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불운한 서장제일도
황보영운은 민망함에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야 하는 것인가 싶었으나. 이미 백진자가 말문을 연 터라, 굳이 숨기기도 모양새가 우스웠다.
“허어, 황보가의 영애께서 지금 적도 무리와 함께 있으시단 말씀이시군요.”
“예. 년전 무가련에 불만을 가진 이들로 저들끼리는 황가련이라 칭한 자들이온데. 호남 일대를 근근이 소란케 하던 중에 기어코 이런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백소설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장황한 말투는 아니었으나, 상황을 알리면서도 감출 것은 잘도 감추었다. 황가련이라는 자들이 어찌 이루어졌을까마는, 소천룡 회도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아무리 무가련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라 하여도, 남악도문의 본산을 차지할 정도란 말인가. 또한 여기 모인 전력을 생각하였을 적에 길게 대치하고 있는 처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천룡은 묘한 눈길로 황보영운과 백소설을 번갈아 보았다.
“그것이, 뜻밖에도 대단한 고수를 방수(幫手)로 삼은 까닭에.”
“대단한 고수라? 아니, 어느 정도이기에?”
전황(戰況)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고수가 그리 흔할 리가 없다. 황보영운은 퍼뜩 헛기침을 터뜨렸다. 큼직한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소천룡 회는 그의 내심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었다.
‘황보 공자도 당했군.’
머뭇거리는 기색에 백소설이 대신 나섰다.
“스스로 밝히기를 위지백이라 하더군요.”
“위지백?”
소천룡 회는 잠시 머뭇거렸다. 들은 바가 있는 이름이나,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에 쾅!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터졌다. 마차에서 소명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뭐라고!”
흠칫한 호남 무림인들은 소명을 보았다가, 다시 소천룡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이들이 의아한 눈초리였다. 그 눈길에 소천룡 회는 그만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런!’
용문제자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고, 또한 소명이 저리 발끈하여 나선 것도 헤아릴 수가 있었다. 위지백, 그 이름을 듣고 왜 대번에 떠오르지 못했을까.
‘서장제일도.’
소천룡 회의 눈이 절로 말고삐를 쥐고 있는 양 당주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이 하남에서 호된 꼴을 당한 상대가 바로 그 이름이지 않았던가.
낭패도 이만한 낭패가 없으련만, 소명이 새삼 험악한 얼굴로 마차에서 나왔다. 그는 말 꺼낸 백소설을 대뜸 노려보았다.
“지금 어디의 누구라고 했나?”
치렁한 머리카락 사이로 엿보이는 안광이 무시무시하여서, 백소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였다. 목이 메어서 누구냐 묻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 걸음 뒤에 있던 황보영운이 오만상을 쓴 채 퍼뜩 나섰다. 그는 백소설의 앞을 막아서면서 소명을 노려보았다.
“귀하는 누구시오!”
“뭐? 귀하?”
호기롭게 나선 것은 좋았으나, 소명의 고개가 천천히 한쪽으로 기울면서 흐린 안광을 발하자, 그만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괜한 상대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황보가의 큰 덩치가 한 번 들썩이니,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백소설은 황보영운의 동요를 보고서, 놀란 가슴을 억지로 다잡았다. 황보영운의 망신을 바로 수습해야 했다.
“화, 황가련의 방수를 묻는 것이라면, 분명 위지백이라는 이름의 절정도객입니다.”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백소설답지 않은 일이지만, 영문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소명의 고개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위지백이라, 지금 그 말이 틀림없겠지.”
“그, 그렇습니다.”
“아오, 이 인간이 정말.”
소명은 빠득 이를 악물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황보영운이건, 백소설이건, 실로 눈에 두지 않는 모양새였다. 발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황보영운은 입매를 굳게 다문 채, 돌아서는 소명을 뚫어질 듯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대체.’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고, 달리 위압감을 느낄 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언뜻 드러나는 흐린 안광뿐이건만, 황보영운은 분명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일순 숨이 흐트러질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그렇다고 따져 묻겠답시고 뒤돌아선 소명을 붙잡을 엄두조차 나지 않으니, 황보영운은 문득 지끈거리는 통증에 두 손을 펼쳤다.
