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불운한 서장제일도
남악도문에는 삼전오당(三殿五堂)이 있는데, 그중 제자들이 연무를 행하는 수신당이 눈에 들어왔다. 일 장 높이의 담을 둘러친 곳에서 힘쓰는 소리가 울렸다.
“흐압! 하압!”
“하앗! 히얍!”
강량과 함께 온 황가련 무인들이었다. 홀로 보인 위지백의 신위에 크게 자극을 받아서는 저렇게들 난리였다. 강량은 후, 한숨을 흘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무인이 자기 수련에 집중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연 정말 좋은 일일까. 강량은 돌아앉으며 눈매를 찌푸렸다.
위지백이 보인 일도(一刀), 아직도 선명하다.
남악도문도 그렇지만, 이후의 일이 더 문제였다. 채 하루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황보세가에서 세를 수습하여서는 남악도문의 본산을 되찾고자 달려왔다. 하지만 황가련이 나설 것도 없고, 황보도옥이 나설 것도 없이, 위지백이 단신으로 내쫓아 버렸다.
달려드는 그들에게 위지백은 마찬가지로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신위를 보였다. 앞장선 황보세가의 무사들을 다 때려누이고는 보란 듯이 일도를 휘둘렀다.
산, 바위를 깊이 갈라 버린 일도는 마치 단칼에 산봉우리라도 뎅겅 베어 버릴 듯했다.
압도적인 무력과 더불어서 거침없는 과단성이라니. 절정도를 완성한 강량이라도 감히 흉내 낼 일이 아니다.
황보도옥은 한숨짓는 강량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위지백이 보인 신위와 그가 단번에 벌여 놓은 일에 그녀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처 말리고 말 것도 없었다. 쫓아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태반이 끝난 상황이었고, 이후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하아.”
“후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에서 한숨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저기 뒤쪽에서 거듭하는 시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지백은 댓돌을 베고 누워서는 흐르는 구름 결을 물끄러미 보았다.
“날씨가 참 좋구나.”
“저어, 대협. 이리 있어도 될까요?”
위지백의 옆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위지백은 슬쩍 실눈을 뜨고서 옆을 흘겨보았다. 그 자리에는 바랜 천으로 얼굴을 꽁꽁 감싼 사내가 있었다.
그는 본래 은밀하게 소명과 위지백을 뒤따르라는 명을 받은 몸이었으나, 채 임무를 수행해 보기도 전에 덥석 붙잡혀서 위지백의 길잡이에,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지백은 그가 어디의 누구인지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부려 먹기만 하고 있었다. 덕분에 사내는 삼관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놓아두고서, 그저 ‘어이, 너, 자네, 야,’라고 불리기만 하고 있었다.
조심조심하는 삼관에게, 위지백은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뭐가?”
“아니, 조만간에 호남의 무림인들이 죄 들고일어날 터인데요.”
“지금 그러라고 이리 주저앉아 있는 것 아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태연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에 말끝을 흐렸다.
위지백이 이미 일도로 황보세가를 비롯한 호남 무림인들을 물러나게 했지만, 언제까지고 일이 좋게 돌아가겠는가.
호남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어쩔까 하고 걱정이 덥석 앞섰다. 삼관으로서는 왜 자신이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여기에 같이 있는 처지이니.
삼관은 혀가 굳어서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푹 고개를 떨구었다.
바깥 동정을 유심히 살피는데, 하루, 이틀 만에 호남 각파의 무림인들이 어김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래서야 천하에 무도하기 짝이 없는 도적이 될 판이었다.
그것을 헤아리니, 황가련에서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일 터. 아니라면, 다른 응원이 와야 마땅한 일이었다.
“광동 가는 일은 어찌하고.”
“어차피 늦었어. 듣자니 다 끝난 일이라지 않은가. 육가가 아주 호된 꼴을 당했다고 하니.”
“예에, 그게 그렇지요.”
개방 거지가 발 빠르게 사방으로 소문을 알린 덕분에 광동육가의 치부가 그만 만천하에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그간 일어난 무가련의 전횡을 의심하는 일이 속출했다. 그런 판국에서 호남황보 또한 마냥 태연할 수가 없는 노릇으로, 어떻게든 남악도문의 일을 서둘러 해결해야 했다.
“아아,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불운이라는 녀석이 들러붙은 것이 틀림없어. 암암, 그렇지 않고서야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나.”
위지백은 퍼뜩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들으라는 듯이 하는 말이었다. 삼관은 귀로는 들었지만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한 번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번 눈을 깜빡이고서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나 불운이라니. 불운을 탓하다니.
