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8
18화. 여류수년(如流數年)
소명은 한층 숨을 가다듬고 주먹 끝을 노려보았다. 그가 주먹 너머로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또 다른 자신이란 허상을 향해 형을 겨루었다. 주먹을 뻗을 때, 허상 속의 소명은 그보다 더 빨리 주먹을 뻗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날카롭다.
꽝!
“우왓!”
소명의 입에서 절로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심코 뻗은 일격의 정권에 닿지도 않은 바위가 쾅하고 부서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공력을 크게 일으킨 것도 아닌데.
어이없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손과 박살 난 바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우상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흐음. 이제 일류 언저리에 올랐구나.”
“이, 일류요?”
주먹을 더듬는 소명을 보며 장우상은 피식 웃었다. 그는 고개 돌려 소명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호에서 경지를 구분하기를…….”
경을 다루면 일류에 닿았다 하고, 기를 다루면 일류라 하고, 경을 발하면 일류를 넘었다 하고, 기를 발하면 절정이라 하고, 절정을 넘으면 그때에 무경(武境)에 이르렀다고 한다.
무경에 이르러 또 다른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때에 천하의 고수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당금 천하고수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다섯이 있는데, 천하오대고수라고 불리지.”
검백(劍伯) 사마종(司馬倧)
만천옹(滿天翁) 허유(許惟)
월부대도(月斧大刀) 노장시(盧帳示)
증장천왕(增長天王) 무운(無雲)
철판관(鐵判官) 치외수(治嵬戍)
지고의 경지를 이룬, 그야말로 일당천(一當千)의 고수들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괴물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한 위인들이다.”
소명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먼 곳을 보며 중얼거리는 장우상의 모습이 뭔가 있는 듯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요?”
“음. 월부대도 노장시.”
서열상으로 세 번째를 차지한 이름이다. 장우상은 새삼 끔찍하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수년 전에 그에게 대항하던 녹림 무리가 있었지. 당시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끔찍하더구나. 사람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녹림의 재앙이라고 불리는 여량혈사(呂梁血史)였다.
녹림총채, 여량채.
그곳의 채주가 월부대도와 관련 있는 자를 해한 것이다. 분노한 월부대도는 단신으로 여량채를 쳤다.
당시의 여량채는 녹림의 총채인 동시에 제일채로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산하에 거둔 녹림도들 숫자만도 기백. 그중에 일류인 자들만 기십, 당장 여량채주만 해도 절정에 이르렀다던 고수였다. 그러나 월부대도의 분노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도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십수 명의 목이 날아갔다.
장우상은 그 광경을 똑똑히 목도했다. 천하의 고수라는 이름은 결코 허명이 아닌 것이다. 그는 거듭 소명에게 당부했다.
그는 설레 고개를 흔들고는 새삼 굳은 얼굴로 말을 늘어놓았다.
“네놈이 허튼 일에 휩쓸릴 녀석은 아니다만, 상대를 할 때는 항상 숙고할 줄 알아야 한다. 생각 없이 나대다간 다음 날 뜨는 해를 못 보는 곳이 강호야.”
“헤에…….”
장우상의 당부에 소명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정말 현세에 있구나 싶은 얼굴이었다.
장우상은 다시 고개 돌려 소명이 박살 내놓은 바위를 바라보았다. 북벽에 자리한 거대한 바위까지는 무리더라도, 이 정도면 수삼 년 내에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외공으로는 경력을 다루는 경지에 올랐고, 내공으로는 형성한 내단지기가 단전에 자리를 잡았다.
장우상은 새삼 소명의 그릇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그는 문득 한숨을 흘렸다.
장우상은 옆에서 권법을 펼치는 소명의 모습을 보았다. 크게 자란 소명은 강건한 모습이었다.
쭉쭉 뻗는 일권, 일보에는 일체의 졸력이 없었다. 바른 형에서 비롯된 경력이 주먹 끝에서 꿈틀거렸다.
공전무융의 내단을 이루면서 맑아진 이목으로 보일 리 없는 경력의 흐름을 엿볼 수 있었다. 실로 신공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다.
장우상은 이제 소명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알고 익힌 모든 것은 소명에게 전해졌다.
소명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경험뿐이었다.
세상 경험, 그리고 사람 경험.