“흡!”
언제 이리 힘주어 주먹을 쥐었던가. 큼직한 두 손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네 손톱이 한껏 파고들어서 피가 배어 나올 듯이 붉은 자국이 또렷했다.
황보영운은 급히 두 손을 아래로 감추었다. 여기서 더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다행인지, 소천룡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돌아선 소명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어라 제지를 가하거나, 달리 말을 걸어 보기에 소명은 기이할 정도로 어려운 모습이었다.
주저하고 있는데, 소천룡 회는 ‘허어’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처음 생각한 것처럼 일이 돌아가지는 않을 모양이다.
* * *
남악이라고 하는 형산에는 하얀 구름이 흐르고 흘렀다.
천하에 손꼽히는 명산, 칠십이 봉의 웅장한 산세를 휘감은 운무는 드넓어서 하늘 아래에 깊은 산세를 꼭꼭 감추었다.
형산의 산허리에는 옛적의 도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악이라고 하는 만큼, 불가(佛家)에서도, 도가(道家)에서도 성지로 삼는 형산이었다. 산세 곳곳에 불도(佛道)의 궁관사찰(宮官寺刹)이 참으로 많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이곳 도궁은 남다른 곳이었다.
구름을 밀고, 당기는 서늘한 바람에 점차 빛바래어가는 잎사귀가 드문드문 흩어지곤 했다. 나풀거리는 잎사귀가 포석(鋪石) 위를 스치고 삐쭉 자란 잡초 위에 앉았다. 잡초가 무성한 자리에는 크기도, 색도 제각기 다른 자연석으로 사방을 덮어 놓았다.
백 년 세월이 고스란한 기와에는 파릇파릇한 잡초가 앉았다. 처마 끝에 매단 풍경은 바람에 덩그렁, 뎅그렁 소리를 울렸다. 맑은 소리가 고즈넉한 산사의 고졸함에 깊이를 더했다.
남조궁(南祖宮), 한조(漢朝) 때에 등선하였다고 전해지는 형산노조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역사는 참으로 오래여서 무려 삼백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한때에는 남악 형산을 전부 아우르기도 하였던 형산파의 근거지였으나, 지금에는 남악도문의 본산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아서, 바깥에서도 남조당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남조당 좌우에는 수백에 이르는 비단천이 벽면 가득히 매달려 있었다. 비단 한 폭마다 도가 경전의 문구가 빼곡했다. 그리고 웃는 얼굴에 한 자루 불진(拂塵)을 늘어뜨린 형산노조의 신상이 있었다. 그 앞에는 붉은 주단을 깔아 놓았다. 복판에는 큼직한 향로가 있어서, 굵직굵직한 향이 여럿 꽂혀 있었다.
때가 되면, 도동이 향을 살피고, 향연이 끊이지 않게 하였으나, 지금에 돌볼 사람이라고는 없으니. 향연은 진즉 다하여서, 잔불이나 몇 개 드문드문 남았고, 재만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활짝 열어 놓은 남조당의 앞, 서넛의 돌계단에 한 사내가 머리를 괴고서 편히 드러누워 있었다. 얇은 홑옷 자락이 부는 산바람에 펄럭였다. 그는 영 나른한 얼굴이었다. 문제의 위지백이었다.
광동 간다던 이가 여기 호남의 그것도 산중 도관에서 턱 하니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황보가의 영애, 황보도옥과 청사도주 강량이 어째 어려운 얼굴로 위지백의 눈치를 보았다.
흐르는 뱃전에서 살기 넘치던 모습이 아니었다. 둘은 어려움을 같이한 사람처럼 묘한 기색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위지백은 편히 누웠고, 둘은 긴장하여서 그의 눈치만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주객(主客)이 뒤바뀌어도 아주 단단히 뒤바뀐 모양새였다.
