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마도의 그림자
소명과 위지백이 남조궁 처마에서 달빛 흐린 밤하늘을 같이 보고 있을 시각, 소천룡 회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느 천막에 앉아 있었다.
황보세가 측에서 내준 천막이었다. 가운데에서 유등이 환하게 타올라 내부를 비추었다. 천막은 크고 넓어 장정 대여섯이 편히 머물만했고 침상, 다탁을 비롯한 일체를 갖추어서 여느 객방에 못지않았다.
소천룡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참으로 고아한 얼굴이었지만, 흔들리는 불빛이 그리는 음영 사이로 지친 모습이 엿보였다.
‘여기서 이리 멈추면 아니 되는 것인데.’
전혀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회는 마음을 쉽게 다잡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낙양으로 향하고자 하건만, 정작 당사자가 여기에 없다.
상념이 계속해서 이어지려고 하자,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내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냅다 산을 올라가 버린 소명이 빨리 내려오기를 바랄 뿐이다.
소천룡은 문득 옷깃을 세우고 천막을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홀연 불어와 옷자락을 흔들었다. 고개를 들자, 까맣게 물든 어둠 사이로 남악의 복잡한 산세가 흐릿하게 보였다.
소천룡은 이내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예, 소천룡.”
불빛 닿지 않는 곳에서 인영이 은밀히 다가왔다. 백검당주 사마청이다. 그는 주변을 의식하여 한층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천룡, 어찌할까요. 낙양에 우선 소식을 전하는 것도 방편일 듯합니다만.”
“아니, 아닐세.”
소천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굳은 눈으로 달빛 아래에서 흐린 형산의 산세를 바라보았다.
가문에서도 극비로 행하는 일이었다. 여기 흑백 양 당주가 와준 것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소명 공께서 직접 나서면서 하루만 기다리라 하였으니, 그대로 따르도록 하세. 추이를 보고 나서 움직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으니.”
소천룡은 늦어지는 걸음에 가슴 졸이던 것을 감추고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심란함 탓일까.
저기 산세가 하염없이 어둡게만 보인다.
사마청은 소천룡의 차분한 말에 더 말하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숙인 얼굴에는 걱정이 잠시 드러났다. 산을 오른 용문제자에 대해서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였으나, 저기 위에 있는 위지백이라면 아주 뼈가 저릴 정도로 호되게 겪어 본 바였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 * *
늦은 밤, 검은 하늘에는 별빛이 총총하다. 옅은 구름이 느릿하게 흐르며 서늘한 바람이 일고는 했다. 어느덧 더위는 다하고 초가을에 접어들 시기였다.
하남성의 어느 한촌, 제법 규모가 있는 저택 후원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을 환히 밝혀 놓고 있었다. 조촐하게나마 지어 놓은 팔각의 정자에서 그림자 셋이 흔들렸다.
“사천! 사천이라고!”
퍼뜩 놀란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한쪽에서 누군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럼, 그 녀석이 갈 데가 사천이지 어디를 가겠어?”
“아니, 아니, 왜?”
다시 묻는 목소리가 한결 풀이 죽어서 조심스럽다.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와하하하!”
“으하하하!”
“아니, 대단하신 황자 나으리께서 어찌 그렇게 바짝 쪼그라드셨을까?”
놀리는 웃음과 한 마디에 사내는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실로 흥겨운 모습이었다. 옛적 친구가 수년 만에 서로 얼굴을 보는 자리였다. 그러나 모여 앉은 셋의 면면을 보면 천하가 요동칠 정도였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크게 웃어 대는 얼굴 하얀 미남자는 당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강시당의 신임당주, 탁연수. 그 옆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있는 금의화복의 사내는 근자에 들어서 두각을 나타내는 십삼황태자 주이청이다. 그리고 두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사내는 공히 하남제일이며, 소림 속가를 대표한다고 하는 등용문의 젊은 맹호, 호충인이다.
면면이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강호의 신비, 황실의 실세, 그리고 강호의 일세라는 것이 다 무의미할 정도로, 세 사람은 허물없이 웃고 떠들었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란 그런 것이니.
나라의 황자를 놀리는 맛에 탁연수는 물론 호충인까지 가세하였다. 여기에는 없는 두 사람 중 하나, 당민 때문이었다.
이청은 짐짓 무심한 척했지만, 당민의 이야기 앞에서는 도통 속내를 감출 수가 없었다. 갈수록 이청은 궁지에 몰리는 모양새였다.
소명에게 듣기로, 당민이 얼마 전까지 안휘에 있다고 알았는데. 지금 그녀가 사천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가 들썩거렸지만, 옆에 앉은 둘의 웃는 눈빛에 퍼뜩 이를 악물었다.
“하하, 이 자리에 소명 놈이 없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그렇지. 그놈이라면 더하면 더했을걸.”
“그게 위로라고 하는 거냐?”
“아무렴.”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다.
