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광동풍운(廣東風雲)
서천백일(暑天白日)이라, 하얗게 이글거리던 햇빛이 뉘엿뉘엿 저물었다. 붉은 노을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그래도 남방의 더위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와 끈적이는 바람이 높이 세운 깃발을 흔들어놓았다. 불구덩이가 옆에서 이글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의 열기는 힘겨웠다.
이곳에 광동 토박이 아닌 자가 없건만, 다들 끈적한 땀을 훔쳐내면서 불평했다. 여기서 마음 편히 몸을 쉬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힘겨운 날에도 소식은 다급했다.
길을 얼마나 재촉하였던지, 소식을 들고 온 전령은 숨이 넘어갈 듯했다. 광동의 끝에서 끝을 하루 만에 가로지른 소식이었다. 그리고 짧은 밀마(密嗎)를 확인하는 순간, 움켜쥔 손이 흔들렸다.
한번을 보고, 두 번을 다시 보아도,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소식의 호오(好惡)를 떠나 전혀 뜻밖의 일이어서, 한참이나 다시 확인할 정도였다. 그는 이내 밀마가 적힌 쪽지를 힘주어 그러쥐었다.
“개방이 물러났다?”
생각지 못한 일이다. 아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다른 곳도 아닌 개방에서 마도의 존재를 확인하지도 않고 발길을 돌리다니. 손의 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밝힌 등잔불빛이 갈색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광동육가의 소가주, 육기였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서, 강호에서는 그를 두고 무정장안(無情藏眼)라고도 하였지만, 지금에는 도리가 없었다. 복잡한 심사가 눈빛에 고스란했다. 광동 땅에서 육씨의 칠성흑기(七星黑旗)를 앞세우고도 이렇게 지지부진하다니. 그는 입매를 비틀었다.
문제가 일어난 춘양에 이르고 벌써 달포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뾰족하게 수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육기에게 주된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등잔 심지에 매달린 불꽃이 흔들거리며 그의 눈을 잡아끌었다.
십삼분가의 폐허를 밟고 섰을 때만 하여도, 광동육가와 그를 따르는 광동 남무림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특히 남칠문(南七門)이라 일컫는 일곱 문파는 그야말로 정예를 이끌었다. 그런즉 길어봐야 하루면 정리될 일이라 여겼건만. 얼마나 가당치 않은 생각이었던가.
“화염마녀, 그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니.”
비틀린 입매에서 헛웃음이 절로 새었다.
마녀는 폐허의 검은 흙을 밟고서 나타났다. 흑단 같은 짙은 머리카락을 산발하고서, 아이의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늘어뜨렸다. 기이한 차림새였으나, 절세가인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 자신조차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으니. 그저 약간의 무공을 지닌 강호의 여인이라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여인이 하얀 손을 가볍게 치켜드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장난처럼 내젓는 손짓을 쫓아서 시뻘건 불길이 일천 장 높이로 치솟아 하늘을 태웠다. 인간의 무력은 그녀 앞에서 일체 무용했다.
어찌 피해를 감내하고서 불길을 뚫었지만, 마녀의 곁에는 남다른 고수가 둘이나 있었다. 마녀처럼 방문좌도(傍門左道)에 가까운 이능(異能)을 지닌 마도의 고수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고수는 분명 정종의 공력을 바탕으로 했다. 그 내력까지 헤아릴 수는 없었다. 한쪽은 섭선으로 최소 무경을 이루어낸 장년인이었고, 다른 쪽은 청년 검수로서, 공력이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춘양의 여러 민초가 있었다. 기껏 돌이나 던지고 흙모래나 끼얹어 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거들어대니, 또 그러한 위협이 없었다.
그런즉, 광동을 뒤흔들 만한 무력을 모아 놓고도 날짜만 헛되이 흐르고 있었다.
육기는 더운 숨을 흘렸다. 처한 상황을 외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육가의 소가주에게 마땅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상황을 헤아릴수록 자신의 부족함이 성큼 다가온다. 그는 강인한 턱을 천천히 짓누르며 쓸어내렸다. 그리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기가 있는 곳은 규모는 상당했지만, 퇴락한 내실이었다. 육가의 소가주가 머무르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급하게 오색 비단 천을 켜켜이 늘어뜨렸지만, 사이로 검댕 가득한 벽이 엿보였다. 문가에도 문짝은 온데간데없어, 비단 자락으로 대신했다. 육기는 천을 치우고 밖으로 나섰다.
흐린 달빛 아래에 일군의 숙영지처럼 여러 천막이 줄지어 자리했다. 좌우로 타다 남은 폐허가 위태하게 서 있었다. 바닥에는 불탄 흔적이 역력했다. 본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높은 화려한 거리였으나, 그 화려함은 모두 잿더미에 파묻혔다.
