사리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오교룡은 소명과 같이 온 모골개 장로를 향해서 연신 눈짓했다.
‘뭐야, 뭔데? 무슨 일인데?’
모골개라고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사정 모르기야, 그도 매한가지였다.
뇌공은 눈을 얇게 떴다. 화염산주에 대해 더는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일이 문제였다.
“육가에서 그것을 몰랐을까?”
“적어도 마도가 아님은 알았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어라고 우물거릴수록 뇌공의 노안에는 차츰차츰 그늘이 짙어갔다. 어느 시름이 깊어가는 듯했다. 그도 잠시, 뇌공은 퍼뜩 짙은 눈썹을 사납게 치켜들었다.
“육가, 이놈의 것들이 감히 장난을 치고 있단 말이지.”
달리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뇌공, 이미 세수가 백수를 훌쩍 넘긴 강호의 노괴물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탁한 눈동자는 그대로였지만, 그 아래에 요동치는 격랑을 감히 헤아리지 못할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어이쿠, 일 났다!’
뇌공 가까이에 있는 개방 거지들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