황보도옥은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곁눈질로 강량을 살피는데, 그 또한 슬쩍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강 노사.”
“그게, 그렇구려. 황보 소저. 아아, 일이 어쩌다가 이리되었는지. 그것참.”
강량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복잡한 눈으로 저기 태평한 위지백을 힐끔 보았다. 그는 새삼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그때에 철없는 남악도문 제자들만 아니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는 돌아가지 않았을 것인데.”
강량은 골이 다 지끈거렸다. 공감하여서, 황보도옥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추호도 몰랐다.
시작은 정말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했다. 뭍에 닿은 황보가의 배였다. 위지백은 그 자리에서 바로 광동으로 떠날 참이었다.
그런데 황보도옥과 황가련의 사람을 알아보는 자들이 있었다. 여기 남악도문의 제자들이다. 형산을 끼고 돌아서 흐르는 상강(湘江)은 그들의 영역이나 다름없어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턱대고 칼을 뽑아들고 황가련 무인들을 붙잡으려 들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주변 민초들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막무가내도 그런 막무가내가 없을 것이다.
위지백은 처음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호남 무림의 일이다. 굳이 그가 나설 것은 없었다. 더구나 아무리 명문의 제자라고 해도, 어린 녀석들이었다.
강량이나, 황가련의 젊은 도객 몇몇이면 상처 없이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중에 몇이 전혀 뜻밖의 수법을 펼쳤다. 마치 급작스럽게 공력이 급증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장담하건대 방심은 없었다.
오히려 남악도문과 아주 등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자들 몸을 상하게 할 수 없었기에 더욱 조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밀리는 것은 황가련의 도객들이었다. 강량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남악도문에서 다른 공력이라도 찾아냈다던가.
강량은 청사도를 불끈 잡았는데, 그보다 먼저 한 자루의 도광이 번쩍였다.
서장제일도, 무광도가 하늘을 먼저 가른 것이다.
놀라서 만류하고 자시고가 없었다. 위지백은 대뜸 칼을 던져서는 쓰러진 황가련 도객의 목을 찌르려는 도문 제자의 팔을 잘라 버렸다.
무광도는 하얀빛을 찬연히 뿌리면서 다시 위지백의 손으로 돌아갔다. 뱃전에서 저벅저벅 내려오면서 날아드는 무광도를 다시 움켜쥐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실로 천하고수의 풍모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딱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위지백은 불문곡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유독 두각을 드러내었던 도문 제자 셋의 한쪽 팔도 죄 끊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어디 놈들이냐 다그쳤다.
새파랗게 질렸지만, 그래도 호남 땅에서 명문이라고 자부하는 남악도문이다. 더구나 남악 형산이 바로 뒤였으니. 그들은 바락바락 악을 써 댔다.
본산이 저기다. 이제 본산 어른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러자 위지백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한 마디가 대체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위지백은 한달음에 형산을 치달려 올라갔다. 황가련은 물론, 황보도옥도 얼결에 뒤를 따랐다.
위지백은 남악도문의 본산 정문을 발길질 한 방으로 깨부수며 뛰어들었다.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미친 호랑이처럼 좌충우돌하였다.
본산에는 여러 어른과 고수들이 있었지만, 성난 위지백을 어찌 막아 내지는 못했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 위지백은 나오는 족족 때려눕혔다.
장문인을 비롯한 남악도문의 이름난 고수들은 때마침 외유 중이라서 화를 피한 셈이었다. 그 밖에 남악도문의 도포를 입은 자들이라면 죄 드러누워서 뒤쪽 요사(寮舍)에 갇혀 있었다. 다만, 이때에는 크게 피를 보는 일은 없었다. 그저 꼴이 엉망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일을 저지른 위지백은 저리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다음 일이 벌어질 적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산 건너에 황보가와 여러 무문의 고수들이 몰려오고 한참인데, 과연 괜찮을지.”
“하아, 강 노사. 저는 이제 고민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예측할 수가 없으니.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는 수밖에요.”
“그건 그렇군요.”
황보도옥은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강량도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숨 삼키고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