육기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십삼분가가 있던 자리였다. 광동 곳곳에 흩어져 있는 광동육가의 사업장 중에서 최근에 조성하였고, 규모 또한 특출 난 곳이었건만, 한 사람의 힘으로 이만한 거리가 전소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번을 서던 무인들이 육기의 모습을 보고는 부랴부랴 고개를 숙였다.
“소주(少主).”
육기는 다른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그는 가까운 또 다른 전각으로 향했다. 그가 처소로 쓰는 곳처럼 반쪽이나마 겨우 남은 전각이었다. 무너진 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검게 그을린 기둥이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곳저곳에서 가져다 갖추어 놓은 탁자와 의자가 있었고, 여러 무인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은 무거웠고, 먼 불빛에 비친 검은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그들은 육기가 들어서자 부랴부랴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육 소가주.”
“소주.”
중장년에 이른 이들이지만, 젊은 육기를 대하는 것은 극진했다. 육기는 그들과 일일이 두 손을 맞잡고서 가장 안쪽의 자리로 갔다. 그 뒤에는 육가의 총관이 공손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켰다. 육기는 총관에게 잠시 눈짓해 보이고서, 다른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소주, 처지가 어렵습니다.”
“마냥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래서. 귀파에서는 이대로 물러나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어허, 아니긴!”
자리에 앉기가 무섭다. 서로 곁눈질하며 침묵만 지키던 이들이 육기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어려움을 토로했고, 말끝을 붙잡고서 쏘아붙였다. 참으로 대단한 인사들이다. 육기는 우선 입을 다물고서, 그들이 갑론을박(甲論乙駁) 떠들어 대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딴에 공을 세워 보겠다고 나섰다가 되레 크게 당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칠문의 문주는 물론이거니와, 크고 작은 무문의 주인들조차 끼어들었다. 공과를 따진다면 여기 있는 누구 하나, 육기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으련만, 이들은 대단도 하였다. 열심히 처지의 어려움을 변명하거나, 다른 이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다.
점점 목소리는 커지고, 분위기는 갈수록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육기는 말이 없었다. 한참을 떠들어대던 이들은 문득 기이함을 깨닫고서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육기의 눈치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새삼스럽다.
“그래, 하실 말씀들은 다 하신 게요?”
“소주, 그것이.”
“우리 힘으로는 화염마녀를 어찌할 수가 없는 모양이구려.”
“그, 그러나 광동무인의 기개는 아직도 뜨겁습니다.”
“아무렴, 아무렴요. 소주께서 걱정하실 정도의 일이 아니고말고요.”
“마녀의 불길도 조만간에 수가 날 것입니다. 그리하면 춘양의 것들도 정신을 차리겠지요.”
“그렇지요, 저런 촌무지렁이들이 뭘 알겠습니까.”
네가 잘했네, 네가 잘못했네 하며 악다구니 쓸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서로 되먹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서 거들었다. 그러나 육기는 묵묵부답, 그저 깍지 낀 두 손에 턱을 괴고서 떠드는 제파의 주인들을 지그시 바라만 보았다.
광동 무림을 지탱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하는 소리가 고작 남아의 기개, 촌무지렁이가 어쩌니 하고 있으니. 참 답답한 소리였다.
육기는 치미는 한숨을 지그시 짓눌렀다. 저들의 행태는 곧 육가의 지금이기도 하다. 각자 다른 깃발을 지녔어도, 결국에는 육가의 칠성기 아래에 있는 까닭이었다.
이곳 춘양에서 일어난 화염마녀의 불길은 기이하여서, 이제 마녀 한 사람의 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금력과 무력, 양면으로 광동을 압도하였던 육가였다. 어찌 보자면 고작 한 지역의 일이 틀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려나, 그 한 곳이 육가만이 관계한 것이 아니라, 무가련의, 그것도 특히 오대세가와 얽혀 있었다.
고약한 일이다.
자칫 광동에서 육가의 위명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육기는 새삼 차분한 눈으로 모여서 갑론을박을 거듭하는 각 무문의 주인들을 잠시 둘러보았다. 여기에도 다른 가문과 줄이 닿은 이가 하나, 둘이 아닐 터였다. 알면서도 일부러 눈 감는 바가 있었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육기는 눈을 감으며, 쓴 속내를 감추었다. 남칠문을 비롯한 여러 중소무파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으니. 육가의 소주이기 이전에, 육기라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부족함이 아프도록 와 닿았다. 평온한 안색과는 달리 시름이 깊었다.
그가 다시 눈 떴을 때, 떠들던 이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서, 육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상황이 참 어지럽군요.”
“소가주.”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천룡이 문호를 다시 열었다고 하여도, 광동육가라면 능히 감당할 수 있으련만. 이제는 다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다. 육가 소가주 육기는 피로함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화염마녀를 제압할 수단의 하나로써 개방을 생각하였건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개방 거지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분명 간단히 넘길 일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당장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육기는 그런 사정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잠깐 말문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춘양을 도모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겠소.”
