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불운한 서장제일도
“아니, 이런.”
대뜸 외쳐 묻는 말투에는 격의가 없으니, 도문 제자들은 퍼뜩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잔뜩 이를 드러냈다. 한쪽 손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검을 뽑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일견하기에도 호화로운 마차가 둘이었다. 비록 호기롭게 길은 막아 세웠지만, 손을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더욱이 수행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몇몇의 면모가 범상치 않았다.
도문 제자는 헛기침을 거듭하더니, 사뭇 위협적으로 말했다.
“감히, 본문의 행사에 훼방이라도 놓겠다는 것이요?”
“무슨 감히 씩이나.”
소명은 귀찮아,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찌푸린 눈으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세에 면한 까닭에 구름이 한층 낮았다. 바로 산 고개를 넘어야 어디서 쉬어 가기라도 할 터였다. 여기서 말 머리를 돌리기에는 길이 멀다. 소명은 험한 젊은 도사들의 기색을 전혀 살피지 않았다.
철없는 것들을 뭐하러 상대하겠는가. 일단은 책임 있는 사람부터 찾고 볼 일이다.
그는 두리번거리더니, 대뜸 힘주어 외쳤다.
“남악도문의 고인은 어디에 계시오. 소림 제자, 소명이 자리를 청하오!”
그리 목청을 높인 것도 아니건만, 당장에 땅거죽이 들썩이고 가까이 수풀이 마른 가지를 바르르 떨어 댔다.
잔뜩 흥분했던 남악도문 제자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이런 일성이라니. 그들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잔뜩 웅크린 채, 얼어 버렸다. 지금 누구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뻗대었던 건지, 이제야 깨달은 셈이었다.
젊은 도사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눈치만 볼 참이었다. 회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바로 나설 줄이야. 그는 한 걸음 뒤에서 새삼 태연한 소명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소명이 문득 혀 차는 소리를 흘렸다.
“쯧.”
짧은 소리였지만, 그 하나에 도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얼굴색이 창백하다 못해 거뭇하게 물들었다. 그때에 힘찬 목소리가 터졌다.
“잠시 기다리시오! 남악도문 장문인, 백진자(白振子)라 하외다!”
묵직한 일성이 쩌렁 울리고는, 다급한 인영이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아들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몸을 뒤집더니, 사뿐하게 내려섰다. 지켜보는 회의 눈가에 이채가 흘렀다.
‘백원비영(白猿飛影), 남악도문이 당대에 위세를 떨친다고 하더니. 과연.’
급하게 나타난 백진자는 언뜻 기이한 모습이었다. 흑백의 음양도관에 좌우가 흑백인 음양포를 걸쳤다. 뒤에 삐죽 솟은 고검의 자루에는 비단 수실이 길게 늘어졌다.
그의 이목구비는 이제 중년에 이른 듯하나, 관 아래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수염도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뜻 연배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소명은 알지 못했으나, 소천룡 회는 그의 외견에서 짧게나마 탄성을 흘렸다.
백원비영의 보신경을 알아본 것처럼, 회는 백진자의 외견이 뜻하는 바를 바로 알아보았다.
남악에서 전하는 노원대괘공(老猿大卦功)이 경지에 이르면 저와 같이 백염, 백발에 이른다고 했다. 귀밑머리는 하얗고, 수염이 잿빛으로 물든 것으로 보건대, 백진자는 못해도 구성 이상의 성취를 이루었다. 노원대괘공은 과거 남악도문의 시조인 건원존자(乾元尊者) 이후로는 팔성을 넘긴 이가 드물다고 들었다.
귀밑머리가 하얀 남악의 도사는 조심하라 하였는데, 지금 백진자는 수염도 보다 하얀색에 가까운 잿빛이었다.
일문의 장문인으로 자처함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등장한 백진자는 고개 든 소명의 모습에 되레 움츠러들었다. 소명이 내처 떨친 일성의 공력이 자신 못지않음을 똑똑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애써 태연하려고 하였으나, 백원비영을 펼치는 와중 한껏 일성을 떨친 까닭에 가슴 아래에서 숨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제자들과 외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백진자는 평소 성정은 잠시 젖혀 두고 소명과 소천룡을 향해 사뭇 공손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다시 인사 올리겠소. 빈도는 남악도문 장문인으로 백진자라 하외다.”
