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마도의 그림자
본산의 나한이라도 쉬운 일이 아닐 게다.
소명이라는 이름 말고, 진실한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강량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산 아래에 있는 황보세가와 그 동맹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인데, 마도까지 나왔다. 눈앞에 있는 소림 속가에 대해서까지 헤아리기에는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위지 선생의 말씀은 아무래도 가볍게 들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적대하는 처지라고 하지만, 남악도문은 과거 호남을 대표하였던 형산파의 큰 줄기 중 한 곳입니다. 그런 곳이, 설마, 설마…….”
한참 침묵 끝에, 강량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차마 말을 맺을 수는 없었다. 지금 위지백에게 들은 것을 십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강량은 곁눈질로 위지백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귀 아래를 벅벅 긁적거리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 의심하는 거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연이 가볍지 않은 탓이지요, 위지 선생.”
황보도옥이 차분한 신색으로 말을 거들었다. 그녀도 새삼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지금껏 황가련과 황보세가 사이에서 큰 피해 없이 일을 매듭짓기를 바랐다. 그런데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일어난 셈이니.
해가 있을 때만 하여도, 그녀와 강량은 황가련과 황보세가를 필두로 하는 호남 무가련 간의 큰 다툼을 걱정하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은 판이 전혀 달라졌다.
위지백의 말대로라면, 남악도문을 범한 일은 진정 작은 가지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심지어 저 아래에 소천룡이 와 있다는 것조차 그렇게 와 닿지가 않았다.
위지백이 대뜸 꺼낸 한 마디는 그만한 무게를 지녔다.
마도가 모습을 감춘 것이 이미 한 세월이라고 하지만, 그 이름이 주는 두려움은 가볍지 않았다.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다.
마도가 고개를 들면, 어김없이 거대한 혈겁이 일어난다.
천하를 휩쓸었고, 빈부귀천이나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미 몇 차례나 일어나지 않았던가. 무림 일문으로 마도의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나, 경고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보도옥은 숨을 달랬다. 마냥 흔들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남악도문의 이름 아래에 마도의 종자가 뿌리내린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그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
“지금의 말씀은 여기 남악도문에서, 아니, 호남 무림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흠, 그렇기도 하지.”
위지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도옥의 말대로 사안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에게 굳이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 흘깃 소명을 돌아보았다.
“헤헤, 일이 이렇다.”
묵묵부답, 내내 조용하던 소명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유가 마땅하네. 다른 것도 아니고, 마도에 빠진 것들을 네가 잘못 봤을 리는 없겠지.”
소명은 쯧,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광동에서 딴 길로 샐 만한 이유였다. 아니,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또 마도가 불쑥 튀어나왔다.
벌써 세 번째.
하남 등용문, 하동 흑선당과 강시당, 그리고 호남 형산이라니. 이곳 형산은 더욱 위험했다. 마도의 종자가 은밀히 자라고 있는 형국이니.
위지백이 먼저 마주하여 베어 버린 놈들은 제법 악취가 나기 시작한 것들이라고 하였으니, 그 표현대로라면 마도에 접어든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것이다.
황보도옥은 위지백과 소명의 모습을 또한 의아하게 보았다.
‘이것은, 위지 선생이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느냐만, 아무리 보아도 단순한 사이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주종이라 하기에는 너무 격의 없고, 친우 사이라 하기에는 눈치를 과하게 본다. 강량은 혼자 머리가 복잡해서 미처 둘 사이를 헤아리지 못하였지만, 황보도옥은 이 와중에도 여인의 예리한 촉각으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이한 기류를 읽어 냈다.
정확하게는 위지백의 눈치였다.
이것은 마치, 마치.
‘무슨 빚이라도 진 사람 같군.’
황보도옥은 저도 모르게 짙은 눈썹을 잠시 찌푸렸다. 빚이라면 무슨 빚이 있어서 위지백 같은 도객이 쩔쩔맬까.
“황보 아가씨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오?”
“예?”
황보도옥은 넌지시 물어 오는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소림 속가라는 소명이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보다, 두 분. 이제부터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마도의 낌새를 아시고, 남악도문을 치셨다고 하셨으니. 허면 이후로 어떤 복안이 있으신지요?”
“달리 복안이랄 것이 무어 있을까. 원칙대로만 하면 될 일이지.”
“원칙?”
위지백은 눈을 빛냈다. 자객불원으로서 자객살수를 상대할 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홀린 놈, 홀리는 놈, 홀릴 뻔한 놈, 죄 베어 버리면 그뿐.”
그리고 어깨에 걸쳐 놓은 무광도를 힘주어 잡았다.
강량과 황보도옥은 순간 아연하여서, 입을 쩍 벌렸다. 그 말대로라면 남악도문과, 아니 호남 무림과 아주 척을 지고 말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위, 위지 선생.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 남악도문은 그래도 명문이라는 곳인데.”
“원 별걱정을. 이 위지백, 그렇게까지 생각 없는 인간은 아니오.”
위지백은 히쭉 웃으며 가슴을 쳤다. 그러나 하나 설득력이 없다. 생각이 있다면, 대뜸 남악도문까지 치달려 올라올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네가 그런 말을 하냐.”
“아니, 뭘.”
소명마저 어이없어 면박이다. 소명이 입가를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아직 멍한 강량, 황보도옥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일에는 선후가 있으니, 우선은 위지 녀석이 무턱대고 저질러 놓은 남악도문과의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마무리라 하시면? 어떤?”
