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98
198화. 소천룡, 소천룡
팔가의 무공은 화려하면서도 위험한 꽃을 활짝 피워 냈지만, 나한십팔수의 손끝에서는 채 영글지 못했다. 소명이 그들보다 반 호흡 더 앞서 있기 때문이었다.
단 반 푼의 낭비도 없이, 소명의 나한십팔수는 연환의 고리를 끊어 냈고, 합격의 호흡을 빼앗았다. 그 결과는 참담할 정도였다.
대단한 위명에 비하면 싱거울 정도로 후딱 일이 끝난 셈이다. 뽀얗게 일어난 먼지가 절로 가라앉고서, 그제야 주변 모습이 일목요연해졌다.
숨결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소명은 중정 복판에 우뚝 섰다.
좌우로 팔가의 영걸들이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끄윽!’ ‘으윽!’ 악문 잇새로 질근 문 신음이 헛되이 흘렀다.
소명은 가볍게 손을 털었다.
크게 힘을 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소명도 내심으로는 철렁했다. 영걸들의 재주가 생각 이상이었다. 먼저 선수를 취하였음에도 제법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딱 반촌의 차이가 상황을 이렇게 갈라놓았다.
소명은 이제 남은 소천룡 과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자아, 이제 다시 말해 보자고. 천룡의 진노가 어떻다고?”
“이, 이이!”
과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러자 희뿌연 연기가 흔들리는 어깨 뒤로 차츰차츰 일었다.
기이한 광경이다.
소명은 치렁한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흙먼지가 부스스 떨어졌다. 그는 소천룡 과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눈에도 심상치 않은 변화라는 것은 잘 알겠다. 그렇다고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서, 소명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일순 과를 에워싸던 희뿌연 운무가 꿰뚫렸다.
딱!
울리는 소리가 크다. 허공을 가르는 것보다 시원한 타격음이 먼저였다. 동시에 과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꿰뚫린 운무는 서서히 흩어졌다.
과는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젖힌 고개를 세웠다. 굵직한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고, 미간 사이가 유독 붉었다. 치뜬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렇게 선수를 취할 줄이야. 그럼에도 과는 탄지의 일수를 감당해 냈다.
“얼씨구? 이걸 버티네?”
“크으!”
과는 으스러질 듯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치미는 욕설을 애써 혀 아래로 삼켜 냈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눈초리를 다잡으려 애썼다.
“제법, 제법이군. 이만한 위력에 아무런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다. 이것이 소림의 탄지신통인가? 하지만 본가에도 그만한 공부는 있지.”
그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똑바로 짓씹었다. 그만큼 열이 올랐다는 뜻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빤히 내려다보던 소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응? 뭐라고? 여봐, 지금 저 친구가 뭐라는 거야?”
“하, 하하.”
소명은 한참 물러나 있는 회에게 외쳐 물었다. 그러자 회는 멋쩍음에 쓴웃음을 흘렸다. 놀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혀가 잔뜩 꼬여서 웅얼거리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과는 초점 잃은 눈을 끔뻑거렸다. 자신은 태연한 척하지만, 이미 큰 충격을 받은 후였다. 그는 등 뒤의 회를 돌아보려다가 휘청거렸다.
“그만 쉬어라. 여기는 내가 정리하도록 하마.”
“쉬기는 무슨, 정리는 또 뭔.”
과는 떠듬거리며 항거했으나, 조용히 다가와 부축하는 회의 손길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까무룩할 사이에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소명은 가볍게 손을 털었다.
주변은 난장판이다. 높은 담은 허물어졌고, 사이사이마다 속한 바를 따질 것 없이 과를 따르는 이들이 죄 뻗어 있었다. 죽은 자는 없었다. 드러누운 자들의 가슴이 위아래로 기복을 보였다.
“그렇게 손이 과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한주먹에 황천 갈 정도의 약골은 없지 않겠소.”