“오호, 장문인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소림 속가로 소명이라는 범부입니다.”
“아하, 소림의 속가이시라.”
주저 없이 밝힌 소림 속가라는 말에, 백진자는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언뜻 보기에도 젊은 소명이었고, 소천룡이었다. 그런 이들이 일문의 주인을 앞에 두고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니. 평범한 속가 제자라고는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내지른 일성은 산세를 흔들 정도였다.
백진자 자신도 쉽게 장담할 수가 없는 공력이다. 그는 이내 얼굴을 쓸어내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 그래, 소림의 속가께서 어인 영문으로.”
“다름이 아니라.”
“여기 길목을 귀파의 제자가 떡하니 막고는, 무턱대고 돌아가라 하더군요.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존장을 청하였습니다.”
“으음, 그런 일이.”
좋게 말하려는 소천룡을 막아서며 소명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백진자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다시 자신의 뒤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다섯 제자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래도 백진자가 등장하여서 숨이나마 겨우 돌린 참이었다. 그러고는 돌아보는 눈빛에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여기 소협의 말이 맞느냐?”
“제, 제자들은 그저 명을 이행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분들이 양보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통에.”
은근슬쩍 말끝을 흐렸다. 백진자의 잿빛 눈썹이 퍼뜩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듯하나, 백진자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오가는 길을 막으라고 명한 것은 자신이니. 여기 녀석들을 탓할 것은 없겠으나, 사뭇 고압적으로 윽박질렀을 것이 뻔했다.
백진자는 헛기침을 흘리면서 소명, 회에게 다시 두 손을 맞잡았다.
“불편함을 끼치게 되었으니,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소. 하나, 지금 산중에는 단지 본파뿐만이 아니라, 호남 무림의 큰일이 벌어지는 중이라오. 이는 외인께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니, 그만 발걸음을 돌려 주시오.”
“큰일? 호남 무림의 큰일이란 말입니까?”
“그러하외다.”
이래저래 똑같은 말이다.
결국, 할 말도 없고, 길을 내어 줄 수도 없다는 것이니. 소명은 허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잠시, 소명의 입매에 흐린 미소가 떠올랐다.
호남 무림의 큰일이라.
하기야, 어지간한 일이라면 이렇게 막아서는 일도 없을 것이고, 일문의 장문인이 직접 나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뒤 없이 길을 막아서는 것은 아무래도 그냥 넘기기가 어렵다.
“장문인께서는 참으로 억지를 부리시는군요.”
“크흠.”
“억지라니! 감히!”
백진자는 불편함에 헛기침을 흘렸다. 뒤에서 제자들이 거듭 발끈했다. 공력이 드높은 고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무람없는 태도에 나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소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장문인께서는 지금 누구 앞에 서 계신지 모르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응?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백진자의 잿빛 눈썹이 곱지 못하게 치솟았다.
아무리 양보를 청했다고 해도, 소림의 속가가 위명으로 자신을 겁박하려 드는 것인가. 그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일부러 도포 소매를 떨쳤다. 무형의 경기가 일어 바닥의 흙모래를 휩쓸었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뜻이다.
소천룡 회는 돌아가는 상황에 잠시 당황하여서 급히 소명에게 다가섰다.
“소명 공, 이만하고 발길을 돌리지요. 조금 서두르면 해질 무렵에는 민가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용문제자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소천룡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자 소명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공자의 마음을 모르지 않소. 그러나 따질 것은 따지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지요. 그게 세상 이치 아니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내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오.”
“예?”
뜬금없이 세상 이치 운운이라니. 위로라고 하는 말인지, 소천룡은 퍼뜩 의아하여서 주저했다. 소명은 그렇게 소천룡을 달래고는 한 걸음 나섰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소천룡이 걱정하는 것처럼 소림사 용문제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자리는 한순간에 얼어붙어서 누구랄 것 없이 입을 쩍 벌린 채 소명을 빤히 보았다. 심지어 장관풍도 놀란 눈이었다.
