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89
189화. 칼바람에는 자비가 없다
강량은 본당에서의 불편한 자리를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황가련 무사들을 단속했다. 질서 정연하게 서 있는 그들은 또렷한 눈으로 강량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전의는 지금 최고조에 도달해 있었다.
서장제일도가 보인 신위와 더불어서, 그가 황보세가는 눈에 두지 않고 남악도문 장문인에게 직접 고개 숙이는 모습이 이들에게는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호남에서 황가련의 세가 점점 위축되어 가면서, 이들 또한 전의가 시들어가던 터였다. 위지백이 보인 압도적인 무력과 깔끔하게 물러나는 모습은 이들 가슴에 새삼 바람을 불어넣었다.
강량은 그런 무사들 모습이 싫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기에 없는 몇몇이 아쉬웠다.
제자인 백기는 배에서 위지백에게 호되게 당하고 모처로 옮겨 놓았다. 그가 여기에 있다면 큰 경험을 하였을 터인데.
강량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상념은 여기까지이다. 그는 줄지어 선 황가련 무사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쩌면 호남 무림, 아니 천하무림의 안위에 연관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너희는 마땅히 긴장하도록.”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황가련 무사들은 가볍게 듣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낯빛을 정돈하고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
“예, 노사!”
강량은 입매를 잠시 비틀어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돌렸다.
“자아, 이제 그쪽은 어찌하시려오, 황보 소저.”
황보도옥은 차분한 눈으로 황보영운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황보영운은 잠시 당황했다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찌푸린 눈매에 불쾌한 심정이 절로 떠올랐다. 그는 남조궁 본당을 나서기가 무섭게 황보도옥의 부름을 받은 참이었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외운당을 잠시 물리라는 것뿐이다. 그 한마디가 어렵더냐?”
“외운당이 불복(不服), 불패(不敗), 불퇴(不退)의 삼불당(三不黨)이라 불리는 것을 모르십니까?”
황보영운은 짐짓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항복하지 않고, 패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삼불당. 이는 외운당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별칭이었다. 그러나 마주한 황보도옥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고요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서?”
“예?”
“그래서, 지금 불복하겠다는 뜻이더냐?”
황보영운은 그만 말을 잃었다. 고요한 황보도옥의 눈을 똑바로 보고서, 당연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꺼운 입술을 질끈 물었다. 목덜미가 무겁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찌 제가 감히.”
“영운.”
“예, 누님.”
“이번 일로, 외운당은 황보외당 중에서, 아니, 본가의 어느 곳보다도 그 이름이 앞서게 될 것이다.”
황보영운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황보도옥의 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가문에 있어서 골칫덩이나 다름없는 황가련이 눈앞에 있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서, 어찌 이름을 앞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의아하기는 뒤에서 조용한 백소설도 매한가지. 그녀는 시린 눈빛으로 황보도옥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황보도옥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요하면서도 한층 무거운 눈빛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뭔가 있어.’
백소설은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호남의 요호라고까지 불리는 그녀였다. 황보도옥이 괜히 외운당을 주저앉히는 것일 리가 없다. 백소설은 황보도옥의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에서 다가올 무엇을 감지했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일 듯하다.
“먼저 말씀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음.”
황보도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 할 긴장감이 흘렀다. 황보영운은 아무래도 상황이 마뜩잖았다. 그러나 건너에 소천룡이 있고, 서장제일도라고 하는 절대 도객이 있었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였다가는 일이 어찌나 크게 번져갈지.
적어도 그 위험은 알았다.
황보영운은 입매를 힘주어 비틀고는 백소설을 돌아보았다. 의견을 구하는 눈빛에 백소설은 눈을 얇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도옥의 뜻에 따르라는 것이다.
“후우, 알겠습니다. 누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형제들을 단속하도록 하지요.”
황보영운은 반쯤은 체념이었고, 반쯤은 반항 어린 기색으로 대꾸하고는 방을 나섰다. 열고 나가는 서슬에 형산의 짙은 운무가 잠시 엿보였다.
운수당(雲水堂). 남조궁의 객방으로 고색창연한 옛적의 전각이 동, 서, 남으로 세 채가 있었다. 특히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장소로 규모도 번듯했다. 지금은 전에 없이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한쪽은 황보세가 외운당 무사들이고, 다른 쪽은 황가련 무사들이다. 그 외에도 소천룡의 일행에게 또 다른 한 채를 내주었다.