생사 위기를 넘긴 탁연수는 한결 웃음이 많았다. 강시당의 공력을 이루어 낸 것도 있겠지만, 옛적의 천성을 되찾은 듯했다. 그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또 호충인을 흘깃거렸다.
이번에는 화살이 호충인에게 향할 참이라.
“그래, 제수씨는 대관절 언제 보여 줄 셈이냐?”
“케헥! 켁! 켁!”
갑작스럽다. 호충인은 마시던 술을 그대로 뿜어내며 밭은기침을 연신 터뜨렸다. 그는 술이 뚝뚝 떨어지는 입가를 훔칠 생각도 못 하고, 놀란 눈으로 탁연수를 올려다보았다.
“너, 너, 어떻게?”
“뭘 어떻게야, 다 들었지.”
탁연수는 배시시 웃었다. 호충인은 이를 앙다물고 끄응, 앓는 소리를 흘렸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고민할 것도 없다.
“소명, 이 자식.”
“야, 야, 소명 탓 마라. 그놈 아니었으면 네가 여기서 멀쩡했을까.”
“남 말 하냐!”
호충인은 탁연수의 한 마디에 불끈해서는 빽 소리를 높였다.
“하하, 그도 그렇다.”
여기 모인 셋 모두 소명의 도움으로 백척간두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놈도 참,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 건지,”
“광동 소식 못 들었어.”
“듣기야 했지만.”
한 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소명의 이야기에 웃음이 잠시 잦아들었다.
“다 여기에 있었던 게냐.”
“스승님.”
불현듯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아직 단단한 외양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 호가무관의 관주, 호경한이다.
하남 무림에서 말하는 십대권사 중에 항상 손꼽히는 양천호격(陽穿虎擊)이 눈앞의 노인이다.
탁연수와 이청은 바로 일어나 두 손을 맞잡았다. 호 관주는 허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신분을 모를 적에야 거리낌이 없었지만, 그래도 일문의 젊은 주인과 나라의 황자가 한자리에 있다. 그들에게 스승의 예를 받는다는 것이 어째 어렵다.
한때에 가르치기는 하여서 제자라 하여도 무리는 아니겠으나, 아무래도 면면이 대단도 하였다. 특히 얌전하였던 아이가 황자의 몸일 줄이야.
금 선생이었던 성 부인이 남다른 내력을 지니고 있음을 헤아리고 있었기에 짐작은 했었지만, 그래도 황족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하남의 한촌에 숨은 몸이라고는 하나, 들려오는 풍문에 아주 귀를 닫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황실에서 새로운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십삼황자라 하지 않았던가. 또한, 다른 아이는 강호의 이대 신비라 하는 강시당 당주라고 하였으니.
“스승님, 그저 편히 대해 주십시오.”
“허, 그래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촌로에 지나지 않는 몸이건대.”
“여기서는 주이청이 아니라, 그냥 이청입니다. 스승님.”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까지 그러시면 이놈이 어디서 편하게 있겠어요?”
“아이쿠!”
아무리 그래도 황자에게 이놈 저놈이라니. 호 관주는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터뜨렸다. 호충인은 부친의 놀라는 모습에도 히죽 웃었다.
“아니, 세상천지에 제자를 어려워하는 스승이 또 어디에 있답니까.”
호충인은 웃으며 면박이었다. 호 관주는 찌푸린 눈으로 흘겨보았지만, 아들 말이 가히 틀리지는 않았다.
“알았으니, 그만들 하게.”
“편히 말씀하시지요.”
“어디 그런 말을. 이 만큼으로도 내 노력하고 있는 바이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청이 그런 말을 하다니. 전하 운운하지 않는 것만도 꽤 어려운 일을 하는 셈이었다.
“아이고, 아버지도 참.”
호충인은 헛기침 흘리는 부친을 보면서 실실 웃었다.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에 황자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까.
“공연한 소리 하지 말아요.”
문득 안채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큼직한 접시를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호청연이다. 그녀는 밤늦게 벌어진 술판에 급하게 안주를 마련하고, 요리한다며 정신이 없었다.
이래저래 없는 재료를 다 모아서는 한 상을 차려 낸 마당이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상 위에 소리 나게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냉큼 가자미눈을 하고서 탁연수를 노려보았다. 허여멀건 한 얼굴은 옛적과 다름이 없다.
호충인은 그런 동생의 눈초리에 어이가 없다.
“넌 또 왜 그런 눈이냐?”
“흥! 그렇게 훌쩍훌쩍 떠나고서 무슨 염치로 이렇게 돌아왔대요?”
“오호, 인제 보니, 우리 호 동생이 단단히 삐친 모양이군.”
“삐치다니!”
“아이구, 그래, 그래.”
탁연수는 여전히 아이를 대하듯이 호청연을 어른다. 그것이 더욱 여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건만. 부릅뜬 도끼눈에도 탁연수는 여전히 싱글벙글하였다.
딱 예전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벌써 십수 년도 훨씬 지난 세월이건만.