회는 과를 부축한 채, 쓴웃음을 지었다. 소명의 손 속이 너무도 무식했다. 설마 천룡의 영걸을 상대로 이렇듯 냅다 치고 들어갈 줄이야, 누가 생각했을까.
“이들에게도 큰 가르침이 되었을 겁니다. 사정을 두어 주셔서 가문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별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소명은 귀찮다는 듯이 대충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렸다. 뻥 뚫린 담장 너머에서 남은 저녁노을이 숨죽여가고 있었다.
“거, 길 나서기에는 늦은 듯하군. 염치 불고하고 신세 좀 집시다, 소천룡.”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천룡 회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가 아니던가. 이제까지 소명을 붙잡고자 하다가 이 사달이 일어난 터였으니. 그는 후딱 물러나 있는 양 당주에게 말하여서 주변을 정리토록 했다.
천룡세가의 역사에서 이만한 소동은 흔치 않았으리라.
두 당주는 부랴부랴 움직였다.
수하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찾을 길이 없고, 다른 사용인들도 간데없이 몸을 숨긴 터였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둘뿐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소천룡 두 사람이 나설까.
* * *
소명은 호화로운 방에 앉아서 높은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늘어뜨린 비단 천 너머로 밝힌 등불이 일렁였다. 드리운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살짝 열어 놓은 들창으로 가을 냄새를 품은 바람이 가만히 스며들었다.
다른 기척은 없었다. 그러나 방 한가운데 놓인 다탁에 앉은 소명은 어느 구석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한참 침묵 끝에, 소명은 입매를 찌푸렸다.
“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요?”
참다못해 소명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사람 없는 곳을 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비단 천의 그림자가 조용히 흔들거린다. 침묵이 계속되자, 소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원, 할 말이 없으면 있지를 마시든가.”
소명은 툭 내뱉고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이래저래 일이 있었던지라, 적잖이 피로한 참이다. 먼지투성이 장삼을 걸친 채, 비단 금침의 침상에 냅다 드러누워 버렸다.
“아이고, 지친다.”
아래에서 힘을 쓰고, 올라와서 한바탕 난리를 일으켰다. 공력이야 어떻든 간에 머리가 복잡했다. 소명은 두 팔로 목을 받치고서는 천장에 새겨진 금장의 문양을 물끄러미 보았다. 오채(五彩) 구름 사이로 노니는 용이다. 마치 실제로 요동치는 것처럼 화려하게 일렁이는 용의 비늘 하나하나를 헤아렸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소명은 그렇게 드러누워서 새겨진 용문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그사이, 소명이 지켜보던 자리에서 한 가닥 그림자가 기척 없이 흩어졌다.
그림자의 기척이 다시 나타난 것은 소천룡이 머무는 전각이었다. 소천룡 회는 뒷짐을 진 채, 먼 달빛을 물끄러미 보았다.
불과 몇 각 전에 일어난 소란의 여파로 아직도 열기가 후끈하였지만, 회는 차분할 뿐이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전각의 그림자가 짙었다. 회는 확인하듯이 다시 물었다.
“잠이 들었다? 그것뿐이더냐?”
“예, 소주(少主).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잘 알았다.”
그림자 아래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힘없는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천룡세가를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렵게 여기지도 않는다. 단지 소림의 용문제자이기 때문은 아닐 터였다. 회는 입가를 쓸어내리며 밝힌 심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모두 물리거라. 귀빈을 모신 용정당(龍井堂)은 지금부터 금지로 삼겠다. 다른 명이 있을 때까지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라.”
답은 없었으나, 그림자 속의 기척이 잠시 흔들렸다. 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대낮처럼 밝았다.
좌우는 물론이거니와 높은 천장에까지 황촉 수십 자루가 고운 불빛을 비추었다. 그리고 비단 침상 위에는 ‘과’가 누워 있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구나.”
“그런 말 마시구려.”
과는 눈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 그는 이내 쯧, 혀를 찼다. 두 손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미간이 아직도 지끈거렸다. 속에서는 성질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성질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당한 후유증으로 손발이 무겁고, 눈이 어질했다.