장우상이 겪은 강호풍파, 이십여 년 세월 중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했지만, 실제 겪은 것에 비할 수는 없다. 남은 것은 소명이 직접 나아가 헤쳐 나가야 할 것이었다.
“이제 때가 되었나.”
그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비가 필요했다.
다음 날, 날 밝기가 무섭게 장우상은 다시 연공하려는 소명을 손짓해 불렀다.
“이리 와봐라, 꼬맹아.”
“왜 그러세요? 아저씨?”
“크크. 됐으니까, 이리 와 앉아봐라.”
“뭘 하시려고요?”
소명은 의아해하면서 장우상 앞에 주저앉았다.
“얼추 삼 년이지? 이곳에 떨어진 지.”
“헤헤, 그러네요. 세월 정말 빠르죠?”
“그래, 네가 이렇게 곰같이 컸으니.”
“곰 같다뇨? 이렇게 잘생긴 곰이 어디 있어요.”
“하, 변죽은. 망할 놈. 손이나 줘봐라.”
소명은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또 한 소리 들을까 싶어 순순히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순간, 장우상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일시에 맥문을 움켜쥐려 한 것이다. 하지만 소명도 녹록치는 않았다. 이내 손목을 뒤집으며 장우상의 손을 막아냈다.
소명의 눈이 밝아졌다. 이제 보니 수기(手技)를 가르치려고 하시는구나. 두 사람의 손이 빠르게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장우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다른 손까지 사용해서 소명을 몰아붙였다. 그러자 소명도 들떠서는 한층 빠르게 손을 놀렸다. 장우상이 가르친 금나연환수가 실타래 풀리듯이 줄줄 펼쳐졌다.
두 쌍의 손이 순식간에 수십여 초를 교환했다.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장우상은 능숙하게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는 소명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이 바보 같은 놈!’
지금 수기를 연마할 때가 아니었다. 오래 숙고한 끝에 드디어 마음을 먹었건만, 초를 쳐도 이렇게 치다니. 장우상은 불끈 성이 나서 펼치는 손속이 점점 매서워졌다.
소명은 날카로워지는 장우상의 손끝을 용케 막아냈다. 처음에 금나연환수를 배울 때만 해도 한 번에 십수 번은 팔이 꺾이고 바닥에 처박혔는데, 이제는 제법 버티어내지 않는가.
“에잇!”
성질난 장우상은 대뜸 물러섰다. 이제 끝났나 싶은 순간, 장우상은 소명의 눈에 대뜸 흙모래를 뿌렸다.
“우악! 아저씨!”
소명이 당황해 뒤로 물러서려는데, 장우상은 냉큼 소명의 맥문을 그러쥐었다. 소명은 버럭 외쳤다.
“치사해요!”
“헹, 치사하기는. 내가 말했지? 언제나 대비하라고.”
팔이 꺾인 상태로 있던 소명은 잠깐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는 냅다 어깨를 뒤틀더니 제압당한 맥문을 역으로 풀어냈다.
“어엇?”
“헤헤, 이럴 줄은 몰랐죠?”
“하, 하하.”
금나연환 중 대비수를 역으로 펼친 것이다. 장우상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어리바리하던 녀석이 이렇게 영악해졌으니. 그는 두 손을 들었다.
“많이 컸구나. 이제 정말 더 가르칠 것이 없겠어.”
문득 낮아지는 목소리에 소명은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장우상은 불편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휘청거리는 그 모습에 소명은 급히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아저씨.”
“음.”
그 순간, 장우상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소명은 장우상을 부축하던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장우상이 일시에 마혈을 점해버린 것이다.
잠시잠깐 공력을 일으킨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장우상은 숨을 몰아쉬었다.
“하, 하하. 이건 몰랐지, 요놈아.”
“아, 진짜!”
장우상은 짜증내는 소명의 모습에 음흉하게 웃었다. 그는 곧 소명의 오금을 슬쩍 밀어 넘어뜨렸다.
“어, 어어!”
쿵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소명은 오만상을 썼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소명은 눈동자를 굴려서 장우상을 흘겨보았다. 그렇지만 장우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엎어져 있던 소명은 입으로만 구시렁거렸다. 소리 없이 불평을 늘어놓던 소명은 문득 장우상에게 물었다.