“에잇! 몰라요!”
호청연은 빽 소리치고 돌아 나가 버렸다. 호 관주는 딸의 그런 모습에 끌끌, 혀를 찼다. 아무리 오랜 사이라 하여도 그렇지, 어찌 저리 무람없이 구는 것인가.
“저런, 녀석 하고는.”
“마음 두지 마십시오, 스승님. 연수의 농이 과했던 게지요.”
이청은 말하면서, 꾸짖듯이 탁연수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탁연수는 눈동자를 빙글 굴리면서 모른 체였다.
“허허, 이것 참.”
호 관주는 멋쩍음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호 관주는 너무 오래 마시지는 말라 당부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세 사람이 앉은 자리에 새삼 침묵이 앉았다. 그들은 빈 잔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웃고 떠든 시간은 이제 지나갔다. 그들 얼굴은 무엇 때문인지 심각했다.
“소명이 나한테 당부를 하나 하기는 했는데 말이야.”
조용하다가, 호충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너도?”
“역시 너희한테도 했나 보구나.”
“어찌 생각해?”
탁연수와 이청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신중했다. 이청은 두 손으로 온기가 따끈한 찻잔을 감싸 쥐었다.
“마도의 준동이라.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니지, 안 그래?”
“음, 이청 말이 옳다. 마도가 조용한 세월이 벌써 몇 년이야?”
“근자에 들어서 강호에서 큰일이라면, 구파와 무가련의 알력 정도이기는 했지.”
크고 작은 갈등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었지만, 한 지역을 뒤흔들어 댈 정도의 큰일은 좀체 없었다. 특히 하남 일대는 소림파를 중심으로, 등용문이 단단히 단속하고 있으니, 다른 부침이 더욱 적었다.
큰 소요가 있을 적마다, 호충인은 휘하를 이끌고 달려가 일망타진하기도 했다.
자연 하남의 무림은 소림파를 비롯한 중소무파가 여느 곳보다 훨씬 강성했다. 그 힘이 모여서 적어도 하남 쪽에는 무가련의 입김이 다른 지역만 못했다.
그런데 소명은 마도의 준동을 여기 친우들에게 경고했다. 특히 호충인은 섣불리 들을 수가 없었다. 쉬쉬하고 있지만, 암암리에 퍼져 나간 소문.
등용문의 대공자가 마도에 들어서 큰 화를 입었다는 것.
실제 호충인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던가. 그는 한층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마도가 준동한다면.”
“우리 힘으로 무얼 할 수가 있겠나. 강호가 힘을 모아야 할 터인데.”
“아니, 그렇게 생각할 일도 아니지.”
불현듯 호충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이 모이면 떠든다고 반이야. 누구는 의기에 넘쳐서 달려들 테고, 누구는 이해관계를 따지려 들 터이고. 뭐, 어디 사람이 제각각인데, 뭘 할 수 있겠나.”
괜히 하는 말이 아닌 모양이다. 호충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남 일대를 뛰어다니면서 소림파의 대소사를 챙기다 보니, 온갖 꼴을 본 까닭이다.
어느 곳은 도와주러 와서 고맙다고 달려 나오지만, 어느 곳은 온갖 트집을 잡아 대면서 자신의 이득만 취하려 하기도 했다.
“일단 들쑤시면 싫든 좋든 움직일 수밖에 없을 터이니. 그런 생각은 젖혀 두자고.”
“호오, 등용문의 차기 문주가 하는 소리치고는 꽤 위험한 발언 아니냐?”
“킁! 차기 문주는 무슨.”
호충인은 혀를 찼다. 아니 그래도 부담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금은 허락을 받고 쉬는 기간이었지만, 돌아가서 다시 뒤를 이으라 강권할 등용문주를 생각하니 골이 아팠다.
“여튼 임자 있는 몸은 달라. 그렇지 않냐?”
탁연수는 물러나지 않고, 실실 웃었다. 이제는 놀리는 대상이 이청에서 호충인으로 바뀐 셈이다. 이청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빼지는 않았다.
“그러게나 말이야. 스스로 천생 무골이라고 자처하지 않았던가? 여색은 약한 것들이나 탐하는 것이라면서?”
“야, 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글쎄, 내 기억으로는 그렇게 어리지는 않았을걸.”
호충인은 다급하게 얼버무리며 두리번거렸다. 행여나 선자가 듣지는 않을지. 걱정이 솔직했다. 엉덩이가 다 들썩거렸다.
난처한 꼴은 참 보기가 좋다.
탁연수, 이청은 숨죽여 키득거렸다. 이미 꽉 잡힌 몸이라는 것이 훤히 보여서, 나중이 참으로 기대되는 바이다.
“흠, 천하의 차기 등용문주가 공처가라고 하면, 그것도 재밌겠네.”
“야, 너는 다를 것 같냐? 너도 똑같다, 똑같애.”
“내, 내가 무슨.”
탁연수는 어이없어하며 이청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