“허어, 남악도문이라고 하면, 과거 구파의 반열에도 올랐던 형산파의 후신일진대. 오늘 뜻밖의 횡액을 당하였구나.”
담일산은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옆에서 조용히 염주 같은 것을 굴리던 성 부인이 어머, 의아한 눈으로 부군을 돌아보았다. 크게 상한 사람도 없고, 위지백이 직접 고개 숙이며 남악도문의 체면을 살펴 주기도 하였다.
“어찌 횡액이라고 하십니까?”
“차후, 형산파를 도모하려거든 이날의 일이 큰 장애가 될 수도 있지 않겠소?”
“오히려, 오늘의 일로 형산을 도모하고자 할 수도 있겠지요.”
“흐음, 그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려. 부인.”
큰일에서 대범한 모습을 보였으니, 포용하는 덕을 보일 수도 있다. 옛적의 일문을 다시 이루어 내겠다고 한다면, 그러한 자세도 득이 될 수 있는 것일 터이니.
담일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무림의 일이, 아니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어디 보이는 대로만 돌아간다든가. 더욱이 소명이 있었다. 어떻게 일이 마무리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성 부인은 염주를 주섬주섬 정리하며 문득 말문을 열었다.
“다만, 오늘의 일로 남악도문의 일이 모두 마무리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음.”
산을 오르는 와중에 잠시 엿보았던 백진자의 기이한 낯을 떠올리면서 담일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좌우에는 소명과 위지백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 오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산 아래에서는 마치 체념한 듯이 고소를 머금던 얼굴이 점차 파랗게 질렸다가, 곧 시커멓게 물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백진자는 바로 낯빛을 수습했지만, 담일산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담일산은 짧은 숨을 흘렸다. 그러고는 문득 눈을 돌렸다.
새삼 객방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문에서 내준 이곳은 정갈하고 드넓었다. 천장이 높았으며, 창이 커서 채광이 좋았다. 소천룡과 함께한 일행이라는 것이 더욱 큰 이유이겠지만, 굳이 내준 좋은 방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커흠, 커흠. 그러고 보니, 산주께서는 따로 묵으시는 모양이구려.”
담일산은 나직이 헛기침을 흘렸다. 본래 둘이 오붓하게 나선 유람 길이었다. 마냥 고즈넉하다가, 천만뜻밖의 인연으로 광동의 큰일에 휩쓸리기도 하였으니.
참 격렬한 나날이다. 와중에 새삼 부부간에 있는 자리가 멋쩍었다. 성 부인은 그의 속삭임에 잠시 멈칫했다. 고운 얼굴에 발그레 열이 올랐다.
“그,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이리 오붓하게 있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군요.”
“부인.”
“상공.”
담일산을 슬쩍 손을 뻗어, 성 부인의 하얀 손을 깍지 끼며 맞잡았다. 아직 날도 밝건만, 눈빛과 눈빛이 스치고, 주책없이 숨이 잦아들었다.
“흐에에엥!”
그때 급작스럽게 우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질 것처럼 와장창 열렸다. 화염산주 아함이다. 부부는 자연스럽게 서로 손을 놓고 슬쩍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 사이로 아함이 파고들어서는 마구 우는소리를 했다.
성 부인은 자연스럽게 아함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부부간의 오붓한 시간은 한참 물 건너간 모양이다.
“또 혼나셨군요.”
“히이잉.”
소명에게 들러붙었다가 또 불벼락을 맞은 것이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라. 두 내외는 그저 쓴웃음만 흘렸다. 아무래도 뚝딱 달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성 부인은 담일산에게 눈짓했다. 자리를 피해 달라는 뜻이다. 담일산은 멋쩍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인.”
“예.”
담일산은 자연스럽게 방을 나섰다. 닫은 문틈 사이로 아함이 칭얼대는 소리가 새었다. 담일산은 에휴, 짧은 한숨을 흘렸다. 두 어깨가 괜히 축 내려갔다. 어디 달리 갈 곳도 없어서, 담일산은 다른 방에서 혼자 머물고 있을 장관풍을 찾아갔다.
