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칼바람에는 자비가 없다
성마를 따르는 마인들에게는 여러 기기묘묘한 묘술, 마공이 있는데, 그중에 손꼽는 것이 바로 마장의 묘법이었다. 그네들은 성마의 가호를 받는 신묘한 이술(異術)이라고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귀신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멀쩡한 산천을 사람 손으로 뒤집어서 사람 아닌 것을 끌어들이고, 삿된 기운을 성하게 만들어 대니.
위지백은 말했다.
남조궁 주변에 손을 쓴 흔적이 있다고 했다. 그것으로 형산의 산룡을 성나게 하여, 지맥을 흐트러뜨리고, 흡사 마공기력에 가까운 귀기가 고이게 한다는 것이다.
백진자의 안색이 대번에 시퍼렇게 질렸다.
“그, 그럴 리가.”
“차츰차츰 손을 쓴 탓에 누구라도 짐작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오. 그것은 도장이 아니라, 천하의 누구라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일이지.”
백진자는 위지백의 설명을 듣고 잠시 넋을 잃었다. 소명이 덧붙였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마장이라니, 영산을 더럽히는 그런 술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들었지만, 그것을 이루는 귀물이 남조궁 곳곳에 숨겨져 있을 동안 조금도 알지 못했다니. 실로 기함할 일이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새삼 집중하여서 공력을 일으켰다. 평생을 연마한 노원대괘공이 아니었다.
천려십삼결(天呂十三結), 하늘의 음률을 담은 열여섯 가지 결문이다. 남악 형산의 도문에서 전하는 술법 일체를 두고 이리 칭하는데, 형산일문일 적에야 도인의 마땅한 도리로서 당연히 연마하였다고 하나, 그 세월이 언제이던가.
형산일문이 수 조각으로 갈라진 세월이 벌써 일백 년 하고도 수십 년이 흘렀다. 그중 한 줄기인 남악도문에서는 고작해야 한두 수 정도가 남았을 뿐이고, 그나마 연마하는 자도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장문인인 백진자나 구문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수박 겉핥기나마 약간의 배움을 떠올리고는, 애써 집중했다. 힘주어 감은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백진자가 번쩍 눈을 치뜨는 순간 두 눈에는 새하얀 백광이 어렸다가 흩어졌다.
한결 또렷한 눈초리로 백진자는 남조궁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본당 아래에서 안개 흩어지듯 흐르는 잿빛 기운이 보였다. 한눈에도 불길한 기운이었다.
“이, 이럴 수가.”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모골이 송연하다. 하늘 아래에 있어서는 아니 되는 기운이, 다른 곳도 아니고 남조궁의 본당에 고여 있다니.
눈을 뻔히 뜨고서도, 제대로 볼 줄 몰랐던 셈이다. 그런즉,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백진자는 일으킨 공력을 거두면서 연신 눈을 깜빡였다.
“허, 허허허. 검을 쓰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무술에만 연연하더니. 정작 마음이 병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고서 무슨 진인이 되겠다며 수행자라 하였는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젖어드는 눈가는 단지 공력을 집중했기 때문은 아닐 터였다.
위지백은 백진자를 새삼 감탄한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그러하여도, 이렇듯 일문의 존주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불어서 백진자는 마도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소명은 잠시 쓴웃음을 머금었다.
“장문인, 마도라는 것들은 경박하나, 음습하고, 그만큼 지독하답니다. 작정하고 감추겠다고 한다면, 설사 선인이 내려온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병근(病根)을 끊어 내야지요.”
소명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 말에 틀림은 없다.
백진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복잡한 심경이 머릿속에서 뒤채었다. 몰랐을 때야 속수무책이려나, 이제는 알았으니. 사문의 이름을, 아니 명운이 걸린 일이다. 무엇을 마다할까.
다시 뜬 그의 눈동자는 단단했다.
“두 분, 청컨대. 방도를 일러 주십시오.”
“방도, 방도라.”
위지백은 백진자의 무거운 한마디를 되뇌었다. 마장의 흔적은 모두 찾았지만, 그것을 놓은 자는 아직 알지 못했다. 소명이 말한 병근, 이미 마도에 든 자는 자신을 교묘하게 숨기고 있었다.
위지백이 앞서 남악도문을 뒤집어 버린 까닭에 그것은 더욱 깊이 숨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한 놈이라도 드러날 줄 알았건만.’
“이봐, 어울리지 않게 자책할 것 없어.”
“자책은 무슨…… 아니, 잠깐, 어울리지 않다니? 그건 무슨 뜻이야?”
위지백은 대범한 척 웃으며 넘기려다가 소명의 다른 한 마디에 눈살을 찌푸렸다. 소명은 딱 외면하면서 백진자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연배를 떠나서, 근자에 들어 경지가 한층 높아지거나, 낮아진 제자가 없는지. 외유가 잦았던 제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없는 제자가 누구인지였다.