저 무서운 칼 한 자루를 앞세우고 불문곡직 남악도문으로 달려든 것이 어디의 누구더란 말인가. 광동의 일이 들려온 것은 여기 남악도문을 정리하고서도 며칠이 지난 다음이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삼관은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다. 대신 짧게 숨을 돌렸다.
“뭐, 어느 놈이든 오기만 하라고, 오기만. 으흐흐흐.”
그 사이, 위지백은 한탄하기를 관두고서 곧 살기와 더불어 실실 웃었다. 실로 호남 무림을 안중에 두지 않는 태도이지 않은가. 삼관은 질린 눈으로 위지백의 태연함을 보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래! 왔다, 이놈아!”
낄낄거리는 위지백의 웃음을 딱 끊어 버리면서 벼락같은 노성이 터졌다.
삼관은 놀란 자라인 양, 바짝 고개를 움츠렸다. 사방에서 종소리가 뎅뎅 울리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어디선가 터진 노성이 쩌렁쩌렁하여서 남악도문의 오래된 궁관을 뒤흔들었다.
“으헉! 아이고!”
죽을 자리라는 것이 딱 여기인 모양이다.
삼관은 당장 눈앞이 깜깜하고, 머리가 어질했다. 가까이 들린 일성의 여파가 그에게 와락 밀려든 때문이다. 다문 잇새로 피비린내가 차올랐다.
‘이, 이게 무슨.’
그는 흔들리는 무릎을 부여잡고서 겨우 몸을 가누었다. 용케도 주저앉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눈앞의 위지백은 그저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잉? 저 인간이 저런 얼굴을 할 때가 다 있나?’
당장에라도 토악질을 하면서 주저앉을 듯했지만, 삼관은 와중에도 위지백의 상판을 보며 딴생각을 했다.
위지백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삼관은 본체만체였다.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발치에서 꽝! 소리가 크게 터졌다.
“으익!”
위지백은 질겁하여서 한쪽 발을 치켜든 채, 굳어 버렸다. 뽀얗게 흙먼지가 일었다. 발치에는 얼핏 보기에도 석 자 이상의 깊이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에헤, 이거 단단히 뿔이 나셨구만.”
낭패한 일이다.
위지백은 찌푸린 얼굴을 돌렸다. 저 아래의 산문에서 한 인영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색이 한껏 바랜 남색 장포가 펄럭거렸다. 쿵쿵, 발소리까지 울려 가면서 다가오는데, 기세가 녹록지 않았다.
위지백은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후우, 한숨을 길고도 길게 흘렸다.
암만 하여도 웃고 넘어갈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다.
위지백은 대충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댓돌에 기대어 놓은 무광도를 차올렸다. 내딛는 발을 축으로 빠르게 몸을 비틀었다. 동시에 발도가 이루어졌다.
도광이 번쩍 치솟기 무섭게 거친 폭음이 돌연 터졌다.
꽈릉!
마른하늘에서 어디 벼락이라도 떨어졌는지, 놀라 간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위지백은 무광도를 내뻗은 채로 쿵쾅거리면서 거푸 물러났다. 발 딛는 자리마다 돌덩이가 쩍쩍 갈라졌다.
가까이에서 이를 목도한 삼관은 그저 입가를 틀어쥐고서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이, 이건 또 무슨!’
그는 부랴부랴 물러난 위지백과 저기서 다가오는 이를 번갈아 보았다. 남악도문의 앞마당은 드넓었다. 못해 십수 장에 달할 듯한데, 그 거리를 그대로 가로지르면서 이만한 위력을 보였다는 것인데.
사람의 경지인가?
위지백은 몇 걸음인가 물러난 끝에 충돌의 여력을 해소했다. 그는 퍼뜩 신형을 세우고서, 턱을 치켜들었다. 낭패한 표정은 간데없고, 크게 뜬 눈가에서 불이 쏟아졌다.
“이 인간이, 진짜 죽일 작정이냐! 심하잖아!”
“심하기는 개뿔이!”
등장한 소명은 내지른 주먹을 거두면서 욕설을 터뜨렸다. 진정 노한 까닭이라, 성난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소명은 위지백의 뻔뻔한 낯짝에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그리 신신당부를 하였건만, 전혀 엉뚱한 곳에서, 전혀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는 판이니. 내처 힘을 더하여서 날려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크게 자제한 것이다.
