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소천룡, 회
고창문의 높은 담 곳곳에 칠성금흑기가 펄럭거린다. 그 아래에 하얀 인영이 다가섰다.
단정한 차림의 젊은 사내였다. 머리에 두른 백건에는 다른 장식이 없었고, 걸친 하얀 장삼도 상당한 고급의 비단을 쓴 모양이지만, 과하지 않았다. 그는 요란한 고창문 앞에서 문득 고개를 들었다.
짙은 눈썹 아래의 맑은 눈동자가 펄럭거리는 삼각의 금흑기를 올려다보았다.
“철성금흑기라. 어떻게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군.”
그는 가만한 웃음을 머금었다.
광동육가의 칠성금흑기는 마치 검은 용처럼 힘차게 펄럭거렸다. 그는 이내 고창문 마당으로 눈을 돌렸다. 광동의 무인들이 자리에 모여서 바글바글했다.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체 많은 이들이 모여 있을 뿐만 아니라, 무인 아닌 자들도 부지기수였으니. 그는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며 계속 걸음 했다.
이쪽에서는 빈한 자들이 모여서 먹거나, 몸을 쉬고 있고, 저쪽에서는 개방 거지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었다. 여타 다른 광동의 무림인들도 여기저기 흩어져서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낯빛이 좋지 않았다.
백의 사내는 곧 마당을 가로질러서,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쪽에 모여 있던 광동 각 파의 무림인들이 새삼 험악한 얼굴로 앞을 막아섰다.
스치듯 보아도 백의 사내는 광동인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한 햇빛에도 하얀 얼굴 하며, 더욱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텐데도 한 조각 여유를 품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가 다가서자 광동 무인들이 퍼뜩 눈을 날카롭게 하며 경계했다. 지금 이 자리는 어쩌면 광동 무림에 다시없을 치욕의 날일지도 몰랐다. 그런 곳에 외인(外人)이 들어선다는 것은 쉽사리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광동인의 검붉은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누구시오. 광동 사람은 아닌 듯한데.”
“이 너머는 외인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오. 썩 물러가시오.”
다그치는 목소리에는 적의가 짙었다. 다른 눈이 없었다면 흉한 짓이라도 저지를 기세였다. 그러나 사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험악한 이들에게 다가서며 나직이 자신을 밝혔다.
백의 사내는 외인이나, 또한 외인이 아니기도 했다.
소천룡이다!
놀란 한마디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마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은 누구의 입에서 비롯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창문의 바깥에서 안쪽에 이르기까지, 소천룡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땅을 들썩였다.
“소천룡! 소천룡!”
“천룡구주진천(天龍九州振天)!”
“천룡구주진천!”
달리 수행하는 자도 없이 홀로 나타난 소천룡이다. 그러나 감히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슬쩍 드러낸 기세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요한 가운데에 묵직한 위엄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사내는 한 조각 미소를 머금고 차분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지만, 무인들은 황급히 좌우로 물러났다. 태생의 위엄이란 이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창문 중정에 이르기까지 감히 소천룡을 막아서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호위하듯 뒤를 따르고, 길을 열었다.
중정에 모인 모든 이들의 눈길이 백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소……천룡?”
육기는 소천룡의 모습에 퍼뜩 몸을 긴장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천룡을 직접 마주한 유일한 사람이라면, 그뿐이었다. 그는 크게 눈을 치뜨고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소천룡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니다.
‘이럴 수가!’
낙양회합에서 마주하였던 소천룡이 아니다. 그러나 가짜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의 소천룡과 흡사한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무게는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 않았다.
“확실히 소천룡이군.”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육명이 차분한 눈으로 소천룡을 보고 있었다. 들어선 소천룡은 자연스럽게 그와 눈길을 마주쳤다.
“육 가주시로군요.”
“그렇소, 소천룡. 이런 자리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육명의 말에는 뼈가 있었으나, 소천룡은 흐릿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 자리의 가장 어른인 뇌공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소천룡은 공손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뇌공 노방주. 천룡가의 회(晦)라고 합니다.”
“허어, 천룡가의 회라. 그리 칭하니 참 신비하게 보이기는 하는구먼.”
