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광동풍운(廣東風雲)
사내, 소명은 다그치는 장관풍의 일성에 잠시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삐딱하게 기울인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고스란했다.
“뭐라? 정체를 밝히라?”
“그, 그렇소.”
장관풍은 천천히 되묻는 말에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목소리가 떨린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야무지게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소명은 아예 팔짱을 끼고서는 턱 끝을 치켜들었다.
“포천(抱天)도 감히 내 앞에서 그렇게는 말 못한다. 너 누구 제자야!”
“예, 예?”
전혀 뜻밖의 소리였다. 포천이라니, 장관풍은 머뭇거리며 치켜든 검을 천천히 내렸다. 그는 연신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포천 진인은 천산파의 제일고수로, 비응십삼검의 수좌이기도 했다. 그 이름은 서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여기 남단의 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대사, 대사형을 아십니까?”
“포천이 대사형이라? 그럼 비응검 중 하나겠군.”
“그, 그게. 그러니까.”
“쯧.”
소명은 짧게 혀를 찼다. 마치 사문의 윗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장관풍은 더더욱 주눅이 들어서 슬금슬금 검을 뒤로 거두었다. 그리고 소명과 뒤에 주저앉은 마가이가의 질풍비각을 번갈아 보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장관풍의 눈치로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후우, 이봐. 비응 몇 번째 검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드잡이할 요량이 아니면 위지 녀석이나 불러 주겠나?”
“위지? 위지라니 누구를 말씀이신지?”
“누구라니? 위지백, 그 녀석 말이네.”
장관풍은 되묻는 말에 여전히 영문 몰라 하는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자 소명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전에 찾아온 이가 없었는가?”
“바깥의 무리가 아니라면, 달리 찾아온 이는 없었습니다.”
눈치 보며 하는 말에, 소명은 그만 긴 한숨을 흘렸다. 일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그보다 수삼 일은 앞서서 광동으로 향한 위지백이었다. 그럼에도 자리에 없다니.
“이것 참.”
소명은 한숨을 흘렸다. 없는 위지백에게 행여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 되기보다는, 또 엉뚱한 곳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기라도 했을까 불안하다. 그러는 중에 담일산이 부랴부랴 다가왔다.
“장 검객! 대체 무슨 일이. 억! 소명 공!”
담일산은 소명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정주 담가의 은인이라고 할 소명이 아니던가. 소명 또한 놀란 기색이었다. 천산 검객은 물론이거니와 정주 담가의 노가주를 광동 땅에서 보다니. 기이한 인연이 아닌가.
“아니, 담 가주. 가주께서 어찌 이곳에.”
“허허, 그것은 이 사람이 물을 일이오. 소명 공이야말로 어찌 이곳을 찾으셨소이까?”
“그것은.”
이번에는 소명이 잠시 멈칫했다. 어찌 이곳을 찾았느냐, 그 한마디에 덥석 말문이 막혔다. 세세한 사정을 말하자니 구구절절하고, 간략히 말하자니 딱히 할 말이 없다. 소명은 이내 가슴이 참으로 갑갑하여서 묵직한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참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이었다.
“허, 허허.”
담일산은 더 묻지 못하고 어색하게나마 웃고 말았다. 그는 곧 소명에게 들기를 청하면서 앞장섰다. 살기마저 치솟았던 잠깐의 소요는 그렇게 마무리되고, 모여든 이들은 다시 흩어졌다. 그리고 고창문의 정문 앞에서는 키 큰 사내만 홀로 남았다.
질풍비각 이홍천은 멍청한 얼굴로 주저앉아서 눈동자만 끔뻑거렸다. 얼결에 고창문 앞까지 끌려왔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칼부림 할 때는 언제고, 아주 까맣게 잊힌 모양새였다. 그는 한참 만에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이제 뭘 어째야 하지?”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후환이 너무 두렵다. 이홍천은 망연하여서,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서 그를 찾을 때까지 멍청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고창문은 대문은 좁고, 내부는 드넓었다. 둥글게 세운 벽은 높았고, 여러 채에 달하는 가옥을 따로 세운 남방의 구조였다. 넓은 마당과 바깥쪽의 가옥에는 춘양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처럼 남루한 이들이 편히 몸을 쉬고 있었다.
소명은 묵묵히 걸음을 옮겨서, 중정을 지나 고창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내당(內堂)에 이르렀다. 좁고 높은 문을 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한 마디의 간드러진 교성이 들려왔다.
“사앙공!”
이런 달큰한 목소리라니. 콧소리가 가득 실려 있었다. 내당 안쪽에서 붉은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며, 여인이 소명을 향해 냅다 몸을 던졌다.