백진자는 잿빛의 눈썹을 모으고서 신중하게 답했다.
남악도문에서 전하는 노원대괘공은 과거 형산파를 대표하는 다섯의 신공 중 하나였다.
대성하기도 어렵고, 입문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한 번 산을 넘으면 어느 경지까지는 수월했다. 차이는 있으나, 아무리 우둔하다고 해도 수년 내에는 오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만큼 공력이 부쩍 성장한 제자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다만, 여타의 다른 공력을 접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특히 장문인의 고제(高弟)인 여덟은 육성의 벽에 거의 근접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유례없이 빠른 성취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자랑하듯 웃으며 말했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랑스러워야 마땅할 제자의 성취를 의심해야 할 처지라니.
소명은 백진자의 말에 신중하게 귀 기울였다. 속단은 금물이겠지만, 마냥 머리만 굴리고 있을 때도 아니었다. 소명의 머릿속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몇몇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백진자는 말을 다하고, 숨소리를 삼켰다.
어느 틈엔가 햇빛이 많이 기울어서인지, 마루에 드리운 셋의 그림자도 한껏 길어졌다.
소명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이를 말이겠습니까.”
소명은 차분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그리 복잡할 것은 없었다. 이를테면 옥석을 구분하는 덫을 놓는 일이었다. 다만, 그에 대한 위험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백진자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따르지요.”
“장문인, 이는 장문인의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 마당에 무엇을 마다할까요.”
“그렇다면, 저희 또한 힘을 다해 돕지요.”
“맡겨 주시오, 장문인.”
소명은 물론, 위지백도 가벼운 기색을 싹 지우고서 사뭇 진지했다. 백진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는 한편으로는 소명의 진실한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단순한 소림 속가로 볼 수가 없는 노릇이 아닌가.
서장제일도가 선뜻 고개를 숙이고, 소천룡조차 양보하는 듯하니. 그러나 외인에 대한 의구심을 풀기보다, 문호를 단속하는 것이 우선이다.
백진자는 차오르는 숨을 잇새로 끊어 냈다.
소명과 위지백은 본당을 나섰다. 붉은 햇빛이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얘기가 제법 길었다.
위지백은 눈살을 찌푸린 채, 유달리 붉은빛을 띤 햇빛을 흘겨보았다.
“하루가 아주 짧구만.”
“그런 말은 해가 다 저물고 나서 하는 게 어때?”
“흐, 그보다 골치군. 계획대로 되겠어?”
“그 승냥이 같은 것들이 이만한 기회를 놓치려 하겠어?”
“그것도 그렇지.”
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설렁설렁 걸었다. 그런데 위지백이 어느 구석을 향해서 손짓하자, 짙은 그늘에서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후다닥 위지백 앞으로 달려왔다.
어이, 거기, 너.
원행의 내내 그렇게 불려 온 불쌍한 사내. 삼관이다.
“예, 선생.”
“찾으라는 것은?”
“다 찾아는 놓았습니다만.”
“만? 만, 무어?”
“아니, 아닙니다.”
삼관은 합죽이인 양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찾으라 하고는 또 손대지 말라 하는 것이 못내 기이한 탓이나, 위지백이 반문하는 말에 꼬투리를 잡자,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삼관은 어깨를 잔뜩 모은 채, 좌우로 눈동자를 굴렸다. 이제부터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자신의 처지도 걱정이었지만, 마도가 어떻고, 마장이 어떻고 하지 않은가.
그는 퍼뜩 입 안이 바짝 말라갔다. 그런데 조용하던 소명이 삼관을 향해 손짓했다.
“넷! 권야 공!”
소명은 자신을 권야라 칭하는 삼관을 물끄러미 보았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서장제일도와 함께 권야를 떠올린다면 다른 곳일 리가 없다.
천룡세가 쪽에서 남긴 사람이 분명하다. 하기야 지금에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는 삼관에게 나직이 몇 마디를 속삭였다.
삼관은 그러자 멍한 눈으로 소명을 보았다. 지금 소명이 뭐라고 말한 것인지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번 생각한 그는 옆에 있는 위지백의 눈치를 보며 다시 물었다.
“저, 정말로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런 도움 정도는 받아도 괜찮지 않겠어? 나 좋다는 일도 아닌데 말이야.”
“그, 그렇긴 하지요.”
“그럼, 어서 가서 말 전하게.”
“옙!”
삼관은 넙죽 고개 숙이고는 행여 위지백이 또 뭐라 할 새라,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소명은 위지백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황가련인가 하는 쪽은.”
“에이, 알았어. 내가 말해 놓을게.”
위지백은 쩝 소리를 내면서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 * *
날이 저물고, 다시 밝아왔다.
이른 아침, 산무가 뿌옇게 일어난다. 들불처럼 일어나는 안개구름 아래에서 세상은 차츰 깨어났다. 산곡에 걸린 햇빛이 안개에 흩어지면서 어지럽게 산란했다.