남조궁을 다시 찾아, 조사께 예를 올리는 것을 일단락하고서, 본당에는 이제 몇몇만 남았다. 백진자는 제자들에게 일러, 황가련 또한 예를 갖춰 대하라고 당부했다.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속이 불편했지만, 그들은 한목소리로 답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본당에는 백진자와 소명, 위지백이 남았다. 하루 전만 하여도 강량과 황보도옥을 마주하였던 자리였다. 소명은 잠시 입매를 비틀었다. 그런데 그를 보는 백진자와 위지백의 얼굴이 못내 어색했다.
방금 한바탕 소란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줄줄이 나가는데, 한 여인이 불쑥 뛰어 들어왔다. 화염산주 아함이다. 그녀가 꼬박 하루를 참은 것도 참 용한 일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소명이 그녀의 응석을 받아 주지는 않았다.
형산에서의 일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함은 참았던 만큼이나 막무가내였다. 아이처럼 고집부리는 것을 달래는 것도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함의 어깨 위로 절로 불길이 일어났고, 언성을 높이면 불꽃이 색을 달리했다.
참으로 세상에 다시 없을 신이한 광경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모두를 싹 무시해 버리는 소명도 참 대단했다. 아함을 겨우 돌려보내고, 소명은 내심 한숨을 쉬다가 문득 자신을 향한 기이한 두 쌍의 눈길에 입매를 찌푸렸다.
“지금 이리 한가할 때가 아닌 듯한데.”
“어흠, 그렇지요. 그렇지요.”
백진자는 놀란 눈을 급히 수습했다. 이리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위지백도 헛기침을 연신 흘렸다.
“아함 녀석, 폐관한 보람이 있네. 주변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잖아.”
“음, 그렇지.”
“그래도 너무한 것 아니냐. 난 아주 본체만체야.”
위지백은 자신을 한번 흘겨보기만 한 아함의 모습에 짐짓 인상을 썼다. 소명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찍힌 거지. 못 믿을 사람으로.”
“뭐? 아니, 내가 뭘?”
“아아, 둘 사이는 나중에 알아서 하시고.”
소명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 치며 말문을 막았다. 지금 그의 불만을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위지백도 더 고집하지는 않았다. 두 사내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저 둘을 보는 백진자의 얼굴에서 어색한 기색이 드러났을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함이 난리 친 여파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백진자는 괜히 헛기침을 흘리면서, 소명과 위지백을 번갈아 살폈다.
“그럼, 이제부터 얘기를 나누어 볼까요, 두 분.”
표정이 새삼 진지해졌다.
위지백은 흘깃 소명을 보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처음 시작은, 말했다시피 몇몇 젊은 제자가 함부로 손을 쓰는 것을 보고 알았더랬소. 자기들이 밀린다 싶으니까. 마공기력을 두서없이 뿌려 대더군. 딱 보아도 하루, 이틀 만에 이루어 낸 수준이 아니었소.”
백진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들은 내용이었지만, 다시 정리해서 들으니 울림이 달랐다. 위지백은 어린 제자가 이 정도라면, 본산에도 그보다 더한 위험이 있으리라 판단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남악도문을 뒤집어엎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위지 선생. 어떠하였습니까?”
“음, 본산에 남은 이들 중에서 마공기력을 부릴 줄 아는 이는 없었소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장문인을 비롯해 바깥에 있던 이들을 의심하고 있소.”
백진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마저 의심한다는 것에 불쾌할 것은 없었다. 그저 마도의 근원이 불확실하다는 것이 걸릴 뿐이었다.
위지백은 백진자의 침중한 안색을 보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여보오, 장문인.”
“말씀하시지요, 위지 선생.”
“근자에 들어 진경이 요동치는 일이 없었소?”
“진경이 요동치다니, 그게 무슨.”
“운공을 하다가 심주가 흔들리거나, 사념이 끼어든다든가.”
백진자는 영 의아했다. 그러나 잿빛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가슴이 공연히 들뜨고, 심란하여서 쉬이 진경에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려 보면 하루 밤낮이 예사로 지나 있었고, 노원대괘공의 공력이 부쩍 늘어나 있음을 깨닫고는 했다. 조짐이 기이하다 싶어서, 연공을 자제하던 터였다.
“선생께서는 짐작하는 바가 있으시오?”
“그것이 마장(魔障) 놀음이라오.”
“아니, 마장이라니. 그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