“그 작자는 대체 뭐요?”
“알고 있지 않으냐. 소림사의 용문제자. 당대에 소림제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아아, 그래, 그렇구려. 낙양에서 일을 죄 망쳐 놓았던 것이 결국 소림이었단 말이구려.”
그는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떼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후우, 한숨이 참 길었다. 잘난 소천룡이라지만, 어찌 패배를 모를까. 가문의 원로를 비롯한 여러 고수에게 호된 꼴을 당하면서, 비로소 알을 깨어 나가는 것이니. 그러나 결단코 이렇게 한 수에 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갓 무공에 입문하였을 때에 이미 압도적인 재능을 보였던 소천룡이었다.
처참하다.
과는 잘 알았다.
‘제기랄. 그 인간, 감히 나에게 사정을 두었어.’
턱 아래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악문 어금니가 부르르 떨렸다. 소명이라는 용문제자가 진정으로 작정했다면, 단 일수만에 절명이다. 궁 서생을 갈가리 찢어 버린 기이한 공력을 아직도 기억했다. 뜻밖이다 싶었으나,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정도라면.
천룡세가에서 전하는 무극류로는 감당할 수 없다. 과의 눈길이 문득 옆에 서 있는 회에게 향했다. 혼원류는 어떠냐 묻는 것이다.
회는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무극과 혼원, 천룡세가에서 전하는 양대무맥이지만, 결국 극에 이르러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만 쉬어라. 그리고 이번 일이 후계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아랫것들 앞에서 이렇게 개망신을 당한 마당인데.”
“하하, 망신이랄 것 있더냐. 그만한 실력자가 있을 뿐이지. 너는 정녕 천 년 소림을 눈 아래로 두는 것이냐?”
“아니, 그, 그건 아니지만.”
말 꺼내고 보니, 회의 말에 그만 궁색해졌다.
소림의 용문제자라는 것을 들었다. 당대의 소림 방장이 직접 나서서 천하에 알렸다는 것 또한 들었다. 그것은 곧 소림일문이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이를 손쉽게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만이고, 무지일 터.
“후우.”
과는 결국 긴 숨을 흘리고서 비단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새삼 당한 미간이 지끈거렸다. 회는 흐린 미소를 그린 채, 앓는 동생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목구비나 얼굴 윤곽이 자신보다 굵을 뿐이지, 빼다 박았다고 할 만했다.
역시 한 핏줄이구나.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리 한방에 오붓이 있는 것도 실로 간만이군요.”
“간만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더냐. 너야 항상 주렁주렁 달고 다녔으니.”
“내가 그랬던가?”
“네가 그랬다기보다는, 워낙에 사람들이 너를 잘 따르는 게지.”
“거, 참. 듣자니 내가 어디 모자란 놈 같지 않소.”
과는 얼굴 덮은 손을 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제 앞가림도 못 하여서는 주변 걱정을 사는 듯하지 않은가. 불퉁한 얼굴에 회는 나직이 웃었다.
“하하, 모자라기는. 그만큼 너를 아끼고 아낀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쳇, 포장은 좋소.”
과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회가 웃음 짓는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회는 과가 누운 침상 옆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조용히 불렀다.
“아우야. 우령아.”
“으익, 새삼.”
넌지시 부르는 한 마디에 과는 퍼뜩 고개를 세웠다. 치뜬 눈가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그러나 회는 흔들거리는 불빛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우령, 소천룡이 되기 전, 과의 이름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부르는 사람이 없는 그 이름을 굳이 지금 꺼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과, 아니 우령은 새삼 눈매를 얇게 뜨고 상념에 젖어든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관절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러시는 게요? 광휘 형.”
“광휘, 그래. 내 이름이 광휘였지.”
광휘와 우령.
“여하튼, 천룡세가는 다시 웅지를 펼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자가 주인이 되어야지요.”
“네가 강하더냐.”
“강합니다. 적어도 형보다는요.”
“…….”
우령은 단호했다. 망설임 없이 말했다.