장관풍은 고개를 가볍게 꺾으면서 굳은 어깨를 풀었다. 낯선 산사였지만, 그래도 산이 품은 남조궁이다. 장관풍은 혹독한 천산파 본산을 떠올리면서 안개 고인 새벽하늘을 물끄러미 보았다.
형산 산중에 머물고 벌써 이틀이었다. 그동안에 있는 일이라면 특별할 것이 없었다. 호남의 다른 무림인들은 하나, 둘씩 떠나가고, 고요한 가운데에 화기만 머물렀다.
귀동냥하여 듣기로 황가련이라는 곳과는 아주 단단히 척을 진 듯한데. 서로 불편한 시선을 주더라도, 딱히 충돌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황가련이라고 하는 쪽에서 몸을 사리거나, 다른 무인들이 피해 가는 일도 없었다.
장관풍은 몸을 풀면서 이상하다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중원은 중원이구나. 천산에서라면 양당 간에 매듭을 짓고서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일단 묻어 두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었다.
“장 검객, 여전히 부지런하시구려.”
“담 가주.”
장관풍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졸지에 한방에서 같이 밤을 보낸 담일산이었다. 그도 의관을 바르게 하고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장관풍은 담일산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명 공께서 오늘은 길을 나설 것이라고 하니, 채비는 갖추어야 할 듯합니다.”
“채비랄 것이 무어 있겠나. 어차피 천룡세가의 대단한 마차에 신세를 지는 참인데.”
“그래도 거들 만한 것은 거들어야지요.”
장관풍은 히죽 웃었다. 언제고 날이 서 있어서, 대하기 어려운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함의 닦달이 줄어든 덕분이다.
그는 문득 목을 빼고서 낮은 담 건너의 모습을 보았다. 그 자리에는 미처 요사에 들지 못한 황보세가 외운당 무사들이 잠시 몸을 쉰 천막이 어지럽게 자리해 있었다.
그들도 이제 천막을 거두고, 자리를 정리한다고 분주했다. 그러면서도 이쪽을 흘깃거리는 눈초리에는 경계하는 바가 뚜렷했다.
소천룡의 일행이라는 것이 저들에게는 다른 의미를 주는 모양이었다. 장관풍은 어색한 듯 낮은 헛기침을 흘렸다. 담일산은 반면에 입매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접선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소명 공께서는 다른 말씀이 없으셨던가?”
“다른 말씀이라 하시면?”
담일산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을 뿐이지만, 장관풍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괜한 말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담일산은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가만 생각하면, 남악도문에 들어설 때에 소명이 몇 마디를 하기는 하였다.
‘긴장을 늦추지 말라 하셨던가?’
장관풍은 그러자 퍼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가?”
새벽안개가 점차 흐려질 무렵이다.
무너진 산문 앞이 새삼 웅성거렸다. 두 쪽이 난 산문을 수습하고자, 황가련의 무사들과 남악도문 제자들이 같이 땀을 흘렸다. 그들은 새벽안개를 헤쳐 가면서, 무너진 주변을 정리했다.
도문의 제자들은 황가련 무사들이 어색했지만, 돕겠다는 손을 마다할 것은 없었다. 조각난 기와를 치우고, 무너진 기둥을 끌어냈다. 장정 하나, 둘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분주한 와중에 불현듯 피식거리는 헛웃음이 흘렀다.
“왜 그러나?”
“아니, 우스워서.”
“뭐가?”
“여기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아니, 위지 선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리 만들어 놓으신 거람?”
사내는 말하면서 흘깃 고개를 들었다. 남조궁의 산문은 제법 규모가 있었다. 옛적의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여서 이제껏 지켜 왔던 터였다. 그것을 단칼에 뚝딱 베어서 허물어뜨려 놓았으니.
그 경지가 참 대단하기도 하였지만, 굳이 산문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을 만한 마땅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즉 어이가 없어 실소가 흘렀다.
“그런 말씀 마시오. 우리는 여기 산문이 무너질 때, 가슴도 같이 내려앉았소.”
“응? 그게 무슨?”
그들과 가까이 있던 도문 제자가 말했다. 그는 후, 한숨이 길었다.
“저기 남은 기둥을 한번 잘라 보시구려. 그럼 알 테니.”
“기둥을? 아니, 그야.”
황가련 도객들은 주저했다. 도문 제자는 개의치 말라면서 손짓했다. 삐죽 솟은 기둥은 굵직했지만, 그렇다고 손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말 꺼낸 그를 비롯하여서 여기 있는 도객들은 각자 일류 이상으로 손꼽히는 무인들이었다.
기둥보다 더 굵다고 하더라도 너끈히 베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도문 제자들 눈치가 기이했다. 그들 표정에는 쓴웃음이 역력했다. 딱히 황가련 도객들은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