긴장하여서 소명을 기다리던 담일산 내외나, 몇몇 사람이 한없이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상공이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화염산주의 입에서 상공 소리가 튀어나올 줄이야. 그야말로 기겁할 참인데, 이어진 모습은 더욱 기겁할 참이었다.
소명은 달려드는 화염산주를 슬쩍 피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는 이의 뒷덜미를 딱 붙잡아 냅다 패대기쳤다.
철퍼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대신 내당에는 얼어붙은 정적이 높은 천장까지 가득 차올랐다.
누가 말문을 열 수가 있을까.
“이게 어디 은근슬쩍 상공 운운이야.”
“히잉.”
고개 든 화염산주는 대번에 울상이었다. 소명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쌩쌩 돌았다.
“아함(兒涵), 이 녀석! 네놈 때문에 일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알기나 하는 게냐!”
“히잉.”
화염산주, 아니 소명의 앞에서는 언제고 어린 소녀, 아함이었다. 자객불원의 전설을 만들게 된 이유이자, 화염산의 명운, 그 자체였다. 그러한 화염산주가 혼쭐이 나고 있다. 패대기를 치고는 아명을 거리낌 없이 외치다니. 이것이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장관풍은 넋을 놓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 그렇지!”
이제야 이름 하나가 머리를 쌩하니 스치고 지나친 것이었다. 세상 천지에 화염산주를 저리 막대할 수 있는 이가 달리 있을 리가 없었다.
“궈, 권야!”
“권야라니? 그게 무슨 이름인가?”
담일산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서, 놀라 소리치는 장관풍을 돌아보았다. 장관풍은 맹한 눈초리로 소명과 놀란 담일산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입을 뻐금거리기나 할 뿐,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어찌하고 있든, 소명은 호되게 꾸짖었고, 화염산주는 한없이 시무룩하여서 푹 고개를 떨구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족히 닷 발은 되었다. 소명은 그 앞에서 쯧쯧 혀를 찼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노려보는 눈초리는 예리하기도 하였다.
“여기가 어디 서장 땅이더냐?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만들어놓아!”
“아니, 나는 그냥.”
잔뜩 풀 죽어 있어서, 사정을 모르면 안쓰럽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양도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아함은 이내 배시시 웃었다. 호되게 다그쳐도 저 웃음에는 도리가 없다. 소명은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쿠, 이 녀석아.”
그는 입매를 찌푸린 채, 마구잡이로 매달리는 아함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행색에 그는 더 타박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꿰입은 아이의 저고리 옷은 화염산에 들어갈 적에 소명이 입혀준 그대로였다. 그 세월이 수삼 년이건만, 이제까지 맞지도 않는 아이 옷을 계속 입고 있었으니. 소명은 쯧,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성 부인이 영 어색한 모습으로 있었다.
“부인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이 녀석이 두 분께 큰 폐를 끼쳤군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성 부인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새삼 정색하여서 말했다.
“산주께서 노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또한 공께서 본가와 정주 사람들에게 베푼 은혜가 절대 작지 않습니다. 공과를 비교할 일은 아니나, 소명 공께 사죄를 받기에는 저희 부부가 염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소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스친 인연을 여기서 다시 마주한 것도 신기하건만, 이렇게 생각해 주다니.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마운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더 말은 않지요. 우선은 이곳 일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예, 정주의 노선께서 찾아주셨으니. 벌써 일이 해결된 것만 같습니다.”
“어이쿠.”
그놈의 노선 소리. 소명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터뜨렸다. 그러자 옆에 매달려 있던 아함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고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호기심이 참 가득하다.
“상공, 상공, 노선이라니요. 또 새 별호가 생기신 거예요?”
소명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춘양, 봄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이곳에 사람이 살 만한 온기는 전혀 없었다. 한쪽은 크게 쇠락하였고, 한쪽은 폐허만 그득했다. 그저 살풍경한 광경뿐이었다. 홍염화령 안쪽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소명은 고창문과 주변을 살피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껏 잘 버티어냈지만,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고창문에 앉은 마을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했다. 담일산과 성 부인은 뒤에서 조용한 소명을 바라보았다. 장관풍에게 약간이나마 권야의 이름을 들은 터였다.
“허어, 권야, 권야란 말이지. 그것도 자객불원의.”
“백마보를 폐한 것이 결코 과한 일은 아니었겠습니다.”
담일산이 문득 중얼거리자, 성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거들었다. 자객불원이라는 이름은 서천 일대에서는 천하고수에 버금간다. 하북 정주의 일문인 백마보가 갑작스럽게 문을 닫았을 적에 소명을 떠올렸건만, 그것이 괜한 생각이 아니었던 셈이다. 담일산은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쓴웃음이 역력했다.
팽가의 외압에 위태로웠던 가세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소명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다. 속사정 모르는 정주의 백성은 그를 두고 무명노선이라 하면서 작은 사당마저 마련하지 않았던가.