강량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소명의 한 마디는 위지백과는 또 다른 무게를 지녔다. 가볍게 들리지가 않아서, 절로 귀를 세웠다. 소명은 남악도문과의 일을 큰 충돌 없이 마무리 짓겠다고 약조했다. 그 방안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위지백과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위지백이 대번에 시무룩하여서는 고개를 돌린 까닭이다.
그리고 소명은 말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오. 그것들은 꽤 음흉하면서도 성급하거든.”
“음, 그렇지. 음흉하고 성급하지.”
위지백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두 사람은 어째 지긋지긋해 하는 투였다. 강량과 황보도옥은 아무 말 못 하고,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는 더 놀랄 것도 없으리라 여겼건만.
‘마도’, 그 공포스러운 이름 앞에서 태연자약을 넘어, 귀찮아하는 기색이라니.
“그때 두 분께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소.”
“도움이 된다면야 무엇이든지 하지요.”
“아무렴요. 다만, 도움이 되겠습니까?”
강량도, 황보도옥도 마다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걱정이었다. 자신들이 마도를 상대로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소명과 위지백은 때가 올 것인즉, 그때에 나서 달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매듭짓고, 자리는 일단 파했다.
강량과 황보도옥은 들어올 때보다 더욱 창백한 낯빛을 한 채, 본당을 나섰다.
남조궁 곳곳을 밝힌 불빛은 환했다. 경계를 서는 황가의 도객들이 여기저기서 그림자를 흘리며 다녔다.
소명과 위지백은 본당의 높은 처마에 올라앉았다. 그들은 노을이 다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한참이고 말이 없었다. 위지백은 술병 하나를 손에 들고서 같이 보다가 툭 한마디를 물었다.
“고 녀석은 어때?”
“여전하지 뭐. 여기 올라오는 데에도 떼어 놓는다고 한바탕했다.”
“크크크.”
위지백은 키득거리고는 술병을 슬쩍 기울였다. 술 한 모금에 한숨이 따라서 흘렀다. 녀석이라고 하면, 화염산주 아함을 말함이다. 소명도 따라서 한숨을 삼키고는 천산 검객 장관풍이나, 하남의 담 가주 내외까지. 아함에게 휩쓸린 이들 얘기를 간단히 늘어놓았다.
“참, 대단도 하여라. 아니, 제 놈이 화염산을 떠나고 뭘 얼마나 되었다고.”
“말해 무엇하겠냐. 그게 아함이지.”
푸념 섞인 한마디였다. 위지백은 공감하여서 술병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젖은 입가를 소매로 훔쳐냈다.
“저 아래에 소천룡인지, 뭔지도 와 있다고?”
“음, 네가 반가워할 두 사람도 같이 있다.”
“참 대단하다, 대단해.”
위지백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천룡세가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끈덕지게 들러붙더니, 기어코 소천룡까지 등장했다.
소명은 대답 대신 심드렁한 위지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가려서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그시 보는 눈길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위지백은 커흠, 헛기침을 흘리며 턱 아래를 벅벅 긁적거렸다. 싫은 기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소명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다 헤집어 놓은 보람이 있더냐?”
“음, 강변에서 마주했던 놈들 서넛이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고. 여기 본산이라는 곳에 있는 것들은 그저 냄새만 조금 나는 정도더군. 그래도 어른이라고 할 만한 이들은 근자에 들어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야. 운공에 들면 진경이 흔들리는 통에, 며칠 동안은 연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럼.”
“여기 있는 것들은 그저 표면에 드러난 것들이고, 진짜 병근(病根)은 저 바깥에 있다는 것이지.”
위지백은 새삼 굳은 낯으로 말했다. 소명은 산 아래를 향해서 잠시 눈길을 던졌다. 흐린 불빛 몇이 깜빡거리는 것이 아스라이 보였다.
저곳에 황보세가 외운당과 남악도문, 그리고 호남의 무인들이 밤을 지새우고 있다.
남악도문 전체가 마도에 빠졌다면 차라리 일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불문곡직, 전부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았을 적에, 분명 한두 놈이 마도에 들어서, 야금야금 가까이 손을 쓰고 있었다. 남악도문 또한 큰 화를 당한 셈이다.
소명은 입매를 비틀었다. 맺힌 조소가 차갑다. 그런데 위지백이 넌지시 물었다.
“저기, 그런데 말이야.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냐?”
“왜? 하기 싫어?”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 뭐랄까.”
위지백은 소명의 눈치를 보면서 자꾸 주저주저했다. 뭔가 마땅치 않은 일을 해야 할 판이다. 소명은 물끄러미 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안 되는가 싶어 위지백이 침울해져 있는데,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 싫다면야, 다른 방법도 있지.”
“그으래? 이그,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다른 방법 소리에 위지백은 대번에 반색했다. 기대감이 그득했다. 뭐라든 간에 지금 당면한 것만 아니면 그대로 따를 양이다.
“내가 지금 네놈을 때려잡고, 도적의 수괴를 잡았노라 하면 되지 않겠어? 일단 그걸로 진정은 할 텐데 말이야.”
“아, 아하하. 이보게 친구. 무슨 농을 그리 살벌하게 하시는가.”
“농처럼 보여?”
소명은 위지백을 보지 않고 천천히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우드득 소리가 울리면서, 앉은 기왓장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흰소리는 더 통하지 않을 요량이다.
“에이, 알았어.”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있는 자존심을 우선 내려놓아야 할 판이다.
“해, 하면 될 거 아냐.”
“그게 간단하지.”
“에효.”
지금 마도의 일을 꺼낸다고 저기서 덥석 ‘예,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할 리도 없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버티고 있을 것도 아니다.
위지백은 습관적으로 술병을 기울였다가, 전 같지 않은 맛에 오만상을 썼다.
“쩝, 술이 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