노걸개는 푸근한 기색으로 비꼬았다. 제 이름 하나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소천룡이 우스울 따름이다. 회라고 자신을 밝힌 소천룡은 나직이 웃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가 극히 적은 천룡세가였다. 가문의 법도가 어떠함을 알 수가 없으니. 그는 다시금 뇌공에게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소명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에서 희뿌연 광휘가 어려 갔다.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맺혔다.
“그대가 당대의 용문제자이시구려.”
사뭇 친근한 투였다. 그러나 마주한 소명은 말이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싸늘한 한광(寒光)이 일렁였다. 적의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호의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소천룡 회는 가만히 미소만 보였다.
미소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다. 뇌공은 미간에 주름을 깊게 잡고서, 넌지시 물었다.
“그래, 소천룡께서는 무슨 용무로 오셨나? 같은 무가련이라도 살피려고 하는 겐가?”
소천룡 회는 잠시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노방주께서 오해를 하셨군요. 어디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여기 광동은 엄연히 육가의 영역인 것을요. 또한, 제가 무가련에 어떤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으응? 천룡세가에서 무가련의 어린 것들을 모아다 놓고 한탕 소란을 부린 것을 다 아는 데에. 지금 소천룡은 이 늙은이를 너무 업수이 보는 것 아닌가?”
“제가 어찌 감히.”
소천룡은 잠시 두 손을 맞잡으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한 걸음 물러나는 모양새에, 뇌공은 주름 가득한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그렇다면, 소천룡께서는 무슨 용무가 있어서 이곳까지 걸음 하시었는가.”
새삼 무거운 목소리가 울린다. 소천룡은 흘깃 고개를 돌렸다. 육명이 그를 지그시 보고 있었다. 검은 얼굴에 하얀 안광이 머물렀다.
감춘 경계심이 언뜻 드러났다.
소천룡의 걸음이 가벼울 리가 없으니. 그러자 소천룡 회는 환히 웃었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 있던 소명을 딱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심상치 않다.
“소천룡 회가, 용문제자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회는 소명을 향해서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곧은 눈길로 소명을 보았다. 사심 없는 눈빛이었다.
광동의 일이 아니라, 소림사의 용문제자와 겨루어 보고자 찾아왔다는 것이다. 육명, 육기는 물론이고, 개방 뇌공을 비롯한 자리의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주하는 소명은 그저 입매를 잔뜩 찌푸릴 뿐, 뭐라 답을 하지 않았다.
천룡이라는 것들은 도대체가 뭐 이리 당당들 한 것인지.
예의를 차리면서도 하는 양은 시비나 다름없다. 소명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웃는 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치렁한 머리카락이 앞을 가렸지만, 눈매가 곱지 않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천룡 회는 쓴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불편한 모습을 보이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자리를 파했다.
소천룡의 등장으로 잠시 주춤하였지만, 이미 얘기는 다 한 상황이었다. 육명은 그대로 따르겠다 하였고, 춘양 사람들은 더는 불만을 갖지 않았다. 덧붙인 것은 개방에서 어찌 잘 돌아가는지 지켜보겠다고 하는 정도였다.
자칫 육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도 육가를 믿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사대봉가와 여러 당주가 발끈하였지만, 육명은 이 또한 받아들였다. 기왕에 가문의 곳간을 털어 내는 일이었다. 하나 숨길 것 없이 일을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그러는 편이 더욱 빠르게 광동 무림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편이리라.
육명은 더 지체할 것도 없어서, 바로 고창문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서 여러 무림인들이 줄지어 나섰다. 육가에 속한 자들만도 기백을 헤아린다.
육명은 문득 정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뒤따르던 모두가 일제히 굳어서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육명은 고개를 돌렸다. 높이 세운 금흑기를 거두며, 연이어 다른 문파도 깃발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기야.”
“예.”
육명의 부름에, 육기는 한달음에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올 것이 왔는가. 그는 한숨을 삼키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정장안이라고 하는 육기였으나, 지금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단지 일을 그르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후계가 어쩌고 하는 것 또한 문제가 아니었다.
육가의 치욕이었고, 그것을 가주가 온전히 감내했다.
무슨 면목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육명은 육기를 탓하지 않았다.
“기야, 여기 춘양의 일은 너에게 일임하마.”