“그런데 뭘 하려고 그러세요? 그만 좀 풀어줘요.”
“가만히 있어.”
장우상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소명은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아직 일과가 많이 남은 참이었다. 권련도 해야 하고, 내일 치 먹을거리를 마련하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엎어져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바쁜데.”
소명은 소리 죽여 중얼거렸다.
장우상은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이때에도 이런 불평을 하는 놈이라니. 그렇지만 그것이 소명인 것을. 삼 년이란 시간 동안 한결같은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답답해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이 있었다.
장우상은 응차, 힘을 써서 소명을 일으켜 앉혔다. 굳은 몸을 세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이 필요했다. 소명은 계속해서 불평했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묻는데, 장우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앉힌 소명의 명문에 장심을 바짝 밀어붙였다.
“아, 진짜, 뭐예요오!”
“…….”
소명의 목소리 끝이 부들 떨렸다. 지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소명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버럭 소리쳤다.
“계속 이러면 저, 정말 화낼 거예요!”
“닥치고 정신 똑바로 차려. 내가 하는 말,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너랑 나랑 같이 죽는 거야.”
“아저씨!”
외치는 소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우상은 신공의 구결을 읊어갔다. 동시에 장심으로 내단지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내단을 이루어 맴돌던 공전무융의 흐름이었다. 끊임없는 흐름이 흩어지니 속에 품고 있던 거대한 힘이 장우상의 몸을 거쳐 소명에게로 흘러들었다.
소명은 흡! 눈을 치떴다. 등 뒤에서 감당 못할 거대한 기운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등골을 타고 사지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격랑이었다.
소명은 급히 심지를 바로하며 법문에 집중했다. 뒤에서 장우상이 법문을 외는 목소리가 들렸다.
“심여의합(心與意合), 의여기합(意與氣合), 기여역합(氣與力合)”
“연기도(練其道), 지기묘(知其妙), 선천무명(先天無名), 무종지도(無終至道).”
뒤따라서 소명도 법문을 읊어나갔다.
그동안 소명의 내부에서는 격랑광풍(激浪狂風)이 일었다.
쾅!
어느 순간 천지가 갈라졌다. 몸속 깊은 곳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그것은 연쇄적으로 일어나 전신으로 치달렸다. 사지백해, 곳곳에서 폭발이 일었다.
눈감은 소명의 몸에 격한 경련이 일었다. 전이의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장우상은 마지막 힘을 다했다. 지금 이때에 멈춰서는 안 된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제발, 좀 더, 좀 더! 버텨라!’
다른 누가 아닌, 자신에게, 자신의 몸에게 하는 말이었다. 소명에게 모든 것을 전해줄 때까지 이 비루한 몸이 버티기를 간절히 바랬다.
명문에 밀어붙인 두 팔에서 뿌드득하는 기음이 들렸다. 공전무융이 품은 파괴력을 그의 근골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장우상은 혼신을 다했다.
공전무융의 법문을 읊어가는 둘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공동 위로 메아리쳤다.
入無窮之門하여 以遊無極之境라.
무궁의 문으로 들어가 무극에 파묻히리라.
장우상의 손이 툭 떨어졌다.
조금의 힘도 남지 않았다. 그는 운공삼매에 빠져든 소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에서 생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전한 것은 단순한 내단지기가 아니었다. 그의 생명 전부를 내어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모습으로 보기에 너무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치 모든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장우상은 편안히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명은 들끓는 기운을 가라앉혔다.
받은 기운 전부를 단정으로 모으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세월의 문제였다. 단시일에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눈을 깜빡였다. 혈도는 전부 풀렸다.
소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몸이 너무 달라진 것이다. 마치 족쇄를 풀어낸 것처럼 날듯이 가볍다. 소명은 멍한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
소명은 장우상을 찾아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장우상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의 바로 뒤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 아저씨.”
답은 없었다. 생기 없는 그의 모습. 눈앞이 뿌옇게 차올랐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너무 뜨거웠다. 눈을 감은 장우상의 얼굴은 평온했다.
멍하니 있던 소명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절을 올렸다. 일배, 이배, 삼배…….
구배는 스승의 예라 들었다.
장우상은 그에게 스승이나 사부라 부르지 못하게 했지만 그는 소명에게 이미 스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