소명이 쿵쾅, 발소리 요란하게 위지백의 앞에 서자, 이내 좌우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황가련 무인들이 이제야 변고를 알고 달려 나온 것이다. 다급하게 칼날을 뽑아 들고서 소명을 경계했다.
“흐응, 여기서 대장 놀음에라도 빠진 게냐?”
“에헤이, 대장 놀음이라니. 그럴 리야 있나. 하다 보니 일이 뒤얽혔기 때문이지.”
“정말로 부탁하건대, 그 뒤얽힌 일이라는 게 사리에 맞기를 바라네, 친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말로 화를 낼 작정이거든.”
“잠시만! 잠시만!”
그때 황보도옥이 불쑥 끼어들었다. 상황이 아무래도 요상하게 꼬여가는 듯하여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지백은 그녀의 등장에 무광도를 내리고, 소명은 고개를 기울이면서 움켜쥔 주먹을 풀었다.
“아가씨는?”
“황보가의 도옥이라 합니다.”
“아아, 저 아래에서 그리 말하던 문제의 인물이시구먼.”
소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 황가련이라는 곳에서 절정도객을 방수로 삼아서 황보가의 영애를 억류하고, 남악도문의 본산을 침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 보기에 황보도옥은 딱히 억류된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소명은 황보도옥의 멀끔한 모습과 좌우에서 긴장한 채 서 있는 황가련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이들은 오히려 위지백, 황보도옥을 보호하려는 기색이었다.
분명 내막(內幕)이 있기는 한 모양이라.
성질을 잠시 미루어 두기로 했다. 소명은 쯧, 혀를 차고서 고개를 돌렸다. 황보도옥의 뒤에서 위지백이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낯짝이다.
기껏 다잡은 속내가 새삼 울컥 흔들리고 말았다.
소명은 뿌득 이를 악물고는 세차게 소매를 떨쳤다. 넉넉한 소맷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때를 같이해 위지백은 뒷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억!”
기척 없이 엄습한 경력이 뒤통수를 호되게 때린 것이다.
* * *
형산, 깊은 산에 어둠이 서서히 내렸다. 아직 서산의 노을이 다하지 않아서, 깊은 산곡을 가득 메우고 있는 운무가 흡사 타들어 가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가, 차츰차츰 사그라져 갔다.
산 중턱의 남조궁에서는 노을을 마주하면서, 밤을 맞이할 채비로 분주했다. 곳곳에 불을 밝히고, 칼 찬 무사들이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여기 있는 무사들은 그 출신이나, 내력이 다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황가련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억류한 남악도문 제자들을 살피고, 또한 외곽을 두루 경계했다. 넉넉한 머릿수는 아니었지만, 태만한 자는 없었다. 저기 산 아래에는 황보세가 외운당과 호남의 여러 무인이 진을 치고 있었다. 며칠 조용했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닌 까닭이다.
그리고 남조궁 본당에서는 스며드는 노을빛을 받으면서 네 사람이 마주하고 있었다. 불빛 받은 얼굴에 드러나는 심경이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고요했고, 누구는 심드렁했으며, 또 누구는 심각해서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여기서 맴돌았던 몇 마디의 대화가 지닌 무게는 막대했다.
“후우.”
답답함을 못 이겨서 자리의 유일한 여인인 황보도옥이 저도 모르게 긴 숨을 흘렸다.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듯하다. 가슴은 천 근의 추가 달린 것처럼 무거웠다.
강량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괜히 수염을 쓸어내렸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둘의 맞은편에서 서장제일도 위지백이 마냥 심드렁한 얼굴로 있었다. 입을 막아 버릴 정도로 두려운 말을 꺼낸 당사자치고는 참 천하태평이다. 그들은 이제야 위지백이 남악도문을 뒤엎어 버린 사연을 막 들은 참이었다.
차라리 한 고수의 변덕 때문이라고 하면 암담해도 어찌 이겨내련만.
‘마도(魔道), 마도라니.’
강량은 위지백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이름을 재차 곱씹었다. 그것이 어디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름이던가. 처음에는 무슨 나쁜 농을 들은 듯했다. 두 번이나 거듭 묻고, 위지백의 눈이 스산해지는 것을 보고서야 진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눈앞이 어찔하다.
방황하는 강량의 눈길이 문득 위지백의 옆으로 향했다.
낯선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한낮에 불쑥 올라와서는 자신을 그저 소림 속가의 한 사람이라고만 밝혔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신분은 아닐 터였다.
‘아무리 천하의 소림이라 하여도, 속가 제자가 한주먹에 서장제일도를 때려눕힐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