부부는 고창문 내를 둘러보는 소명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퍼뜩 소명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보내십시오. 내일 마주하여서 모든 고리를 끊어내자고 전하십시오. 그쪽도 싫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그들이 있는 작자들이기 때문이지요.”
소명은 짧게 말했다.
대치하여서 달포가 지났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것은 육가로서도 바라는 상황이 아닐 터였다. 저들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육가의 이름이 강대하기 때문이다.
“과연.”
담일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릇 명가라고 하는 이들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그였다. 그 자신 또한 일문의 주인 된 처지가 아니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광동육가의 이름에 의심을 품을 수 있었고, 반석같이 견고하였던 명성이 흔들릴 수 있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균열은 강대한 외적보다 두려운 법이었다.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장관풍이 공손한 모습으로 나섰다. 그러자 소명의 입매가 장난스럽게 슬쩍 올라갔다.
“좋지, 최대한 요란하게 다녀오게.”
“요란하게요?”
장관풍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눈동자에 소명은 다짐이라도 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관풍은 소명처럼 히죽 따라서 웃었다.
“아무렴요, 아주 요란하게 다녀오겠습니다요. 헤헤헤!”
숨은 뜻이 있는 모양이다. 담일산과 상 부인, 그리고 노선생은 마냥 의아하여서 두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날은 한껏 어두웠다. 저기 달빛도 멀었다. 그러나 춘양 가까이는 대낮 못지않게 훤하였다. 고창문을 비롯해서 빈한 거리를 에워싼 불길 덕분이었다.
“히야, 정말 마녀는 마녀로군.”
불길을 지켜보던 불산 나한문의 장문제자, 지도평은 새삼스럽게 탄성을 흘렸다. 벌써 몇 날이고 보아온 광경이었지만, 다시 볼 때마다 놀라웠다. 인세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니.
춘양을 에워싸고 있는 불길의 벽은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면서 계속 타올랐다. 처음에는 가볍게 여겼지만, 물이나 흙으로도 잡을 수가 없는 불길이었다. 수십, 수백 근이나 되는 물과 흙을 들이부어도 잠깐 잦아들 뿐이었다. 이내 성이라도 내듯이 더욱 맹렬하게 솟구치곤 했다. 그러하니, 아무리 많은 수의 고수가 있더라도 한 번에 춘양을 도모할 수가 없었다. 불길을 뛰어넘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렁이는 불길에 자칫 닿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털끝만큼만 닿아도 삽시간에 전신을 집어삼켰다. 지도평은 불현듯 피식하며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사문의 어른 중 한 분이 이깟 불길쯤 못 넘겠느냐면서 나섰다가, 그리 자랑하던 백발, 백염을 홀라당 태워 먹은 일이 떠올랐다.
지도평은 이내 헛기침을 흘리며 들썩이는 입가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이러고 있다가 자칫 누구 눈에라도 띄면 그것도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닐 터였다.
“거기 누구 있소?”
퍼뜩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도평은 화들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 것인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주변에 다른 이는 없었다. 그러자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아무도 없소?”
“누, 누구냐!”
“여기요, 여기!”
“무슨?”
지도평은 두리번거리다가 곧 불길을 바라보았다. 외쳐 묻는 소리는 그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지도평은 다급하게 목에 건 호적(號笛)을 움켜쥐었다. 이제껏 이쪽에서 불벽을 넘어가고자 애를 썼지, 너머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었다.
‘이걸 어찌해야?’
지도평이 잠시나마 주저할 새, 너머의 목소리가 다시 외쳤다.
“거, 너무 놀라지 마시구려.”
“응? 놀라? 뭘 놀라?”
“흐랏차!”
대갈일성과 함께 이글거리는 불벽이 쫘악 갈라졌다. 막대한 경풍이 몰아치니, 지도평은 흡! 숨을 멈추고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움켜쥔 호적을 입가에 두고서도 미처 반응할 수가 없었다.
광동의 무인들이 그토록 고생하다가, 결국 물러난 불길이 이렇게 간단하게 갈라지다니. 그 사이로 남색 단삼의 사내가 번뜩이는 검을 거두면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일검의 경력으로 불길을 가른 것이다.
지도평은 입을 벌리고서 다가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지도평에게 두 손을 맞잡으며 자신을 밝혔다.
“천산파 삼대제자, 장모라 하외다.”
지도평은 한 박자 늦게 마른침이나마 꼴깍 삼켰다. 멋들어지게 등장한 사내의 기세에 눌리고, 놀란 것도 있었지만, 전혀 머릿속에서 없는 이름이 들린 까닭이었다. 우뚝 버티고 선 장관풍의 등 뒤로 불길은 다시 벽을 이루며 타올랐다.
지도평이 달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서둘러 알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