소명 혼자 당당했다.
“뭐, 지금 뭐라고?”
“아니, 그런!”
백진자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뒤에 있는 남악도문 제자들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급한 숨을 집어삼켰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소천룡 회도 어떻게 반응하지 못했다. 넋이 나가서 느릿느릿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놀란 백진자의 얼굴을 보고서, 다시 소명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의 하얀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참으로 솔직했다. 그러자 소명은 무슨 뜻인지, 슬쩍 턱짓하며 히죽 웃었다.
“아니, 소, 소명 공. 대체 왜?”
“뭐가 말이오?”
“아니, 왜 저를.”
소천룡 회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황망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기껏 모습을 감추고 암행하는 참이었다. 그런데 소명이 한순간에 소천룡의 정체를, 천룡세가의 행사를 고스란히 밝혀 버린 것이다.
소명은 당황하는 소천룡을 빤히 보면서 태연히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어쨌든 내 얘기는 안 했잖소.”
뭘 그리 놀라느냐는 투였다.
소천룡 회는 더 말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자, 후다닥 물러선 백진자가 소천룡의 위아래를 연신 훑어보고 있었다. 살피는 눈길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백진자는 마냥 헛소리로 여길 수도 없었다. 앞에 서 있는 회의 차분한 모습이 범상치 않을뿐더러, 천룡세가의 문이 다시 열렸다는 것은 이미 강호무림에 널리 알려진 판이었다. 소천룡이 앞서 오대세가의 소주를 굴복시켰다는 소문도 적잖이 들려왔다.
그것을 마냥 소문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소가주 회합에서 돌아온 여러 소가주가 지체 없이 폐문에 들거나, 잠적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이곳 호남의 오랜 종주인 황보세가의 소주도 갑작스럽게 폐관에 들어간 마당이다.
백진자는 한 걸음 물러서며 잠시 주저했다. 눈앞의 귀공자가 진정으로 소천룡이란 말인가.
소천룡은 고개를 내저었다. 구차하게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짧게나마 한숨을 흘리고 뒤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두 당주에게 눈짓했다.
“예, 공자!”
두 당주는 부랴부랴 정신을 차렸다. 그들도 워낙 당황한 까닭이다. 그들은 냉큼 두 마차의 좌우에 소기(少旗)를 세웠다. 나풀거리는 하얀 깃발에 천룡의 상징인 천룡백영문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이 앞에서 과연 누가 문파의 사정을 운운하면서 길을 막을 수 있을까.
더구나, 여기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마냥 관련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참으로 소천룡이시란 말이오?”
“그것이……. 예, 그렇습니다. 장문인께 다시 인사드립니다.”
소천룡 회는 바로 낯빛을 수습하고 가벼운 웃음을 머금었다. 차분히 두 손을 맞잡았다.
공손하면서도 과하지 않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적에는 미처 몰랐지만, 새삼 마주하자 담담한 눈빛이 품은 정광을 엿볼 수 있었다. 백진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께서는 이 사람에게 따로 용무가 있으신지요?”
소천룡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으로는 바로 길을 비켜 주었으면 하나, 백진자의 낯빛이 남달랐다. 그러자 백진자는 서둘러서 두 손을 맞잡았다.
“아니, 장문인.”
“남악도문의 일이 아니라, 호남 무림의 하나로서 삼가 소천룡을 청하고자 하오.”
정중하게 자신을 낮춘 백진자는 불편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대체 무슨 큰일이기에 일문의 주인이 자존심을 모두 접어 두고 고개를 숙인다는 말인가.
이 또한 뜻밖의 일. 소천룡은 난처한 눈으로 소명을 보았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쨌든 큰 말썽 없이 여기 산길은 지나게 되지 않았는가.
나머지는 소천룡이 알아서 할 일이다.
“자, 그럼. 뒷일은 소천룡께서.”
소명은 그러고는 냉큼 마차로 돌아가 버렸다.
“허어, 이런.”
남은 소천룡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지그시 어금니를 힘주어 물고는 어색한 웃음을 애써 지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대의 마차는 다시 나아갔다. 해 저물기 전에 적어도 산그늘에서는 벗어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