“소, 소주! 본문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가장 구석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기겁하여서 소리를 높였다. 육기는 벌떡 일어난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춘양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고창문의 문주였다. 가장 먼저 화염마녀라는 횡액을 당한 이였고, 실상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작자이기도 했다.
“버리다니. 그런 말씀 마시구려.”
무능한 작자, 처음부터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지금에 와서 버리네, 마네. 결국에 제 안위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육기는 불쾌함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육기의 뒷자리에 말없이 있던 육가 총관 도포정이 나섰다.
“고창문주, 말씀이 과하십니다. 본가를 실로 경시하는 말씀이 아니오이까.”
“허,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소가주의 말씀은 더욱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결코, 고창문과 우방을 저버린다는 뜻이 아니오이다.”
“이, 이 우둔한 무부가 실로 결례를 범하였소이다.”
고창문주는 엉거주춤 일어나, 육기는 물론, 자리한 여러 문주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도 추태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저할 새,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럼, 소가주께서는 어떤 묘안이 있으신지.”
“늦은 감이 있으나. 일단 만나보도록 하지요.”
“예?”
육기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남칠문의 주인들은 흠칫 눈을 크게 떴다. 똑바로 듣고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육기는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도포정에게 말했다.
“전령을 추려보시구려.”
“예, 소주.”
더는 웅성거림이 없었다. 그들은 긴장한 눈으로 빠르게 머리만 굴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자신들에게 어떤 이해(利害)가 있을지 고민할 뿐이었다. 육기는 그들 모습을 흘깃 보고는 다른 말 없이 일어섰다. 다른 이들은 생각이 한참 복잡하야, 미처 육기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뒤늦게 중년의 사내가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광동남칠문 중 자리에 없던 불산(佛山)의 나한문주였다.
문주의 갈색 얼굴에는 당황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육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한 통의 배첩을 전했다.
“소주.”
“이게 무엇입니까?”
“저, 저 그것이.”
육기는 눈매를 모았다. 나한문주의 주저하는 기색이 기이했다. 한 쌍의 철장(鐵掌)으로 수백 왜구를 격퇴하여서 척왜철장(斥倭鐵掌)이라고도 불리는 무인이 주저함이라니. 그는 곧 배첩을 건네받았다. 조악하나마 격식을 갖춘 배첩이었다. 신중하게 앞뒤를 살폈지만, 다른 이름은 없었다. 배첩을 펼치자, 먼저 눈을 잡은 것은 단정하나 힘 있는 필체였다. 상당한 힘이 담겨 있었다. 명가(名家)의 솜씨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었다. 의례적인 문구가 지나고 짧은 본문이 있었다. 육기는 피식 입매를 끌어올렸다. 달리 불편한 모습은 아니었다.
“저쪽에서 먼저 손을 썼군. 재밌는 일이네.”
육기는 배첩을 덮었다. 뜻밖이라면 뜻밖이었다. 이때에 먼저 손을 내밀 줄이야. 그는 표정을 지우고서, 나한문주를 돌아보았다.
“배첩을 전해온 이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데.”
“응? 무엇입니까?”
나한문주는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열심히 머리 굴리던 장내의 인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문주는 새삼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기를.”
* * *
광동, 춘양이라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광동 무림이 크게 소란하다고 하나, 일이 벌어진 곳이 시끄러울 뿐, 다른 곳은 도리어 고요했다.
소명은 언덕 위에 올라섰다. 하남을 벗어날 때만 하여도 늦더위가 한창이었건만, 광동의 끝에 이른 지금에는 습하기는 하여도 더위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춘양이라는 곳이 멀리 보였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소명은 불현듯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그 녀석. 여기 있기는 있구만.”
마을의 광경은 기이했다. 다른 무엇보다 한곳에서 높이 이는 불길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마치 벽을 쌓은 것인 양 활활 타올랐다. 기이한 광경이었지만, 소명은 저기 불길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화염산의 삼대신비 중 하나를 남쪽 끝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일컬어 홍염화령(紅焰華靈), 그것은 화염산주가 거하는 곳을 증거하는 이적이었다. 그리고 일어나는 불길을 경계로 수십에 이르는 화려한 깃발이 드높이 펄럭였다. 서로 다른 이름을 새긴 깃발 아래로 수많은 무부가 모여서, 불길을 에워싸고 있었다. 속한 바는 서로 다르겠지만, 마치 군진(軍陣)처럼 정연한 모습이었다.
“좋지 않군. 위지 녀석을 먼저 보낸 게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는데.”
소명은 찌푸린 입술 사이로 나직이 속삭였다. 위지백, 그 혈기 넘치는 인사가 저런 난장판 속에서 얌전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서 성큼 앞으로 나섰다. 이 마당에 길게 고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먼지를 담뿍 뒤집어쓴 채, 흙먼지와 함께 나서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강호낭인이었다. 더구나 색이 한껏 바래어 있는 남색 장삼에 때가 꼬질꼬질한 새끼 끈으로 허리를 묶고 있어서 행색이 더욱 초라했다. 소명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며 불길을 향해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