“예?”
“여기 사람들을 잘 다독이고, 고창문의 빈자리를 채우도록 하여라.”
육기는 퍼뜩 눈을 치떴다. 진정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유폐나 폐관을 각오하고 있던 터이건만, 육명은 그에게 어찌 보면 가장 큰일이랄 수 있는 춘양을 맡아 수습하라 하는 것이다.
“가, 가주. 저는.”
“오늘의 일을 어찌 치욕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 일로 무가련에서는 제법 눈치가 보이겠으나, 나중에는 육가의 이름만이 온전할 것이다. 앞으로가 중요한 일이니.”
육명은 묵직한 손으로 육기의 어깨를 다독였다. 더 말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충분했다. ‘믿는다.’ 그 한마디가 뚜렷하다.
육기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총관이 어두운 얼굴로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십삼분가의 피해는 온전히 육가만의 것이 아니다. 무가련의 다른 가문, 특히 오대세가에서 깊숙하게 얽혀 있었다.
“가주, 십삼분가의 손해는.”
“하하, 다른 가문에서 소리가 나온다면, 어디 재주껏 해 보라고 하지.”
육명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바로 낯빛을 굳혔다. 굳은 눈매에 하얀 안광이 맴돌았다.
십삼분가를 비롯한 여타 분가에서 다른 세가가 무슨 분탕질을 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여기 고창문 또한 육가의 깃발 아래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가와 뒷거래가 오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민초의 삶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칠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육가의 잘못이고, 자신의 책임이다. 기세를 일으키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육명은 이내 미소 지었다.
“그들은 감히 따져 물을 수 없을 것이오.”
“허나, 가주. 뒤에서 손을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게. 개방의 정예가 곳곳에서 도끼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터. 그들도 섣부른 수를 쓸 수 없을 것일세.”
개방이 지켜보겠다고 하는 것을 선뜻 받아들인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개방을 통해서 광동육가의 당당함을 보이는 동시에, 다른 세가들을 견제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자 가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육명은 다시 한 번, 육기의 어깨를 다독였다.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기억하거라. 기아야. 오늘이 육가가 다시 도약하는 날일 것이다.”
육기는 어깨가 하염없이 무거웠다.
일천, 아니, 족히 일만 근에 달하는 무게를 올린 듯하다. 전에 없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육기는 버거워하기보다는 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서 육명에게 고개를 숙였다. 맞잡은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두 부자(父子)에게 말은 필요치 않았다.
육 가주를 비롯해 육가의 중진들이 떠나면서 금흑기를 내렸지만, 고창문 마당은 아직도 시끌시끌했다. 천룡세가의 소천룡이 왔다는 소식에 사람이 더욱 몰릴 듯했다.
고창문의 심처(深處)는, 바깥의 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깊은 곳이다. 그곳에는 꽤 공을 들여서 조성한 정원이 있었다. 규모만큼이나 화려하였으려나, 달포 남짓 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지금은 시든 잡초만 무성했다.
소명은 그 자리에 영 껄끄러운 심정으로 있었다.
정원 복판에 있는 팔각의 정자였다. 다른 이는 없었다. 소명과 소천룡이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자연석을 끌어다 놓아 마련한 다탁이 있었다. 여러 다구(茶具)가 모락모락 김을 올렸다. 소천룡은 능숙하게 다구를 다루었다.
한 잔의 찻물을 우려내기 위해서, 한참이 걸렸다. 소명은 앉은 채 말이 없었다. 그저 혼자 분주한 소천룡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참 만에야 소천룡은 잔을 권하며 말했다.
“차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또한 차에 그렇게 조예가 있는 편은 아닌지라.”
소명은 잔을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예를 운운하기에도 부족했지만, 적어도 지금 소천룡이 권한 한 잔의 차가 귀한 찻잎이라는 것 정도는 헤아릴 수 있었다. 한 모금에 온기와 더불어서 청량함이 가득했다.
“잘은 모르지만, 좋은 차군요.”
“광동 사람들이 흔하게 마시는 오룡이라고 하지요.”
“오룡.”
소천룡이 오룡이라는 차를 권한다라. 소명은 입매를 잠시 비틀고서,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새삼 소천룡 회의 얼굴을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